조선의 철학

퇴계의 공경 사상 / 곽병찬의 향원익청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9. 14. 08:10

사설.칼럼칼럼

[곽병찬의 향원익청] 퇴계, 세상의 며느리를 울리다

등록 :2016-09-13 17:21수정 :2016-09-13 19:00

 

곽병찬의 향원익청

퇴계가 강조해온 덕목의 하나가 일체경지(一切敬之)였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똑같이 사랑하고 공경하라.’ 가부장 신분질서 속에서 사회의 최하층을 이루는 건 종과 천민, 특히 남성의 부속품으로 여겼던 여성들이었다. 퇴계는 이들을 사대부 혹은 권력자와 똑같이 공경했다. 그에게 종 학덕과 그 아이의 생명은 손주와 손주며느리 그리고 훗날 종손의 생명만큼이나 소중했다.

퇴계는 손주 안도가 장가갈 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넣어줬다. “부부는 남녀가 처음 만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부부는 가장 친밀한 사이이므로 더욱 조심해야 하며 바르게 행해야 한다. 중용에서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발단이 된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경북 안동시 토계리 퇴계종택 솟을대문을 들어설 때만 해도 씁쓸했다. “여기서도 한 여인이 희생됐군. 열녀의 허울 아래 청춘과 행복을 빼앗기고….” 솟을대문의 문과 들보 사이 홍살에 걸린 정려문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열녀 통덕랑 사온서 직장 이안도 처 공인 안동 권씨 지려”. 남편 이안도는 퇴계의 맏손주이니, ‘열녀 권씨’는 퇴계의 손부다.

한사코 무릎을 꿇고 손님을 맞이하는 팔순의 종손(이근필)과 마주하고서도 찜찜했다. 솟을대문을 나설 때 김병일 선비문화원 이사장(전 기획예산처 장관)으로부터 뒷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낯이 뜨듯해졌다.

권씨는 뒤늦게 연년생으로 아들과 딸을 낳았다. 권씨는 아들을 낳고 불과 6개월여 만에 딸이 들어서면서 그나마 부족했던 젖도 나오지 않게 됐다. 암죽으로 겨우겨우 연명은 했지만 아들은 날로 쇠약해졌다. 마침 종택의 하녀 학덕이 출산을 했다.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증손주의 젖어미로 학덕을 보내주십시오.’

종이란 집안에 딸린 재산 물목 가운데 하나였던 시절이었으니, 예사로운 부탁이었다. 그러나 선생이 손주에게 보낸 답은 이러했다. “네가 좌우명처럼 읽고 배운 <근사록>은 ‘다른 사람의 자식을 죽여서 내 자식을 살리는 것은 몹쓸 일’이라고 가르친다. 모름지기 배운 대로 실천하지 않는 건 선비가 할 일이 아니다.” 맏증손자 창양은 시름시름 앓다가 두 돌이 갓 지나서 세상을 떴다.

그런 퇴계를 권씨는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르침과 실천을 더욱더 존중했다. 퇴계(1570년)에 이어 시아버지(1583년), 남편(1584년)이 차례로 세상을 뜨고 오래잖아 임진왜란까지 닥쳤다.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던 권씨는 피난 중 퇴계의 저작물을 지키는 데 온몸을 바쳤다. 지금도 퇴계의 저작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건 권씨의 이런 정성 덕분이었다.

철학자 박종홍은 퇴계의 철학을 성(誠)과 경(敬)으로 두 글자로 압축했다. 지극한 마음과 공경이다. 실제 퇴계가 강조해온 덕목의 하나가 일체경지(一切敬之)였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똑같이 사랑하고 공경하라.’ 가부장 신분질서 속에서 사회의 최하층을 이루는 건 종과 천민, 특히 남성의 부속품으로 여겼던 여성들이었다. 퇴계는 이들을 사대부 혹은 권력자와 똑같이 공경했다. 그에게 종 학덕과 그 아이의 생명은 손주와 손주며느리 그리고 훗날 종손의 생명만큼이나 소중했다.

종택에서 오리쯤 거리의 건지산 산비탈에 있는 퇴계 묘를 방문하자면 반드시 거쳐야 할 묘가 있다. 맏며느리 봉화 금씨의 묘다. 남편(장남 준)은 제법 떨어진 죽동에 묻혔는데, 금씨는 시아버지 곁에서 시아버지를 시봉한다.

준은 이웃마을인 외내의 자칭 명가 금재의 딸과 혼인했다. 혼례 때 퇴계는 상객으로 사돈댁에 갔다. 그곳에서 퇴계는 사돈 이외의 모든 금씨 일가친척들로부터 홀대를 당했다. ‘별 볼 일 없는 가문에서 사위를 봤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퇴계가 일어서자 그들은 퇴계가 앉았던 자리를 물로 씻어내라고 하고, 심지어 대패로 밀어버리라고까지 했다.

그런 사실을 금씨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낯으로 시아버지와 남편을 뵐 것인가….’ 그러나 퇴계는 일체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혹시 며느리가 상처를 받을까봐 더 자상하게 챙겼다. 때때로 머리핀이나 실패, 골무 등 가사 용품도 보냈고, 금씨가 아프면 약을 직접 챙겨 보냈으며, ‘제대로 돌보지 못한’ 아들을 나무랐다. 금씨는 시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유언했다. “시아버님 묘소 밑에 나를 묻어라. 죽어서라도 그분의 혼을 모시겠다.”

사대부에게 조정에서 받는 ‘정려’는 가문의 자랑이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젊어 혼자 된 며느리에게는 사실상 수절을 강요했다. 그러나 퇴계는 달랐다.

족보를 보면 둘째아들 채의 부인 자리가 비어 있다. 비록 22살에 죽었지만, 그는 분명히 16살에 혼례를 올렸다. 문중 주변에선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채가 죽고 4년 뒤 퇴계는 맏아들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 ‘둘째 며느리를 실본시켜라.’ 퇴계로서는 젊어서 홀로 사는 둘째 며느리의 불행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호적에서 이름을 파 개가의 길을 터준 것이다.

‘미친×’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천한 존재의 이름이다. 그런 이를 거두어 정부인으로 삼아 극진히 챙긴 이 또한 퇴계다. 그는 첫째 부인 허씨와 21살에 결혼해 27살에 사별했다. 3년 뒤 둘째 부인 안동 권씨를 맞이했다. 권씨는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권씨는 예안에 유배 중이었던 권질의 딸이었다. 권씨 집안은 연산군 때부터 중종 때까지 여러 사화에 휘말려 권주(부친), 권전(동생)과 그 부인 그리고 권질이 줄줄이 재앙을 당했다. 그 재앙 속에서 권씨는 혼이 나갔다. 권질은 평소 잘 알던 퇴계를 예안으로 불렀다. “두 차례의 사화로 내 여식은 혼이 나가 온전치 못하네. 이미 혼기도 넘겨버렸네. 저 아이를 두고 어찌 눈을 감겠는가. 내 딸을 데려가 주시게나.” 퇴계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어머니께 아뢰어 승낙을 받고 곧 예를 갖추어 혼인을 치르겠습니다.”

결혼 후 권씨는 제삿날 제상에서 떨어진 배를 치마폭에 숨겨 나오거나 제기 위의 대추를 집어먹다가 걸리는 등 정신 나간 일로 퇴계를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퇴계는 그런 부인을 한 번도 꾸짖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사별할 때까지 16년간 그의 따듯한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다.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첫째 부인 허씨 소생의 아들들에게 친모상처럼 시묘살이를 하게 했으며, 자신은 권씨의 묘지가 보이는 곳에 초막을 짓고 일년 넘게 무덤을 지켰다. 장인도 깍듯이 모셨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권질은 사위가 지어준 자신의 초당 당호 사락정(四樂亭)을 아호로 삼았다.

퇴계는 손주 안도가 장가갈 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넣어줬다. “부부는 남녀가 처음 만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부부는 가장 친밀한 사이이므로 더욱 조심해야 하며 바르게 행해야 한다. 중용에서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발단이 된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제자 중에는 부인과 사이가 안 좋아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다는 이(이함형)가 있었다. 퇴계는 제자가 순천 집으로 돌아가던 날 아침상을 같이한 뒤, 고향집 사립문 앞에서 읽으라며 편지를 건넸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후에 예의가 있다’ 하였으며, 자사(子思)는 말하기를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되나 그 궁극적인 경지에서는 천지의 모든 원리와 직결된다’고도 하였다. (…) 부부의 윤리란 이처럼 중대한 것인데 어찌 마음이 서로 맞지 아니한다고 소박할 수 있겠는가. (…) 충고하노니, 자네는 마땅히 거듭 깊이 생각하여 고치려 힘쓰도록 하게나. 끝내 고치는 바가 없으면 굳이 학문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실천한단 말인가.” 퇴계는 이듬해 세상을 떴다. 이함형 부부는 친자식처럼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상례를 갖추었다.

퇴계학의 산실이자, 360여명의 제자를 길러낸 도산서당은 방, 마루, 부엌 각 1칸씩 3칸의 작고 초라한 집이다. 그러나 그곳이 얼마나 흡족했던지 퇴계는 이런 글을 남겼다. “달은 밝고 별은 깨끗하며 강산은 텅 비어 있는 듯 적적하여, 천지가 열리기 이전 세계의 한 생각이 일어났다.” 그런 퇴계를 고봉 기대승은 이렇게 추모했다. “…산도 오래되면 무너지고, 돌도 오래되면 삭아 부서지지만, 선생의 이름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이 불후의 문장은 그러나 퇴계의 자찬 묘지명 앞에선 빛을 잃는다. 조촐한 갈석의 비석 뒷면에 새긴 96자 명문은 이렇게 끝난다. “…근심 속에 낙이 있고, 기쁨 속에 근심 있네. 자연으로 사라지니, 또다시 찾아서 무엇하겠는가.” 앞면에는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늦게서야 도산으로 돌아온 진성 이씨의 무덤)라는 글씨만 새겨져 있다. 증직된 의정부 영의정 등 숱한 벼슬 경력은 하나도 적지 않았다.

곽병찬 대기자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