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근대로 가는 길을 놓친 뒤에야 다산을 알았네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9. 3. 21:04

문화여행·여가

근대로 가는 길을 놓친 뒤에야 다산을 알았네

등록 :2016-09-02 19:16수정 :2016-09-02 19:31

[토요판] 르포
다산 종손과 함께한 실학기행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가서 처음 기거했던 사의재가 옛 동문 밖 샘터 옆에 복원돼 있다. 다산이 강진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는 등 박대했지만, 주막집 노파가 방 한 칸을 내줬던 곳이다. 다산은 여기에서 4년간 살면서 아전의 자식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훌륭한 학자로 키웠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가서 처음 기거했던 사의재가 옛 동문 밖 샘터 옆에 복원돼 있다. 다산이 강진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는 등 박대했지만, 주막집 노파가 방 한 칸을 내줬던 곳이다. 다산은 여기에서 4년간 살면서 아전의 자식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훌륭한 학자로 키웠다.

▶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 손암 정약전은 사회 변화와 개혁을 고민하고 모색했던 조선 후기 지식인이었다. 조선을 지배했던 주자학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학문을 추구했다. 정치적 박해를 받아 전남 강진과 흑산도에서 긴 유배생활을 했다. 고난 속에서도 실사구시를 실천했으며, 사회개혁안을 담은 경세서를 썼다. 그러나 형제가 집대성했던 실학은 당시의 집권세력 등 사회 주류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두 형제의 유배지를 찾아 그들의 꿈은 좌절되고 조선은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데 실패했던 아픈 과거를 떠올려봤다.

괜히 난바다가 아니었다. 방파제처럼 목포 앞바다를 둘러싼 비금도와 도초도를 지나자마자, 양처럼 잔잔했던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황소로 변했다. 바람이 거의 없는데도 거친 파도가 뱃전을 때렸다. 처음에는 놀이기구를 탄 듯 신나는 함성이 터져나오기도 했지만, 이내 선내는 조용해졌다. 검은 봉지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는 이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뭍에서 온 자들에게 바다의 쓴맛을 보여준 뒤에야 흑산도는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의 뱃멀미는 200여년 전 손암 정약전(1758~1816년)이 겪었을 고통을 상기하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됐다. 쾌속선으로 목포에서 두시간밖에 안 걸렸지만, 조선시대 뱃길로는 보름에서 한달이 걸렸다. 함께 간 다산 정약용(1762~1836)의 7대 종손인 정호영(58·EBS정책기획센터장)씨는 “이렇게 빠르고 큰 배로도 힘든데 당시는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손암 선생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에 왔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다산연구소(이사장 박석무)가 주관하는 ‘2016 실학기행’ 답사단은 지난달 26일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도착했다. 일행은 다산의 형인 손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사리 마을부터 찾았다. 사리는 흑산도에서도 가장 외진 동네다. 흑산항이 있는 예리나 번화한 진리의 반대편이다.

손암이 기거하면서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복성재(復性齋)는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정확한 위치인지 알 길이 없지만, 복원한 복성재의 초가지붕은 예전의 마을 모습을 짐작하게 해줬다. 복성재 처마 밑에 걸린 ‘사촌서당’(沙村書堂)이라고 쓴 현판도 반가웠다. 손암과 다산이 주고받은 편지에는 사촌서실이라는 단어가 여러차례 나온다.

“정약전, 약종, 약용 등 다산 3형제는 조선의 3대 천재였어요. 시대를 앞서간 학자들이었지요. 또, 손암과 다산은 눈물겨울 정도로 형제간 우애가 좋았어요..” 박석무 이사장의 목소리가 복성재 앞마당을 가득 채웠다.

전남 강진 다산초당에서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다산 사상에 대해 열강하고 있다.
전남 강진 다산초당에서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다산 사상에 대해 열강하고 있다.

외국서도 인정한 다산의 근대성

그랬다. 다산 형제는 근대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졌던 조선의 몇 안 되는 지식인이었다. 천주교와 서학 등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으며, 꽉 막혀 시대적 역할을 다한 주자학 대신 실사구시의 학문을 추구했다. 다산의 근대성은 외국에서도 인정한다. 동시대 중국과 일본의 학문과 다산의 저작을 비교 연구한 대만대학의 차이전펑 교수는 최근 저서(‘다산의 사서학: 동아시아의 관점에서’)에서 “다산의 사서학은 근대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손암과 다산은 계몽군주 정조가 아끼는 신진 학자였다. 똑똑한 젊은 학자들로만 구성한 일종의 싱크탱크인 초계문신에 둘 다 뽑혔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숨지면서 조선의 개혁을 꿈꿨던 형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천주교를 한때 믿었다는 죄목으로 1801년(신유박해) 손암은 전라도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당했다. 천주교를 고수했던 약종은 아들들과 함께 사형당했다. 권력을 잡은 노론 벽파가 정조가 발탁했던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벌인 정치적 박해 성격이 강했다. 형제의 고난은 끝이 아니었다. 이해 10월 황사영이 천주교 박해 실상을 알리고 조선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는 서신(황사영 백서)을 중국의 천주교 신부에게 보내려다가 붙잡히면서 형제는 다시 서울로 끌려와 국문을 받았다. 황사영은 다산의 큰형인 약현의 맏사위였다. 황사영 백서와 관계없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정치적으로 미운털이 박힌 형제는 흑산도와 강진으로 쫓겨갔다.

손암은 처음에는 소흑산도로 불리는 우이도에 정착했다가 1807년 흑산도로 거처를 옮겼다. 좁은 우이도보다는 넓은 흑산도가 그래도 양식을 구해 살아가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손암은 다산보다 성격이 활달하고 봉건질서에도 덜 얽매였던 듯하다. 다산이 쓴 손암의 묘지명에는 “공(정약전)이 바다 가운데 들어온 때부터는 더욱 술을 많이 마셨는데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패거리가 되어 친하게 지냈다. 귀한 신분으로서 교만 같은 것을 부리지 않았다”고 표현돼 있다.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 손암의 생활 속의 진보가 불후의 명작인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검다는 뜻의 글자(玆)를 ‘자’라고 읽을지 ‘현’이라고 부를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 이번 답사에서도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장은 자산어보론을 주장했으나, 박 이사장은 현산어보론을 지지했다. 이에 중·고교 교과서에 기록된 대로 자산어보로 적는다.) 물고기들의 습성과 쓰임새 등에 관한 자세한 관찰 내용의 대부분은 흑산 주민인 장창대(일명 장덕순)한테서 얻었다. 1814년 우이도로 이사가려던 손암을 주민들이 쫓아가서 붙잡아올 정도로 그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다산이 곧 유배에서 해제되면 나를 찾아올 텐데 동생을 이곳까지 오게 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하소연한 뒤에야 겨우 우이도로 나갈 수 있었다.

손암이 자주 찾았을 흑산도 주변 바다는 맑고 깨끗했다. 원래 섬에 자라는 동백과 후박나무가 멀리서 보면 검푸른색이어서 흑산으로 불렸다는 게 정설인데도, 섬을 일주하는 배의 선장은 푸르다 못해 검은색을 띤 바다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했다. 아무러면 어떤가. 자산어보에 나오는 226종의 바다 생명이나 만나고 싶었다. 흑산도의 명물인 홍어나 전복, 조기는 안 보이고, “머리와 꼬리가 없다. 얼굴도 눈도 없다. 몸은 연하게 엉켜 있어 타락죽과 같고, 모양은 중이 삿갓을 쓴 것과 같다”고 손암이 묘사한 해파리만 눈에 띄었다.

주자학 굴레 벗어나려 고민한
손암 정약전 다산 정약용 형제
정치 박해로 흑산도·강진 유배
무지렁이들과 잘 어울렸던 손암
불후의 명작 ‘자산어보’ 남겨

다산은 아전 자식 제자로 받아
조선후기 최고의 시인으로 키워
경세유표, 목민심서에 담긴 지혜
다산 사후 100년 뒤에야 빛봐
생각 다양성 막은 조선 이미 패망

다산 정약용의 7대 종손인 정호영(오른쪽)씨와 종부 이유정씨가 전남 신안군 흑산도 사리 마을의 복성재 마루에 앉아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복성재는 이곳으로 유배온 다산의 형인 손암 정약전이 기거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다산 정약용의 7대 종손인 정호영(오른쪽)씨와 종부 이유정씨가 전남 신안군 흑산도 사리 마을의 복성재 마루에 앉아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복성재는 이곳으로 유배온 다산의 형인 손암 정약전이 기거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다산의 학문적 스승이었던 손암

건널 수 없는 바다를 사이에 뒀지만, 학문적 동지로서의 관계는 더 깊어졌다. 다산은 공부하다가 막히거나 책을 쓸 때는 손암의 의견을 묻거나 점검받았다. 다산이 쓴 음악이론서 ‘악서고존’(樂書孤存)을 본 손암이 몇가지 논평을 하자, 다산은 곰곰이 생각한 뒤 “지난번 원고를 없애버리고 모든 것을 공(손암)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랐다.” 손암의 자산어보는 반대로 다산이 자신의 제자 이청에게 이론적 지식을 보완하게 해서 완성했다. 다산은 이런 손암을 “유일한 지기”라고 표현했다.

일년에 한두차례 오가는 고깃배에 부치는 편지가 두 사람을 이어주는 끈이었다. 한번은 살생을 금하는 바닷가 풍습 탓에 육고기를 못 먹어 피골이 상접했다는 손암의 소식을 들었다. 다산은 산에 돌아다니는 개라도 잡아서 드시라면서 형님에게 개를 포획하는 방법과 조리법을 자세하게 적어 보냈다. 박제가가 알려준 레시피였다. 그러고 보면 실학자들이야말로 요리하는 남자의 원조인 듯하다.

손암은 우이도에서 동생을 기다리며 2년여를 더 살았다. 거기서는 배가 표류하는 바람에 3년 동안 오키나와와 필리핀, 중국을 떠돌았던 홍어장수 문순득을 만났다. 그가 겪은 이국의 모습을 ‘표해시말’(漂海始末)에 기록했다. 19세기 초 동아시아 문화사와 교류에 관한 소중한 자료다. 손암은 1816년 58살의 나이로 그리던 동생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올해가 타계 200주년이다.

27일 흑산도를 나온 일행은 다산의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 있는 강진으로 갔다. 강진 시내에 있는 사의재(四宜齋)부터 찾았다. 1801년 겨울 중죄인 다산이 도착하자, “가는 곳마다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고 달아나는” 등 사람들의 박대가 심했다. 그때 동문 밖 샘터 옆에서 밥을 팔던 주막집 노파가 다산에게 방 한 칸을 내줬다. 다산은 ‘생각은 맑게, 용모는 단정하게, 말은 무겁게, 행동은 신중하게’ 하자는 뜻에서 방문 위에 사의재라고 쓴 현판을 달았다. 4년간 사의재에 머물 때 다산은 아전의 아이들을 기꺼이 제자로 받아들였다. 조선 후기 최고의 시인 중 하나였던 황상, 다산의 저작을 도왔던 이청 등이 그들이다. 사의재 주변에는 저잣거리 조성 등 공원화 사업이 한창이어서 요란하긴 해도 민초들의 따뜻한 정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의 야산 중턱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이 1808년부터 유배생활이 끝나는 1818년까지 10년간 거처했던 곳이다. 초가가 아니라 기와로 복원한 탓에 소박한 느낌은 없지만, 눈 감고 가만히 귀 기울이니 다산초당에서는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또 다산이 기거했던 동암의 방에서는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실학을 집대성한 책을 쓰는 다산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가 ‘정석’(丁石)이라고 새긴 집 뒤쪽 바위, 차를 마시던 초당 마당의 평평한 돌(다조), 차 끓일 때 썼던 샘(약천), 잉어를 길렀던 연못, 혜장선사를 만나러 다녔을 백련사로 가는 산길에서도 다산의 숨결이 전해져오는 듯했다.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뒤 바위에 다산 정약용이 새긴 글씨가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뒤 바위에 다산 정약용이 새긴 글씨가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오갈 데 없던 다산 정약용에게 방 한 칸을 내준 강진 동문 밖 주막집의 노파를 기념하는 주모상이 사의재 옆 기념관 앞에 서 있다.
오갈 데 없던 다산 정약용에게 방 한 칸을 내준 강진 동문 밖 주막집의 노파를 기념하는 주모상이 사의재 옆 기념관 앞에 서 있다.

“다산초당의 계단 밭 복원해야”

다산은 글로만 실학을 외치지 않고 생활 속에서 실천했다. 그는 연못에서 흐르는 물을 이용해 초당 아래에 계단밭을 일궜다. 밭에는 무, 부추, 상추, 미나리 등을 직접 심어서 내다팔기까지 했다. 17년간의 유배가 끝났을 때 강진에는 다산이 소유한 농토 열여덟마지기가 있었을 정도로 생활력도 강했다. 고향인 남양주 마재에 있는 아들들에게도 “시골에 살면서 원포를 가꾸지 않으면 천하에 쓸모없는 사람”이라며 보리농사와 마늘과 파 심기를 권했다. 맏아들 학연은 마늘 판 돈으로 여비를 마련해 아버지를 만나러 오기도 했다. “초당 아래의 계단밭이 흔적도 없어 아쉬워요. 지금이라도 밭을 복원해서 다산이 실사구시를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박 이사장의 말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다산은 강진에서 제자들과 유지들의 도움으로 생활이 안정된 뒤에도 서울에서 기별이 올 때마다 혹시 사약을 내리는 것은 아닌지 항상 두려움에 떨었다. 또, 막내아들(농아)과 그가 아꼈던 조카 학초(손암의 아들), 그리고 형님 손암의 죽음을 유배지에서 들어야 했다. 이러한 고난의 삶 속에서도 다산은 나라의 제도개혁 방안(경세유표), 공직자의 자세(목민심서) 등에 대한 책을 짓거나 초고를 완성했다. 유배를 마치고 강진을 떠날 때 책이 수레 하나에 가득 싣고도 넘쳤다. 정호영씨는 “다산 선생의 공부는 나만을 위하거나 줄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공부였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다산 형제가 살았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서구사회는 이미 산업혁명과 정치혁명(1776년 미국 독립혁명,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거쳐 근대사회로 치닫던 시기였다. 하지만 은둔의 나라 조선의 주류는 새로운 사회를 상상했던 다산 형제를 철저하게 내치고는 외면했다. 혜안을 가진 다산의 저작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 뒤(1936)에야 출간됐다. 이미 책으로서의 시대적 소명은 다했으며,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진 뒤였다. 김태희 다산연구소장은 “다산에 대한 정치적 복권도 망국 직전에야 이뤄졌지요. 그의 저작들이 제때에 널리 읽혔더라면 조선의 운명도 달라졌을지도 모르죠”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사회나 학계는 어떤가, 사상적 편협함이 없으며, 학문적 개방성은 충분한가. 상경길 버스 속에서 꼬리를 무는 질문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박석무)와 ‘삶을 바꾼 만남-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정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덕일) ‘현산어보를 찾아서’(이태원) 등을 참고했습니다.)

흑산도·강진/글·사진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