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문사철 아우르는 통합적 연구에 한국학 미래 있어” / 박희병 서울대 교수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9. 5. 11:13

문화학술

“문사철 아우르는 통합적 연구에 한국학 미래 있어”

등록 :2016-09-04 17:18수정 :2016-09-04 21:30

 

[짬] 한국고전 연구자 박희병 교수
박희병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사진 박종식 기자 <A href="mailto:anaki@hani.co.kr">anaki@hani.co.kr</A>
박희병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서울대 국문학과 박희병(60) 교수의 저술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책은 <연암을 읽는다>(돌베개, 2006)이다. 박지원의 빼어난 산문 20편을 추려 밀도 있는 해석을 곁들였다. 그는 이 책으로 연암 문학의 진가를 설득력있게 해명함과 동시에 상업적 성공도 거뒀다. 박 교수는 이 책을 출판한 뒤 학문적 방법론을 바꿨다고 했다. ‘대중서는 여러 사람들이 하고 있으니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나만의 것을 하자’고 결심했다. “문학과 사상, 예술의 벽을 허물고 통합적으로 접근하는 ‘통합 인문학으로서의 한국학’을 하자고 생각했지요.” 그 뒤 그가 거둔 학문적 결실은 이 결심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의 평등사상을 깊이 들여다본 연구서 <범애와 평등-홍대용의 사회사상>(돌베개, 2013)은 그에게 월봉저작상을 안겼다. 최근엔 조선시대 문인화가인 능호 이인상(1710~1760) 문집(능호집)을 완역했고, 올해 안으로 이인상의 그림과 글씨를 깊이 살핀 연구서도 낼 예정이다. 한국학의 지평을 조금씩 넓히고 있는 박 교수를 지난 31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인물전 천권 읽으며 학문기초 다져
“연암 등 현실과 불화 인물에 관심”
‘고전 100선’ 기획으로 한국학 영토 넓혀

문학과 사상, 예술 등 통합연구 추구
문인화가 이인상 문집 ‘능호집’ 완역
올해 이인상 서화평석 두권 더 낸다

그는 자신을 ‘칩거형 학자’라고 했다. 학과장 외에는 보직을 맡은 적도 없고 신문·잡지 기고나 방송 출연도 하지 않는다. 언론 인터뷰도 될 수 있으면 피해왔다고 했다. 이렇게 그가 갈무리한 시간은 연구나 저술 쪽으로 향했을 것이리라.

지난 10년 동안 20권을 펴낸 ‘우리 고전 100선 시리즈’(돌베개)의 중심에도 그가 있다. 이 시리즈 기획자인 그는 <말똥구슬>(유금 저)과 <골목길 나의 집>(이언진 저) 두 권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책은 소프트하지만 내용은 학문적 기초 위에 있죠. 최근 나온 흠영 유만주의 일기 모음집은 이전에 번역된 적이 없는 중요한 책입니다. 알려진 고전의 답습이 아니라 한국 고전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죠. 이 시리즈가 영어로 번역되면 한국학의 레퍼토리가 확대되겠죠.”

그는 1998년 능호집 번역을 시작했다. 상하 두 권의 역서를 내는 데 18년이 걸린 것이다. 더군다나 올해 안으로 800쪽짜리 두 권 분량으로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1.회화 2.서예)을 내놓을 계획이다. 그는 이 서화평석 두 권을 두고 “문학과 사상, 예술 분야에 걸친 내 공부 역량이 고스란히 투입될 것”이라고 밝혔다.

서얼 출신인 이인상의 그림엔 이른바 문기가 가득하다. 글씨를 잘 쓴 화가로도 알려져 있다. “박지원을 공부하면서 이인상을 만났죠. 연암 산문 ‘불이당기’를 보면 이인상이 뛰어난 화가로 그려집니다. 서화 작품을 함께 연구하지 않으면 정확한 번역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18년이 흘렀죠.”

시서화 통합 연구를 위해 이인상 작품을 확보하는 데 공을 들였다. “이전에 알려진 이인상 글씨보다 50%는 더 모았어요. 어떤 소장자는 구입을 하지 않으면 보여주지 않겠다고 해서 제 처지에선 큰돈을 내고 글씨를 사기도 했죠.”

이인상의 어떤 매력이 그를 붙들었을까? “이인상의 시대에 청나라를 인정하자는 현실주의적 태도가 큰 흐름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존명배청’의 정신을 철저히 고수했죠. 시대착오적이죠. 하지만 이런 부정성에서 승화되는 고매함이란 게 있어요. 속물성이 빠진, 고양된 정신성이죠. 이게 예술의 역설입니다.” 그는 이인상을 두고 ‘4절’이란 표현을 썼다. “시서화는 물론 전각도 1급이었죠. 이인상의 대자전서 글씨를 보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하죠.”

젊은 연구자 시절, 그의 관심사는 인물전이었다. 조선 후기 인물전 연구로 박사 논문을 썼다. “인물전만 천편 이상 봤죠. 이 연구로 학문적 기초체력을 단련했어요. 인물을 보는 안목을 키웠죠.”

권력, 현실과 불화한 아웃사이더에 특히 관심이 갔다고 했다. 주류에서 벗어난 사상을 가졌던 홍대용이나 조선의 신분 차별에 저항했던 역관 출신 천재 시인 이언진을 깊이 살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연암 등을 보면 현실과의 불화가 창작의 원천이 됐죠.” 그는 이런 문제의식을 담아, 곧 ‘불화의 정신사’나 ‘불화의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책을 낼 계획이다.

그는 연암 글을 두고 ‘귀신 같다’는 표현을 썼다. 공부가 깊어지면서 연암 글을 바라보는 태도에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했다. “이전엔 일면적, 평면적이었다고 할까요. 우상화에 가까웠죠. 지금은 연암의 인간적 약점까지 보듬으면서 그 성취나 미학을 평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연암은 입으로는 서얼 출신인 벗들과의 평등을 말하지만 무의식 속에선 신분의식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죠. 난봉꾼을 뜻하는 파락호란 평가도 있었죠.”

그는 얼마 전부터 박지원을 중심에 놓는 표현인 연암그룹 대신, 홍대용(담헌)과 박지원을 대등하게 놓는 담연그룹이란 표현을 쓴다고 했다. “담헌을 공부하면서 그가 우리 사상이 비빌 언덕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는 당시 인간 대 인간, 민족 대 민족을 평등하게 봐야 한다고 생각했죠. 한국 지성사에서 그만한 사람이 없어요.”

박 교수의 번역을 두고 원문의 의미나 미학적 성취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가독성 역시 뛰어나다는 평가가 많다. “우리말 단어를 고르는 데 늘 고심합니다. 젊었을 때 시를 썼죠. 나이가 더 들면 시를 써보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모국어에 대한 집착이 번역에 도움이 됩니다. 출판사는 싫어하지만 방언이나 고어도 종종 사용합니다. 우리말이 확장되는 게 중요하죠.”

그가 번역한 이인상 시 ‘바다를 보다’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아득하여 가이없거늘/ 다못 파도가 말 앞에 있네.” 다만 대신 같은 뜻을 지닌 전라도 방언 다못을 취한 것이다. 그는 “고전 번역이 변사의 과장된 목소리처럼 미화 일변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일면만 보여주는 것은 국가 문화수준의 저급화로 이어집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