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창간기획-70인에 묻다]공존·공평·공정한 사회를 꿈꾼다면…“해답은 정치야”
김재중·정제혁·허남설 기자■한국 사회의 현재 진단
‘헬조선.’ 근자에 한국 사회 현실을 빗대 가장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단어다. 이 해괴한 조어가 무저갱 같은 2016년 한국 사회를 아프게 반영하고 있어서다.
불평등과 빈부격차라는 구조적 모순에 빠져 있지만 해소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저성장’ 위기에 속수무책이다. 냉전시대 못지않은 남북관계, 국민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정부…. 경향신문이 창간 70돌을 맞아 실시한 ‘70인 한국 사회 진단’ 조사에서 나온 답변들이다.
양극화와 불평등이 사회의 안정성을 해치는 가장 근본적 원인으로 지목됐다. 한은숙 원불교 교정원장은 “경제성장을 하는 동안 개인의 자유가 희생됐고 공동체가 사라졌으며 부정부패와 빈부격차가 구조화됐다”고 말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한국 사회의 현주소는 ‘불평등’과 ‘신뢰 집단과 미래 비전의 부재’로 집약된다”고 진단했다.
송민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은 “빈부·계층 간 갈등, 경제 성장기 세대와 정체기 세대 간 상호 존중 거부가 사회 기풍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했고,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1 대 99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불평등이 민생고를 강화하고, 민생고가 다시 양극화를 굳히는 악순환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양극화와 불평등은 사회적 병증도 낳았다. 저출산·고령화·저성장과 청년 문제 등이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조만간 들이닥칠 저출산·고령화 사회가 만들어낼 새로운 변화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청년들이 미래를 설계할 수 없게 만드는 청년 실업, 인구 밸런스를 무너지게 만드는 저출산, 수명이 연장된 노인들이 노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모르는 노후 대책 문제”를 한국 사회 문제점으로 꼽았다. “청년들이 결혼, 연예, 취업 등을 못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강풀 만화가),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심화되는 세대 간 갈등”(서민 단국대 교수)도 한국 사회를 힘겹게 하고 있다.
무한대결 중인 남북관계도 걱정을 샀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냉전 해체 이후 한반도에서 남북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데탕트(긴장 완화)가 실패했다”며 “이로써 북한은 핵 무장을 하고 남한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같은 무기 체계를 들여오는 정치·군사적 대립이 재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한 채 사회 역동성이 저하되는 상황도 위기감을 높이고 있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은 “한국 사회는 의욕을 상실했다. 방향을 떠나서 이동하고자 하는 의욕 자체가 없다”고 우려했다.
이광형 미래학회장도 “역동성이 사라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안된다는 식의 의식이 만연해 있다”고 했다.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은 “그동안 배우고 축적해온 지식과 지혜가 지금 우리를 둘러싼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 진짜 위기”라고 지목했다.
“정치적 파편화”(장강명 소설가), “정치적 신념의 붕괴”(이윤택 연극연출가), “위기를 해결할 정치적 신뢰와 합의가 충분히 조직되지 못하는 점”(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 등 정치의 오작동 혹은 미작동도 한국 사회를 지체시키는 문제로 지적됐다.
■2017 대선이 요구하는 시대정신
5년마다 열리는 대통령 선거는 한국 사회의 미래 비전을 두고 의견이 분출되는 공간이다. 경향신문이 창간 70돌을 맞아 실시한 ‘70인 한국 사회 진단’ 조사에서 응답자들이 꼽은 내년 19대 대선의 시대정신은 ‘격차·불평등 해소’ ‘상생·공존·통합’이었다. 격차를 해소하고 이념·세대·성별 등 중층으로 갈라진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다는 당부의 말이기도 하다.
‘격차·불평등 해소’를 꼽은 이들이 많았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불평등 해소야말로 이념을 막론한 시대정신”이라고 진단했다. 국제노동기구 이상헌 사무차장 정책특보는 “불평등 해소와 안전권의 보장, 이를 위한 시민사회와 국가의 복원”이 19대 대선의 시대정신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성학자 정희진씨는 “경제, 지역, 문화, 교육 등 전반적 양극화의 해소”를, 목판화가 이철수씨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분배와 나누는 삶”을 각각 꼽았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격차, 안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완화한 안전한 사회”, 유종일 KDI정책대학원 교수는 “특권층 기득권 타파, 공평한 세상 건설”을 제시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함께 잘사는 사회, 동반성장”을 꼽았다.
‘상생·공존·통합’이라는 답변이 비슷한 빈도로 나왔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지역, 계층, 세대를 나누는 풍조를 극복하는 국민 통합”을,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다 함께 조화롭게 잘사는 사회, 경제발전·경제민주화라는 복합적 목표”를 제시했다. 소설가 김숨씨는 “극심한 갈등과 격차 해소를 위한 평등과 화합의 정신”을, 영화제작자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공존공생의 화합 정신”을, 드라마 작가 김은희씨는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답으로 택했다.
통합의 방법론으로 “보수 가치인 애국, 중도 가치인 선진, 진보 가치인 공정의 통합”(이범 교육평론가), “진보적 경제 패러다임과 보수적 안보 패러다임을 통합한 리더십”(윤평중 한신대 정치철학 교수) 등 좌우 가치의 절충이 화두가 될 것이라는 응답도 있었다. “모두를 생각하는 시선”(이영표 축구해설위원),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마음”(박정환 바둑기사) 등 공존을 위한 태도에 강조점을 두는 답변도 눈에 띄었다.
남북관계, 청년문제, 민주주의 회복, 성장·도약, 사회공공성 문제가 대선 의제라는 답변도 있었다.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북한 핵, 미사일 위협으로부터 국민 안위를 지킬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방책”을,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북한에 대한 ‘악마화’ 정책 수정”을 각각 답으로 내놓았다.
도법 스님은 “청년들이 희망을 갖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를, 시인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경제 시스템 변화를 통한 청년 취업 해결”을 꼽았다. 시인 김선우씨는 “최소한의 민주주의 상식 회복”을 말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한민국 리뉴얼-신성장, 사회 정의, 젊은 대한민국, 제4차 산업혁명”,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시장권력으로부터 국가권력의 자율성 회복”을 화두로 제시했다.
■우리 사회가 가야 할 미래
경향신문이 창간 70돌을 맞아 실시한 ‘70인 한국 사회 진단’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공동체의 복원’을 꼽았다. 개개인이 파편화되고, 세대·지역·계층 간 갈등이 만연한 상황에서는 경제·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연대’ ‘통합’ ‘사회적 합의’를 통한 공공성의 회복을 요구했다. 다수 응답자들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정치’가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시민들이 공감하고 연대하는지, 사회에 참여하는지, 민주주의를 믿고 있는지 등을 생각해 보면 오늘의 한국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진단했다. 임경지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은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의 보편적 원리로 도입된 뒤 각자도생만 남았다”며 “나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라고 깨닫는, 관계성이 살아있는 사회를 복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인국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는 “공멸이냐, 공생이냐, 둘 중 하나의 선택”이라고 했다.
공동체 복원이 필요해진 이유로는 경제·사회적 불평등을 꼽은 답변이 많았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 사무차장 정책특보는 “불평등과 불안정의 구조화 문제를 해소하려면 현재 만연한 개인주의적 해법을 넘어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송민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은 “서로 나눌 수 없는 동네는 미래도 없다”며 “평화와 번영의 길은 기회 균등과 경제의 질적 성장을 향한 구조혁신”이라고 밝혔다. “상생, 함께하는 소박한 삶”(이철수 목판화가), “격차 없는 대동”(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등 답변은 모두 불평등 해소에서 공동체적 해법을 지향했다.
동시에 공동체의 개념은 그 규모와 성격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다양한 가치의 공존”(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다양한 이웃에 대한 존중”(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대표)에서부터 “극심한 진보·보수 편 가르기를 극복한 합리적 사회”(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세대·지역·계층·남북 분열을 넘어 통합된 국가”(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국가·종교·민족·이념을 뛰어넘은 지구촌 시민사회”(도법 스님)까지 확장됐다.
공동체 회복을 구체적으로 복지국가 실현과 연결한 답변도 눈에 띄었다. 건축가 이일훈씨는 ‘공동체의 회복’을 “복지사회로 가는 한 축”이라며 부의 편중을 완화할 수단으로 봤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복지국가를 “불평등을 개선한 공존을 이룬 사회”라고 정의했다. 조성주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소장은 “복지국가는 단순한 복지정책의 나열이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 해소와 공동체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공동체에 필요한 개념인 ‘연대·통합·합의’의 구현은 대개 ‘정치’의 책무로 귀결됐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공공가치를 체현한 정치세력의 등장’과 ‘민주시민의 자질과 덕성 함양’이 필요하다고 봤다. 소설가 손아람씨는 “연대를 위해서는 주체들 간 거래가 필요한데, 이 거래가 바로 정치”라고 했다. 서민 단국대 의과대학 교수는 “정치가 사회적 갈등의 완충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답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정치가 갈등을 완화하고 조정하고 나아가 타협과 합의를 도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치·외교·안보>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 남경필 경기도지사,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문재인 더민주 전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박원호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송민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전 공동대표, 안희정 충남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윤평중 한신대 정치철학과 교수,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 정운찬 전 국무총리, 조성주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소장,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추미애 더민주 대표
<경제·산업·과학> 김상조 경제개혁연구소 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서민 단국대 의과대학 교수, 유룡 카이스트 화학과 교수,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교수, 이광형 미래학회 회장, 이동걸 전 한국금융연구원 원장,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 관장, 이효진 8퍼센트 대표,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
<사회>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 김운성·김서경 작가,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박준영 재심전문변호사, 안진걸 참여연대 공동사무처장,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대표, 이범 교육평론가,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이상헌 국제노동기구 사무차장 정책특보, 임경지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전원책 변호사,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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