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을 묻다-김상봉]"선출된 왕정을 최소한 원로원 체제로 가져가야"
정리|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경향신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기획 특별취재팀은 지난 7~9월 지식인 40여명과 기획 자문을 겸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도움 주신 분들의 양해를 얻어 전문을 싣습니다. 게재 전 보완 과정을 거쳤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대한민국은민주공화국인가 특집페이지 바로가기
김상봉(전남대 교수·철학)은 박명림(연세대 교수·정치학)와 함께 2009년 경향신문에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연재 바로가기를 연재했다. 두 학자는 공화국·헌법1조·정부수립·국가와 민족·시민의 권한과 책임·정치의 한계와 가능성·시민교육·다문화사회·분단과 통일·세계시민성과 주체성 등 10가지 주제를 놓고 편지를 교환했다. 경향신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특별취재팀은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를 단초로 기획 방향을 논의했다. 지식인 릴레이 인터뷰 연재를 김상봉·박명림부터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 기획이 끝난 지 7년 뒤인 지난 7월 11일 저녁 서울 대학로에서 김상봉을 만났다. 베트남사회과학원과 독일 사민당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공동 주최하는 경제민주화 관련 학회 참석 출국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현 한국 정치 상황과 전망, 개헌 문제에 관해서도 말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대로 국정의 혼란과 부패가 지속된다면 내년에 박근혜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도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한다”고 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 베트남과 학술 교류에 오래 전부터 참여하신 듯한데요.
“베트남 사회과학원은 사회주의 경제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시장 경제의 효율성과 함께 사회주의적 평등의 대의와 경제 공공성을 양립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해 오고 있습니다. 저도 사회과학원의 객원교수로서 비교적 일찍부터 그 프로젝트에 참여해 왔습니다. 2009년 초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 시리즈 2회 ‘공화국이란 무엇인가’와 3회 ‘헌법 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베트남 학회 참석 때 썼어요. 그런데 그 시절만 하더라도 베트남 사회과학원 내에서 경제적 공공성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아직은 시작단계여서 2009년 학회의 주제가 세계화와 사회적 연대였어요. 생각하면 그 당시 한국에서도 연대성에 대한 논의가 비교적 활발했었는데, 저는 이미 그 때부터 일관되게 노동자 경영권과 공장의 폴리스화를 말했지요. 그 후 두 번째로 참가했던 학회의 주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였는데, 저는 그 때도 이른바 CSR이란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만든 수사일 뿐이므로 정말로 사회적 책임을 지게 하려면 노동자 경영참여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지요. 그러면서 독일의 노사 공동결정제도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주제입니까?
“전체 주제는 경제민주주의와 평등의 문제입니다. 주제 자체부터 많이 진전된 셈이지요. 그리고 사회과학원과 공동으로 학회를 주최하는 기관도 예전에는 독일의 가톨릭 교회 산하 기관이었는데, 이번에는 독일 사민당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입니다. 게다가 독일의 노사공동결정제도를 처음 도입했던 초대 노조위원장을 기념해 만든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에서도 관계자가 참여할 예정이어서 저로서는 기대가 됩니다.”
―선생님 발표주제는 무엇인지요?
“저는 이번에도 독일에 대해 발표합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노사공동결정제도뿐만 아니라 전체 경제체제를 발표합니다. 독일 사람들은 자기네 경제체제를 사회적 시장경제라고 부릅니다. 시장경제를 사회적 공공성과 결합한 거라고 보면 되겠는데, 계획경제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시장경제라고 부르지만, 신자유주의나 자유방임형 경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적 공공성의 원리를 지켜나간다는 점에서 사회적 시장 경제라는 거지요. 구체적으로 말해 세 기둥이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를 떠받치고 있는데, 첫째가 전체 시장 질서에 관해서 보자면 대기업의 독점을 철저히 예방함으로써 기업들 사이에 진정한 자유경쟁의 조건을 만들고, 둘째는 개별 기업의 차원에서는 노동자들의 경영참여와 공동결정권을 법적으로 보장해줌으로써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기업 내에서 임금노예가 아니라 기업의 주권자로서 생산에 참여하게 되고 경영진의 입장에서는 노사갈등 없이 안정적으로 기업 경영을 할 수 있게 되지요. 마지막으로 독일 경제체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원화된 직업교육입니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라면 기업이 양성해야지 그걸 왜 학교가 합니까? 한국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은 좋은 노동자가 아니라 최신식 기계설비”
―그건 뭔가요?
“핵심은 기업이 자기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스스로 교육시켜서 채용하는 제도지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가면 으레 한쪽에는 그런 직업교육장이 있습니다. 각 분야의 마이스터를 비롯해 고참 노동자들이 직업교육을 위한 자격증을 이수한 후에 실습교사로서 10대 후반의 실습학생들을 가르치는데, 3년 반 동안의 교육과정 동안에 실습학생들은 저학년일 경우 일주일에 사흘 학교 교육을 받고, 이틀 동안 실습 교육을 받다가, 고학년이 되면 이틀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사흘을 기업에서 실무 교육을 받게 되지요. 물론 모든 비용은 기업과 상공회의소 그리고 국가가 부담합니다. 3년 반의 교육이 끝나면 기업은 실습생들을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게 되지요. 독일 경제의 경쟁력은 이런 치밀한 직업교육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의 기업은 입만 열면 학교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지 못한다고 불평하는데,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라면 기업이 양성해야지 그걸 왜 학교가 합니까? 학교는 학교에서 가르칠 것을 가르치고 기업은 기업에서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 옳지요. 학교는 직업의 차이를 불문하고 인간의 모든 활동에 필요한 보편적 지식과 기예를 가르치는 것이 옳습니다. 보다 전문적이고 특수한 직업교육은 기업이 스스로 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기업은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스스로 양성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학교 탓만 합니다. 그러면서 노동생산성이 낮다고 노동자들을 싸잡아 비판합니다.”
―한국 기업이 직업교육에 무관심한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그야 노동자들이 정말로 전문성과 특별한 경쟁력을 가지게 되면 마음대로 해고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요. 한국의 자본가들이 원하는 노동자는 숙련된 전문성을 가진 기술자들이 아니에요. 그저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시키는 대로 일하는 평균적 노동력을 원할 뿐이지요. 그래야 자본이 노동에 예속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한국의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은 좋은 노동자가 아니라 최신식 기계설비에요. 노동생산성 타령은 노동자들을 옥죄기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선동일 뿐이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좋은 기계 들여 놓고 저임금으로 물건 만들어 팔아먹는 게 언제까지 가능하겠어요? 그런 일은 이제 한국보다 더 임금이 싼 많은 나라들이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한국 경제가 근본에서 바뀌지 않으면 이제 우리 경제는 끝났다고 봐요. 그런데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경제를 호의적으로 보는 편이거든요. 물론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처음부터 기초를 잘못 놓았다간 정말로 낭패를 볼 수 있으니, 한국의 야만적 착취경제보다는 독일식의 사회적 시장경제를 모델로 해서 경제체제를 설계하라고 언제나 설득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신자유주의인가, 사회적 시장경제의 세계화인가?” 하는 제목으로 독일 경제 제도에 대해 좀 자세히 소개를 하고 토론을 할 생각이에요.
- 창간 70주년 기획을 무엇을 할지를 두고 ‘보수의 위기’ 등 여러 한국 사회 문제를 고민하다가 모두를 포괄하는 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군요. 근데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이 보수의 위기라고 생각 안 해요. 진정한 위기는 진보의 위기 또는 더불어민주당의 위기죠. 국민의당은 말할 가치도 없는 집단이고요. 87년 이후 한국의 진보 진영은 이제 완전히 고갈됐다고 봐요. 우리 사회의 진짜 위기는 거기에 있습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관찰하자면 보수의 위기인 듯이 보이는 상황이 머지않아 올 거예요. 저는 이대로 국정의 혼란과 부패가 지속된다면 내년에 박근혜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도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합니다. 더민주 사람들이 ‘우리가 8부 능선 왔으니까 큰 실수만 없으면 내년에는 정권 교체할 수 있다’는 식으로 안이하게 생각하고 부자 몸조심하듯 몸 사리고 있는데, 제가 보기엔 그런 생각으론 정권 못 찾아옵니다. 이대로 가면 십중팔구 내년에 제2의 6·29선언 나옵니다.”
“한국 사회는 어떤 식이든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떠밀려 가고 있어”
- 무슨 뜻인지요?
“이대로 나라가 방향타 없이 표류한다면 침몰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 아닙니까? 침몰하는 데 사람들이 그 안에서 같이 죽자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이어온 역사인데?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식이든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떠밀려 가고 있습니다. 지금 조선업 구조조정은 전조에 지나지 않습니다. ‘87체제’의 안정성이라고 하는 게 실은 형식적 민주주의 정당성에 기초하고 있는 거죠. 그런 껍데기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지 않잖아요? 이게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 되었단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없을 만큼 가난해서 그런 건 아니잖아요? 여러 해 동안 계속 무역흑자 행진이 계속되고 있고, 그 결과 재벌은 천문학적 사내 유보금을 보유하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밥걱정을 해야 될 처지에 왔다면, 그건 경제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말 아니겠어요?
생각하면, 민주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재벌이에요. 군부 독재가 자본독재 기업독재로 바뀌었잖아요. 노무현 대통령 말처럼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으면, 시장을 지배자들이 최소한 시장이 붕괴하지 않도록 지켜야 할 규칙을 지켜야 할 것 아니에요? 쉽게 얘기해서 재벌 자식들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자식들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해주어야 이 경제체제가 재생산되고 지속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처럼 젊은이들이 학교 졸업해 봤자 온통 비정규직이고 간신히 혼자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돈으로 연명이나 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회적 조건 아래서 무슨 경제적 독립이 가능하겠어요? 결혼이나 출산이 벼슬처럼 어려워진 나라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가능하겠어요? 요컨대 저임금에 기초한 착취경제는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근데 제가 이렇게 말하면 노동자 편만 든다 하겠지만, 평범한 기업가의 입장에는 뭐가 다릅니까? 한국에 애플의 스티브 잡스나 테슬라 모터스의 일론 머스크 같은 기업가가 출현할 수 있어요? 온통 삼성과 현대가 시장의 생태계를 물샐 틈 없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누가 창업을 꿈이나 꿀 수 있냐구요? 경제는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움직이는 건데, 진입장벽 때문에 새롭고 혁신적인 창업이 불가능하다면, 기존의 기업 망하는 것 말고 무슨 다른 변화가 있겠어요?
혁신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을 개, 돼지, 물건 취급하는 사회에 무슨 창조적 혁신이 있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 모든 면에서 더는 성장의 동력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온 것이죠.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지금 집권세력이 하는 일이 뭐예요? 내부적으로는 약자를 희생시켜 자기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또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국민들을 끊임없이 분열시키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지요. 그렇게 해서 권력기반이 취약해지면 외세에 기대에 권력을 유지하려 하겠지요. 그걸 위해 정치 경제 군사적인 이권을 달라는 대로 내줄 거구요. 그럼 그 와중에 세상이 다시 어지러워지면 그 상황에 대처한답시고 다시 남남갈등 남북갈등을 부추기겠지요. 그래서 다시 나라는 어지러워지고. 이렇게 끝없는 악순환의 고리 속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사람을 개, 돼지, 물건 취급하는 사회에 무슨 창조적 혁신이 있을 수 있나”
―그게 보수의 위기 아닌지요?
“그렇지요. 한국사회가 정상적인 항로를 이탈해서 급격하게 침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갈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표면적으로는 보수의 위기가 올 것인데요, 그런데 그 위기를 자기 것으로 받아 안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진보적 전망이 더민주에게는 아무 것도 없어요. 사드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는 집단입니다. 그런 기회주의자들의 집단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한국 재벌 체제에 대해 어떤 말도 못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고요. 그 사람들 아무 것도 못합니다.”
―야권의 집권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는 전망이 많은데요?
“역사가 그렇게 쉽게 굴러가지 않아요. 보수 세력은 자고 있답니까? 아직은 현직 대통령이 저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까 차기 주자들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지요. 하지만 때가 되면 그들은 과감하게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거예요. 그리고 한국 사회의 총체적 위기가 닥치면 반드시 그 상황을 자기들 방식으로 전유해서 드라마를 쓸 거예요. 누가 압니까? 제 2의 6·29선언이 나올지? 아니면 국회에서 여당 발 탄핵안이 발의될지. 아무도 몰라요. 재집권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못하겠어요? 청와대와 타협해서 쇼를 할 수도 있는 일이고. 국민들의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날려버릴 카드는 무궁무진하게 있어요. 바로 내일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는 나라가 한국이에요. 4·19, 부마항쟁, 10·26사태, 5·18 그리고 6월항쟁까지 그거 누가 예측한 사람 있었답니까? 해방 후 한국 역사를 보면 30년이 지나기 전에 체제가 붕괴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내년이 87년 30주년인데, 그나마 지금까지 그만한 봉기가 없었던 것은 87년 역사가 그만큼 위대한 역사였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 그 시효가 끝났어요. 우리에게 미래는 없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87년 체제가 아니라 해방 이후 이어져온 역사가 종말에 이르렀다고 봐야겠지요. 더민주는 마치 이승만 치하의 한민당이나 민주당처럼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집단이에요. 근본적 변화가 닥치면 그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나 되겠지요.”
“더민주는 이승만 치하의 한민당이나 민주당처럼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집단”
―잘 믿기지 않는 예언처럼 들립니다.
“물론 그런 극단적인 일이 내년에 당장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각 상황에 대해 치밀하게 대비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한국의 이른바 진보 진영은 너무 안이해요. 아무 준비 없이 소일하다가 막상 절박한 상황이 닥치면 허둥대면서 주먹구구식으로 대처하지요. 4·19도 그렇고, 87년도 그렇고, 거슬러 올라가면 구한말도. 생각하면 비통한 일이에요. 어쩌면 그렇게 시대의 징조를 못 읽는지. 몇 십 년은 아니라도 최소한 몇 년 앞은 내다보면서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예전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를 다시 읽었습니다. 당시엔 너무 시대를 앞선 기획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만 듣고 보니 미리 내다보고 준비한 것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7년이 지난 이제서야 ‘공화국’ 담론이 학계 밖으로도 나오는데요. 2009년 연재 당시 담론을 이어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분이 헌법 제1조부터 다문화와 통일까지 두루 짚으셨죠.
“원래 우리나라 주류 지식인들이 그런 짓 안하죠. 구한말에도 그랬어요. 서양 문명이 물밀 듯이 밀려와 나라가 절체절명의 혼란과 위기에 처했는데, 누구도 치열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사람은 없었어요. 도무지 책을 쓰지 않아요. 구한말에 서양에 대해 스스로 연구하고 분석한 책이 있습니까? 그리고 조선의 현재를 비판하고 미래를 이론적으로 전망한 책이 있습니까? 일본에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있었고, 중국에는 캉유웨이 량치차오를 비롯해 기라성 같은 지식인들이 책을 썼지요. 그런데 우리는 없어요. 19세기 말에도 꽤 많이들 유학 갔어요. 윤치호 같은 사람 미국 유학 가서 감상적인 일기나 썼지 서양을 분석하고 조선의 미래를 제시한 글 같은 건 쓸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고작해야 유길준의 <서유견문> 정도인데, 아무런 절박함도 감동도, 아니 재미조차 없는 한가한 구경꾼의 정말 진부한 기행문이에요. 그러니 나라가 망하지 않고 배기겠어요? 그런 나라에서 예나 지금이나 민중들은 목숨을 걸고 봉기하는데, 지식인들은 나라를 새롭게 형성할 이론적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아요. 모든 문제가 거기서 생깁니다. 나라를 어떻게 하자는 걸 두고 토론과 논쟁이 없으니까 혼란한 세상에 권력투쟁만 남는 거예요. 권력을 잡아도 무얼 어떻게 고치겠다는 전망도 없는 자들이.
그런데 비감한 건 이게 지식인들만의 책임은 아니에요. 묻는 사람이 없으니 답을 하는 사람도 없는 거지요. 말이 나왔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경향신문에 ‘외국인 지식인 지형도’ 같은 기획은 무슨 지면 낭비입니까. 그런 게 우리 사회에 무슨 도움이 되나요. 그거 독자들이 알면 뭐하고 모르면 뭐합니까? 철지난 외국 학자들 이야기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슨 도움이 된다고. 아는 척 하고 싶은 사람이야 책 읽으면 되지요. 세상에 흔해 빠진 것이 싸구려 인문학 소개서들인데, 신문에서까지 나서서 영업활동을 해주는 이유가 뭐랍니까? 그러니까 대중들도 한국 학자들에게 한국 문제에 대한 답을 물을 생각을 못하는 거잖아요? 학자는 외국에만 있다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한국에 학자 아무도 없다고 치자구요. 그럼 그 잘난 외국의 석학들이 한국 문제에 대해 살뜰하게 답을 준답니까? 잘났든 못났든 우리가 우리 문제 해결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 사회 분석하고 우리 미래의 갈 길을 보여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구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보잘 것 없어도 우리 학자들에게 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가 나는 나라잖아요. 대책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남의 나라 학자들에게 자기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할 건가요?
경향신문 덕분에 7년 전에 저도 한국 사회를 새롭게 형성할 청사진을 간략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연재가 끝난 뒤에 내용을 많이 보완해서 박명림 선생님과 함께 <다음 국가를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는데, 그 책 지금은 절판되고 없어요. 그만큼 사람들 관심이 없는 거죠.”
―저널리즘은 담론 구축과 전달에 어려움을 느끼곤 하는데요.
“그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은요, 원론적인 말인데, 담론의 역사를 이어가야 합니다. 함석헌이 말했어요. 역사는 릴레이 경주와 같아서 누군가에게 바통 넘겨주지 못하면 역사는 없는 거예요. 정신의 역사도 마찬가지에요. 생각하면 한국의 진보 진영이 보수 세력에게 이기기 어려운 까닭이, 도무지 진보 진영은 역사를 이어가질 않아요. 이어가는 철학이나 이론이 없어요. 유일하게 이어가는 게 있긴 하죠. 바로 남한 사회에서 허락되지 않는 김일성주의입니다. NL들이 이어가요. 그래서 PD가 NL을 못 이기는 겁니다. 그러면 우익은 어떨까요? 그들은 없어도 만들어냅니다. 집요하게 이승만·박정희를 이어갑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지 근대화론도 만들어낸 겁니다. 대한제국이나 노론도 그렇고요. 자기네들 계보를 이어낸 거죠. 그런데 그게 없는 게 진보에요.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없죠. 언제나 자기가 제일 잘 낫다고 여기면서 아무도 이어가려 하지 않으니 역사를 이어내지 못해요. 그러니까 옆으로 사람들을 모을 수도 없죠. 각자 서로 다른 외국 교과서를 읽고는 저 잘났다 싸우다 망합니다. 지금이라도 집요하게 이어가는 철학이 있어야 돼요. 철학이 아니면 담론이라도”
- 그런 의미에서 취재팀도 7년 전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에서 두 분이 제기한 의제들을 짚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제기하셨던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부문의 문제들은 더 심각해진 듯합니다.
“물론입니다. 병은 치료하지 않으면 악화될 수밖에 없고 사회적 모순은 해소되지 않으면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 때 제기한 문제들 가운데 해소되거나 해결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더 심각해진 것이 너무도 당연한 거지요.”
―간략하게 한 가지씩 좀 짚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민주주의 급진화가 시대 화두에요. 87년 민주화로 정치적 민주화만 이루었죠. 그것도 간신히 제일 꼭대기만 민주화되었을 뿐입니다. 중앙권력을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것에 머물러 있는 거죠. 지금 지방자치는 빈 껍데기니까. 대통령은 그냥 선출된 왕이에요. 역사가 하루아침에 비약할 수는 없어요. 선출된 왕정을 최소한 원로원 체제로 가져가야 하는 게 지금 한국 정치 과제에요. 구체적으로 말해 내각제로 가야 될 때가 된 거지요.
그와 함께 급진적인 지방 분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분권화를 못 이루면 통일도 못합니다. 역설적이지만 통일 국가는 분권국가가 되어야 실현가능한 거지요. 만약 권력을 중앙 정부가 독점한다면, 남이 양보하겠어요, 북이 양보하겠어요? 그러니까 인구 비례에 따라서 국가 예산 다 나눠야 합니다. 도대체 뭐가 그리 한가해서 학교 급식까지 중앙정부에서 간섭한답니까? 단호하게 지방분권해서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경남의 홍준표 지사가 무상급식 안 하겠다고 하면, 전남은 다 무상급식 하면 됩니다. 부산은 대학까지 무상 교육 한다고 하고요. 경북은 기본소득 준다고 하고요. 그렇게 지자체가 서로 경쟁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권력을 지방에 이양할 때만 중앙권력이 약화되고 그래야 통일을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걸 염두에 두고 권력구조 개편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게 첫 번째 과제입니다.”
― 경제 쪽은요?
“87년에 못 이룬 게 경제 민주화죠. 그 결과 지금 보듯이 한국인의 삶의 조건이 악화될 대로 악화됐습니다. 직장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삶의 세계 아닙니까? 그런데 그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삶의 세계에서 도구화 되고 사물화 되어 노예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인간의 삶이 과연 자유로울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정말로 이 땅에서 자유인으로 살려면, 정치와 국가 조직뿐만 아니라 경제와 기업 조직도 민주화해야 하는 거예요. 그럼, 경제 민주화가 의미하는 게 뭐겠어요? 결국 노동자의 ‘동등권’입니다. 민주주의가 뭡니까?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의 모든 참여 주체들에게 동등한 권한을 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경제의 영역에서 소비자 주권은 말하면서 왜 노동자 주권은 말하지 않습니까? 정작 경제를 끌고 가는 사람은 그들인데.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말하면 기업은 엄연히 오너가 있다고 떠드는데, 도대체 법인기업에 주인이 어디 있어요? 독일의 2000명 이상 기업에서는 경영진을 임명하는 기업의 최고 권력기구인 감독이사회의 법인 이사 절반이 노동자 몫입니다. 즉 종업원 몫이죠. 500~2000명 미만 규모의 기업에서는 그 몫이 3분의 1이구요. 기업 의사 결정에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동등권을 확대해야 임금 노예화를 방지할 수 있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구의역 참사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그 사건 후 제가 평소에 존경하는 어떤 교수분이 신문에 노동권 존중만이 답이라는 칼럼을 쓴 걸 읽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찬찬히 읽었지만 아무리 다시 읽어도 그 글 속에는 무엇이 노동권 존중인지가 없더라구요. 그러니 사람들이 노동권을 존중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존중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거지요. 그런데 이처럼 정말로 중요한 일에는 추상적 당위만 있고 구체적 전략이 없는 것이 한국 진보 진영의 현주소에요.”
―선생님께선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2012)에서부터 노동자의 경영 참여야말로 노동권 존중의 길이라고 꾸준히 주장해오셨죠.
“맞아요.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해서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구의역 사고를 막을 수 있어요. 독일의 공동결정 관련법에 따르면 작업 환경의 안전 여부를 규제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공동결정권에 속하는 사항이에요. 한국처럼 노동자들이 자기의 작업환경을 주체적으로 규제하지 못한다면, 자본가들이야 당연히 노동자들의 목숨보다 이윤을 더 중시하는 자들이니 끊임없이 사고가 나는 것은 일종의 논리적 필연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저는 몇 년 전부터 책이든 다른 글이든 아니면 강연이든 기회 있을 때마다 노동자의 실질적 경영 참여와 공동결정권을 말해왔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우리 사회 전체로는 아무런 반향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소귀에 경읽기지.”
―그 책에서는 노동자 경영권을 말씀하셨는데, 요즘은 독일식 노사 공동결정제도를 선호하시는 겁니까?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노동자 경영권의 정당성과 근거를 순수한 이론적 차원에서 증명하기 위해 쓴 책입니다. 경영권은 기업 내부인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에게 주고 투자자인 주주들에게는 배당금을 주는 것이 옳다는 것이 그 책의 요지였습니다. 여기서 노동자는 넓은 의미에서 기업 내부에서 기업 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업 내에서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이 기업을 운영하는 권한과 책임을 가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한 번에 전면적으로 현실에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행의 전략으로서 독점 상태의 공기업이나 언론기관에서 가장 먼저 노동자 경영권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더랬지요. 그런데 그 후 민간 기업에 관해 노동자의 경영참여의 방안을 구체적으로 고민하면서, 이 문제에 관해 독일의 경험과 제도를 보다 철저히 연구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역시 이행의 전략으로서 주주와 종업원의 공동결정제도가 현실적인 적합성이 있겠다고 생각해서, 그걸 어떻게 하면 한국적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었지요. 여러 가지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독일의 제도를 그대로 이식할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아직도 구체적인 실행방안에 대해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필요하게 쓰일 때가 오리라 생각하면서 미리 준비하는 거지요.”
―마르크스 이후에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는데, 특별히 독일 모델이 더 우월한 점이 있습니까?
“자본주의 극복을 위해 마르크스가 구체적으로 대안을 제시한 건 없지만 최소한 방향을 제시하기는 했지요. 크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의 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둘 다 언뜻 듣기엔 실현 불가능한 공상처럼 들리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기본소득제는 마르크스가 말한 앞의 원칙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공상은 아닌 거죠.”
―그럼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은 어떻습니까?
“예. 실은 그게 더 복잡해요. 기본 소득이야 재원 문제만 해결되면 상대적으로 단순해요. 너무 단순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냥 주면 되잖아요. 장애 수당, 농민 수당, 가사 노동 수당, 청년 수당 등등 좋은 이름 붙여서 급한 분야에서부터 지원을 하면 되지요. 대가 없이 말이에요. 그리고 그 정도의 재원은 한국의 경제 수준이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요. 그러니까 사회적 합의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의 이념은 달라요. 그건 그 자체로서 정교한 설계가 필요한 일이거든요. 어떻게 해야 생산 활동에서 노동자의 자유를 확보하면서도 생산 활동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답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노동자의 자유만 생각하다가 기업이 아무런 의사결정도 할 수 없는 무정부 상태가 되어서도 안 되는 거고, 그렇다고 해서 경영진의 독재 아래 노동자들이 임금노예가 되어서도 안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이 두 마리의 토끼를 같이 잡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더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철폐하고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실시하면 그런 모순이 사라진다고 몽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을 수 있는데, 아무리 시장을 거부한 사회주의 경제라 하더라도 문제는 똑같이 남아요. 그건 과거 소련이나 중국 그리고 지금의 북한을 생각해보면 너무 명백한 사실이죠. 재벌이 아니라 국가가 기업의 주인이 된다 해서 노동자자 자유로운 생산자가 되고 기업이 그런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 경우 노동자는 국가의 노예, 당의 노예가 되는 거지요.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는 접어두고 서유럽의 경우만 놓고 보자면 20세기에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실험이 있었어요. 제가 여기서 그걸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대표적으로 두 가지는 언급할 수 있어요. 하나는 영국 모델이었어요. 영국의 노동당은 마르크스의 교리에 기대어 생산 수단을 사회화하면 기업을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고 노동당이 집권했을 때, 은행 및 주요 기간산업을 국유화했어요. 예를 들면 철도, 가스, 전기, 탄광 등등.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어떻게 되었습니까?
“처음엔 좋았지요. 그런데 나중이 안 좋았어요? <빌리 엘리어트>라는 영화 보셨나요? 그 영화가 1984년에서 5년까지 1년 이상 계속된 탄광 노조 총파업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왜 파업이 일어났는지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아요. 그런데 간단히 말하자면 그 파업의 원인은 거슬러 올라가면 탄광이 국유화되었기 때문이에요. 탄광이 국유화되고 국가가 사용자가 되었으니, 처음엔 노동권을 존중하고 노동자를 살뜰하게 보호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국유화된 탄광이 세월이 흘러 사양 산업이 되니까, 아무리 석탄을 캐도 팔리지 않고, 국가 재정에 너무 큰 부담이 되는 겁니다. 1970년대 들어 영국에서 이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데 누구도 그걸 해결할 방안을 내놓지 못하는 거예요. 노조 역시 일자리를 지키겠다고 파업은 할 줄 알아도, 객관적으로 닥친 위기 상황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했어요. 결국 1984년 봄 대처 수상이 들어서서 구조조정을 시작하죠. 노조는 1년 이상 총파업을 감행했지만 거의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어요. 84년 12월 여론조사에서 파업 찬성이 고작 7%, 반대가 무려 88%였어요. 결국 다음해 5월 달이 되면 탄광노조 위원장을 배제하고 대의원들이 파업 철회를 결의하고 말아요. 백기 투항한 거죠. 아무런 설득력 있는 대안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탄광이 사양 산업이 된 건 독일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독일은 어땠을까요? 거기서도 50년대부터 40년 동안, 탄광에서 50만개 일자리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탄광에서 해고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믿기세요? 제가 그거 확인하려고 작년에 독일에 갔어요. 독일 탄광이 한참 잘나갈 때 사람이 모자라 한국에서도 광부를 데려갔잖아요. 그분들 만나러 갔었어요. 그리고 물었죠. ‘진짜로 아무도 해고 안 됐습니까?’ 해고 안됐습니다. 이 탄광이 문 닫을 것 같으면, 다음 탄광으로 보내줘요. 그래도 석탄이 안 팔리는데 바보가 아니라면 끝이 보이잖아요. 한 편으로 탄광 회사는 업종변경을 준비하고 다른 한편으로 기업이 나서서 외국인 노동자에게 재취업을 위한 교육을 합니다. 막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주경야독해서 마이스터가 되고 훨씬 더 좋은 조건에서 독일 사회 정착할 수 있게 된 거죠. 그게 거기 역사입니다. 2차 대전 후 독일 노사공동결정제도는 1951년에 제정된 탄광과 철강 산업 노동자의 공동 결정에 관한 법률이 그 효시예요. 그 법 덕분에 독일의 탄광지역이었던 루르 지방은 지금도 독일 산업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예요. 그게 다 노사 공동 결정, 공동 경영 덕분에 가능한 역사였죠.
제가 쌍용차 사태부터 계속 말해온 것도 그거예요. 공적자금 투입해서 엉뚱한 사람 배불리고, 나중에는 이도 저도 안 되니까 상하이 자동차에게 팔아넘겼잖아요. 그럴 거면, 차라리 노동자에게 경영권을 주라고.(<씨알의 소리>, 2009년 9/10월호) 채권은행이 법정관리인을 누구로 지정하든 그가 노동자와 기업의 운명에 대해 무슨 살뜰한 관심이 있겠어요? 큰 손해 보지 않고 청산하려는 생각이나 하겠지요.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들에게 권한을 위임한다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 최선의 대안을 모색하지 않겠어요? 스스로 단결해서 생산성을 높이고 가장 유능한 경영자를 초빙해 위기를 극복할 길을 찾겠지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언제나 의병들이 지켜온 역사가 있는데, 왜 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노동자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나요?
물론 정말 위기 상황이 닥치면 노동자가 아무리 경영권을 가진다 하더라도 때가 늦겠지요. 한진중공업 사태 이후 조선업의 위기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 선진국의 사양 산업이 한국에 이전되었던 것처럼, 이제 그게 한국에서도 수지가 맞지 않아 다시 제3세계 이전되는 걸 누가 무슨 수로 막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위기가 닥치기 전에 준비하도록 해야지요. 그렇게 노동자의 입장에서 기업의 미래를 전망하고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하려면 노동자의 경영참여나 노사 공동결정제도가 반드시 필요해요.”
- 법조와 언론 문제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87년 이후 한국 사회의 과제를 한 마디로 말하라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민주화라고 말할 수 있어요. 자본권력이 첫째지요. 그에 대해서는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말씀드렸구요. 그 다음으로 중요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바로 법조권력과 언론권력이죠. 저는 법조권력의 민주적 통제를 위해 ‘새로운 공화국을 위하여’에서는 인권재판소를 제안했었는데, 그게 아니면 검찰총장을 선출하는 것도 방법이 되겠지요. 검찰의 수사권을 경찰에게로 이관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구요. 어떤 식으로든 법조권력의 민주적 통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숙제죠.
언론은 노동자경영권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든지, 경영권은 종업원에게 있다는 걸 언론에서부터 법제화 해야 합니다. 주주가 누가 됐든, 손 못 대게 해야 합니다. 제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제안했듯이, 우선 공영 언론사부터 시작해야 하죠. KBS나 MBC는 종업원 주권으로 가야 하죠. 경향신문이나 한겨레 같은 모델로 가야 합니다.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든, 대주주가 누구든, 그게 국가든 누구든, 노동자 경영권을 1차 적용해야 할 데가 언론사입니다.”
“한국이 계속 우왕좌왕 하게 되면 동아시아와 세계 전체의 미래가 새로운 냉전구도 속에서 불확실해져”
- 앞서 사드배치를 두고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의 서세동점의 시대가 끝났다는 걸 한국인들이 아직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제 세계의 중심은 동아시아로 옮겨왔어요. 20세기 초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시작된 동아시아의 부상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중국의 등장과 함께 안정된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아야지요. 중국은 이제 미국과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초강대국의 길에 들어섰어요. 그런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려고 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던 구한말의 지배세력과 똑같이 한국의 주류세력 역시 늘 하던 대로 종주국인 미국이 달라는 걸 다 주고 있지요.
그래서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사드기지를 주겠다고 한 건데, 중국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지금 한국이 정치 군사적으로는 미국의 반식민지, 피보호국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볼모잡혀 있는 나라예요. 작년 한국의 무역통계를 보면, 대중국무역에서 469억불의 흑자를 보았고 홍콩에서는 289억불의 흑자를 보았어요. 미국이 그 다음으로 258억불이에요. 우리 경제가 그렇게 중국과 홍콩에 기대고 있어요. 그런데 미국에 사드를 주었으니, 중국에 파격적으로 반대급부를 주어야 하겠지요. 그게 뭐겠어요? 미국 눈치 때문에 군사적 이권을 줄 수는 없으니 경제적 이권이 되겠지요. 마치 제주에서 미국을 위해 강정해군기지 만들고 중국 자본을 위해 대규모 리조트 허가 내주는 것처럼 앞으로 한반도 전체가 미국의 군사적 식민지, 중국의 경제적 식민지가 되지 말란 법이 없어요. 사드 배치는 그 절망을 터널로 들어가는 입구예요.
함석헌 선생이 그랬지요. 중국이 일어서기 시작하면, 그 나라의 민족주의를 제어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제가 보기엔 베트남과 한국뿐이지요. 중국이 부상하는 것은 정해진 일인데, 중국이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한국이 좋은 이웃으로서 해야 할 역할이 있어요. 그런데 한국이 지금처럼 계속 정신 못 차리고 우왕좌왕 하게 되면 동아시아와 세계 전체의 미래가 새로운 냉전구도 속에서 불확실해지는 거지요.”
―음울한 미래상이군요. 희망은 없습니까?
“젊은이들이 희망입니다. 40이 넘으면 세상을 바꾸기 어렵습니다. 대개 20년 동안 열심히 뛰어 다녔는데,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는 좌절만 남거든요. 그래서 늘 세상은 바꾼 건 20대 청년들이었어요. 3·1운동의 유관순도, 4·19를 촉발시킨 김주열도, 우리 시대의 예수 전태일도, 부마항쟁의 대학생들도, 5·18의 윤상원도 30이 채 안 된 나이에 그런 역사를 썼어요.
그런데 제가 특별히 지금의 20대에게 거는 기대는 그들이 처음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그 청사진과 설계도를 찾는 세대라는 거예요. 세상을 바꾸기 위해 화염병이 아니라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세대가 지금의 20대예요. 그만큼 우리의 정신이 성숙한 거지요.”
“한국 교육은 개인적으로는 출세교육, 사회적으로는 노예교육”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변화지요. 한국 사회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새로운 사회를 위한 전망을 제시하는 철학이 있어야 그에 입각해서 실천을 할 거 아니겠어요? 그런 철학이 무엇인지를 찾는 젊은이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을 뚜렷이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어차피 외국 학자들의 철학은 한국 문제의 해결에는 별 쓸모가 없어요. 그렇다고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남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어요? 그럼 우리 사회 내에서 자라나온 어떤 철학이 지금의 문제를 총괄적으로 인식하고 해결하는 척도가 되겠어요? 젊은이들이 그걸 묻기 시작했다는 거지요. 그 물음 속에 희망이 있어요. 일단 묻기 시작하면 반드시 답을 찾게 되거든요.”
―그럴수록 교육이 중요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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