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라”는 파시즘 아닌가? / 경향신문에서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10. 22:51

[시대의 창]대통령의 서재

전우용 | 역사학자

 

고등학교 때 대입 영어시험 예상 문제 지문으로 빠지지 않았던 게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문과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취임사였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라”는 민주주의와 애국주의에 관한 가장 간결하고 명료한 명언으로 오늘날에도 세계인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이들의 글을 외며, 우리나라 학생들은 언제쯤이면 대통령이 남긴 명언을 욀 수 있게 될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들의 연설문은 말을 듣기 좋게 꾸며 내는 수사학의 결과물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자기 시대의 과제를 명확히 이해했고, 자기가 이해한 바를 설득력 있게 대중에게 설명하는 방법을 알았다.

[시대의 창]대통령의 서재

민주주의 시대의 권위는 세습혈통이 아니라 ‘앎’에서 나온다. 국민 대중의 삶에 대한 ‘앎’, 세계사의 추이와 국제관계의 변동에 대한 ‘앎’, 공동체 앞에 산적한 과제들의 우선순위와 그 해결 방도에 대한 ‘앎’ 등. 민주국가의 지도자라면 자기 나라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깊고 넓게 알아야 한다. 기자회견장에서 사전 각본 없이 질문에 즉답하는 능력을 민주국가 지도자의 기본 소양으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권력이 ‘앎’과 굳게 결합해 있기에 미국 전직 대통령들의 안락한 생활과 정치적 영향력을 뒷받침하는 것도 ‘말’이다. 그들은 현직에 있을 때보다 퇴임 후에 더 많은 돈을 번다. 연봉은 각료급으로 격하되지만, 시간당 10만달러 이상의 강연료를 받는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평생에 걸쳐 쌓아온 ‘앎’에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얻은 ‘특별한 앎’이 더해져, 전직 대통령의 ‘앎’은 특별한 권위를 갖는다. 그들이 받는 고액 강연료는 그의 전직(前職)에 대한 예우인 것만이 아니다. 그의 특별한 ‘앎’에 지급되는 보수의 의미가 더 크다. ‘앎’과 ‘말’이 곧 재산이자 영향력인 사회에서는 대통령이 퇴임 후를 대비해 무슨 재단이나 사조직을 만들 이유가 없다.

권위의 원천이 세습혈통이던 왕조국가에서도 왕의 ‘앎과 말’은 매우 중요했다. ‘왕의 말이 곧 법’이 되기 위해서는 법조문과 똑같이 명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했다. 왕의 말에 조리가 없으면 법도가 무너지고 세상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 사극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 왕들의 하루 일과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점한 것이 경연(經筵)이었다. 경연이란 왕이 학식 높은 신하들에게 배우는 것을 말한다. 배워야 알 수 있고, 알아야 다스릴 수 있다. 유교의 치국론에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하려는 자에게 수신제가(修身齊家)보다 먼저 요구한 것이 ‘격물치지 성의정심(格物致知 誠意正心)’이었다. 사물을 탐구해 앎을 얻으며, 그 앎으로 뜻을 가다듬고 마음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정치, 경제, 외교, 안보로부터 윤리, 도덕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난국이라고들 한다. 이렇게 된 이유의 상당 부분은 대통령의 앎과 말이 총체적 난국인 데에 있다. 출제자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통치자의 앎이 모호하면 옳고 그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통치자의 말이 꼬이면 일의 선후가 꼬이는 법이다. 말은 그저 솜씨나 재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말로써 생각하며, 말로써 세상을 이해하고 분석한다. 말의 수준이, 앎의 수준이다.

아무리 많은 강연료를 받아도 좋으니, 퇴임 후 여기저기 강연하고 다니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그럴 능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면, 퇴임 후를 걱정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모든 언론사들이 저마다 후보 자격을 검증한다며 온갖 과거사를 다 들추지만, 정작 후보의 서재를 검증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주권자라면, 후보가 무슨 책들을 읽었으며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는 했는지, 그 책들이 그의 식견과 통찰력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 권리가 있는 게 아닐까? 그의 ‘앎’이 어떤 수준이며, 어떤 것들로 구성되었는지도 모르면서 몇 년 동안 자기와 나라의 운명을 맡기는 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물론 그러려면 먼저 주권자 스스로가 후보의 ‘앎과 말’을 평가할 지적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지식은 무식을 알아보나, 무식은 지식을 분간하지 못한다.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토크빌의 말은, 대중 선거로 정부를 구성하는 나라에서는 진실에 가깝다. 가을이다. 책 좀 읽자. 그래서 세상 보는 안목도 키우고 사람 보는 안목도 높이자. 이게 총체적 난국에서 벗어나는 가장 바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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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610092041015#csidxc7a57956da85513a926ffa6f4eba0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