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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의, 시험에 의한, 시험을 위한 메리토크러시(meritocracy)를 초월하는 족속들 / 경향신문에서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10. 22:34

[김민아 칼럼]‘박근혜의 신성가족’ 최순실

김민아 논설위원

입력 : 2016.10.10 21:03:02 수정 : 2016.10.10 21:06:42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쓴 <불멸의 신성가족>은 법조계 이너서클의 실체를 파헤친 역저다. 출간 시기는 이명박 정권 때인 2009년이다. 지금쯤 속편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진경준·홍만표 이야기가 아니다. 청와대 주변 부나방들 얘기다.

[김민아 칼럼]‘박근혜의 신성가족’ 최순실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법학자인 손기병 교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극화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때문에 일어난다고 지적합니다. 실력주의, 업적주의로 번역되는 메리토크라시는 능력을 스스로 증명한 사람만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체제입니다. 처음 이 용어를 사용한 마이클 영에 따르면 메리토크라시는 지능지수와 노력에 의해 수월성(merit)을 획득한 사람들에 의한 지배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메리트를 오직 시험에 의해서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전형적인 메리토크라시 사회라는 것이 손 교수의 주장입니다.”

시험은 사람의 열정과 재능을 평가하는 많은 수단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시험 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열정과 재능을 폭넓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시험 결과조차 부모의 배경, 학교와 교육시스템이라는 비능력적 요인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은 터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하에서는 메리토크라시 비판도 사치로 여겨진다. 메리토크라시마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오장육부’로 불린다는 최순실씨가 대표적 사례다. 왜 최씨는 대통령의 친동생도 넘기 어렵다는 청와대 문턱을 내 집처럼 넘나드는가. 왜 그의 딸은 개인 승마연습 때도 한국마사회에서 감독을 파견하는 일이 가능한가. 왜 그의 딸을 위해 명문대가 학칙을 개정했다는 말까지 나오는가.

광고감독 차은택씨도 마찬가지다. 2000년대 CF계의 ‘미다스 손’이었다고 하나 일반인에겐 생소했던 그가 어떻게 ‘문화계 황태자’로 등극할 수 있었는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아들은 또 어떤가(우 수석은 메리토크라시의 통과의례인 사법시험이라도 거쳤다고 치자). 다른 젊은이들은 운전도 못해 불안한데, 그는 ‘코너링’이 유난히 좋다는 이유로 서울경찰청 차장의 운전병이 된다. 이들이 보유한 수월성의 실체는 ‘대통령과 가깝다’(혹은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과 가깝다’)는 것뿐이다. 시험을 통과하지도, 선거로 선출되지도 않은 ‘박근혜 친목모임’ 출신에게 부와 명예와 권력과 편리가 집중되는 것은 비정상이다.

박 대통령이 지난 7일 코리아 가상현실(VR) 페스티벌을 찾았다. 대통령은 “기가 막힌다” “대단하다” “놀라움의 연속”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다음 세대의 반은 가상현실에서 살면서 거기서 배우고, 또 반은 현실에서 사는 이런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했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대통령은 감탄할 이유가 없다. 최순실, 차은택, 최씨의 딸, 우 수석의 아들은 실재 인물이다. 하지만 그들이 속한 세계는 이 글을 쓰는 나와, 읽을 독자들이 속한 현실이 아니다. 일종의 가상현실이다. 대통령도 그들과 함께 가상현실 속에 살고 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800억원 모금이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세상, 특정 광고감독이 특정 대기업 방송광고의 절반 이상을 ‘자연스럽게’ 독식하는 세상. 일반 시민은 상상조차 어렵지만 ‘짐은 곧 국가’라 여기는 대통령에겐 딱히 이상할 게 없다. 그러니 최순실 의혹을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으로 일축하며 의혹 제기가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혼란을 가중시킨다”고 몰아붙이지 않았겠나. 무력한 시민은 이 가상현실의 성에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얻고 싶다. 어떻게 하면 이런 세상에 한 자리 끼어들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메리토크라시는 왜곡된 시스템이다. 그러나 메리토크라시마저 무력화시키는 ‘박근혜크라시’는 왜곡을 넘어 최악이다. 박근혜크라시에는 메리토크라시에 적용되는 최소한의 규칙조차 없기 때문이다. 권력자와의 거리가 돈과 힘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인 나라는 민주공화국이 될 수 없다. 아니 왕자·공주의 나라보다도 나쁘다. 많은 군주국은 왕실의 특권을 허용하는 대신 군 복무 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요구한다. 최순실과 차은택은 집권당의 엄호 속에 국정감사 출석조차 면제받는다. ‘박근혜의 신성가족’끼리 모여 사는 가상현실을 깨부수려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런데최순실은?”(※)

※트위터·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그런데최순실은?’ 해시태그 붙이기 캠페인이 일고 있다.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최순실 의혹’을 상기하자는 취지다. 해시태그란 #(해시) 기호 뒤에 단어·문구 등을 띄어쓰기 없이 붙여 씀으로써 분류·검색을 쉽게 하는 메타데이터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0102103025&code=990100#csidx81d8e71720f31e1860bc1c924fbac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