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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권력이 그 주인을 억압할 때, 국민은 ‘헌법 제1조’ 떠올렸다 / 경향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12. 22:37

[민주공화국]권력이 그 주인을 억압할 때, 국민은 ‘헌법 제1조’ 떠올렸다

황경상·최민지·허진무·박광연·이유진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ㆍ최근 7년간 ‘민주공화국’ 언급 트윗 분석

가끔 그 문장을 꺼내 읽으며 쓰다듬고 싶을 때가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하는 헌법 제1조 이야기다. 시민들이 민주공화국을 떠올리는 때는 언제일까. 트위터 사용자가 본격 늘어난 2009년 4월부터 2016년 8월까지 7년4개월 사이 ‘민주공화국’을 한 번이라도 언급한 트윗을 모두 모았다. 맥락 없이 반복 게재된 트윗을 제외한 7639건을 들여다봤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 문장이 이렇게나 공허한 문장이었나요?”

가장 처음 등장한 트윗이다. 2009년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가 벌어진 날이다. 시민들은 노제가 끝나도 서울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경찰은 해산작전에 돌입했다. 이 트윗은 당시 경찰을 비판하면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한 자릿수에 머물던 ‘민주공화국’ 언급량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도 1년 뒤인 2010년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즈음이다.

그해 11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홍보 포스터에 풍자 의미로 ‘쥐 그림’을 그린 박정수씨에 대한 긴급체포와 구속영장 청구가 알려졌다. 정부는 G20 행사를 앞두고 학생들을 동원했다. 쓰레기 배출까지 자제시켰다. 시민들은 껍데기 민주공화국의 탈을 쓴 ‘왕정’을 떠올렸다. “세계 각지 정상들이 모이니까 이거 하지 마라. 이해할 수 있어. 근데 헌법에 민주공화국이라고 써뒀으면, 제발 미안해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니들 지금 당당한 걸 넘어 아예 명령조잖아!” 당시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의 대우조선해양 비리 연루 의혹이 제기됐다. “국모가 상처를 받았다.” 황영철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의 반응이었다.

민주주의 가치가 훼손될 때 사람들은 헌법을 떠올리며 ‘민주공화국’을 언급했다. 트윗 성격을 분야별로 나누어 보니 ‘정치’(38.1%) 분야가 가장 많았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2011년 6월 ‘민주공화국’ 언급이 처음으로 한 달에 200건을 넘어섰다. 반값등록금 운동이 확산되고,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을 위한 희망버스 운동이 전개되던 시기다. 시민들은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의 칼럼을 인용해 트윗했다. “희망버스는 단순히 주변부로 몰린 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지원 투쟁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뿌리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민주공화국의 운동이다.”

11월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우리는 이름만 민주공화국인 국가에 살고 있었다”는 분노가 나왔다. “다수결, 이게 민주공화국인 것”이라며 비준 과정에서 국회 본회의장에 최루탄을 터뜨린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의 행위를 비판하면서 비준의 절차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넉 달 뒤인 2012년 3월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의 민간인 사찰 관련 폭로가 나왔다.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민간인을 감찰했다는 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말한 헌법 1조를 무시하고 국가 근본을 흔들어버린 중대 범죄행위다.”

12월 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문재인 후보 지지연설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데, 투표를 안 하면 만주공화국이 된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인용 트윗을 올렸다.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의 대선 개입 현장 상황을 조롱하는 “민주공화국 VS 만주공화국 = 잠금 VS 감금”이란 트윗도 나왔다. 똑같은 ‘민주공화국’으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재인 : 퍼다주고 평화를 유지하겠다 이정희 : 북한이 원하는 대로 통일을 하겠다 박근혜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선거 뒤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이 불거지면서 ‘민주공화국’은 ‘부정선거’라는 키워드와 함께 꾸준히 거론됐다. 2013년 6월 국정원의 조직적인 대선 개입이 검찰 기소로 기정사실화하면서 한 달 사이 400건에 육박했다. 역대 최고치였다. “꼭 탱크 몰고 한강다리 건너야 쿠데타인가? 민주공화국, 주권재민의 가치를 부정하고 권력을 탈취하면 모조리 쿠데타이다. 국정원이 만든 권력, 당연히 쿠데타 정권이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후에도 ‘민주공화국’을 떠올리는 일이 잦아졌다. “어떤 민주공화국에서 국민이 대통령에게 무릎을 꿇으며 자신들의 권리를 빌며 얘기한단 말인가.” 그해 12월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하면서 언급량은 200건 가까이 뛰었다. “심판대에 선 것은 통합진보당이 아니라 헌재 재판관들이며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이다.” 그즈음 정윤회씨의 청와대 비선 실세 의혹 사건,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이 벌어졌다. “‘십상시’ ‘궁중암투’ ‘세습’…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절대 왕정이 통치하는 ‘중세 신분제사회’!”

2015년 7월, 다시 ‘민주공화국’을 불러낸 것은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였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압박으로 물러나면서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의 가치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헌법 1조 1항을 대통령에 의해 쫓겨난 새누리 국회의원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 상상 못했다”는 트윗이 붙었다. 11월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 농민 사건 등으로도 언급량이 늘었다. “정치인이나 정부가 국민의 자격을 묻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국민의 자격 따위는 없다. 끊임없이 정부의 자격을 묻는 것이 민주공화국이다.”

어떤 시민들에게 민주공화국은 다가오지 않은 미래다. 실현해야 할 가치다. 어떤 시민들에게는 지금 대한민국은 당연히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는 아직 민주공화국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지난 8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건국절 주장 비판 발언도 많은 트윗을 불렀다.

사용자 수 차이를 감안해야겠지만 ‘민주공화국’이 점점 더 많이, 더 넓게 호명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빅데이터 분석가인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는 민주공화국 가치가 내년 대선 화두로 계속 떠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민주주의의 급속한 후퇴,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사법 정의 실종 등 전방위적 퇴행 속에서 많은 후보들이 헌법적 가치를 박근혜 정부와의 차별화 전략으로 내세울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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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40100&artid=201610112223005#csidxb680ea09775a0c3aa4c6010a38584d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