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2)“돈이 지배하는 갑·을의 사회…중세 신분제와 뭐가 다른가” / 경향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12. 22:42

[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2)“돈이 지배하는 갑·을의 사회…중세 신분제와 뭐가 다른가”

황경상·최민지·허진무·박광연·이유진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ㆍ시민이 말하는 ‘당신들의 민주공화국’

우리 모두는 민주공화국에 산다. 그런데도 일상에서는 잘 느끼지 못한다. 개개인이 맞닥뜨린 삶에서 민주공화국의 원칙은 자주 흩어져 버린다. 무력감을 느낀 시민들은 ‘민주공화국이 맞는지’를 되묻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정지윤 기자

우리 모두는 민주공화국에 산다. 그런데도 일상에서는 잘 느끼지 못한다. 개개인이 맞닥뜨린 삶에서 민주공화국의 원칙은 자주 흩어져 버린다. 무력감을 느낀 시민들은 ‘민주공화국이 맞는지’를 되묻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정지윤 기자

정선숙씨(49)는 초등학교 방과후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쉽게 말해 비정규직 교사”라고 했다. 매년 3월이 되면 정씨는 ‘360일짜리’ 계약서를 쓴다. 학교가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쓰는 편법이다. 그나마라도 지키면 다행이다. 11월쯤 일방적으로 끝내기도 한다. “그냥 끝입니다 하면 끝이더라고요.” 초등학교 정규 1교시 수업은 40분인데, 방과후교사는 50분을 한다. 시간당 받는 3만원은 20년 전과 같다. 그런데도 정씨는 “철저한 을이라 소리를 낼 수도 없다”고 했다.

겉보기에 분명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한꺼풀 벗겨서 각각의 집단 안으로 들어가면 민주공화국 원칙은 작동을 멈춘다. 법은 약자의 눈물을 외면한다. 소수가 권력을 움켜쥐고 돈이 지배하는 사회, “중세 신분제 사회와 뭐가 다르냐”고 묻는 대한민국이다.

■국민이 주인인가, 노예인가

헌법 1조에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박혀 있다. 국민이 공화국의 ‘진짜 주인’이 되려면 ‘노예’가 아니어야 한다. 김경희 성신여대 교수는 <공화주의>(책세상)에서 “국민이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 주인으로 서려면 적어도 신분·지위·재산 같은 조건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예속되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지배가 없는 자유가 보장되고 사람이 아닌 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공화국의 기본원칙이다.

골프장에서 일하는 이민석씨(31·가명)는 “24시간 중 나를 위해서 쓰는 시간이 하루에 한 5시간이 안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 5시20분에 출근하고, 퇴근 전 갑자기 일이 던져지거나 상사 눈치가 보여 제 시간에 퇴근하지 못하는 날이 많다고 했다. 그런 속에서도 힘이 빠지고 설움이 오래 뭉치는 것은 ‘을 중의 을’이 될 때다. “손님이 막무가내로 욕부터 하니까 직원들이 한 번씩은 다 우는 것 같아요.” 이씨는 “VIP가 오면 정말 영화 속 장면처럼 90도 각도로 인사한다”고 말했다. “완전 계급사회죠. 돈이 곧 권력이 되고, 그게 그냥 신분이 되는 것이죠.”

취재팀이 만난 시민 40여명은 각박한 세상살이 속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김세정씨(24·가명)는 회사 안에서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킨다. “수당도 안 주는데 연차도 제대로 못 써요. 하지만 ‘불합리합니다’ ‘고쳐주십시오’ 하고 자유롭게 말 못해요.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 자체도 알려질까 두려워요. 법이 보장하는 내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할 말 못하는 이 사회는 민주공화국이 아니죠.” 제조업체 영업사원인 정형준씨(30·가명)는 노동조합에 가입할 생각이 없다. 노조를 만들려다 한 방에 ‘훅 가는’ 사람을 봤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과장님이었죠. 그분이 현재 노조가 어용이라며 복수노조를 만들려고 했어요. 그러다 지방 생산직으로 발령받았죠.”

■출발선과 기회가 다른 나라

취업준비생 송주용씨(27)는 대학 시절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다. 백화점 의류매장 점원, 식품코너에서 고구마 팔기, 보일러 수리공 보조…. 학기 중에도, 방학에도 일했다. 어렵게 졸업의 문턱을 넘었지만, 돌이켜보면 상처투성이다. “반말은 예사고요. 고구마를 봉지에 담는데 장갑 끼지 않은 손이 조금 닿았다고 화를 내며 안 산다고 하기도 하고…. 내가 인격적으로 하등한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죠.” 송씨는 대한민국이 누구나 똑같이 배우고 도전하고 꿈꿀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사회라고 했다.

대학원생 김태진씨(28)도 “금수저 친구들의 생활을 보면 마치 다른 나라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방학 끝나고 물어보면 흙수저인 애들은 대부분 알바했다고 하고, 집이 여유로운 애들은 외국 갔다왔다고 해요.” 그의 눈에는 한국의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됐고 쉽게 열려 있지도 않다. “선출직 공무원이나 사법·행정 고위관료들이 권력을 다 잡은 것 아닌가요.” 김씨는 “선거도 공탁금이나 선거비용을 보전해 주는 최소 득표율이나 진입 문턱 자체가 너무 높다”며 “이젠 5급 공무원 준비도 경제적 부담이 커 좀 사는 집 애들이 준비도 많이 하고 합격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구성재씨(28·가명)는 보통 오전 7시20분 출근해 오후 9시까지 일한다. 회식도 잦다. 오후 11~12시에 들어가 다음날 오전 5시에 일어나야 한다. 몸의 에너지가 소진된 삶을 생각하면 “토가 나온다”고 했다. “지방에서 서울 올라와 사느라 매달 월세만 50만원 넘게 내는데 언제 집을 마련하고 결혼도 하겠어요.” 그는 “한국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2)“돈이 지배하는 갑·을의 사회…중세 신분제와 뭐가 다른가”

■지배받는 ‘약자의 끝’ 여성

김세정씨는 회사에서 그만둔 여자 선배들의 이름을 다 외운다. 남자 상사들이 “결혼하면 그만두겠지”라며 입에 달고 다녔던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여자는 ‘뻑 하면 울거나 그만두는 존재’들이다. “같이 입사한 동기는 회식 자리에서 ‘결혼하고 그만둘 생각이면 폐 끼치지 말고 당장 그만두라’는 말을 듣고 서럽게 울었다고 해요.”

담배를 수시로 피우러 나가는 상사들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사러 가는 여직원을 삐딱하게 본다. 여직원은 분위기나 구색 맞춰 주는 존재로만 남길 바란다. “노래방에서 술 취한 상사가 더듬으려고 한 적도 있죠. 한 입사 여동기는 호텔 나이트클럽 룸에서 춤추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거부했다가 울었어요. 상사가 ‘분위기 정말 못 맞춘다’며 되레 화를 냈다고 해요.”

서울의 한 여대를 졸업하고 로스쿨에 입학한 전민영씨(28·가명)도 “여성이 소수자인 사회로 나오니 목소리를 마음껏 내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 ‘검사 힘든데 왜 하려고 하냐’는 질문은 늘 여자만 받아요. 자기 검열에 빠지는 것이 요즘 가장 힘들어요.” 가정주부로 살다 2006년부터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는 김영숙씨(49·가명)는 “한국에서 ‘아줌마’로 산다는 것은 무지와의 싸움”이라며 “학교에서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만, 한국 사회 자체가 여성이 자기 생각을 말하면 불편해한다”고 주장했다.

■제도를 채울 알맹이가 없다

공화국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시민적 덕성’이다. 법과 제도가 잘 갖춰져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직장인 손정우씨(26·가명)는 “한국은 하드웨어는 갖춰져 있는데 소프트웨어는 못 따라간다”고 짚었다. “예를 들어 파업을 하잖아요. 노동 3권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죠. 근데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는 거예요. 민주공화국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니까 다른 사람들이 권리를 정당하게 주장하는 것도 배 아파하는 거죠.”

마키아벨리는 공적 이익을 추구하는 시민적 덕성이 사라지고 사적 이익만을 챙기는 부패가 만연하는 이유가 불평등 때문이라고 봤다. 권력과 재산을 많이 가진 이들이 법과 제도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 사람들은 능력과 자질을 함양하기보다는 부정한 방법에 의탁한다는 것이다. 학원강사 허역씨(52)는 개인을 탓하기 앞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체가 텅 비어버린 거죠. 사회구조 자체가 배려나 공동체 의식을 내세우면 다른 사람들보다 뒤처지게 만들어져 있어요.”

제도 그 자체로서 민주공화국에 만족하고 나머지는 개인 노력으로 채워가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대학생 최영환씨(24·가명)는 “정권교체까지 가능할 정도로 선거제도가 정착된 한국 사회는 불안정한 면이 있더라도 민주공화국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자영업을 하는 지준성씨(56·가명)는 청년들이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표현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 사는 곳을 지옥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사회라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국회의원들이 자녀들 취업하는 데 야비한 수를 쓴다든가 그런 걸 보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는 봐요.”

■일상이 정치·민주주의·공화국이다

“전 골치 아픈 건 될 수 있으면 안 보려고 해요. 뭐라 그래도 어차피 바뀌는 게 없잖아요. 힘 없는 우리는 짜증만 나니까요. 성완종 사건도 그렇고 뻔한 건데 위에서 다 덮어버리죠. 뭐 할 말 있는 사람들 보니까 다 죽더군요. 무서워요, 아주. 이게 무슨 민주공화국이에요.” 주부 김은숙씨(52)의 말엔 대다수 시민들이 품고 있는 울화가 담겼다.

대학생 이상목씨(24)는 우리가 받는 교육부터 잘못됐다고 본다. “제가 고3 때 촛불집회가 크게 일어났어요. 그때 정치에 처음 관심을 가졌는데,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제 정신이냐고. 정치를 알아선 안되는 듯이 하다가 성인이 되면 갑자기 너희의 책임과 의무라면서 관심 가지라는 게 너무 이상해요.”

여성학·평화학 연구자인 정희진씨는 “사람들이 현실정치와 일상정치, 절차적 민주주의와 일상의 민주주의를 나누고 있는데 사실은 이게 분리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일상의 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이고 현실 정치는 일종의 그림일 뿐”이라며 “근본적으로 정치의 개념을 달리해야 한다”고 짚었다. 겉보기에 민주공화국에선 법과 제도의 틀이 갖춰지고 공정한 선거가 치러진다. 그러나 취재팀을 만난 대한민국 시민들의 일상에 ‘민주공화국’의 이상은 배어 있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특집 페이지 주소 http://news.khan.co.kr/kh_storytelling/2016/republic/

■특별 취재팀 김종목 이주영 장은교 황경상 김형규 심진용 박광연 이유진 최미랑 최민지 허진무 기자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0112215005&code=940100#csidx9873793fda01d1ca52b04cadf2dc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