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명체 30억년의 ‘결정적 장면들’ | |
광합성·생식·운동·의식·죽음… 진화역사의 10가지 ‘대사건’ 들분자 차원의 생화학 지식 동원 오늘날 ‘생명 존재’의 근원 탐구 | |
한승동 기자 | |
〈생명의 도약〉 닉 레인 지음·김정은 옮김/글항아리·2만4000원 산소 없이는 우리가 당장 숨도 쉬지 못할 것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산소가 없다면 지구상엔 출렁이는 바다도 없을지 모른다. 산소가 없다면 오존도 없다. 오존층이 지구로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는 자외선을 차단하지 않으면 물은 산소와 수소로 분해된다. 산소는 산화물 형태로만 남아 대기중엔 축적되지 않을 것이며 가벼운 수소는 우주로 날아가버릴 것이다. 금성의 바다는 그렇게 날아가버렸고, 화성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지금 지구 대기의 21%를 채우고 있는 산소를 만들어낸 것은 엽록소를 지닌 생명체들이었다. 그들이 광합성을 통해 쏟아낸 산소가 흙과 바위 속에 들어 있던 철분과 바닷속 황, 대기 중의 메탄까지 산화시켰고, 남은 산소는 대기를 채웠다. 그리하여 분해된 수소마저 대기 속에서 산소와 결합해 비가 되어 내렸다. 맑고 푸른 행성 지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광합성은 물 분자에서 수소 원자를 떼어내 얻은 전자를 이산화탄소와 결합시켜 당 등 유기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생명 에너지의 통화’라는 아데노신삼인산(ATP)도 만든다. 지구상에서 물을 분리해서 광합성을 하는 방법을 알아낸 생명체는 세균, 그중에서도 남조(藍藻)세균이었다. 광합성은 꼭 물을 분해해야 하는 건 아니다. 황산이나 산화철을 분해해서 전자를 얻고 광합성을 하는 세균들도 있다. 광합성은, 결국 전자를 활용해 이산화탄소와 결합시켜 유기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게 지구상 대다수 생명활동의 토대다. 헝가리 출신 노벨상 수상자인 얼베르트 센트죄르지는 그래서 “생명이란 쉴 곳을 찾는 전자일 뿐”이라는 말을 했단다.
최소량의 에너지를 투입해 물을 분해하고 산소를 내보낸 뒤 전자를 활용할 때 남조세균이 이용하는 에너지는 태양광선이다. 남조세균의 초록색 색소인 엽록소가 떼어낸 전자와 이산화탄소를 이른바 ‘제트(Z)체제’를 통해 결합시킬 때 전자의 에너지 준위를 높여 결합을 성사시키는 게 태양광선의 역할이다. 그렇게 해서 당이 만들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에너지의 일부가 방출돼 세포의 동력으로 쓰이는 아데노신삼인산도 만들어진다. 인간이 이 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면 거의 무진장한 무공해 에너지를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엽록소뿐이다. 엽록소는 그렇게 해서 산소를 만들어내고(따라서 산소는 광합성의 노폐물이다. 지구 역사 초기에 산소는 생명체들에 치명적인 독가스이기도 했다) 유기물을 만들어내는데,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동식물 절대다수가 바로 이 메커니즘에 삶을 의존하고 있다.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생명체들이 있지만 그 에너지 이용효율은 산소호흡 생명체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차례대로 잡아먹는 생태계 먹이사슬에서 각 단계마다 에너지 손실이 일어나는데, 그 결과 산소호흡 생명체들은 포획된 에너지의 40% 정도를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산소가 아닌 철이나 황, 메탄 등을 이용한 호흡의 에너지 효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산소호흡을 하지 않을 때의 먹이사슬은 두 단계만 거쳐도 처음 투입 에너지의 1%밖에 남지 않지만 산소호흡은 여섯 단계를 거쳐야 비슷한 수준이 된다. 최종 포식자에 이르는 먹이사슬 단계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생명체들이 풍성하게 번성한다는 얘기다. 2009년 초 <미토콘드리아>(뿌리와이파리)라는 책에서 20억년 전 독립적인 발효세균이 메탄 생성 고세포 몸속에 들어감으로써 진핵세포의 등장이라는 지구 생명 역사상의 대이변이 시작됐다고 설파했던 영국 생화학자 닉 레인이 새 책 <생명의 도약>(Life Ascending- The Ten Great Inventions of Evolution)에서 그렇게 썼다. 닉 레인은 이번엔 진핵세포의 출현을 포함해 생명의 기원, 유전체(DNA), 광합성, 성(性), 운동, 시각, 온혈성, 의식, 죽음 등 모두 10가지의 주제로 지구 생명 진화역사를 다룬다. 모두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있게 됐는지”, 그 결정적 계기가 된 진화상의 대사건들에 대한 얘기다. 분자 차원의 생화학 지식을 동원해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설득력을 높였으나, 일반인들에겐 쉽지 않을 부분도 있다. 광합성과 산소의 대기축적은 눈(시력)의 진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눈의 발달에는 큰 수정체와 넓은 망막, 그리고 그것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해석해낼 뇌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고도로 진화하려면 몸체의 크기라는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큰 동물일수록 눈의 진화에도 유리한 것이다. 몸체의 대형화는 그것을 받쳐줄 먹이와 그 먹이를 길러내고 호흡을 통해 에너지를 얻어낼 수 있게 해주는 존재, 산소가 대기 중에 일정 비율 이상 축적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약 5억5000만년 전 캄브리아기 시작 무렵의 화석기록에 갑자기 몸집 큰 동물들이 출현해 번성한 것도 대기 중의 산소량 증가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그것은 또 눈의 진화와도 서로 맞물려 있다. 대기 중 산소 농축으로 대형동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것은 눈의 진화를 도왔으며, 눈의 진화는 다시 캄브리아 생물 빅뱅에 불을 붙인, “지구 생명 역사 전체에서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사건”이었다. 레인은 모든 동물의 눈에 ‘로돕신’이라는 빛을 감지하는 단백질이 공통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며, 이는 조상이 같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최초의 눈이 단 한번의 진화를 거쳐 출현했단다. 이는 지금까지의 생물 진화가 세균과 박테리아의 합체를 통한 진핵세포 등장이라는 20억년 전의 기적적인 한 사건에서 비롯됐다는 그의 얘기를 떠올리게 한다. 단 한번 만에 진화했다는 건 다른 진화경로를 거치지 않았고 지금의 생명체가 모두 그 한 사건의 파생물이라는 얘기다. 레인은 생명이 어두운 바다 밑 대륙이 생성되는 해령의,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는 열수분출공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유황과 황화수소 기체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열수분출공 인근에는 엄청난 수의 눈 없는 새우들과 입도 항문도 없는 거대한 관벌레 등이 무리 지어 살고 있다. 그들은 지상이나 물속의 생물들이 내려가 그 환경에 적응한 것이 아니다. 레인은 여러 논거들을 들이대며 바로 거기서 지구 생명체가 탄생했다고 얘기한다. 유전체(DNA, RNA)도 거기서 합성됐다고 본다. 황화수소 기체에서 뽑아낸 수소를 이산화탄소와 결합시켜 유기물질을 만들어내는 황세균. 생명은 열수분출공의 무기물에서 나온 그런 세균 형태로 시작됐다. 녹색식물 엽록소도 거기서 출발해 다른 세균과의 결합, 먹이사슬을 통해 진화한 남조세균에서 비롯됐다. 성에 집착하는 생명체의 본성도 진화의 산물이다. 암수로 나뉘어 다양한 조합을 만들어내는 유성생식이 무성생식보다 돌연변이로 인한 이익을 극대화하고 위험을 최소화하는 데 유리하며, 기생충과의 싸움에서도 절대 유리하다. 운동, 온혈성, 의식, 그리고 죽음까지도 진화의 산물이자 진화를 폭발적으로 가속시켜 지금의 지구와 우리를 만든 사건들이라고 레인은 설명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왜 ‘위험한 짝짓기’를 감수하는가? 돌연변이 감소·잡종 강세 등 지어낸 얘기일 가능성이 높지만, 한 파티에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를 만난 예쁜 여배우가 제안을 했다. 둘이 아이를 낳으면 자신의 미모와 쇼의 좋은 머리의 합작품이 나올 테니 얼마나 좋겠느냐고. 쇼가 뭐라 대꾸했을지는 다들 아는 얘기일 텐데, 닉 레인은 왜 대다수 생명체들이 성에 탐닉하는지에 대한 얘기를 그 일화로 시작한다. 만일 그 여배우의 미모와 쇼의 지능이 이상적으로 조합된 2세가 태어났다고 치고, 사람이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무성생식으로 그 우수한 유전자를 계속 그대로 복제해가면 좋지 않을까. 유성생식을 하면 쇼의 말대로 그의 못생긴 얼굴과 그 여배우의 둔한 지능만 발현된 합작품을 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유성생식의 단점은 수두룩하다. 매독 등 치명적인 성병이나 에이즈에도 걸릴 수 있고 데이트와 결혼 비용도 만만찮게 지불해야 하며, 이혼 부담까지 안게 될지 모른다.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려는 이기적 기생유전자들이 득실대게 만들어 전체를 망가뜨리고, 급기야 살인이나 전쟁까지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식물도 꽃을 피우고 꿀샘으로 벌과 새들을 불러들이는 비용을 들여야 하는 등 불안정한 외부 힘에 번식을 의존해야 한다. 자가번식의 무성생식이라면 절반의 비용에다 마음에 드는 후손을 마음대로 불려갈 수 있을 텐데. 그런데도 왜 거의 모든 생물들이 유성생식을 택할까? 레인은 먼저 지금 지구상에 현존하는 무성생식 클론(복제)들은 단세포생물인 담륜충 등 극소수를 빼고는 거의 모두 수천년 전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는 무성생식이 수천년 전에야 시작됐다는 뜻이 아니라 살아있는 클론의 역사가 그것밖에 안 된다는 얘기다. 무성생식은 태곳적부터 이어져 왔으나 무성생식을 택한 종의 후손들은 오래 살아남은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 절멸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유성생식의 장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암수로 분화해 짝을 짓는 유성생식은 여러 다른 계통들과의 교배를 통한 ‘잡종 강세’의 이점을 누린다. 혈우병 등 근친교배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감수분열을 통한 다양한 유전자 조합은 거의 일상적인 돌연변이의 위험으로부터 종을 지켜준다. 무성생식으로 번식하는 집단에선 예컨대 유익한 돌연변이 두 가지가 나타났을 때, 이를 종 내에 널리 퍼뜨리기가 몹시 어렵다. 거꾸로 악성 돌연변이가 등장했을 때 ‘인종청소’라도 하지 않는 한 제거하기도 어렵다. 유성생식은 그 반대다. 이럴 경우 무성생식은 멸종으로 인도하는 악마의 톱니바퀴가 되고 유성생식은 고장난 곳을 수리하고 좋은 점을 살리는 착한 정비사가 된다. 기생충 감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성만이 돌연변이 등으로 인한 파멸을 막고 복잡하고 고등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암수의 유혹과 환희와 탄식이 없는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 한승동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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