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삶도 문학도 ‘부드러운 직선’ 같기를 꿈꿨습니다 | |
고명섭 기자 | |
한보사태가 터지고 외환위기가 몰아닥치면서 나라는 거덜나기 시작했습니다. 김영삼 정부가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걸 안 국민들은 1997년 선거에서 국민의 정부를 선택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정권은 교체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제금융 사태는 이제까지 찾아온 어떤 위기보다도 충격파가 큰 시련의 시작이었습니다. 수많은 개인의 삶을 부도냈을 뿐만 아니라 87년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새로운 시련이었습니다. 사회를 민주화하는 일에만 전력투구해 온 민주화운동 세력은 경제를 민주화하는 일에는 전문성이 부족했습니다. 경제를 자유화하는 시장주의자들에게 맡겨놓고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하이에크만을 신봉하는 경제 관료들이 나라 경제를 신자유주의로 끌고 가기 좋은 세월이 온 것입니다. 산 너머에는 더 큰 산맥이 길을 막고 있었고, 겨우 강을 빠져나오니 더 큰 파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해직 생활 구년을 넘겼을 때 교원들의 노조가 법적인정을 받고 합법화되었습니다. 고난 받으며 교육운동을 해온 교사들은 감격스러워했고, 10만 명 조합원 시대를 열자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겸손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년 유배생활을 했던 추사 김정희가 생각났습니다. 추사는 젊어서 탄탄대로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호조참판이 되고 자신도 사마시험에 합격하면서 부친을 따라 연경에 가서 중국 학자들과 교류하며 국제적인 학자로 성장하였습니다. 청나라 석학 옹방강으로부터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는 칭찬을 들었고, 과거시험 대과에 합격하며 출셋길을 달렸습니다. 그러나 동지부사로서 꿈에 그리던 연경길에 오르기 직전 제주도로 귀양을 갑니다. 부친이 정치적 격변에 휘말리게 된 때문입니다. 제주도로 귀양을 가는 길에 추사는 해남 대흥사엘 들렀습니다. 그때 대흥사 대웅보전의 현판 글씨를 보고는 저런 글씨를 버젓이 걸어 놓을 수 있느냐며 글씨를 직접 써주고는 바꿔 달게 했습니다. 그 현판 글씨는 동국진체의 대가 이광사가 쓴 것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추사는 햇수로 9년의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동안 부인이 죽고 귀양지에서 회갑을 맞았습니다. 외로움과 억울함과 쓸쓸함을 추사는 글씨를 쓰며 달랬습니다. 63세의 나이로 귀양지에서 풀려나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돌아오는 길 추사는 다시 대흥사에 들렀습니다. 그러고는 대웅보전의 자기 글씨를 떼어내고 이광사의 현판을 달게 했습니다.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 추사는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겸손해지면서 추사의 글씨는 더욱 깊어진 것이지요. 소년기의 시련을 딛고 청장년기에 승승장구하다 생의 후반기에 몰락하여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는데 거기서 비로소 깊어지고 겸손해져 자기 예술의 완성을 이룩해 낸 것이지요. 혹시 내가 그동안 오만하여 겁 없이 떼어낸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내가 다시 걸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한 계단 내려서서 낮은 자세로 살아야 하고 겸허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직 9년 교원노조가 합법화됐습니다 세상은 문인에게 참 많은 걸 요구합니다. 잘나갈 때 겸손해야 한다고 하고 좋은 일이 생길 때 자세를 낮추라고 합니다. 문학의 외길에 빠져 있으면 문학주의자라고 하고, 사회 현실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으면 문학이 사회운동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문학성과 운동성, 예술성과 역사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문합니다. 진정성, 치열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문학의 품격과 위의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잘못된 정치현실에 분노하지 않으면 역사의식이 부족하다고 하고, 분노하는 목소리가 너무 크면 거칠다고 질타합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면 시가 너무 무겁다고 하고, 경쾌한 이야기를 다루면 가벼워졌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입니다. 저항하면 또 그 소리 하느냐고 하고, 야유하고 풍자하면 경박해졌다고 합니다. 시가 슬퍼 보이면 애이불비(哀而不悲)해야 한다고 하고, 외롭게 있으면 화이부동(和而不同)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문학도 삶도 희이불경(喜而不輕), 노이불분(怒而不憤), 애이불음(愛而不淫), 낙이불천(樂而不淺)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쁘되 가볍지 않고, 분노하되 흥분하고 날뛰지 않으며,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되 음란하지 않고, 즐거움을 주되 천박하지 않아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모순되고 상반된 요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느 한쪽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할 때도 많은데 상반된 요구들을 다 녹여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시인들은 그 상반된 요구를 끌어안고 뒹굴고 충돌합니다. 그러다 그 충돌하는 것들의 길항 속에서 시를 만나기도 합니다.
저 자신도 유연해지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제게 원칙만 고집하지 말고 부드러워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드러워져서 쉽게 타협하면 바로 질타합니다. 부드러운 자세를 지니면서도 원칙을 잃지 않는 일은 쉬운 게 아닙니다. 유연한 태도로 살면서 쉽게 타협하지 않는 곧은 마음을 갖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직선’이란 말도 모순된 말입니다. 부드러운 선은 곡선이요, 직선은 곧은 선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 고건축의 추녀를 표현한 말입니다. 우리나라 고건축의 백미는 멋들어지게 휘어져 올라간 추녀에 있습니다. 그런데 추녀의 절묘한 곡선은 직선의 목재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휘어진 나무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곧은 나무들이 촘촘하게 어깨를 맞대고 이어져 이루어진 것입니다. 굽은 나무로는 그런 선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부석사 무량수전도 그렇습니다. 건물 귀퉁이 쪽 기둥을 가운데보다 높게 처리했고, 건물의 앞면을 마치 오목거울처럼 휘어져 보이게 한 곡선의 율동이 건축미학의 백미를 만들어 냅니다. 직선의 목재로 빚은 곡선의 건축미학은 모순된 요구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기 삶의 원칙을 지켜 가면서도 유연하고 부드러운 인격을 지닌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인격도 ‘부드러운 직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잘 지어진 집이 뒷산의 능선과도 조화를 이루듯 그런 분들도 그분을 둘러싼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립니다. 잘 지어진 집은 자연 속에 들어 있으면서 자연에 멋스러움을 더합니다. 자연과 하나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직선’의 인격을 지닌 분도 그분의 배경과 잘 어울리는 걸 봅니다. 유연하다는 것은 변화의 실체를 바로 알고 슬기롭게 대처한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부도와 민주적 정권 교체와 전교조의 합법화와 십 년 만의 복직을 앞에 놓고 저는 어떻게 원칙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유연하고 슬기롭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유연하다는 것이 비굴한 모습으로 허리를 굽히는 일이거나 지조도 버리고 이리저리 양지를 찾아 몸을 옮기는 행동을 정당화하는 말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연암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지켜온 삶의 원칙을 지키되 구태의연하지 말고, 새로이 거듭나되 도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삶도 문학도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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