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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미워졌다 / 하성란

이윤진이카루스 2011. 3. 26. 11:13

[삶의 창] 나는 내가 미워졌다 / 하성란
하성란 소설가
한겨레
» 하성란 소설가
이삼십대를 함께 보낸 친구를 얼마 전 창졸간에 떠나보냈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그의 마지막 길은 가족과 절친했던 친구 셋이 함께했다. 십수년 전 한 일간지의 신춘문예로 등단을 했지만 그에게는 단 한 권의 시집도 없었다. 어느 날 그가 난데없이 두문불출할 때만 해도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에 답도 하지 않았다. 끈질긴 구애에 점점 지쳐 우리가 연락하는 일도 뜸해졌다. 그래도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사이 그의 병이 그렇게 깊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다. 문득문득 그의 안부가 궁금해지고 보고 싶었지만 하루하루 밀린 일들과 육아, 가사의 피로함에 내일 일로 미루고 말았다.

오래전 우리는 한 문예지에 같이 글을 실었다. 통상 시는 두 편을 싣게 되어 있는데 그는 한 편만 편집부에 건넸다. 그가 다른 한 편의 시를 붙들고 얼마나 고심을 했는지는 그의 퉁퉁 부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시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 엄격했다. 그의 시를 되찾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양심에 꺼리는 일은 질색했다. 수없이 쏟아지는 시들을 보며 안타까웠던 우리는 그의 지나친 완벽주의를 나무라기도 했다. 누군가는 게으른 것 아니냐고 꼬집기도 했다. 그가 발표하는 시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의 시에 관심을 보이던 출판사들도 자연스럽게 청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그의 시를 한 편도 읽을 수 없게 되었고 그에게 “시 안 써?”라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밤새워 책을 읽었다. 그의 집에는 그가 읽은 책 수천권이 그가 누웠던 자리의 사방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생계를 위해 낮이면 교정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중에는 받아야 할 교정료도 점점 밀린 모양이었다.

대학 시절 그가 학보에 발표했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모시나비 한 마리 길을 건너는’. 왜 하필 모시나비였을까. 곤충도감에서 모시나비를 찾아 들여다본다. 흰 날개를 가진 나비는 요란스럽지 않고 소박하다. 생전의 그처럼 단정하다. 그가 왜 그냥 나비라고 뭉뚱그려 말하지 않았는지, 왜 줄나비도 아니고 멧노랑나비도 아니었는지 알 듯하다. 이제 모시나비 한 마리 길을 건너는 오월이 온다. 도시에서는 개체수가 급감했다고 하지만 오월이 되면 우연히 한 마리쯤 눈에 띄지 않을까. 그가 떠나는 날은 모처럼 화창했고 두터운 겉옷 속으로 땀이 밸 정도로 훈풍이 불었다.

느닷없는 그의 죽음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이웃나라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천재가 인재로 이어졌다. 지구 한쪽에서는 강력한 진압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죽는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렇게 수많은 죽음들 속에 묻혔다. 시시각각 속보를 전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한편으로는 화창한 봄에 돋보이는 화장법과 옷 입는 법이 소개된다. 연예인들의 열애 기사가 뜬다. 살아 있는 누군가가 누군가의 치부를 낱낱이 까발리고 누군가는 소문을 재생산해낸다. 우리의 관심은 소문 속의 주인공이 들고 나온 명품백에 집중된다. 고작 백이다.

생전에 바랐던 것처럼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갔다. 그리고 단짝 중 셋은 살아 있다. 한 사람은 중국 출장길에 오르고 한 사람은 지진을 피해 서울로 건너와 미뤄두었던 수술을 받았다. 남은 한 사람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 앞 길게 늘어선 줄에 가 선다. “적당히 타협할 수 없어?” “누군 그러고 싶어 그러는 줄 알아?” 모지락스러운 그 말을 그에게 했던 게 나였던가, 아니면 우리 셋 모두였던가.

살아남은 나는 눈치보며 적당히 타협했던 것에 대해, 다른 이보다 운이 좋았던 날들에 대해 생각한다.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떠오른다. 어디선가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라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를 듣는다. 살아남은 자의 비애와 함께 나는 내가 미워졌다. 정말 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