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칸트 전집 번역을 놓고 최근 칸트학회와 백종현이 벌이는 논쟁을 그리 탐탁지 않은 마음으로 지켜보던 차에 며칠 전 한겨레 온라인판에 게재된 김상봉의 기고문을 읽었다.
학문적 논쟁은 늘 기대해온 바며 뜨겁게 달아오를수록 더욱 환영한다. 그러나 양편의 논쟁은 철학의 본령과는 무관하게 번역서와 특정 번역어 몇 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권위의 힘겨루기로 보여 생산적일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transzendental(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옮기는 백종현의 번역을 김상봉이 “심각한 왜곡”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서, 필자도 끼어들어 한마디 보태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안만큼은 충분히 철학적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전문용어의 번역과 관련해서 필자는 백종현의 편이며 김상봉의 평가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다른 한편, 필자는 번역서가 많아질수록 좋다고 보고 학회가 주도한 번역서도 얼마든지 환영한다는 점에서 김상봉과 뜻을 같이하는데, 이 부분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김상봉도 인정하듯이, ‘transzendental’의 뜻은 ‘초월적’이다. 그는 굳이 라틴어를 들먹이면서 “‘트란스첸텐탈’이라는 라틴어의 원래 뜻이 초월적이라는 건” 자신도 안다고 하지만, 라틴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독일어에서도 그렇다. 독일어 ‘transzendental’은 칸트의 시대에나 지금에나 ‘초월적’을 뜻한다. 혹시 김상봉이 이 엄연한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꼴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철학적 해석을 바탕에 깔지 않는다면, ‘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옮기는 것이 도리어 심각한 왜곡이다.
기고문에서 김상봉은 과거 라틴어의 뜻이 ‘초월적’이라고 해서 칸트철학에서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옮겨야 한다면,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유래한 영어 ‘idea’, 독일어 ‘Idee’도 ‘형상’으로 번역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이 물음으로 그는 ‘트란스첸덴탈’을 칸트철학의 취지에 맞게 ‘선험적’으로 옮기자는 자신의 입장을 옹호한다.
그러나 궁색한 논리다. 번역에서 아무 탈도 일으키지 않는 ‘idea’와 ‘Idee’를 왜 끌어들이나? 로크의 ‘idea’와 헤겔의 ‘Idee’는 당대 영어와 독일어의 일반적 어법에 따라서 ‘관념’과 ‘이념’으로 번역되고, 이것은 나무랄 데 없는 번역이다. 이 단어들이 플라톤의 ‘이데아’와 관련이 있으니까 ‘형상’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단어들을 번역할 때 굳이 플라톤의 ‘이데아’를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로크와 헤겔은 당대 언어환경에 어울리게 그 단어들을 사용했고, 우리는 라틴어니 희랍어니 들먹일 필요 없이 그 언어환경에 맞게 그 단어들을 번역하면 된다.
하지만 칸트가 사용하는 ‘transzendental’에서는 확실히 문제가 발생한다. 그가 이 단어를 당대와 현재의 독일어 환경에서 통용되는 뜻과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선험적’이라는 번역어를 옹호하는 분들이 잘 지적하듯이, 칸트의 ‘transzendental’은 일반적인 독일어 ‘transzendental’과 뜻이 다르다. 그러니 그냥 ‘초월적’으로 번역하면 안 되고, 자상한 해석이 가미된 번역어인 ‘선험적’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그분들의 견해다. 하지만 필자는 이 견해에 반발한다. 칸트의 ‘transzendental’이 독특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일반적 번역어 ‘초월적’을 버리고 칸트 맞춤형 번역어 ‘선험적’을 택해야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일반적 번역어를 택하고 칸트의 독특한 어법을 그 독특함과 함께 음미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김상봉은 말한다.
“칸트 이전의 철학이 신과 영혼 같은 초월적 존재자들에 대한 사변인 데 비해, 칸트는 그런 것을 파괴하고 철저히 내재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한 철학자다. 그런데 백 교수는 ‘칸트 철학은 초월철학’이라니, 대다수 칸트 학자들은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었다.”
필자는 “철저히 내재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한 철학자”라는 김상봉의 해석에 부분적으로만 동의한다. 왜냐하면 칸트는 신과 영혼 등에 관한 전통적 논의를 시대의 요구에 맞게 재구성한 철학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파괴는 일방적인 파괴가 아니라 재건이기도 하다. 칸트의 위대함이 거기에 있다.
김상봉은 “대다수 칸트 학자들”을 들먹이는데, 덕분에 필자는 대다수에서 벗어난 예외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런 예외가 적지 않다. ‘칸트라는 그릇이 과거 형이상학의 논의를 모두 담을 수 있을 만큼 큰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렇다’라고 답할 칸트 전문가들은 수두룩하다. 그들은 “칸트 철학은 초월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이다”라는, 칸트 본인에게서 유래한 말을 그 어법의 독특함까지 충분히 음미하면서 수긍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칸트철학의 해석에 관한 이야기니, 이 정도로 줄이자. 문제는 번역어 선택이다. 필자의 논지는 간단명료하다. 칸트가 ‘transzendental’이라고 썼다. 그러니 우리는 ‘초월적’으로 번역하자! 칸트는 자신의 어법이 독특하다는 것을 잘 알았고, 그래서 그 어법을 자상하게 설명했다. 그러니 우리도 칸트의 독특한 어법을 그대로 살리면서 칸트처럼 설명을 덧붙이자!
‘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번역하면, 칸트의 독특한 어법은 완전히 은폐된다. ‘선험적’을 옹호하는 분들은 그렇게 번역해야 칸트의 취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누구도 칸트의 입을 막고 자기가 대신 말함으로써 칸트의 취지를 전달할 권리는 없다.
비유하건대 ‘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번역하는 것은 등산로 입구에 커다란 안내판을 설치하여 산을 가려버리는 것과 같다. 왜 그런 도발을 할까? 칸트의 산을 보는 것보다 번역자 본인의 안내판을 보는 편이 더 유익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일까?
굳이 따지자면, ‘선험적’이라는 번역어가 칸트가 사용하는 ‘transzendental’의 의미를 충실히 받아내는 것도 아니다. 그 의미는 ‘경험의 가능 조건에 관한’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초월철학이란 ‘경험의 가능 조건을 다루는 철학’이다. 과연 ‘선험적(경험에 앞서는)’이라는 단어가 ‘경험의 가능 조건에 관한’이라는 뜻을 충실히 표현할까? ‘앞선다’는 말과 ‘가능성의 조건이다’라는 말이 맥이 닿기는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앞선다’는 것은 시간적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순서를 말한다는 설명이 보충되어야 한다. 요컨대 ‘선험적’이라는 번역어는 칸트가 ‘transzendental’을 사용할 때의 취지, 곧 ‘경험의 가능 조건에 관한’이라는 뜻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물론 모든 번역어는 나름의 방식으로 불완전하기 마련이다. 등산로 안내판이 산보다 불완전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안내판을 설치하여 산을 가려버리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할 것이다. 칸트의 취지에 맞게 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필자가 보기에 ‘칸트 맞춤형 번역’을 옹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무릇 맞춤형 번역에 반대한다. 왜 저자의 독특한 언어 사용을 은폐하려 하는가? 왜 독자들의 소화 능력을 불신하는가?
김상봉은 “평균적인 한국인”이 ‘초월적’이라는 번역어를 “뭔가 현세적 차원이나 내재적인 지평을 뛰어넘는 의미”로 이해하여 칸트철학을 오해할 것을 우려한다. 그렇다. 그런 오해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확실히 해두자. 애당초 그런 오해를 유발한 장본인이 누구인가? 바로 칸트 자신이다. 어쩌면 칸트는 ‘평균적인 독일인’이 자신의 철학에 접근하면서 일단 그 오해를 품었다가 이내 자신의 설명을 읽으면서 깨기를 바랐을 것이다. 김상봉이 우려하는 오해도 칸트가 의도한 바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칸트의 진정한 의도는 독자들이 그렇게 오해를 품고 깨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이야기되어온 ‘초월’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 해석이 옳다면, 번역자는 한국어 사용자들 역시 그렇게 오해를 품고 깨는 과정을 거치도록 유도해야 마땅하다. 물론 이 해석이 그릇되다면, 바꿔 말해 칸트의 독특한 어법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실수여서 교정해야 마땅하다면, 번역자는 칸트 맞춤형 번역어로 ‘선험적’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느 해석이 옳은지는 따져 봐야 할 일일뿐더러, 엄연한 저자의 어법을 해석자가 나서서 근본적으로 교정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끝내 의문스럽다.
2008년에 필자는 셸링의 <초월적 관념론 체계>(System des transzendentalen Idealismus)를 번역 출판하면서 주석에서 ‘transzendental’의 번역에 관하여 꽤 길게 언급했다. 그 언급을 2절로 덧붙인다. 요점은 ‘칸트 맞춤형 번역’, 나아가 무릇 ‘맞춤형 번역’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 땅의 독자들도 칸트의 독특한 어법을 스스로 알아서 소화할 수 있지 않은가! 서양문물을 처음 접한 극소수 엘리트가 어설프게 이해한 칸트철학을 잘게 부수고 맞춤형으로 요리하여 우매한 민중에게 떠먹이던 시절은 벌써 옛날에 지나지 않았는가 말이다.
2.
(2절은 셸링, 전대호 역, <초월적 관념론 체계> 2008 이제이북스, 332~333쪽에서 인용)
초월철학은 ‘Transzendental-Philosophie’의 번역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독일어를 ‘선험철학’으로 옮긴다. 어느 번역어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마치 제사상에 대추를 더 오른쪽에 놓아야 하는지 아니면 감을 더 오른쪽에 놓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처럼 비생산적이기 십상이라서 피해야 할 것이나, 생산적일 수도 있을 만한 제안은 던져도 좋을 것이다.
일반적인 맥락에서 ‘transzendental’이 ‘초월적’을 의미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얄궂게도 거의 고유명사화한 ‘Trnaszendental-Philosophie’의 원조 칸트는 ‘transzendental’을 독특한 의미로 썼다. 그러면서 자신의 언어 사용이 독특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자상히 설명했다. 그에게 ‘transzendental’이라는 술어는 ‘경험의 가능 조건에 관한’이라는 의미라고 말이다.
일부 학자들이 선호하는 ‘선험철학’이라는 번역어는 분명 이 뜻풀이에 의거할 것이다. 요컨대 꽤 오래전에 ‘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정착시킨 선배 철학자들은 아주 자상한 번역을 한 셈이다. 칸트의 ‘Transzendental-Philosophie’를 직역하여 “초월철학”이라고 부른다면 의미상으로 칸트의 뜻에 반하여 혼란만 더 가중될 테니 그의 뜻에 맞게 ‘선험철학’이라고 번역하자, 하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모든 맞춤형 번역의 기저에는 그런 세심한 배려가 있는 것 같다. 독일어나 철학에 접근할 수 있는 인구가 극히 드물었던 시절에는 그게 옳았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라. ‘transzendental’도 모르고 ‘a priori’도 모르고 ‘초월적’도 모르고 ‘선험적’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원래 transzendental은 초월적이라는 뜻인데, 특이하게 칸트는 a priori 즉 선험적이라는 뜻으로 썼으므로 Transzendental-Philosophie를 선험철학으로 번역하겠습니다, 라고 설명한다면, 누가 알아먹겠는가! 그냥 “칸트의 철학은 선험철학입니다”하고 단박에 가르치는 게 옳았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땅의 평균적인 지식인도 ‘transzendental’과 ‘a priori’와 ‘초월적’과 ‘선험적’을 함께 생각할 능력을 갖췄다. 이제는 위의 장황한 설명을 충분히 알아먹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transzendental’을 ‘초월적’이라는 원래 위치에 갖다놓아도 되지 않을까? 칸트의 철학을 칸트처럼 ‘초월철학’이라고 부르고 칸트처럼 위의 설명을 덧붙인다면, 옛 선배들이 우려한 혼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왜 칸트는 무리해서 그런 독특한 언어 사용을 강행했을까?”라는 매우 생산적인 질문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칸트는, 경험의 가능 조건을 향한 도약은 또 하나의 초월이며, 그 새로운 초월로 과거에 논의된 모든 철학적 주제들을 다룰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런 식으로 생각을 펼친다면, 성 토마스의 초월과 칸트의 초월을 비교하려는 욕구도 생기고 심지어 우리의 초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은 장한 마음도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자상한 선배들의 맞춤형 번역인 ‘선험철학’은 이 모든 흥미로운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선험철학’으로 부르든 ‘초월철학’으로 부르든, 중요한 것은 흥미로운 가능성들을 열어나가는 마음가짐이다.
3.
칸트 맞춤형 번역, 나아가 무릇 저자 맞춤형 번역은 바람직할까? 번역은 기본적으로 당대의 일반적인 어법에 기초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음악에서 연주자가 그러하듯이 번역자는 저자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저자의 독특한 어법과 거기에 담겼을 가능성이 있는 암묵적 의도를 번역자가 나서서 원천적으로 도려내는 것은 너무 심한 해석, 사실상 왜곡이 아닐까? 필자는 일제시대 이래로 이 땅에서 통용되어온 칸트 번역, 곧 칸트의 ‘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옮기는 번역이 그런 심한 해석이며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왜곡이라고 본다.
김상봉의 지적대로 그 오랜 관행에 반기를 든 것은 백종현이다. 백종현의 번역 방법론과 칸트 해석에 대해서는 필자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칸트의 ‘transzendental’ 번역에 대해서만큼은, 그의 취지와 상관없이, 한 명의 번역가로서 또한 철학자로서 필자는 이제껏 설명한 나름의 이유에서 백종현의 선택을 옹호한다.
30년 전에 백종현이 과감히 제안한 번역어 ‘초월적’을 다시 ‘선험적’으로 되돌리는 것은 명백히 퇴행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 철학계의 실상이라면, 어쩌겠는가, 받아들일 수밖에. 그러나 최소한 퇴행인 줄 알면서 퇴행하자. 반드시 필요한 퇴행인지, 혹시 일제시대 이래로 극소수 엘리트 지식인의 입에 붙어 대물림된 ‘선험적’이라는 번역어가 지금도 그저 익숙하고 편해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지 따져보면서 퇴행하자.
※전대호는 서울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후 칸트의 공간론에 관한 논문으로 같은 대학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독일학술교류처의 장학금으로 쾰른에서 주로 헤겔 철학을 공부한 뒤, 다시 서울대 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대 초반에 신춘문예로 등단해 두 권의 시집을 냈으며, 다른 저서로는 <철학은 뿔이다>(2016)가 있다.
현재는 주로 과학과 철학 분야의 영어 및 독일어 책 번역에 주력하고 있으며, <위대한 설계>, <로지코믹스>, <기억을 찾아서>, <경이의 시대>, <생명이란 무엇인가>, <초월적 관념론 체계>, <아인슈타인의 베일>, <푸앵카레의 추측>, <데미안>, <미하엘 콜하스의 민란>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