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ant

이마누엘 칸트: 계몽주의 철학자

이윤진이카루스 2020. 11. 12. 12:20

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II 부 역사에 관하여, 9장 이마누엘 칸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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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누엘 칸트: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 사망 150주년을 추념하는 강좌

 

 

 

150년 전 프러시아의 지방 마을인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에서 80세 생애를 보내고, 이마누엘 칸트가 사망했다. 여러 해 동안 그의 은퇴가 완료되었고 그의 친구들은 조용한 장례식을 계획했다. 그러나 어느 기술자의 이 아들은 왕처럼 매장되었다. 그의 사망 소문이 마을을 통하여 퍼졌을 때 사람들은 그를 보겠다고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장례식 날 그 마을의 삶은 멈추었다. 모든 교회들 종이 울리는 가운데 관에는 수 천 명이 뒤따랐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이와 같은 일은 이전에 발생한 적이 없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대중의 감정이 이렇게 놀랍게 고조된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위대한 철학자로서 그리고 훌륭한 사람으로서 칸트의 명성에 기인하기만 하는가? 내가 보기에 그것에는 이보다 더 많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1804년 절대군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치하에서 칸트를 위하여 울린 저 종소리들은 미국과 프랑스 혁명의 반향을 1776년과 1789년의 이념들을 지녔다고 나는 제안한다. 그의 조국에게 칸트는 이 이념들의 화신 되었다고 나는 제안한다. 독일인들은 인권에 관한, 법 앞에서의 평등에 관한, 세계시민 정신에 관한, 지구상의 평화에 관한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지식을 통한 해방에 관한 스승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I. 칸트와 계몽주의

 

이 이념들 대부분은, 1733년에 출판된 저서인 볼테르의 영국민에 관한 서

 

영어 원문은 저자가 작성함.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 5판본, 루틀리쥐 출판사, 런던, 1989년 참조.

 

(Letters Concerning the English Nation)을 통하여 영국에서 유럽대륙에 도달했다. 이 저서에서 볼테르는 영국의 입헌정부와 유럽대륙의 절대왕정을 대비시킨다; 로마가톨릭의 태도와 영국의 종교적 관용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뉴튼의 우주론의 그리고 로크의 분석적 경험론의 설명력을 데카르트의 독단론과 대비시킨다. 볼테르의 저서는 불태워졌다; 그러나 그 저서의 출판은 한 가지 철학적 운동의 그 운동의 지성적 공격성이라는 고유한 분위기가 영국에서는 이해되지 않은 운동인데 영국에서는 그런 운동에 관한 계기가 없었다 시작을 표시한다.

칸트 사망 후 6년 만에 동일한 이 영국의 이념들은, 영국인들에게 얄팍하고 허장성세적인 지성주의(intellectualism)’로서 제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계몽주의라는 영어 단어는 당시 볼테르에 의하여 시작된 운동을 지칭하는 데 이용되었는데 아직도 얄팍함과 허장성세의 어감으로 뒤덮여 있다; 이것은, 적어도,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이다. 내가 계몽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런 어감이 의도된다는 것을 내가 부언할 필요가 없다.

칸트는 계몽주의를 신뢰했다. 칸트는 최후로 계몽주의를 옹호했던 훌륭한 사람이었다. 내가 칸트를 계몽주의 옹호자로서 보는 반면, 그는 계몽주의를 파괴한 학파의 피히테, 쉘링(Schelling), 헤겔의 낭만주의 학파의 설립자로소 흔히 간주된다. 이 두 가지 해석들을 양립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피히테, 그리고 나중에 헤겔은 칸트를 자신들 학파의 설립자로서 이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칸트는 오래 살아서a 피히테의 집요한 접근을 배척했는데 피히테는 자신이 칸트의 후계자이자 계승자라고 선언했다. 너무나 알려진 바가 없는 피히테에 관한 공개적 선언(A Public Declaration Concerning Fichte)에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친구들로부터 보호하시기를...이유인즉 호의라는 언어로 말하는 반면 우리의 파멸을 목적으로 기획하고 있는 기만적이고 불충스러운 소위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와 감상적인 열정과 몽상(Schwärmerei)에 대한 이 세계-시민인 칸트의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시민이 민족주의적인 낭만파를 돕도록 성공적으로 억지로 끌어들여진 것은 그가 더 이상 항의할 수 없었던 때인 칸트가 사망한 후일뿐이었다. 그러나 칸트 자신이 계몽주의의 개념을 어떻게 기술하는지 살펴보자:

 

a 역주: ‘오래 살아서의 원어 표현은 lived long enough인데 박영태 번역은 생전에이다.

 

계몽주의는 사람을 스스로-부과한 보호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외부의

지도가 없이 자기 자신의 지성을 이용하지 못하는 상태로부터. 그런 보호상태가 지성의 결여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도움 없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용기나 각오의 결여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런 상태를 스스로-부과한이라 고 부른다. Sapere aude! 당신 자신의 지성을 과감하게 사용하라! 이것이 계몽주 의의 구호이다.

 

칸트는 여기서 매우 개인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경력의 한 부분이다. 경건주의라는 엄격한 독일식 청교도주의 편협한 인생관으로 거의 빈곤상태에서 양육되어 그의 자신의 삶이 지식을 통한 해방의 이야기였다. 후년에 그는 그의 보호 시대인, 자신이 어린 시절의 노예상태로서 지칭한 것을 두렵게 뒤돌아보곤 했다. 우리는 아마도, 그의 전체 생애를 지배한 주제는 정신적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II. 칸트의 뉴튼적 우주론

 

이 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은 뉴튼 이론에 의하여 수행되었는데 그 이론은 볼테르에 의하여 유럽 대륙에 알려지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와 뉴튼의 우주론은, 칸트의 지성적 삶에 강력하고 흥미진진한 영감을 주었다. 그 첫 번째 중요 저서 천체 이론(The Theory of the Heavens)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부제를 지녔다: 뉴튼의 원리에 따라서 다루어진 우주의 구조와 역학적 기원에 관한 논문(An Essay on the Constitution and the Mechanical Origin of the Universe, Treated According to Newtonian Principles). 그 저서는 우주론과 우주발생론에 대한 최고의 공헌들 중 한 가지 공헌이었다. 그 저서는, 태양계에 관하여 지금 칸트-라플라스 가설로 지칭되는 것에 관한 최초의 언명뿐만 아니라 진스(Jeans)에 앞서서 이 개념을 은하계(토마스 라이트[Thomas Wright]5년 앞서서 행성체계로서 해석한) 적용한 것을 또한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칸트가 성운들(nebulae)을 다른 은하계들우리 은하계와 유사한 먼 행성체계들 동일시함에 의하여 초월되었다. 칸트가 자신의 지식론으로 그리고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으로 다다르게 된 것은, 그가 그의 서한 한 가지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우주론적 문제였다. 그는, 공간과 시간 모두와 관련하여, 우주의 유한성이나 무한성이라는 난해한 문제들에 (모든 우주론자들이 틀림없이 직면하는) 관심을 가졌다. 공간에 관한 한,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확정적이기도 하고 한계들이 없는 세계의 형태로 매혹적인 해답이 그 후 제시되었다. 이 해답은 칸트의 매듭을 바로 해결해버렸지만, 그 해답은 칸트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이용할 수 있었던 수단들보다 더 강력한 수단들을 사용한다. 시간에 관한 한, 칸트가 지녔던 난제들에 대하여 동등하게 유망한 해답이 지금까지 제시되지 않았다.

 

III. 순수이성비판과 우주론적 문제

 

시간적으로 우주에 시작이 있었는지 아닌지를 고찰할 때 자신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의 핵심적인 문제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고 칸트는 우리에게 말한다. 이 두 가지 가능성들 모두에 대하여 표면적으로 유효한 증명들을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음을 그는 발견하고 실망했다. 두 가지 증명들은 흥미롭다; 그 증명들을 이해하기에 집중이 필요하지만 그 증명들은 길지 않고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첫 번째 증명에 관하여 우리는, 연도들의 (혹은 하루들이나 아니면 시간과 관련된 동등하고 정해진 다른 간격들) 무한수열이라는a 개념을 분석함에 의하여 시작한다. 연도의 그런 무한수열은 틀림없이, 계속해서 진행하여 끝나는 적이 없는 수열이다. 그 수열은 결코 완료될 리가 없다: 완료되거나 경과한 시간의 무한성이라 하면 모순된 단어들로 구성되는 서술이다. 이제 그의 첫 번째 증명에서, 세계에는 틀림없이 시간적으로 시작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이 현재의 순간에 무한한 숫자의 연도가 틀림없이 경과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칸트는 논증한다. 이것으로 첫 번째 증명이 끝난다.

두 번째 증명에 관하여 우리는, 완전히 비어있는 시간이라는 세상이 있기 이전의 시간 개념을 분석함에 의하여 시작한다. 그런 비어있는 시간은 그 시간 안에 어떤 것도 없고, 틀림없이 그 시간의 간격들이 하나도 사물들 및 사건들에 대한 자체의 시간적 관계에 의하여 다른 시간의 간격과 차별화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물들과 사건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제 비어있는 시간의 마지막 간격을 세상이 시작되기 직전의 간격 고려하라. 분명히 이 간격은 앞선 모든 간격들과 차별화되는데 왜냐하면 그 간격은 어떤 사건에 세계의 시작 대한 자체의 밀접한 시간적 관계에 의하여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일한 간격은 비어있는 것으로 상정되는데 그것은 모순된 단어들로 구성되는 서술이다. 이제 이 두 번째 증명에서, 세상에는 시간적으로 시작이 있을 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시작이 있다면 비어있고 그러나

 

a 역주: ‘무한수열의 원어 표현은 infinite sequence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세상에서 어떤 사건에 대한 자체의 즉각적인 관계에 의하여 규정되는 시간-간격이 세상이 시작되기 직전의 순간 있을 터이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칸트는 논증할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증명들 사이의 충돌을 경험한다. 그런 충돌을 칸트는 이율배반(二律背反: antinomy)’이라고 불렀다. 공간적으로 우주의 한계들에 관한 이율배반들과 같은, 칸트 자신이 휘말렸던 다른 이율배반들로 나는 여러분을 괴롭히지 않겠다.

 

IV. 공간과 시간

 

이 당혹스러운 이율배반들로부터 칸트는 어떤 교훈을 도출했는가? 공간 및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들은 우주 전체에 적용될 수 없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우리는 공간 및 시간에 대한 개념들을 평범한 물리적 물체들과 물리적 사건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간 및 시간 자체는 물체들도 아니고 사건들도 아니다: 그것들은 심지어 관찰될 수도 없다: 그것들은 더 포착하기 어렵다. 그것들은 물체들과 사건들에 대한 일종의 틀이다: 관찰들을 위한 우편물함들이나 파일 시스템과 같은 것. 공간과 시간은 물체들과 사건들의 실제적인 경험적 세상의 한 부분은 아니지만 더 정확하게는 이 세상을 파악하기 위한 우리의 도구인 우리의 정신적 장비이다. 그것들의 고유한 쓸모는 관찰의 도구로서이다: 사건을 관찰하면서, 우리는 공간과 시간의 순서로 통상적으로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그 사건의 위치를 발견한다. 그리하여 공간과 시간은, 경험에 근거하지는 않지만 경험에서 직관적으로 이용되고 경험에 합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참고의 틀로서 기술될 것이다. 이것이, 모든 가능한 경험을 초월하는 분야에 공간과 시간을 이용함에 우주 전체에 관한 우리의 두 가지 증명들에서 우리가 그렇게 했던 바와 같이 의하여 우리가 공간과 시간이라는 개념들을 잘못 적용한다면, 우리가 곤경에 빠지는 이유이다.

내가 방금 개괄한 견해에 칸트는 아름답지 못하고 이중으로 기만적인 초월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곧 이 선택을 후회했는데, 이유인즉 그로 인하여 물리적 물체들의 실재성을 부인한다는 의미에서 그가 관념론자라고 사람들이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리적 물체들은 관념들일 뿐이라고 그가 선언했다고. 칸트는 서둘러, 공간과 시간을 경험적이고 실재적이라는 물리적 물체들과 사건들이 경험적이고 실재적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적이고 실재적인 것을 자신이 부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항변은 소용이 없었다. 그의 난해한 문체가 그의 운명을 결정해버렸다: 그는 독일 관념론의 아버지로서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것을 바로잡을 때라고 나는 제안한다. 칸트는 항상, 공간과 시간에서의 물리적 물체들은 실재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독일 관념론자들의 거칠고 애매한 형이상학적 사변들에 관하여, 칸트의 순수이성비판(Critique)이라는 바로 그 제목은 그런 사변적 추론 모두에 대한 비판적 공격을 선언하도록 선택되었다. 이유인즉 순수이성비판(Critique)이 비판하는 것은 순수이성이기 때문이다; 그 저서는, 감각 경험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순수한세계에 대한 모든 추론을 비판하고 공격한다. 세상에 대한 순수한 추론으로 인하여 우리가 틀림없이 이율배반들에 항상 휩싸인다는 것을 밝힘에 의하여 칸트는 순수이성을 공격했다. (Hume)에 의하여 자극을 받아, 감각 경험의 한계들이 세상에 관한 모든 건전한 추론의 한계들이라는 것을 확립하기 위하여 칸트는 자신의 저서 순수이성비판(Critique)을 저술했다.

 

V.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직관적인 참고의 틀로서의 공간 및 시간에 관한 자신의 이론에 대한 칸트의 믿음은, 그가 그 이론 안에서 두 번째 문제에 대한 해답의 열쇠를 발견했을 때, 확인되었다. 이것은 뉴튼 이론의 타당성이라는 문제이었는데 칸트는 모든 동시대 물리학자들과 공통으로 그 이론이 절대적이고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진리라고 믿었다. 이 정확한 수학적 이론은 틀림없이 축적된 관찰들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은 상상 불가능하다고 그는 느꼈다. 그러나 다른 무엇이 그 이론의 근거일 수 있었는가? 먼저 기하학의 위상을 고찰함에 의하여 칸트는 이 문제에 접근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관찰에 근거하지 않고 공간적 관계들에 대한 우리의 직관에 근거한다고 그는 말했다. 뉴튼의 과학은 유사한 입장에 있다. 뉴튼의 과학은 관찰에 의하여 확인될지라도, 이 관찰들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고방식들의, 우리의 감각-자료들을 정리하여 그 자료들을 이해하고 그 자료들을 지성적으로 소화하려는 우리의 시도들의 결과이다. 우리의 이론들에 책임을 지는 것은 이 감각-자료들이 아니라 우리 정신의 소화체계를 조직한 것인 우리 자신의 지성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자연은. 자체의 질서와 자체의 법칙들과 함께 그리하여 주로 우리의 정신이 흡수하여 정리하는 활동들의 산물이다. 이 견해에 대한 칸트 자신의 두드러진 언명으로, ‘우리의 지성은 자연으로부터 자체의 법칙들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의 법칙들을 자연에 부과한다.’

이 언명은, 칸트 자신이 자랑스럽게 자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지칭한 개념을 요약한다. 칸트가 그것을 표현하는 바와 같이,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로써는 진보가 이룩되고 있지 않음을 발견하고, 말하자면 판을 뒤집어서 교착상태를 타개했다: 관찰자들인 우리가 멈춰 서있는 동안 회전하는 것은 천체들이 아니라고 그는 전제했고, 천제들이 멈춰 서있는 동안에 관찰자들인 우리가 회전한다고 그는 전제했다. 유사한 방식으로 과학적 지식의 문제는 뉴튼의 이론과 같은 정확한 과학은 어떻게 가능한지의 문제와 그 과학은 어떻게 발견될 수 있었을 터인지 문제 해결될 수 있다고 칸트는 말한다. 자연이 자체의 규칙성을 우리에게 각인시키기를 기다리는 우리가 수동적인 관찰자들이라는 견해를 우리는 포기해야한다. 대신 우리의 감각-자료들 소화시키면서, 그 감각-자료들에게a 우리 지성의 질서와 법칙들 우리가 능동적으로 각인시킨다는 견해를 우리가 채택해야 한다. 우리의 우주는 우리의 정신들의 각인을 지닌다.

관찰자이자 탐구자이자 이론가에 의하여 수행되는 역할을 강조함에 의하여 칸트는 철학에 뿐만 아니라 물리학 및 우주론에도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칸트의 사유 기풍이 있는데 그 기풍이 없었다면 아인슈타인의 이론들이나 보어(Bohr)의 이론들은 생각될 수 없다; 그리고 에딩튼(Eddington)은 아마도 칸트 자신보다도 어떤 면들에서 더 칸트적이라고 언급될 것이다. 심지어 나처럼 칸트를 줄곧 추종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자연의 비밀들을 폭로하는 것이 자연을 기쁘게 할 때까지 시험가가 기다려서는 안 되고 시험가가 자연을 심문해야한다는 그의 견해를 수용할 수 있다. 시험가는 자신의 의심, 자신의 추측, 자신의 이론, 자신의 생각 그리고 자신의 영감에 비추어 자연을 세밀하게 검사해야 한다. 여기에 탁월한 철학적 발견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발견으로 인하여, 이론적이든 실험적이든 과학을 인간의 창조물로서 간주하는 것이 그리고 과학의 역사를 예술과 문학의 역사 수준에서 개념들의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칸트 방식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에서 본질적인 두 번째이자 훨씬 더 흥미로운 의미가 있는데, 그 방식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양면가치(兩面價値: ambivalence)를 아마도 나타낼 의미이다. 이유인즉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초래한 인간적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인간으로부터 물리적 우주에서의 인간의 핵심적인 지위를 박탈했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이것을 완화시킨다. 그는 물리적 우주에서의 우리의 위치가 무관함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우주는 우리 주위를 선

 

a 역주: ‘감각-자료들의 원어 표현은 대명사 them으로 sense-data인데 박영태 번역은 자연이다.

 

회한다고 언급될 가능성이 높음도 밝힌다; 이유인즉 적어도 부분적으로 우리가 우주 안에서 발견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주에 관하여 우리의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다. 우리는 발견자들이다: 그리고 발견은 창조적인 예술이다.

 

VI. 자율성의 원리

 

우주론자이자 지식에 관한 그리고 과학에 관한 철학자인 칸트로부터 나는 이제 도덕주의자인 칸트에게로 선회한다. 칸트의 윤리학의 근본적인 개념들이 모든 면에서 내가 기술한 한 가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에 유사한 또 다른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에 해당한다는 것이 이전에 주목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유인즉 칸트가 인간을 자연에 대한 입법자로 만든 것과 꼭 마찬가지로 칸트는 인간을 도덕성 부여자로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그는 인간의 도덕적 우주와 인간의 물리적 우주 모두에서 인간의 핵심적인 지위를 인간에게 돌려준다. 칸트는, 과학을 인간화한 것처럼, 윤리를 인간화했다.

윤리학 분야에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그의 자율성 교설에 아무리 고양되었을지라도 권위의 명령을 윤리의 궁극적인 근거로서 우리가 수용할 수 없다는 교설 담겨있다. 이유인즉 우리가 권위에 의한 명령에 직면할 때마다, 이 명령이 도덕적인지 혹은 비도덕적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권위는 자체의 명령들을 강요할 힘이 있을 것이고 우리에게는 저항할 힘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하는 것을 물리적으로 방해받지 않는다면 책임은 우리의 것으로 남는다. 명령에 복종할 것인지, 권위를 수용할 것인지는 우리의 결정이다.

칸트는 이 혁명을 종교의 영역까지 대담하게 가져간다. 여기에 두드러진 구절이 있다:

 

나의 말이 여러분을 많이 놀라게 할지라도,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여러분은 나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하느님을 창조한다. 도덕적 관점 에서... 여러분은 심지어 여러분을 창조한 분인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여러분 의 하느님을 창조해야한다. 이유인즉 어떤 방식으로든...하느님이 자신을 여러분에 게 틀림없이 밝힌다면... 하느님은 틀림없이 여러분에게 알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어서 숭배하는 게 여러분에게 허용되는지를 [여러분의 양심에 의하여] 판단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이다....

 

칸트의 윤리 이론은, 인간의 양심이 인간의 도덕적 권위라는 서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또한 우리의 양심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명령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하려고 시도한다. 이 도덕적 법칙에 관하여 그는 몇 가지 언명들을 제시한다. 그 언명들 중 한 가지는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을 본질적으로 목표로서 간주하고 모든 사람을 단지 여러분의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 결코 이용하지 말라.’ 칸트 윤리학의 정신은 다음 말로 요약될 것이다: 과감하게 자유를 추구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라.

이 윤리학을 토대로 칸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국가론과 자신의 국제법 이론을 세웠다. 그는 국제연맹 즉, 국가들의 연맹을 요구했는데 그 연맹은 궁극적으로 지구상에서의 영구적인 평화를 선언하고 유지할 목적이었다.

나는, 인간과 인간의 세상에 대한 칸트의 철학과 그 철학의 두 가지 주요 영감을 뉴튼의 우주론 및 자유의 윤리학 폭넓게 개괄하려고 시도했다; 칸트가 우리의 머리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우리 내부에 있는 도덕적 법칙을 말할 때 그가 언급한 두 가지 영감.

칸트의 역사적 역할에 대하여 훨씬 더 먼 관점을 얻기 위하여 뒤로 멀리 발걸음을 옮기면, 우리는 그를 소크라테스와 비교할 것이다. 두 사람 모두는 국가 종교를 왜곡하고 젊은이들의 정신을 타락시켰다고 비난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혐의를 부인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사상의 자유를 옹호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자유는 억업의 부재 이상을 의미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자유는 생활 방식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부터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부터 자유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솟았다: 그의 정신이 억압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개념; 자족적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개념; 자신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법의 지배를 자유롭게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억압이 필요 없는 사람.

우리 서구 유산의 일부를 형성하는 자족(自足: self-sufficiency)이라는 이 소크라테스적 개념에게 칸트는 지식과 도덕 분야 모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그는 그 개념에 자유인들의 모든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추가했다;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결정을 위한 책임이라는 짐을 지고 그가 태어나기 때문.

 

 

주석

 

     ㅡ 칼 포퍼, "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126~136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