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한 칸트 전집 중에서 칸트가 라틴어로 쓴 세 편의 학위 논문과 교수 취임 논문의 번역을 맡았다. 이 저작들은 언어가 독일어가 아니라 라틴어인데다 <불에 관하여>나 <물리적 단자론>의 경우에는 제목에서 보듯이 물리·화학적인 내용이어서 번역이 쉽지 않았다. 이 저작들을 대학원 강의에서 학생들과 같이 읽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만약 칸트학회에서 기획한 번역 사업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번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회 일이라고 하니 나도 동참하는 의미에서 ‘기왕이면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을 법한 저작을 번역하자’고 생각하고 일부러 라틴어 저작들을 떠맡았다. 사실 이번에 출판된 라틴어 저작 세 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비판기의 칸트와 사뭇 다르고 내용도 까다로운 편에 속해서 이를 번역한 나라는 일본과 영국 등 극소수의 나라를 제외하면 별로 없다. 그런데 이번 전집으로 한글로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도 이번의 학회 번역 사업의 기여라면 기여라고 할 수 있다.
한길사에서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한 칸트 전집 출간 보도자료에 사용한 “정본”이라는 말은 출판사에서 좋은 학술적 작업을 알리려다 보니 과도한 열정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백 교수가 정본이나 공인이란 말이 정말 문제라고 한다면, 그 지적을 받아들여 표현을 철회할 수 있다. 내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만 학회 회원으로서 또 공동번역자로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실제로 이미 학회에서 한길사에 보도자료와 광고에서 ‘정본’, ‘최초’, ‘공인’이란 표현은 삭제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학회에서 번역했다는 사실 자체를 철회하라는 백 교수의 요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부터가 이번 번역 사업이 칸트학회가 기획하고 주도한 일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번역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이 34명이 아니라 340명이 참여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임의의 개인들의 모임이고 학회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제안되고 기획된 일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참여할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나도 칸트의 몇몇 주요 저작에 대한 번역을 진행 중이고, 번역 외에 나름의 출판 일정도 빠듯하다. 공동으로 번역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집단적으로 일정을 조율해야 하니까 개인적으로는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번역에 참여한 까닭은 칸트학회 차원에서 번역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칸트 학자들이 그동안 논란이 되어 온 칸트 철학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번역어 문제를 같이 토론하고 가능한 합의를 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예전과 달리 칸트의 저작 각각을 연구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전문가들이 많이 생겼기에 이런 분들이 맡아 번역을 한다면 전문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백 교수가 학회에서 모여서 번역해내는 것이 “문명국가에 없는 일”이라고 비난하니 도무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학회 회원들이 같이 모여 한국의 칸트 연구를 한 단계 격상시키기 위해 필요한 토론을 거쳐 칸트의 저작들을 전문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번역하자는 소박하고 순수한 선의가 왜 비난을 받아야 하나. 문명국가의 학회에서 모여서 번역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편에서 생각하면, 문제의 핵심은 학회의 이름으로 회원들이 공동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그건 당연히 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한 사람이 칸트의 모든 저작들을 다 번역하는 것이 더 좋으냐 아니면 각각의 저작에 관해 그 저작의 전문 연구자들이 따로 번역하는 것이 좋으냐 하는 것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후자가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플라톤의 경우라면 서양에서 한 사람이 거의 모든 저작을 번역한 경우가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경우에도 혼자 모든 저작을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칸트의 경우에는 주제와 논의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다. 순수 물리학적 저술에서부터 형이상학과 윤리학 그리고 법철학과 미학과 종교철학까지 다루는 주제가 너무나 다양하고 방대한 까닭에 한 사람이 그걸 전문적으로 연구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을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경우 의도치 않은 오류나 불충분함이 없을 수 없다.
일본의 경우 이와나미쇼텐 출판사에서 칸트 전집이 스물두 권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경우에도 여러 사람이 나눠서 번역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이 각 저작의 전문 연구자들이 자기가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저작을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나도 가능하면 삼 비판서(<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는 내 손으로 번역하려고 생각하고 부분적으로 번역을 끝낸 책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까지 번역서들이 여러 가지로 개선되어야 할 점이 많았기 때문에 일종의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뿐이다. 학문의 전문성을 생각하면 각각의 책을 평생 연구한 학자들이 따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다.
학문의 전문성에 대해서도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전남대 대학원에서 칸트를 전공하는 제자들을 많이 두었고, 그들이 칸트의 저작 가운데서 다양하게 주제를 선정해서 논문을 쓰는 까닭에 대부분의 저작을 공부하고 또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모든 주제에 전문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의 주제에 전문가가 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칸트 저작을 혼자 다 번역한다 해서 전문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번역한 책의 내용도 돌아서면 기억나지 않는데, 하물며 그 책이 다루는 주제 자체에 대해 전문가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교수가 혼자서 거의 모든 저작을 번역하고 번역할 계획인 것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분의 열성이 후학들에게 자극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도리어 칭찬을 해야 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칸트 학회에서 한편에서는 전체적으로 용어를 통일하고, 각 저작의 전문가들에게 번역을 위촉하고, 번역된 원고를 다른 전문가의 비판적인 검토를 거쳐 전집을 번역하는 것 역시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학회에서 기본 용어를 통일한 것은 한 전집 안에서 서로 다른 용어를 쓰는 것을 지양하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통일이 필수인 용어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나머지 용어들은 ‘제안 용어’들로 번역자가 자신의 용어를 고집할 경우 전집 안에서도 얼마든지 자신이 선택한 용어를 쓸 수 있도록 했다.
용어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나도 학회에서 “나도 내가 쓰는 용어가 있지만, 나부터 내려놓겠다”며 “열린 마음으로 토론하되 다수의 뜻에 따라 결정된 사항은 같이 따르자”고 제안했다. 다들 칸트 철학을 하시는 분들답게 온화한 마음으로 받아주시고 자기 생각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조금씩 양보를 해서 용어를 통일했다. 사실 나부터 내가 쓰던 번역어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양보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뜻을 모은 것이지 학회에서 특정한 누군가의 학문적 입장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킨 것이 아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번역서가 나왔든지 간에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번역자들은 보다 나은 번역을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하면 되지 않나. 백 교수 번역이 있고, 학회 차원의 번역이 있고, 나도 따로 번역할 수 있고, 후배들이 또 새로운 번역을 해나갈 것이다. 내가 번역하는 칸트 저작에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번역어(‘트란스첸덴탈’=‘선험론적’, ‘아프리오리’=‘선험적’)를 사용한다. 경우에 따라 칸트학회의 번역어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내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 그 모두가 열려 있다. 학회 차원의 번역이 “특정 번역어와 학설을 회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라고 백 교수가 생각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학회에서 번역을 한 것은 따지고 보면 백 교수가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언론에 언급된 가독성 정도의 문제가 아니고 훨씬 더 전문적이고 심각한 학문적인 용어 선택의 문제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백 교수가 ‘트란스첸덴탈’(transzendental)이란 용어를 ‘초월적’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출발한다. 그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트란스젠덴탈’과 ‘아프리오리’를 각각 ‘선험적’, ‘선천적’이라고 번역해왔다. 하지만 30년 전에 백 교수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부터 논란이 시작됐다.
‘트란스첸덴탈’은 칸트가 자기 철학을 명명하는 데 쓰는, 가장 중요한 용어다. 하지만 이걸 ‘초월적’이라고 번역하는 건 심각한 왜곡이다. ‘트란스첸덴탈’이라는 라틴어의 원래 뜻이 초월적이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플라톤에게서 ‘이데아’가 ‘형상’의 의미라 해서 로크의 ‘아이디어’(idea)도 ‘관념’이 아니라 ‘형상’이라 번역해야
하고, 헤겔의 ‘이데’(Idee)도 ‘이념’이 아니라 ‘형상’이라 번역해야 하나? ‘페르소나’(Persona)가 중세 철학에서 신의 삼위일체 위격을 뜻하니까, 칸트에게서도 ‘페르손’(Person)을 인격이 아니라 위격으로 번역해야 하는가? 철학 용어의 사전적인 뜻이나 이전 시대에 통용되던 의미를 무차별하게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는 것은 동료 학자들의 동의를 얻기 어려운 아집일 뿐이다. 왜냐하면 같은 용어가 시대와 철학자에 따라 정반대의 뜻으로 쓰이는 일이 철학사에서는 드물지 않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트란스첸덴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평균적인 한국인에게 ‘초월적이라는 말이 뭘 의미하냐’고 물어본다 하자. 뭔가 현세적 차원이나 내재적인 지평을 뛰어넘는 의미라고 답하지 않겠나. 플라톤의 이데아를 가리켜 초월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칸트 이전의 철학이 신과 영혼 같은 초월적 존재자들에 대한 사변인 데 비해, 칸트는 그런 것을 파괴하고 철저히 내재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한 철학자다. 그런데 백 교수는 ‘칸트 철학은 초월철학’이라니, 대다수 칸트 학자들은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칸트 저작을 가장 많이 번역한 서울대 교수가 그렇게 주장하니 그게 옳은 줄 알고 그렇게 쓰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칸트가 서양 철학에서 워낙 중요한 사람이다보니 칸트 학자가 아니라도 더 나아가 철학이 아닌 다른 학문 연구자들도 칸트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글을 쓰면서 같은 페이지 내에서 한번은 초월적이란 말을 칸트의 ‘트란스첸덴탈’을 의미하는 말로 썼다가, 그 몇 줄 아래서는 우리말의 일상언어에서 의미하는 초월적이라는 뜻으로 사용해, 급기야 초월적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사례가 이것 하나가 아니다. 백 교수는 지난주에 칸트 학회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의사’라고 번역한 ‘빌퀴어’(Willk?r)를 학회가 ‘자의’(恣意)라고 번역한 것을 비판했다. ‘빌퀴어’는 영어론 arbitrariness, 즉 ‘엄격한 도덕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의사’를 말한다. ‘내 맘대로’, ‘자유분방한 의지’ 같은 의미다. 이걸 백 교수가 ‘의사’라고 번역하니 그 의미가 전달될 수 있겠나.
번역어에 관해 백 교수가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을 하니까 칸트 전문가들 사이에서 우려가 커졌다. 칸트 학회에서 ‘차라리 용어를 통일해서 공동으로 번역하자’고 나선 까닭이 그것이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번에 이 일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뒤에 번역어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논쟁은 이미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었다. 다만 이번 번역작업으로 대다수 칸트 학자들의 상식적인 판단이 결집된 형태로 표현된 것뿐이다.
용어 통일과 번역 사업을 주도한 학자들은 지난 200년간 칸트 철학 연구의 본거지인 독일로 유학을 가서 칸트 연구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학자들에게 혹독하게 훈련받은 이들이다. 독일 트리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엽 청주대 교수와 김수배 충남대 교수, 마인츠대 박사인 최소인 영남대 교수, 마르부르크대 박사인 이충진 한성대 교수 등 칸트학회 전·현직 회장들은 물론이고, 김재호, 김상현, 이남원 교수 모두 훌륭한 칸트 전문가들이다. 번역에 참여한 번역자 중에 상대적으로 실력이 넘치는 사람도 있고 저처럼 다소 부족한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번역과는 차별화된 전문성이 있다고 자부한다.
생각하면, 각자 칸트를 공부할 만큼 공부한 전문가들이 자기 자존심 내려놓고 동료 학자의 엄격한 검토와 신랄한 비판을 거쳐서 번역을 한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내 경우에도 누가 검토를 했는지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심사한 걸 보내왔다. 빨간펜으로 수정된 교정지를 받아 드는 그 순간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검토를 받는 과정에서 많이 배운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성의 있게 꼼꼼히 검토해준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여담이지만, 나는 최근엔 칸트학회에 부지런히 참여하는 축에 속하진 않는다. 하지만 평생 칸트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칸트를 연구하는 동료학자들에 대해 조금씩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 됐다. 그 까닭은 같은 철학이라도 칸트를 공부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윤리적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칸트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특별히 과격하지 않으면서 이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엄격함 같은 것을 보여주는 분들이 많다. 대개 칸트학자들은 자기를 냉철하게 돌아보게 하는 거울을 마음 속에 하나씩 가진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것이 칸트 철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선량한 분들이 칸트 저작의 공동번역이라고 하는 어려운 일을 한국 학계를 위해 소박한 선의를 가지고 해나가고 있다. 그것이 칭찬을 받지는 못할망정 비난을 받는 것은 옳은가. 책이 나오고 출판사 마케팅 차원에서 다소 과장된 언사가 있었다 해서 번역에 참여한 학자들과 학회가 무슨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비방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 백 교수가 당시 기자회견에 나온 이충진 회장과 최소인·김수배·김재호·김화성 교수에게 “학회를 탈퇴하라”고 요구한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회장이 잘못한 일이 있을 때 회원들이 회장을 탄핵할 수는 있겠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아무 것도 없는데 백 교수가 그분들에게 탈퇴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칸트 전집 번역 출판에 관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마찰에 대해서는 서로 선의로 조율하고, 또 그 과정에서 백교수의 정당한 요구는 학회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학회 임원들도 대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로 안다. 그러나 백 교수의 앞의 요구는 너무도 과도하고 비상식적이어서 결국은 대다수 학회 회원들의 반감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왜 이렇게 나오시는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대개 한국의 칸트 학자들은 유독 연구에 몰두하느라 신문에 칼럼 하나 쓰지 않는 조용한 학자들이다. 그나마 언론에 몇 번 나선 적이 있는 내가 그분들을 옹호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인터뷰를 자청하게 됐다. 내 말은 칸트 학회의 공식적인 견해는 아니지만, 나도 평생 칸트를 연구하고 가르쳐 온 학회 회원이자 이 사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번역자로서 학회의 번역 사업이 악의적으로 매도되는 상황을 무관심하게 보고 있을 수 없어 나름의 입장을 분명히 표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2월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항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김상봉은 부산에서 태어나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철학과 고전문헌학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고 이마누엘 칸트의 <최후 유작>(Opus postumum)에 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그리스도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를 지냈으나 해직되었다. 그 후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시민단체 ‘학벌없는사회’를 만든 산파였으며 이사장을 지냈다. 또한 ‘민주화를위한교수협의회’ 공동의장과 ‘5.18기념재단’ 이사를 지냈다.
저서로 <자기의식과 존재사유: 칸트철학과 근대적 주체성의 존재론>(한길사, 1998), <호모 에티쿠스: 윤리적 인간의 탄생>(한길사, 1999), <나르시스의 꿈: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한길사, 2002),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철학이야기>(한길사, 2003), <학벌사회: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한길사, 2004), <도덕교육의 파시즘: 노예도덕을 넘어서>(도서출판 길, 2005), <서로주체성의 이념: 철학의 혁신을 위한 서론>(도서출판 길, 2007), <만남: 서경식 김상봉 대담>(공저, 돌베개, 2007), <5.18 그리고 역사: 그들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의 나라로>(공저, 도서출판 길, 2008), <다음 국가를 말하다: 공화국을 위한 열세 가지 질문>(공저, 웅진지식하우스, 2011),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꾸리에, 2012), <철학의 헌정: 5.18을 생각함>(도서출판 길, 2015), <만남의 철학: 김상봉 고명섭 철학 대담>(공저, 도서출판 길, 201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