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껴안으려면
슈바이처의 언명처럼,
“가끔 눈을 들어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보다
숨통 끊어지는 순간을 통절하게 느껴야
생명의 의미 되살아나지 않을까.
정열적인 어느 미국 여가수의 소망처럼,
“죽음 경험하고 싶다”라고 말하면
불가능한 것 경험하려는 얄팍한 수작인데
무대의 황홀경에 빠지면 현실로 돌아오기
두렵고 싫고 권태롭다는 의미일까?
경험되는 현실 얼마나 적으며
그런 현실을 의식하는 자 또한 극소수여서
삶 추구하는 인간만 우리 눈에 보이는가.
애절하고 아프게 살아가노라면
생명의 종말 극복하지 못하겠지만
생애 더욱 충만하여
회한 없지 않을까?
후기:
우리가 우리 자신을 피상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체로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깊이 본다면, 우리가 과정임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중단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종말임을 발견한다.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발견을 낳았던 원초적 통찰이었던 듯하다: ‘나는 나 자신을 탐색했다’고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은 물체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타오르는 불, 화염이었다. 우리가 더 많이 깨어있을수록 우리는 더 살아있고 완전히 더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가 잠든다면, 우리 삶의 과정이 감소되면 우리의 영혼은 더 이상 살아있는 불이 아니다 ㅡ 우리는 거의 죽었다.
ㅡ 칼 포퍼 저, 아르네 피터슨 편집,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2007년, 156쪽 ㅡ
We may appear to ourselves as things, if we look at ourselves superficially. But if we look a little deeper, we find that we are processes; and that, if the processes stop, that is the end of us. This, it seems, was the original insight that led to Heraclitus’ discovery: ‘I searched myself’, he tells us. And what he found was not a thing, but a process: a burning fire, a flame. We are the more alive, the more fully ourselves, the more we are awake. If we are asleep, if our life processes are reduced, our souls are hardly any longer a living fire ㅡ we are almost d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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