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시

살구 줍기

이윤진이카루스 2020. 6. 21. 21:51

살구 줍기

 

역사가 반복되는 게 아니라

역사의 추세가 반복된다는데

그런 추세는 인간에게만 해당한다면,

다시 말해서 인간만 추세를 만든다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인간에 의한 우주인가?

 

어린 시절에 살던 집에는

덩굴장미가 앞마당에 피고

뒷마당 커다란 살구나무가

여름이 되면 노란 참살구를 떨어뜨렸지.

비바람이 훑고 간 밤이면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새벽에 찾아간

살구나무 아래 검붉은 흙 위에

흐드러지게 널브러진 노랑 살구들.

 

어머니가 세상을 일찍 뜨고

셋방을 전전하면서 덩굴장미도

살구도 추억 속에만 남았는데

그 을씨년스러운 세월 속에서

푸르른 젊음이 탈색되며 지나갔지.

 

시간이 흐르면

살구는 더는 보이지 않고

푸르른 나뭇잎이 무섭게 짙어지고

기이한 생각에 나무만 보다가

수십 년 세월이 흘러

하늘도 보고 우주도 생각하니

이제 철이 들었나 싶다.

 

시간 속에 놓인 존재가 되기보다는

가끔

시간을 주름잡아

영겁의 세월도 되돌아보고

남은 세월도 먹어보지만

엔트로피는 증가만 하지 않고

원래 상태 부근으로 돌아오기도 한다니

무질서와 질서가 교차하는 세상에

우리가 산다는 말인가?

무질서가 질서로 돌아오고

역순도 성립한다면

이게 무슨 난감한 상황이고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 브라운이

꽃가루를 들여다보니 서로 움직여서

어떻게

시간의 화살을 타고 직선으로

엔트로피가 증가만 한다는 것인가?

 

저 어마어마한 영겁의 세월에

열역학 제2 법칙을 적용하면

공간과 시간을 지닌 우주가

인간을 보고 비웃을지도 모르지.

지나간 영겁을 어쩔 것이고

다음 영겁은 어떻게 알아내는데?

 

어제와 오늘

노인정 옆에 거대한 살구나무가 있어

무수히 떨어진 살구를 주웠는데

이게

무질서와 질서의 반복이라면

나의 삶도 고작 그런 반복이었던가.

 

 

 

후기:

내가 열역학 제2 법칙이 브라운 운동에 의하여 실제로 반증되었다고 정말로 믿을지라도...

ㅡ 칼 포퍼, ‘끝없는 탐구’, 165쪽 ㅡ

even though I do believe that the second law is actually refuted by

Brownian movement.

Karl Popper, ‘Unended Quest’, p165

 

 

 

 

 

살구 줍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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