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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우 변호사 - 법정에 선 양심수들의 역사 증언하고 싶었다

이윤진이카루스 2011. 6. 6. 07:26

[한겨레가 만난 사람] “법정에 선 양심수들의 역사 증언하고 싶었다”

등록 : 20110605 19:41

 

시국사건 변론 20년 기록 펴낸 홍성우 변호사
민청학련사건 맡은게 인권변호사로 인생 바꿔 학생들 살리기 위해 인혁당과 무관함 강조
“어쩔수없는 선택이었지만 회한…유족에 미안” 시국사건에 사명감…“

» 인권변호사 1세대의 4인방 이돈명, 조준희, 황인철, 홍성우 변호사는 모두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될 때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고 이돈명 변호사는 한겨레신문창간위원회 초대 대표, 조준희 변호사는 3대 위원장, 홍 변호사와 고 황인철 변호사는 초대 이사·감사였다. 2003년 식도암 수술을 받은 뒤 변호사 업무에서 사실상 물러난 홍 변호사는 매일 한 시간씩 양재천을 걷는 것으로 건강을 유지한다고 한다. “평생 동지 황인철, 가장 아꼈던 후배 조영래를 앞세웠고, 지난해엔 이돈명 선배를 보냈다. 어려웠던 세월 서로 돕고 의지하며 잘도 견뎠는데, 아, 이제 누가 남았는가 싶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우리나라 민주화운동기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들을 꼽으라면 이돈명, 한승헌, 황인철, 조준희, 홍성우 변호사 등이 첫손에 꼽힌다. 인권변호사 1세대들이다. 이 가운데 늘 변호인단의 중심에 서서 활약했던 이가 홍성우 변호사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부터 1991년 사노맹 사건까지 그가 변론에 참여한 민주화운동 및 양심수 사건이 90건이 넘는다. 민주화운동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최근 자신의 시국사건 변론 기록과 회고를 담은 책 <인권변론 한 시대>(경인문화사)를 냈다. 이 책은 민주화운동사의 망실을 우려한 서울법대 한인섭 교수가 2007년부터 1207종 4만6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변론 기록을 전산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홍 변호사와 나눈 대담을 기록한 것이다. 70~80년대 주요 시국사건 40여건이 망라된 이 대담집은 그 방대함과 새롭게 소개되는 흥미로운 비사만으로도 한국 사법사, 나아가 한국 현대사의 위대한 증언으로 기억될 것 같다.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하지 않아” 법정활동 관련 저서도 남기지 않은 그를 지난 2일 서울대 법학관에서 한 교수의 안내로 만났다. “책 출간을 축하합니다.” “저야 뭐 한 일이 별로 없고 한 교수가 고생했지요. 나는 그저 책 속의 사진에 더 눈이 가요. 파안대소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친구들 초상에 가 보면 이젠 영정사진도 활짝 웃는 게 좋아요.”

1938년생이니 올해로 73살이다. 변호사로서 가장 왕성한 시절을 한국 현대사의 고난이자 영광인 민주화운동가들을 변론하고 보호하는 데 바친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은퇴 변호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한 게 1971년인데, 판사라는 선망의 직을 그만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시 사법파동을 주도한 게 일차 계기였지만, 제가 5남매의 맏이로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했던 부분이 컸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판사복을 벗긴 거지요.”

-경기중·고 서울법대 학력에 판사(고등고시 13회) 출신이니 변호사로도 잘나갔을 텐데 굳이 왜 인권변호에 뛰어들게 되었는지요?

“제가 학생운동 출신도 아니고 정치적 성향도 아닌데 어느날 법대 동기인 고 황인철 변호사가 제 손을 잡아끌었어요. 고생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같이 돕자,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별생각 없이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시작한 게 민청학련 사건이었지요. 그게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셈이지요.”

-그래도 특별한 신념 없이 어려운 시기에 20년 가까이 인권변론 운동에 헌신하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사건을 할수록 내가 안 하면 누가 이 험한 일을 할까 싶은 그런 책임감과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겨났습니다. 또 일반사건보다 시국사건이 재미있더라고. 사실 재미와 보람이 없다면 길게 못하잖아요?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기록을 의식해 변론 기록을 보관한 겁니까?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언젠가 좋은 세월을 만나면 이 기록이 다시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정도는 했습니다. 그렇게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다 보니 라면박스로 열 개가 되었어요. 기록이라는 게 쌓일수록 오히려 더 못 버리게 되더라구요.”

책에 수록된 40여건의 사건 속에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서부터, 김지하 양심선언 사건, 명동3·1구국선언 사건, 리영희 교수 필화사건, 동아투위 민권일지 사건, 남민전 사건,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등과 1980년대 들어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원풍모방노조 탄압사건, 김근태 고문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서노련 사건, 사노맹 사건 등 당시 주요 시국사건들이 거의 망라돼 있다.

-정말 많은 사건 변론에 참여하셨는데요, 사건마다 다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사건을 한두개만 꼽는다면?

“그런 질문이 제일 어려워요.(웃음) 다 중요하지만, 김지하 사건이 맨 먼저 떠오르네요.”

-사법적 측면에서 김지하 시인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김지하 시인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을 살고 나와 <동아일보>에 ‘고행 1974’라는 글을 썼는데 인혁당 사건은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고 일갈했습니다. 인혁당 사건은 대구·경북 출신 혁신계 인사 8명을 박정희가 전격 사형시킨 사건 아닙니까? 그걸 조작극이라고 했으니 박정희로서는 몹시 아팠겠지요. 그래서 김지하 집을 뒤져서 찾아낸 창작메모 내용을 걸어서 공산주의 혁명을 부추겼다는 죄목으로 잡아넣은 거죠. 창작 메모, 즉 머릿속 생각만으로 작가를 처벌하려 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사상탄압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김지하씨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당시 운동권이 자기를 운동에 이용하기 위해 죽이려 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만일 김지하가 그런 말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무엇인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김지하 가족들을 비롯해 우리들은 박 정권이 김지하를 진짜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를 갖고 있었습니다. 김지하가 잡혀간 뒤 월남이 패망해 여의도에서 연일 반공 궐기대회가 벌어지던 때였는데, 검찰이 별안간 공소사실을 변경해 최고 7년 이하 형만 가능한 단독재판부에서 최고 사형이 가능한 합의부로 재판부 변경을 요청한 겁니다. 이걸 보고 우리는 다들 오싹했어요. 인혁당 전격 사형 사건이 뇌리에 안 스쳐갈 수가 없어요.그래서 우리도 정면대응에 나서 ‘김지하 양심선언문’이란 걸 만들어 일본 신부를 통해 외국에 발표하게 했습니다. 김지하가 처해 있는 위기를 전세계에 알려 박 정권이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자는 작전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성공했습니다. 그때 김지하 구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사람이 김정남(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입니다. 그는 김지하의 친구이자 동지였습니다. 독방에 갇힌 김지하를 대신해 양심선언 초안을 쓰도록 조영래를 끌어들인 사람도 그입니다. 김지하는 김정남이 몰래 들여보내준 초안에다 자기 생각을 더해 몇차례 가필을 한 뒤 구치소 소년수를 통해 바깥으로 내보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김지하 양심선언문입니다. 그걸로 김지하는 일약 세계적 인물이 되었고 로터스 상도 받게 됐지요. 이듬해 최후진술에서도 김지하는 장장 2시간 동안 열변을 토했습니다. 김지하의 최후진술은 그 자체로도 한 사람의 사상, 철학, 신학관이 모두 담긴 빼어난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욕과 열정을 가지고 한 일을 자신을 제물로 삼으려 했다느니, 장단에 놀아났느니 한다는 것은 정말 자기부정이고 자기모순입니다. ”

-가까운 친구이자 동지로서 김지하를 살리기 위해 최전선에서 분투했던 김정남씨가 가장 섭섭했을 것 같군요.

“김정남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변호사님의 증언을 보면 당시 주요 민주화운동 사건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 김정남입니다.

“김정남은 70~80년대 대부분의 주요 민주화운동 사건을 막후에서 조직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단언합니다.그때 표면적으로는 명망가들이 전면에서 활동하지만, 배후에서 그분들을 하나로 엮어내고 무수한 성명서나 선언문들을 쓴 게 김정남입니다. 철저하게 막후에서 활동해 이름이 안 드러났을 뿐이지, 민청학련 이후 등장한 여러 활동가들 중에서 가장 뚜렷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그를 ‘민주화운동의 막후 비밀병기’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뉴라이트의 수장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책에서 일부 민주화운동 사건의 공산혁명 연계성을 주장하는 발언을 해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분이 거론한 5가지 사건 중 저는 2차 인혁당과 남민전 변론에 관여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인혁당 사건은 관련자 한분이 북한 방송에 나온 내용을 적어와 돌려읽고 이야기를 나눈 게 가장 중한 혐의사실입니다. 아무리 세게 잡아도 징역 몇년이면 끝날 일을 8명이나 사형시켰습니다. 안 교수의 시각을 폄훼할 뜻은 없습니다만 인혁당의 경우는 조금 오버한 게 아닌가 싶어요. 남민전 사건은 용공 성향의 증거가 뚜렷이 나왔으니 안 교수의 시각에선 공산주의 혁명 기도로 볼 수도 있겠지요. 다만, 이재문을 비롯한 방계 운동권 인사들의 돌출적인 운동 방식을 남민전 관련자 다수의 생각과 행동으로 엮는 것은 무리입니다.”

홍 변호사는 이 이야기를 하며 인혁당 사건 유족들에게 거듭 미안함을 표시했다. 당시 박 정권이 민청학련 관련 학생들을 인혁당과 연계시켜 처벌하려고 하자, 당시 변호인들은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용공 혐의가 씌워진 인혁당과 민청학련은 조직적으로 전혀 연결돼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변호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는 하지만, 이후 인혁당 관련자들이 사형을 당함으로써 민청학련 관련자와 변호인들에게는 큰 회한이 되고 말았다.

-8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 노선이 과격해지면서 변론 방향도 많이 바뀌게 되었지요?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학살 이후 학생운동이 변혁운동으로 전환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폭력혁명노선을 일부 받아들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니 아무리 인권변호사라 하더라도 보수성향인 사람들은 변론 자체가 어렵게 되었어요.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학생운동의 주류는 늘 건강한 시대정신을 표출하고 반영하고 있다고. 그래서 학생운동이 좌경폭력노선으로 좀 기울어도 윗세대들이 이들을 끌어안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문용식 같은 친구들을 변론하면서 많이 배우기도 했구요. 그 친구 참 대단한 이론가였습니다. 유시민한테는 니가 변호사라고 치고 변론서 한번 써봐라 그랬더니 잘 써 왔어요. 나중에 그게 나뿐 아니라 여러 변호사들의 텍스트가 되었어요. 허허.”

-변호사님의 변론활동은 백태웅·박노해가 주도한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을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주사파들을 나름 이해한다고 했는데, 김정일 세습부터는 주사파 학생들이 잘 이해가 안 되더군요. 저는 자기 생각과 달라도 변론하는 양심범의 소신을 끝까지 지켜주는 것이 변호사의 역할이라고 다짐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된다는 느낌이 오던 차에 사노맹 사건을 맡았어요. 해보니 역시 잘 안돼요.”

-1997년인가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을 하셨지요.

“내가 마음이 약해서…이회창씨는 학교 선배이자 법원 선배죠. 인간적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 양반이 그때만 해도 민주화운동 세력에 호의적이고 정치개혁 의지가 있었어요. 그도 나를 너무 잘 아니까 나를 연결고리로 삼아 자기 캠프에 민주화운동 세력을 일부 포용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하도 간곡하게 호소하길래, 그만. 아무튼 제정구 등과 같이 갔다가 선거에서 지고는 바로 손 털고 나왔죠. 그게 끝이에요. 하하.”

지난 5월30일 그의 출판기념회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다. 민주화운동가들의 홈커밍데이 같았다고 한다. 그가 변론을 했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에서부터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 이철·유인태, 학생운동가 문용식, 원풍모방 노조위원장 정선순 등이 찾아와 감사의 말을 전했다. 홍 변호사는 20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은 이유를 ‘양심수의 신념을 지켜주고 싶어서, 기자도 없는 법정에서 역사의 증언자가 되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김수환 추기경과의 비화 첫 공개

변호사 휴업당하자 직원월급 주라며 봉투 쥐여줘

» 홍성우 변호사
추기경은 특별히 인권변호사들을 사랑했다. 주변 사람들이 “감옥까지 가며 고생하는 사람이 많은데 잘 먹고 잘사는 변호사들만 이뻐하신다”고 불만을 보여도 추기경은 틈만 나면 성당으로 변호사들을 불러 같이 식사를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추기경이 보기에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일 변호사들이 자청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고 있으니 참으로 믿을 만한 존재였을 것이다.

1986년 부천서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이 터졌을 때다. 이 추악한 사건은 민심의 폭발을 겁낸 전두환 정권의 철저한 보도통제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때 이상수, 조영래, 홍성우, 김상철 등 9명의 변호사들이 추기경을 만나 사건의 진상을 전한다. 분노한 추기경은 ‘권양’ 앞으로 위로의 편지를 쓴다. ‘친애하는 권양에게, 무어라고 인사와 위로의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양심과 인간성 회복을 위해 용감히 서 있는 권양을 주님이 은총으로 보살펴 주시리라고 믿고 기도합니다.(하략)” 이 짤막한 친필 편지는 변호인들의 탁월한(?) 언론플레이를 통해 보도통제의 벽을 뚫고 신문에 보도되는 데 성공한다. ‘김수환 추기경 권양에게 격려편지’라는 밑도 끝도 없는 제목의 1단 기사가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관한 최초의 보도였다. 이 기사가 나간 뒤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홍성우 변호사가 처음으로 털어놓은 추기경의 모습은 이랬다. “이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분도 돌아가셨으니 해도 되겠지요. 1980년 신군부가 저와 이돈명 변호사를 강제로 휴업시켰어요. 당시 서울통합변호사회 문인구 회장의 도움으로 변호사 자격은 간신히 유지했지만 사무실은 개점휴업이 되고 말았어요. 몇달이 지났을까 직원들 월급 걱정을 하고 있는데 추기경께서 집무실로 날 부르셨어요. 홍 변호사. 이 일은 당신하고 나만의 평생 비밀일세. 절대로 남한테 얘기하면 안 돼. 그렇게 다짐하고는 봉투를 주시는데, 독일돈 2만마르크였어요. 우리돈으로 600만원쯤인데, 30년 전에 그 액수는 아주 큰 돈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분이 독일에 가서 어느 주교님한테 어려운 친구를 도와주는 데 쓰려고 하니 용도는 묻지 말고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받아온 돈이랍니다. 살만한 변호사로서 참 얘기하기가 너무 부끄럽고 미안한 게 그때 추기경님이 도와줄 사람이 좀 많겠어요? 장애인부터 불우한 이웃들까지… 그런데 그 돈을 제게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