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위 지식의 근원에 관하여
귀 대학의 인문학부에서 나에게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커다란 명예에 감사한다. 나는 이 명예에 깊이 감사하며, 그 명예를 아주 즐겁게 받아들인다.
나는 매우 짧은 기간의 통보를 받고 어려운 과제를 떠맡았는데 즉, 짧은 강연을 수행하는 과제다. 그러나 이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나의 뉴질랜드 시절에서 유래하는 사실인 이야기를 여러분에 알려주고 싶다.
뉴질랜드, 크라이스처치(Christchurch)에서 나는 물리학자인 콜러리지 파(Coleridge Farr) 교수와 친했는데 그는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대략 지금 나의 나이였다. 그는 재치가 있고 즐거움을 주는 분이었는데 런던의 왕립협회 회원이었다. 파 교수는 공공의 복리를 중시하는 사람이어서, 다른 것들 가운데서 감옥을 포함하여 최고로 다양한 집단들에서 대중적인 과학에 관하여 강의를 열었다. 한 번은 그가 다음과 같은 말로 감옥에서 자신의 강의를 시작했다: ‘오늘 나는, 6년a 전에 내가 여기서 수행한 강의와 정확하게 동일한 강의를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그 강의를 이미 들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주 잘하는 짓이다!’ 그가 이 다소 도발적인 말을 하자마자 강의실의 불이 꺼졌다. 그는 나중에, 불이 다시 들어올 때까지 그는 다소 불안했다고 말했다.
지난 토요일 ㅡ 즉, 바로 마지막 순간에 ㅡ 와인가트너(Weingartner) 교수가 오늘 여기서 내가 강의를 하기로 기대한다고 나에게 알려주었을 때 나는 이 상황이 기억되었다. 내가 물론 나의 옛 강좌들 중에서 한 가지를 반복할 수 있다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파 교수를 생각했고 또한 나는 여기서 ‘나의 강의를 이미 들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잘하는 짓이다’라고 말할 수 없을 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파 교수보다 훨씬 더 나쁜 위치에 처했는데, 이유인즉 나에게 시간이 없어서 몇 번 시도하여 실패한 후에 나의 연구들 중 더 큰 연구를 재구성하여 새로운 서문을 붙이고 무엇보다도 8분의 7
1979년 7월 27일,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저자가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행한 강좌.
a 역주: ‘6년’은 박영태 번역에 ‘60년’이다.
정도 줄여서 제시하는 선택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정말로 사과하는데 특히 왜냐하면 나의 강좌가 여전히 너무 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고결한 청중 한두 분을 제외하고 아무도 나의 강좌를 알아채지 못하기를 나는 희망한다. 나의 강좌 제목은 ‘소위 인간 지식의 근원에 관하여’이다.
거의 2,500년 동안 지식론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로부터 비엔나 학파에 이르는 철학자들에게 관련된 이 지식론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지식의 근원에 대한 문제였다.
비엔나 학파의 주도자 한 명인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의 최근 저서 한 권에서조차 우리는 다음 행들에서 중요한 것을a 읽을 수 있다: 당신이 주장을 한다면 당신은 또한 그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이 다음 질문들에 답변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당신은 저것을 어떻게 아는가? 당신이 주장하는 것의 근원은 무엇인가? 어떤 관찰들이 당신이 주장하는 바의 기초를 이루는가?
내가 알기에 이 일련의 질문들은 아주 불만족스러워서 이 강좌 도중에 내가 왜 이 질문들을 그렇게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는지 그 이유들 몇 가지들 지적하고자 한다.
나의 주요 이유는, 이 질문들이 인간의 지식이라는 문제에 권위적인 태도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식의 근원이라는 권위의 그리고 특히 관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경우에만b 우리의 주장들은 신뢰될 수 있다고 그 질문은 전제한다.
대조적으로 그런 권위들 없다고 그리고 불확실성의 순간이 모든 주장에서 지속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심지어 관찰에 근거한 모든 주장들, 정말로 심지어 참인 모든 주장들에서도.
저것이 내가 여기서, 지식의 근원에 관한 옛 질문이 완전히 다른 질문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지식론에 대한 전통적인 질문에는, 정치이론에 대한 전통적인 질문과 특정 유사성이 있고 이 유사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지식론을 위하여 새롭고 더 합당한 질문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권위주의적인 지식의 근원에 관한 전통적인 질문은, 플라톤에 따른 정치이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부합한다. 나는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언급하고 있다.
a 역주: ‘중요한 것’의 원어는 something인데 박영태 번역은 ‘어떤 기준’이다.
b 역주: ‘~면, 그리고 그 경우에만’의 원어 표현은 if, and only if인데 박영태 번역은 ‘~경우와 그리고 경우에만(if and only if, 필요충분조건)’이다.
이 질문은 권위주의적인 답변을 요구한다. 전통적인 답변들을 다음과 같았
다: ‘최고의 사람들’ 혹은 ‘가장 현명한 사람들’. ‘인민들’이나 ‘다수’와 같은 이
질문에 대한 다양하고 표면적으로 진보적인a 답변들이 또한 그 질문의 권위주의적인 언명 안에 도사리고 있다.
부언하여 그 질문으로 인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대안들에 다다르기도 한다: ‘누가 우리의 통치자들이 되어야 하는가: 자본가들인가 노동자들인가?’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인식론적 질문과 유사하다: ‘무엇이 궁극적인 지식의 근원인가: 지성인가 혹은 감각들인가?)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명백히 잘못 표현되는 것이고 그 질문이 이끌어 내는 답변들은 권위주의적이다. (그것들은 또한 역설적이다.)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완전히 다르고 훨씬 더 겸손한 질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나쁘거나 무능한 통치자들이 (물론 우리가 피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마도 만나게 될) 최소량의 해코지만 저지를 수 있도록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치제도들을 조직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질문을 바꾸지 않으면, 국가와 국가 제도들에 대한 합리적인b 이론을 향하여 나아가기를 우리는 결코 희망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나의 견해로, 민주주의를 위한 유일한 이론적 토대는 이 훨씬 더 겸손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 놓여있다. 답변은 이렇다: 민주주의적 제도들은 우리가 피를 흘리지 않고 나쁘거나 무능하거나 독재적인 통치자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고안된다. (부언하여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ㅡ ‘대중의 통치’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ㅡ 생존함으로 인하여, 실제로 민주주의는 독재 예방이라는 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루려고 항상 시도하여 다행일지라도 플라톤주의와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불행하게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밝혀진다.)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의 지식의 근원에 관한 질문도 또 다른 질문에 의하여 갈음될 수 있다. 전통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았고 지금도 그렇다: ‘무엇이 우리의 지식에 대한 최고의 근원들인가 ㅡ 가장 신뢰될 수 있는 근원들이자 우리를 오류로 이끌고 가지 않을 근원들이고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마지막 최고법원으로서 우리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a 역주: ‘진보적인’의 원어는 liberal인데 박영태 번역은 ‘자유스럽게’이다.
b 역주: ‘합리적인’의 원어는 reasonable인데 박영태 번역은‘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이다.
지식에 대한 그런 이상적이고 무오류의 근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ㅡ 이
상적이고 무오류의 통치자들도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ㅡ 그리고 우리의 지식의 모든 ‘근원들’은 항상 우리를 오류로 이끌어갈지도 모른다고 전제할 것을 나는 제안한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전혀 다른 질문에 의하여 우리의 지식에 대한 근원들이라는 질문을 갈음하자고 제안한다: ‘오류를 탐지하여 제거하는 방법이 있는가?’
우리의 지식에 대한 근원들이라는 질문은, 그렇게 많은 권위주의적인 질문들처럼, 출처에 관한 질문이다. 그 질문은, 지식이 자체의 족보에 의하여 합당해질 것이라는 믿음에서, 우리의 지식에 대한 출처를 요구한다. 그 질문의 배후에 있는 (흔히 무의식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은, 인종적으로a 순수한 지식이자 흠결 없는 지식이고 가능하면 하느님 자신에게서 나온 최고의 권위에서 나오고 그리하여 독립적인 고귀함이라는 권위를 포함하는 지식이다. ‘어떻게 우리는 오류를 탐지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라는 나의 수정된 질문은, 그렇게 순수하고 흠결 없고 확실한 근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리고 출처나 순수성에 대한 질문들은 타당성이나 진리에 대한 질문들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서 나온다. 이 견해는 오래된 것이다: 이 견해는 제노파네스(Xenophanes)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노파네스는 기원전 약 500년에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추측과 견해일 ㅡ 진리(episteme)라기 보다는 억측(doxa) ㅡ 뿐임을 알았다. 이것을 우리는 그의 운문에서 알 수 있다.
신들(gods)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배우고 사물들을 더 잘 알 것이다b.
그러나 확고한 진리에 관하여,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고,
그것을 앞으로 알지도 못할 것이다; 신들(gods)에 관해서도,
내가 말하는 모든 것들에 관해서도.c
그리고 우연히 사람이 완벽한 진리를 말할지라도,
그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할 터이다:
모든 것이 추측으로 짜여진 그물이기 때문이지.
a 역주: ‘인종적으로’의 원어는 racially인데 박영태 번역은 ‘근본적으로’이다.
b 역주: ‘알 것이다’의 원어 표현은 may know인데 박영태 번역을 ‘알게 되었다네’이다.
c 역주: 이 구절의 원어 표현은 neither of the gods, Nor yet of all the things of which
I speak.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 어떤 신들로 알지 못할 것이라네, 내가 말하는 모든 사물들의
진리에 관해서.‘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에 대한 권위적 근원들을 묻는 전통적인 질문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제시된다 ㅡ 게다가 자신들이 모든 권위에 반항한다고 확신하는 심지어 실증주의자들과 다른 철학자들에 의하여 매우 빈번히.
‘우리가 어떻게 오류를 탐지하여 제거하기를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대한 합당한 답변은 내가 보기에 ‘다른 사람들의 이론들과 추측들을 비판함에 의하여 ㅡ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 수 있다면 ㅡ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우리 자신의 이론들과 사변적인 시도들을 비판함에 의하여.’ (부언하여, 우리 자신의 이론들에 대한 그런 비판은 매우 바람직하지만 필수불가결하지는 않다; 이유인즉 우리 자신이 그 이론들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신해서 그렇게 할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답변으로 인하여, 우리가 아마도 ‘비판적 합리주의’로서 묘사할 입장이 요약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인들에게 빚진 견해이자 태도이고 전통이다. 그 견해는, 데카르트와 그의 학파가 말하는 ‘합리주의’나 ‘지성주의(intellectualism)’와 그리고 심지어 칸트의 인식론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윤리와 도덕적 지식 분야에서, 칸트의 자율성 원칙(principle of autonomy)이 이 입장에 근접한다. 이 원칙은, 아무리 고귀할지라도 권위의 명령을 윤리의 토대로서 우리가 결코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깨달음을 표현한다. 이유인즉 우리가 권위의 명령에 직면할 때마다 복종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항상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권위에는 자체의 명령들을 강제하는 힘이 있을 것이고 우리에게는 저항할 힘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우리는 궁극적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유인즉 비판적인 결정은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명령에 복종하거나 불복종할 수 있다; 우리는 권위를 수용하거나 배척할 수 있다.
칸트는 이 개념들을 종교의 분야에도 대담하게 적용했다: 그의 견해로 종교의 가르침들이 선한 것으로서 수용되어야 하는지 사악한 것으로서 배척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책임은 우리의 책임이다.
이 대담한 진술을 고려하면, 자신의 과학에 대한 철학(philosophy of science)에서 칸트가 비판적 합리주의인 비판적 오류 탐색이라는 동일한 태도를 채택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딱 한 가지 것으로 인하여 칸트가 그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우주론 분야에서 칸트가 뉴튼의 권위를 수용한 것. 이렇게 수용한 것은, 뉴튼의 이론이 거의 믿을 수 없이 성공적으로 가장 엄격한 시험들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토대로 했다.
칸트에 대한 나의 해석이 옳다면, 비판적 합리주의는 ㅡ 내가 또한 옹호하는 비판적 경험주의 ㅡ 칸트의 비판적인 철학을 확대하려는 시도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앨버트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가능해졌을 따름인데 아인슈타인은, 뉴튼의 이론이 자체의 압도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여전히 오류일 것이라고 우리를 가르쳤다.
그래서 ‘당신은 저것을 어떻게 아는가? 당신이 주장하는 바의 근원이나 토대는 무엇인가? 어떤 관찰들을 토대로 당신이 주장하는 바가 세워지는가?’에 대한 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물론 나는, 내가 뭔가를 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나의 주장에는 추측인 가설로서의 의도만 있다. 또한 우리는 근원이나 근원들에 관하여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들로부터 나의 추측이 나왔을 것이다: 많은 가능한 근원들이 있고, 나는 그것들 모두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a. 아무튼 출처나 족보는 진실과 관련이 없다. 그러나 내가 나의 잠정적인 추측에 의하여 해결하려고 노력한 문제에 당신이 흥미를 갖는다면, 당신을 나를 도울 수 있다. 나의 잠정적 추측을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엄격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비판하려고 노력하라!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기에 아마도 나의 주장을 반증할 실험을 당신이 고안할 수 있다면, 그 주장을 당신이 반증하는 것을 돕도록 나의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수행할 준비가 나는 되어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답변은, 역사성 주장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어떤 과학적 주장에 관하여 이 질문이 제기된다는 조건으로만, 적용된다. 이유인즉 잠정적인 주장이 역사성 언급을 한다면, 그 주장의 타당성에 대한 비판적 토론은 물론 근원들을 ㅡ ‘궁극적’이고 ‘권위적’인 근원들을 아닐지라도 ㅡ 다루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답변을 근본적으로 동일할 터이다.
이제 나는 이 토론의 결과들을 요약할 예정이다. 나는 그 결과들을 8가지 논지들의 형태로 표현하겠다:
1. 지식의 궁극적인 근원들은 없다. 모든 근원, 모든 제안이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모든 근원, 모든 제안은 비판적 토론에 또한 종속된다. 우리가 역사성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닌 정보의 근원들을 조사한다기보다는 주장된 사실들 자체를 통상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2. 인식론에 관한 합당한 질문들을 실제로 근원들과 전혀 관련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주장이 참인지를 ㅡ 다시 말해서, 그 주장이 사실들과 일치하는지 ㅡ 묻는다.
진실에 대한 이 비판적 검토와 관련하여, 모든 종류의 논증들이 동원되어
a 역주: ‘나는 그것들 모두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의 원어 표현은 I am by no means aware of
them at all인데 박영태 번역은 ‘나는 그러한 출처들 모두를 다 아는 것은 결코 아니다’이다.
시험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절차들 중 한 가지 절차는 우리 자신의 이론들을 향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여 특히 우리의 이론들과 관찰들 사이의 모순점들을 찾는 것이다.
3. 전통은 ㅡ 타고난 지식과 별도로 ㅡ 단연코 가장 중요한 우리의 지식의 근원이다.
4. 우리의 지식의 근원들 대부분이 전통적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전통에 반대하는 것 다시 말해서 반(反)전통주의는 중요하지 않다고 밝혀진다. 그러나 이 사실은 전통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믿어져서는 안 된다; 이유인즉 아무지 작을지라도 우리의 전통적 지식의 모든 편린은 비판적 검토에 부쳐지고 필요하다면 전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이 없으면 지식은 불가능할 터이다.
5. 지식은 무(無: nothing)에서 ㅡ 백지상태에서 ㅡ 시작할 수 없고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찰로부터 시작할 수도 없다. 우리의 지식의 진전은 앞선 지식의 교정과 수정을 본질로 한다. 물론 관찰을 통해서나 우연한 발견을 통해서 전진 단계를 밟는다는 것이 때때로 가능하다; 그러나 관찰이나 발견의 중요성은 일반적으로 그로 인하여 우리가 현존하는 이론들을 수정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6. 관찰도 이성도 권위가 아니다. 지성적 직관이나 지성적 상상력과 같은 다른 근원들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들 또한 신뢰될 수 없다: 그것들로 인하여 우리는 사물들을 극도로 명확하게 볼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못된 길로 갈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우리의 이론들의 주요 근원들이고 그리하여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우리 이론들의 대다수는 허위이다. 관찰과 논리적 사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지만 또한 지성적 직관과 상상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미지의 것을 탐구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저 대담한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우리를 돕는 것이다.
7. 명징성(明澄性: clarity)은 본질적으로 지성적 가치이다; 그러나 정확성과 정밀성은 지성적 가치가 아니다. 절대적인 정밀성은 도달될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정밀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을 쓸모없다. 우리의 개념들을 ‘정밀하게’ 만들거나 심지어 그 개념들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그 개념들을 우리가 정의(定義: define)해야 한다는 개념은 기만적이다. 모든 정의(定義: definition)는 틀림없이 정의하는 개념들을 이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정의되지 않은 개념들로써 연구하는 것을 결코 피할 수 없다. 단어들의 의미나 정의와 연결된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이 순전히 언어적인 문제들은 지루하다: 그 문제들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도 회피되어야 한다.
8. 모든 문제 해결에는 미해결인 새로운 문제들이 생긴다. 원래 문제가 어려울수록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대담할수록, 이 새로운 문제들은 더 흥미롭다. 세상에 관하여 우리가 많이 알수록 그래서 우리의 학습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무지에 대한 우리의 지식인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a 대한 우리의 지식은 더 의식되고 분명하고 잘-정의될 것이다. 우리의 무지에 대한 주요 근원은, 우리의 무지가 틀림없이 반드시 무한한 반면 우리의 지식은 한정적일 수 있을 따름이라는 사실에 놓여있다.
우리가 하늘의 광활함을 관조할 때 우리의 무지가 광활하다는 개념을 우리는 얻는다. 우주의 규모가 우리의 무지의 가장 깊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규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의 원인들 중 하나이다.
세상에 관하여 더 많을 것을 발견하는 것만으로 우리에게 아는 게 얼마나 없는지를 우리가 가르침을 받을지라도, 그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아는 다양한 지식 편린들에서 우리가 크게 다를지라도 우리의 무한한 무지에서 우리 모두가 동등하다는 것을 때때로 기억하면 아마도 우리에게 혜택이 올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멀리 우리가 미지의 것을 관통했을지라도 우리가 지닌 지식의 전체 영역 안에서 비판을 넘어 발견될 권위가 없음을 우리가 수용한다면, 진리 자체는 인간의 모든 권위를 초월한다는 개념을 우리는 독단론의 위험 없이 간직할 수 있다. 정말로 우리는 이 개념을 간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개념을 간직해야 한다. 이유인즉 그 개념이 없으면 과학적 탐구에b 대한 객관적 기준도 있을 리 없고 추측된 우리의 해결책에 대한 비판도 있을 리 없고 미지의 것에 대한 모색도 있을 리 없고 그리고 지식 추구도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a 역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의 원어 표현은 what we do not know인데 박영태 번역은 ‘미지의 세계’이다.
b 역주: ‘과학적 탐구’의 원어 표현은 scientific inquiry인데 박영태 번역은 ‘과학적 지식’이다.
주석
'칼포퍼 원전+번역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1부 지식에 관하여, 5장 사회과학의 논리 (0) | 2020.10.12 |
---|---|
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1부 지식에 관하여 4장 과학과 비판 (0) | 2020.09.20 |
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1부 지식에 관하여 2장 지식과 무지에 관하여 (0) | 2020.09.12 |
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1부 지식에 관하여, 1장 지식과 실재의 형성 (0) | 2020.09.08 |
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서문 (0) | 2020.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