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부
지식에 관하여
1
지식과 실재의 형성
더 좋은 세상에 대한 탐구
나의 강좌 제목의 전반부는 나에 의해서가 아니라 알파크 토론회(Alpbach Forum)의 조직위원들에 의하여 선택되었다. 그들이 선택한 제목은 ‘지식과 실재의 형성(Knowledge and the Shaping of Reality)’였다.
나의 강좌는 3부로 구성된다: 지식; 실재; 그리고 지식을 통한 실재의 형성. 2부는 실재를 다루는데 3부를 위한 준비를 통해서 많은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단연코 가장 길다.
1. 지식
나는 먼저 지식으로써 시작하겠다. 우리는, 비이성주의(非理性主義: irrationalism)가 다시 한 번 유행하게 된 시대에 살고 있다. 결국, 내가 과학적 지식을 우리가 지닌 최고이자 가장 중요한 종류의 지식으로서 간주한다고 ㅡ 비록 내가 그 지식을 유일한 지식으로 전혀 간주하지는 않을지라도 ㅡ 선언함으로써 나는 시작하고 싶다. 과학적 지식의 핵심적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1. 과학적 지식은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문제들로써 시작한다.
주요 실용적인 문제에 대한 한 가지 사례는 예방 가능한a 질병에 대항하는 의술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 싸움으로 인하여 의도하지 않은 매우 심각한 결과가 생겼다: 인구 폭발. 이것은, 오래된 또 다른 문제가 새롭게 시급해졌음을 의미한다: 산아제한이라는 문제. 의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들 중 한 가지 과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정말로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발견하는 것이다.
1982년 알파크(Alpbach)에서 시행된 강좌. 부제목은 ㅡ ‘더 좋은 세상에 대한 탐구’ ㅡ 저자에
의하여 추가되었다.
a 역주: ‘예방 가능한’의 원어는 avoidable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우리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들이 새로운 문제들을 일으키는 것은 이런 방
식이다.
우주론에서 주요 이론적 문제의 사례는 중력이론이 어떻게 추가적으로 시
험될 것인지와 통합장이론이 어떻게 추가적으로 검사될 것인지 이다. 이론적으로나 실용적으로 모두 중요한 매우 큰 문제는, 면역체계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론적인 문제는, 설명되지 않은 자연적 사건들에 대하여 이해될 수 있는 설명을 제시하여 그 설명이 예측하는 바를 통하여 설명적 이론을 시험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2. 지식은 진리 탐구를 ㅡ 객관적으로 참이고 설명적인 이론들의 탐구 ㅡ 본질로 한다.
3. 지식은 확실성 탐구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른다. 인간의 지식 모두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고 그리하여 확실하지 않다. 진리와 확실성을 우리가 예리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귀결된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우리가 실수에 대항하여 부단히 싸워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가장 신중했을 때에도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우리는 전적으로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과학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ㅡ 오류 ㅡ 참이 아닌 이론을 우리가 참으로 간주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훨씬 더 드물게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어떤 이론이 참일지라도 그 이론을 허위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류인 실수와 싸운다는 것은, 객관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것과 허위사항들을 발견하여 제거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일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과학적 활동의 과제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과학자로서 우리의 목표는 객관적인 진리이다; 더 많은 진리, 더 흥미로운 진리, 더 이해될 수 있는 진리. 우리는 확실성을 합리적으로 겨냥할 수 없다. 인간의 지식은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자마자,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음을 우리가 결코 완벽하게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깨닫는다. 이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불확실한 진리들이 ㅡ 심지어 우리가 허위라고 생각하는 참인 서술들 ㅡ 있지만 불확실한 확실성들은 없다.
우리가 결코 어떤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없으므로, 확실성 탐구는 가치가 없을 따름이다; 그러나 진리 탐구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실수들을 탐구함에 의하여 그렇게 하여 우리는 그 실수들을 수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과학이자 과학적 지식은 항상 가설적이다: 그것은 추측성 지식이다. 그리고 과학의 방법은 비판적 방법이다: 진리를 위하여 일하면서 오류들을 찾아서 제거하는 방법.
물론 어떤 사람은 칸트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오래되고 유명한 질문”을 나에게 던질 것이다: ‘진리는 무엇인가?’ 그의 주요 저서에서 (884쪽짜리) 칸트는, 진리는 ‘지식의 대상에 대한 지식의 대응’ 외에 (순수이성비판, 2판본, 82쪽 이하.) 이 질문에 추가적인 답변을 제시하기를 거부한다. 나는 매우 유사하게 말할 것이다: 이론이나 서술은, 자체가 말하는 것이 실재에 대응한다면, 참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에 세 가지 추가적인 언급을 덧붙이고 싶다.
1. 모호하지 않게 언명된 모든 서술은 참이거나 허위이다; 그리고 그 서술이 허위라면 그 서술에 대한 부정은 참이다.
2. 그러므로 허위 서술들만큼 많은 참인 서술들만 있다.
3. 그런 모호하지 않은 서술 모두는 (그 서술이 참인지 우리가 확실하게 알지 못할지라도) 참이거나, 참인 부정을 지닌다. 이로부터, 진리를 확정된 혹은 확실한 진리와 동일시하는 것은 틀렸음이 귀결된다. 진리와 확실성은 예리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여러분이 법정에서 증인으로 소환된다면 여러분은 진실을 말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요구를 이해한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게 전제된다: 여러분의 진술은 사실들에 대응해야 한다; 여러분의 진술은 여러분이 지닌 주관적인 확신들에 의하여 (혹은 다른 사람들의 주관적인 확신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여러분의 진술이 사실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거짓말을 했거나 오류를 저질렀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철학자만이 ㅡ 소위 상대론자 ㅡ 당신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아니요, 나의 진술은 참입니다, 이유인즉 진리에 의하여 나는 사실들과의 대응을 제외한 것을 의미한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훌륭한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를 좇아서 유용성을 의미합니다; 혹은 독일과 미국의 많은 사회철학자들의 제안을 좇아서 진리에 의하여 내가 의미하는 것은 수용되는 것입니다; 혹은 사회에 의하여 제시되는 것입니다; 혹은 다수에 의하여 제시되는 것; 혹은 나의 이익집단에 의하여 제시되는 것; 혹은 아마도 텔레비전에 의하여 제시되는 것.’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오래되고 유명한 질문 뒤에 숨는 철학적 상대론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증오를 조장하는 거짓말 정치선동과 같은 사악한 것들로의 길이 열릴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다수의 상대론적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인식했어야 하고 인식할 수 있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그것을 알았고, 지식인의 배반(La Trahison des Clercs)의 (‘The Treason of the Intellectual’) 저자인 쥘리앙 방다(Julien Benda)도 알았다.
상대론은 지성인들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많은 범죄들 중 한 가지 범죄이다. 상대론은 이성과 인간성에 대한 배반이다. 몇몇 철학자들에 의하여 옹호되는 소위 진리의 상대성은, 진리의 개념과 확실성의 개념을 혼동함으로부터 생긴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유인즉 확실성의 경우에 우리는 정말로 확실성의 등급들을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더 많은 신뢰 가능성이나 더 적은 신뢰 가능성. 확실성은, 항상 쟁점이 되고 있는 것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도 상대적이다. 그래서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진리와 확실성의 혼동이라고 그리고 몇몇 경우들에서는 그 혼동이 아주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법학과 법 집행에 아주 중요하다.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피고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라’는 표현과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라는 개념으로 인하여 이것이 밝혀진다. 배심원들의 과제는, 자기들이 다루는 사건이 여전히 의심스러운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배심원이었던 사람은 누구나a, 확실성은 주관적인 판단의 문제인 반면 진실은 객관적인 것임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배심원에게 닥치는 어려운 상황이다.
배심원들이 합의에 ㅡ ‘규약(convention)’ ㅡ 도달할 때 이것은 ‘평결(verdict)’로 지칭된다. 평결은 자의적임과 거리가 멀다. 자신의 지식을 최대한도로 발휘하여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객관적인 진실을 발견하려고 노력함이 모든 배심원의 의무이다. 그러나 동시에, 배심원은 자신의 불확실성에,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진실에 관하여 합당한 의심이 들면 배심원은 피고에게 유리하도록 판단해야 한다.
그 과제는 힘들고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진실 탐구에서 언어적으로 언명된 평결로의b 이동은 결정의, 판단의 문제임을 그 과제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과학의 경우에도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 인하여,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실증주의’ 혹은 ‘과학주의’와 다시 한 번 결합되어 있다는 결론이 생길 것이다. 이 표현들이 남용의 용어들로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이것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용어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사실들을 왜곡한다는 것은 나에게 정말로 문제가 된다.
과학적 지식에 대한 나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학주의를 신봉하는 사
a 역주: ‘배심원이었던 사람은 누구나’의 원어 표현은 Anyone who has ever been a juror인데
박영태 번역은 ‘배심원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이다.
b 역주: ‘평결’의 원어는 verdict인데 박영태 번역은 ‘판결’이다.
람이 아니다. 이유인즉 과학주의는 과학적 지식의 권위를 독단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어떤 권위도 신뢰하지 하지 않고 독단론에 항상 저항했다; 그리고 나는 특히 과학에서 독단론에 계속해서 저항한다. 과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신뢰해야 한다는 논지에 나는 반대한다. 나에 관한 한, E. M. 포스터(Forster)가 말하는 바와 같이, ‘나는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특히 과학에 대한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기껏해야, 믿음은 윤리학에서 자리를 차지하는데 심지어 여기서도 몇 가지 사례들에서만이라고 나는 믿는다. 예를 들어 객관적 진리는 가치라고 ㅡ 다시 말해서, 아마도 존재하는 가장 큰 가치인 윤리적 가치 ㅡ 그리고 잔인성은 가장 큰 죄악이라고 나는 믿는다.
실재를 신뢰하지 않는 것과a 인간과 동물이 겪는 고통의 무한한 중요성을 신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인간의 소망과 인간의 선함의 실재와 중요성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이라고 내가 생각한다는 이유로만 나는 또한 실증주의자가 아니다.
나를 빈번히 겨냥하는 또 다른 비난은 다른 방식으로 답변되어야 한다. 이것은, 내가 회의론자라는 그리하여 내가 나 자신을 부정하고 있거나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Tractatus] 6. 51에 따라서) 비난이다.
내가 (항진명제적이[恒眞命題的이: tautological] 아닌) 진리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한, 나를 회의론자로서 묘사하는 것은 (고전적 의미에서) 정말로 옳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합리적인 사상가에게, 가령,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이나 타스키(Tarski)에게 성립한다. 그리고 그들처럼 나도 고전적 논리를 (내가 비판의 추론 수단으로서 해석하는; 다시 말해서, 증명의 추론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반증의, elenchos의 추론 수단으로서) 수용한다. 그러나b 나의 입장은, 오늘날 보통 회의론적으로 지칭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 명의 철학자로서 나는 의심과 불확실성에 관심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주관적인 상태들이기 때문이고 오래전에 주관적인 확실성에 대한 탐구를 불필요한 것으로서 내가 포기했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을 끄는 문제는, 진리 탐구에서 또 다른 이론에 대하여 한 가지 이론을 선호하기 위한 객관적으로 비판적인 합리적 근거들이라는 문제이다. 현대 회의론자 누구도 나에 앞서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나는 상당히 확신한다.
이것으로 ‘지식’에 관한 나의 언급들을 당분간 끝낸다; 이제 나는 ‘실재’라
a 역주: ‘실재를 신뢰하지 않는’의 원어 표현은 not to believe in reality인데 박영태 번역에는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접속사는 But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래서’이다.
는 주제로 선회하여 나는 ‘지식을 통한 실재의 형성’을 토론하여 끝낼 것이다.
2. 실재
I
우리가 살고 있는 실재의 부분들은 물질적이다. 우리는, 인류가 단지 최근에 ㅡ 나의 생애 80년 동안에 ㅡ 정복한 지구의 표면에서 산다. ‘조금’을 강조하여 우리는 지구의 내부에 관하여 조금 안다. 지구와 별도로, 태양과 달과 별들이 있다. 태양, 달 그리고 별들은 물질적인 것들이다. 지구는, 태양과 달과 별들과 함께, 우주에 대한 우리의 최초 개념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 우주에 대한 탐구는 우주론의 과제이다. 모든 과학은 우주론에 도움을 준다.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물체들을 지구상에서 발견했다: 생물과 무생물. 두 가지 물체들은 물리적 물체들의 세계인 물질적 세계에 속한다. 나는 이 세계를 ‘세계 1’로 지칭하겠다.
나는 ‘세계 2’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우리의 경험, 특히 인간의 경험 세계들을 언급하겠다. 심지어 세계 1과 세계 2의, 다시 말해서 물리적 세계와 경험 세계의 용어사용법적 및 잠정적 구분은 많은 반론을 낳았다. 그러나 이렇게 구분하여 내가 의미하는 유일한 것은, 적어도 세계 1과 세계 2가 일견a 다르다는 것이다. 그 세계들이 지닌 가능한 독자성을 포함하여, 그 세계들 사이의 관련성들은 물론 가설들을 사용하여 우리가 탐구할 필요가 있는 것들의 한 부분이다. 그 세계들을 언어적으로 구분함에 의하여 미리 판단되는 것은 없다. 제시된 언어사용법의 요점은, 문제에 대한 분명한 정식화를 용이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마도 동물들 또한 경험을 겪는다. 이것은 때때로 의심을 받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의심을 토론한 시간이 없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 심지어 아메바도 경험을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이유인즉 우리의 꿈으로부터 혹은 고열이나 유사한 증상을 지닌 환자들로부터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매우 다양한 의식 등급들이 있는 주관적인 경험들이 있기 때문이다. 깊은 무의식 상태나 심지어 꿈을 꾸지 않는 수면 상태에서 우리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그것과 함께 우리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의식적 상태들이 또한 존재하고 그 상태들도 세계 2에 포함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세계 2와 세
a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prima facie인데 박영태 번역은 ‘분명하게’이고 강조되지 않았다.
계 1에는 아마도 이동이 또한 발생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가능성들을 독단적으로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물리적 세계인 세계 1이 있는데 그 세계를 우리는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고 그 세계는 또한 특히 압박과 운동과 힘(forces)과 힘의 장(場: fields) 상태들이나 사건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모든 의식적 경험들의 세계이자 우리가 상상하는 바, 무의식적 경험들의 세계인 세계 2가 있다.
‘세계 3’에 의하여 나는, 인간 정신의 객관적 산물들의 세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 2의 인간적 부분들이 만들어내는 산물들의 세계. 인간 정신의 산물들의 세계인 세계 3은, 저서들과 교향곡들과 조각품들과 구두들과 항공기들과 컴퓨터들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또한 완전히 간단한 물리적 대상들로 아주 명백하게 세계 1에도 속하는데 냄비나 곤봉 같은 것들이다.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계획되거나 의도적인 모든 산물은, 그것들 대부분이 세계 1 대상들이기도 할지라도, 세계 3안으로 분류된다는 것은 이 용어사용법과 관련하여 중요하다.
그리하여 이 용어사용법으로 우리의 실재는 세 가지 세계들로 구성되는데 그 세계들은 상호 연결되면서 어느 정도 서로 영향을 미치고 또한 부분적으로 서로 중첩된다. (‘세계’라는 단어는 분명히 우주가 아니라 더 정확하게 우주의 부분들을 의미하도록 여기서 시용되고 있다.) 이 세 가지 세계들은: 물체들과 물리적 상태들인 사건들과 힘들(forces)의 물리적 세계 1; 경험들과 무의식적인 정신적 사건들의 세계 2; 그리고 정신적 산물들의 세계 3이다.
세계 1만 실재적으로서 간주하는 소위 유물론자들이나 물리주의자들인 철학자들이 몇몇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리고 세계 2만 실재적으로서 간주하는 소위 비유물론자들인 다른 철학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심지어 몇몇 물리학들은 유물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속했고 지금도 속한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인데 그는 (그에 앞선 버클리[Berkeley] 주교처럼) 우리의 감각적 인상들만 실재적으로서 간주했다 ㅡ 아마도 항상은 아닐지라도. 그는 중요한 물리학자였지만 물질이론에서 난제들을 해결하는 그의 방식은,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원자도 없고 분자도 없다고 그리고 이 정신적인 구축물들은 불필요하고 아주 기만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다음에 소위 이원론자들(二元論者들: dualists)이 있었다. 그들은, 물리적 세계 1과 심리학적 세계 2 모두가 실재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훨씬 더 멀리 가고 있다a: 물리적 세계 1과 심리학적 세계 2가 실재적이고 그리하여 예를 들어 자동차나 칫솔과 동상과 같은 인간 정신의 물리적 산물 모두가 실재적이라고 나는 전제할 뿐만 아니다; 세계 1에도 속하지 않고 세계 2에도 속하지 않은 정신적 산물들이 동등하게 실재적이라고 나는 또한 전제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 3에는 비물질적 주재원들이 존재한다고 나는 전제하는데 그 주재원들은 실재적이고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문제들.
세계 1, 2 그리고 3의 순서는 (이 숫자들에 의하여 지적되는 바와 같이) 그 세계들의 나이에 상응한다. 우리가 지닌 추측성b 지식의 현재 상태에 따르면, 세계 1의 무생물 부분은 단연코 가장 오래되었다; 그다음에 세계 1의 생물 부분이 오고 동시 혹은 다소 나중에 경험들의 세계인 세계 2가 온다; 그리고 그다음에 인류의 도래와 동시에 정신적 산물들의 세계인 세계 3이 온다; 다시 말해서 인류학자들이 ‘문화’라고 부르는 세계.
II
이제 나는, 물리적 세계 1로 시작하여 이 세 가지 세계들 각각을 더 상세하게 토론하기를 원한다.
나의 현재 주제가 실재이기 때문에, 물리적 세계 1은 내가 주장하는 세 가지 세계들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실재적’으로서 간주될 자격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나는 출발하고 싶다. 이것으로 나는 실제로, ‘실재’라는 단어가 물리적 세계에 적용되고 있음에 의하여 자체의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나는 그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마흐(Mach)의 선배 버클리 주교가, 물리적 물체들의 실재를 부인했을 때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은 온 힘으로 돌멩이를 걷어차면서 ‘나는 이래서 그를 반박한다’고 말했다. 물질의 존재를 증명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돌멩이의 저항이었다: 돌멩이는 반대로 밀었다! 이것에 의하여 나는, 존슨이 일종의 반발력이자 반향으로서 실재인 저항을 느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슨은 물론 이런 방식으로 어떤 것도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없었을지라도, 그는 그런데도 우리가 어떻게 실재를 이해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
어린이는 효과를 통하여, 저항을 통하여 실재적인 것을 배운다. 벽인 난간은 실재적이다. 집어서 입안에 넣어질 수 있는 것은 실재적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길을 방해하거나 우리에게 반대하여 행동하는 고체들은 실재적이다. 고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 am going still further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에 관한 논의를 조금 더 진행시켜보자’이다.
b 역주: ‘추측성’의 원어는 conjectural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체들은 실재에 대하여 우리가 지니는 핵심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우리에게 부여하고 그 개념은 이 핵심으로부터 퍼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체들을 변화시킬 수 있거나 고체들에게 작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시킨다. 이것으로 인하여 먼저 물과 공기가 실재적이 된다; 그리고 또한 끌어당기는 전자기력, 그리고 중력; 냉온; 운동과 정지가 실재적이 된다.
그리하여 레이더와 같이 우리나 다른 실재적인 물체들에게 반사할 수 있고 반사를 당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실재적이다; 혹은 우리에게 또는 다른 실재적인 물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 이것이 충분히 분명하기를 나는 소망한다. 이것은 지구와 태양, 달과 별들을 포함한다. 우주는 실재적이다.
III
나는 유물론자가 아니지만 나는 유물론적 철학자들, 특히 위대한 원자론자들인 데모크리투스(Democritus), 에피큐러스(Epicurus) 그리고 루크레티우스(Lucretius)에게 감탄한다. 그들은 고대의 위대한 계몽 철학자들로 미신을 반대했으면 인류를 해방시킨 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유물론은 자체를 초월했다.
우리 인간은 한 가지 종류의 효과에 익숙하다: 우리는 스위치 같은 대상에 다가가서 그 대상을 누른다. 아니면 우리는 팔걸이의자를 밀거나 밀친다. 유물론은, 실재가 물체들로만 구성된다는 이론이었는데, 그 물체들은 접촉에 의한 밀치기나 행위인 압력을 통하여 서로에게 작용한다. 유물론에는 두 가지 해석본들이 있다: 먼저 원자론인데, 너무 작아서 보일 수 없는 작은 입자들이 서로 상호연결되어 서로 충돌한다고 가르쳤다. 입자들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다른 해석본은 공간이 없다고 가르쳤다. 물체들은, 차로 채워져 저어진 찻잔 속의 찻잎들과 다소 같게 ‘가득 찬’ ㅡ 아마도 ‘에테르(ether)’로 가득 찬 ᅳ 세상 속에서 움직인다.
이해될 수 없거나 친숙하지 않은 작동 방식들이 없다는 것이 ㅡ 압력, 밀치기와 밀기만 있다 ㅡ 두 가지 이론들 모두에게 근본적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당기기와 인력도 압력과 밀기를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개목줄로 개를 당길 때 실제로 효과는, 개의 목줄이 개에게 압력을 발휘하거나 개를 민다는 것이다. 개목줄은 쇠사슬처럼 작용하는데 그 쇠사슬의 연결고리들이 서로를 압박하고 있거나 밀고 있다. 당기기, 인력은 어떤 정도로든 압력에 의하여 틀림없이 설명된다.
압력과 밀기에 관한 이 유물론적 철학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특히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에 의하여 또한 제기되었는데 힘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흔들렸다. 먼저 원격작용을 하는 인력으로서 뉴튼의 중력이론이 왔다. 그다음에 라이프니츠(Leibniz)가 나타났는데 그는 원자들이 통과될 수 없고 밀기를 할 수 있다면, 원자들이 틀림없이 반발력의 중심들임을 밝혔다. 그다음에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이 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접촉에 의한 밀기, 압력 그리고 작용도 원자들의 전자껍질의 전기적 반발에 의하여 설명되었다. 저것이 유물론의 끝이었다.
유물론을 대신해서 물리주의가 왔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압력과 밀기를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것이 모든 다른 효과들과 그리하여 실재 전체를 설명한다고 믿었던 세계의 개념 대신에, 미분방정식들에 의하여 그리고 닐스 보어와 같은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들이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고 궁극적으로 보어가 반복적으로 주장한 바와 같이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던 공식들에 의하여 효과들이 서술된 철학이 왔다.
현대 물리학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과도하게 단순화된 방식으로 서술될 수 있다: 뉴튼, 패러데이(Faraday) 그리고 맥스웰과 동시에 유물론은 아무도 몰래 끝났다. 아인슈타인, 드 브로이(de Broglie) 그리고 슈뢰딩거가 자신들의 연구 프로그램을 물질 자체의 본성에 대한 설명으로 지향했을 때 유물론은 스스로를 초월했다; 수평적 진동들(oscillations), 진동들(vibrations) 그리고 파동들(waves)을 통하여; 물질의 수평적 진동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힘(forces)의 장들(fields)로 구성되는 비물질적 에테르의 진동들. 그러나 이 프로그램도 역시 구식이 되어서 훨씬 더 추상적인 프로그램들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예를 들어, 물질을 확률의 장들(fields)의 진동들로서 설명하는 프로그램에 의하여. 모든 단계마다 다양한 이론들이 극도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 이론들은 훨씬 더 성공적인 이론들에 의하여 따라잡혔다. 저것이, 개괄적으로 말해서, 내가a 유물론의 자기-초월로 지칭하는 것이다. 저것은 정확하게, 물리주의가 유물론과 전혀 다른 것인 이유이기도 하다.
IV
물리학과 생물학 사이에서 발전한, 빠르게 변하는 관계들을 기술하는 것은 너무 길 터이다. 그러나 자연선택에 관한 현대 다윈 이론의 관점에서, 동일한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방식들로 재현될 수 있음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재현의 한 가지 방식은 전통적이다; 나머지 한 가지 방식은, 그러나, 내가
a 역주: ‘내가’의 원어 표현은 I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보기에 두 가지 방식 중 단연코 더 좋은 것이다.
다윈론은 통상적으로 잔인한 철학으로서 간주된다: 다윈론은 ‘이빨과 발톱이 빨간 자연’을 묘사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일반적인 생명체들에게 자연이 적대적인 위협을 가하는 그림. 나의 주장은, 이것이 다윈론의 편향된 견해라는 것인데 그 견해는 다윈 이전에 존재했던 이념들에 (맬서스, 테니슨[Tennyson], 스펜서[Spencer]) 의하여 영향을 받았고 다윈론의 실제 이론적 내용과 거의 관계가 없다. 다윈론이 소위 ‘자연선택’을 크게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다윈은 맬서스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맬서스는 인구증가가 식량부족과 결합하여 잔인한 경쟁인 최강자의 선택과 그만큼 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전멸을 야기할 것임을 밝히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맬서스에 따르면, 심지어 최강자들도 경쟁에 의하여 압력을 받는다: 최강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에너지를 발휘하도록 강요를 받는다. 그리하여 이 해석을 토대로, 경쟁은 자유의 제약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밝혀질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확대하기를 추구한다: 인간은 새로운 가능성들을 탐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체장애자들과 같은 개별적 인간을 위한 장소들을 포함하여 새로운 생태적 장소들의 발견 및 건설과 함께, 생계유지의 새로운 수단들과 그 수단들과 함께 생명의 새로운 가능성들의 발견을 선호하는 과정으로서 경쟁은 분명히 간주될 수 있다.
이 가능성들은, 증가된 선택의 자유와 더 많은 자유라는 대안적 결정들 사이에서의 선택을 수반한다.
그 두 가지 해석들은 그리하여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 번째 해석은 비관론적이다: 자유의 제약. 두 번째 해석은 낙관론적이다: 자유의 확대. 두 가지 해석들 모두는 물론 과도한 단순화이지만 진리에 대한 훌륭한 근사치로서 간주될 수 있다. 두 가지 해석들 중 한 가지 해석이 더 좋은 해석이라고 우리는 주장할 수 있는가?
우리가 주장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경쟁 사회의 커다란 성공과 그 성공이 가져온 커다란 자유의 확대는 낙관론적 해석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그 해석은 더 좋은 해석이다. 그 해석은 진리에 더 가깝다, 그 해석은 더 많은 것을 설명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내부로부터의 압력인 개인적인 주도권과 새로운 가능성 탐색 및 새로운 자유 탐색 그리고 이 가능성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활동이,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보다 더 효율적인데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은 더 약한 개체들이 제거되고 심지어 가장 강한 자의 자유가 축소된다.
이 언급들 내내 나는, 인구증가 때문에 발생하는 압력을 당연시하고 하고 있다.
이제 다윈의 진화론을 자연선택을 통하여 해석하는 문제는 내가 보기에 맬서스의 이론을 해석하는 문제와 아주 유사하다.
오래되고 비관적이고 여전히 수용되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적응에서 생명체들을 수행하는 역할은 순전히 수동적이다. 생명체들은 매우 이질적인 개체군(個體群: population)을 구성하는데 그 개체군으로부터 경쟁이자 생존투쟁에 의하여 다른 개체들이 제거됨에 의하여 (대체로) 최고로 잘 적응된 개체들을 선택된다. 선택압력은 외부에서 온다.
모든 현상들, 특히 적응 현상들은 이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을 참고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 통상적으로 크게 강조된다a. (유전자 집합)의 변화 가능성인 돌연변이들을 제외하여 내부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나의 새로운 낙관론적 해석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활동을 강조한다 (베르그송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모든 생명체들은 문제해결에 완전히 몰두한다.b 그들의 첫 번째 문제는 생존이다. 그러나 가장 다양한 상황들에서 발생하는 셀 수 없이 많은 구체적인 문제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 한 가지 문제는 더 좋은 생활 환경을 찾는 것이다: 더 큰 자유를 찾는 것; 더 좋은 세상을 찾는 것.
이 낙관론적 해석에 따라서, 강력한 내부 선택압력이 매우 초기에 존재하게 되는 것은 자연선택을 통해서이고 (우리가 상상할 바) 외부적 선택압력을 통해서이다; 생명체들이 자기들의 환경에 발휘하는 선택압력. 이 선택압력은, 우리가 새로운 생태적 지위의 탐색으로서 해석할 종류의 행태로서 드러난다. 때때로 그것은 심지어 새로운 생태적 지위의 건설이 된다.
이 내부로부터의 압력은 지위들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생활방식과 환경의 선택으로서 간주될 행태의 형태들로 이어진다. 이것은 친구들 선택, 공생(共生: symbiosis)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마도 생물학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배필의 선택을 포함한다고 틀림없이 생각된다; 그리고 특정 종류의 먹이, 특히 태양광선에 대한 선호.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내부적 선택압력이 있다; 그리고 낙관론적 해석은 이
a 역주: ‘크게 강조된다’의 원어 표현은 Great emphasis is (usually) put (on)인데 박영태 번역은
‘잘 (설명할 수 있다)’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ll organisms are fully occupied with problem-solving.인데 박영태
번역은 ‘모든 유기체는 문제 해결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이다.
내부로부터의 선택압력을 적어도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만큼 중요한 것으로서
간주한다: 생명체들은, 심지어 스스로 생명체의 변화를 겪지 않고도, 새로운 지위를 탐색한다; 그리고 생명체들은, 자기들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선택된 지위의 선택압력인 외부적 선택압력의 결과로서 나중에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과 내부로부터의 선택압력 사이에는 상호작용들의 원(circle) 혹은 더 정확하게 나선형이 있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두 가지 해석들에 의하여 다르게 답변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이 원이나 나선형에서 어느 고리가 능동적이고 어느 고리가 수동적인가? 옛 이론은 능동성을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 안에 둔다; 새로운 이론은 내부로부터의 선택압력 안에 둔다: 선택하는, 능동적인 것은 생명체다. 두 가지 해석들 모두는 동일한 객관적 내용에 대한 이념적 해석들이자 이념들이라고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두 가지 해석들 중 다른 한 가지 해석에 의해서보다 한 가지 해석에 의하여 더 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생명체가 생명이 없는 자체의 환경에 대한 생명체의 승리로서 간략하게 서술할 터이다. 본질적인 사실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 대부분이 생각하는 ㅡ 몰론 가설적으로 ㅡ 바와 같이 모든 생명이 점진적으로 진화한 원초적인 세포가 있었다. 다윈론의 진화론적 생물학에 따르면 이것은, 자연이 극도로 잔인한 끌(chisel)을 사용하여 생명체를 다루었다는 가설에 의하여 제일 잘 설명되는데 그 끌(chiesel)은 그다음에 우리가 놀라는 모든 생명이 있는 적응을 조각했다.
그러나 이 견해를 부인하는 한 가지 사실을 우리는 지적할 것이다: 원초적 세포는 여전히 살아있다. 우리는 모두 그 원초적 세포이다. 그것은 심상도 아니고 은유도 아니며 더 정확하게 문자 그대로 진리이다.
나는 이것에 대하여 매우 간략한 설명만 제시하고 싶다. 세포에게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 가능성은 죽음이고, 두 번째는 세포분열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융합이다: 또 다른 세포와 합치는 것인 결합인데 그 결합으로 인하여 거의 항상 분열이 일어난다. 분열이나 결합은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번식의 과정이고 하나의 살아있는 세포가 거의 동일한 두 개의 살아있는 세포들로 변하는 것이다. 그것들 모두는 원래 세포가 살아서 계속되는 것이다. 원초적 세포는 수십억 년 전에 나타났고 원초적 세포는 수십조의 세포들의 형태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세포는, 지금 살아있는 모든 세포들 중 각각 하나의 세포 안에 여전히 계속해서 살아간다. 그래서 생존한 적이 있는 모든 것과 오늘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원초적 세포가 분열들을 일으킨 결과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원초적 세포로 구성되는데 그 세포는 여전히 살아있다. 이것들은, 생물학자가 논쟁할 수 없는 문제들이고 어떤 생물학자도 논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혹시 나의 현재 신체의 원자 하나도 30년 전에 나의 몸속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라도, 내가 30년 전과 동일하다는 의미와 유사한 의미에서 (유전자 동일성[genidentity]a) 우리 모두는 원초적인 세포이다.
‘이빨과 발톱’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환경에 대한 그림 대신에, 작고 하찮은 생명체가 수십억 년 동안 생존에 성공하고 자체의 세상을 정복하여 개선하는 데 성공한 환경을 나는 본다. 그러므로 생명체와 환경 사이에 투쟁이 있다면 생명체가 승리했다. 다윈론에 대하여 다소 수정된 이 개념으로 인하여 옛 이념에 대한 견해와 완전히 다른 개념 즉, 생명체의 활동과 생명체의 더 좋은 세상을 탐구 덕분에 생명체에게 점점 더 쾌적하고 점점 더 많이 호의적인 된 세상에 우리가 산다는 견해가 생긴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누가 이 견해를 인정하고 싶을까? 오늘날 모든 사람이 세상이 그리고 ‘사회’가 전체적으로 사악하다는 설득력이 있는 허구를 신뢰한다; 이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모든 사람이 하이데거와 히틀러, 그리고 전쟁을 신뢰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러나 사악함에 대한 그릇된 신뢰 자체가 사악하다: 그 신뢰로 인하여 젊은이들이 낙담하고 의심과 절망 그리고 심지어 폭력에 잘못 발을 들여놓는다. 이 그릇된 신뢰는 본질적으로 정치와 관련될지라도, 다윈론에 대한 옛 해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뢰에 기여했다.
매우 중요한 논지가 그 비관론적인 이념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데 즉, 환경에 대한 생명체의 적응과 수십억 년에 걸친 생명체의 이 모든 (내가 생각하기에 놀라운) 발명품들은 오늘날 우리가 실험실에서 아직 재창조할 수 없는데 전혀 발명품들이 아니고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생명체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았고, 그것 모두는 순전히 우연한 돌연변이들과 자연선택의 기제(機制: mechanism)라고 주장된다; 생명체의 내부 압력은 자기-번식 이상의 것이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은 서로 대항하고 자연에 대항하는 정말로 맹목적인 투쟁인 우리의 투쟁을 통하여 발생한다. 그리고 먹이로서 태양의 이용과 같은 것들은 (나의 견해로 놀라운 것들) 우연의 결과이다.
나는, 이것이 다시 한 번 이념, 그것도 정말로 옛 이념의 한 부분일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념에, 그런데,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허구와 (이유인즉 유전자들은 협동에 의하여 기능하고 생존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현재 새롭고 우활하게(naively) 결정론적인 ‘사회생물학’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부활한 사회적 다윈론이 속한다.
a 역주: ‘유전자 동일성’은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이제 나는 두 가지 이념들의 주요점들을 조합하고 싶다.
1. 옛 이념: 외부로부터의 선택압력은 살해에 의하여 작용한다: 그 압력은
제거한다.a 그리하여 환경은 생명에게 적대적이다.
새 이념: 내부로부터의 능동적인 선택압력은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생태적 지위, 더 좋은 세상에 대한 탐구이다. 그 압력은 최고로
생명에게 호의적이다. 생명체는 자체를 위하여 환경을 개선하고
환경이 생명에게 더 호의적이게 (그리고 인간에게 더
우호적이게) 만든다.
2. 옛 이념: 생명체들은 완전히 수동적이지만 생명체들을 능동적으로
선택된다.
새 이념: 생명체들은 능동적이다: 생명체들은 문제-해결에 부단히
몰두한다. 생명체는 문제-해결을 본질로 삼는다. 해결책은
흔히 새로운 생태적 지위의 선택이거나 건설이다. 생명체들은
능동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활동은 부단히 증가한다.
(인간에게서 활동을 부인하려는 시도는 ㅡ 결정론자들이
그렇게 하려는 바와 같이 ㅡ 특히 우리가 지닌 비판적인
정신적 활동과 관련하여 역설적이다.)
동물의 생명이 바다에서 시작되었다면 ㅡ 우리가 상상할
바와 같이 ㅡ 그 환경은 많은 측면들에서 상당히
균일적이었다. 그러나 동물들은 (곤충들을 제외하고) 육지로
올라가기 전에 척추동물로 발전했다. 그 환경은 생명체에게
동등하게 호의적이었고 상대적으로 차별이 없었지만 생명체
자체는 예견될 수 없이 큰 숫자의 다양한 형태들로 분화했다.
3. 옛 이념: 돌연변이들은 순전히 우연의 문제이다.
새 이념: 그렇다; 그러나 생명체들은 생활을 개선하는 놀라운 것들을
부단히 발명하고 있다. 자연, 진화 그리고 생명체들은 모두
발명적이다. 그것들은, 발명가들로서, 우리가 실행하는 동일한
방식으로 일한다: 시행과 오류제거의 방식을 사용하여.
4. 옛 이념: 잔인한 제거 행위들을 통한 진화에 의하여 도전을 받는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새 이념: 최초의 세포는 수십억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살아있고 지금은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eliminates.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 압력은 종을 멸절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이다.
심지어 수십조로 복제되어 여전히 살아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곳마다 최초의 세포는 그곳에 있다. 최초의 세포는 우리의
지구를 정원으로a 만들었고 우리의 환경을 초록 식물들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최초의 세포는 우리의 눈(eyed)을
만들어 푸른 하늘과 별들을 보게 만들었다. 최초의 세포는
잘 작동하고 있다.b
V
이제 나는 세계 2로 선회한다.
생명체와 그의 환경에서의 개선사항들은, 동물 의식의 확대 및 향상과 연관된다. 문제-해결인 발명은 완벽하게 의식적인 행위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시행착오라는 수단에 의하여 항상 이루어진다: 시험들과 오류 제거라는 수단에 의하여; 그것은, 생명체와 그의 세계인 생명체의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의 과정에 의식이 때때로 개입한다. 세계 2인 의식은 아마도 바로 처음부터 문제-해결 의식인 평가하는 그리고 감지하는 의식이었다. 물리적 세계의 생물적 부분에 대하여, 나는 모든 생명체들이 문제 해결자들이라고 말했다. 세계 2에 관한 나의 기본적 전제는, 세계 1의 생물 부분의 이 문제-해결 활동인 의식의 세계가 세계 2의 창발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의하여 나는, 생명체들에 대하여 내가 주장했던 바와 같이, 의식이 항상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생명체들은 매일 문제-해결에 몰두하지만, 문제들의 해결이 의식의 가장 중요한 생물학적 기능일지라도 의식은 문제들의 해결에 관심을 갖는 것만은 아니다. 나의 가설은, 의식의 원래 과제는 문제-해결에서 성공 및 실패를 예상하여 생명체가 문제 해결로 가는 올바른 혹은 잘못된 통로에 있는지를 즐거움과 고통의 형태로 생명체에게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다. (‘통로[path]’는 우선 ㅡ 아메바의 경우에서처럼 ㅡ 생명체의 물리적 방향에 대한 통로로서 전적으로 문자 그대로 이해될 수 있다.) 즐거움과 고통의 경험을 통해서 의식은 생명체의 발견 여행들에서 그리고 생명체의 학습 과정들에서 생명체를 돕는다. 그리하여 의식은 기억의 기제들(mechanisms) 중 많은 기제들에 개입하는데 그 기제들 ㅡ 다시 생
a 역주: ‘정원’의 원어는 garden인데 박영태 번역은 ‘비옥한 곡창 지대’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is doing well.인데 박영태 번역은 ‘세포는 점차 좋아지고 있다.’이다.
물학적 이유들 때문에 ㅡ 모두가 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기억의 기제들 중 다수가 의식적임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의식의 다수 기제들은 서로 개입할 터이다. 서로 완벽하게 밀착되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사건들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이유 ㅡ 이것은 거의 선험적으로 밝혀질 수 있다 ㅡ 때문이다.
그리하여 거의 불가피하게 무의식의 영역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기억 장치와 연결되어 나타난다. 그 영역은 무엇보다, 우리의 환경에 관해서인 우리의 지역적 생물학적 지위에 관한 일종의 무의식적인 지도를a 포함한다. 이 지도를a 그리고 그 지도가a 포함하는 기대들을 조직하여 기대들을, 즉 이론들을 이어서 언어적으로 정식화하면 인지 장치의 과제가 되고 그 장치에는 그리하여 물리적 세계이자 세계 1인 세포들과 상호작용하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면모들의 있다; 사람에게서는 두뇌와 상호작용하는.
그래서 나는 세계 2를, 마흐(Mach)가 감각들과 시각들과 청각들 및 기타 등등으로서 서술한 것으로서 간주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들 모두를, 우리의 다변적인 경험들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거나 분류하는 데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세계 2에 대한 이론에 도달하는 데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시도들로서 간주한다.b
우리의 근본적인 출발점은 의식의 생물학적 기능들이 무엇이고 이 기능들 중 어느 기능들이 가장 기본적인가라는 질문이어야 한다c. 어떻게 우리가, 세상에 관한 정보를 능동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감각들을 발명하는지를 우리는 또한 물어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촉감 기술을 배우고 광영향성(光影響性: phototropy), 시각과 청각을 발전시키는지. 그리하여 우리는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하고 환경에 관하여 새로운 기대들로써 그리고 새로운 이론들로써 대응한다. 그리하여 세계 2가 세계 1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나타난다.
(자연스럽게 그리하여 재빠른 행동들을 위하여 신호들을 발견하는 추가적인 문제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들은 이것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VI
a 역주: ‘지도’의 원어는 map인데 박영태 번역은 ‘유전 지도’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 regard all of these as thoroughly unsuccessful attempts to describe or classify our varied experiences systematically and, in this way, to arrive at a theory of world 2.인데 박영태 번역은 ‘나는 마흐의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의 다양한 경험들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거나 분류하는 데 완전히 성공할 수 없는 시도며, 또 이런 방식으로는 세게 2에 관한 이론에 도달하는 것도 완전하게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이다.
c 역주: ‘(질문)이어야 한다’의 원어 표현은 should be인데 박영태 번역은 ‘(물음)이었다’이다.
나는 곧 세계 1과 세계 2로 돌아오겠다; 그러나 먼저 나는 물리적 세계인 세
계 1에 관하여 그리고 창발의 개념에 관하여 몇 마디 말을 하고 싶은데 창발
의 개념을 단계라는 개념의 도움을 받아서 나는 도입하고 싶다.
어떻게 세계 1이 나타났는지 그리고 그 세계가 나타나기나 했는지a 우리는
알지 못한다. 빅뱅 이론이 참이라면, 존재하게 된 첫 번째 것은 아마도 빛이었다. ‘빛이 있어라!’는 창세기의 첫 번째 단계였을 터이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빛은, 자외선 영역을 충분히 건너뛰는 단파장(short wavelength)을 지니고 있었을 터이고 그리하여 사람에게 보이지 않았을 터이다. 그다음에 전자들과 중성미자들이 왔고 그다음에 최초의 원자핵이 ㅡ 수소와 헬륨의 핵만 ㅡ 왔다고 물리학자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세계는 원자들에게는 여전히 너무 뜨거웠다.
그리하여b 우리는, 비-물질적이거나 물질 이전의 세계 1이c 있다고 상상할 것이다. 빅뱅으로부터의 세계 팽창이라는 이론을 (나의 견해로 매우 의심스러운) 우리가 수용한다면, 세계가 자체의 팽창 덕택에 서서히 식고 있다고 그리하여 옛 유물론적 철학의 의미에서 점점 더 ‘물질적’이 되고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아마도 이 식어가는 단계에서 몇 가지 단계들을 구분할 수 있을 터이다:
단계 0: 여기에는 빛만 있고 아직 전자들도 없고 원자핵들도 없다.
단계 1: 이 단계에는 빛(광양자)뿐만 아니라 전자들과 다른 기초입자들이 있다.
단계 2: 지금쯤 수소핵과 헬륨핵도 있다.
단계 3: 이 단계에는 원자도 있다: 수소 원자들과 (그러나 분자들은 아니다)
헬륨 원자들.
단계 4: 원자들에 추가하여, 이제 이원자분자들(diatomic molecules)이 또한
존재할 수 있고 그리하여 다른 것들 가운데서d, 이원자수소(diatomic
hydrogen) 기체 분자들이 포함된다.
단계 5: 이 단계에는 다른 것들 가운데서d 액체상태의 물이 있다.
단계 6: 이 단계에는 다른 것들 가운데서 처음에 매우 드물게 물 결정체들, 즉
눈송이들이라는 다양하고 놀라운 형태들의 얼음과 나중에는 또한
a 역주: ‘그 세계가 나타나기나 했는지’의 원어 표현은 if it came into being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것이 무(無)에서 갑자기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지’이다.
b 역주: 이 접속사의 원어는 Thus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러나’이다.
c 역주: ‘1’은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d 역주: ‘다른 것들 가운데서’의 원어 표현은 among others 혹은 among other things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얼음덩어리들과 훨씬 나중에는 다른 결정체들과 같은 고체의
결정체들이 또한 있다.
우리는 이 여섯 번째 단계에 산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세계에는 국지적 지역들이 있는데 그 안에는 고체들과 물론 또한 액체들과 기체가 있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는 또한 분자 기체들에게는 너무 뜨거운 커다란 지역들이 또한 있다.a
VII
생명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계 6에 속하는 세계에서 충분히 식었지만 너무 춥지는 않은 지역에서 나타날 수 있을 따름일 터이다. 생명은 단계 6 내부에서 매우 특별한 단계로서 생각될 수 있다: 기체, 액체 그리고 고체 상태들의 물질의 동시적 출현은 더 진행된 상태인 콜로이드 상태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가 생명으로서 알고 있는 것에 필수적인데 콜로이드 상태는 액체 상태와 고체 상태 사이의 어딘가에 놓인다.b 물의 액체 형태와 기체 형태처럼 물의 두 가지 단계들이 서로 다른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피상적으로) 매우 유사하지만 무생물인 물질적 구조들과 살아있는 물질은 다르다.
이 온도-의존적인 단계들의 특징은, 한 가지 온도-의존적인 단계를 철저히 검사해도 위대한 자연과학자가 다음 그리고 나중 단계의 속성들을 예견할 수 없을 터이라는 점이다: 원자들만 있고 여전히 분자들이 없는 단계 3 외에 자신의 검사를 위하여 자신이 재량껏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더 많이 지니지 못한 위대한 사상가에 의하여 격리된 원자들이 검사되어도 그 사상가는 심지어 가장 가까이서 원자들을 검사하여 다가오는 분자들의 세계를 추론할 수 없을 터라고 우리는 전제할 것이다. 그리고 단계 4에서 증기를 가장 신중하게 검사하여도 그 사상가는, 고도록 복잡한 생명체들은 고사하고 물이나 눈(snow) 결정체들의 풍부한 형태들의 속성들과 같은 액체의 새로운 속성들을 완벽하게 예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Further away there are, of course, also large areas that are too hot fir molecular gases.인데 박영태 번역은 ‘더 진행되면 분자 기체가 존재하기에는 너무나 뜨거운
넓은 공간 영역들이 생기게 된다.’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 simultaneous presence of matter in gaseous, liquid and solid
states is essential for what we know as life, as is a further state, the colloid state, which lies somewhere between the liquid and the solid states.인데 박영태 번역은 ‘기체, 액체, 고체 상태로 물질이 동시에 현존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명이라고 아는 것, 즉 더 진행된 상태인 콜로이드(colloid) 상태가 존속하려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콜로이드 상태는 액체와 고체의 중간에 있는 상태다.’이다.
견할 수 없을 터이다.
기체, 액체 혹은 고체 상태의 속성과 같은 속성들을 우리는 ‘창발하는
(emergent)’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그 속성들이 지닌 예견 불가능한 본성을 참고하여). 분명히 ‘살고 있는’이나 ‘살아 있는’은 그런 속성이다. 이것은 그다
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지만 이것은 물의 단계들과의 유사성을 정말로 암시한다.
VIII
그리하여 생명은 의식처럼 창발적(創發的: emergent)이라고 우리는 전제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세계 3으로 지칭하는 것도 그렇다.
생명과 의식이 지금까지 취한 가장 위대한 창발적 단계는 인간의 언어 발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틀림없이 인류가 창조되었다.
인간의 언어는 자기-표현(self-expression)만 (1)을 본질로 삼지 않고, 신호하기(signalling)만을 (2) 본질로 삼지도 않는다: 동물들에게도 이 능력들이 있다. 인간의 언어는 또한 상징성만도a 아니다. 상징성 또한 그리고 심지어 의례(儀禮: rituals)도b 동물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예견될 수 없는 의식의 발전을 야기한 위대한 단계는 묘사적 서술들(descriptive statements)의 (3) 발명으로 칼 뷜러(Karl Bühler)가 말하는 표상적 기능(representational function)이다: 객관적인 사태를 묘사하는 서술들의 발명인데 그 서술들은 사실에 대응할 것이거나 대응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참이거나 허위일 서술들의 발명. 이 기능은 인간의 언어 내부에서 전례 없는 특징이다.
여기에 동물 언어들과의 차이점이 놓인다. 혹시 우리는 벌들(bees)의 언어에 대하여, 벌들의 의사소통이 참이라고 ㅡ 아마도 어떤 과학자가 벌을 유도하여 잘못할 때를 제외하고 ㅡ 말할 수 있을 터이다. 허위로 유도하는 징표들은 동물들 가운데서도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비들의 날개들에는 눈(eye) 모양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우리 인간만 비판적 논증들을 통하여 우리의 객관적인 진리를 목적으로 우리 자신의 이론들을 검토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것이 언어의 네 번째 단계인 논증적 기능(argumentative function)이다 (4).
a 역주: ‘상징성’의 원어는 symbolism인데 박영태 번역은 ‘기호’이다.
b 역주: ‘의례’의 박영태 번역은 ‘종교적 의식’이다.
IX
묘사적 (혹은 뷜러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표상적) 인간 언어의 발명으로 인하여 추가적인 단계인 추가적인 발명이 가능해진다: 비판의 발명. 그것은 의식적인 선택인데, 이론들의 자연적 선택 대신에 이론들의 의식적 선택이다. 그리하여 유물론이 지체를 초월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연선택도 자체를 초월한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것은 참인 서술과 허위인 서술을 포함하는 언어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언어가 그다음에 비판의 창발인 비판의 발명으로 그리하여 선택의 새로운 단계로 이어진다: 자연선택은 비판적인 문화선택에 의하여 확충되어 부분적으로 추월당한다. 비판적인 문화선택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오류들을 의식적이고 비판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오류들을 의식적으로 발견하여 근절할 수 있어서, 한 가지 이론이 또 다른 이론에 대하여 열등한 것으로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결정적인 요점이다. 여기서 나에게 주어진 제목에서 소위 ‘지식’이 시작된다; 인간의 지식. 진리 탐구를 돕는 비판인 이성적인 비판이 없으면 지식도 없다. 동물들에게는 이런 의미에서의 지식이 없다. 물론 동물들은 모든 종류의 물체들을 안다 ㅡ 개(dog)는 자체의 주인을 안다. 소위 지식과 가장 중요한 유형의 지식인 과학적 지식은 이성적인 비판에 의존한다. 이것이 그리하여 참인 서술과 허위 서술의 발명에 의존하는 단계인 결정적인 단계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문화를 위하여 세계 3에 관한 초석을 놓는 단계라고 나는 제안한다.
X
세계 3과 세계 1은 겹친다: 예를 들어 세계 3은 저서들을 포함하여 세계 3은 서술들을 포함한다. 세계 3은a 무엇보다도 인간의 언어를 포함한다. 이것들 모두는 또한 세계 1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물리적 대상들인 대상이자 사건들이다. 언어는, 신경조직들 안에 그리하여 물질적인 것 안에 묶여있는 의향들로b 구성된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기억으로, 기억 흔적들로, 기대들로, 학습되어 발견된 행태들로 구성된다고; 그리고 저서들로 구성된다고. 오늘 음향효과 때문에 여러분은 나의 강좌를 들을 수 있다: 나는 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이
a 역주: ‘세계 3’의 원어는 대명사 It인데 박영태 번역은 ‘언명’이다.
b 역주: ‘의향들’의 원어는 dispositions인데 박영태 번역은 ‘속성들’이다.
소리는 세계 1의 한 부분이다.
이제 나는, 이 소리가 아마도 순수한 음향효과 이상임을 밝히고 싶다. 세계 1을 넘어가는 그것의 저 부분을 내가 사용하고 있는데, 정확하게 내가 세계 3으로 지칭한 것이고 지금까지 거의 주목되지 않았을 뿐이다.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세계 3의 내력에 관하여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 그러나 나의 저서 객관적 지식[Objective Knowledge], 3장, 5절을 참조하라.) 나는 주요점, 다시 말해서 비물질적인 부분인 세계 3의 비물질적인 면모를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싶다; 혹은 우리가 아마도 말할 것과 같이, 세계 3의 자주적 면모: 세계 1과 세계 2을 초월하는 것. 동시에 세계 3의 비물질적 면모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한 가지 역할을 수행함뿐만 아니라 ㅡ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 면모는 한 가지 주요 역할을 수행한다 ㅡ 심지어 세계 1 및 2와 별도로 그 면모가 실재적임을 나는 밝히고 싶다. 세계 3의 비물질적 (그리고 비-의식적) 면모는, 내가 밝히기를 소망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우리의 의식을 통하여 물리적 세계인 세계 1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세 가지 세계들과 그 세계들의 후속적인 상호 강화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보교환 기제들(機制들: mechanisms)의 상호작용, 혹은 우리가 혹시 나선형으로 부를 것을 토론하고 싶다. 그리고 여기에 비물질적인 것 즉, 이 서술들이나 논증들이 청강되거나 서술되어서 그리하여 물리적으로 정식화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우리의 서술들의 그리고 우리의 논증들의 내용이 있다는 것을 나는 밝히고 싶다. 그리고 언어의 진정한 인간적 의미에서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항상 주제나 내용이다. 세계 3에 속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저서의 내용이지 그 저서의 물리적 형태가 아니다.
여기에 내용의 개념이 지닌 중요성을 분명하게 예시하는 매우 간단한 사례가 있다: 인간 언어의 발달과 함께 ‘하나’, ‘둘’, ‘셋’, 기타 등등으로 셈하는 숫자들이 왔다. ‘하나’, ‘둘’, 그리고 ‘다수’라는 단어들만 지닌 몇몇 언어들이 있다; 몇몇 언어들에는 ‘하나’, ‘둘’... ‘스물’까지 그다음에 ‘다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와 같이, 다른 언어들이 여전히 있는데, 우리가 모든 숫자에서 계속해서 셈하도록 허용하는 방법을 발명했다;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확정되지 않지만 모든 숫자가 원칙적으로 또 다른 숫자를 추가함에 의하여 여전히 초과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다소 한계가 없는 방법. 이것은, 언어의 발명에 의해서만 가능해진 위대한 발명들 중 한 가지이다: 점점 더 많은 숫자들의 무한수열을 구축하는 방법. 그런 수열을 구축하기 위한 명령들은 언어적으로 혹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정식화될 수 있고 그 명령들은 그리하여 구체적인 것으로서 묘사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자연수들의 수열이 이제 (잠재적으로) 무한하다는 우리의 발견은 완전히 추상적이다. 이유인즉 이 무한수열이, 세계 1
에서나 세계 2에서도 구체적인 용어들로 예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수들의 무한수열은, 그 자연수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순전히 개념적인 것’이다: 그 무한수열은 세계 3의 순수한 산물인데 왜냐하면 그 무한수열이, 정말로 생각되지만, 사고에서도 물리적으로 구체적인 숫자들로도 그리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도 구체적인 용어들로 예시되지 않는 요소들이나 ‘거주자들’로 구성되는 세계 3의 저 추상적인 부분에 속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연수들 수열의 (잠재적인) 무한성은 발명이 아니라 오히려 발견이라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 수열을 가능성으로서 발견한다; 우리에 의하여 발명된 수열의 의도하지 않은 속성으로서.
동일한 방식으로 ‘짝수’, ‘홀수’, ‘가분(divisible)’, ‘소수(素數: prime number)’라는 숫자의 속성들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리고 유클리드의 문제와 같은 문제들을 우리는 발견한다: 소수들의 수열은 무한한가 아니면 (더 큰 소수들이 항상 증가하면 드물어지면서 암시되는 바와 같이) 유한한가? 이 문제는, 말하자면, 완전히 감춰져 있었다; 그 문제는 심지어 무의식적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문제는, 우리가 숫자 체계를 발명했을 때, 그곳에 없었을 따름이다. 아니면 그 문제가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 그 문제가 있었다면 그 문제는 개념적인 그리고 순전히 추상적인 의미에서, 즉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그곳에 있었다; 그 문제는 누구도 그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런저런 사람의 무의식 속에 어떤 방식으로든 숨지 않고a 그래서 물리적 흔적을 뒤에 남기지 않고, 우리가 구축한 숫자 체계 안에 숨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었다는 것. 그 문제가 읽힐 수 있던 서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문제는 물리적으로 그곳에 있지 않았다. 세계 2에 관한 한, 그 문제는 그곳에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문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발견될 수 있는 문제로서 그곳에 있었다: 세계 3의 순전히 추상적인 부분에만 속하는 문제의 전형적인 사례. 부언하여b, 유클리드는 그 문제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유클리드는, 모든 소수 다음에 틀림없이 또 다른 소수가 있다는 명제에 대하여 증명을 발견했다; 그 증명으로부터 우리는, 소수들의 수열이 무한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명제는, 문제 자체로서 분명히 순전히 추상적인 사태를 묘사한다: 이 명제는 동일하게 세계 3의 순전히 추상적인 부
a 역주: ‘누구도 그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런저런 사람의 무의식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숨지 않고’의 원어 표현은 without anyone's being aware of it and without its being somehow
hidden in the unconscious of some person or other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그리고 어떤 사람의 무의식 가운데 숨겨져서’이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Incidentally인데 박영태 번역은 ‘우연히도’이다.
분에 거주한다.
XI
예를 들어 골드바흐(Goldbach)의 문제와 같은 소수들과 관련된 많은 미해결 문제들이 또한 있다: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가지 소수들의 합계인가? 그런 문제에는 긍정적이 해답이 있거나 부정적인 해답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런 문제는 해결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문제의 해결불가능성 자체로 인하여 증명이 허용될지도 모르고 허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새로운 문제들이 생긴다.
이것들은 모두, 영향들을 미친다는 의미에서 실재적인 문제들이다. 이것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람은 문제를 보거나 발견하여 그다음에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문제를 파악하는 것과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인간 정신인 의식의 활동이다; 그리고 이 활동은 분명히 문제에 의하여, 문제의 존재에 의하여 또한 생겨난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서적 출간으로a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추상적인 세계 3 문제로b 인하여 가장 무거운 인쇄기가 작동하게 (세계 2을 거쳐서) 될지도 모른다. 유클리드는 소수들에 관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해결책을 서술했다. 이것은 많은 결과들을 유발한 물리적 행위였다. 유클리드의 증명은 많은 교과서들에, 다시 말해서, 물리적 대상들에 재생되었다. 이것들은 세계 1의 사건들이다.
물론 세계 2인 의식은, 추상적인 문제에서 세계 1로 유도되는 인과적 연쇄들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한다. 내가 알 수 있는 한, 세계 3의 추상적인 부분인 추상의 세계이자 비-물질적인 내용들인 실제적인 특수한 세계 3은 지금까지 세계 1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행사한 적이 없다; 심지어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서도 그렇다c. 연결고리는 항상 의식인 세계 2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아마도 이것은 어느 날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의식을 ㅡ 세계 3과 상호작용하는 자체의 역할에서 ㅡ 언급하고 있을 때 우리는 ‘정신’을 말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정신이 세계 3의 거주자들과 중재를 하여 결정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의식적 및 무의식적 삶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삶을 형성한다고 나는 믿는다. 여기 세계 2와 세계 3 사이의 상호작용에, 인간과 동물 의식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a 역주: ‘서적 출간’의 원어는 publication인데 박영태 번역은 ‘공개 발표’이다.
b 역주: ‘문제’는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c 역주: ‘심지어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서도 그렇다’의 원어 표현은 ‘not even with the aid of
computers인데 박영태 번역은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는’이다.
실마리가 놓인다.
XII
요컨대 세계 3, 무엇보다도 인간 언어에 의하여 창조되는 세계 3의 저 부분이 우리의 정신인 의식의 산물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언어처럼, 그것은 우리의 발명품이다.
그러나 이 발명품은 우리의 피부 외부에 있어서 우리에게 외부적인 (‘신체외적[身體外的: exosomatic]’)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발명품들이 그러한 것처럼, 객관적인 것이다. 모든 발명품들처럼, 그것은 자체의 문제들을 만들어내는데 그 문제들은 자주적일지라도 우리에게 의존한다. (화제 억제나 자동차 발명을 생각하라.) 이 문제들은 의도적이지도 않고 기대되지도 않는다. 이 문제들은 우리의 행동들이 야기하는 전형적이고 비의도적인 결과들인데 그 결과들은 그다음에 우리에게 반응한다.
이것이 객관적이고 추상적이며 자주적이지만 실재적이고 효율적인 세계 3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한 가지 사례는 아마도 전적으로 대표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드러진 것이 수학이다. 수학은 분명을 우리의 작품이고 우리의 발명품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수학은 확실히 객관적이고 동시에 추상적이다: 우리가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견하는 것은 문제들과 해결책들의 세계 전체이다.
따라서 수학의 위상을 숙고한 사람들은 주로 두 가지 견해들에 도달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사실상 수학에 대한 두 가지 철학들이 있다.
1. 수학은 인류의 업적이다. 이유인즉 수학은 우리의 직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혹은 수학은 우리가 구축한 것이다; 혹은 수학은 우리의
발명품이다. (직관론[intuitionism]; 구성론[constructivism]; 규약론
[conventionalism].)
2. 수학은 자체의 자격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분야이다. 수학은
객관적인 진리들로 무한히 풍요로운 분야인데, 그 진리들을 우리는
만들어내지 않고 객관적으로 대면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진리들 중
몇 가지 이상의 진리들을a 발견할 수 있다. (수학에 대한 이 개념은
a 역주: ‘몇 가지 이상의 진리들’의 원어 표현은 more than a few인데 박영태 번역은 ‘약간만’이다.
통상적으로 ‘플라톤주의[Platonism]’으로 서술된다.)
수학에 대한 이 두 가지 철학들은 지금까지 서로 직접적으로 반대 입장에 서있었다. 그러나 세계 3 이론으로 인하여 이 두 가지 철학들 모두 옳다고 밝혀진다: 자연수들의 무한수열은 (예를 들어) 우리의 언어적 발명품이다; 우리의 규약; 우리의 구성. 그러나 소수들과 소수들의 문제들은 그렇지 않다: 이 문제들을 우리는 객관적인 세계에서 발견하는데 그 객관적인 세계를 우리가 정말로 발명했거나 만들어냈지만 그 객관적인 세계는 자체를 창조한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객관화되고 그 사람들의 의지와 독립적이 된다 (모든 발명품들처럼): 그 세계는 ‘자주적’, ‘순전히 개념적’이 된다: 그 세계는 ‘플라톤적’이 된다.
세계 3의 관점에서 수학의 두 가지 철학들 사이에는 논쟁이 있을 리 없다. 기껏해야 특정 수학적 대상이 ㅡ 숫자의 무한수열이나 공리 집합론의 집합들의 세계와 같은 ㅡ 인간의 업적인지 혹은 우리가 이 분야를 객관적인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하느님에 의하여 주어진 양, 대면하는지에 관한 의견불일치만 남는다. 그러자 적어도 1963년 (폴 코언[Paul Cohen]) 이래, 공리 집합 이론이 사람의 작품이기도 함을 우리는 알았다. 오랫동안 우리는, 심지어 수학도 오류를 저지를 수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을 반증할 수 있지만 항상 그 이론들을 증명할 수는 없음을 알았다.
나는 세계 3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나의 강좌의 세 번째 및 최종 부분에 왔다: 실재의 형성에 관하여.
3. 실재의 형성에 관하여
I
실재의 형성으로서 간주될 것은 세계 1, 세계 2 그리고 세계 3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다수의 정보교환 기제들(機制들: mechanisms)로 구성되는 상호작용을 그 기제들 내부에서 우리는 시행착오의 방법을 사용하여 조작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정보교환 기제들의 이 나선형에 의식적으로 개입한다. 우리는 ㅡ 인간 정신, 우리의 꿈, 우리의 목표 ㅡ 작품의, 산물의 창조자이고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작품에 의하여 형성된다. 이것은 사실상 인류에게서 창조적 요소이다: 우리가, 창조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변형시킨다는 것. 그리하여 실재의 형성은 우리가 하는 것이다; 자체의 국면들 세 가지 모두인 이 세 가지 세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는 과정; 그리고 세 가지 세계가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상호작용들이나 정보교환 기제들의 이 나선형은 우리가 이론들을 개발함에 의하여 그리고 우리의 꿈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한 가지 사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새를 형성하여 창조하고 발명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오늘날 비행기로서 알고 있는 것을 형성하여 창조하고 발명한 것. 하늘을 나는 것을 야기하는 것은 날고자하는 꿈이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적 역사 개념이 틀림없이 시사할 것처럼 그리하여 돈을 벌겠다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주지함이 중요하다.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과 (그의 형제를 나는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라이트 형제들과 많은 다른 사람들은 비행을 꿈꾸어 자신들의 꿈을 추구하면서 의식적으로 목숨을 걸었다. 그들을 고취시킨 것은 소득을 얻겠다는 소망이 아니라 새로운 자유에 대한 ㅡ 우리의 생태적 지위의 확대에 대한 ㅡ 꿈이었다: 오토 릴리엔탈이 자신의 생명을 잃은 것은 더 좋은 세상을 탐구하는 과정에서의 일이었다.
세계 3은, 세계 2의 비행하려는 꿈을 실현하려는 시도인 실재의 형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결정적인 요소는 계획들, 묘사들, 가설들, 시도들 사고들 그리고 교정들이다; 한 마디 말로서, 비판을 통한 시행들과 오류들의 제거 방법.
이것은 나선형의 정보교환 기제(機制: mechanism)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연구자들과 발명가들의 세계 2가 또한 커다란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창발하는 문제들과 무엇보다도 세계 3인데 세계 3은 세계 2에 부단히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꿈들은 어느 날 최종적으로 실현될 수 있기까지 세계 3에 의하여 부단히 수정된다.
비관론자들은 나에게 지적하기를, 독일 글라이더 조종사인 오토 릴리엔탈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새와 같이 비행하는 방식을 꿈꿨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우리가 만든 에어버스를 볼 수 있었을 터이라면 공포에 휩싸였을 터이다.
우리의 개념들이 우리가 그 개념들을 상상하는 바와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틀림없이 실현되지 않는 한, 이 비평은 옳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평은 틀렸다. 정확하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릴리엔탈이 비행하기를 원했던 방식으로 오늘날 비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글라이더 클럽에 합류할 필요만 있다. 그에게 용기가 있다면 그것은 너무 어렵지 않다. 에어버스나 보잉 747로 비행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글라이더와 그 비행기들이 크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이렇게 비행하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글라이더보다는 혹은 철로나 배나 자동차보다 그 비행을 선호하는 이유들. 심지어 대형 항공기에 승객이 꽉 차서 여행하는 것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새로운 가능성들과 새롭고 귀중한 자유들이 많이 생겨났다.
II
대형 항공기들은 의심할 바 없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릴리엔탈이 꿈을 꾼 결과들이지만 아마도 예견될 수 없는 결과들이다. 우리의 언어, 우리의 과학적 지식 그리고 우리의 기술을 사용하여, 우리는 우리의 꿈과 우리의 소망 그리고 우리의 발명품의 미래 결과들을 식물이나 동물보다 더 잘 예측할 수 있지만 많이 더 잘 할 수는 없다. 우리의 행위들이 야기하는 이 예견할 수 없는 결과들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바가 얼마나 없는지를 깨닫기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은 여전히 시행과 착오이다: 흔히 위험하고 훨씬 더 위험한 착오 ㅡ 때때로 인류에게 위험한.
정치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이 특히 위험하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의 환경 탐구와 같이 더 좋은 세상에 대한 탐구가 (내가 옳다면) 생명의 모든 본능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본능이라는 사실과 연결된다. 우리 세상의 향상에 우리가 기여할 수 있고 기여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우리가 옳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들과 행위들의 결과들을 우리가 예견할 수 있다고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인간의 생명을 희생해서는 (최악의 경우에 혹시 우리의 생명을 제외하고a) 안 된다. 또한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을 희생하라고 설득하거나 심지어 격려할 권리가 없다 ㅡ 심지어 우리를 완벽하게 확신시킨 (아마도 우리의 무지 때문에 불합리하게) 이념이자 이론을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다.
아무튼 더 좋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탐구 한 부분은, 이념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희생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 세상의 탐구를 본질로 한다.
III
나는 나의 강좌의 끝에 왔다. 나는 최종적인 낙관적 심사숙고를 한 가지만을
a 역주: 괄호 안의 원어 표현은 except perhaps our own if the worst comes to the worst인데
박영태 번역은 ‘최악의 경우에는 아마도 우리 자신의 생명을 제외하고는 희생시킬 수도 있다’이다.
추가하고 싶은데 그 심사숙고로써 나는, 나의 친구 존 에클스(John Eccles) 경과 내가 함께 저술한 자아와 자아의 두뇌(The Self and Its Brain)에 대한 나의 글을 또한 끝냈다.
내가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다윈의 선택인 자연선택과 선택압력이라는 개념들은 일반적으로 피어린 생존투쟁과 결합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만 심각하게 수용되어야 하는 이념이다.
그러나 인간 의식의 그리고 정신의 그리고 언어적으로 정식화된 이론들의 창발과 동시에 이 모든 것은 완전히 변한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될 수 없는 이론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론들 사이에 맡겨둘 수 있다. 이전 시대에는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이 제거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대신에 이론이 죽도록 할 수 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ㅡ 자연선택의 관점 ㅡ 정신의 그리고 세계 3의 주요 기능은, 그것들이 의식적인 비판의 사용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론지지자들을 죽이지 않고도 이론들을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합리적 비판을 비-폭력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생물학적 발전을 통하여 가능해진다; 우리의 언어 발명과 후속적인 세계 3의 발명을 통하여. 이런 방식으로 자연선택은 자체의 원래 틀림없이 다소 폭력적인 특징을 극복하거나 초월한다: 세계 3의 창발과 함께 최고의 이론들, 최고의 적응들을 심지어 폭력 없이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제 우리는 비-폭력적인 비판을 이용하여 허위 이론들을 제거할 수 있다. 틀림없이, 비-폭력적인 비판은 여전히 이용되지 않는다: 비판은, 심지어 종이 위에서 싸울 때에도, 통상적으로 여전히 반쯤 폭력적이다. 그러나 폭력적인 비판을 위한 생물학적 이유들은 더 이상 없고 그런 비판에 반대하는 이유들만 있다.
그리하여 현재 지배적인 반쯤 폭력적인 비판은 이성의 발전에서 일시적인 단계일 수 있을 터이다. 세계 3의 창발은, 비-폭력적인 문화적 진화가 유토피아적 꿈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선택을 통하여 세계 3이 창발한 생물학적이고 전적으로 합당한 결과이다.
평화와 비-폭력이라는 목표로써 우리의 사회적 환경을 형성하는 것은 단순히 꿈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를 위하여 가능하고 생물학적 관점에서 분명히 필요하고 객관적이다a.
a 역주: ‘객관적’의 원어는 objective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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