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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1부 지식에 관하여, 5장 사회과학의 논리

이윤진이카루스 2020. 10. 12. 14:06

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1부 지식에 관하여, 5장 사회과학의 논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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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회과학의 논리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무지 사이의 대비를 표현하는 두 가지 논지들로써 사회과학의 논리에 관한 나의 논문을 시작하겠다고 나는 제안한다.

첫 번째 논지: 우리에게는 적당한 양의 지식이 있다. 게다가 결정되지 않은 지성적으로 흥미로운 세부사항들뿐만 아니라, 더욱 특히 상당히 실용적인 중요성을 띠기도 하고 게다가 우리에게 세상에 대한 심오한 이론적 통찰과 놀라울 정도의 이해를 제공할 사물들을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두 번째 논지: 우리의 무지는 끝이 없어서 우리를 사색하게 만든다. 정말로 심지어 자연과학 자체의 분야에서도 우리의 무지를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은 정확하게 이 자연과학의 압도적인 진보 (나의 첫 번째 논지가 언급하는)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무지라는 소크라테스적 개념에 왜곡이 새롭게 발생한다.a 전진

 

1961년 튀빙겐에서 열린 독일 사회학회의 회의에서 행한 개막 강좌. 나의 강좌는 쾰른 사회학 및 사회심리학지(Kölner Zeitschrift für Soziologie und Sozialpsychologie), 2, 14, 1962, 233-48쪽에 처음 실렸다. 나의 강좌는 논쟁을 일으킬 예정이었다. 아도르노(Adorno) 교수가 자신의 보충 논문에서 이 논쟁을 계속하도록 초청을 받았는데 그 논문에서 그는 본질적으로 나와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저서 독일 사회학에서의 실증주의적 논쟁(The Positivist Dispute in German Sociology)이 출간되었을 때 아도르노는 논쟁을 불러오는 두 편의 글로써 시작했는데 그 두 편의 글이 대략 100쪽을 차지했다; 그다음에 나의 강좌가 왔고 아도르노의 보충 논문과 회의에서 제시되지 않은 다른 논문들이 이어졌다. 나의 강좌가 논쟁을 열었다는 것과 아도르노의 공격적인 개막용 100쪽 논문들이 훨씬 더 늦게 서술되었다는 (특히 그 저서를 위하여) 것을, 독일 사회학에서의 실증주의적 논쟁이라는 저서를 읽는 사람이 생각할 개연성은 매우 낮다.

 

원래 번역자의 주석: 이 번역의 주요 부분은, 글린 에이디(Glyn Adey)과 데이비드 프리스비(David Frisby)독일 사회학에서의 실증주의적 논쟁(Der Positivismusstreit in der deutschen Soziologie)을 영어로 번역한 The Positivist Dispute in German Sociology에서 인쇄된 판본을 다소 이용한다. 그러나 그 부분은 이 판본을 위하여 특히 독일어가 영어로부터 두드러지게 이탈하는 저 장소들에서 수정되고 개정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주 2에서 사진으로 촬영된 원문과 박영태의 상세한 주석 참조: 역자)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gives a new twist to the Socratic idea of ignorance.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러한 두 번째 논제의 내용은 무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관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도록 만든다.’이다.

 

단계마다, 우리가 해결하는 문제마다 우리는 새롭고 해결되지 않은a 문제들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확고하고 안전한 토대 위에 서있었다고 믿었을 바로 그때 모든 것들은 실제로 안전하지 못하고 불안함을 우리는 또한 발견한다.

물론 지식과 무지에 관한 나의 두 가지 논지들은 서로 모순이 되는 듯이 보일 따름이다. 이 표면적인 모순의 주요 원인은, ‘지식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논지들 각각에서 다소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그러나 두 가지 의미들 모두는 중요하고 두 가지 논지들도 그렇다: 그래서 내가 다음 세 가지 논지들로 이것을 명시적으로 만들기를 제안하는 정도까지 간다.

세 번째 논지: 모든 지식론에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과제가 있는데 그 과제는 심지어 그 지식론을 결정으로 시험하는 것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모든 지식론은, 두드러지고 부단히 증가하는 우리의 지식과 실제로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부단히 증가하는 통찰 사이의 관계들을 설명함에 의하여 우리의 처음 두 가지 논지들을 공정하게 다루어야한다.

우리가 그 지식론을 조금 생각한다면, 지식에 관한 논리가 지식과 무지 사이의 이 긴장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말할 필요도 없다. 이 통찰의 중요한 한 가지 결과가 나의 네 번째 논지에 언명된다. 그러나 이 네 번째 논지를 제시하기 전에 여전히 나타날 많은 논지들에 대하여 나는 사과하고 싶다. 나의 사과는, 이 논문을 숫자가 매겨진 논지들의 형태로 내가 모으라는 제안이 나에게 왔다는 것이다.b 이런 양식이 독단론의 인상을 불러올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c 이 제안이 매우 유용함을 알았다. 그래서 여기에 나의 네 번째 논지가 있다.

네 번째 논지: 과학이나 지식이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말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지식은, 지각들이나 관찰들이나 자료들 혹은 사실들의 수집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지식은, 오히려, 문제들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c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문제들이 없으면 지식도 없다; 그러나 또한, 지식이 없으면 문제들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지식은 지식과 무지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시작됨을 의미한다: 지식이 없으면 문제들이 없다 무지가 없으면 문제들이 없다. 이유인즉 모든 문제는, 우리의 지식이라고 생각되는 것 안에 불합리한 것이 있음을 발견하여 출현하기 때문이다; 혹은 논리적으로 간주되어, 우리의 지식이라고 생각되는

 

a 역주: ‘해결되지 않은은 원어는 unsolved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My excuse is that it was suggested to me that I assemble this paper in the form of numbered theses.인데 박영태 번역은 내가 양해의 말을 하는 것은, 숫자로 매겨진 논제의 형식으로 이 논문을 구성하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이다.

c 역주: 이 주어들은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것 안의 내부적 모순을 혹은 우리의 지식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사실들 사이의

모순을 발견하여; 혹은 더 정확하게 우리의 지식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사실들로 생각되는 것 사이의 분명한 모순을 발견하여.

나의 처음 세 가지 논지들이 혹시, 그 논지들에 있는 추상적인 특징 때문에, 그 논지들이 우리의 주제와 다시 말해서, 사회과학의 논리 다소 동떨어진다는 인상을 불러올 것인 반면, 나의 네 번째 논지로 인하여 우리가 바로 우리의 주제의 심장부에 도달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나의 다섯 번째 논리에서 언명될 수 있다.

다섯 번째 논지: 모든 다른 과학들에서처럼, 사회과학들에서 우리가 관련하는 문제들의 중요성이 흥미도와 정비례하여 우리는 성공적이거나 성공적이지 못하거나 흥미롭거나 단조롭거나 효과를 내거나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리고 또한 물론 우리가 이 문제들을 다루는 정직성, 직접성 그리고 단순성과 정비례하여. 이것 중 어느 것도 우리를 이론적 문제들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가난, 문맹, 정치적 박해 혹은 법률적 권한과 관련된 불확실성과 같은 심각한 실용적인 문제들은 사회과학에서의 탐구를 위한 중요한 출발점들이다. 그러나 이 실용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사변, 이론화와 그리하여 이론적 문제들이 생긴다. 모든 경우들에서, 예외 없이, 과학적 업적의 가치나 가치결여를 결정하는 것은 문제가 지닌 특징과 특성이다 그리고 또한 물론 제시된 해결책의 대담성과 독창성이다.

그러므로 출발점은 항상 문제이다; 그리고 관찰은, 문제를 밝힌다는 조건으로만 출발점과 같은 것이 된다; 혹은 달리 표현하여 관찰로 인하여 우리가 놀라게 된다면, 우리가 지닌 지식에 관하여 우리가 지닌 기대들에 관하여 우리가 지닌 이론들에 관하여 전혀 옳지 않은 것이 있음이 관찰로 인하여 우리에게 밝혀진다면. 그리하여 관찰이 우리가 지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기대들 중 어떤 기대들과 모순이 될 때, 관찰로 인하여 문제가 생길 따름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의 과학적 연구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a 관찰이라기보다는 특수한 역할을 수행하는 관찰이다; , 문제를 창조하는 관찰.

이제 나는, 나의 주요 논지6번 논지로서 언명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그 논지는 다음으로 구성된다.

여섯 번째 논지 (주요 논지):

(a) 자연과학의 방법처럼, 사회과학의 방법은 우리의 탐구들이 시작되는 저

 

 

a 역주: ‘다름 아닌의 원어 표현은 pure and simple로 명사 관찰 뒤에서 수식하는데 박영태 번역은 순수하고 단순한 (관찰)’이다.

 

문제들에 대한 잠정적인 해결책들을 시험하는 것을a 본질로 한다.

해결책들은 제시되어 비판된다. 제시된 해결책이 객관적인 비판을 받지 않는다면 그 해결책은 혹시 잠정적으로만 일지라도 비과학적인 것으로서 배제된다.

(b) 제시된 해결책이 객관적인 비판에 부쳐진다면, 우리는 그 해결책을 반증하려고 시도한다; 이유인즉 모든 비판은 반증 시도들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c) 제시된 해결책이 우리의 비판을 통하여 반증된다면 우리는 또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d) 그 해결책이 비판을 통과한다면, 우리는 그 해결책을 잠정적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해결책을, 무엇보다도 추가적인 토론과 비판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수용한다.

(e) 그리하여 과학의 방법은, 가장 엄격한 비판에 의하여 제어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잠정적인 우리의 시도들 (혹은 묘안들) 중 하나이다. 그것은 시행착오방식의 비판적 전개이다.

(f) 소위 과학의 객관성은 비판적 방법의 객관성에 놓인다; , 무엇보다도 어떤 이론도 비판으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리고 나아가 비판이라는 논리적 도구는 논리적 반박 객관적이라는 사실에 놓인다.

나의 핵심적인 논지 배후에 놓인 기본적인 개념은 아마도 다음 방식으로 또한 표현될 것이다.

일곱 번째 논지. 지식과 무지 사이의 긴장으로 인하여 문제들과 잠정적인 해결책들이 생긴다. 그러나 그 긴장은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이유인즉 우리의 지식은 항상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해결책에 대한 제안들을 본질로만 한다고 판명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식이라는 바로 그 개념은, 원칙적으로, 그 지식이 오류여서 무지의 경우였음이 판명될 가능성을 포함한다. 그리고 우리의 지식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방법 자체는 단지 잠정적인데 이유인즉 그 방법이 비판을, 혹은 더 정확하게 지금까지 우리가 시도한 해결책들이 심지어 우리의 가장 날카로운 통과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의 도움을 받는 것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정당화는 없다: 이것을 초월하는 정당화는 없다. 특히 우리의 잠정적인 해결책들은 개연적인 것으로 (확률계산의 법칙들을 충족시키는 어떤 의미에서) 밝혀질 수 없다.

 

a 역주: ‘시험하는 것의 원어 표현은 trying out인데 박영태 번역은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데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 입장을 비판주의적으로서a 묘사할 수 있을 터이다.

나의 주요 논지에 대하여 그리고 사회학에 관한 그 논지의 중요성에 대하여 나은 개념을 제시하기 위하여 그 논지를, 흔히 무의식적으로 흡수된 널리 수용되는 방법론에 속하는 다른 특정 논지들과 대조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주의(naturalism)나 과학주의의 오도되어 틀린 방법론적 접근방식이 있는데 그 방식은, 사회과학이 자연과학으로부터 과학적 방법이 무엇인지를 배울 적기임을 열심히 설득한다. 이 오도된 자연주의는 다음과 같은 요구들을 확립한다: 관찰들과 측정들로써 시작하라; 예를 들어 이것은, 통계적 자료들을 수집함에 의하여 시작함을 의미한다. 그다음에 귀납으로부터 일반화들로 그리고 이론들의 형성으로 나아가라. 이런 방식으로, 이것이 사회과학에서 조금이라도 가능한 한, 여러분은 객관성이라는 이상에 접근할 것이라고 제안된다. 그렇게 하면서, 그러나, 사회과학에서의 객관성이 자연과학에서보다 이룩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그 객관성이 조금이라도 이룩될 수 있다면) 사실을 여러분의 의식해야 한다. 이유인즉 객관적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가치 판단들에 의하여 편향되지 않아야 다시 말해서 (막스 베버가 그것을 지칭한 바와 같이), ‘가치-중립적(value-free)’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학자가 자기 자신의 계급의 가치 체계로부터 벗어나서 그리하여 심지어 제한된 정도의 가치중립객관성을 이룩할 수 있는 경우들은 가장 희귀할 뿐이다.b

내가 여기서 이 오도된 자연주의의 탓으로 돌린 이 논지들 각각은 나의 견해로 전적으로 오류이다: 이 논지들 모두는 자연과학의 방법에 대한 오해에 그래서 실제로 허구에 불행하게도 너무나 널리 수용되어 너무나 영향력이 큰 허구 근거한다. 그것은, 자연과학의 방법의 귀납적 특징이라는 그리고 자연과학의 객관성의 특징이라는 신화이다. 이어지는 것에서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의 한 부분을 이 오도된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에 쏟을 것을 제안한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내가 이 오도된 자연주의의 탓으

 

a 역주: ‘비판주의적의 원어는 criticist인데 박영태 번역에 비판주의자(criticist)’로 번역되면서 포퍼는 ‘cirtic’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criticist’라는 새로운 조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critic이 비평가, 혹평가를 지칭하면서 나쁜 뉘앙스를 가지고 있으니까,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낸 것 같다.”라는 역주가 붙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ut only in the rarest cases can the social scientist free himself from the value system of his own social class and so achieve even a limited degree of ‘value freedom’ and ‘objectivity’.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러나 사회과학자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 계급의 가치 체계에서 거의 중립적일 수 없으며, 아주 제한된 정도로만 가치중립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이다.

 

로 돌린 논지들 중 한 가지를 배척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자연주의는 현재, 아마도 정치경제학에서는 제외하고, 사회과학에서 우세한 듯이 보인다; 적어도 영어권 국가들에서. 나의 여덟 번째 논지에서 나는 이 승리의 증상들을 언명하고 싶다.

여덟 번째 논지: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사회학은, 아마도 이론물리학과 비교될 수 있는 일반적인 이론사회학으로서 간주되었고 사회인류학은 매우 특별한, 다시 말해서 원시 사회에 대한 사회학으로서 간주되었다. 오늘날 이 관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주목되어야 하는 사실.a 사회인류학 즉, 민족학은 일반적인 사회학이 되었고 사회학은 사회인류학 내부에서 하나의 요소가 되는 것을 점점 더 체념하고 수용했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매우 특별한 형태에 대한 고도로 산업화된 서유럽 형태의 사회 사회인류학. 더 개괄적으로 재서술되어, 사회학과 인류학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사회인류학은 응용 전문가적 학문에서 근본적으로 과학으로 격상되었고 인류학자는 겸손하고 다소 근시적인 현장연구가에서 선견지명이 있고 심오한 사회이론가 및 사회 심층-심리학자로 고양되었다. 그러나 이전 이론사회학자는 현장연구가로서 그리고 전문가로서 고용된 것을 발견하고 틀림없이 행복하다: 그들이 하는 일은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백인 원주민들의 숭배대상들과 금기사항들을 관찰하여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과학자들의 운명에서의 이 변화는 아마도 너무 심각하게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과학적 주제의 본질과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나는 나의 아홉 번째 논지에 다다른다.

아홉 번째 논지: 소위 과학적 주제는, 인위적인 방식으로 구획설정된 문제들과 잠정적인 해결책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문제들과 과학적 전통들이다.

이 아홉 번째 논지에도 불구하고, 사회학과 인류학 사이의 관계들이 완벽히 뒤바뀐 것은 극도로 흥미로운데 주제들이나 주제들의 제목들 때문이 아니라 그 뒤바뀜이 사이비-과학적 방법의 승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다음 논지에 다다른다.

열 번째 논지: 인류학의 승리는 소위 관찰적, 소위 묘사적 방법의 승리인데 그 방법은 귀납적 일반화들을 사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소위 보다 객관적인 방법의 그리하여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생각되는 것의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oday this relationship has been completely reversed; a fact to which attention should be drawn.인데 박영태 번역은 오늘날, 이론보다는 사실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이러한 관계는 완전하게 역전되었다.’이다.

 

승리이다. 그것은 대가가 너무 큰 승리이다: 또 다른 그런 승리가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말해서, 인류학과 사회학 모두 패배한다.a

나의 열 번째 논지는 다소 너무 신랄하게 언명될 것임을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물론 나는, 사회인류학에 의하여 흥미롭고 중요한 많은 것이 발견되었음을 인정하는데 사회인류학은 가장 성공적인 사회학들 중 하나이다. 게다가 우리 유럽인들이 변화를 위하여 사회인류학자들의 안경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 아주 매혹적이고 흥미로운 경험일 수 있음을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이 안경들이 다른 것들보다 아마도 더 착색이 되어있을지라도 이로 인하여 우리 유럽인들이 더 객관적이 되지는 않는다. 인류학자는, 자신들이 흔히 생각하는 바와 같이 화성에서 와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흔히 수행하려고 시도하는 (그리고 취향이 없지 않게) 관찰자가 아니다; 또한 화성의 주민들이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것보다 더 객관적으로우리를 볼 터이라고 생각한 최소한의 이유도 우리에게 없다.

이런 맥락에서 인정되는 바와 같이 극단적이지만 전혀 독특하지 않은b 한 가지 이야기를 나는 말하고 싶다. 그것이 사실인 이야기일지라도, 그것은 현재의 문맥에서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에게 그 이야기가 비개연적으로 들린다면, 어리석은 과장을 통하여 중요한 요점을 명백히 하려고 의도된 허구로 자유롭게 가공된 예시로서 수용하시라.

몇 년 전 나는 어느 신학자에 의하여 조직된 나흘 일정의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 회의에는 철학자들, 생물학자들, 인류학자들 그리고 물리학자들이 각 지식 분야에서 한두 명의 대표자들 참석했다; 우리는 모두 8명이 참석했다. 주제는 과학과 인본주의(Science and Humanism)’이었다. 몇 가지 초기 문제들과 고상한 논증으로 우리에 인상을 남기려던 시도가 무위로 끝난 후에 약 네다섯 명의 참석자들이 함께 노력하여 사흘 동안에 토론을 특이하게 높은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우리의 회의는 그 단계에 우리 모두가 서로로부터 중요한 것을 배우고 있다는 행복한 느낌을 느꼈던 도달했다 (혹은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아무튼, 우리 모두가 논쟁의 주제에 침잠해있을 때 전혀 예기치 않게 그 사회인류학자가 입을 열었다.c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other such victory and we that is, both anthropology and sociology are lost.인데 박영태 번역은 왜냐하면 이것도 또 하나의 승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즉 인류학과 사회학 모두는 패배한 것이기 때문이다.‘이다.

b 역주: ‘전혀 독특하지 않은의 원어 표현은 in no way unique인데 박영태 번역은 좀처럼 잘 일어나지 않는이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t any rate, we were all immersed in the subject of our debate when out of the blue that social anthropologist made his contribution.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런데 그렇게 되어가는 데에는 사회인류학자가 뜻밖에도 많이 공헌했고, 처음에 제시된 토론회의 주제에

 

이 회의에서 내가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여러분은 아마도 놀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로서 나는 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여러분의 언어적 행태에 참석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여러분의

언어적 행태를 연구하기 위해서이다. 그게 내가 실천하고 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러분이 토론하는 실제 내용을 나는 항상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수십 가지의 토론 무리들을 연구한 나와 같은 사람은, 토론되는 주제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결국 배운다. 우리 인류학자들은 외부로부터 그리고 보다 객관적인 관점으로부터 그런 사회적 현상들을 바라보는 것을 배운다 이것은 거의 그가 말한 그대로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a. 우리를 흥미롭게 한 것은 어떻게였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한 사람 혹은 또 다른 사람이 무리를 지배하려고 시도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의 시도들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한 사람에 의하여 혹은 연합을 형성하여 배격되는가; 이런 종류의 다양한 시도들 이후에 어떻게 계층적 질서와 그리하여 무리의 평형이, 표현을 통한 무리의 의식(儀式: ritual)b 함께, 발전하는가; 이런 것은, 토론의 주제로서 역할을 하는 문제가 아무리 다양하게 보일지라도, 항상 유사하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화성에서 온 인류학적 방문객이 말해야 하는 모든 것을 들었다; 그다음에 나는 그에게 두 가지 질문들을 제시했다. 먼저 우리의 토론의 실제 결과들에 관하여 그가 제출한 비평이 있는지; 그다음에 타당하거나 타당하지 않을 수 있는 비개인적인 논거들이나 논증들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가 알 수 있었는지. 자신은 우리 무리의 행태를 관찰하는 데 너무 많이 집중해서 우리의 논증들을 상세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고 그는 답변했다; 게다가 그가 우리의 논증을 상세하기 이해했다면 그는 자신의 객관성을 위험에 빠뜨렸을 터이다 (그렇게 그는 말했다); 이유인즉 그는 아마도 논증에 말려들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논증에 그 자신이 빠졌다면, 그는 우리들 중 한 명처럼 되었을 그리고 그로 인하여 그의 객관성을 끝장이 났을 터이다 터이다. 그 외에 언어적 행태의 (그는 언어적 행태언어적 표현이라는c 용어들을 그는 부단히 사용했다) 내용을 문자 그대로 판단하지 말라고 혹은 그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훈련을 그는 받았다. 그와 관심을 가진 것은 이 언어적 행태의 사회학적 및 심리학적 기능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

 

우리 모두가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다.

a 역주: 이 표현의 원어 표현은 this is almost verbatim (so far as I remember)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 말들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거의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말했다이다.

b 역주: ‘표현을 통한 무리의 의식의 원어 표현은 a group ritual of verbalization인데 박영태 번역은 말로 표현된 그룹이 공식선언문(a group ritual of verbalization)‘이다.

c 역주: ‘언어적 표현의 원어는 verbalization인데 박영태 번역은 공식 선언문이다. 위 역주 b 참조.

 

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논증과 논거들이 참석자들로서 당신들에게 인상을 남길지라도, 나에게 흥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런 수단을 통하여 당신들이 서로에게 상호 인상을 남겨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특히 이 영

향이 남기는 증상들. 우리는, 강조와 망설임과 개입과 양보와 같은 개념들에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토론의 사실적 내용에 실제로 관심을 갖는 적이 없지만, 다양한 참석자들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에만 항상 관심을 갖는다: 극적인 상호작용과 같은 것에 관심을 갖는다. 소위 논증들에 관하여 그 논증들은 물론 언어적 행태의 한 가지 양상이고 다른 양상들보다 결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논증들과 다른 인상적인 언어적 표현들을a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는 개념은 순전히 주관적인 망상이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타당한 논증과 객관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논증의 구분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시간에 쫓긴다면, 특정 시간에 타당하거나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서 논증들이 수용되는 사회나 무리에 따라서 우리는 논증들을 분류할 수 있을 터이다. 시간이라는 요소가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현재의 토론 무리와 같은 토론 무리에서 한때 수용되는 소위 논증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석자들 중 한 명에 의하여 나중 단계에 다시 공격을 받거나 배척될 것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또한 밝혀진다.’

이 사건에 대한 기술을 나는 길게 끌고 싶지 않다. 현재의 모임에서 나의 인류학자 친구의 다소 극단적인 입장이 자체의 지성적 출처에서 객관성에 대한 행동주의적 이상의 영향뿐만 아니라 독일 토양에서 자라난 특정 개념들의 영향 또한 드러낸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철학적 상대주의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역사학적 상대주의인데 그 상대주의는 객관적인 진리가 없고 이런저런 시대와 관련된 진리들만 있다고 믿는다; 사회학적 상대주의는, 무산자 과학이나 유산자 과학과 같은 이런저런 무리나 계급을 위한 진리들이나 과학들이 있다고 가르친다. 소위 지식 사회학은, 나의 인류학자 친구에 의하여 반복된 독단들의 초기 역사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나는 또한 믿는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나의 인류학자 친구는 저 회의에서 다소 극단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이 입장은, 특히 우리가 그 입장을 조금 수정한다면, 비전형적이지도 않고 하찮지도 않다.

그러나 이 입장은 터무니없. 역사학적 및 사회학적 상대주의와 또한 지식 사회학을 내가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그렇게 하지 않겠다. 나는, 이 입장의 기초를 이루는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우활(迂闊:

 

a ‘언어적 표현은 앞의 역주 bc 참조.

 

naive)하고 오도된 개념을 간략하게 토론하는 데 나 자신을 국한시키겠다.

열한 번째 논지: 과학의 객관성이 과학자의 객관성에 의존한다고 전제하는 것은 완전히 오류이다. 자연과학자의 태도가 사회학자의 태도보다 더 객관적이라고 믿는 것은 완전히 오류이다. 자연과학자는 다른 사람만큼 편파적이어서 그가 부단히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극소수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는 불행하게도 자기 자신의 개념들을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방식으로 선호하여 흔히 극도로 편향된다. 가장 뛰어난 현대 물리학자들 몇 명은, 새로운 개념들에 대하여 강력하게 저항하는 학파들을 심지어 설립했다.

그러나 나의 논지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고 이것이 더 중요하다. 그 긍정적인 면이 나의 열두 번째 논지의 내용을 형성한다.

열두 번째 논지: 과학적 객관성으로서 기술될 것은, 모든 종류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주 우세한 독단을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비판적 전통에만 근거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의 객관성은 과학자 개인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과학자들 가운데서 노고를 우호적-적대적으로 나누는 것의 그리고 그 과학자들의 협력의 그리고 또한 과학자들의 경쟁의 사회적 결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비판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은 부분적으로 사회적 및 정치적 환경의 전체 구조에 의존한다.

열세 번째 논지: 소위 지식 사회학은 과학자들 개인의 행태에서 객관성을 보고 과학자들의 사회적 서식지를 통하여 객관성의 결여를 설명하는데,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요점을 완전히 놓쳤다: 객관성은 비판에만 의존한다. 지식 사회학이 간과한 것은 다름 아닌 지식 사회학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이론 자체이다. 객관성은 경쟁과 (과학자들 개인과 다양한 사상 학파들 모두의) 같은 사회적 개념들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을 따름이다; 전통 (, 비판적 전통); 사회제도들 (예를 들어, 경쟁하는 다양한 학술지들에서의 그리고 경쟁하는 다양한 발표자들에 의한 발표물들; 회의들에서의 토론들); 국가의 능력 (, 자유 토론에 대한 국가의 정치적 관용).

예를 들어 연구자의 사회적이거나 이념적인 서식지와 같은 사소한 세부사항들에는 결국 이 과정에 의하여 제거되는 경향이 있다; 비록 인정되는 바와 같이 그 세부사항들이 단기적으로 어떤 역할을 항상 수행할지라도.

소위 가치중립이라는 문제는, 객관성이라는 문제와 꼭 마찬가지로, 통상적으로 수행되는 것보다 훨씬 더 중립적인 방식으로 해결될 것이다.

열네 번째 논지: 비판적 토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구분할 것이다: (1) 주장이 지닌 진실성의 문제; 그 진실성의 유관성이라는, 그 진실성이 지닌 흥미라는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갖는 문제들에 직면한 그 진실성이 지닌 중요성이라는 문제. (2) 인간의 복지라는 문제 혹은 국가 방위나 공격적인 국가주의적 정책이라는 완전히 다른 구조를 지닌 문제와 같이, 다양한 과학-외적인 문제들과 직면한 그 진실성의 유관성이라는 그리고 그 진실성이 지닌 흥미라는 그리고 그 진실성이 지닌 중요성이라는 문제; 혹은 산업적 확장이라는 문제; 혹은 개인적인 재산의 획득이라는 문제.

과학적 연구로부터 그런 과학-외적인 관심사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연과학에서의 연구로부터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의 연구 그 관심사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사회학에서의 연구로부터 그 관심사들을 제거하는 것과 똑같이 불가능하다.

가능한 것 그리고 중요한 것 그리고 과학에 과학의 특별한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과학-외적 관심사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 탐구에 속하지 않은 관심사들과 진리에 대한 순전히 과학적인 관심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가 으뜸 과학적 가치일지라도, 진리가 유일한 으뜸 과학적 가치는 아니다. 순전히 과학적 문제 상황에 직면한 명제들의 유관성, 관심사 그리고 중요성이 탁월한 과학적 가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유익성, 설명력, 단순성 그리고 정확성과 같은 가치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순전히 과학적인 저 긍정적 및 부정적 가치들과 과학-외적인 그런 가치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과학적인 일을 과학-외적인 응용들과 평가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가치-영역들에 대한 혼동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과 특히 진리에 관한 문제들로부터 과학-외적 평가들을 제거하는 것이 과학적 비판 및 과학적 토론의 과제들 중 한 가지 과제이다.

이것은 물론 어떤 법령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이룩될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은 상호간의 과학적 비판이라는 지속적인 과제들 중 하나다. 순수과학의 순수성은, 아마도 도달될 수 없는 이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판을 통하여 우리가 부단히 목표로 싸우는 그리고 싸워야 하는 이상이다.

이 논지를 언명하면서 나는, 과학적 활동으로부터 과학-외적 가치들을 추방하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상황은 객관성과 관련해서도 유사하다: 과학자로부터 그의 인간성을 빼앗지 않고 우리는 그로부터 그의 편파성을 빼앗을 수 없고 또한 우리는 그를 인간으로서 동시에 과학자로서 파괴하지 않고 그의 가치판단들을 억누르거나 파괴할 수 없다. 우리가 지닌 동기들과 우리가 지닌 순전히 과학적인 이상들은, 순수한 진리 탐구라는 이상처럼, 과학-외적이며 부분적으로는 종교적인 가치판단들에 깊이 안착하여 있다.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과학자는 이상적인 과학자가 아니다. 열정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틀림없이 순수과학에서도 이룩할 수 없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은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객관성과 가치중립이 실제로 과학자 개인에게 도달될 수 없는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객관성과 가치중립자체가 가치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치중립 자체가 가치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가치중립에 대한 요구는 역설적이다. 이 반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가치 혼동을 노출하여 과학-외적인 문제들로부터 진리와 유관성과 단순성 및 기타 등등을 분리하는 것이 과학적 비판의 과제들 중 한 가지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로써 우리가 가치중립에 대한 요구를 대체한다면 그 역설은 완전히 스스로 사라진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과학의 방법은 문제들의 선택과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항상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우리의 시도들에 대한 비판을 본질로 한다는 논지를 전개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사회과학들에서 많이 토론된 방법에 대한 두 가지 문제들을 나의 보기들로서 이용하여, 방법들에 대한 이 비판적 접근방식이 (그 방식이 아마도 지칭될 것과 같이) 아주 합리적인 방법론적 결과들을 야기함을 나는 추가적으로 밝히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내가 인식론인 지식의 논리에 관하여 몇 마디 말을 했고 사회과학들의 방법론에 관하여 몇 마디 비판적인 말을 했을지라도, 사실상 나는 지금까지 나의 주제인 사회과학의 논리에 작은 긍정적인 기여만 이행했다.

적어도 첫 번째 접근에서 과학적 방법을 비판적 방법과 동일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내가 간주하는 이유들이나 핑계들을 제시함에 의하여 나는 여러분을 잡아두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신, 이제 나는 순전히 논리적인 몇 가지 문제들과 논지들로 곧장 이동하고 싶다.

열다섯 번째 논지: 순수한 연역적 논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비판의 도구로서이다.

열여섯 번째 논지: 연역적 논리는 논리적 추론들의 타당성이나 논리적 결론들의 관계의 타당성에 관한 이론이다. 논리적 추론의 타당성에 관한 필수적이고 결정적인 조건은 다음과 같다: 타당한 추론의 전제들이 이라면 결론도 틀림없이 이다.

이것은 또한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연역적 논리는 진리를 전제들로부터 결론으로 전달하는 이론이다.

열일곱 번째 논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모든 전제들이 참이고 추론이 타당하다면 결론도 또한 틀림없이 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타당한 추론에서 결론이 허위라면 모든 전제들이 참이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 사소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결과는 다음 방식으로 또한 표현될 것이다: 연역적 논리는, 전제들로부터 결론으로의 진리 전달 이론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논리는 동시에 결론으로부터 적어도 전제들 중 한 가지 전제로의 허위의 재전달 이론이다.

열여덟 번째 논지: 이런 방식으로 연역적 논리는 합리적 비판의 이론이 된다. 이유인즉 모든 합리적 비판은, 수용 불가능한 결론들이 우리가 비판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주장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음을 밝히려는 시도의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주장으로부터 수용 불가능한 결론들을 논리적으로 도출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 주장은 반증된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열아홉 번째 논지: 과학에서 우리는 이론들로써, 다시 말해서, 연역적 이론체계들로써 연구한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론이나 연역적 이론체계는 설명을 하려는 시도이어서 결과적으로 과학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두 번째, 이론 즉 연역적 이론체계는 자체의 결론들을 통하여 합리적으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합리적 비판에 부쳐지는 것은 잠정적 해결책이다.

비판의 도구로서 형식적 논리에 관해서는 이 만큼이다.

내가 여기서 이용한 두 가지 근본적인 개념들에는 간략한 설명이 필요하다: 진리의 개념과 설명의 개념.

스무 번째 논지: 진리의 개념은, 여기서 전개된 비판적 접근방식에 필수불가결하다.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이론이 참이라는 주장이다. 어떤 이론에 대한 비판자로서 우리가 밝히려고 시도하는 것은, 분명히, 이 주장에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 주장이 허위라는 것.

우리가 우리의 오류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중요한 방법론적 개념은, 진리라는 규제적 개념이 없으면 이해될 수 없다: 어떤 오류도, 우리의 목표이자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우리의 기준을 이룩하지 못한 것을 본질로 하는데 그 진리는 우리의 규제적인 개념이다.

어떤 명제가 사실들과 일치하거나 사실들에 대응한다면 혹은 사태가 명제에 의하여 기술되는 것과 같다면 우리는 그 명제를 (true)’이라고 지칭한다. 이것은 소위 진리의 절대적 혹은 객관적 개념인데 그 개념을 우리 각자는 부단히 이용한다. 진리에 대한 이 개념이 성공적으로 복원된 것은 현대 논리학의 가장 중요한 결과들 중 하나다.

이 언급은, 진리의 개념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말로 이것은, 우리 시대에서 우세한 상대주의적 이념들을 생산해낸 추동력이었다.

이것은, 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ski)에 의하여 현대 수리논리학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결과로서 진리 개념의 복원으로 내가 기술하고 싶은 이유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이 결과를 논의할 수 없다; 타스키(Tarski), 사실들에 대한 명제의 일치가 어디에 놓이는지에 관하여 상상 가능한 가장 단순하고 가장 확신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고 나는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과제의 절망적인 어려움이 회의론적 상대주의를 여기서 상술할 필요가 없다고 내가 확신하는 사회적 결과들과 함께 야기한 바로 그 과제였다.

내가 이용했고 설명이 필요한 두 번째 개념은 설명의 개념, 혹은 더 정확하게, 인과적 설명의 개념이다.

순전히 이론적인 문제는 순수과학의 문제 항상 사실에 대한 혹은 현상에 대한 혹은 두드러진 규칙성에 대한 혹은 두드러진 규칙의 예외에 대한 설명인 어떤 설명을 발견하는 과제를 본질로 한다. 우리가 설명하기를 희망하는 것은 피설명항(explicandum)으로 지칭될 것이다. 문제에 대한 잠정적 해결책은 다시 말해서, 설명 항상 연역적 이론체계인 이론으로 구성되는데, 그 이론을 다른 사실들과 (소위 초기조건들[initial conditions]) 논리적으로 연결함에 의하여 그 이론으로 인하여 우리는 피설명항을 설명할 수 있다. 완전히 명시적인 설명은 항상, 몇 가지 초기조건들에 의하여 강화된 이론으로부터 피설명항을 논리적으로 도출함을 (혹은 도출 가능성) 지적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그리하여 모든 설명의 기초적인 도식은, 그 전제들이 이론 및 몇 가지 초기조건들로 구성되고 그 결론이 피설명항인 논리적인 연역적 추론으로 구성된다.

이 기초적인 도식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응용사항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 도식은, 임시방편적인 가설과 독립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가설을 구분하는 데 이용될 것이다. 나아가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여러분에게 더 흥미로울 것이다 우리는, 이론적 문제들과 역사관련 문제들 및 응용과학의 문제들의 구분을 간단한 방식과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이론과학이나 입법학(立法學: nomothetic science) 및 역사관련 과학이나 표의문자학(表意文字學: ideographic science)에 관한 유명한 구분에 완벽한 논리적 정당화가 있음이 밝혀진다 이 문맥에서 우리가 과학이라는 용어를, 확정적이고 논리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문제들의 집합에 대한 관심을 의미한다고 간주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이용한 논리적 개념들에 대한 설명은 이만큼이다.

진리의 개념과 설명의 개념이라는 이 개념들 양자로 인하여, 지식논리학을 위하여 혹은 방법론을 위하여 아마도 훨씬 더 중요한 추가적 개념들이 논리적으로 전개된다. 이 개념들 중 첫 번째 개념은, 진리에 대한 근사치라는 개념이고 두 번째 개념은 어떤 이론이 지닌 설명력이나 설명적 내용이다.

이 두 가지 개념들은, 명제가 지닌 진리라는 그리고 명제가 지닌 내용이라는 다시 말해서, 어떤 이론이 지닌 논리적 결과들의 등급이라는a 순전히 논리적인 개념들의 도움을 받아서 정의(定義)될 것인 한, 순전히 논리적인 개념들이다. 두 가지 개념들 모두는 상관되는 개념들이다. 각각의 명제가 단지 참이거나 허위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명제는 또 다른 명제보다 진리에 대하여 나은 근사치를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자(前者) 명제가 두 번째 명제보다, ‘더 많은참인 논리적 결론들을 그리고 더 적은허위인 논리적 결론들을 지닌다면 이것이 성립할 것이다. (두 가지 명제들이 지닌 결론들의 집합들의 참인 부분집합들과 허위인 부분집합들이 비교될 수 있다고 여기서 전제된다.) 그렇다면 케플러의 이론보다 뉴튼의 이론이 진리에 대한 나은 근사치라고 우리가 왜 올바르게 전제하는지가 쉽게 밝혀질 수 있다.

유사하게 케플러 이론의 설명력보다 뉴튼 이론의 설명력이 더 크다는 것이 밝혀질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이론들에 대한 평가의 기초를 이루고 우리가 과학적 이론들과 관련하여 진보나 퇴보를 유의미하게 말하도록 허용하는 논리적 개념들을 얻고 있다.

지식에 대한 일반적인 논리는 이만큼만 한다. 특히 사회과학들의 논리에 관하여 나는 몇 가지 추가적인 논지들을 소개하고 싶다.

스물한 번째 논지: 순전히 관찰적인 과학과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이론화할 수 있는 (다소 의식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과학들만 있다. 이것은 사회과학들에게도 또한 성립한다.

스물두 번째 논지: 심리학은 사회과학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들과 행위들이 주로 사회적 조건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a) 모방, (b) 언어, (c) 가족과 같은 개념들은 분명히 사회적 개념들이다; 그리고 학습과 사고의 심리학과 또한 예를 들어, 정신분석은 이 사회적 개념들 중 한 가지 또는 다른 한 가지를 이용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리하여 심리학은 사회적 개념들을 상정한다; 이로 인하여 배타적으로 심리학적 용어들로 사회를 설명하는 것이나 사회를 심리학으로 환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심리학을 사회과학들의 기초로서 간주할 수 없다.

 

a 역주: ‘등급의 원어는 class인데 박영태 번역은 부류(class)’이다.

 

원칙적으로 우리가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모든 심리학적 설명에서 우리가 상정해야 하는 것은 사람의 사회적 환경이다. 이 사회적 환경을 기술하는 과제는 (다시 말해서, 이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이론이 없는 기술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설명적 이론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리하여 사회과학의 근본적인 과제이다. 이 과제를 사회학에 할당하는 것은 합당할 개연성이 높다. 그리하여 나는 이것을 이어지는 것에서 상정한다.

스물세 번째 논지. 사회학은, 상당한 정도까지 사회학이 자체를 심리학으로부터 독립적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주적이다. 사회적 개념들에 대한 심리학의 의존과 별도로, 의도되지 않고 흔히 바람직하지 않은 인간 행위의 사회적 결과들을 설명하는 과제에 사회학이 부단히 직면한다는 사실에서 이것은 또한 기인한다. 한 가지 사례는, 경쟁이 경쟁자들에게는 통상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지만 경쟁자들의 행위들의 (의식적이고 계획된)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통상적으로 불가피한) 설명될 수 있고 설명되어야 하는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쟁자들의 행위 몇 가지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이 있을지라도, 경쟁의 사회적 현상은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 행위들의 사회적인 결과이다.

스물네 번째 논지: 그러나 사회학은 다음과 같은 두 번째 의미에서도 또한 자주적이다; 다시 말해서, 흔히 객관적 이해의 사회학으로 (verstehende Soziologie) 지칭되었던 것으로서.

스물다섯 번째 논지: 경제학의 방법들을 논리적으로 탐구하면, 모든 사회과학들에 적용될 수 있는 결과가 생긴다. 이 결과로 인하여, 사회과학들에는 순전히 객관적인 방법이 있음이 밝혀지는데 그 방법은 객관적인 이해의 혹은 상황적 논리의 방법으로 지칭될 개연성이 높다. 객관적인 이해로 지향된 사회과학은 모든 주관적이거나 심리학적인 개념들과 독립적으로 발전될 수 있다. 그 사회과학의 방법은, 심리학으로부터 추가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의 행동을 상황을 통하여 충분히 설명하기 위하여 그 사람의 상황을 분석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객관적인 이해, 행동이 객관적으로 상황에 합당했음을 깨닫는 것을 본질로 한다. 다시 말해서, 처음에 심리학적으로 보여서 (소망, 동기, 기억과 연상과 같이) 상황의 요소들로 변환된 요소들에 관하여 상황은 충분히 널리 분석된다. 그리하여 특수한 소망들을 지닌 사람은, 자신이 특수한 객관적인 목표들을 추구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자신의 상황이 규정될 사람이 된다; 그리고 특정 기억들이나 연상작용들을 지닌 사람은, 자신이 객관적으로 특정 이론들로 혹은 특수한 정보로 장착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자신의 상황이 규정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행동들을 객관적인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나에게는 다양한 목표들이 있고 나는 다른 (가령, 샤를마뉴[Charlemagne]와 다른) 이론들을 믿는다; 그러나 내가 그의 상황에 처해서 그렇게 분석되었을 터라면 상황이 목표들과 지식을 포함하는 곳 나와 아마도 여러분 또한 그가 행한 것을 실행했을 터이다. 상황분석의 방법은 틀림없이 개인주의적인 방법이지만 그 방법은 틀림없이 심리학적인 방법은 아니다; 이유인즉 그 방법이, 원칙적으로, 모든 심리학적인 요소들을 배제하여 그 요소들을 객관적인 상황적 요소들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나는 통상적으로 그것을 상황의 논리혹은 상황적 논리로 지칭한다.

스물여섯 번째 논지: 여기서 기술된 상황적 논리에 대한 설명들은 합리적이고 이론적인 재구성이다. 그 설명들은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지나치게 도식화되어 결과적으로 일반적으로 허위이다. 그러나 그 설명들은 상당한 진리 내용을 지닐 수 있어서 그 설명들은, 엄격하게 논리적인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충분한 근사치들일 수 있고 심지어 시험될 수 있는 다른 설명들보다 훨씬 나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근사치라는 논리적 개념은, 상황적 분석이라는 방법을 이용하는 사회과학들에서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상황적 분석들은 합리적이고 경험적으로 비판될 수 있어서 개선이 가능하다. 이유인즉 예를 들어 우리는, 샤를마뉴가 이용할 수 있던 지식은 우리의 분석에서 우리가 상정했던 지식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편지를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심리학적이거나 특성연구적인 가설들은 비판될 수 없다.

스물일곱 번째 논지: 일반적으로 상황적 논리는, 우리가 행동하는 물리적 세계를 상정한다. 예를 들어 이 세계는 물리적 자원들을 포함하는데 그 자원들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고 그 자원들에 관하여 우리는 또한 중요한 것을 알고 그리고 우리가 중요한 (흔히 그다지 많이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아는 물리적 장애물들을 포함한다. 이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이 거주하는 사회적 세계를 상황적 논리는 또한 틀림없이 상정하는데 그들의 목표들에 관하여 우리는 중요한 것과 (흔히 그다지 많이 중요하지 않은) 나아가 사회제도들을 안다. 이 사회제도들이, 사회적 환경의 고유하게 사회적인 특징을 결정한다. 그 사회제도들은 사회적 세상의 모든 사회적 실재들로 구성되는데 물리적 세계의 사물들에 대응하는 실재들이다. 식료품 가게나 대학 기관이나 경찰이나 법률은, 이런 의미에서, 사회제도들이다. 교회, 국가 그리고 결혼도 또한, 예를 들어 일본에서의 할복(hara-kiri)과 같은 특정 강요적 관습들이 그러한 것처럼 사회제도들이다. 그러나 우리 유럽 사회에서는, 내가 자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그리고 범주가 중요하다고 내가 주장하는 의미에서 사회제도가 아니다.

저것이 나의 마지막 논지였다. 이어지는 것은 제안이고 짧은 결론적 언급이다.

제안: 우리는 아마도 먼저 상황들에 대한 일반적인 논리 연구를 그리고 두 번째로 제도들과 전통들에 대한 이론을, 순전히 이론적인 사회학의 근본적인 문제들로서 잠정적으로 채택할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포함할 터이다:

1. 제도들은 행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도들 안에서 그리고 제도들을 위하여 개인들만 행동한다. 이 행동들에 대한 일반적인 상황적 논리가, 제도들의 유사-행동들에 대한 이론일 터이다.

2. 우리는 아마도, 목적이 있는 행동이 야기하는 의도되고 의도되지 않은 제도적 결과들에 대한 이론을 구축할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또한, 제도들을 창조하거나 발전시키는 이론이 생길 수 있을 터이다.

마지막 한 가지 언급. 개별적인 과학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철학을 위해서 인식론이 중요하다고, 그리고 우리 시대의 종교적 및 철학적 불안은 틀림없이 우리 모두에게 관련되는데 주로 인간 지식의 철학에 관한 불안이라고 나는 믿는다. 니체는 그것을 유럽의 허무주의라고 불렀고 방다(Benda)는 지식인의 배반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것을,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발견의 결과로서 규정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결코 우리의 이론들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 중요한 발견은, 많은 다른 불안들 가운데서, 실존주의라는 불안을 만들어냈는데 발견의 절반일 따름이다; 그리고 허무주의는 극복될 수 있다. 이유인즉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고 심지어 그 이론들이 개연적임을 증명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 이론들을 합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쁜 이론들로부터 나은 이론들을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이것은 제노파네스(Xenophanes)에게 알려졌는데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들(gods)은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다,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배우고 사물들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