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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비판
알파크 토론회(Alpbach Forum)의 옛 회원으로서 그 토론회의 30주년 축하식에 초대를 받아서 나는 기쁘다; 그러나 나는 이 초대를 다소 망설인 후에 수락했을 따름이다. ‘과거 30년에 걸친 지성적 및 과학적 발전’이라는 극도로 폭넓은 기본적인 주제에 관하여 단지 30분에 합당하고 이해 가능한 것을 말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실상 나의 계산이 옳다면, 이것으로 인하여 나에게는 지성적 및 과학적 발전 매년에 대하여 정확하게 1분이 나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나는 사과의 말로써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고 더 이상의 소동을 일으키지 말고 시작해야겠다.
I
내가 선택한 제목, ‘과학과 비판’으로부터 여러분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지성적 발전이라는 문제는 다소 무시되도록 하고 주로 과학의 발전을 다룰 의도가 나에게 있다. 이것에 대한 이유는, 전적으로 간단하게, 과거 30년의 지성적이거나 문화적 발전을 내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는a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분야에서 문외한인데 왜냐하면 나는 문화에 관한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새로운 것을 생산하려는 모든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과거 30년의 지성적 발전은 레마르크(Remarque)의 저서 제목 ‘서부전선은 이상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아래 포함될 수 있다. 게다가 상황은 ‘동부전선은 이상없다(All Quiet on the Eastern Front)’이기도 해서 ㅡ 인도가 마하트마 간디에서 원자폭탄으로 이동한 것을 여러분
소위 ‘알파크 유럽 토론회(Alpbach European Forum)’ 30주년을 기념하여 1974년 8월에 행한 강좌. 알파크는 티롤 산맥(Tyrolese Mountains)의 높은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그곳에서 1946년 이래 여름학교가 열렸다.
a 역주: ‘좋게 생각하다’의 원어 표현은 think much of인데 박영태 번역은 ‘많이 생각하다’이다.
이 지성적 발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ㅡ 나는 우려한다a.
이 발전으로 ㅡ 서양에서 인도로 온 ㅡ 인하여 비-폭력이라는 개념이 폭력이라는 개념으로 환치되었다. 슬프게도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문화에 관한 우리의 서구 철학자들 몇몇은 파멸적인 운명에 대한 그리고 폭력에 대한 예언자들로 오랫동안 이것에 관하여 설교했고 분명히 기대되었던 대로 그들의 이론은 지금 폭력 강령들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은 것인 정신의 영역으로부터 더 고무적인 것을 보고할 수 없을까? 우리는 보고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거의 위대한 거장들의 음악이 30년 전에 사람들이 꿈꿀 수 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청취될 수 있다고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와 희망과 열정을 불어넣는다고 나는 흔히 기쁘게 생각한다. 이 작품들에 대하여 정말로 다음과 같이 언급될 수 있다.
당신의 놀라운 작품들,
모두 측량될 수 없이 심오한데,
탁월하고 순수하여
그것들이 창조되는 날 같구나.
사실상 내가 보기에 그 작품들은 날마다 훨씬 더 찬란해진다.b
우리 시대의 최고의 것들 중 한 가지는, 과거에서 유래하는 위대한 작품들을 많은 사람들이 예리하게 감상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인정되는 바와 같이, 부분적으로 기술 ㅡ 축음기, 라디오 그리고 텔레비전 ㅡ 덕택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런 기술이 진정한 지성적 욕구들에 도움을 주고 있다. 과거의 작품들에 그렇게 큰 흥미가 없다면, 그 작품들을 그렇게 빈번하게 연주되어 공연되지 않을 터이다. 이 분야에서의 발전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중요한, 가장 혁명적이고 가장 유망한 과거 30년의 정신적 발전이다.
이제 나는 나의 두 가지 핵심적인 주제들로 선회하고 싶다: 과거 30년에 걸친 과학적 발전과 나의 주제인 과학과 비판.
II
a 역주: ‘나는 우려한다’의 원어 표현은 I am afraid인데 박영태 번역은 ‘나는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n fact, it seems to me that they grow still more magnificent by
the day.인데 박영태 번역은 ‘사실 이 작품들은 하루에 어느 정도씩 점점 더 장엄하게 발전하여 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이다.
내가 여기서 오늘 과학적 발전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면, 나는 분명히 매
우 선택적인 접근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나의 기준은 간단하다: 나에게 가장
큰 흥미를 부여했고 세계에 대한 나의 개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몇 가지 과학적 발전들을 나는 토론하겠다.
물론 나의 선택은, 과학에 관한 나의 견해들과 그리고 특히 내가 이론들에 대하여 제안한 과학적 위상에 대한 기준에 관한 나의 견해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기준은 비판 가능성으로 합리적 비판이다. 자연과학에서 이 기준은, 경험적 시험들이나 경험적 반증을 통한 비판 가능성의 본질이 된다.
분명히 나에게는 비판 가능성에 대한 매우 간략한 토론 이상을 위한 시간이 없다.
예술, 신화, 과학 그리고 심지어 사이비-과학에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사물들을 새롭게 비추어 보는 것을 허용하는 창조적 단계와 숨겨진 세계들을 언급하여 일상적인 세계를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창조적 단계와 같은 것에 그것들 모두가 속한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상상의 세계들은 실증주의자들에게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위대한 비엔나 실증주의자인 심지어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도 원자론에 왜 반대했는지가 설명된다. 그러나 원자론은 살아남았고, 물질적 및 원자적 구조의 물리학뿐만 아니라 또한 전기적 및 자기적 분야의 물리학과 중력장의 물리학이라는 우리의 물리학 전체가 가설적 세계들에 대한 기술인데 우리는 그 세계들이 우리의 경험의 세계 너머에 숨겨져 있다고 상상한다.
이 가설적인 세계들은, 예술에서와같이, 우리의 상상의 그리고 우리의 직관의 산물들이다. 그러나 과학에서 그 산물들은 비판에 의하여 제어된다: 과학적 비판인 합리적 비판은 진리라는 규제적 개념에 의하여 감독을 받는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과학적 이론들을 정당화할 수 없는데 이유인즉 그 이론들이 허위로 판명되지 않을지를 우리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론들을 비판적 검토에 부칠 수 있다: 합리적 비판이 정당화를 갈음한다. 비판은 상상을 제어하지만 상상을 구속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상상은 예술이든 신화든 과학이든 모든 창조적 활동에 공통적인 반면, 과학은 진리라는 개념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합리적 비판에 의하여 규정된다. 그래서 나는 이어지는 것에서, 상상과 합리적인 비판이라는 이 요소들 모두가 특히 드러나는 발전들에 나 자신을 국한하겠다.
III
나는 수학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시작하겠다.
학생으로서 나는 비엔나의 저명한 수학자 한스 한(Hans Hahn)에게 강력한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자신의 역할에서 화이트헤드(Whitehead)와 러셀의 위대한 작품인 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저술이 지닌 흥미진진한 이념적 내용은, 수학이 논리로 환원될 수 있다는 혹은 더 정확하게 수학이 논리로부터 논리적으로 연역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틀림없이 논리인 것으로써 시작한다; 그다음에 우리는 엄격하게 논리적인 연역을 통하여 나아가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틀림없이 수학인 것을 획득한다.
이것은 대담한 계획인 것만은a 아닌 듯하다. 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에서 이 연구 프로그램은 성취된 듯이 보인다. 수학원리(Principia)는 연역의 논리, 명제계산(propositional calculus)b그리고 제한적 함수계산(restricted functional calculus)으로써 c 시작했다. 이로부터 류들(classes)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고 류들(classes)의 계산이 연역되었다. 그다음에 추상적인 집합이론이 연역되었는데 그 이론은 19세기에 게오르크 칸토어(Georg Cantor)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게다가 수학원리(Principia)는, 미적분이 집합이론의 한 부분으로서 구축될 수 있다는 논지를 증명하는 데로 많은 일을 했고 그 논지는 심지어 지금도 논쟁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수학원리(Principia)는 엄격한 비판을 받았고 약 40년 전에 상황은 여전히 다음과 같았다. 사상과 관련하여 세 가지 학파들이 구분될 수 있을 터이다. 먼저 수학이 논리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 논리주의(logicism)로 불리는 학파가 있었는데 버트런드 러셀에 의하여 지도되었고 비엔나에서는 한스 한(Hans Hahn)과 루돌프 카르납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두 번째로 나중에 형식주의(formalism)로도 지칭된 공리학(axiomatics) 학파가 있었는데 그 학파는 집합이론을 논리학으로부터 연역하지 않고 집합이론을 유클리드 기하학과 유사한 공리들의 형식적인 체계로서 도입하기를 원했다; 이 견해를 믿은 사람들에는 힐베르트(Hilbert), 체르멜로(Zermelo), 프랑켈(Fraenkel), 버네이스(Bernays), 아커만(Ackermann), 겐첸(Gentzen) 그리고 폰 노이만(von Neumann)이 포함되었다. 세 번째 학파는 소위 직관론자들의 학파였는데 푸앵카레, 브로우베르(Brouwer) 그리고 나중에는 헤르만 바일(Hermann Weyl)과 하이팅(Heyting)이 속했다.
a 역주: ‘만’의 원어는 just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명제 계산’은 박영태 번역에서 ‘명제논리’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제한적 함수 계산’은 박영태 주석에 따르면 ‘(x)(Mx→Fx)나 (∃x)(Hx & Gx)와 같이, 변항들 x의 적용범위가 속박된(한정된) 명제함수(1차 술어논리)를 말한다’로 설명되었다.
그것은 매우 흥미로운 상황이었지만 처음에는 희망이 없어 보였다. 논쟁에 관련된 두 명의 가장 탁월하고 가장 연구를 많이 한 수학자들인 힐베르트와
브로우베르 사이에는 강력하게 개인적인 고음을 내는 적의가 전개되었다. 많은 수학자들은 수학의 토대에 관한 그 논쟁을 쓸데없는 것으로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계획 전체를 배척하기도 했다.
그다음 44년 전에 오스트리아 수학자인 쿠르트 괴델(Kurt Gödel)이 논쟁이 참여했다. 괴델은 비엔나에서 공부했는데 그곳에서 논리주의는 강력한 지원을 받았지만 그곳에서 나머지 두 가지 움직임들도 역시 매우 진지하게 고려되었다. 괴델의 첫 번째 주요 업적인 제한적 함수계산에 대한 완벽한 증명은 힐베르트에 의하여 언명된 문제들에 근거하였고 아마도 형식주의에 귀속될 수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업적은 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의 그리고 수이론(the theory of numbers)의 불완전성을 그가 확실하게 밝혀 증명한 것이었다. 경쟁하는 세 학파들 모두는 이 업적에 대하여 다소 공로를 인정받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종말의 ㅡ 다시 말해서, 사상과 관련한 이 세 학파들의 종말 ㅡ 시작이었다. 나의 견해로 이것은 또한 새로운 수리철학의 시작을 공표했다. 사태가 당시 유동적이었지만 아마도 다음과 같이 요약될 것이다:
러셀의 환원이론, 다시 말해서 수학은 논리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이론은 배척되어야 한다. 수학은 완벽하게 논리로 환원될 수 없다; 사실상 수학은 심지어 논리학을 상당히 정제했고 논리학을 비판적으로 수정했다고 언급될 것이다:a 우리의 논리적 직관을 비판적으로 수정했다고 그리고 우리의 논리적 직관은 전혀 그렇게 신뢰될 만하지 않다는 우리의 비판적 통찰을 불러왔다고. 다른 한편으로 직관은 매우 중요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또한 밝혀졌다. 창조적 개념의 다수는 직관들 통하여 발생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생하지 않는 창조적 개념들은 직관적 개념들에 대한 비판적 반증의 결과이다.
수학의 근본적인 원리들에 대한 한 가지 체계가 있는 듯이 보이지 않고 수학을 구축하는 다양한 방법들이나 수학의 다양한 분야들이b 있는 듯이 보인다. 나는 ‘확립(establishing)’이 아니라 ‘구축(constructing)’을 말하는데 왜냐하면 수학의 근본적인 원리들에 대하여 궁극적인 확립이나 안전장치가 없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취약한 체계들의 경우에서만 우리는 우리가 구축한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n fact, it has even led to a considerable refinement of logic and, it may be said, to critical correction of logic: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러한 완전한 환원 불가능성은 상당히 정밀하게 다듬어진 논리학으로 인도했다. 즉, 비판적으로 교정된 논리학’이다.
b 역주: ‘분야들’의 원어는 branches인데 박영태 번역은 ‘체계들’이다.
것의 일관성을 증명할 수 있다. 그리고 타스키(Tarski)로부터, 수학의 중요 분
야들이 근본적으로 불완전함을, 다시 말해서, 이 체계들이 강화될 것이지만 결코 우리가 그 체계들 안에서 모든 참이고 유관한 서술들을 증명할 수 있다는 정도까지는 강화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 대부분의 수학적 이론들은, 물리학이나 생물학에 관한 이론들 대부분처럼, 가설적-연역적이다: 그리하여 순수 수학은 자체가 심지어 최근에 생각되었던 것보다, 그 가설들이 추측들인 자연과학들에 훨씬 더 근접한 것으로 판명된다.
괴델과 코언(Cohen)은, 소위 연속체 가설(continuum hypothesis)이 지금까지 이용된 집합이론의 방법들로써 반증될 수도 없고 증명될 수도 없다는 증명들을 성공적으로 또한 제시했다. 이 유명한a 가설은, 칸토어와 힐베르트가 훗날 증명하기를 소망했는데 현재 이론과 독립적임이 밝혀졌다. 물론 그렇게 이론을 강화하여 (추가적인 전제들을 사용하여b) 가설이 증명될 수 있게 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이론을 강화하여 가설이 반증되는 것도 동등하게 가능하다.
우리는 이제, 수학이 어떻게 수정되지 않은 혹은 우활한(迂闊한: naive) 혹은 ‘자연적인’ 논리적 직관들을 수정할 수 있는지를 예시하는 흥미로운 사례로 왔다. 독일어, 영어, 그리스어 그리고 다른 많은 유럽어들은, 우리의 자연적인c 논리적 직관에 따라서 ‘부인될 수 없는(undeniable)’이라는 단어와, 혹시 훨씬 더 명백하게 ‘반증될 수 없는(irrefutable)’이라는 단어에는 ‘반증될 수 없이 참인(irrefutably true)’이나 ‘전적으로 확실하게 참인(quite definitely true)’과 동일한 의미의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게다가 어떤 서술의 반증불가능성이 실제로 증명된다면 (괴델이 연속체 가설에 대하여 반증불가능성을 증명했듯이) 우리의 자연적인 논리적 직관에 따라서 서술 자체가 반증이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증명되어서 참으로 중명된다.
이 논증은 수정되어, 연속체 가설의 반증불가능성을 증명한 괴델이 동시에 이 반증 불가능한 명제도 또한 증명될 수 없음을 또한 생각했다는 사실에 의하여 우활한(迂闊한: naive) 것으로 밝혀진다: 그리하여 이 이론체계 안에서 그 명제가 반증될 수도 없었고 증명될 수도 없었다는 그리고 그 명제가 독립적이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그의 생각은 폴 코언에 의하여 곧 확인되었다.
내가 여기서 간략하게 언급한 괴델, 타스키 및 코언의 선구적인 연구들은
a 역주: ‘유명한’은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추가적인 전제들을 사용하여’의 원어 표현은 by using additional assumptions인데 박영태 번역은 ‘보조 가설들의 사용에 의해’이다.
c 역주: ‘자연적인’은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모두 집합이론인 칸토어의 탁월한 실무한(實無限: actual infinite) 이론과 관련된다. 이 이론은, 반대로, 주로 분석을 위한 다시 말해서 미적분 계산을 위한 근거를 만들어내는 문제에 의하여 고취되었는데 그 계산은 특히 자체의 원래 형태에서 무한소(無限小: infinitesimal)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이 무한소라는 개념은 라이프니츠(Leibniz)에 의하여 그리고 잠재적 무한을 연구하는 이론가들에 의하여 도움은 되지만 문제가 있는 개념으로서 이미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 개념은 탁월한 칸토어에 의하여,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그리고 심지어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명시적으로 배척되었다: 실무한은 무한히 큰 것에 국한되었다. 그리하여 1961년에 ‘제2의 칸토어’가 (이 용어는 A. 프랑켈[Fraenkel]의 의하여 사용되었다) 등장했는데 그는 실무한소(the actual infinitesimal)라는 엄격한 이론을 개괄했고 그는 그 이론을 1966년에 매우 상세하게 확대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유감스럽게도 이 이론을 창시한 아브라함 로빈존(Abraham Robinson)은 최근 미국에서 사망했다.
물론 수리논리학과 수학에서의 최근 업적들에 관한 나의 언급들은 물론 매우 개략적이다. 그러나 무한에 관한 이 무한히 넓은 분야에서 가장 흥미로운 발전들을 몇 가지를 지적하려고 나는 시도했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에 근거한 발전들이다. 괴델, 타스키 그리고 로빈존은 특히 비판자들이다. 괴델의 업적은, 40년 전의 지도적인 모든 사상 학파들에 대한 비판에 해당한다; 논리주의, 형식주의 그리고 직관주의의 학파들에 대한. 그리고 그의 업적은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데 실증주의는, 괴델이 회원이었던 비엔나 학파에서 강력하게 재현되었다. 그리고 괴델의 비판은, 그의 수학적 직관에 근거했고 그에게 정말로 영향을 미쳤지만 그가 권위로서 이용한 적이 없는 수학적 상상에 근거했다: 그 비판은, 합리적이고 비판적-논변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시험을 항상 치러야 했다.
IV
나는 몇 분 동안 우주론에 관하여 이야기할 예정인데 우주론은 논증될 수 있는 바와 같이a 모든 과학 중에서 가장 철학적으로 중요하다.
우주론은 과거 30년에 걸쳐서 믿기 어려운 발전을 거쳤다. 심지어 그 이전에도 뉴튼이 여전히 세계의 체계라고 부르던 태양계가 국지적인 현상이 되었다. 칸트에 의하여 크게 정식화된 최초의 현대적 우주론인 행성 체계 및 은하
a 역주: ‘논증될 수 있는 바와 같이’의 원어는 arguably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수 체계들에 대한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이론들과 행성 거리들을 추산하는 허블의 새로운 방식들의 영향을 받아서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서 발전했다; 그리고 확장하는 우주라는 허블의 이론은 확립된 듯이 보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영국과 호주에서 최초로 발전한 전파천문학이 이룩한 결과들은, 처음에 이 구조에 잘 맞아떨어지는 듯이 보였다. 확장하는 우주라는 이론 한 가지는 (나의 견해로 매우 좋고 유망한 이론) 본디(Bondi)와 골드(Gold) 그리고 호일(Hoyle)에 의하여 제시되었는데 심지어 전파천문학의 방식들을 이용하여 시험될 수 있다고 판명되었다; 그리고 그 이론은 (더 오래된) 빅뱅 확장 이론을 선호하여 반증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허블 상수(Hubble Constant)는 10분의 1로 감소되었고 최대 은하수의 확장은 150배로 늘어났다. 많은 다른 결과들에도 전파천문학에 의하여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리가 평화를 추구하는 과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정치에서 느끼는 것처럼, 완벽하게 혁명적인 이 결과들 몇몇에 직면하여 우주론 분야에서 우리는 거의 무력한 듯이 보인다. 미증유의 질량과 밀도를 지닌 별-같은 대상들이 존재하는 듯이 보이고, 모든 방향들로 평화롭게 산포하는 은하수라는 우리의 이전 개념들은 아마도 드물지만 부단히 재발하는 파멸들이라는 이론에 의하여 곧 대체될 것이다.
아무튼, 모든 기대들에 반하여 전파천문학은 우주론의 역사에서 매우 흥미진진하고 혁명적인 일화를 재현한다. 그 혁명은 갈릴레오가 발명한 망원경에 의하여 시작된 혁명에 비견될 수 있다.
여기서 일반적인 비평이 합당할 것이다.a 과학적 발견들의 역사는 새로운 기구들을 순전히 기술적으로 발명한 것들에만 (혹은 주로) 의존한다고 흔히 주장된다. 대조적으로 과학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개념들의 역사라고 나는 믿는다. 갈릴레오가 확대경들을 천문 망원경에 사용하겠다는 생각을 갖기 전에도 오랫동안 확대경들은 여러 곳에 있었다.
전파천문학은 유사하게 지체되었다. 전파는 1888년에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그러나 아마도 별인 대상들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방사선을 찾으려는 대안이었던 소위 우주 광선들을 빅토르 헤스(Victor Hess)가 1912년에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파천문학이 시작되고 그 천문학에 필요한 기구들이 발명되기까지는 20년이 더 걸렸다. 그 지체에 대한 개연적인 설명은, 어떤 천문학자도 전파를 이용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개념이 출현하자마자, 그 개념으로 인하여 새롭고 혁명적인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 general comment may be appropriate here.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에 관한 알반적인 설명은 여기서 끝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이다.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 개념의a 생존을 위한 얼마간의 싸움이 지나고). 그리고 새로운 기구들의 구축을 제안된 것은 새로운 개념에 의해서였다; 거대한 인공적인 감각기관들과 같은 것.
V
아무튼 뉴튼의 시대 이래 우주론은 물리학의 한 부분이었고 칸트, 마흐, 아인슈타인, 에딩튼(Eddington)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우주론을 그와 같이 취급했다. 아인슈타인, 에딩튼, 에르빈 슈뢰딩거 그리고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는 (파울리는 슈뢰딩거처럼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특히 한편으로는 물질과 원자 구조와 다른 한편으로서 우주론 사이의 관계들에 관하여 흥미로운 언급들을 내놓았다. 그것이 40년 전이었고 그 후 몇몇 위대한 물리학자들, 특히 아인슈타인과 디랙(Dirac)과 하이젠베르크 및 코르넬리 란초슈(Cornelius Lanczos)가 지속적으로 물리이론의 통합을 다루었지만 이 개념들은 다소 포기되었다.
그러나 중성미자 장들(fields)과 중력의 연계에 관한 파울리의 가설들이, 태양 중성미자의 유동이 표면적으로 결핍됨에 관한 예기치 않은 실험적 결과들 때문에, 최근에 다시 다루어졌다. 포츠담 출신인 우주론자이자 물리학자인 한스-위르겐 트레더(Hans-Jürgen Treder)는, 1934년에 파울리에 의하여 제안된 가설을 사용하여 자신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으로부터 해석하여 이 부정적인 실험 결과를 도출하려고 시도했다. 바라건대, 이것이 물질과 우주론의 더 근접한 연계를 조성하려는 시도들의 새로운 단계를 촉발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새로운 시도가, 실험적으로 반증된 어떤 기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VI
이제 나는 과거 30년에 걸쳐서 아마도 과학 발전의 가장 중요한 사례인 생물학의 발전으로 선회한다. 가장 중요하고 정보성 특징을 지닌 새로운 결과들이 분출한 제임스 왓슨(James Watson)과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의 이론 덕택인 유전학에서의 독특한 돌파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나는 또한 동물 심리학인 동물행동학의 성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지
a 역주: ‘그 개념의’의 원어는 its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향된 발전적 심리학과 다윈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시작.
왓슨과 크릭의 훌륭한 돌파구는 무엇이었나? 유전자라는 개념은 상대적으로 오래되었다: 그 개념은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의 업적에 함축되었다. 그러나 그 개념은 라브와지에(Lavoisier)의 연소 이론(combustion theory)보다 더 오랫동안 의문시되었다. 왓슨과 크릭은 유전자들에 대한 화학적 구조뿐만 아니라 화학적 유전자 복제 이론과 심지어 유전자들에 속에 암호화된 패턴이 유기체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이론도 제시했다. 그러나 이것이 충분하지 않은 양, 혹은 충분한 것 이상으로a 패턴이 서술되는 언어의 알파벳을 그들은 또한 발견했다: 유전자 암호의 알파벳.
유전자 암호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가설은, 내가 아는 한, 에르빈 슈뢰딩거에 의하여 처음 전파되었는데 그의 기억은 우리의 알파크(Alpbach) 모임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개체의 미래 발전과 성숙한 상태에서 그 발전의 작용 패턴을 어떤 종류의 암호-기록 속에 포함시키는 것은, 이 염색체들이거나 아마도 우리가 염색체로서 현미경을 통하여 실제로 보는 것의 척추 섬유일 뿐이다’라고 슈뢰딩거는 서술했다.
슈뢰딩거의 이 가설은 다음 30년에 걸쳐서 미증유의 방식들로 발전되었고 증명되었으며 분자 유전자 암호가 해독되었다.
왓슨과 크릭 이론의 결과로, 이 과학적인 기적은 슈뢰딩거 생애의 마지막 해에 사실이 되었고 그의 사망 후 곧 그 암호는 완벽하게 해독되었다. 이제 우리는, 슈뢰딩거에 의하여 가설로 제기된 언어의 알파벳과 어휘와 구문론 그리고 의미론을 (다시 말해서, 의미의 과학) 안다. 모든 유전자는 특정 효소를 구축하라는 지시임을, 그리고 유전자 암호에 기록된 지시로부터 문제의 효소에 대한 정확한 (선형[線形: linear]) 화학 구조식을 산출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또한 많은 효소들의 기능에 관하여 안다. 그러나 우리가 암호화된 유전자 공식으로부터 상응하는 효소에 대한 화학식을 산출할 수 있을지라도, 그 화학식으로부터 효소의 생물학적 기능을 아직 결정할 수 없다: 여기에 유전자 암호의 의미에 대한 우리 지식의 한계선이 놓인다.
마지막으로 중요하고 환영받는b 또 다른 생물학적 개념을 아직 나는 언급하고 싶은데 그 개념도, 슈뢰딩거가 이 개념들 다룬 최초 사람도 아니고 마지막 사람도 아니었을지라도, 또한 슈뢰딩거의 업적과 관련된다. 이것은, 로이
a 역주: ‘충분한 것 이상으로’의 원어 표현은 more than enough인데 박영태 번역은 ‘다소 충분한 것으로 보이더라도’이다.
b 역주: ‘중요하고 환영받는’의 원어 표현은 important and welcome인데 박영태 번역은 ‘인기 있는’이다.
드 모건(Lloyd Morgan)과 볼드윈(Baldwin) 및 다른 사람들이 ‘유기체 선택
(organic selection)’으로서 기술한 다윈론의 한 가지 면모이다. 슈뢰딩거는
다윈의 선택을 말했는데, 그것은 라마르크론을 모방한다.a
첫눈에 보기에, 다윈의 개념들은 진화의 중요성을 식물과 동물 개체의 행태에 ㅡ 예를 들어 동물 개체가 새로운 종류의 먹이에게 혹은 새로운 사냥 방법에게 보여줄 선호에 ㅡ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듯하다 (라마르크의 개념들과 대조적으로). 유기체 선택 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개체적 행태의 이 형태들이 자연선택을 수단으로 종족의b 진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개념은 간단하다: 행태의 모든 새로운 방식은 새로운 생태학적 보금자리의 선택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새로운 먹이에 대한 혹은 특정 종류의 나무 위에 둥지 틀기에 대한 선호로 심지어 동물이 이동하지 않을 때도 동물이 새로운 환경으로 이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생태학적 보금자리인 이 새로운 환경을 채택하면서 동물은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새로운 환경적 영향에 그리하여 새로운 선택압력에 노출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선택압력이 유전적 발전에 영향을 미쳐서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을 불러오는 것은 그때이다. 이 간단하고 확신을 주는 이론은 오래된 것이지만 ㅡ 알리스터 하디(Alister Hardy)가 밝히는 바와 같이, 그 이론은 다윈에 앞서고 심지어 라마르크에도 앞선다 ㅡ 과거 30년 동안에 예를 들어 워딩튼(Waddington)에 의하여 그 이론은 재발견되어 더욱 발전되고 실험적으로 시험되었다. 그 이론으로 인하여, 동물의 탐색 욕구와 호기심과 기타 등등 및 동물이 혐오하는 것들과 같은 행태가 계통발생론적 유전자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이 라마르크보다 훨씬 더 명백하게 밝혀진다.
그래서 생명체 개체의 모든 행태적 참신성은 창조적이고 흔히 혁명적인 계통발생론적 결과들을 낳는다. 이로 인하여, 개체의 자주적 행동은 다윈적 발전에서 능동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 관찰로 인하여, 생명체 개체의 활동인 선택 기제(機制: mechanism)에서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을 터로 보였을 때 그렇게 오랫동안 다윈론을 둘러쌓던 가망 없고 절망적인 인상이 극복된다.
여러분, 가장 최근에 생긴 놀라운 결과들로부터 우리가 과학의 미래에 관한 어떤 결론도 도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부언하는 일만 남았다. 과학 탐구를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Schrödinger spoke of a Darwinian selection, which simulates
Lamarckism.인데 박영태 번역은 ‘슈뢰딩거는 이러한 다윈주의자의 선택(도태)에 대해서 이것은 라마르크의 진화론(Lamarckism)을 보여준다고 말했다.’이다.
b 역주: ‘종족’의 원어는 phylum인데 박영태 번역은 ‘문(phylum)’이다.
위한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조직들이 과학에 대한 심각한 위험을 상징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위대한 과학자들은 비판적인 개인들이었다. 이것은 물론 슈뢰
딩거와 괴델에게도 그리고 심지어 왓슨과 크릭에게도 사실이었다.
과학 정신은a 조직된b 탐구의 결과로서 변했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개인들이 항상 있을 것을 우리는 소망해야 한다.
a 역주: ‘정신’의 원어는 spirit인데 박영태 번역은 ‘풍조’이다.
b 역주: ‘조직된’의 원어는 organized인데 박영태 번역은 ‘체계화된’이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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