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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II부 역사에 관하여, 10장 지식을 통한 해방

이윤진이카루스 2020. 11. 26.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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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식을 통한 해방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은, 그의 역사철학과 함께, 독일에서 낡은 것으로서 그리고 헤겔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대체된 것으로서 흔히 간주된다. 이것은, 독일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인 칸트의 우월한 지성적 및 도덕적 위상에a 기인할 확률이 높다; 이유인즉 그의 업적의 바로 그 위대성이 그의 하찮은 후배들을 괴롭히는 존재여서 피히테와 나중에는 헤겔이, 세상 사람들에게 칸트가 자신들의 선두주자들 중 한 명일뿐이라고 설득함에 의하여 이 괴로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반대로 칸트는 낭만파 운동 전체를 그리고 특히 피히테를 확고하게 반대했다: 칸트는 사실상 저렇게 매도당한 운동인 계몽사조의 마지막 위대한 지지자였다. ‘계몽사조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중요한 논문에서 (1785)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계몽사조는 인간이 스스로 짊어진b 보호 상태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다.

상태는, 인간이 외부의 지도가 없으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에서

기인한다. 그런 보호 상태가 지성의 결여 때문이 아니라 지도자의 도움이 없이

인간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려는 용기나 결심의 결여 때문이라면 그런 보호 상태를

나는 스스로 짊어진이라고 [혹은 비난받을만한’] 부른다.b Sapere aude! 당신

 

19612역사의 의미에 관하여(On the Meaning of History)’라는 연속방송으로 바바리아 방송국(Bavarian Broadcasting Network)에서 독일어로 진행된 방송 강연. 영어 원문은 저자가 작성함.

 

a 역주: ‘위상의 원어는 stature인데 박영태 번역은 업적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Such a state of tutelage I call 'self-imposed' [or 'culpable'] if it is due not to lack of intelligence but to lack of courage or determination to use one's own intelligence without the help of a leader.인데 박영태 번역은 자신에게 부여된(자신의 허물만을 지적하는(self-culpable)) 훈계 지침에만 따르는 미성숙의 상태라고 내가 말하는 경우는, 지성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지도자의 도움이 없을지라도 자신의 지성에 따라 실천해보겠다는 용기와 결단이 부족하여 훈계 지침에 따르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이다.

 

의 지성을 과감하게 사용하라! 이것이 계몽사조의 구호이다.

 

칸트의 논문에서 나온 이 구절은 그에게 계몽사조의 핵심적 이념이었던 것을 설명한다. 그것은 지식을 통한 해방이라는 이념이었다.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이라는 이 이념은 칸트의 생애를 통하여 지침으로서뿐만 아니라 과제로서 칸트에게 남았다; 그리고 필요한 지성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 이 이념은 아마도 영감으로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칸트가 확신했지만 칸트는, 우리가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이나 다른 주로 지성적인 훈련을 인간 삶의 전체 의미나 목표로서 채택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정말로 칸트에게는 순수이성을 비판하기 위하여 낭만파의 조력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인간이 순수하게 합리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들이 상기시켜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칸트는, 순전히 지성적인 지식이 인간의 삶에 최고의 것도 아니고 가장 고귀한 것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그리고 인간의 목표들의 다양성을 신뢰한 다원론자였다; 그리고 다원론자이기 때문에 그는 열린사회를 다음과 같은 그의 자신의 금언에 부응할 다원론적 사회 신뢰했다: ‘과감하게 자유로워지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자율성을 존중하라; 이유인즉 인간의 존엄은 인간의 자유, 그리고 특히 다른 사람들의 자율적이고 책임감이 있는 신념들이 그 인간 자신의 것들과 다르다면 그 다른 사람들의 그런 신념들을 그가 존중하는 것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다원론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성적인 자기-교육이나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에서 철학적인 관점에서 필수불가결한 과제를 보았다; 모든 사람에게 즉각적인 행동을 당장 그리고 항상 요구하는 과제. 이유인즉 지식의 성장을 통해서만 정신이 자체의 정신적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편견들, 우상들 그리고 피할 수 있는 실수들에 의한 노예 상태. 그리하여 자기-교육이라는 과제는, 삶의 의미를 틀림없이 망라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의미를 향하여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삶의 의미역사의 의미사이의 유사점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삶의 의미라는 표현에서 의미라는 단어의 모호성을 먼저 검토하겠다. 이 표현은, 더 심오하고 숨겨진 의미라는 경구(警句: epigram)의 혹은 시()의 혹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신비의 합창(Chorus Mysticus)의 숨겨진 의미와 같은 것 뜻으로 때때로 사용된다. 그러나 몇몇 시인들의 그리고 또한 혹시 몇몇 철학자들의 지혜가, ‘삶의 의미라는 표현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삶의 의미가, 숨겨진 그리고 혹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삶에 부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의 과업을 통하여, 우리의 능동적인 행위를 통하여, 우리는 삶의 방식 전체를 통하여, 그리고 우리의 친구들과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a 대하여 그리고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채택하는 태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b. (물론,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발견으로 떠오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삶의 의미 추구는 윤리적 질문으로 나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하여 나는 나 자신에게 어떤 과제들을 설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변한다; 혹은 칸트가 그것을 표현한 바와 같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변은, 자유와 자율에 대한 칸트의 개념과 법 앞에서 평등이라는 개념에 의해서만 제한되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상호간의 존중이라는 개념에 의해서만 제한되는 다원론이라는 칸트의 이념에서 주어진다;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이라는 이념처럼,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념들.

역사의 의미라는 표현도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이것 또한, 세계 역사의 기초를 이루는 비밀이나 숨겨진 의미라는 뜻에서 흔히 해석되었다; 또는 혹시 역사에서 본질적인 숨겨진 방향이나 진화적 경향이라는 뜻에서; 또는 세계가 지향하여 애쓰고 있는 목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러나 삶의 숨겨진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그러한 것처럼, 숨겨진 역사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 생각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숨겨진 역사의 의미를 탐색하는 대신,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우리의 과제로 삼을 수 있다. 우리는 정치 역사에 그리고 그리하여 우리 자신에 목표를 부여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정치 역사에서 더 심오하고 숨겨진 의미를 찾는 대신, 무엇이 가치 있고 인간적인 정치 역사의 목표들이 될 수 있을 터인지 우리는 자문할 수 있다: 인류에게 합당하고 혜택이 되는 목표들c.

나의 첫 번째 논지는, 그리하여, 역사 안에 숨겨진 것이라는 뜻에서 혹은 역사 관련 하느님의 비극 안에 숨겨진 도덕적 교훈이라는 뜻에서 혹은 역사에 관한 몇 가지 진화적 경향들이나 법칙들이라는 뜻에서 또는 혹시 어떤 위대한 역사가나 철학자나 종교지도자에 의하여 발견될 어떤 다른 의미라는 뜻에서 역사의 의미를 말하기를 우리는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첫 번째 논지는 부정적이다. 역사에는 숨겨진 의미가 없다

 

a 역주: ‘동료 인간들의 원어 표현은 fellow men인데 박영태 번역은 동료이다.

b 역주: ‘부여한 수 있다의 원어 표현은 can bestow인데 박영태 번역은 부여한다이다.

c 역주: 이 문구의 원어 표현은 aims both feasible and beneficial to mankind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 그리고 자신들이 그런 의미를 발견했다고 믿는 저 역사가들이나 철학자들은 자신들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러나 나의 두 번째 논지는 매우 긍정적이다. 우리 자신이 정치 역사에 한 가지 의미를 혹은 더 정확하게 복수의 의미들 부여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들에게 합당하고 가치가 있는 의미들.

그러나 나는 저것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간다. 이유인즉 나의 세 번째 논지는 역사로부터, 역사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우리 자신을 겸손한 윤리 개혁자들로서 확립하려는 시도가 헛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배울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가 윤리적 목표들이 지닌 역사적인 힘을 과소평가한다면 우리는 결코 역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 윤리적 목표들은, 처음 그 목표들을 생각했던 사람들에 의하여 예견되지 못하고 흔히 지독한 결과들을 초래했다.a 그러나 몇 가지 국면들에서, 미국 혁명에 의하여 혹은 칸트에 의하여 재현된 바와 같이, 우리는 계몽사조의 목표들과 이상들에 이전 세대보다 더 근접했다. 더욱 특히 다원론적이거나 열린사회라는 이념인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이라는 이념과, 영구적 평화를 확립함에 의하여 끔찍한 전쟁들의 역사를 종식시킨다는 관념은 혹시 여전히 요원한 이념들일지라도 거의 우리들 모두의 목표와 희망이 되었다.

이 목표들에 우리가 더 근접했다고 말함에 의하여, 물론 나는 우리가 곧 혹은 언제가 그 목표들에 도달할 것이라고 모험적으로 예언하고 있지 않다. 틀림없이 우리는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 이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쉴러, 벤담(Bentham), 밀 부자(Mills)와 스펜서(Spencer), 그리고 독일에서는 베르타 폰 주트너(Berta von Suttner)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푀르스터(Friedrich Wilhelm Förster)가 지향하여 싸운 평화의 이념은 오늘날 모든 문명국가들의 외교관들과 정치가들에 의하여 국제정치의 목표로서 공개적으로b 인정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기대되는 평화라는 개념을 위한 저 위대한 투사들을 뛰어넘고 우리가 25년 전에 기대할 수 있었을 터인 것을 뛰어넘는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이 커다란 성공은 매우 부분적인 것일 뿐이고 그 성공은 에라스무스의 이념이나 칸트의 이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핵전쟁은 인류를 끝장낼 터이라는 깨달음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평화가 지금 일반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우리의 정치적 목표로서 인정된다는

 

a 역주: 이 문장에 대한 박영태의 주석은 나치스에 의한 유대인 학살 들을 예로 들 수 있다.’이다.

b 역주: ‘공개적으로을 원어는 openly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사실과 우리의 난제들은 주로 지금까지 외교관들과 정치가들이 평화를 실현하

기 위한 수단을 찾지 못함에 기인한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서 저 난제들을 토론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세 가지 논지들을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토론하면 그 난제들을 이해하고 올바르게 볼 수 있다.

정치적 역사에는 숨겨진 의미가 없고 우리가 아마도 찾아서 발견할 의미가 없다는 숨겨진 경향과 같은 것도 없다는 부정적인 주장인 나의 첫 번째 논지19세기의 다양한 진보 이론들예를 들어 콩트,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의 이론들 부인한다. 그러나 그 논지는, 예를 들어 플라톤과 지오바니 바티스타 비코(Giovanni Battista Vico)와 니체 및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제기된 고전적인 순환들에 대한 이론들뿐만 아니라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20세기 서양의 몰락(Decline of the West) 이론도 부인한다.

나는 이 모든 이론들을 잘못 판단된 것으로서 그리고 심지어 어떤 면에서 무의미한 것으로서 간주한다. 이유인즉 그 이론들을 잘못 표현된 질문에 답하기 때문이다. ‘진보’, ‘후퇴’, ‘몰락등등과 같은 개념들은 가치 판단들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이 모든 이론들은, 역사적 진보나 후퇴를 혹은 진보와 후퇴로 구성된 순환을 예언하든, 가치들의 어떤 규모를 틀림없이 필수적으로 언급한다. 그런 가치들의 규모는 도덕적이거나 경제적 혹은 아마도 미학적이거나 예술론적일 수 있다; 그리고 후자(後者) 가치들의 영역 안에서 그런 가치들의 규모는 음악이나 회화 혹은 건축이나 문학과 관련될 수 있다. 그 규모는 과학이나 기술의 영역들과 또한 관련될 것이다. 가치들의 또 다른 규모는 우리의 건강이나 사망률의 통계에 그리고 또 다른 규모는 우리의 도덕성에 근거할 것이다. 분명히 우리는 이 분야들 중 한 가지나 몇 가지로 진보할 수 있고 동시에 다른 분야들에서 퇴보하여 바닥에 닿을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독일에서 바흐의 위대한 작품의 시기인 1720-50년에 문학이나 회화에서 아주 뛰어난 작품들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몇몇 분야들에서의 가령 경제학이나 교육 분야들에서 진보는 틀림없이 다른 분야들에서의 퇴보로 흔히 대가를 치른다; 자동차 교통의 속도와 확산 및 빈도가 안전을 희생하여 대가를 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제 기술적이거나 경제적인 가치들의 실현에 참인 것은, 물론, 특정 도덕적인 가치들에 대하여 그리고 특히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의 근본적인 공준(公準: postulates)에 대해서도 또한 성립한다. 그리하여 미국의 많은 시민들은, 남부 주들에서 노예제도가 지속되는 것이 용인될 수 없고 그들의 양심이 명령하는 것과 양립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혹독한 전쟁으로 그리고 번성하고 독특한a 문명을 파괴함으로써 노예를 해방하는 것에 대가를 치러야 했다.

유사하게, 과학의 진보는 그 자체가 부분적으로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이라는 이상의 결과 우리의 삶을 연장하고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진보로 인하여 우리는 그 삶을 핵전쟁의 위협 하에서 보내게 되어서 그 진보가, 모든 것을 감안하면, 인간의 행복과 만족에 기여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가 진보할 수 있고 동시에 퇴보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진보에 대한 역사관련 이론들과 퇴보의 이론들 그리고 순환들에 관한 이론들과 심지어 파멸에 대한 예언들 모두는, 그것들이 자체의 문제들을 야기하는 방식에서 분명히 틀렸기 때문에, 동등하게 옹호될 수 없다. 그것들 모두는 사이비-과학 이론들에 시달린다 (내가 다른 곳에서 밝히려고 시도한 바와 같이). 내가 역사주의적(historicist)이론들로 명명했던, 역사에 관한 이 사이비-과학 이론들에는 그 이론들 자체의 다소 흥미로운 역사가 있다.

호머의 역사 이론은 구약성경에서 창세기에서의 역사 이론과 같이 역사적 사건들을, 매우 변덕스러운 인간-같은 신들(: deities)이 지닌 예측 불가능한 의지의 즉각적인 표현으로서 해석한다. 이 유형의 이론은, 나중의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우세한 하느님의 개념과 양립될 수 없었다. 그리고 정말로 정치 역사를 강도질, 전쟁, 약탈, 강탈 그리고 항상 증가하는 파괴의 수단들의 역사 하느님의 직접적인 업적으로서 간주하는 것은 불경죄나 다름없다. 역사가 자비로운 하느님의 업적이라면, 하느님의 의지가 우리에게 난해하고 이해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다는 조건으로만 그 역사는 그럴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역사에서 자비로운 하느님의 직접적인 행동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가 역사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리하여 역사의 의미를 실제로 우리에게 이해 가능하도록 만들려고 (역사의 의미를 이해 불가능하게 내버려두기보다는) 시도하는 종교는, 역사의 의미를 전능한 하느님의 신성한 의지의 직접적인 계시로서가 아니라 몇몇 선하고 몇몇 악한 권력들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작용하는 권력들 사이에서의 갈등으로서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이것이, 성 아구스티누스(St Augustine)가 자신의 저서 신국(神國: De Civitate Dei)에서 시도한 것이다. 그는 구약성서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플라톤에 의해서도 또한 영향을 받았는데 플라톤은 정치 역사를, 원래 성스럽고 완벽하고 조화롭고 공산주의적인 도시국가가b 은총으로c

 

a 역주: ‘독특한의 원어는 unique인데 박영태 번역은 놀랍게 발전한이다.

b 역주: ‘도시국가의 원어 표현은 city state인데 박영태 번역은 시민국가이다.

c 역주: ‘은총의 원어는 grace인데 박영태 번역은 영광이다.

 

부터 타락하는 역사로서 해석했는데 그 도시국가의 도덕적 쇠퇴는 인종적 타락 및 그 결과들에 의하여 초래되었다: 지도적인 귀족계급의 세속적인 야망과 이기심에 의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에 미친 또 다른 중요한 영향은 그 자신의 마니교(Manichean) 기간에서 유래한다: 세상을, 오르무즈드(Ormuzd)와 아리만(Ahriman)에 의하여 인격화된 선한 원칙들과 사악한 원칙들 사이의 싸움터로서 해석한 폐르시아적-마니교적 이단으로부터a.

이 영향들로 인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의 정치 역사를, 하느님의 나라(Civitate Dei)라는 선한 원칙들과 악마의 나라(civitas diaboli)라는 사악한 원칙들 사이의 다시 말해서, 천국과 지옥 사이의 갈등으로서 기술하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거의 모든 나중 이론들은 아마도 진보에 대한 더 우활한(迂闊: naive) 이론들 중 몇 몇 가지 이론들을 제외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거의 마니교적인 이 이론들로 거슬러 추적될 수 있다. 현대 역사주의적 이론들 대부분은, 그의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범주들을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언어로 번역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그 이론들은 하느님과 악마를, 도덕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선량한 종족들로 통치하기에 적합한b 인종들과 도덕으로나 생물학적으로 나쁘거나 통치하기에 적합하지b 않은 종족들로 대체할 따름일 것이다; 혹은 선량한 계급들과 나쁜 계급들로 무산자들과 자본가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란 노동자들이 노예상태로 전락하는 지옥이라고 믿는다1970년경에 후르시초프[Khruschchev]는 서술한다.) 이로 인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이론의 특징은 변하지 않는다.

이 이론들에서 올바를 수 있는 극소수의 것은, 우리 자신의 이념들과 이상들이 우리의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힘들이라는 그 이론들에 있는 본질적인 전제이다.c 그러나 훌륭하고 고귀한 이념들도 역사에 파멸적인 영향을 때때로 미칠 것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반대로, 나쁜 것을 의도했지만 좋은 것으로 나타나는 이념이자 역사적 힘을 우리는 때때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버나드 드 맨더빌[Bernard de Mandeville]이 아마도 최초로 안 바와 같이); 실수가 진리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을 우리가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a 역주: ‘이단의 원어는 heresy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통치하기에 적합한의 원어 표현은 fit to rule이나 unfit인데 박영태 번역은 규칙에 적합한이나 규칙에 부합하지 않는이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 little that may be allowed to be correct in these theories is their inherent assumption that our own ideas and ideals are powers that influence our history.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 이론들 속에 올바르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거의 없는데도 이 이론들은 우리 자신의 관념과 이상들이 우리의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가진다는 것을 처음부터 가정하고 출발한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도로 다원론적인a 우리의 역사를 흑백으로 그리는 것으로서 혹은 몇 가지 대비되는 색깔들로b 채색된 그림으로서 간주하는 것을 신중하게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역사에, 진보나 순환들이나 파멸을 예측하기 위하여 혹은 유사하게 역사와 관련하여 예측들을 하기 위하여 이용될 수 있는 역사관련 법칙들을 자의적으로 부여하지 않도록 우리는 훨씬 더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반 대중들은, 특히 헤겔 이후 그리고 슈펭글러 이후는 훨씬 더c, 진정한 학자는 현자나d 철학자나 역사가 점술가나 점쟁이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을 기대하고 요구한다. 그런 사람이 미래를 예언할 수 있을 것을.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이 요구로 인하여 자체에 대한 공급이 생긴다. 사실상 그 고집스러운 요구로 인하여 예언가들이 크게 과잉으로 생겨났다. 많이 과장하지 않고도 우리는, 오늘날 명망이 있는 모든 지성인은 역사관련 예언의 기술에서 전문가가 되려는 억제할 수 없는 의무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가 지닌 비관론의 심연은 (이유인즉 비관론자가 되지 않으면 전문가의e 예의가 거의 훼손되기 때문에), 그가 내놓은 심오한 계시들 및 일반적인 위엄과 쌍벽을 이룬다.

점치기를 그 자체가 속하는 곳에 야외전시장 놓아두려고 시도할 적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에게는 물론, 점술가들이 진리를 예언하는 적이 없다고 말하려는 의도가 없다: 그 점술가들의 예언들이 충분히 모호하다면, 참인 그들의 예언들의 숫자는, 거짓인 그들의 예언들의 숫자를 심지어 능가할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유일한 것은, 슈펭글러가 그렇게 많은 수요를 창출한 저 야망적인 역사적 예측들과 같은 것을 우리가 창출하는 데 아마도 도움을 줄 과학적이거나 역사적 혹은 철학적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관련 예측들이 사실이 될지 아닐지는, 방법의 문제도 아니고 지혜나 직관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우연의f 문제이다. 이 예측들은 자의적이고 우연적이고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그 예측들 중 어떤 예측도 강력한 정치 선전적 효과를 이룩할 가능성이 높다. 충분한 숫자의 사람들이 서구의 쇠퇴를 신뢰한다면, 서구는 쇠퇴할 것이다; 서구의 쇠퇴에 대한 저 정치적 선전이 없

 

a 역주: ‘고도로 다원론적인의 원어 표현은 highly pluralist인데 박영태 번역은 고차원적인 다원주의자이다.

b 역주: ‘몇 가지 대비되는 색깔로의 원어 표현은 in a few contrasting colours인데 박영태 번역은 비교될 수 있는 색깔이 거의 없이 소수의 색깔로이다.

c 역주: ‘훨씬 더의 원어 표현은 still more인데 박영태 번역은 아직까지도이다.

d 역주: ‘현자의 원어는 sage인데 박영태 번역은 철인이다.

e 역주: ‘전문가의의 원어는 professional인데 박영태 번역은 기본이다.

f 역주: ‘우연의 원어는 chance인데 박영태 번역은 행운(chance)’이다.

 

었을지라도, 서구는 계속해서 번창했을 터이다.a 예언자들, 심지어 거짓 예언자들도 산을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관념들, 심지어 틀린 관념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올바른 관념들로써 틀린 관념들과 싸우는 것이 가능할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것에서 나는 몇 가지 다소 낙관론적인 관념들을 표현하겠다; 그러나 그 관념들은, 크게 강조하여, 미래에 대한 예언들로서 간주될 수 없는데 이유인즉 나는 미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그것을 안다고 믿는 사람들을 내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로부터 배우는 우리의 능력에 관해서만 나는 낙관적이다; 좋고 나쁜 많은 것들이 가능했고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을b, 그리고 더 좋은 세상을 희구하고 그 세상을 위하여 노력하고 일하는 것을 포기할 이유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나의 두 번째 논지, 우리가 정치 역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목표를 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의미와 한 가지 목표이거나 몇 가지 의미들과 목표들인데 그것들은 우호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것들이다.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두 가지 다른 방식들로 이해될 수 있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방식은, 우리의 윤리적 개념들에 근거하여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의미를 부여한다는 표현의 덜 근본적인 또 다른 의미에서, 칸트적 철학자인 테오도르 레싱(Theodor Lessing)은 역사 서술을, ‘무의미에 의미를 부여하기로서 (Geschichte als Sinngebung des Sinnlosen) 기술했다. 테오도르 레싱의 논지는 (나의 논지와 다를지라도 내가 동의하고 싶은) 이렇다: 역사

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할지라도, 역사에 관하여 서술된 전통적인 저서들에게 우리는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관념들이 가령, 자유의 관념과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의 관념 역사의 굴곡진 길을 통하여 어떻게 진행했는지를 질문함에 의하여. ‘진보라는 단어를 진보의 법칙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하지 않도록 우리가 조심한다면, 어떤 진보를 우리가 이룩했는지 혹은 어떤 좌절들을 우리가 경험했는지 그리고 특히 특정 방향들로 진보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를 질문함에 의하여 전통적인 역사에 우리는 심지어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우리가 지불한 그 대가의 한 부분은 우리가 저지른 많은 비극적인 오류들에 우리의 목표들에서의 오류들과 우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even if, without that propaganda for its decline, it would have continued to flourish.인데 문맥상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박영태 번역은 심지어 서구의 몰락에 대한 그러한 선전이 없어도, 그 예언은 계속해서 번창할 것이다.’이다.

b 역주: ‘가능했고 여전히 가능하다의 원어 표현은 have been and still are possible인데 박영태 번역은 존재하고 여전히 가능하다는 (사실과)’이다.

c 역주: ‘우호적의 원어는 beneficent인데 박영태 번역은 유익하()’이다.

 

리의 수단 선택에서의 오류들 의하여 밝혀진다.

유사한 생각이, 역사주의를 배격했고 그와 더불어 역사적 진보에 대하여 주장되는 법칙들을 배격했지만 역사에서의 사건들에 윤리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 진보라는 기준을 적용하여 비판적 관점에서 그 사건들을 판단함을 회피하지 않았던 위대한 영국 역사가 H. A. L. 피셔(Fisher)에 의하여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피셔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나보다 더 현명하고 박식한 사람들은 역사에서 책략, 리듬, 미리 결정된 모형을

감지했다...파도가 이어지는 것과 같이 한 가지 비상상황이 또 다른 비상상황으로

이어지는, 그 사실이 독특하기 때문에 그 사실과 관련하여 역사가에게 일반화들이

있을 수 없고 다만 한 가지 안전한 규칙만 있을 수 있는 하나의 위대한 사실만

나는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규칙은 역사가가 인정해야 하는...우발적인 것과 예견

되지 않는 것의 작용.

 

여기서 피셔는, 발전과 관련하여 본질적인 경향들은 없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말한다:

 

이것은 냉소와 절망의 교설이 아니다. 진보에 관한 사실은 역사의 기록장에 크고

명백하게 서술된다a; 그러나 진보는 자연의 법칙이 아니다. 한 세대가 얻은 토대는

다음 세대가 잃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어떤 진보는 여기서 피셔는 진보에 의하여, 자유와 정의의 분야에서 사회적 개량을 그리고 또한 경제적 진보를 의미한다 전쟁과 권력-정치적 싸움이 불합리하고 잔인하게 출현함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혹시 이 진보의 지속을 담보할 역사적 법칙들이 없기 때문에, 진보의 미래 운명은 그리고 그 운명과 함께 우리 자신의 운명 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렸을 것이다.

피셔가 옳기 때문만이 아니라, 역사에는 자체의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기계적이든 변증법적이든 아니면 구조적이든 법칙들이 있다는 관념보다 역사가 부분적으로 우리에 달렸다는 그의 관념이 어떻게 훨씬 더 유의미하고 고귀한지를 내가 밝히기를 원하기 때문에도 나는 피셔를 인용했다; 혹은 역사의 꼭두각시-놀음에서 우리가 꼭두각시라는 관념보다; 혹은 우리가 선과 악의 권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 fact of progress is written plain and large on the pages of history인데 박영태 번역은 진보의 사실은 역사의 사건들에 대해서 알기 쉽고도 과대하게 기록한다이다.

 

능과 같은 초인간적인 역사적 권능들의 희생자들이나, 무산자들과 자본가들의 집단적인 힘의 희생자들이라는 관념보다.

그리하여 역사나 역사 저서들을 저술하고 읽으면서 우리는 역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기의 더 중요하고 다른 의미로 선회한다: 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과제들을 정할 수 있다는 관념을 의미한다;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는 개인들로서뿐만 아니라 시민들 그리고 특히, 역사의 무의미한 비극을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서 간주하여 그 비극 안에서 미래의 역사를 유의미하게 만들려고 우리의 최선을 다하는 세계의 시민들로서 우리 자신에 과제를 정할 수 있다는 관념. 그 과제는, 주로 좋은 의도들과 좋은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비극적으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지극히 어렵다. 그리고 내가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이라는 계몽사조와 비판적 합리주의라는 이념을 지지하기 때문에, 심지어 계몽사조와 합리주의라는 개념들이 가장 지독한 결과들을 초래했다는 요점을 강조하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더 필요하다고 나는 느낀다.

프랑스 혁명을 환영했던 칸트에게,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의 이름으로 극악무도한 범죄들이 저질러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였다: 십자군 원정에서, 마녀사냥의 다양한 기간들에서 그리고 30년 전쟁 동안에 기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극악무도한 범죄들과 꼭 마찬가지로. 그래서 칸트와 함께 우리는, 프랑스 혁명의 공포로부터 교훈을 얻을 것인데 너무 자주 반복될 수 없는 교훈이다: 광신주의는 항상 사악하여 다원론적 사회와 양립될 수 없다는 그래서 우리는 여하한 형태의 광신주의도 반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심지어 그 목표들이 광신적으로 추구될지라도 본질적으로 윤리적으로 반대할 수 없을 때 그렇고 그 목표들이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목표들과 일치할 때는 훨씬 더 그렇다 교훈. 광신주의의 위험들 및 광신주의를 어떤 상황에서도 반대하는 우리의 의무는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들이다.

그러나 광신주의와 광신주의의 무절제를 피할 수 있는가? 역사는 우리에게, 저 윤리적 목표들 자체가 광신적으로 신봉되고 지지를 받을 때만 역사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윤리적 목표들에 의하여 이끌어지는 모든 시도들은 틀림없이 허사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그리고 모든 종교들과 모든 혁명들의 역사는, 윤리적 관념에 대한 광신적 신봉이 그 관념을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그 관념을 그 관념의 바로 반대상황으로 반복적으로 변환시킨다는 것을, 우리에게 밝히지 않는가? 그 광신적 신봉으로 인하여 우리가 자유의 이름으로 모든 감옥 문들을 열고, 우리의 새로운 자유에 대한 새로운 적대자들을 가두고 거의 즉각 그 문들을 닫게 될 따름임을. 그 광신적 신봉으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평등을 가르침 받게 되지만 또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등하게a 될 것임을? 그리고 이 평등은, 덜 평등했던 조상들 몇몇의 불평등을 3대 및 4대 자손들에게 가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는 질투하는 신(: god)이 아닌가? 이 평등으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형제애를 선언하게 되지 않는가; 그리고 또한 우리가 우리의 형제들의 보호자들이라고 마치 그 형제들을 지배하려는 우리의 소망은 형제 살해죄일 것이라고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인 양b 선언하게 되지 않는가? 역사는 우리에게, 모든 윤리적 관념들은 해롭고 그 관념들 중 최고의 관념들은 흔히 가장 해롭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그리고 더 최근에는 아프리카의 혁명들로부터 계몽사조의 이념들과 더 좋은 세상에 대한 꿈들은 헛소리일 뿐만 아니라 범죄성 헛소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지 않은가?

이 의문들에 대한 나의 답변은 나의 세 번째 논지에 담겨있다: 우리는 서유럽과 미국의 역사로부터, 우리의 역사에 윤리적 의미나 목표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항상 헛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저것은, 우리가 어느 때고 우리의 윤리적 목표들을 실현했거나 어느 때고 완전히 실현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의 주장은 매우 겸허하다.C 내가 말하는 유일한 것은, 윤리적으로 고취된 사회적 비판은 어떤 곳들에서 성공적이었다는 것과 그 비판이 적어도 당분간 사회적 및 공적 생활의 최악 결점들을 중 몇 가지 결점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세 번째 논지는 이렇다. 나의 세 번째 논지는 역사의 모든 비관론적 견해들을 부인하기 때문에 낙관적이다. 이유인즉 순환적 진보와 쇠퇴에 관한 모든 이론들은, 우리 자신이 역사에 윤리적 목표인 윤리적 의미를 성공적으로 부과한다면, 분명히 반증되기 때문이다.

 

a 역주: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등하게의 원어 표현은 some are more equal than others인데 박영태 번역은 몇몇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역량을 가졌다고(more equal than)’”이고 이 부분에 붙은 박영태의 역주는 이 표현에 대해 포퍼는 특히 인용 부호를 사용했다. 이러한 포퍼의 의도는 사실 평등에 대해서는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앞의 equality와 같은 어원을 가지는 충분한 역량을 가진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equal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비교가 가능하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간의 비교가 가능하다는 점을 부각시켜, 평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다소 역설적인 언어 사용의 측면을 드러내고자 한다.’인데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이 표현은 아마도 사회주의체제나 독재체제 등에서 상위 계급들이 자신들만의 평등을 향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as if to remind us that our wish to rule over them may be fratricidal인데 박영태 번역은 마치 우리의 형제를 지배하려는 우리의 욕심이 형제에 대한 사랑인 양 상기시켜주는 것처럼이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My assertion is very modest.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그러나 윤리적 목표들을 부과하기 위한, 사회적 관계들을 성공적으로 향상

시키기 위한 매우 확정적인 특정 전제조건들이 있다. 사회적 이상들과 사회적 비판은, 사람들 자신의 견해들과 다른 견해를 존중하는 것을 사람들이 배우고

사람들 자신의 정치적 목표들에서 냉철하고 실재론적이 되기를 배운 곳에서만

성공에 의하여 보상을 받는다; 지구상에서 천국을 창조하려는 시도가 우리의 동료들에게는 쉽게 우리의 지구를 지옥으로 바꾸어놓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배운 곳에서.

이 교훈을 배운 최초의 국가는 스위스와 영국인데 거기에서는 지구상에 천국을 창조하려는 몇 가지 유토피아적 시도들이 환멸을 초래했다. 거대한 현대 혁명들 중 최초의 혁명인 영국혁명은 천국을 야기한 것이 아니라 찰스 I세의 처형과 크롬웰의 독재를 초래했다. 철저하게 환멸을 느끼고 영국은 자체의 교훈을 배웠다: 영국은 법치의 필요성을 신봉하도록 전향했다. 권력에 의하여 영국에 로마가톨릭을 재도입하려는 제임스 II세의 시도는 저 태도의 암초에 좌초했다. 종교적 및 시민적 싸움에 지쳐서 영국은, 존 로크와 계몽사조의 다른 선구자들의 종교적 관용을 지지하는 주장들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고 강요된 종교에서는 가치가 있을 리 없다는 원칙을 수용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이 지닌 신념들에 반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강제로 끌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원칙 (교황 이노센트 XI세가 표현한 바와 같이).

미국 혁명은 광신주의와 불관용이라는 함정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스위스와 영국과 미국이 모두 몇 가지 환멸적인 정치적 경험들을 겪어야 했다는데 민주주의적 개혁들에 의하여, 혁명과 광신주의와 독재 및 강제를 수단으로 도달될 수 없었을 터인 윤리-정치적 목표들을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우연적일 리가 없다.

아무튼 영어권 민주주의 국가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스위스와 스칸디나비아의 역사로부터도 또한, 우리가 우리에게 목표들을 정할 수 있다는 것과 우리가 그 목표들을 때때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이 목표들이 너무 광범위하지도 않고 너무 협소하지도 않으며 다원론적 정신으로 구상된다면 다시 말해서, 그 목표들이 현격하게 다른 관념들과 믿음들을 지닌 모든 종류의 사람들의 자유와 신념들에 대한 존중을 구체화한다는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역사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음이 밝혀진다; 그것이, 정확하게, 나의 세 번째 논지이다.

나의 견해로, 계몽사조라는 명칭이 천박함에 대한 동의어가 되었을지라도 천박했던 것은 낭만파와 계몽사조에 대한 낭만파의 비판이었지 계몽사조가 아니었다. 칸트와 계몽사조는, 자유에 대한 이상들을 진지하게 수용한 것 때문에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일시적인 현상 이상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천박하고 우활한(迂闊: naive) 것으로서 조롱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다시, 이 이념들이 반드시 일시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다.a 그러나 그 이념들의 일시성을 설명하는 것과 그 이념들의 임박한 쇠퇴를 예언하는 것 대신에, 그 이념들의 부활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나을 터이다. 이유인즉 이 이념들은 자체의 생명력과, 지독한 공격에도 살아남는 자체의 능력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다; 이 이념들은, 칸트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바와 같이, 다원론적 사회에 필수적인 체제를 제공하는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순도 성립한다: 다원론적 사회는 정치적 의미들이나 목표들이 성공하기 위한 필수적인 체제이다; 당장을 초월하는 정책을 위한; 우리의 과거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여 우리의 현재 및 미래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정책을 위한.

계몽사조와 낭만주의에는 한 가지 중요한 요점이 공통적으로 있다: 두 가지 사상 모두는 인류의 역사를 주로 투쟁하는 이념들과 믿음들의 역사로서 본다; 이념적인 갈등들의 역사로서. 이런 면에서 그들의 의견을 일치한다. 그러나 계몽사조와 낭만주의가 그렇게 크게 갈라지는 것은 이 이념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이다. 낭만주의는 신념의 힘과 같은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 낭만주의는 신념의 지닌 열정과 깊이를, 신념이 지닌 진리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귀중하게 여긴다. 이것이 낭만파가 계몽사조를 그렇게 경멸하는 실제적인 이유인 듯이 보인다. 이유인즉 계몽사조는 신념과 신념이 지닌 힘을 어느 정도로 불신하며 바라보기 때문이다. 계몽사조는 다른 사람들이 지닌 신념에 대하여 관용과 심지어 존중을 가르칠지라도, 계몽사조의 가장 큰 가치는 신념이 아니라 진리이다. 그래서 계몽사조는, 절대적인 진리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을지라도, 절대적인 진리와 같은 것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오류들을 수정함을 통하여 그 진리에 근접할 수 있다고. 이것은 사실상 계몽사조라는 철학의 근본적인 논지이다; 그리고 이것에, 낭만파의 역사관련 상대론에 대한 계몽사조의 가장 큰 대비점이 놓인다.

그러나 진리에로의 접근은 쉽지 않다. 진리로 향하는 한 가지 방법만 있는데 오류를 통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저지르는 오류를 통해서만 우리는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들을, 진리를 향한 디딤돌로서 평가할 준비가 되고 심지어 간직할 준비가 된 사람만 그리고 자신의 오류들을 탐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d nowadays we can hear again a lot about the necessary transience of these ideas.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이러한 민주주의 사상들이 일시적으로만 필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을 수가 있다.’이다.

 

색하는 사람만 배울 것이다: 자신의 오류들을 의식하게 되었을 때만 그가 그 오류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 오류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지식을 통한 우리 자신의 해방이라는 관념은 그리하여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배라는 관념과 동일하지 않다. 전자(前者)는 더 정확하게 오류로 부터의, 미신으로부터 그리고 거짓 우상들로부터의 정신적인 자기-해방이라는 관념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관념들에 대한 자기 자신의 비판을 통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항상 필요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정신적 자기-해방과 성장이라는 관념이다.

그리하여 계몽사조가,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들로 그리고 계몽사조가 더 냉철한 자세에 의하여 정치에서 그리고 실용적인 사건들에서 더 좋은 것들이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광신주의와 광신적 형태들의 믿음을 배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계몽사조가 광신적인 믿음을 배격하는 것은, 더 정확하게, 우리의 오류들을 비판함에 의하여 우리가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관념의 당연한 결과이다. 이 자기-비판과 이 자기-해방은, 다원론적 사에서만,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의 오류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오류들도 용납하는 열린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이라는 이념은 계몽사조의 근본적인 이념인데 본질적으로 광신주의에 대한 강력한 적대자이다; 이유인즉 그 이념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가 지닌 관념들과 동일시하는 대신에 우리 자신의 관념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고립시키거나 심지어 분리시키려고 (그 관념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때로 이념들이 지닌 압도적인 역사적 힘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허위나 거짓 이념들의 압도적인 영향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지를 우리는 틀림없이 배운다. 진리 추구를 그리고 오류들로부터의 우리의 해방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관념들을 우리가 반대하는 관념들과 꼭 마찬가지로 비판적으로 보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이것은 상대주의에 대한 양보가 아니다. 사실상 오류라는 바로 그 개념이 진리라는 개념을 전제한다. 다른 사람이 옳고 내가 그를지도 모른다는 것을 수용한다고 해서, 각자의 개인적인 관점이 동등하게 참이거나 동등하게 옹호될 수 있다는 그리고 상대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이 지닌 참고의 틀 안에서 모든 사람이 틀릴지라도 자신의 참고의 틀 안에서 각자가 옳다는 의미도 아니고 그런 의미가 될 수도 없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때때로 우리가 틀렸고 우리의 적대자들이 옳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이 중요한 진리를 소화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상대주의에 빠져들었다. 자유로운 다원론적 사회를, 그리고 그 사회와 함께 지식의 성장을 위한 그리고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을 위한 사회적 체제의 창조라는 우리의 커다란 역사적 과제에서, 우리 자신의 관념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보다 어떤 것도 필수적이지 않다; 그러나 상대주의자들이나 회의론자들이 되지 않고 그리고, 우리의 신념들이 항상 수정에 좌우됨과 그 신념들의 수정을 통해서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오류로부터 해방시켜서 그리하여 지식에서 우리가 성장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음을 우리가 깨달을지라도, 우리의 신념들을 위하여 싸우려는 용기와 결심을 잃지 않고 우리 자신의 관념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