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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해에 대한 객관적
이론
서양의 다양한 철학들은 크게 주로 심신 이원론이라는 주제에 관한 변종들이다. 이 이원론적 주제로부터 주로 이탈하는 것들은, 그 주제를 어떤 종류의 일원론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들이다. 내가 보기에 이 시도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일원론적 항의들의 장막 뒤에는 심신 이원론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음을 나는 반복해서 발견한다.
다원론과 세계 3
그러나 일원론적 추론들뿐만 아니라 몇 가지 다원론적 추론들도 있었다. 이것은 다신론(多神論: polytheism)에서 그리고 심지어, 다신론에 있는 일신론적 및 무신론적 변종들에서도 명백하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다양한 종교적 해석들이 심신 이원론에 대안을 제시하는지 의심스럽게 보일 것인데 이유인즉, 많건 적건, 신들(gods)이 우리 자신들과 대비하여 불멸의 신체들이 부여된 정신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순수한 정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철학자들은, 심신인 물리적 대상들과 의식적 과정들에 추가하여 제 3세계의 존재를 주장함에 의하여 진정한 다원론을 제시했다. 이 철학자들에는 플라톤, 스토아 철학자들 그리고 라이프니츠(Leibniz)와 볼차노(Bolzano)와 프레게(Frege)와 같은 몇몇 현대 사상가들이 포함되었다 (헤겔은 포함되지 않는데 헤겔은, 자주 ‘객관적 정신’이나 ‘영혼’을 말하지만, 강력한
1968년 9월 3일 비엔나에 개최된 XIV차 철학국제회의의 총회에서 행한 강좌의 확대본 (객관적 지식[Objective Knowledge]의 4장으로 재수록된 나의 논문 ‘객관적 정신 이론에 관하여[On the Theory of the Objective Mind]’, 옥스퍼드대학 출판부, 1972년, 1979년 또한 참조).
일원론적 경향들을 구체화했다).
플라톤의 형상과 이데아의 세계는 의식의 세계도 아니었고 의식의 내용들의 세계도 아니었는데, 더 정확하게, 논리적 세계에 대한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세계였다. 그 세계는, 물리적 세계 및 의식의 세계와 함께, 제 3의 세계인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세계로서 존재했다. 나는 플라톤주의자도 아니고 헤겔주의자도 아니지만, 나는 이 다원론적 철학을 옹호하고 싶다.
이 철학에서 우리의 세계는 적어도 세 가지 두드러진 하위-세계들로 구성된다; 혹은 내가 말할 것과 같이, 세 가지 세계들이 있다. 첫 번째 세계는 물리적 세계 또는 물리적 상태들의 세계이다; 두 번째 세계는 의식의 세계이거나 정신적 상태들의 세계이다; 그리고 세 번째 세계는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관념들의 세계이다. 그것은 본질적인 이론들과 그 이론들의 논리적 관계들의 세계이다; 본질적인 논증들의 세계; 그리고 본질적인 문제들과 본질적인 문제 상황들의 세계a. 존 에클즈(John Eccles) 경의 충고를 받고 나는 이 세 가지 세계들을 ‘세계 1’, ‘세계 2’ 그리고 ‘세계 3’으로 지칭했다.
이 다원론적인 철학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들 중 한 가지 문제는 이 세 가지 세계들의 관계와 관련된다.
세 가지 세계들은 매우 관련성이 커서 세계 1과 세계 2가 상호작용을 할 수 있고 세계 2와 세계 3도 그렇다. 이것은,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인 경험들의 세계인 세계 2가 다른 두 가지 세계들 각각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 1과 세계 3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들의 세계인 세계 2의 개입을 통하지 않으면, 상호작용을 할 수 없는 듯이 보인다.
내가 보기에 세 가지 세계들의 관계가 이런 방식으로 ㅡ 다시 말해서, 세계 2가 세계 1과 세계 3의 중재자로서 ㅡ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세계 3과 우리가 말하고 있는 객관적인 논리적 내용 및 우리가 말하고 있는 대상들을 최초로 중요하게 구분한 사람들은 스토아학파였다. 이 대상들은 반대로 세 가지 세계들 중 어떤 세계에라도 속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물리적 세계에 관하여 (물리적 대상들이나 물리적 상태들에 관하여) 말할 수 있거나 두 번째 심리적 상태들에 (이론들에 대한 우리의 파악을 포함하여) 혹은 세 번째 몇 가지 산술적 명제들과 같은 이론들의 논리적 내용에 관하여 그리고 특히 그것들의 진실성이나 허위성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스토아학파가 세계 3의 이론을 플라톤적 관념들로부터 이론들과 명제들로 확대한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문제들과 논증들 및 탐구들과 같은 여
a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of problems in themselves, and problem situations in themselves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전히 다른 세계 3 언어적 실체들을 또한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명령들, 훈계들, 기도들, 협약들 및 설화들을 추가로 구분했다. 그들은 또한 개인적인 성실성의 상태나 진리와, 이론들이나 명제들이 지닌 객관적인 진리를 매우 분명하게 구분했다; 다시 말해서, 세계 3 술어인 ‘객관적으로 진리인’이 적용되는 이론들과 명제들.
이제 나는, 두 무리의 철학자들을 구분하고 싶다. 첫 번째 무리는, 플라톤처럼 자율적인 세계 3을 수용하여 그 세계를 초인간적이어서 결과적으로 신적(神的: divine)이고 영원한 것으로서 간주하는 철학자들이다.
두 번째 무리는, 로크나 밀(Mill) 혹은 딜타이(Dilthey)처럼 언어와 그 언어가 ‘표현하거’나 ‘전달하는’ 것이 인공적이라고 지적하는 철학자들로 구성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언어와 언어적인 모든 것을 세계 1과 세계 2의 한 부분으로서 보고 세계 3이라는 제안을 배격한다. 인문학을 배우는 대부분의 학생들, 특히 문화역사가들이 이 두 번째 무리에 속하여 세계 3을 배격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첫 번째 무리인 플라톤주의자들은, 영원한 진리들이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다: 모호하지 않게 언명된 명제들은 시간과 관계없이 참이거나 허위이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보인다: 영원한 진리들은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틀림없이 진리였다. 그리하여 그 진리들은 우리가 만든 것일 리가 없다.
두 번째 무리의 철학자들은, 그런 영원한 진리들이 우리 자신이 만들 것일 리가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으로부터, 영원한 진리들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두 가지 무리들의 입장과 다른 입장을 채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실재를 그리고 특히 세계 3의 자율성을, 다시 말해서 세계 3이 인간 활동의 산물로서 시작되었음을 동시에 인정하는 반면 세계 3이 인간의 변덕으로부터 독립적임을 우리가 수용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우리는, 세계 3인 인공적이고 매우 명백한 의미에서 동시에 초인간적임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세계 3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세계가 세계 2의 중재를 통하여 세계 1에 미치는 엄청난 효과를 우리가 고려하자마자, 분명해질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비유기체적 및 유기체적 물리적 환경에 미치는 전력 송전이나 원자 이론의 영향인, 선박 혹은 항공기를 만들 것인지와 같은 결정들에 미치는 경제이론들의 효과를 생각할 필요만 있다.
내가 여기서 채택하고 있는 입장에 따르면 세계 3은, 꿀이 벌들의 생산물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의 언어처럼 인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언어처럼 (그리고 꿀처럼이라고 나는 전제한다) 세계 3은 인간 (혹은 동물) 행동들이 초래하는 의도되지 않고 계획되지 않은 부산물이다.
예를 들어 숫자 이론을 바라보자. 자연수의 수열은 인간의 작품이자 인간 언어의 그리고 인간 사고의 산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크로네커[Kronecker]와 달리). 그러나 그런 숫자들은 무한하여, 인간에 의하여 발표되거나 컴퓨터에 의하여 이용될 것보다 더 많고 무한히 더 많다. 그리고 그런 숫자들 사이에는 무한히 많은 참인 방정식들과 허위인 방정식들이 있다; 우리가 ‘참’이나 ‘허위’로서 발표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그것들 모두는 세계 3의 거주자들이자 대상들이다.
그러나 훨씬 더 흥미롭고 새롭고 기대되지 않은 문제들이, 자연수들로 구성된 수열의 의도되지 않은 부산물들로서 출현한다; 예를 들어 소수(素數: prime numbers) 이론의 미해결 문제들 (가령 골드바흐[Goldbach]의 추측). 이 문제들은 분명히 자율적이다. 이 문제들은 우리와 별개이다; 더 정확하게, 이 문제들을 우리에 의하여 발견된다. 이 문제들은 발견되기 이전에 존재했고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미해결 문제들 중 적어도 몇 가지 문제들은 해결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문제들과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우리의 시도들에서 우리는 새로운 이론들을 창안할지도 모른다. 이 이론들은 우리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이 이론들은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우리의 사고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이론들의 진실성이나 허위성은 (예를 들어 골드바흐의 추측의)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론 각각은, 새롭고 의도되지 않고 기대되지 않은 문제들인 자율적인 문제들을 만들어내는데 발견될 문제들이다.
이로 인하여 세계 3이, 또 다른 의미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 자율적일지라도, 시작부터 우리의 산물임이 어떻게 가능한지가 설명된다. 이로 인하여, 심지어 이 세상의 작은 구석도 통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우리가 세계 3에 왜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세계 3을 확대하거나 세계 3이 성장하는 것을 돕는지가 설명된다. 우리 모두가 그 세계의 성장에 기여하지만 우리의 개별적인 기여들 거의 모두가 극도로 작다. 우리 모두는 그 세계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그 세계와 상호작용을 하지 않고는 우리는 중 누구도 살아갈 수 없을 터인데 이유인즉 우리 모두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3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여하한 사람의 파악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든 사람의 파악을 멀리 초월하여 성장했다. 이유인즉 수와 연산에서 참인 모든 명제들의 (완벽한) 체계는 공리화될 수 없어서 (본질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A. 타스키[Tarski], A. 모스토프스키[Mostowski], R. M. 로빈슨[Robinson], 결정 불가능 이론들(Undecidable Theories), 암스테르담, 1953년; 특히 60쪽 이하의 주석 13 참조). 연산에 무한히 많은 미해결 문제들이 항상 있다고 귀결된다. 우리의 정신 상태와 완전히 별개로, 우리가 세계 3에 관하여 기대되지 않은 그런 발견들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 결과는 본질적으로 쿠르트 괴델[Kurt Gödel]의 선구적 연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a 우리의 정신적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Yet world 3 has grown far beyond the grasp not only of any man, but even of all men, in a readily comprehensible manner.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러나 세계
성장에 미치는 그리고 동시에 자체의a 성장에 미치는 세계 3의 영향력은, 그 세계에 미치는 우리의 중요한 바로 그 창조적 행위보다 훨씬 더 크고 더 중요하다. 이유인즉 인류에게서 거의 모든 정신적 성장은 정보교환(feedback) 효과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지성적 성장과 세계 3의 성장은, 미해결 문제들로 인하여 해결책들을 시도하라고 요구를 우리가 받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문제들이 미해결로 그리고 미발견으로 항상 남을 것이기 때문에, 세계 3이 자율적일지라도 ㅡ 혹은 정확하게 그런 이유로 ㅡ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연구를 위한 여지가 항상 있을 것이다.
이해하기의 문제, 특히 역사에서
나는 여기서, 자율적인 세계 3의 존재 이론을 뒷받침하고 설명하는 몇 가지 근거들을 제시했는데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소위 이해하기의 문제와 관련되도록 하기를 내가 소망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인문학도들에 의하여 그들의 핵심적인 문제들 중 한 가지 문제로서 오랫동안 간주되었다.
나는 여기서, 인문학의 주요 과제인 것은 세계 3에 속하는 대상들을 이해하기라는 이론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싶다. 이것은, 거의 모든 인문학도들에 의하여 그리고 특히 대부분의 역사가들에 의하여 그리고 특히 이해하기의 문제의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 의하여 수용되는 기본적인 독단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듯이 보인다. 우리의 이해하기의 대상들이 인간의 행위들의 산물들로서 세계 2에 속한다는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대상들이 주로 심리학적 (사회심리학적을 포함하여) 관계들로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다는 독단을 나는 의미한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b, 이해하기의 행위나 과정에는,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요소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그 행위는, 다소간의 성공적인 결과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 그 행위의 (아마도 잠정적일 따름인) 결과이자 획득된 이해하기이고 해석으로부터 구분되어야 하는데, 그 해석을 토대로 우리는 시험적으로 연구해야 하고 우리는 그 해석을 추가적으로 개선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그 해석은 반대로, 세계 2 행위의 세계 3 산물로서 간주될 것이지만 또한 주관적인 행위로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해석을 주관적인 행
3은 어떤 사람의 포착 범위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모든 사람들의 포착 범위까지 넘어서서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성장했다.’이다.
a 역주: ‘자체의’의 원어 표현은 세계 3의 소유격 대명사인 its인데 박영태 번역은 ‘세계’이다.
b 역주: ‘인정되는 바와 같이’의 원어는 admittedly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래서’이다.
위로서 간주할지라도, 여하한 경우에도 저 행위에 대응하는 세계 3대상이 여전히 있다. 나의 견해로 이것은 중요하다. 세계 3 대상으로 간주되어, 그 해석은 항상 이론일 것이다: 예를 들어 역사 해석과 역사 설명을 생각하라. 이것은, 서류들과 명문들(銘文들: inscriptions)과 추가적인 역사적 증거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일련의 논증들에 의하여 뒷받침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해석은 이론으로 판명되고, 모든 이론처럼, 다른 이론들에 그리고 다른 세계 3 대상들에 안착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해석의 장점들을 지닌 세계 3 문제가 제기될 수 있고, 특히 그 문제의 가치가 우리의 이해하기와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이해하기의 주관적인 행위도, 반대로, 세계 3 대상들에 대한 자체의 관련성들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유인즉 내가 다음 세 가지 논지들을, 이해하기의 주관적인 행위와 관련하여 주장하기 때문이다:
1. 그런 행위 모두는 세계 3에 안착한다는 것;
2. 그런 행위에 관하여 수행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중요한 언급들은, 세계 3 대상들에 대한 자체의 관계들을 지적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는 것; 그리고
3. 그런 행위는, 우리가 세계 3 대상들로써 연구하는 방식이 물리적 대상들로써 우리가 연구하는 방식을 밀접하게 닮는다는 사실만 본질로 한다는 것.
객관적인 역사 이해하기의 경우
이 모든 것은 역사 이해하기라는 문제에 대하여 특히 참이다. 역사 이해하기의 주요 목표는 역사적 문제 상황을 가설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갈릴레오의 조석론(潮汐論: theory of tides)에 관한 몇 가지 (반드시 개괄적인) 역사관련 언급들의 도움을 받아서 나는 이 이론을 예시하도록 노력하겠다. 이 이론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달이 조석[潮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그 이론이 부인하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 시대에도 갈릴레오는 분명하게 허위인 그런 이론들을 고집스럽게 고수했기 때문에 심하게 그리고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아서 퀘슬러[Arthur Koestler]에 의하여).
개략적으로 조석(潮汐)은, 반대로 지구의 운동들의 결과인 가속들의 결과라고 갈릴레오의 이론에 적혀있다. 더 정확하게, 규칙적으로 자전하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 때 태양 반대편에 위치한 표면의 지점의 속도는, 그 동일한 지점이 태양을 마주할 때 그 지점의 속도보다 더 클 것이다. (이유인즉 B가 지구의 공전속도이고 R이 적도상의 한 지점의 자전속도라면, B + R은 자정에서 이 지점의 속도이고 B - R은 정오에서 그 지점의 속도이기 때문이다.) 속도에서의 이 변화들은, 주기적인 가속도들과 감속도들이 틀림없이 발생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물통의 주기적인 감속도들 및 가속도들은 조석(潮汐)의 감속도들 및 가속도들을 닮은 모습들로 귀결된다고 갈릴레오는 말한다. (갈릴레오의 이론은 합당하지만 다음과 같은 형태로 옳지 않다: B가 0이라면 또한 발생하는 지구의 자전에서 기인하는 일정한 가속과 ㅡ 다시 말해서, 구심가속도(求心加速度: centripetal acceleration) ㅡ 별도로, 추가적인 가속이 발생하지 않고 그리하여 특히 주기적인 가속이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마도, 조석에 대한 갈릴레오의 운동 이론이 소위 갈릴레오적 상대성 원리와 모순이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허위일 터인데 왜냐하면 이 원리가 회전운동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갈릴레오의 물리학적 직관은 ㅡ 지구의 자전에는 비-상대론적인 기계적 결과들이 있다는 ㅡ 옳았다; 그리고 이 결과들이 (회전하는 팽이의 운동, 푸코의 진자, 기타 등등) 조석들(潮汐들: tides)을 설명하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크리올리 힘(Criolis force)은 조석들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움직임의 곡률을 참고하자마자 우리는 주기적인 운동역학적 가속도들을 얻는다.
a
매우 자주 오해되는 이 이론에 대한 우리의 역사관련 이해하기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첫 번째이자 지극히 중요한 조치는 다음과 같이 자문하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갈릴레오의 잠정적 해답이었던 제 3세계 문제는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이 문제가 출현한 상황은 ㅡ 논리적인 문제 상황 ㅡ 무엇이었던가?
갈릴레오가 지녔던 문제는, 지극히 간단하게, 조석(潮汐)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제 상황은 훨씬 덜 간단했다.
갈릴레오가, 내가 그의 문제로 방금 지칭한 것에 심지어 즉각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조석(潮汐)의 문제로 그를 이끌어간 것은 또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part from the constant acceleration due to the rotation of the earth ㅡ that is, the centripetal acceleration ㅡ which also arise if B is zero, there does not arise any further acceleration and therefore especially no periodic acceleration.인데 박영태 번역은 ‘지구의 자전 때문에 발생하는 일정한 가속도ㅡ지구의 인력에 의해 지국의 중심을 향해 잡아당기는 구심력에 의한 가속ㅡ를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갈릴레이의 설명이 그럴듯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이 구심력에 의한 가속은, 만약에 공전 속도 B가 0이고, 그 이상의 가속이 일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특히 그 이상의 가속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구의 자전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갈릴레이의 이론을 조수를 잘못 설명했다.)이다.
다른 문제였다: 지구의 움직임에 관한 문제인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진리성 혹은 허위성이라는 문제. 조석(潮汐)에 관한 성공적인 이론을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논증으로서 자신이 이용할 수 있을 터라는 것이 갈릴레오의 소망이었다.
내가 갈릴레오의 문제 상황으로서 지칭하는 것은 복잡한 사태로서 판명된다. 그 문제 상황이 조석(潮汐)의 문제를 수반하지만,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시금석이라는 특수한 역할에서 그렇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문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것도 심지어 충분하지 않다.
참된 우주론자이자 이론가로서 갈릴레오는 처음에 코페르니쿠스의 주요 관념인 지구와 다른 행성들은 말하자면 태양의 위성들이라는 관념의 믿을 수 없는 대담성과 단순성에 처음 매료되었다.
이 대담한 관념이 지닌 설명력은 매우 컸다; 그래서 갈릴레오가 자신의 망원경을 통하여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하여 그 위성들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태양계의 작은 모형을 인식했을 때, 그는 이것에서 이 대담하고 거의 초험적인 관념이 경험적으로 입증되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예측을 시험하는 데 성공했다: 그 예측은, 내부 행성들이 달의 상들(相들: phases)처럼 상들을 드러낼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갈릴레오는 금성의 상들을 발견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본질적으로, 기하학적 (그리고 운동학적) 수단에 의하여 구축된 기하학-우주론적 모형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물리학자였다. 실제적인 문제가 기계적인 물리학적 설명을 발견하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설명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발견했는데 특히 관성의 법칙과, 상응하는 회전운동들에 대한 보존법칙이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물리적 지식에 커다란 격차들이 틀림없이 있음을 인식했지만, 이 두 가지 법칙들에만 (그가 아마도 한 가지 법칙으로 간주한) 자신의 물리학을 근거시키려고 시도했다. 방법의 관점에서 갈릴레오는 전적으로 옳았다; 이유인즉 우리가 우리의 오류 가능한 이론들을 끝까지 이용하려고 시도한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그 이론들의 약점으로부터 배우기를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갈릴레오가, 자신이 케플러의 연구에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원운동 가설을 고수한 이유가 설명된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면서 완전히 정당화되었다. 그가 코페르니쿠스의 원들에 대한 난제들을 숨기려고 했다고 그리고 그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정당화될 수 없는 방식으로 과도하게 단순화했다고 흔히 언급된다; 또한 그가 틀림없이 케플러의 법칙들을 수용했다고.a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역사 이해하기의 실패가 ㅡ 제 3세계 문제 상황에 대한 분석에서의 오류 ㅡ 밝혀진다. 갈릴레오는 과도한 단순화를 대담하게 사용하여 연구함에서 전적으로 옳았다; 그리고 케플러가 주장한 타원들은 동등하게 과도하게 단순화된 것으로 대담했다. 그러나 케플러는 운이 좋았는데 왜냐하면 그의 과도한 단순화가 뉴튼에 의하여 나중에 이용되고 그리하여 설명되어서 그의 이체문제(二體問題: two-body problem)에 대한 해답을 시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갈릴레오는 자신의 조석이론(潮汐理論: theory of tides)에서 달의 영향을 부인했을까? 이 질문으로 인하여 문제 상황의 고도로 중요한 국면이 열린다. 먼저 갈릴레오는 점성술에 반대했는데 점성술은 행성들을 신들(gods)과 동일시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계몽사조의 선구자였고, 케플러를 칭찬했지만, 케플러에게 반대했다. 나의 저서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 1963년 (12쇄, 루틀리쥐 출판사, 런던, 1990년), 188쪽을 참고하는데 그곳에서 나는, 뉴튼의 중력이론이 ㅡ 행성들이 서로에게 미치는 그리고 지구에게 달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론 ㅡ 점성술로부터 도출된 것임을 밝힌다.
두 번째 그는 원운동들에 대하여 기계적인보존 원리를 이용하여 연구했고 이것은 행성 사이의 영향력들을 배제하는 듯이 보였다. 조석(潮汐: tides)을 이렇게 협소한 근거에 두고 설명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함에서 갈릴레오의 방식은 완전히 옳았는데 이유인즉 이 노력이 없었다면 이 근거가 설명을 제공하기에는 너무 협소했다는 것과 추가적인 관념이 ㅡ 뉴튼의 인력과 원거리 효과라는 관념 ㅡ 필요했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알지 못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거의 점성술적 특징을 지녔던, 그래서 계몽사조를 지지했던 사람들 및 고수했던 사람들에 (뉴튼 자신을 포함하여) 의하여 미신적으로 느껴졌던 관념이어서 추가적인 관념이 필요했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갈릴레오의 문제 상황을 분석함에 의하여, 그가 다양한 역사가들에 의하여 비판을 받은 몇 가지 요점들에서 갈릴레오의 방식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리하여 우리는 갈릴레오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야망, 질투, 흥분상태를 만들어내려는 소망, 공격적인 의향과 고정관념으로 된 ‘강박관념’과 같은 심리학적 설명들은 불필요하게 된다.
유사하게 갈릴레오가 원운동을 고수했을 때 ‘독단론’ 때문에 그를 비판하는 것과 ‘신비로운 원운동’을 (딜타이[Dilthey]) 원형적인a 관념으로서 도입하려는 것 혹은 아마도 이 관념을 심리학적 수단에 의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게 된다. 이유인즉 갈릴레오가 원운동들에 대하여 합리적인 보존법칙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한 한 멀리 나아가려고 시도했을 때 그의 방법은 옳았기 때문
a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also that he ought to have accepted Kepler’s laws.인데 박영태 번역은 ‘또한 이 이외에도 그는 케플러의 법칙을 받아들였어야만 했다고 말한다.’이다.
a 역주: ‘원형적인’의 원어는 archetypical인데 박영태 번역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무의식의 형태로 된(고태형(古態型))’이다.
이다. (당시까지 역학이론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반화
심리학적인 설명 원리a 대신에, 주로 논리적 특징을 지닌 제 3세계 고찰들을 우리는 이용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역사 이해하기에서 성장의 원인이다.
이 역사 이해하기 및 설명에 대한 제 3세계 방법은 모든 역사 문제들에 적용될 것이다; 나는 그 방법을, ‘상황 분석의 방법’으로 (혹은 ‘상황 논리’의 방법으로) 지칭했다. 나의 저서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1957년 (14쇄, 루틀리쥐 출판사, 런던, 1991년) 및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14쇄, 루틀리쥐 출판사, 런던, 1991-2년), 1945년 참조.
그것은 가능한 곳에서, 본질적으로 논리적 본성을 지닌 제 3세계 관계들에 의하여 심리학적으로 논리적인 설명들을 대체하는 방법인데 역사 이해하기와 역사 설명의 토대로서 대체하는 방법이고, 행동하는 개인들이 전제하는 이론들과 가설들이 포함된다.
내가 여기서 제시하기를 원하는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역사 이해하기는 자체의 심리학적 방법들을 포기하고, 세계 3의 이론에 근거하여 세워진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소위 ‘해석학’이 불필요하게 되거나 적어도 단순화된다.
a 역주: ‘설명 원리’의 원어 표현은 explanatory principles인데 박영태 번역은 ‘설명’이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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