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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과 자유주의적 원칙들
다음 언급들에는 자유주의자들의 (그 용어의 영어 의미에서) 어느 국제회의에서 토론을 위한 재료를 제공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나의 목적은 단지 훌륭한 일반적인 토론을 위하여 토대들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나의 청중에게서 자유주의적인 견해들을 내가 상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견해들에 대한 호의적인 대중적인 상정들을 지지하기보다는 도전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1. 여론이라는 신화
우리는, 흔히 무비판적으로 용납되는 ‘여론’에 관한 몇 가지 신화들을 경계해야 한다.
먼저 대중의 목소리는 신(神)의 목소리(vox populi vox dei)라는 고전적인 신화가 있는데 그 신화는, 대중의 목소리에, 일종의 최종적인 권위와 무제한적인 지혜를 부여한다. 현대에 그 신화의 등가물은, 신화적 인물인 ‘보통사람’, 그의 투표권,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궁극적으로 옳다는 상식에 대한 신뢰이다. 두 가지 경우들 모두에서 명사의 복수형을 쓰지 않은 것a 쓰지 않은 것은 특징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 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리고 다양한 거리들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은, 회의실에 모인 중요인사들(VIPs)만큼 다양하다. 그래서 때때로 사람들이 다소 같은 목소리를 정말로 낸다면, 그들이 말하는 것은 반드시 현명한 것은 아니다. 그들을 옳을지도 모르고 틀릴
이 논문은 1954년 9월 베니스에서 열린 Mont Pèlerin 협회(Society)의 6차 집회에서 강독되었다; 이 논문은 1955년 Il Politico, 20에 (이탈리아어로) 그리고 1956년, Ordo, 8에 (독일어로) 실렸다. 영어본은 저자가 작성했다.
a 역주: ‘명사의 복수형을 쓰지 않은 것’의 원어 표현은 The avoidance of the plural인데 박영태 번역은 ‘(귀족이나 참주들과 같은 특정한 몇몇 사람들을 의미하는’ 다수(plural)를 기피한다는 것‘이다.
지도 모른다. ‘목소리’는 매우 의심스러운 문제들에 매우 단호할지도 모른다. (사례: ‘무조건적 항복’의 요구를 거의 만장일치로 그리고 묻지 않고 수용하는 것.) 그리고 목소리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문제들에 관하여 주저할지도 모른다. (사례: 정치적 갈취와 대량 학살을 용납할 것인지의 문제.) 그것은 의도가 좋을지는 모르지만 경솔할 것이다. (사례: 호어-라발 협정[Hoare-Laval plan]을 파괴한 대중의 반응) 아니면 그것은 의도가 좋은 것도 아니고 또한 매우 신중한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사례: 런시먼 사절단[Runciman mission]에 대한 승인; 1938년의 뮌헨 협정[Munich agreement of 1938]에 대한 승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중의 목소리(vox populi)라는 신화에는 매우 작은 진실이a 숨겨져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아마도 그것을 다음 방식으로 표현할 것이다: 많은 단순한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제한된 정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정부보다 흔히 더 현명하다; 그리고 더 현명하지 않을지라도 그렇다면 더 좋고 더 너그러운 의도들에 의하여 고취된다. (사례: 뮌헨 협정 전야에 싸우려는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의 각오; 다시 호어-라발 반발.)
내가 보기에 특별히 흥미롭고 중요한 그 신화의 ㅡ 혹은 아마도 그 신화 배후에 있는 철학의 ㅡ 한 가지 형태는, 진리는 명백하다는 교설이다. 이 교설에 의하여 내가 의미하는 바는, 오류는 설명될 (선의가 없기 때문에, 혹은 편향에 의해서거나 편견에 의하여) 필요가 있는 것일지라도 진리는 억압되지 않는다면 항상 자체를 드러낼 것이라는 교설이다. 그리하여 자유는, 억압과 다른 장애물들을 처결함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틀림없이 진리와 선함의 지배를 ㅡ 콩도르세(Condorcet)의 인간 정신의 진보의 역사적 그림에 대한 개괄(Sketch for a Historical Picture of the Progress of the Human Mind)에서 끝맺는 문장의 단어들로, ‘이성에 의하여 창조되고, 인류에 대한 사랑에게 알려진 가장 순수한 쾌락들에 의하여 은총을 받은 천국’을 ㅡ 초래한다는 믿음이 나타난다.
나는 의식적으로 이 중요한 신화를 과대하게 단순화했는데 그 신화는 또한 다음과 같이 언명될 것이다: ‘진리가 제시된다면 누구도 그 진리를 인식한다.’ 이것을 ‘합리주의적 낙관론’으로b 지칭할 것을 나는 제안한다. 그것은 정말로 계몽사조가, 자체의 정치적 후손 대부분과 자체의 지성적 조상 대부분과 공유하는 이론이다. 대중의 목소리(vox populi)라는 신화처럼, 그것은 또 다른 만장일치 목소리의 신화이다. 인간이 본질이라면 우리는 숭배해야 하고 그렇다
a 역주: ‘매우 작은 진실’의 원어 표현은 a kernel of인데 박영태 번역은 ‘진리의 핵심’이다.
b 역주: ‘합리주의적 낙관론’의 원어 표현은 the theory of rationalist optimism'인데 박영태 번역은 ‘낙관적인 합리주의자 이론’이다.
면 인류의 만장일치 목소리는 우리의 최종적 권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신화임을 배웠고 그래서 우리는 만장일치를 불신하는 것을 배웠다.
이 합리주의적이고 낙관주의적인 신화에 대한 반응은 대중의 목소리(vox populi)라는 이론의 낭만적 해석본이다 ㅡ 대중적 의지의, ‘일반적인 의사(volonté générale)’의, 민중의 정신의, 민족의 천재성의a, 집단정신의 혹은 혈통의 본능적 권위와b 고유성의 교설. 나에게는 여기서, 칸트 및 다른 사람들이 ㅡ 그들 중 한 명이 나의 자신 ㅡ 비합리적인 진리 파악에 대한 이 교설들을 겨냥한 비판을 반복할 필요가 없는데 그 교설들은, 진리를 본능적이거나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도구들로서 우리의 열정들을 이용하는 이성의 간계(the cunning of reason)라는 헤겔의 교설에서 끝난다; 그리고 그 교설들로 인하여,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열정들을 따른다면, 사람들이 틀린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중요하고도 여전히 매우 영향력이 큰 그 신화의 변종은 여론의 진보라는 신화로서 기술될 것인데 그것은 19세기 자유주의자의 여론이라는 신화이다. 그것은 앤서니 트롤롭(Anthony Trollope)의 피네아스 핀(Phineas Finn)으로부터 한 구절을 인용함에 의하여 예시될 것인데 E. H. 곰브리치(Gombrich)가 그 구절을 나에게 주지시켰다. 트롤롭은, 아일랜드 소작권에 대한 의회의 발의에 관한 운명을 기술한다. 분열이 오고 해당부처는 23이라는 다수에 의하여 패배한다. ‘그리고 이제 불행한 것은 우리가 이전보다 조금도 소작권에 더 가깝지 않다는 것이다.’라고 의회의원이 몽크(Monk) 씨가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소작권에 더 가깝다.’
‘한 가지 의미에서는 그렇다. 그런 논의와 그런 다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ㅡ 생각은 너무 높은 단어이다; 통상적으로 사람들
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단어는 그 단어 안에 중요한 것이 있다고 사람
들을 믿게 만들 것이다. 이전에 그 주제에 관한 입법을 상상적으로서 간주한
많은 사람들은, 이제 그 입법이 위험할 뿐이라고 혹은 아마도 어려운 것 이상 은 아니라고 상상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그 입법은 가능한 것들 중 한 가지
로서, 그 다음에는 개연적인 것들 중 한 가지로서 간주되게 될 것이다; ㅡ 그래
서 그 입법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서 국가가 요구하는 저 희귀한 조치들 의 목록에 들 것이다. 저것이, 여론이 형성되는 방식이다.’
‘입법에서 최초의 커다란 조치를 취한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라고 피네
a 역주: ‘천재성’의 원어는 genius인데 박영태 번역은 ‘(국가의) 수호신’이다.
b 역주: ‘혈통의 본능적 권위’의 원어 표현은 the authority...of the instinct of the blood인데 박영태 번역은 ‘왕족의 본능(the instinct of the blood) 등의 권위’이다.
아스는 말했다.
‘최초의 커다란 조치는, 그들이 그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혁명 선동가들인
거의 배반자들로서 간주되었던 사람들에 의하여 오래전에 취해졌다. 그러나
우리를 계속 앞으로 이끄는 어떤 조치를 취한다는 것을 훌륭한 것이다.’라고
몽크 씨는 말했다.
여기서 급진적-자유주의자인 의회의원 몽크 씨에 의하여 설명된 이론은 아마도 ‘여론에 관한 전위적 이론’이나 혹은 선구자의 지도력 이론으로 지칭될 것이다. 그것은, 저서들과 책자들 혹은 편지들을 The Times지에 보내서 혹은 의회 연설들이나 발의들에 의하여 몇 가지 관념들이 처음에는 거부당하고 나중에는 토론되고 최종적으로 수용되도록 하는 데 성공하는 여론의 몇몇 선도자들이나 창조자들이 있다는 이론이다. 여론은 여기서, 새로운 생각들과 새로운 개념들과 새로운 논증들을 만들어내는 정신을 지닌 귀족들의a 사념들과 노력들에 대한 일종의 공공적 반응으로서 상상된다. 여론은 느린 것으로서, 다소 수동적이고 본성에 의하여 보수적인 것으로서 상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자들의 주장들이 지닌 진리를 결국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서 ㅡ 느리게 움직이지만 지배층의 논의에 대한 최종적이고 권위적인 심판으로서 ㅡ 상상된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영국의 현실이 첫눈에 보기에 그런 형태의 우리 신화에 아무리 많이 합치되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다시 또 다른 형태의 우리 신화이다. 틀림없이 개혁자들의 주장들은 정확하게 이런 방식으로 흔히 성공했다. 그러나 타당한 주장들만 성공했는가? 영국에서 정책과 관련하여 여론의 지지를 얻을 것 같은 것은, 주장이 지닌 진리나 제안이 지닌 지혜라기보다는 수정될 수 있고 틀림없이 수정되는 불의가 이행되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트롤롭에 의하여 기술되는 것은 여론이 지닌 특징적인 도덕적 감수성과 적어도 과거에 여론이 흔히 자극된 방식이다; 사실적인 진리에 대한 여론의 직관이라기보다는 불의에 대한 여론의 직관. 트롤롭의 기술이 다른 나라들에게 얼마나 멀리 적용될 수 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심지어 영국에서b 여론이 과거에서처럼 민감하게 남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
을 위험할 터이다.
a 역주: ‘정신을 지닌 귀족들’의 원어 표현은 aristocrats of the mind인데 박영태 번역은 ‘최고의 지성인들’이다.
b 역주: ‘심지어 영국에서’의 원어 표현은 even in Great Britain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제 영국에서만’이다
II. 여론의 위험성
여론은 (그것이 무엇이든) 매우 강력하다. 여론은 정권들을, 심지어 비-민주적인 정권들도 바꿀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런 권력을 어느 정도 의심스럽게 보아야 한다.
여론이 지닌 익명성 때문에, 여론은 권력의 무책임한 형태이고 그리하여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특히 위험하다. (사례: 유색인종 차별들과 다른 종족적 문제들.) 한 가지 방향에서 치유책은 명백하다: 국가권력을 최소화함에 의하여 국가의 부처를 통하여 자행되는 여론의 영향력이 지닌 위험이 감소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개인의 행위와 사고의 자유가, 여론의 직접적인 압력으로부터 보장되지 않는다. 여기서 개인에게는 강력한 국가의 보호가 필요하다. 이 상충되는 요건들은 적어도 특정 종류의 전통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충족될 수 있다.
여론이 무책임하지 않고 어떤 정도로든 ‘자체에 책임을 진다’는 교설은 ㅡ 여론이 저지르는 오류들이 그릇된 견해를 믿는 대중에게 되돌아올 것이라는 의미에서 ㅡ 여론의 또 다른 형태의 집단주의적 신화이다: 한 무리의 시민들이 지닌 그릇된 정치선전이 매우 다른 무리에게 쉽게 해코지할지도 모른다.
III. 자유주의적 원칙들: 논지들
1. 국가는 필요악이다: 국가권력은 필요한 것 이상으로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마도 이 원칙을 ‘진보론적 면도날’로 부를 것이다.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 다시 말해서, 실체들이나 본질들은 필요한 것 이상으로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원칙과 유추하여.)
국가의 필요성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인간에 대한 홉스(Hobbes)의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다(homo-homini-lupus)라는 견해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반대로 사람은 사람에게 고양이다(homo homini felis)라고 혹은 사람은 사람에게 천사다(homo homini angelus)라고 우리가 전제할지라도 ㅡ 다시 말해서 인간이 지닌 친절함과 천사와 같은 선량함 때문에, 아무도 다른 사람을 해코지하는 적이 없다 할지라도 ㅡ 국가의 필요성은 밝혀질 수 있다. 그런 세상에도 여전히 약자들과 강자들이 존재할 터이고 약자들에게는 강자들에 의하여 허용되는 법률적 권한이 없을 터이어서 강자들이 약자들을 허용하도록 그렇게 친절함에 대하여 약자들은 강자들에게 감사할 터이다. 이것이 만족스럽지 못한 사태라고 생각하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살아갈 권리를 지녀야 한다고 그리고 모든 사람은 강자들의 힘에 대항하여 보호될 법률적 청구권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강자이든 약자이든) 모든 사람의 권리들을 보호하는 국가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국가는 필요한 것이지만 틀림없이 부단히 위험하고 혹은 (내가 감히 그렇게 지칭하는 바와 같이) 사악한 것임은 알기 쉽다. 이유인즉 국가가 자체의 기능을 완수할 수 있다면 국가는 틀림없이 아무튼 개별적인 사사로운 시민이나 대중적 결사보다 더 권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권력들이 오용될 위험을 최소화하는 제도들을 우리가 혹시 고안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 위험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없다.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금의 형태로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예를 들어 위협하는 관료들의 손에서 당하는 수모의 형태로, 국가의 보호에 대하여 항상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보호에 대하여 너무 무겁게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이다.
2. 민주주의와 독재의 차이점은, 민주주의에서는 정권이 피를 흘리지 않고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재에서는 정권이 그렇게 제거될 수 없다.
3. 민주주의와 같은 제도는 시민에게 혜택을a 공여할 수 없고 그런 제도가 혜택을 공여할 수 있다고 기대되어서도 안 된다. 사실상 민주주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ㅡ 민주주의의 시민들만 (물론, 정권을 구성하는 저 시민들을 포함하여) 행동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인 다소 조직되어 일관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체제를 제공할 따름이다.
4. 다수가 항상 옳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전통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최소한으로 사악한 전통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자들이다. 다수가 (혹은 ‘여론’) 독재를 선호하기로 결정한다면, 민주주의자에게는 그리하여 자신의 견해들에 있는 어떤 치명적인 불합리성이 밝혀졌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민주주의자는 더 정확하게, 자신의 국가에서 민주주의적 전통이 충분히 강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5. 전통에 의하여 조절되지 않는다면 제도들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강력한 전통에 없으면 제도들이 또한 의도된 목표에 반대인 목표에 부합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제도들은 항상 양면적(兩面的)이다. 예를 들어 의회의 야당은, 개략적으로 말해서, 다수당이 납세자들의 돈을 훔쳐가는 것을b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 제도의 양면성을 예시하는 유럽 동남부 어느 국가에서 발생한 사건을 나는 잘 기억한다. 그 나라에서 야당은 전리품을 다수당과 나누어 가졌다.
a 역주: ‘혜택’의 원어는 benefits인데 박영태 번역은 ‘특권’이다.
b 역주: ‘훔쳐가는 것’의 원어는 stealing인데 박영태 번역은‘낭비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전통들은, 개인적인 인간들의 제도들과 의도들과 평가들 사이에서 일종의 고리를 형성하는 데 필요하다.
6. 자유주의적 유토피아는 ㅡ 다시 말해서, 전통이 없는 백지상태 위에 합리적으로 고안된 국가 ㅡ 불가능하다. 이유인즉 자유주의적 원칙은, 사회생활에 의하여 필수적이 되는 각자의 자유의 제한이 가능한 한 최소화되고 평등화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칸트).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그런 초험적(a priori) 원칙을 실제 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까? 피아노 연주자가 연습하는 것을 우리는 막아야 할까, 아니면 그의 이웃이 고요한 오후를 즐기는 것을 막아야 할까? 그런 문제들 전부는, 현존하는 전통들과 관습들의 그리고 정의에 대한 전통적인 감각의 도움을 받아서만 실제로 해결될 수 있다; 영국에서 지칭되는 바와 같이 관습법(common law)의 그리고 공평에 대한 공정한 판사의 감식의 도움을 받아서. 모든 법률들은, 보편적인 원칙들이기 때문에, 적용되기 위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해석에는 구체적인 실행에 관한 몇 가지 원칙들이 필요한데 그 원칙들은 살아있는 전통에 의해서만 제공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자유주의의 고도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원칙들에게 더욱 특히 성립한다.
7. 자유주의의 원칙들은, 현존하는 제도들을 대체하는 원칙들로서라기보다는 현존하는 제도들을 평가하고 필요하면 수정하거나 변경하는 원칙들로서 기술될 (적어도 오늘날) 것이다. 자유주의가 혁명적 신조라기보다는 진화적 신조라고 (자유주의가 독재정권과 맞닥뜨리지 않는다면) 말함에 의하여 우리는 이것을 또한 표현할 수 있다.
8. 전통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전통으로서 우리가 간주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의 ‘도덕적 체제’로서 (제도적인 ‘법률적 체제’에 대응하는) 지칭할 것이다. 이것은, 정의나 공정함에 대한 혹은 사회가 도달한 도덕적 민감성의 등급에 대한 사회의 전통적인 감성을 포함한다.a 이 도덕적 체제는, 상충하는 이해관계들 사이에서 공정하고 공평한 타협이 필요한 곳에서 그 타협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토대로서 작동한다.b 그 도덕적 체제 자체가 물론 변경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체제는 비교적 느리게 변한다. 이 전통적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incorporates the society’s traditional sense of justice or fairness, or the degree of moral sensitivity it has reached.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것은 그 사회의 전통적인 정의감이나 공정성, 또는 그 사회가 도달한 도덕적 민감성의 정도를 통합한 것이다.’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moral framework serves as the basis which makes it possible to reach a fair or equitable compromise between conflicting interests where this is necessary.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러한 도덕적 구조 체제는 서로 갈등하는 이해관계들 사이에서 조정과 타협이 필요한 경우네는 공정하거나 평등한 조정과 타협에 도달하도록 하는 기반으로서 기여하게 된다.’이다.
체제의 파괴가 나치즘에 의하여 의식적으로 겨냥되었던 바와 같이, 그 파괴보
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종국적으로 그 체제가 파괴되면 냉소주의와 허무주의,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적 가치들에 대한 무시와 해체가 초래될 것이다.
IV. 자유로운 토론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론
사고의 자유와 자유로운 토론은 궁극적인 자유주의적 가치들인데 그 가치들에는 실제로 추가적인 정당화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가치들은, 그 가치들이 진리 탐구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통하여 실용적으로 또한 정당화될 수 있다.
진리는 명백하지 않다; 그래서 진리는 얻기가 쉽지 않다. 진리 탐구에는 적어도
(a) 상상력
(b) 시행착오
(c) (a)와 (b) 그리고 비판적 토론을 통한 우리가 지닌 편견들의 점진적 발견이
필요하다.
서구의 합리주의적 전통은 그리스인들에게서 유래하는데, 비판적 토론의 ㅡ 명제들이나 이론들을 반증하려고 시도함에 의하여 그 명제들이나 이론들을 검사하고 시험하는 ㅡ 전통이다. 이 비판적인 합리적 방법은 증명의 방법으로서, 다시 말해서, 진리를 최종적으로 확립하는 방법으로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그 방법은, 항상 의견일치를 보장하는 방법도 아니다. 더 정확하게 그 방법의 가치는, 토론 참석자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고 더 현명한 사람이 되어 헤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놓여있다.
토론이, 공통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공통적인 기초적 전제들을 수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능할 따름이라고 흔히 주장된다. 이것은 오류라고 나는 생각한다. 필요한 유일한 것은 토론에서 자신의 상대방으로부터 배우려는 각오인데 그 각오는 상대방이 의도하여 말하는 것을 이해하려는 진정한 소망을 포함한다. 이 각오가 토론에 있다면 토론은, 상대방의 배경들이 크게 다를수록 더 결실을 거둘 것이다. 그리하여 토론의 가치는 주로 경쟁하는 견해들의 다양성에 의존한다. 바벨탑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탑을 만들었을 터이다. 자유주의자는 의견의 완벽한 일치를 꿈꾸지 않는다; 그는 의견들이 상호 간에 비옥해지기를 그리고 결과적으로 관념들이 성장하기를 소망한다. 심지어 보편적으로 만족하도록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때도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의견을 달리하기 마련인 많은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후회스러운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합리적 토론을 통한 진리 탐구가 공적인 일일지라도, 그 탐구는 공적인 일에서 생기는 여론이 (여론이 무엇이든) 아니다. 여론이 과학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서 과학을 판단할지도 모르지만, 여론은 과학적 토론의 산물이 아니다.
그러나 합리적 토론의 전통으로 인하여, 정치 분야에서, 토론에 의한 행정이라는 전통 그리고 그 전통과 함께 또 다른 관점을 경청하는 습관이 생긴다; 정의감의 성장; 그리고 타협하려는 각오.
그리하여 우리의 소망은, 전통들이 비판적 토론의 영향을 받아 그리고 새로운 문제들의 도전에 반응하여 변하고 발전하면서 통상적으로 ‘여론’으로 지칭된 것들 중 많은 것을 대체할 것이고 여론이 충족하기로 약정된 기능들을 떠맡을 것이라는 점이다.
V. 여론의 형태
여론에는 두 가지 주요 형태들이 있다; 제도화된 여론과 제도화되지 않은 여론.
여론에 부합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제도들의 사례들: 언론 (편집자에 보내는 편지들 포함); 정당들; Mont Pèlerin 협회와 같은 협회들; 대학들; 출판; 방송; 극장; 영화관; 텔레비전.
제도화되지 않은 여론의 사례들: 최신 뉴스에 관하여, 혹은 외국인들에 관하여 혹은 ‘유색인들’에 관하여 기차 객실이나 다른 공공장소들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 혹은 만찬석에서 서로에 관하여 말하는 것. (이것은 심지어 제도화될지도 모른다.)
VI. 몇 가지 실용적 문제들: 언론검열과 공공성의 독점
이 절에서 논지들은 제시되지 않는다 ㅡ 단지 문제들만 제시된다.
언론검열에 반대하는 경우는 어느 정도까지 스스로-부과한 언론검열이라는 전통에 의존하는가?
발행인의 독점은 어느 정도까지 일종의 언론검열을 확립하는가? 사상가들은 어느 정도까지 자신들의 관념들을 자유롭게 발표하는가? 완벽한 출판의 자유가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든 출판할 완벽한 자유가 있어야 하는가?
지식인들의 영향력과 책임: (a) 이념들의 확산에 관하여 (사례: 사회주의); (b) 흔한 독재적 유행들의 (사례: 추상미술) 수용에 관하여.
대학의 자유: (a) 국가의 간섭; (b) 개인적인 간섭; (c) 여론의 이름으로의 간섭.
여론의 운영 (혹은 여론에 대한 계획). ‘대외 관계 담당자들’.
신문 (특히 만화에서의), 영화, 기타 등등에서의 잔인성에 대한 선전 문제.
취향의 문제. 표준화와 평준화.
선전 및 광고 대(對) 정보의 살포 문제
VII. 정치적 예시들에 대한 짧은 목록
이것은, 틀림없이 신중하게 분석할 가치가 있는 경우들을 포함하는 목록이다.
1. 호어-라발 협정 및 여론의 불합리한 도덕적 열정에 의한 그 협정의 패퇴.
2. 에드워드 8세의 퇴위.
3. 뮌헨 협정.
4. 무조건 항복.
5. 크리첼 다운(Crichel Down) 사건.
6. 고난을 불평 없이 수용하는 영국인의 습관.
VIII. 요약
여론으로 지칭되는 파악될 수 없고 모호한 실체로 인하여, 정교하지 못한 명민함 혹은 권력을 쥔 정권의 도덕적 감수성보다 우월한 도덕적 감수성이 더 전형적으로 때때로 드러난다. 그러나 여론이 강력한 자유주의적 전통에 의하여 절제되지 않는다면 여론은 자유에 위협이 된다. 여론은, 취향의 중재자로서 위험하고 진리의 중재자로서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여론은 때때로 계몽된 정의의 중재자로서 역할을 맡을 것이다. (사례: 영국 식민지들에서의 노예해방.) 불행하게도 여론은 ‘관리될’ 수 있다. 이 위험들은 자유주의적 전통을 강화함에 의해서만 상쇄될 수 있다.
여론은 자유롭고 비판적인 토론의 공공성과 구분되어야 하는데 그 공공성은 과학에서 규칙이고 (혹은 규칙이어야 한다), 정의 및 다른 도덕적 논쟁들이라는 문제들에 대한 토론을 포함한다. 여론은 이런 종류의 토론에 영향을 받지만 그 토론의 결과도 아니고 그 토론의 지배를 받지도 않는다. 그 토론에 초래하는 유익한 영향은, 이 토론들이 더 솔직하고 간단하고 분명하게 수행될수록, 더 커질 것이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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