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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명의 본질

이윤진이카루스 2020. 11. 8.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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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문명의 본질

 

 

 

우리의 문명은 본질적으로 지중해 문명인데 그리스인들로부터 유래한다. 이 문명은, 기원전 6세기에서 4세기까지 태어났고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아테네의 기적은 어마어마하다. 여기서 우리는 기원전 600년경에 솔론(Solon)으로 시작하여 짧은 기간에 몇 가지 평화로운 정치적 혁명들을 경험한다. 착취당하는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부채를 탕감함에 의하여 그리고 아테네 시민이 자신의 부채 때문에 노예가 될 수 있음을 금지함에 의하여 솔론은 아테네를 구했다. 그것은 시민들의 자유를 보전하려고 고안된 최초의 헌법이었으며, 자유는 확보되는 것이 없고 항상 위협을 받음을 아테네의 역사가 충분히 분명하게 밝힐지라도 그것은 잊힌 적이 없다c.

솔론은 위대한 정치가만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아테네 시인이었으면 그는 자신의 목표들을 자신의 운문에서 설명했다. 그는 eunomia, ‘훌륭한 정부에 대하여 말했으면 그는 이것을 시민들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들의 균형을 잡는 것으로서 설명했다. 헌법이 윤리적이고 인도주의적 목표로써 형성된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최초였고 적어도 지중해 지역에서 최초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은 쇼펜하우어가 다음과 같은 간단한 형태로 표현한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윤리적 본질이었다: Neminem laede imo omnes, quantum potes, juva! 다시 말해서: 아무도 해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모든 사람을 도우라!

이후 2천 년이 넘어서 발생한 미국혁명처럼, 솔론의 혁명은 시민들을 자유만을 염두에 두었다: 구매된 야만인 노예들의 노예 상태는 두 가지 경우들 모두에서 간과되었다.

솔론 이후에, 아테네의 정치는 결코 안정되지 못했다. 몇몇 주요 가문들이

권력 투쟁을 벌였고 몇 번 성공하지 못한 시도 끝에 솔론의 친척인 피시스트라투스가 자신을 아테네의 군주 즉, 참주로 옹립했다. 그의 막대한 재산은 아티카 외곽에 위치한 은광들에서 나왔고 그는 자신의 재산을 주로 문화적 목적들을 위하여 그리고 아테네에서 솔론의 개혁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사용했다. 그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많이 건설했고 축제들을 만들어냈는데 특히 극장에서의 축제들이었었다; 아테네에서의 비극 공연들을 도입한 것은 그의 덕택이다. 그리고 우리가 키케로부터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조직을 만들어 호머의 작품인 일리아드(Iliad)오디세이(Odyssey)를 서술했는데 그 작품은 이전에 구전의 형태로 존재했을 뿐으로 보인다.

이것이 아주 지대한 결과들을 낳은 행위였다는 것이 나의 강좌의 요지이다; 이것이 우리 문명의 역사에서 중심적인 중요성을 띤 사건이었다는 것.

내가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저술한 이후 여러 해 동안, 아테네의 기적은 나를 매혹한 문제였다. 그 기적은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를 놓아주지 않은 문제이다. 아테네에서 우리의 문명을 만들어낸 것은 무엇이었나? 무엇으로 인하여 아테네인들은 예술과 문학, 비극, 철학, 과학과 민주주의 모두를 1백 년도 못 되는 짧은 기간에 창조할 수 있었나?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한 가지 답변을 냈는데 의심의 여지없이 참이지만 내가 느끼기에 완전히 불충분한 답변이었다. 그 답변은 문화 충돌이었다. 두 가지 이상의 문화들이 접촉할 때, 그렇게 오랫동안 당연시된 사람들의 방식들과 관습들이 자연스럽지않고 유일하게 가능한 것들도 아니고 신들(gods)에 의하여 결정된 것도 아니고 인간 본성의 한 부분도 아님을 사람들은 깨닫는다. 그들은 문화가 인간과 인간 역사의 작품임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로 인하여 새로운 가능성들의 세계가 열린다: 그로 인하여 창문이 열리고 새로운 공기가 들어온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학적 법칙이고 이것으로 인하여 많은 것이 설명된다. 그리고 이것은 틀림없이 그리스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정말로 일리아드에서, 게다가 오디세이에서는 훨씬 더 많은데 호머의 주제들 중 한 가지 주제는 바로 이 문화 충돌에 관한 이 주제이다. 그리고 문화 충돌은 물론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y)의 주제이다. 그리스 문명에 대한 문화 충돌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그러나 이 설명은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포기해야 하겠다고 느꼈다. 아테네의 기적과 같은 기적은 설명될 수 없다고 나는 느꼈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기적은 완벽하게 설명될 수 없다. 호머의 작품들을 서술하는 것이 틀림없이 큰 영향을 미쳤을지라도 그 기적은 그 서술에 의하여 특히 설명될 수 없다. 저서들, 정말로 훌륭한 저서들이 이전에 그리고 다른 장소들에서 서술되었는데 아테네의 기적과 비견될 수 있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플라톤이 쓴 자신의 판사들 앞에서 행한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y of Socrates Before His Judges)을 ㅡ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철학 작품 ㅡ 다시 읽었다. 그리고 많이 토론된 구절을 다시 읽으면서 나에게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구절 [26 D-E]는 기원전 399년에 아테네에 번성하는 책 시장으로 아무튼 고서들이 (아낙사고라스의 저서 자연에 관하여[On Nature]와 같은) 정규적으로 팔리고 그 고서들이 매우 저렴하게 구매될 수 있었던 시장이 있었음 암시한다. 옛 희곡의 탁월한 거장이었던 유폴리스(Eupolis)는 심지어 50년 전의 책 시장에 대하여 말한다 [폴룩스오노마스티콘의 단편 글 IX, 47에서; VII, 211 참조]. 이제 그런 시장은 언제 출현할 수 있었고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나? 그것은 분명했다: 피시스트라투스가 호머의 작품들을 필사시킨 후에만이었다.

서서히 이 사건의 전체 중요성이 나에게 떠올랐다: 그림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호머의 작품의 필사되기 전에 저서들이 있었지만, 시장에서 자유롭게 판매되는 대중적인 저서들이 아니었다: 저서들은 심지어 존재했던 곳에서도 매우 희귀했고 상업적으로 복사되어 유통되지 않았지만 (헤라클리투스에 의하여 저술된 저서처럼) 사제들의 감시를 받으며 신성한 장소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호머의 작품이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모든 사람이 호머의 작품을 읽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작품을 암송했거나 적어도 호머 작품의 구절들을 암송했다. 호머는 최초의 공공 연예인이었다! 우리가 다시 플라톤으로부터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은 주로 아테네에서의 경우였는데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법률(Laws)에서 스파르타와 크레타가 문학적 흥미가 없다고 풍자하는 반면 자신의 저서 국가(Republic)에서 위험한 연예활동에 관하여 불평한다: 스파르타에서 호머의 이름을 알려졌다고 ㅡ 알려지기만 ㅡ 그는 지적한다; 그리고 크레타에서 호머의 이름이 들리지 않았다고 그는 지적한다.

아테네에서 호머가 크게 성공함으로 인하여 상업적인 서적 출판과 같은 것이 생겼다: 책들은 글을 아는 노예들의 무리들에게 낭독되었고 그 노예들은 그 책들을 파피루스 위에 적었음을 우리는 안다; 파피루스 장들이 수집되어 두루

마리들, 서적들이 되었고 그것들이 오케스트라(Orchestra)’라고 불린 시

장에서 팔렸다.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가장 간단한 가설은, 부자였던 피시스트라투스 자신이 호머의 작품을 편집시켰을 뿐만 아니라 복사시켜서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기묘한 우연에 의하여 나는 약 6년 전에, 피시스트라투스가 여전히 아테네에서 통치하고 있던 해에 이집트에서 아테네로 최초이자 상당히 많은 파피루스 수출이 시작되었다고 적힌 보고서를 우연히 발견했다.

피시스트라투스가 호머 작품을 공개적으로 암송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새로 편집된 책들의 유통을 시작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리고 그 책들이 인기를 얻자 다른 출판사들이 나타났다.

다른 시인들이 쓴 운문들과 비극들 및 희극들이 수집되어 뒤를 이었다. 이것을 중 어떤 것도 출판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서술되지 않았다; 그러나 출판이 아테네에서 확립된 관행이 되고 아고라(Agora)에서 서적 시장이 (biblionia) 제도로 확립되자마자 저런 의도로 저술된 책들이 뒤를 이었다. 출간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저술된 최초의 책은 아낙사고라스의 방대한 자연에 관하여(On Nature)였다고 나는 추측한다. 리시움(Lyceum)에 복사본 한 권이 ㅡ 아마도 요약본 ㅡ 있었고 아폴로도러스(Apollodorus)가 나중에 아테네의 한 도서관에서 복사본 한 권을 ㅡ 아마도 동일한 복사본 ㅡ 발견한 듯이 보일지라도, 아낙시맨더의 작품은 출판된 적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적어도 지중해 지역에서 호머의 작품들의 출판이 최초이고 실제로 출판의 발명이었다고 나는 제안한다. 그로 인하여 호머의 일리아드가 아테네의 경전이 된 것뿐만 아니다 ㅡ 그로 인하여 호머의 일리아드는 최초의 교재, 최초의 초급독본, 최초의 쓰기 책, 최초의 소설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아테네인들을 글자를 해득하게 되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 혁명을 ㅡ 피시스트라투스의 아들 히피아스를 아테네로부터 추방한 것, 그리고 헌법 제정 ㅡ 확립하기 위하여 이것이 고도로 중요했다는 것은, 이 최초의 출판 이후 약 50년 만에 설립된 민주주의의 특징적인 제도들 중 한 가지 제도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나는 도편추방 제도를 의미한다. 이유인즉 한편으로는 이 제도가, 시민이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을 ㅡ 시민이 질그릇 조각 위에 자신이 생각하기에 위험스럽게 인기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저명한 시민의 이름을 쓸 수 있었다는 것 ㅡ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이 사람들은, 아테네인들이 독재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시민들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도편추방 제도는, 아테네인들이 적어도 참주 히피아스를 추방한 이후 첫 세기 동안 독재 예방을 자신들의 민주주주의의 핵심적인 문제로서 간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개념은, 도편추방 제도가 추방을 처벌로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매우 명백하게 나타난다. 추방됨에 의하여 시민은 자신의 명예를 온전히 유지했고 그는 자신의 재산과 정말로 아테네에 남아있을 그의 권리를 제외하고 모든 권리들을 유지했다. 그가 재소환될 수 있었을지라도 그는 이 권리를 처음에는 10년 동안 그리고 나중에는 5년 동안 잃었다. 어떤 의미에서 추방은 찬사였는데 왜냐하면 도편추방은 어떤 시민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개념은 다음과 같았다: 민주주의에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지도력을 많이 칭찬할지라도 특정 지도자 없이도 틀림없이 우리가 해나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지도자가 우리의 주인이 되기에, 이것을 피하는 것이 우리 민주주의의 주요 과제이다. 도편추방은 오랫동안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알려진 최초의 경우는 기원전 488년이었고 마지막 경우는 기원전 417년이었다. 모든 경우들은 추방된 위대한 사람들에 비극적이었다. 그 기간은, 아테네 비극의 걸작들의 기간인 아이스킬로스(Aeschylus)와 소포클레스 및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기간과 거의 일치하는데 에우리피데스는 나중에 스스로 추방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유럽에서의 최초 출판은 호머 작품의 출판이었고 이 다행스러운 사실로 인하여 그리스 사람들이 호머와 호머 작품의 영웅들을 사랑하게 되고 대중들이 글을 배우고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더 많은 일을 이룩했다. 호머는 물론 이전에도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화병 그림들은 얼마 동안 그의 작품을 예시한 것들이었다. 많은 조각품들도 마찬가지였다. 호머 자신은 그렇게 많은 생생하고 흥미로운 장면들을 단어들로 상세하고 실재적으로 묘사한 사람이었고,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로 인하여 조각가들과 화가들이 자신들의 다른 매체에서 자극을 받고 그를 본받았다. 그리고 호머의 원문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더 널리 퍼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 자극은 훨씬 더 커졌다. 그래서 읽기 능력이 예술에 미친 영향은 부인될 수 없

. 아테네의 비극작가들에게 미친 호머 작품의 주제들의 영향은 분명하다; 그리고 심지어 그 비극작가들이 호머의 주제가 아닌 주제들을 사용하는 희소한 경우들에서도 그 비극작가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청중이 익숙하다고 전제될 수 있는 주제들을 계속해서 선택했다. 그래서 서적 시장이 미친 문화적 영향력은 막대했다고 나는 정말로 주장할 수 있다. 아테네의 문화적 기적의 모든 구성요소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 시장에 의하여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논증들의 정점을 이루는 것은, 일종의 역사적 실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훨씬 더 큰 규모로 서적들의 출판이라는 발명을 되풀이한 위대한 발명은, 피시스트라투스가 서적 출판을 발명한 이후 2000년에 구텐베르크에 의하여 서적 인쇄가 발명된 것이었다. 그 발명이 북유럽에서 이루어졌을지라도 인쇄술을 습득한 인쇄업자들 대부분이 지중해 남쪽으로 ㅡ 이탈리아로 ㅡ 인쇄술을 가져온 것은 흥미롭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쇄업자들은, 문예 부흥(Renaissance)으로 불린 저 위대한 새로운 운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는데 문예 부흥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문명 전체를 바꾼 새로운 인본주의적 학문의 발전과 새로운 과학의 발전을 포함했다.

이것은, 내가 아테네의 기적으로 별칭을 붙인 운동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운동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주 훨씬 더 큰 판본에 근거한 운동이었다. 1500년에 알두스(Aldus)는 복사본들의 판본 1천 부를 인쇄했다. 그것은 분명히, 이 새로운 혁명의 근원이었던 인쇄된 판본들의 규모였다. 그러나 그 외에는 가령 기원전 500년 아테네에서 시작되어 지중해에 걸쳐 퍼진 것과 우리 시대인 1500년에 피렌체나 베네치아에서 발생한 것 사이에는 놀라울 정도의 유사점이 있다. 그리고 새로운 인본주의적 학자들은 이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테네의 정신을 재개하기를 원했고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과 그렇게 하는 데 그들이 성공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아테네에서처럼 그리고 나중에는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 식민지인 마그나 그라이키아(Graecia Magna)에서처럼 ㅡ 특별히 알렉산드리아에서이지만 진정으로 지중해 전역에 걸쳐서 ㅡ 과학적 및 특히 우주론적 사고가 이 운동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코만디노(Commandino)와 같은 문예부흥 수학자들은,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Apollonius), 파푸스(Pappus)와 프톨레미(Ptolemy) 그러나 또한 아리스타쿠스(Aristarchus)의 실종된 업적들을 성공적으로 다시 알아냈는데 그로 인하여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리하여 갈릴레오와 케플러와 뉴튼과 아인슈타인이 탄생했다. 우리 자신의 문명이 최초의 과학적 문명으로서 올바르게 기술된다면, 그것은 모두 지중해에서 유래하는 것이고 내가 제안하는 바, 아테네의 서적 출판과 아테네의 서적 시장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아랍인들을 기여를 심하게 무시했는데 아랍인들은 지중해에 인도의 숫자체계를 가져왔다. 그들이 지중해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많은 것을 제공했지만 더 많이는 아닐지라도 그들이 제공한 만큼 이익을 받았다.

여러분, 나는 잘 알려진 ㅡ 한 가지 작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기여를 제외하고 잘 알려진 ㅡ 이야기를 간략하게 다시 말했다: 서적들에 의하여, 특히 바로 처음부터 출판된 서적들에 의하여 수행된 결정적인 역할. 우리의 문명은 정말로 책에 열중하는 문명이다: 우리 문명의 전통성과 독창성, 그 문명의 진지함과 지성적 책임감, 그 문명의 전대미문의 상상력과 그 문명의 창조성, 그 문명의 자유에 대한 이해와 자유에 대한 그 문명의 경계심 ㅡ 이 모든 것은 서적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의존한다. 단기적인 유행, 매체들과 컴퓨터들이 서적들에 대한 우리의 밀접한 개인적인 애착을 망치거나 심지어 헐겁게 하지 않기를!

그러나 아무리 서적들이 우리의 문명에 중요할지라도, 나는 서적들로써 그치고 싶지 않다. 문명은 문명화된 남녀들로, 훌륭한 삶과 문명화된 삶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저서들과 우리의 문명이 기여해야 하는 것은 이 목표이다. 저서들과 우리의 문명은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나는 믿는다.

ㅡ 칼 포퍼, ‘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1996, 108~114,

 

우리의 서구 문명은, 그 문명에 관하여 온전히 정당하게 발견될 수 있는 모든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저 문명들 중에서 가장 정의롭고 가장 인도주의적이어서 최고의 문명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의 서구 문명은, 자기-비판에 관해 그래서 향상에 관해 가장 큰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최고의 문명이다.

전 세계에 걸쳐서 인간은 새롭고 흔히 매우 다른 문화적 세계들을 창조했다: 신화들의, 운문의, 미술의, 음악의 세계들; 생산 방식들의, 도구들의, 기술들의, 사업의 세계들; 도덕성의, 정의(justice)의 세계들과 그리고 어린이들과 장애인들과 약자들과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보호하고 돕는 세계

. 그러나 법 앞에서의 평등에 대한 요구와 평화에 대한 요구 및 폭력의 최소화에 대한 요구와 함께, 개인적인 자유에 대한 도덕적 요구가 널리 인정되고 심지어 널리 실현되는 것은 유일하게 우리의 서구 문명에서만이다.

이것이, 내가 우리의 서구 문명을 지금까지 최고의 문명으로서 간주하는 이유이다. 물론 우리의 서구 문명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고려하면, 우리의 서구 문명은 거의 모든 사람이 그 문명을 가능한 한 많이 개선하기 위하여 함께 노력하고 있는 것은 유일한 문명이다.

심지어 우리의 문명도 매우 불완전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완벽한 사화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기 쉽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가 구체화해야 하는 실제로 모든 가치에 대하여, 충돌하는 다른 가치들이 있다. 심지어 아마도 모든 사회적 및 개인적 가치들 중에서 최고의 가치인 자유도 제한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갑의 자유가 을의 자유와 너무 쉽게 충돌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유를 고집하던 어느 피고인에게 미국 판사가 예전에 말한 바와 같이: ‘당신이 주먹을 쓰는 자유는 당신 이웃의 코의 위치에 의하여 제한된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다른 시민의 가능한 가장 큰 자유와 함께 공존하도록 모든 시민에게 가능한 가장 큰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입법의 과제라는 칸트의 언명에 다다른다. 다시 말해서, 자유는 불행하게도 항상 제한되어야 한다: 법률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질서에 의하여 제한되어야 한다. 질서에 의한 이 제한은 자유에 대한 필수적인 ㅡ 거의 논리적으로 필수적인 ㅡ 견제이다. 그리고 우리가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모든 혹은 적어도 거의 모든 가치들에 대하여 그런 견제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바로 이 순간에도, 복지국가라는 훌륭한 개념에도 자체의 한계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우고 있다. 사람에게 자신과 자신에 의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책임을 덜어주는 것이 위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많은 경우들에서 젊은이들에게 삶을 위한 투쟁을 우리가 훨씬 더 쉽게 만들어주어야 하는지가 아마도 심지어 의심스럽다. 실제적인 도전들을 그리고 개인적인 책임들을 감소시킴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삶이 자체의 의미를 빼앗길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사례는 평화인데 우리 모두는 평화를 이전보다 오늘날 더 강력하게 갈망한다. 폭력적인 싸움들을 피하기 위하여, 혹은 적어 그런 싸움들을 제한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든 능력을 다하기를 우리는 원하고 정말로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갈등이 없는 사회는 비인간적일 터이다. 그런 사회는 인간의 사회가 아니라 개미무리의 사회일 터이다. 또한 우리는, 위대한 평화주의자들이 위대한 투사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마하트마 간디도 투사였다: -폭력을 위한 투사.

인간의 사회에는 평화가 필요하지만 진지한 관념적 싸움들도 역시 필요하다: 가치들, 개념들인데 우리가 지향하여 싸울 수 있는 것들. 우리의 서구 문명은, 칼보다 말이 이 싸움들에서 훨씬 더 크고 더 지속적 효과를 낳는다는 것을 배웠다 ㅡ 그리스인들로부터; 그러나 모든 것 중에서 매우 효과적인 것은, 간단하게 표현된다면, 이성적인 논증들이다.

그러므로 완벽한 사회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몇몇 사회적 질서들은 다른 질서들보다 낫다. 우리의 서구 사회는, 말에 (words) 의하여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ㅡ 오직 드물지라도 ㅡ 심지어 이성적인 논증들이라는 수단에 의하여 바뀔 수 있는 사회체계로서의 민주주의를 선호했다. 이성적인, 다시 말해서, 객관적인 비판에 의하여: 과학에서, 특히 그리스인들 이래 자연과학에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것들과 꼭 같은 개인적이 아닌 비판적인 고찰들에 의하여. 그리하여 나는 서구 문명에 대한 나의 지지를 선언한다; 과학에 대한;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그것들로 인하여, 피할 수 있는 비극을 예방하는 기회와 복지국가와 같은 개혁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추가로 필요한 개선들을 실행하기 위하여 그 개혁들을 시험할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나는 또한 오늘날 그렇게 자주 폄훼되는 과학에 대하여 나의 지지를 선언하는데 과학은 자체의 진리 탐구에서 자기-비판을 이용하고 새로운 발견마다 우리에게 아는 게 얼마나 없는지를 새롭게 발견한다: 우리의 무지는 실제로 얼마나 무한하게 큰지. 위대한 자연과학자들 모두는 자신들의 무한한 무지를 그리고 오류가능성을 인식했다. 그들은 지성적으로 겸손했다. 괴테가 악당만 겸손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지성적인 악당만 건방지다고 답변하고 싶다.

ㅡ 칼 포퍼, ‘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1996, 118~120,

 

Our civilization, which is essentially, the Mediterranean civilization, derived from the Greeks. This civilization was born in the period from the sixth century to the fourth century before Christ, and it was born in Athens.

The Athenian miracle is staggering. Here we have, in a short period, beginning with Solon at about 600 BC, a number of peaceful political revolutions, Solon saved the city by shaking off the burden of debt from the exploited Athenian citizens, and by forbidding that any Athenian citizen could be made a slave because of his debts. It was the first constitution ever designed to preserve the freedom of the citizens, and it was never forgotten, although the history of Athens shows abundantly clearly that freedom is never secure but always threatened.

Solon was not only a great statesman; he was the first Athenian poet of whom we have knowledge, and he explained his aims in his poetry. He spoke of ‘eunomia’ or ‘good government’, and he explained this as balancing the conflicting interests of the citizens. It was, no doubt, the first time, at least the first time in the Mediterranean region, that a constitution had been shaped with an ethical and humanitarian aim. And what was here at work was the universally valid ethical imperative that Schopenhauer brought in the simple form: Neminen laede imo omnes, quantum potes, juva! That is: Hurt no one, but help all, as well as you can!

Like the American Revolution, which came over two thousand years later. Solon's revolution had in mind the freedom of the citizens only: the slavery of the bought barbarian slaves was in both cases overlooked.

After Solon, Athenian politics were far from stable. Several leading families were contesting for power, and after some unsuccessful attempts, Pisistratus, a relation of Solon's, established himself as a monarch or tyrant in Athens. His great wealth derived from silver mines situated outside Attica, and he used his wealth largely for cultural purposes and for stabilizing the Solonian reforms in Athens. He built a lot of beautiful buildings and instituted festivals, especially the theatrical festivals; to him is due the founding of the performances of tragedies in Athens. And, as we know from Cicero, he organized the writing down of the works of Homer, the Iliad and Odyssey, which previously seem to have existed only in the form of an oral tradition.

It is the main thesis of my address that this was an act that had the most far-reaching consequences; that it was an event of focal significance in the history of our civilization.

For many years, ever since I wrote my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the Athenian miracle has been a problem that has fascinated me. What was it that created our civilization in Athens? What made Athens invent art and literature, tragedy, philosophy, science and democracy, all in a short period of time of less than one hundred years?

I had one answer to this problem, an answer that was undoubtedly true but, I felt, quite insufficient. The answer was: culture clash. When two or more different cultures come into contact, people realize that their ways and manners, so long taken for granted, are not 'natural', not the only possible ones, neither decreed by the gods nor part of human nature. They discover that their culture is the work of men and their history. It thus opens a world of new possibilities: it opens the windows and it lets in fresh air. This is a kind of sociological law, and it explains a lot. And it certainly played an important role in Greek history.

Indeed, one of Homer's main themes in the Iliad, and even more in the Odyssey, is, precisely, this topic of culture clash. And culture clash is of course a main topic also of Herodotus' History. Its significance for Greek civilization is very great.

And yet this explanation did not satisfy me. And for a long time I felt that I had to give up. A miracle like the Athenian miracle, I felt, cannot be explained, and I still think so, that it cannot be fully explained. Least of all can it be explained by the writing down of the works of Homer, although this certainly had great influence. Books, indeed great books, had been written down before, and at other places, and nothing comparable to the Athenian miracle had happened.

But one day I read again Plato's Apology of Socrates Before His Judges - the most beautiful philosophical work I know. And rereading a much discussed passage, I had a new idea. The passage [26 D-E] implies that there was a flourishing book market in Athens in the year 399 BC, a market, at any rate, where old books (like Anaxagoras' book On Nature) were regularly sold, and where they could be bought very cheaply. Eupolis, the great master of the old comedy, even speaks [in a fragment cited by Pollux, Onomasticon IX, 47; cf. VII, 211] of a book market fifty years earlier. Now, when could such a market have arisen and how could it have arisen? It was clear: only after Pisistratus had the works of Homer written down.

Slowly, the whole significance of this event dawned on me: the picture began to unfold. Before Homer had been written down, there were books, but no popular books freely for sale at a market: books were, even where they existed, a great rarity, not commercially copied and distributed, but (like the book written by Heraclitus) kept in a holy place, under the surveillance of priests. But we know that in Athens Homer quickly became popular: everybody read Homer, most knew him by heart, or at least passages of Homer by heart. Homer was the first public entertainment ever! And this was the case mainly in Athens, as we can learn again from Plato, who in his Republic complains about the dangerous entertainment, while in his Laws he satirizes Sparta and Crete for their lack of literary interest: in Sparta, he indicates, Homer's name was known-just known; and in Crete, he indicates, Homer had hardly been heard of.

The great success of Homer in Athens led to something like commercial book publishing: books, we know, were dictated to groups of literate slaves, who wrote them down on papyrus; the sheets were collected in scrolls or 'books', and they were sold in the market, at a place called the 'Orchestra'.

How did all this start? The simplest hypothesis is that Pisistratus himself, who was a rich man, not only had Homer edited, but had him copied and distributed. By a strange coincidence I stumbled about six years ago a report saying that the first and very considerable export of papyrus from Egypt to Athens began in a year in which Pisistratus was still ruing at Athens.

Since Pisistratus had been interested in having public recitals of Homer, it is very plausible that he started distributing the newly edited books; and their popularity led to the emergence of other publishers.

Collections of poems written by other poets, and tragedies and comedies followed. None of these had been written deliberately for publication; but books written with that intention followed as soon as publishing became an established practice in Athens, and the book market (biblionia) in the Agora became an established institution. I conjecture that the first book written deliberately for publication was Anaxagoras's great work On Nature. Anaximander's work appears never to have been published, although it seems that the Lyceum had a copy - perhaps a summary - and that Apollodorus later discovered a copy - perhaps the same one - in an Athenian library. So I suggest that the publication of the works of Homer was the first publication ever, actually the invention of publication, at least in Mediterranean region. It not only made Homer's Iliad the bible (biblion) of Athens - it made it the first instrument of education, the first primer, the first spelling book, the first novel. And it made the Athenians literate.

That this was highly significant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Athenian democratic revolution - the expulsion of Pisistratus' son Hippias from Athens, and the establishment of a constitution - may be seen from one of the characteristic institution of the democracy that was established about fifty years after this first publication. I mean the institution of ostracism. For on the one hand, this institution assumed silently that the citizen could write - that he could write on a potsherd the name of the citizen he thought dangerously popular or otherwise prominent. These were the citizens that the Athenians, at least during the first century after expelling the tyrant Hippias, regarded as the central problem of their democracy the prevention of a tyranny.

This idea comes out very clearly when we realize that the institution of ostracism did not regard the banishment as a punishment. By being ostracized, a citizen retained his honour unblemished, he retained his property and indeed all rights except his right to remain in the city. This right he lost, first for ten years and later for five, although he could be recalled. In a sense, ostracism was a tribute, since it recognized that a citizen was outstanding; and some of the most outstanding leaders were ostracized. Thus the idea was: nobody in irreplaceable in a democracy, and much as we admire leadership, we must be able to do without any particular leader; otherwise he may make himself our master, and it is the main task of our democracy to avoid this. It should be noted that ostracism was not long in use. The first known case was in 488 BC, and the last in 417. All the cases were tragic for the great men who were banished. The period almost coincides with the period of the greatest works of Athenian tragedy, with the period of Aeschylus, Sophocles and Euripides, who later banished himself.

So it is my hypothesis that the first publication in Europe was the publication of Homer, and this fortunate fact led to the Greek love of Homer and of the Homeric heroes, to popular literacy and to the Athenian democracy. But I think it did more. Homer was of course popular before; and almost all the vase paintings had been for some time illustrations of his work. So had many sculptures. Homer himself had been a detailed and realistic painter in words of so many vivid and interesting scenes, and as Ernst Mach has pointed out, this challenged sculptors and painters to emulate him in their own different media. And the challenge became even greater as detailed knowledge of the Homeric text became more widespread. So the influence upon the arts of the power to read cannot be denied. The influence of Homeric themes upon the Athenian tragedians is evident; and even in the few cases when they used non-Homeric themes, they still continued to choose themes which their audience could be assumed to be familiar with. So I can indeed claim that the cultural influence of the book market was incalculable. All the components of the Athenian cultural miracle were undoubtedly greatly influenced by this market.

But to crown all these arguments, we have a kind of historical experiment. The great invention that, as it were, repeated on a far larger scale the invention of the publication of books was the invention of book printing by Gutenberg, two thousand years after Pisistratus' invention of book publishing. It is interesting that, even though the invention was made in the North of Europe, the majority of printers who acquired the skill brought it quickly south to the Mediterranean - to Italy. And there they played a decisive role in that great new movement called the Renaissance, which included the development of the new humanist scholarship and the new science that ultimately transformed our whole civilization.

This was a movement on a much larger scale that the movement that I dubbed 'The Athenian Miracle'. It was, frist of all, a movement based on a very much larger edition of books. In 1500, Aldus printed editions of one thousand copies. It was, obviously, the size of the printed editions that was the salient point of this new revolution. But otherwise there is an astonishing analogy, or similarity, between what had started in Athens in, say, 500 BC and had spread from there over the Mediterranean, and what happened in Florence or Venice in, say, 1500 of our era. And the new humanist scholars were aware of this: they wanted to renew the spirit of Athens, and they were proud of their ability to do so, and of their success in doing do.

As in Athens and later in Graecia Magna - and especially in Alexandria, but indeed all over the Mediterranean - scientific and, in particular, cosmological speculation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se movements. Renaissance mathematicians, such as Commandino, successfully recaptured the lost works of Euclid, Archimedes, Apollonius, Pappus and Ptolemy, but also of Aristarchus, which led to the Copernican Revolution and so to Galileo, to Kepler, to Newton and to Einstein. If our own civilization is correctly described as the first scientific civilization, then it all comes from the Mediterranean and, I suggest, from Athenian book printing, and the Athenian book market.

In all this I have badly neglected the contribution of the Arabs, who brought an Indian number system to the Mediterranean. They gave much, but they received as much as they gave, if not more, when they reached the Mediterranean.

Ladies and Gentlemen, I have briefly retold a well-known story - well known except for one small yet, I think, significant contribution: the decisive role played by books, and especially by published books, from the beginning. Our civilization is, indeed, a bookish one: its traditionality and its originality, its seriousness and sense of intellectual responsibility, its unprecedented power of imagination and its creativity, its understanding of freedom and its watchfulness for it - all these rest on our love of books. My short-term fashions, the media and the computers never spoil or even loosen our close personal attachment to our books!

But I do not wish to end with books, however important they are for our civilization. It is most important not to forget that a civilization consists of civilized individual men and women, of individuals who wish to live good lives and civilized lives. It is to this end that books and our civilization must make their contributions. I believe that they are still doing so, and with great success.

- Karl. R. Popper, In Search of a Better World, 1996. p 108~114 -

 

I believe that our western civilization is, in spite of all the faults that can quite justifiably be found with it, the most free, the most just, the most humanitarian and the best of all those we have ever known throughout the history of mankind. It is the best because it has the greatest capacity for self-criticism, and so, for improvement.

All over the world men have created new and often very different worlds: the worlds of myth, of poetry, of art, of music; the worlds of production methods, of tools, of technology, of business; the worlds of morality, of justice, of protection and of help for children, for invalids, for the weak and for others in need. But it is only in our western civilization that the moral demand for personal freedom is widely acknowledged and even widely realized, along with the demand or equality before the law, for peace, and for the minimization of violence.

This is why I regard our western civilization as the best to date. Of course it is in need of improvement. But, when all is said and done, it is the only civilization in which almost everyone is working together in order to improve it as much as possible.

I admit that even our civilization is very imperfect. But this almost goes without saying, since it is easy to see that a perfect society is impossible. For practically every value that a society should embody, there are other, conflicting values. Even freedom, perhaps the highest of all social and personal values, must be limited, since, of course, Paul's freedom may conflict only too easily with Peter's freedom. As an American judge once told a defendant who insisted upon his freedom: 'The freedom of the movement of your fists is limited by the position of you neighbour's nose.' This brings us to Immanuel Kant's formulation that the task of legislation is to allow the greatest possible freedom of every citizen to co-exist with the greatest possible freedom of every other citizen. In other words, freedom must, unfortunately, be always limited: limited by the law, that is, by order. This limitation by order is a necessary an almost logically necessary counterbalance to freedom. And there is such a counterbalance for all, or at least for almost all, the values that we should like to see realized.

For instance, we are learning at this very moment that the great idea of the welfare state has its limitations. It appears that it is dangerous to relieve a person of his responsibility for himself and his dependants; and in many cases it is perhaps even dubious whether we ought to make the struggle for life very much easier for young people. It seems that, for many people, life may be robbed of its meaning by the reduction of real challenges and of personal responsibilities.

Another example is peace, which we all desire more strongly nowadays than ever before. We want to do, indeed we must do, everything in our power to avoid violent conflicts, or at least to limit them. On the other hand, a society without any conflict would be inhuman. It would not be a human society, but an ant heap. Nor should we overlook the fact that the great pacifists were also great fighters. Even Mahatma Gandhi was a fighter: a fighter for non-violence.

Human society needs peace, but it also needs serious ideational conflicts: values, ideas, that we can fight for. Our western society has learned from the Greeks that the word has a much greater and more last effect in these conflicts than the sword; most effective of all, however, are rational arguments, if expressed simply.

A perfect society is therefore impossible. But some social order are better than others. Our western society has opted for democracy as a social system that can be changed by words, and in places if only rarely even by means of rational arguments; by rational, that is to say, by objective criticism: by non-personal critical considerations, just like those typically used in sciences, particularly in natural science since the Greeks. I therefore declare my support for western civilization; for science; and for democracy. They give us the chance to prevent avoidable tragedy and to try out reforms, such as the welfare state, to assess them critically and to make any further necessary improvements. I also declare my support for science, so often maligned these days, which employs self-criticism in its search for truth and which discovers afresh with each new discovery just how little we know: how infinitely great our ignorance really is. All the great natural scientists were conscious of their infinite ignorance and of their fallibility. They were intellectually modest. If Goethe says: 'Only rogues are modest', then I should like to reply: 'Only intellectual rogues are immodest.'

- Karl. R. Popper, In Search of a Better World, 1996. p 118~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