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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II부 역사에 관하여, 8장 문화 충돌에 관하여

이윤진이카루스 2020. 11. 4. 20:01

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II 부 역사에 관하여, 8장 문화 충돌에 관하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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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문화 충돌에 관하여

 

 

 

 

 

비엔나에 초대되어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어 나는 매우 기쁘다; 그리고 나는, 오스트리아 해외동포 협회의 회장에 의하여 오늘 여기에서 짧은 강좌를 제공해달라고 초청받은 것을 커다란 영예로서 느꼈다. 그의 초청장은, 나의 강좌 제목은 나에게 맡겨진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매우 친절하게도 선택을 해야 하는 모든 고민들을 나에게 맡겼다.

결정하는 데서의 난관들은 상당했다. 분명히 나는 나에게 흥미로운 주제를 선택하기를 원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점령을 끝낸 독특한 사건인 현재의 행사에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the Austrian State Treaty) 25주년, 비엔나에서 오스트리아 해외동포들의 모임에 틀림없이 어떤 관련성을 지닌다.

내가 선택한 주제가 이 기대들을 충족하는지 나는 의심한다. 2차 세계대전에 뒤이은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러시아의 점령을 기억하여 나의 강좌는 문화 충돌이라는 문제에 모든 해외동포들이 틀림없이 경험하는 것a 헌정된다.

문화 충돌에 대한 나 자신의 흥미는 다음과 같은 주요 문제에 대한 나의 흥미와 연결된다: 우리의 유럽 문명의 특징들과 근원이라는 문제. 나의 견해로, 이 문제의 부분적인 해결책은 우리 서구 문명이 그리스 문명으로부터 도출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Austrian State Treaty) 25주년을 기념하여 서술된 강좌. 내가 몸소 참가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강좌 내용은 오스트리아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이 참석하고 엘리자베트 헤르츠(Elisabeth Herz) 박사에 의하여 낭독되었다. 국가 조약 25주년(25 Jahre Staatsvertrag), 오스트리아 연방 출판국(Österreichischer Bundesverlag), 비엔나, 1981년에 발표됨.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a thing that all expatriates must experience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된다는 사실에 놓여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리스 문명은 유례없는 현상 지중해의 서양 문화와 동방 문화a 사이의 문화 충돌에서 시작되었다. 이 문화 충돌의 효과들은 깊이 느껴졌다. 호머(Homer)는 문화 충돌을 그리스 문학의 주제로 그래서 서구세계 문학의 주제로 만들었다.

나의 강좌 제목인 문화 충돌에 관하여는 역사 관련 추측인 한 가지 가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그 가설은, 이런 종류의 충돌이 항상 유혈 전투들과 파괴적인 전쟁들로 이어질 필요가 없고 또한 유익하고 생명-촉진적인 문화적 발전들로 이어질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 충돌은 심지어 그리스인들의 문화와 같은 독특한 문화의 진화를 야기할 것인데 그리스인들의 문화는, 로마인들의 문화와 충돌했을 때 로마인들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특히 아랍 문화와 훨씬 더 많은 충돌을 거친 후에 그리스인들의 문화는 문예부흥(Renaissance)에서 의도적으로b 부흥되었다; 그리고 서적 인쇄의 발명 덕분에c, 그리스인들의 문화는 서양의 문화가 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저 문화인데 그 문화는 추가적인 충돌들의 과정에서 세계의 모든 다른 문화들을 결국 변화시켰다.

그러나 이 서구 문명은 훌륭하고 바람직한 것인가? 이 질문은, 적어도 루소 시대이래 특히 젊은이들에 의하여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는데 그 젊은이들은 전적으로 올바르게 더 좋은 것을 항상 추구한다. 그 질문은 오늘날의 서구 문명에 전형적인 질문인데 그 서구 문명은 세계의 다른 문명보다 더 자기-비판적이고 개혁을 향해 우호적인 의향을 지녔다. 문화 충돌이라는 나의 주제로 계속하기 이전에 나는 이 질문에 답하고 싶다.

우리의 서구 문명은, 그 문명에 관하여 온전히 정당하게 발견될 수 있는 모든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저 문명들 중에서 가장 정의롭고 가장 인도주의적이어서d 최고의 문명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의 서구 문명은, 자기-비판에 관해e 그래서 향상에 관해 가장 큰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최고의 문명이다.

전 세계에 걸쳐서 인간은 새롭고 흔히 매우 다른 문화적 세계들을 창조했다: 신화들의, 운문의, 미술의, 음악의 세계들; 생산 방식들의, 도구들의, 기술들의, 사업의 세계들; 도덕성의, 정의(justice)의 세계들과 그리고 어린이들과 장애인들과 약자들과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보호하고 돕는 세계

 

a 역주: ‘지중해의 서양 문화와 동방 문화의 원어 표현은 the western and eastern cultures of the Mediterranean인데 박영태 번역은 동부 지중해인들이다.

b 역주: ‘의도적으로의 원어는 deliberately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c 역주: ‘서적 인쇄의 발명 덕분에의 원어 표현은 thanks to the invention of book printing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d 역주: ‘인도주의적의 원어는 humanitarian인데 박영태 번역은 인문주의적이다.

e 역주: ‘자기-비판은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고 증진이라는 말이 삽입되었다.

 

. 그러나 법 앞에서의 평등에 대한 요구와 평화에 대한 요구 및 폭력의 최소화에 대한 요구와 함께, 개인적인 자유에 대한 도덕적 요구가 널리 인정되고 심지어 널리 실현되는 것은 유일하게 우리의 서구 문명에서만이다.

이것이, 내가 우리의 서구 문명을 지금까지 최고의 문명으로서 간주하는 이유이다. 물론 우리의 서구 문명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고려하면a, 우리의 서구 문명은 거의 모든 사람이 그 문명을 가능한 한 많이 개선하기 위하여 함께 노력하고 있는 유일한 문명이다.

심지어 우리의 문명도 매우 불완전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완벽한 사화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기 쉽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가 구체화해야 하는 실제로 모든 가치에 대하여, 상충하는 다른 가치들이 있다. 심지어 아마도 모든 사회적 및 개인적 가치들 중에서 최고의 가치인 자유도 제한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갑의 자유가 을의 자유와 너무 쉽게 상충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유를 고집하던 어느 피고인에게 미국 판사가 예전에 말한 바와 같이: ‘당신이 주먹을 쓰는 자유는 당신 이웃의 코의 위치에 의하여 제한된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다른 모든 시민의 가능한 가장 큰 자유와 함께 공존하도록 모든 시민에게 가능한 가장 큰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입법의 과제라는 칸트의 언명에 다다른다. 다시 말해서, 자유는 불행하게도 항상 제한되어야 한다: 법률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질서에 의하여 제한되어야 한다. 질서에 의한 이 제한은 자유에 대한 필수적인 거의 논리적으로 필수적인 견제이다. 그리고 우리가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모든 혹은 적어도 거의 모든 가치들에 대하여 그런 견제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바로 이 순간에도, 복지국가라는 훌륭한 개념에도 자체의 한계들이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사람에게 자신과 자신에 의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책임을 덜어주는 것은 위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많은 경우들에서 젊은이들에게 삶을 위한 투쟁을 우리가 훨씬 더 쉽게 만들어주어야 하는지는 혹시 심지어 의심스럽다. 실제적인 도전들을b 그리고 개인적인 책임들을 감소시킴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삶은 자체의 의미를 빼앗길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사례는 평화인데 우리 모두는 평화를 이전보다 오늘날 더 강력하게 갈망한다. 폭력적인 싸움들을 피하기 위하여, 혹은 적어 그런 싸움들을 제

 

a 역주; ‘모든 것을 고려하면의 원어 표현은 when all is said and done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실제적인 도전들의 원어 표현은 real challenges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한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든 능력을 다하기를 우리는 원하고 정말로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갈등이 없는 사회는 비인간적일 터이다. 그런 사회는 인간의 사회가 아니라 개미무리의 사회일 터이다. 또한 우리는, 위대한 평화주의자들이 위대한 투사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마하트마 간디도 투사였다: -폭력을 위한 투사.

인간의 사회에는 평화가 필요하지만 진지한 관념적 싸움들도 역시 필요하다: 가치들, 개념들인데 우리가 지향하여 싸울 수 있는 것들. 우리의 서구 문명은, 칼보다 말이 이 싸움들에서 훨씬 더 크고 더 지속적 효과를 낳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스인들로부터; 그러나 모든 것 중에서 매우 효과적인 것은, 간단하게 표현된다면a, 합리적인 논증들이다.

그러므로 완벽한 사회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몇몇 사회적 질서들은 다른 질서들보다 낫다. 우리의 서구 사회는, 말에 (words) 의하여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오직 드물지라도 심지어 합리적인 논증들이라는 수단에 의하여 바뀔 수 있는 사회체계로서의 민주주의를 선호했다. 합리적인, 다시 말해서, 객관적인 비판에 의하여: 과학에서, 특히 그리스인들 이래 자연과학에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것들과 꼭 같은 개인적이 아닌 비판적인 고찰들에 의하여. 그리하여 나는 서구 문명에 대한 나의 지지를 선언한다; 과학에 대한;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그것들로 인하여, 피할 수 있는 비극을 예방하는 기회와 복지국가와 같은 개혁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추가로 필요한b 개선들을 실행하기 위하여 그 개혁들을 시험할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나는 또한 오늘날 그렇게 자주 폄훼되는c 과학에 대하여 나의 지지를 선언하는데 과학은 자체의 진리 탐구에서 자기-비판을 이용하고 새로운 발견마다 우리에게 아는 게 얼마나 없는지를 새롭게 발견한다: 우리의 무지가 실제로 얼마나 무한하게 큰지. 위대한 자연과학자들 모두는 자신들의 무한한 무지를 그리고 오류가능성을 인식했다. 그들은 지성적으로 겸손했다. 괴테가 악당만 겸손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지성적인 악당만 건방지다고 답변하고 싶다.

서구 문명에 대하여 그리고 과학, 특히 자연과학에 대하여 나의 지지를 내가 선언했음을 고려하여 나는 곧 나의 주제인 문화 충돌로 돌아오겠다. 그러나 먼저 나는, 불행하게도 여전히 이 서구 문명의 중요한 요소인 무서운 이단을 매우 간략하게 언급하고 싶다. 나는 민족주의라는 혹은 더 정확하게 민족

 

a 역주: ‘간단하게 표현된다면의 원어 표현은 if expressed simply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추가로 필요한의 원어 표현은 further necessary인데 박영태 번역은 필요 이상의이다.

c 역주: ‘그렇게 자주 폄훼되는의 원어 표현은 so often maligned인데 박영태 번역은 악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이다.

 

국가라는 이념 무서운 이단을 언급하고 있다: 여전히 그렇게 흔히 지지를

받으며 국경은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의 경계선과 일치해야 한다는 표면적으로

도덕적인 요구의 교설. 이 교설이나 요구에서 근본적인 오류는, 자연스러운 단위들로서 민족들이 국가에 앞서서 존재한다는 다소 뿌리처럼 전제인데 따라서a 그 단위들은 국가에 의하여 점유되어야 한다. 실제로 그 단위들은 국가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전혀 실행될 수 없는 이 요구는, 소수 보호에 대한 중요한 도덕적 요구와 틀림없이 대비된다b: 각 국가의 언어적, 종교적 그리고 문화적 소수들이 다수들에 의한 공격에 대비하여 보호되어야 한다는 요구; 물론 자신들의 피부색이나 눈동자 색이나 머리 색 때문에 다수와 다른 저 소수들을 포함하여.

전혀 실행될 수 없는 민족 국가라는 원칙과 달리, 소수 보호라는 원칙은 물론 실행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실행될 수 있는 듯이 보인다. 1950년 이래 내가 미국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이 분야에서 내가 목격한 진전사항들은 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리고 민족성이라는 원칙과 달리, 보호라는 원칙은 예를 들어 어린이 보호라는 원칙과 꼭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분명하게 도덕적 원칙이다.

민족 국가라는 원칙이 왜 세상 어느 곳에서도 실행될 수 없고, 특히 유럽에서는 정신병이나 다름없는가?c 이 문제로 인하여 나는 문화 충돌이라는 주제로 되돌아간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유럽의 인구는 대규모 이주의 결과이다. 태곳적부터 사람들의 물결이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역으로부터 몰려와서 아시아의 남부와 남동부 및 특히 갈라진 서부 반도들에 살던 초기 이주민들과 조우했는데 그 지역을 우리는 유럽이라 부르고 그 물결들이 흩어졌다. 그 결과가 언어적, 민족적 그리고 문화적 모자이크다: 무질서한 혼효(混淆)인데 도저히 풀어 헤쳐질 수 없다.

언어들은, 상대적으로 말해서, 이 혼돈상태를 통과하는 최고의 길잡이들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소 토착적인 혹은 자연적인 방언들과 중복되는d 문어들(文語: written languages)이 있는데 그것들 자체는, 화란어(Dutch)가 분명

 

a 역주: ‘따라서의 원어는 accordingly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런데이다.

b 역주: ‘틀림없이 대비된다의 원어 표현은 must be contrasted인데 박영태 번역은 대조되어 구별되어야만 한다이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Why is the principle of the national state unworkable anywhere in the world, and nothing short of insane, especially in Europe?인데 박영태 번역은 세계 어디서든지 실현 가능하지 않고 거의 광기에 가까운 민족 국가의 원리가 특별히 유럽에 존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이다.

d 역주: ‘중복되는의 원어는 overlapping인데 박영태 번역은 학문 연구나 종교 의식에 사용되는 (기록만을 위한)’이다.

 

히 예시하는 바와 같이, 미화된 방언들에서 기원한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및 포르투갈어와 루마니아어와 같은 다른 언어들은 난폭한 로마의 정복의 산물이

. 그러므로 언어적 혼란이 민족적 혼란을 통과하는 정말로 신뢰 가능한 길잡일 수가 없다는 것은 명명백백하다. 성씨들(surnames)을 조사하면 이것은 또한 분명해진다. 많은 슬라브계 성씨들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독일계 성씨들로 교체되어서 많은 흔적들이 완전히 감춰졌을지라도 그리하여 나는

Bohuschalek라는 사람을 알았는데 그는 내가 올바르게 기억한다면, Bollinger라는 사람이 되었다 슬라브족과 독일인의 동화 흔적들은 여전히 도처에 있다. 특히 그 이름들이 offow로 끝나는 독일의 많은 귀족 가문들은 분명히 어떤 정도로든 슬라브인들의 계통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들의 민족적 기원에 관한 추가적인 실마리들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데 특히 귀족 가문들에 관한 곳에서이고 그 귀족 가문들에 대하여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결혼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예를 들어 농노들과 대조적으로.

그러나 당시 민족주의 원칙이라는 미친 개념이, 주로 철학자들인 루소와 피히테와 헤겔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또한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반응의 결과로서 이 유럽의 혼란상태 가운데서 치솟았다.

물론 민족주의의 선배들이 있었다. 그러나 로마 문화도 고대 그리스 문화도 민족주의적은 아니었다. 이 고대 문화들 각각은 지중해 부근에서 그리고 근동에서 다양한 문화들이 충돌한 결과로서 출현했다. 이것은 그리스 문화에 대해서도 또한 사실인데 그리스 문화는 아마도 현재 서구 문화에 가장 중요하게 기여했다: 자유의 개념, 민주주의의 발견 그리고 궁극적으로 현대 자연과학으로 낳은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나는 의미한다.

심지어 우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그리스 문예 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들인 일리아드(Iliad)오디세이(Odyssey)도 문화 충돌을 유창하게 선언하는 것들이다; 정말로 이 충돌은 그 작품들의 실제적인 주제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작품들을 합리적이고 설명적인 태도 두 가지 모두를 증언한다. 사실상 호머의 작품에서 나오는 신들(gods)의 정확한 기능은, 이해될 수 있는 심리학적 이론을 이용하여 그렇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것들을 (아킬레스와 아가멤논 사이의 불화와 같은)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무나 인간적인 이 신적(神的) 형상들의 신적 형상들인데 그 형상들이 지닌 인간적인 약점들이 분명하고 또한 때때로 비판적으로 판단되는 이해관계들과 질투들을 통하여. 전쟁의 신인 아레스(Aries)는 특히 실패한다. 그리고 일리아드(Iliad)오디세이(Odyssey) 모두에서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들은 적어도 아카이아인들(Achaens)인 그리스인들과 꼭 마찬가지로 동정적으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 비판적이고 계몽된 태도는, 페르시아의 공격들에 대항하는 그리스의 자유 투쟁의 영향을 받아서 자유라는 개념이 최초로 경축되었던 저 작품들에서 다시 출현한다; 특히 아이스킬로스(Aeschylus)와 헤로도토스의 작품들에서. 그것은 민족적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인 자유이고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적인 아테네인들의 자유인데 페르시아의 대왕들의 신민들이 견딘 자유의 결핍과 대비된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는 단순히 이념이 아니라, 삶을 낫게 그리고 더 살아갈 가치가 있게 만드는 삶의 한 방식이다. 아이스킬로스와 헤로도토스 모두가 이것을 분명히 했다. 그들 모두는, 자유의 문화와 독재의 문화인 이 서구 문화와 동방 문화의 충돌에 대한 증인들로서 글을 쓴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는 이 충돌이 가져온 계몽적인 효과를 증언하는데 그 효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의 문화를 의식적이고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어 평가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전통적인 신화들을 합리적이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이오니아(Ionia)에서 (소아시아의 일부) 이것은 비판적인 우주론을, 우주 체계의 구조에 관한 비판적인 사변적 이론들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연현상들에 대한 참된 설명의 탐구인 자연과학을 낳았다. 자연과학이, 자연에 대한 신화적 설명에 대한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태도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서 발생한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내가 합리적 비판을 말할 때, 나는 진리의 관점에서부터의 비판을 의미한다: ‘이것은 참인가?’ 그리고 이것은 참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들의 관점.

자연현상들에 대한 이 신화적 설명들의 진실성을 의문시함에 의하여, 그리스인들은 자연과학들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이론들을 창시했다. 그리고 선사시대에 관한 신화적 보고서들의 진실성을 의문시함에 의하여, 그들은 역사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역사기록학의a 아버지로서 올바르게 지칭되는데 역사연구의 선배만은 아니었다. 문화 충돌의, 특히 그리스와 이집트 그리고 메데-페르시아b 문화들 사이의 충돌의 비판적이고 정보 제공적인 본성을 실제로 발견한 사람은 그였다.

이 지점에서 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관련 작품에서 일화를 인용하고 싶은데 그 작품은 실제로 그리스인들이 근동의 주민들, 특히 페르시아인들과 군사적 및 문화적으로 충돌한 역사이다. 이 일화들에서 헤로도토스는, 합리적인 사람은 심지어 처음에 당연시하는 저것들이 의문시될 것임을 배워한다는 것을

 

a 역주: ‘역사기록학의 원어는 historiography인데 박영태 번역은 역사학이다.

b 역주: ‘메데-페르시아의 원어 표현은 Median-Persian인데 박영태 번역은 중앙 페르시아이다.

 

밝히기 위하여 극단적이고 다소 기괴한 사례를 이용한다.

헤로도토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III, 38): ‘다리우스가 왕이던 어느 때 다리우스는 자신의 궁정에a 있는 그리스인들을 불러서 돈을 얼마나 주면 사망한 그들의 아버지의 시신을 먹을 각오가 되겠느냐고 물었다. 어떤 것도, 그러나 절대적으로 어떤 것도 전혀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유혹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스인들은 답변했다. 그다음에 다리우스는 자신들의 아버지 시신을 먹는 습관이 있던 인도 민족인 칼라티에인들(Kallatiers)을 불러서 통역이 있던 그리스인들의 입회하에 돈을 얼마나 주면 사망한 그들의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하는 데 동의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칼라티에인은 공포의 비명을 지르면서 다리우스에게 그런 불경죄를 심지어 입 밖에 내지도 말아달라고 탄원했다. 저것이 세상의 방식이다.’

이 일화를 자신의 동시대 그리스인들에게 전하면서 헤로도토스는 그들에게 외국의 습관을 존중할 것을 가르치려고 의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당연시하던 것들을 비판할 수 있도록 만들려고 의도했다. 이런 종류의 문화적 대립들을 통하여 그 자신이 분명히 많을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경험을 독자와 공유하기를 원했다.

관습과 전통적인 신화들 사이의 유사점들과 차이점들은 그를 매료했다. 나의 추측이자 나의 가설은, 바로 이 차이점들이 그의 세대들과 후속 세대들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되었고 내가 추측하기에 유럽 문화에 그렇게 결정적인 영향을 물론 많은 다른 중요한 영향들과 함께 미친 저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에서, 오스트리아의 그리고 특히 비엔나의 두드러진 창의성과 문화적 풍요에 대하여 가장 개연적인 설명을 나는 반복적으로 요구받는다: 훌륭한 오스트리아 교향곡 작곡가들의 독보적인 높은 수준의, 우리의 바로크 건축의 그리고 과학에서 및 자연 철학에서 우리의 업적들의 두드러진 창의성과 문화적 풍요에 대하여.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과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는 훌륭한 물리학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선구적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비엔나 학파의 선배들이었다. 사회철학자인 요세프 포퍼-린코이스(Josef Popper-Lynkeus)는 아마도 현대의 복지국가의 철학적 창시자로서 기술될 터인데 역시 이것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곳 비엔나에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관심은 철학적 논쟁에 국한되지만은 않았고 심지어 왕정의 시대에도 몇 가지 두

 

a 역주: ‘궁정의 원어는 court인데 박영태 번역은 법정이다.

 

드러진 실용적인 업적들을 낳았다. 정말로 기적적인 민중의 대학들(People's Universities: Volkshochschulen)’이 있었고, ‘자유학교(Free School) 클럽이 있었는데 그 클럽은 학교 개혁운동의 가장 중요한 씨앗들 중 한 가지가 되었고, 어린이보호 및 구조협회(the Society for the Protection and Salvation of Children)와 응급구호(the Emergency Service)와 노숙자들을 위한 집(the Home for the Homeless) 및 많은 다른 것들과 같은 사회적 구조기관들이 있었다.

이 특수하게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활동과 생산성에 대한 실제적인 설명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잠정적인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아마도 이 오스트리아의 문화적 생산성은 나의 주제와, 다시 말해서, 문화 충돌과 관련된다. 옛 오스트리아는 유럽을 반영했다: 그 오스트리아는 거의 셀 수없이 많은 언어적 및 문화적 소수들을 포함했다. 그리고 지방에서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기가 어렵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최대한으로 독일어를 배워야 했던 비엔나로 이주했다. 많은 사람들은 훌륭한 문화적 전통의 영향을 받고 이곳으로 이주했으며 몇몇은 그 전통에 참신한 기여들을 할 수 있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독일 작곡가와 이탈리아 작곡자들 및 프랑스 작곡가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헝가리의 민속음악과 심지어 터키 음악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 두 사람 모두는, 베토벤과 브람스와 브루크너 및 말러처럼, 비엔나에 새롭게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그 음악가들의 천재성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비엔나에서 태어난 최고의 천재인 슈베르트에게서 천상의 불꽃을 탐지한 사람은 베토벤이었다.

비엔나 음악을 고찰함으로써 아마도 우리는, 하이든에서 브루크너까지의 비엔나와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를 심지어 비교하게 될 것이다.a 그리고 상황은 우리가 처음에 상상하는 것보다 아마도 더 유사했다. 두 도시는 동양과 서양의 극도로 역동적인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에 문화 충돌에 의하여 엄청나게 풍요롭게 되었던 듯하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 consideration of Viennese music might even lead us into drawing a comparison between Vienna from Haydn to Bruckner and Athens in the time of Pericles.인데 박영태 번역은 빈 음악에 대한 고찰은 우리로 하여금 하이든에서부터 브루크너까지의 빈 음악과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 음악 사이의 대조를 이끌어내도록 만든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