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부
자연과학에 관한
문제들
1
과학이론의 논리와 진화*
이 담화에서 내가 제시하고 싶은 핵심적인 관념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될 것이다.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했던 바와 같이 항상 문제들로부터, 어떤 것이 우리에게 경외감을 불어넣는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과학은 상식이 사용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방법인 시행착오의 방법을 사용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철저히 시험하여 거짓 해결책을 틀렸다고 배척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우리가 많은 숫자의 실험적 해결책을 사용하여 연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해결책은 연달아 시험을 당하여 제거된다.
근본적으로 이 절차는 유일한 논리적인 절차인 듯하다. 그것은, 하등생물인 심지어 단세포 아메바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 사용하는 절차이기도 하다. 이 경우에 우리는, 생명체가 고통스러운 문제를 자체로부터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시험적 움직임들을 말한다. 고등생물은, 특정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방법을 시행착오를 통하여 배울 수 있다. 고등생물 또한 시험적 움직임들을 ㅡ 정신적 시험들 ㅡ 실행하며 배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움직임이 발견될 때까지 시험적 움직임들을 연달아 철저히 시험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동물이 발견한 성공적인 해결책을 기대와 그리하여 가설이나 이론과 비교할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의 습성은, 유사한 경우에 동일한 시험적 움직임들이 문제시되는 문제를 다시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함을 (아마도 무의식으로거나 기질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동물의 습성과 식물의 습성 또한, 생명체가 법칙들이나 규칙성들에 조정되
*1972년 3월 7일 북독일 라디오 (NDR: North German Radio)에서 행한 담화.
어 있음을 보여준다. 동식물들은 자체의 환경 속에서 법칙이나 규칙성을 기대하여 나는 이 기대들 대부분이 유전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고 나는 추측하는데 이것은 그 기대들이 선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기대가 어긋났다고 증명되면 동물에게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하여 이것은, 시험적 움직임들인 틀린 기대를 새로운 기대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유발한다.
고등생물이 자체의 기대들에서 너무 자주 실망한다면, 그 고등생물은 무너진다. 그 고등생물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 고등생물은 사멸한다.
시행착오를 통하여 배운 것에 관하여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3단계 모형으로 나는 제시하고 싶다. 그 모형에는 다음 세 가지 단계가 있다:
1 문제;
2 시도된 해결책들;
3 제거.
그래서 이 모형에서 첫 번째 단계는 문제이다. 어떤 종류의 폐해가 ㅡ 선천적인 기대에 대한 폐해나, 시행착오를 통하여 발견되거나 습득된 기대에 대한 폐해 ㅡ 발생할 때 문제는 출현한다.
이 모형에서 두 번째 단계는 시도된 해결책들로 ㅡ 다시 말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들 ㅡ 구성된다.
이 모형에서 세 번째 단계는 실패한 해결책의 제거이다.
다원성(多元性: pluralism)은 이 세 번째 단계에서 필수적이다. 첫 번째 단계인 문제 자체는 단선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는 그렇지 않은데 두 번째 단계를 나는 ‘시도된 해결책들’이라고 복수로 지칭했다. 이미 동물들의 경우에 우리는 시험적 움직임들을 복수로 언급한다. 한 가지 특정 움직임을 시험적 움직임이라고 지칭하는 데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두 번째 단계인 시도된 해결책들은 그리하여 시험적 움직임들이고 그러므로 복수이다; 그 해결책들은 이 모형의 세 번째 단계에서 제거의 과정에 종속된다.
세 번째 단계인 제거는 부정적이다. 제거는 근본적으로 오류의 제거이다. 성공적이지 못하거나 잘못된 해결책이 제거되어도 문제는 미해결된 채로 남아서 새로운 시도된 해결책들을 유발한다.
그러나 시도된 해결책이 결국 성공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 가지 일이 벌어진다. 첫째로 성공한 해결책은 습득된다. 동물 가운데서 이것은 보통, 유사한 문제가 다시 발생할 때 실패한 시험적 움직임을 포함하여 이전 시험적 움직임들이 원래 순서대로 간략하고도 개략적으로 반복됨을 의미한다; 시험적 움직임들은, 성공적인 해결책에 도달될 때까지, 빠르게 시험된다.
학습은, 실패했거나 배척된 해결책이 점점 더 일시적인 참고 수준으로 떨어져서 결국 해결에 대한 성공적인 시도가 남은 거의 유일한 시도로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제거 과정인데, 그 과정은 시도된 해결책들의 다원성에 의존한다.
생명체는 그리하여 새로운 기대를 배웠다고 언급될 것이다. 생명체는 시험적 움직임을 통하여, 그리고 결국 제거되지 않는 최종적인 시험적 움직임을 통하여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생명체의 습성을 기술할 것이다.
우리가 곧 알게 될 것과 같이, 생명체에 의한 이 기대의 발전은 가설들이나 이론들의 형성에서 그 과학적 동질성을 지닌다. 그러나 내가 과학이론의 형성으로 선회하기 전에 나는 내가 주장하는 3단계 모형의 또 다른 생물학적 적용을 지적하고 싶다. 내가 말하는 3단계 모형인,
1 문제;
2 시도된 해결책들;
3 제거는,
다윈의a 진화론의 도식으로서 또한 이해될 것이다. 그 모형은 개별 생명체의 진화에뿐만 아니라 종(種)의 진화에 또한 적용될 수 있다. 이 3단계 모형의 언어로, 환경조건에서나 생명체 내부구조에서의b 변화가 문제를 유발한다. 그것은 종(種) 적응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종(種)은 자체의 유전적 구조 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한다는 조건으로만 생존할 수 있다. 다윈의 견해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의 유전적 장치에는, 유전적 구조에서 변화나 돌연변이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다윈의 이론은, 이 모형과 관련하여, 이 돌연변이들이 2 단계c 시도된 해결책들로서 기능한다고 전제한다c. 대부분의 돌연변이들은 치명적이다: 그 돌연변이들은 돌연변이를 지닌 생명체들에게, 돌연변이들이 발생하는 생명체에게 치명적이다. 그러나 이 모형의 3단계에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돌연변이는 제거된다. 그렇다면 이 3단계 모형에서
a 역주: ‘다윈의’의 원어 표현은 Darwin's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내부구조’의 원어 표현은 inner structure인데 허형은 번역은 ‘본질적 구조’이다.
c 역주: ‘2 단계’의 원어 표현은 as Stage 2인데 허형은 번역은 ‘3단계’이고 ‘전제한다’라는 표현의 원어인 assume은 번역에서 누락되었다.
우리는, 시도된 해결책들이라는 2단계에 대한 본질적인 다원성을 다시 강조해야 한다.a 돌연변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면, 그 돌연변이들은 시도된 해결책들로서 고려될 가치가 없을 터이다. 충분한 돌연변이 가능성이, 우리의 유전적 장치가 기능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우리는 전제해야 한다.
나는 이제 마침내 나의 주제인 과학의 이론이나 논리로 선회한다.
여기서 나의 첫 번째 논지는 과학이란 생물학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과학 이전의b 지식으로부터 출현했다; 과학 이전의 지식은 상식적 지식이 현저하게 지속되는 것으로, 상식적 지식은 반대로 동물 지식의 지속으로서 보일 것이다.
나의 두 번째 논지는, 우리의 3단계 모형이 과학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모두에,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미 본 바와 같이, 과학은 문제들로부터, 본질적으로 매우 평범하지만 과학적인 사색가에게는 문제나 경외감의 근원이 되는 어떤 것에 관한 경외감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언급했다. 나의 논지는, 과학에서 각각 새로운 발전은 이런 방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으로, 과학의 새로운 발전은 문제이거나 문제 상황이라는 (우리가 지닌 축적된 지식의 어떤 상태에서 문제의 출현을 의미하는c) 것이다.
이 요점은 매우 중요하다. 옛 과학이론은, 과학의 출발점이 우리의 지각이나 감각적 관찰이라고 가르쳤고 여전히 가르친다. 이것은 처음에는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설득적으로 들리지만 근본적으로 틀렸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지를 서술함으로써 이것을 쉽게 밝힐 수 있다: 문제가 없으면 관찰도 없다. 내가 당신에게 ‘제발, 관찰하시오!’라고 요구한다면, 언어사용법에 따라 당신은 나에게 ‘네, 그런데 무엇을? 내가 무엇을 관찰해야지요?’라고 답변하면서 되물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자신의 관찰을 통하여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자신에게 정해달라고 나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문제를 제시하지 않고 다만 대상만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이미 중요한 것이지만 전혀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어 내가 당신에게 ‘당신의 시계를 좀 보시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내가 실제로 관찰되기를 원했던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당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n our three-stage model, then, we must again stress the essential pluralism of the second stage of attempted solutions.인데 허형은 번역은 “이렇게 보면, ‘해법들의 시도’에서 다수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이다.
b 역주: ‘과학 이전의’의 원어는 prescientific인데 허형은 번역은 ‘근대과학 이전의’이다.
c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which means the appearance of a problem in a certain state of our accumulated knowledge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신에게 가장 사소한 문제라도 제시하자마자 상황은 달라진다. 혹시 당신은 그 문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당신은 당신의 지각이나 관찰을 통하여 당신이 발견해야 하는 것을 알 것이다. (보기로서 당신은 달이 차는지 기우는지의 문제를, 혹은 당신이 읽고 있는 책이 어느 곳에서 발간되었는지의 문제를 생각할 것이다.)
왜 옛 이론은 과학에서 우리가 문제로부터가 아니라 지각들이나 관찰들로부터 시작한다고 잘못 생각했을까?
이 점에서 과학의 옛 이론은 지식은 상식이라는 관념에 의존했다. 이것은,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전적으로 우리의 감각 인상으로부터 유래함을 말한다.
나는 일반적으로a 상식을 많이 존중한다. 우리가 조금만 비판적이라면, 상식은 가능한 모든 문제 상황에서 가장 귀중하고 의존할만한 조언을 제공한다고 나는 심지어 생각한다.b 그러나 상식은 항상 의존할만하지는 않다. 그래서 과학이론이나 인식론의 문제에서 실제로 상식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감각기관들이 우리 주변의 세상에 관하여 정보를 우리에게 준다는 것과 그런 목적으로 우리의 감각기관들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우리의 지식이 감각 지각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반대로 우리의 감각들은,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생물학적인 특정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형성된 도구이다. 분명히 동물과 인간의 눈은, 발전하여 자신들의 위치를 바꾸어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는 생명체들이 자신들이 피해를 볼지도 모르는 구체적인 대상들과의 위험한 조우에 대하여 충분한 시간을 두고 경고를 받는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발명한 현미경이나 망원경이 그러한 바와 같이, 우리의 감각기관들은 일련의 문제들과 시도된 해결책들의 결과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말하여, 문제가 관찰이나 감각 지각에 선행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찰이나 감각 지각들은, 우리의 시도된 해결책들에 중요한 보조기구이고 그 해결책들을 제거하는 데에 주요 역할을 한다. 내가 주장하는 3단계 모형은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과학의 논리나 방법론에 적용될 수 있다.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generally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 even think that, if we are just a little critical, common sense is the most valuable and reliable counsellor in every possible problem situation.인데 허형은 번역은 ‘우리가 조금만 엄격한 태도를 갖는다면 어떤 문제들 전적으로 상식에만 의존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까지 믿는다.’이다.
1 출발점은 항상 문제이거나 문제 상황이다.
2 그다음에 시도된 해결책들이 뒤따른다. 이 해결책들은 항상 이론들로
구성되고, 이 이론들은 시도들이기 때문에 매우 자주 오류이다: 이
이론들은 가설이나 추측이고 항상 그러할 것이다.
3 과학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실수를 제거함으로써, 즉 우리의 거짓 이론을
제거함으로써 학습한다.
우리의 3단계 모형인,
1 문제;
2 시도된 해결책들;
3 제거는,
그러므로 과학을 기술하는 데 적용될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우리의 핵심적 문제에 다다른다:
인간의 과학에 관하여 무엇이 특징적인가? 아메바와 뉴튼이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 사이의 주요 차이점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과학의 특징이 비판적 방법을 의식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이다; 모형의 3단계인 오류제거 단계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비판적인 방법으로 행동한다.
비판적 방법을 통해서만, 지식의 과학적 형태가 특수하게 빨리 성장하는 것인 과학의 특수한 진보를 설명된다.
모든 과학 이전의 지식은, 동물의 지식이든 인간의a 지식이든, 독단적이다; 그리고 과학은 비-독단적인 비판적 방법을 창안함으로써 시작된다.
여하튼 비판적 방법의 창안은, 비판적 논증들이 형성될 수 있는 기술적인(記述的인: descriptive) 인간 언어를 전제로 한다. 아마도 그 창안은 심지어 글쓰기를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비판적 방법의 본질은, 우리의 시도된 해결책들인 우리가 만드는 이론들과 우리들이 만드는 가설들이 언어로 제시되어 객관적으로 언명될 수 있어서 그것들이 의식적으로 비판적인 연구의 대상들이 되기 때문이다.
겨우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으로 사색되거나 사실적으로 생각되어 기질적으로 심리학적인 구조인 사고와, 언어로 (아마도 또한 글로) 언명되어 그리하여
a 역주: ‘인간의’의 원어는 human인데 허형은 번역은 ‘학습한’이다.
공개된 토론을 위하여 제시되었을 때의 동일한 사고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을 철저히 깨닫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나의 주장은 ‘오늘 비가 올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오늘 비가 올 것이다’라고 동일하지만 말을 하는 명제로의 단계는 매우 중요한 단계로, 말하자면 심연을 뛰어넘는 단계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생각을 표현하는 이 단계가 전혀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것을 언어로 언명한다는 것은 나의 개성, 나의 기대와 아마도 나의 두려움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 이제 객관적으로 제시될 수 있고 그리하여 일반적인 비판적 토론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차이점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또한 아주 크다. 명제는 ㅡ 예를 들어 예언 ㅡ 언어로 언명될 때 나로부터 분리된다. 명제는 나의 기분과 희망과 두려움으로부터 독립적이 된다. 명제는 객관화된다. 명제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실험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지만 또한 실험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찬성론과 반대론은 평가되고 토론된다. 사람들은 예언에 대하여 찬성하고 반대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지식[Knowledge: Wissen]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두 가지 의미 ㅡ 주관적 의미와 객관적 의미의 지식 ㅡ 사이의 중요한 구분에 도달한다. 통상적으로 지식은 주관적이거나 정신적 상태로서 간주된다. ‘나는 안다’의 동사 형태로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은, 아는 것을 특정 종류의 믿음으로서 ㅡ 다시 말해서 충분한 이유들에 의존하는 일종의 믿음 ㅡ 설명한다. ‘지식’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 주관적인 해석은 옛 과학이론에 너무나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사실상 그 해석은 과학이론에 전혀 쓸모가 없는데 이유인즉 과학적 지식은 주관적 기대나 신념이 아니라, 언어로 언명된 객관적인 명제나 가설들과 문제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과학은 인간 정신의 산물이지만 이 산물은 성당이라는 건물만큼 객관적이다. 한 가지 명제가 언어로 표현된 사고라고 언급될 때, 그것은 충분히 사실적이지만 그 명제의 객관성에 충분히 예리하게 집중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사고’라는 단어의 모호성과 연관되어 있다. 철학자 베르나르트 볼차노(Bernard Bolzano)와 (그의 뒤를 이어) 고트로프 프레게(Gottlob Frege)가 특히 강조한 바와 같이, 우리는 사고의 객관적 내용이나 논리적이거나 정보성 내용으로부터 주관적 사고과정을 구분해야 한다. 내가 ‘무하마드의 사상은 부처의 사상과 매우 다르다’고 말한다면 나는 두 사람의 사고과정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교설이나 이론의 논리적 내용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고과정은 인과관계a 속에 놓일 것이다. 내가 ‘스피노자의 이론은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나는 두 사람 사이의 인과적a 관계를 기술하고 있어서 스피노자의 사고과정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스피노자의 이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요점에서 데카르트의 이론과 반대가 된다’고 말한다면 나는 두 이론의 객관적인 논리적 내용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지 사고과정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술의 논리적 내용은 무엇보다도 내가 인간 언어의 객관적 특징을 강조할 때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앞에서, 충분히 명확하게 언급된 사고만이 비판에 부쳐질 수 있다고 말했을 때, 심리학적 사고과정이 아니라 명제의 논리적 내용만이 비판적으로 토론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제 나의 3단계 모형:
1 문제;
2 시도된 해결책들;
3 제거를
상기하고 싶고, 지식이 습득되는 방식에 대한 이 도식이 아메바에서 아인슈타인에게까지 줄곧 적용될 수 있다는 나의 언급을 상기하고 싶다.
차이점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과학이론에 결정적이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시도된 해결책들의 제거인 세 번째 단계에서 나타난다.
과학 이전의 지식발전에서는 제거는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이다: 환경이 우리의 시도된 해결책들을 제거한다; 우리는 제거에서 능동적이지 않고 단지 수동적으로 관련될 뿐이다; 우리는 제거로부터 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제거로b 인하여 우리의 시도된 해결책들이 너무 자주 파괴되거나, 혹은 제거로b 인하여 이전에는 성공적이었던 시도된 해결책이 파괴된다면, 그리하여 제거로b 인하여 시도된 해결책뿐만 아니라 시도된 해결책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 자신이 또한 파괴된다. 이것은 다윈의 선택론의 경우에 분명하다.
과학적 방법과 과학적 접근방식의 결정적인c 참신함은, 우리가 제거에 능동적으로 관심을 갖고 참여한다는 것일 따름이다. 시도된 해결책들은 객관화된다; 우리는 더 이상 개인적으로, 우리의 시도된 해결책들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이 우리가 3단계 모형을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않을지라도, 과학적 접근방식의 참신함은 시도된 해결책들을 우리가 능동적으로 제거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도된 해결책들을 비판에 부치고 이 비판은 우리가
a 역주: ‘인과관계’의 원어 표현은 causal relationships인데 허형은 번역은 ‘임의적 관계’이다.
b 역주: ‘제거’의 원어는 대명사 it인데 허형은 번역은 ‘자연환경’이다.
c 역주 ‘결정적인’의 원어는 crucial인데 허형은 번역은 ‘진정’이다.
이용할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하여 작동한다. 예를 들어 환경이 이론이나 시도된 해결책을 반증할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에, 시도된 해결책에 대하여 환경이 가능한 한 불리한 방식으로, 우리는 환경을 고치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을 시험한다 ㅡ 정말로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을 혹심하게 시험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거짓인 이론들을 발견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아메바가 아인슈타인과 어떻게 결정적으로 다른가라는 질문은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될 것이다.
아메바는 반증(falsification)을 회피한다: 아메바의 기대는 아메바 자체의 한 부분이며, 과학 이전에 기대나 가설을 지닌 생명체는 기대나 가설이 논박을 당하면 흔히 파멸 당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가설을 객관화했다. 그 가설은 아인슈타인과 분리되어서 그는, 그 가설과 함께 파멸되지 않고 비판을 통하여 그의 가설을 파괴할 수 있다. 과학에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가설이 죽도록 만든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의 가설인, 많은 전통적인 과학이론의 지지자들이 모순적으로서 낙인을 찍은 이론에 도달했다. 나의 주요 논지는, 과학 이전의 접근방식으로부터 과학적 접근방식이나 과학적 방법을 구분하는 것은 시도된 반증 (attempted falsification)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모든 시도된 해결책인 모든 이론은, 우리가 그 이론을 시험함에서 가능한 한 엄격하게 시험된다. 그러나 엄격한 시험은 항상, 시험당하는 것에서 약점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이들을 우리가 시험함은 그 이론들의 약점을 탐지하려는 시도이다. 이론을 시험함은 그리하여 이론을 논박하거나 반증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물론 과학자가, 자신의 이론들을 중 한 이론을 반증하면서 항상 행복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학자는 이론을 시도된 해결책으로 제시했고, 이것은 그 이론에는 엄격한 시험을 견디어낼 의도가 있음을 의미한다. 가망이 있는 이론을 반증하는 데 성공한 많은 과학자들은 개인적으로 매우 큰 실망감을 느낀다.
흔히 이론을 반증하는 목적은 과학자의 개인적인 목표가 되지 않을 것이고, 매우 흔히 진정한 과학자는 반증에 대항하여 자신이 큰 희망을 쏟아부은 이론을 옹호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것은 과학이론의 관점에서 철저히 바람직하다; 이유인즉, 달리 어떻게 우리는 망상적 반증으로부터 진정한 반증을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과학에서 말하자면 엄격한 분석을 당하고 있는 여하한 이론에 찬성하고 반대하여, 우리에게는 분파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이성적인 과학적 토론을 할 필요가 있고, 토론이 항상 명백한 해결책을 낳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비판적 접근방식은, 무엇보다도 객관적이고 공개적이고 언어적인 이론들의 언명을 통하여 이룩된, 과학을 현재의 것으로 만드는 결정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편들기와 그리하여 비판적 토론을 유발한다. 흔히 논쟁은,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Niels Bohr) 사이의 유명한 논쟁의 경우에서처럼, 여러 해 동안 해결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모든 과학적 토론이 종결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과학적 진보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나의 주요 논지는, 과학과 과학적 방법의 참신함은 과학 이전의 접근방식으로부터 구별되는데, 그 참신함은 시도된 해결책들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 참신함은 제거 시도에서, 비판하여 반증하려는 시도에서 능동적인a 역할을 한다.
반대로 반증으로부터 이론을 구하려는 시도들에는,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또한 방법론적인 기능이 있다. 그러나 나의 논지는, 의식적으로 반증하려는 노력을 포함하는 비판적 접근방식이 과학을 낳아서 과학적 방법을 지배하는 반면, 그런 독단적 태도가 본질적으로 과학 이전 사고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틀림없이 편들기에는 과학적 방법의 한 기능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생각하기에 개별 과학자가 반증 시도의 토대를 이루는 중요성과 가끔 성공적인 반증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과학적 방법은 (베룰람의 베이컨 [Bacon of Verulam]과 제임스 진즈 경[Sir James Jeans]이 가르친 바와 같이) 누적적(累積的: cumulative)이지b 않기 때문이다; 과학적 방법은 근본적으로 혁명적이다. 과학적 진보는 본질적으로 이전 이론들을 나중 이론들로 대체하는 데 달려있다. 이 새로운 이론들은 옛 이론들이 해결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최소한도 옛 이론들만큼 모든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적어도 뉴튼의 이론만큼, 그리고 혹시 뉴튼의 이론보다 더 잘 행성의 움직임과 일반적인 거시역학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혁명적 이론은 새로운 추정들로부터 시작되어 그 결론에서는 옛 이론을 초월하거나 직접적으로 부정한다. 이 부정으로 인하여, 혁명적
a 역주: ‘능동적인’의 원어는 active인데 허형은 번역은 ‘결정적’이다.
b 역주: ‘누적적’의 허형은 번역은 ‘점진적’이다.
이론은 새로운 이론으로부터 옛 이론을 구분할 수 있는 실험들을 고안할 수
있지만 그 실험들이 두 가지 이론들 중에서 적어도 한 가지 이론을 반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이다. 사실상 실험들을 통하여 살아남는 이론의 우월성이 증명될 것이지만, 그 이론이 지닌 진리가 증명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는 이론은 반대로 곧 따라잡힌다.
이러한 상황을 과학자가 이해하자마자, 과학자 자신은 자신이 선호하는 자신의 이론에 비판적인 태도를 채택할 것이다. 과학자는 자신이 선호하는 자신의 이론을,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기보다는, 자신이 시험하고 싶어 할 것이고 심지어 반증하고 싶어 할 것이다.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한 가지 사례는, 나의 오랜 친구이자 두뇌과학자로 노벨상수상자인 존 에클스 경(Sir John Eccles)이다. 나는 뉴질랜드 더니든(Dunedin)에 소재한 오타고 대학(the University of Otago)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는 존 에클스를 만났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이미 한 신경세포에서 다른 신경세포로 ‘신경접합부의 전달’을 통하여 어떻게 신경자극이 전달되는지의 문제를 실험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헨리 데일 경(Sir Henry Dale)을 중심으로 연구하던 한 학파는 화학적 ‘전달물질’이 (신경세포를 분리하는) 신경접합부를 가로지르고 그리하여 자극을 한 세포에서 다른 세포로 전달한다고 추측했다a. 그러나 에클스의 실험으로 인하여 전달에는 매우 짧은 ㅡ 그의 견해로는 전달물질에게는 너무 짧은 ㅡ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밝혀져서, 그리하여 그는 신경자극과 신경장애 두 가지 모두의 순전히 전기적 전달이라는 이론을 전개했다.
그러나 나는 에클스가 자신을 대변하도록 할 것이다:
1945년까지 나는 과학적 연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전통적인 아이디어를 지니고 있었다 ㅡ 먼저 가설은, 신중하고도 방법론적인 실험자료 수집으로부터 자란다. 이것은 베이컨과 밀(Mill)로부터 유래하는 귀납적 개념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것이 과학적 방법이라고 여전히 믿는다. 둘째로 과학자의 우수성은, 자신이 개발한 더 많은 자료가 축적될수록 상술(詳述)이 틀림없이 필요할 것이지만, 심층적 개념 발전의 확고하고도 안전한 토대로서 존재할 것으로 기대되는 자신이 개발한 가설들에 의하여 판단된다. 과학자는 실험적 자료에 대해 말하여 가설을 일종의 작업용 구조물로서만 간주하기를 선호한다. 마지막이며 이것이 요점이다: 과학자가 새로운 이론에 의하여 반증
a 역주: ‘추측했다’의 원어는 conjectured인데 허형은 번역은 ‘주장했다’이다.
되어 완전히 폐기되어야 하는 가설을 지지한다면 최고로 유감스러우며 실패의 징조이다.
그것의 나의 문제였다. 내가 깨닫게 된 바 폐기되어야 할 가설을 내가 오랫동안 지지해서 나는 그 가설에 대하여 매우 실망해 있었다. 나는 당시 신경접합부의 세포 간 전달이 주로 전기적이라고 믿어서 신경접합부에 관한 논쟁에 관여했다 {...}. 나는, 뒤에 나온 느린a 화학적 요소를 인정했지만 나는 신경접합부를 가로지르는 빠른 전달은 전기적이라고 믿었다.
당시 나는 포퍼로부터 자신의 가설이 반증 당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불명예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내가 오랜만에 들은 최고의 뉴스였다. 자극적이고 장애적인 신경접합부적 전달이라는 나의 전기적 가설을 반증될 정도로 그렇게 정확하고 엄격하게 언명하라고 나는 사실상 포퍼에 의하여 설득당했다 ㅡ 그리고 사실상 그것이 몇 년 후에 나의 가설들에 발생했는데, 1951년에 우리가 운동뉴런(motoneurones)으로부터 세포내부를 기록하기 시작할 때 주로 나의 동료들과 내 자신에 의해서였다. 포퍼가 나를 지도한 덕택에 나는 내가 거의 20년 동안 길렀던 발명품의 이 죽음을 즐겁게 수용할 수 있었고 나의 최선을 다하여 데일(Dale)과 뢰비(Loewi)의 발명품이던 화학적 전달론에 즉각적으로 기여할 수 있었다.
나는 마침내 과학적 방법에 관한 포퍼의 커다란 해방적인 힘을 경험했다.
기묘한 뒷이야기도 있다. 신경접합부의 전달에 관한 전기적 가설을 내가 완전히 폐기하면서 내가 너무 성급했음이 밝혀졌다. 내가 연구하던 많은 형태의 신경접합부는 분명히 화학적이었지만, 지금은 많은 전기적 신경접합부가 알려졌고, 신경접합부에 관한 나의 저서에서는 {에클스, 1964년} 자극적이고 장애적인 전기적 전달에 관한 두 가지 장(章)이 있다!’b
에클스 및 데일 두 사람 모두가 신경 연구에 대한 자신들의 선구적인 이론들에서 그 연구를 잘못 이해하고 있음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연구가 모든 신경접합부에 유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데일의 이론은 두 사람이 연구하던 당시의 신경접합부에 유효하지만 에클스의 이론처럼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었다. 데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인식한 적이 없었던 듯하다; 그들은 에클스에 대한 승리를 너무 확신해서 두 진영 모두 동일한 (이른바) 죄악을 저질렀음을 깨닫지 못했다: 즉, (그럼에도
a 역주: ‘뒤에 나온 느린’의 원어 표현은 late, slow인데 허형은 번역은 ‘느린’이다.
b 역주: 존 에클스의 글 원문에 인용부호가 뒷부분에는 있으나 시작 부분은 없다. 원문에 누락된 듯하다.
불구하고 적용될 수 없는) ‘모든 관련 자료를 기다리지 않은 성급한 일반화’.
자신의 노벨상 전기(傳記)의a 다른 곳에서 에클스는 이렇게 기술한다: ‘이제 나의 발명품으로 내가 간직하던 가설이 반증됨에 나는 심지어 기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반증은 과학적인 성공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요점은 극도로 중요하다. 우리는 반증을 통해서 전체 사물을 배우고 있다. 우리는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왜 그 이론이 틀렸는지를 배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새롭고도 더 날카롭게 조명된 문제를 얻는다; 그리고 새로운 문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과학에서 새로운 발전을 위한 실제로 출발점이다.
여러분은 내가 그렇게 자주 나의 3단계 모형을 언급해서 아마도 놀랐을 것이다. 나는 부분적으로 여러분이 매우 유사한 4단계 모형에 대비하도록, 그렇게 하는데 4단계 모형은 과학과 과학적 발전 역학의 전형이다. 4단계 모형은 우리의 3단계 모형으로부터 (문제, 시도된 해결책들, 제거) 도출될 것인데 이유인즉 우리가 실행하는 것은 첫 번째 단계를 ‘옛 문제’ 그리고 네 번째 단계를 ‘새로운 문제들’로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아가 ‘시도된 해결책들’을 ‘잠정적 이론들’로, 그리고 ‘제거’를 ‘비판적 토론을 통한 시도된 제거’로 대체한다면 우리는 과학이론의 특징인 4단계 모형에 도달한다.
그래서 그 모형은 다음과 같다:
1 옛 문제;
2 잠정적 이론들의 형성;
3 실험적 시험을 포함한, 비판적 토론을 통한 제거 시도들;
4 우리의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으로부터 출현하는 새로운 문제들.
나의 4단계 모형으로 인하여 일련의 과학적 요점 전체가 만들어진다.
문제에 관하여. 과학 이전 문제들 및 과학적 문제들은 본질적으로 처음에 실용적이지만, 4단계 순환작용을 통하여 그 문제들은 곧 적어도 이론적 문제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대체된다. 이것은, 대부분의 새로운 문제들이 이론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현함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새로운 문제들은 이론의 내부에 있다. 이것은 이미 헤시오드(Hesiod)의 우주기원론 속의 문제에서도 사실이고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지녔던 문제들에서는 훨씬 더 사실이다b; 그리고 그것은, 현대 자연과학 속의 대부분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사실
a 역주: ‘노벨상 전기’의 원어 표현은 Nobel Prize biography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이다. 문제들 자체는 이론들의 산물이고, 비판적 토론이 이론들 속에서 밝히는 난제들의 산물이다. 이 이론적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설명들이나 설명적 이론들에 관한 문제들이다: 이론들에 의하여 제시되는 잠정적 해답들은 사실상 시도된 설명들이다.
실용적 문제들 가운데에, 우리는 어떤 것을 예측하는 문제들을 포함시킬 것이다. 그러나 순수 과학의 지적(知的) 관점에서 보면 예측들은 3단계에 ㅡ 비판적 토론 및 검토의 단계에 ㅡ 속한다. 예측들은, 그 예측들로 인하여 우리가 실제로 그리고 실제 세상에서 우리의 이론들이나 시도된 설명들의 유효성을 검사할 수 있기 때문에, 지적(知的)으로 흥미롭다.
우리의 4단계 모형으로부터 우리가, 과학에서 옛 문제들의 순환 한 가운데서 시작하여 반대로 새로운 순환을 위한 출발점으로서 기능하는 새로운 문제와 동시에 끝남을 우리는 또한 알 수 있다. 우리의 모형이 지닌 순환적이거나 주기적인 특징 때문에 우리는 4단계의 여하한 단계에서도 출발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모형의 2단계인 이론들로써 시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과학자는 옛 이론으로부터 시작하여, 비판적으로 그 이론을 토론하여 제거함으로써, 그다음에 과학자가 새로운 이론들을 통하여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문제들에 도달한다. 정확하게 순환적 특징 때문에 이 해석은 완벽하게 만족스럽다.
또한 그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은, 우리가 만족스러운 이론들의 창조를 과학의 목표로서 기술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론이 만족스럽다고 간주되는 상황의 문제는 출발점으로서의 문제로 곧장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분명히 우리가 이론에게 요구하는 최초의 사항은 그 이론이, 문제를 구성하는 난제들을 해명함으로써, 설명이 필요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이론들을 제거하거나 근절하는 것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이론의 붕괴로부터 시작한다고 항상 언급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붕괴, 이 제거는 제거된 이론을 더 나은 이론으로 대체하는 문제를 낳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제를 출발점으로 선호하지만, 모형의 순환적 특징으로 인하여 여하한 단계가 새로운 발전을 위한 출발점으로 간주될 수 있음을 나는 잘 인식하고 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is already true of the problems in Hesiod's cosmogony, and still more of the problems of the Greek pre-Socratic philosophers인데 허형은 번역은 ‘헤시오드가 노래한 우주의 기원에 담긴 문제들은 물론이거니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문제들도 그러했다’이다.
새로운 4단계 모형의 결정적인 특징은 그 모형이 지니는 역동적인 특성이다. 각 단계는, 말하자면, 다음 단계로 진행하려는 내부의 논리적 동기를 포함한다. 과학은, 이 논리적 개괄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현상이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역동성이지 종결된 것이 아니다; 과학이 최종적으로 자체의 목표에 도달하는 지점은 없다.
내가 문제를 출발점으로서 선호하는 또 다른 이유가 또한 있다. 옛 문제와 그 후속편인 새로운 문제 사이의 거리는 내가 보기에, 옛 이론들과 그 옛 이론들을 대체하는 다음 세대의 새로운 이론들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더 인상적인 과학적 진보의 특징이다.
중력에 관한 뉴튼과 아인슈타인의 이론들을 보기로 들자. 두 가지 이론 사이의 거리는 크지만, 뉴튼의 이론을 아인슈타인의 언어로, 소위 텐서 미적분(tensor calculus)의 형식주의로 번역이 가능하다. 그래서 누가 이렇게 한다면 ㅡ 예를 들어 피터 하바스 교수(Professor Peter Havas)가 행한 바와 같이 ㅡ 그 사람은 두 이론 사이의 차이점은 단지 중력파의 유한 속도 안에, 그리하여 유한 광속 c 안에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하바스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설명하여, 중력파의 유한 속도 c를 무한 속도로 대체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뉴튼의 이론과 동일하게 되었음을 언명하는 데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그 이론에 의하여 이룩된 전체 진보가, 중력파의 유한 속도에 놓여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기만적일 터이다.
우리가 뉴튼의 이론에 대한 비판자들에 (예를 들어 에른스트 마흐 [Ernst Mach]) 의하여 발견된 문제들을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한 비판자들에 (주로 아인슈타인 자신) 의하여 발견된 문제들과 비교한다면, 진보에 대한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특징이 훨씬 더 명료해진다고 나는 주장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옛 문제들을 새로운 문제들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엄청난 거리인 엄청난 진보를 안다. 사실상 옛 문제들 중 한 문제만이 미해결인 소위 마흐의 원리에 대한 설명으로 남았다. 이것은, 우리가 무거운 질량의 관성을 멀리 떨어진 우주 질량의 효과로서 상상하라는 요구이다.a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이것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해서 매우 실망했다. 사실상 그의 중력이론은, 관성을 중력의 결과로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에서 질량을 없앤다면, 그 이론은 특수상대성 이론으로 붕괴하고 관성은 심지어 질량에 의하여 야기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a 역주: 이 문장에는 원문에 없는 ‘마흐의 원리는 실험실 안에서 발견되는 자연의 법칙은 우주 전체의 상태와 대응한다는 원리인데’가 허형은 번역에 추가되었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이것을 자신의 이론이 지닌 주요 결점 한 가지로 보았
다. 그리고 마흐의 원리를 중력이론에 통합시키는 문제는, 이 분야에서 반세기 동안 모든 과학자들을 사로잡았다.
이것들과 같은 이유들로 인하여, 우리의 4단계 모형을 문제로 시작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 더 나을 듯하다. 아무튼 그 모형은, 과학 이전의 발전과 비교하여 과학의 역동적 발전에서 새로운 것을 ㅡ 즉, 언어와 글쓰기와 비판적 토론의 발명을 통한 제거과정에 대한 우리의 능동적 참여 ㅡ 보여준다. 나의 주요 논지는, 과학이 비판적 토론의 발명을 통하여 출현했다는 것이다.
나의 주요 논지로부터 도출된 중요한 결론은, 경험적 과학이론들이 다른 이론들과 어떻게 다른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것 자체는, 경험적 과학 문제가 아니라 이론적 과학 문제이다; 그것은, 과학의 논리나 철학에 속하는 문제이다. 해답은 나의 주요 주장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경험적 과학이론은 다른 이론들과 다른데 이유는 경험적 과학이론이 가능한 실험적 결과들에 의하여 무효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실제로 그 결과들을 얻는다면 이론을 반증할, 가능한 실험적 결과들이 기술될 수 있다.
경험적 과학이론들을 다른 이론들로부터 구분하는 문제를 나는 ‘구획설정( demarcation) 문제’라고 불렀고 내가 제시한 해결책을 ‘구획설정의 기준’이라고 불렀다.
구획설정에 대하여 내가 제시한 해결책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구획설정의 기준이다. 이론은 그 이론이 가능한 경험들에 위배되고 그리하여 원칙적으로 경험에 의하여 반증될 수 있다는 조건이나 조건만으로 경험적 과학의 한 부분이다.
나는 이 구획설정의 기준을 ‘반증가능성의 기준’으로 지칭하였다.
반증가능성 기준은 많은 이론들에 의하여 예시될 것이다. 예를 들어 예방접종이 천연두를 예방한다는 이론은 반증될 수 있다: 실제로 예방접종을 받은 누군가가 천연두에 걸린다면 그 이론은 반증된다.
이 사례는. 반증가능성 기준에도 자체의 문제가 있음을 증명하는 데 또한 이용될 것이다. 예방접종을 받은 백만 명 중에서 한 사람이 천연두에 걸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론이 반증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예방접종이나 백신 물질에 문제가 있었다고 추정할 것이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그런 도피로는 항상 가능하다. 우리가 반증에 직면할 때, 우리는 항상 이런저런 방식으로 변명하여 모면할 수 있다; 우리는 부수적 가설을 도입하여 반증을 거부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가능한 반증에 대비하여 우리의 이론들에게 ‘면역력을 주입’할 수 있다 (한스 알베르트 교수 [Professor Hans Albert]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렇다면 반증가능성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항상 간단하지는 않다. 그러나 반증가능성에는 정말로 가치가 있다. 그 적용이 항상 철저하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반증가능성은 천연두 예방접종 이론에 적용될 수 있다. 천연두에 걸리는 예방접종을 받은 사람들의 한 부분이, 천연두에 걸리는 예방접종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부분과 대략 동일하다면 (또는 혹시 보다 훨씬 더 크다면), 모든 과학자들은 백신 보호라는 이론을 포기할 것이다.
이 경우를 내가 생각하기에 반증될 수 없는 이론의 경우와 비교하자: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 분명히 이 이론은 원칙적으로 우리가 그 이론에 위배되는 어떤 인간의 행동을 기술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시험될 수 있을 것이다. 행동에 관하여 그렇게 반증 가능한 이론들이 있다: 예를 들어 장수했고 항상 정직했던 사람은, 자신의 재정적 상황이 안전하다면, 늙어서 갑자기 도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틀림없이 반증될 수 있고, 나는 여기저기서 반증하는 사례들이 정말로 발생하여 그 이론은 방금 주어진 언명에서 거짓일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론과 대조적으로, 정신분석을 반증할 수 있다고 상상될 수 있는 인간의 행동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면, 혹은 그가 오랜 친구의 생명을 위협한다면 ㅡ 여하한 특수한 인간행동을 우리가 혹시 상상할지라도 ㅡ 그것은 정신분석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다. 원칙적으로 정신분석은 가장 기묘한 인간 행동도 항상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은 경험적으로 반증될 수 없다; 정신분석은 시험이 불가능하다.
나는 프로이트가 올바른 통찰을 많이a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의 이론이 경험적 과학이 아니라고, 그의 이론은 엄격하게 시험될 수 없다고b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예방접종 사례와 같은 이론들과 대조되지만, 무엇보다도 물리학과 화학 및 생물학에서의 이론들과 대조된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 이래 뉴튼의 역학이, 탁월한 근사치라 할지라도, 거
a 역주: ‘올바른 통찰을 많이’의 원어 표현은 many correct insights인데 허형은 번역은 ‘정확한 통찰력(을 보여주지)’이다.
b 역주: ‘엄격하게 시험될 수 없다고’의 원어 표현은 strictly untestable인데 허형은 번역은 ‘검증이 완전히 불가능하다’이다.
짓이라고 생각할 이유들이 우리에게 있다. 아무튼 뉴튼의 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이론 모두, 물론 면역화 전략으로써 변명으로 반증을 모면하는 일이 항상 가능하다 할지라도, 반증될 수 있다. 상상 가능한 인간의 행동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부정하지 않을지라도, 그 탁자가 여기저기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탁자의 행동은 뉴튼의 이론을 부정할 것이다. 나의 탁자 위에 있는 가득 찬 찻잔이 별안간 춤을 추고 돌고 방향을 튼다면 ㅡ 특히 모든 회전과 방향틀기의 결과로서 차가 쏟아지지 않는다면 ㅡ 뉴튼의 이론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우리는, 물리적 물체의 편에서 상상 가능한 행동 전체에 역학이 반대가 된다고 ㅡ 상상 가능하지 않은 인간행동에 반대가 되는 정신분석과 전혀 다르게 ㅡ 말할 것이다.a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 자체는, 뉴튼 역학이 거의 상상 가능하게 위반된다면 영향을 받을 것인데, 정확한 이유는 뉴튼의 역학이 아인슈타인의 역학에 그렇게 훌륭하게 근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다가 아인슈타인은, 관찰되면 뉴튼의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이론을 반증할 경우들을 특히 탐색했다.
아인슈타인은 예를 들어 시리우스(Sirius) 항성의 위성들이나 백색왜성의 스펙트럼에서 자신이 예언한 적색편이(赤色偏移: redshift)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자신은 자신의 이론이 반증된 것으로서 여겼으리라고 기술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 자신이 자신의 중력이론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실험적 시험 한 가지도 (모든 시험을 그가 제안했다) 자신의 이론에 비호의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는 이론적인 이유를 근거로 그 이론이 완벽하게 만족스럽지는 않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자연과학에서의 모든 이론처럼, 해결책에 대한 임시적 시도였고 그리하여 가설적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완벽하게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더 세부적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불완전한 것으로서 자신의 연구 프로그램에 대하여 부적합한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는 이유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는, 합당한 이론이 충족해야 할 요건들을 목록으로 만들었
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원래 중력이론에 대하여 주장했던 것은, 추구된 이론
a 역주: 이 문장에 ‘우리는, 물리적 물체의 편에서 상상 가능한 행동 전체에 역학이 반대가 된다고 말할 것이다’의 원어 표현은 One may say that mechanics stands in contradiction to a whole host of imaginable behaviour on the part of physical bodies ㅡ quite unlike psychoanalysis, which stands in contradiction to no conceivable human behaviour.인데 허형은 번역은 ‘이 가상의 상황에서 작용하는 메커니즘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의 있을 법한 움직임에 작용하는 메커니즘에 위배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떠한 상상 가능한 인간행동에도 모순되지 않는 정신분석이론과는 사뭇 다르다.’이다.
에서 그 이론이 뉴튼의 이론보다 나은 근사치를 표현하고 그리하여 진리에 나은 근사치를 표현한다는 것이었다.
진리에 대한 근사치라는 개념은, 내가 생각하기에, 과학이론에서 가장 중요
한 개념 중 하나이다. 그 개념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경쟁하는a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이 과학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비판적 토론은 특정 가치들에 의하여 규제를 받는다. 비판적 토론에는 규제적 원칙이나, 칸트의 용법으로, 규제적 개념이 필요하다.
경쟁하는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을 통제하는 규제적 개념들 가운데는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첫째로 진리 개념이다; 두 번째로 이론의 논리적이고 경험적인 내용이라는 개념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론의 진리 내용과 이론의 진리근사치라는 개념이다.
진리의 개념이 비판적 토론을 통제한다는 것은, 우리가 거짓 이론들을 제거하려는 희망으로 이론을 비판적으로 토론한다는 사실로부터 알려질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참된 이론들을 탐색한다는 개념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밝혀진다.
두 번째 규제적 개념은 ㅡ 이론의 내용이라는 개념 ㅡ 높은 정보성 내용을 지닌 이론들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항진명제들(恒眞命題들: tautologies)이나 12 x 12 = 144와 같은 사소한 산술적 명제들에는 내용이 없다: 그것들은 경험-과학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어려운 문제들은, 높은 논리적이고 경험적 내용을 지닌 이론들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그 내용의 규모는, 이론이 지닌 대담성으로서 기술될 것이다. 우리가 이론으로써 주장을 많이 할수록 그 이론이 거짓일 위험은 더 커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지만 우리는 오직 대담하고 위험한 진리에만 흥미를 지닌다. 높은 논리적 내용을 지닌 대담한 이론들의 사례들이, 다시 한 번 뉴튼과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이고 원자들에 대한 양자이론이고 유전암호에 대한 이론인데 그 이론은 유전에 관한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한다.
이런 이론들과 같은 대담한 이론들에는, 고차원적인 내용이 ㅡ 다시 말해서 논리적으로 수준이 높고 경험적으로 수준이 높은 내용 ㅡ 있다.
내용에 대한 이 두 가지 개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것이다. 이론이 지닌 논리적 내용은 그 이론의 결과들의 집합, 다시 말해서, 문제의 이론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모든 명제들의 ㅡ 결과들이 많을수록 더 수준이 높은 ㅡ 집합이다.
a 역주: ‘경쟁하는’의 원어는 competing인데 허형은 번역은 ‘상반되는’이다.
훨씬 더 흥미로운 것은 아마도 이론이 지닌 경험적 내용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하여, 경험적 자연법칙이나 경험적 이론이 특정 관찰 가능한 사건들을 배제한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하자.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이론은 흰 까마귀의 존재를 배제한다; 그리고 흰 까마귀가 관찰되면 그 이론은 반증된다.) 그러나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여하한 관찰 가능한 사건도 배제하지 않는다. 그 정신분석의 논리적 내용은 틀림없이 높지만, 그 정신분석의 경험적 내용은 전혀 없다.
이론이 지닌 경험적 내용은 그리하여, 그 이론에 의하여 배제된 경험적 명제의 집합으로 기술될 것이다 ㅡ 그러나 그것은 이론을 부정하는 경험적 명제의 집합을 의미한다.
매우 간단한 예시를 들어보자. 흰 까마귀는 없다는 이론은 ‘여기에 흰 까마귀가 있다’는 진술을 부정한다. 그 이론은, 말하자면, 흰 까마귀의 존재를 배제한다.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이론에는 훨씬 더 큰 경험적 내용이 들어있다. 그 이론은 흰 까마귀뿐만 아니라 푸른 까마귀, 녹색 까마귀, 그리고 붉은 까마귀를 또한 배제한다: 배제된 명제들의 집합이 훨씬 더 크다.
어떤 이론을 부정하는 경험적이거나 관찰적인 진술은, 문제의 이론에 대한 가능한 반증이나 잠재적 반증자로서 기술될 것이다. 가능한 반증이 실제로 관찰된다면 그 이론은 경험적으로 반증된다.
‘여기에 흰 까마귀가 있다’는 진술은 그리하여, 흰 까마귀는 없다는 낮은 내용을 지닌 이론과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높은 내용을 지닌 이론 양쪽 모두에 대하여 가능한 반증이다.
‘1972년 2월 10일 녹색 까마귀가 함부르크에 있는 동물원에 전달되었다’는 진술은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이론에 대한 잠재적 반증자이지만, 또한 모든 까마귀는 붉거나 푸르다는 이론에 대한 잠재적 반증자이다. 그런 진술인 그런 잠재적 반증자가 관찰을 토대로 참으로서 수용된다면, 그런 진술이 반증자가 되는 모든 이론들은 실제로 반증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론이 그만큼 더 많이 말을 할수록 그 이론에 대한 잠재적 반증자가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론이 더 많이 말을 하여 더 많은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 이론이 지닌 설명적 잠재력이나 이론이 지닌 잠재적 설명력이 더 크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뉴튼의 중력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을 다시 한번 비교할 것이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지닌 경험적 내용과 잠재적인 설명력이 뉴튼의 이론이 지닌 그것들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튼의 이론이 기술하는 모든 종류의 움직임, 특히 행성의 궤도뿐만 아니라 중력이 빛에 미치는 영향도 ㅡ 뉴튼이 자신의 중력이론이나 광학에서도 언급한 것이 없었던 문제 영역 ㅡ 기술한다. 그리하여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더 위험하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원칙적으로 뉴튼의 이론을 건드리지 않는 관찰들에 의하여 반증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지닌 경험적 내용인 잠재적 반증자의 양은, 그리하여 뉴튼의 이론이 지닌 경험적 내용보다 상당히 더 크다. 마지막으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지닌 잠재적 설명력은 단연코 훨씬 더 크다. 예를 들어 시리우스 행성의 위성 스펙트럼 안에 아인슈타인이 예측한 적색편이(赤色偏移: redshift)와 같은 그런 광학적 효과들이 관찰들에 의하여 확인됨을 우리가 수용한다면, 이 광학적 효과들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해서도 또한 설명된다.
그러나 관련된 관찰들이 이룩되지 않았을지라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잠재적으로 뉴튼의 이론보다 우월하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는 더 큰 경험적 내용과 더 큰 설명적 잠재력이 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이론적으로 더 흥미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튼의 이론보다 훨씬 더 큰 위험에 놓여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정확하게 그 이론에 대한 잠재적 반증자들이 더 많기 때문에, 훨씬 더 반증 당하기 쉽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튼의 이론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시험될 수 있는데 뉴튼의 이론 자체는 이미 매우 엄격하게 시험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이 시험들을 견디어낸다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자체의 패기를 증명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 이론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이론이 나중의 시험에서 반증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론이 지닌 경험적 내용뿐만 아니라 그 이론이 지닌 진리 내용 또한 뉴튼 이론보다 더 크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참인 진술의 숫자가 뉴튼의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숫자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나아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실험적 시험의 결과를 완전히 이용하는 비판적 토론에 비추어, 더 나은 진리에 대한 근사치로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한 근사치라는 개념은 ㅡ 규제적 원리로서의 진리라는 개념처럼 ㅡ 세상에 대한 실재론적 관점을 전제로 한다. 그 개념은, 실재성이 우리의 과학이론이 그 실재성을 기술하는 것과 같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개념은 실재성이 있다는 것과 우리 및 우리의 이론들이 ㅡ 우리 자신이 창조한 아이디어들이어서 항상 이상화된 것들인 ㅡ, 우리가 시행착오의 4단계 방법을 사용한다면, 실재성에 대한 합당한 기술에 점점 접근할 수 있음을 정말로 전제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운이 좋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구상에서 발견하는 상황으로 인하여 생명체가 가능하고 또한 인간의 언어발전과 인간의 의식발전 및 인간의 과학발전이 가능한데, 과학이 기술하는 바와 같은 것으로부터 우주가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우주에서는 그 상황이 극도로 드물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과학에 따르면, 그 우주는 물질이 거의 없고 주로 혼란스러운 방사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우주가 비어있지 않은 극소수의 장소에서는 그 우주가 통상적으로 분자형성을 위해서는 너무 뜨겁거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은 생명체 형태의 발전을 위해서는 너무 추운 혼란스러운 물질로 채워져 있다.
우주의 다른 곳에 생명체가 있든 없든, 우주론적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완벽하게 특이해서 특수하게 드문 현상이다. 그리고 생명체의 발전에서, 비판적 과학 방법은 또한 특수하게 드문 ㅡ 확률계산으로도 거의 무한히 개연성이 없는 ㅡ 발전이다. 이것은, 생명체와 과학이 존재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횡재를 했음을 의미한다.
세상에 대한 실재론적 관점은, 진리에 대한 근사치라는 개념과 함께, 내가 보기에 과학이 지닌 영속적으로 이상화하는(理想化하는: idealizing) 특징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하다. 게다가 세상에 대한 실재론적 관점은 내가 보기에 유일한 인간의 세계관이다: 그 관점만이, 우리처럼 살면서 고통을 당하고 죽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과학은 인간의 아이디어들의 산물로 이루어진 체계이다 ㅡ 지금까지 관념론은 옳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들은 실재에 대비하여 시험을 당할 때 실패하기 쉽다. 이것이 실재론이 종국적으로 옳은 이유이다.
이 실재론에 관한 언급 및 실재론과 관념론 사이의 논쟁으로 인하여, 나의 주제 밖으로 내가 잠시 나간 듯이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ㅡ 그 반대이다. 실재론 논쟁은 양자역학에서 크게 화제가 되고 그리하여 오늘날 과학철학에서 매우 새롭고도 많이 논의되는 문제들 중 하나이다.
지금은 내가 이 문제에 대하여 중립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나는 전적으로 실재론의 편에 선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영향력이 있는 관념론적 학파가 있다. 사실상 상상 가능한 모든 관념론적 기미가 보이며, 어느 유명한 양자 물리학자는 양자물리학으로부터 유아론적(唯我論的: solipsistic) 결과들을 도출하기도 했다; 그는, 이 유아론적 결과들이 양자역학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
내가 답변으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렇다면, 아무리 양자역학이 탁월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양자역학이 실재에 대한 근사치로서 탁월할지라도, 틀림없이 양자역학에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은 예외적으로 엄격한 시험을 견디어냈다. 그러나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실재론자라는 조건에서만, 진리에 대한 양자역학의 근사치에 관하여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
과학이론에서 실재론과 객관론에 관한 갈등은, 미래에도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해결되지 않고 화제가 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또한, 잘 언급된 바와 같이, 어떤 의미에서 과학이론이 자체를 초월하게 만드는 문제이다. 이 근본적인 문제에 관하여 내가 나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명백하게 밝혔기를 나는 희망한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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