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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체는 문제해결 중이다, 1부 3장 인식론과 평화의 문제

이윤진이카루스 2021. 2. 18. 06:18

모든 생명체는 문제해결 중이다. I부 3장 인식론과 평화의 문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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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식론과 평화의 문제*

 

 

 

 

I

 

예기치 않게 여기서 많은 젊은이들을 보고 나는 매우 행복하다고 내가 말할까? 나는 여러분들과 아주 길고도 모험적인 여행을 떠맡을 계획이어서 아마도 나는 먼저 나 자신을 소개해야겠다.

오늘 83세의 나이에, 나는 최고로 행복한 사람임을 나는 안다. 나는 삶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것을 안다. 삶이란 의심할 바 없이 지독해서, 나는 나의 가까운 친척들과 친구들 가운데서 고통스럽게 슬픈 죽음들을 경험했다. 나의 가까운 친척들 중에서 16명이 히틀러에 의하여 희생되었는데 몇몇은 아우슈비츠에서, 몇몇은 자살로 죽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차례 이상 자포자기 상태였고 여전히 오늘날에서 중대한 걱정거리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고 내가 잠깐 행복했다가 다음 순간에 불행했지만, 나는 행복하다.

나는 나의 자신에게 더 많은 시간을 쓰지 않겠다. 내가 느끼는 것은, 괴테의 파우스트(Faust)의 천상의 서곡(Prologue in Heaven)의 첫 번째 8행에서 잘 서술된다. 나는, 그가 보는 것처럼 세상을 본다:

 

Die Sonne tönt nach alter Weise

In Brudersphären Wettgesang,

Und ihre vorgeschriebne Reise

Vollendet sie mit Donnergang.

Ihr Anblick gibt den Engeln Stärke,

Wenn keiner sie ergründen mag:

 

* 19858월 취리히에서 개최된 강좌.

 

Die unbegreiflich hohen Werke

Sind herrlich wie am ersten Tag.

 

지식인들 가운데서 현재 우세한 이념들이 우리 세상의 사악함에 대한 어리석음이고 거짓 종교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이 모든 것을 말한다. 사람들에게는 제안이 몹시 필요하고, 제안에 대한 이 위험한 필요성이 오늘 나의 주요 주제들 중 한 가지 주제이다. 나의 주제는 크다. 나는 열심히 연구했지만, 가능한 한 그 주제를 간단하게 기꺼이 제시한다. 내가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음을 나는 우려하여, 나는 여러분의 능동적인 협조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제안하는 여하한 것도 여러분이 믿지 말 것을 요청한다! 한 마디의 말도 믿지 말라! 나는, 가능한 한, 진실만을 잘 이야기하겠기 때문에 저것이 너무 많은 요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나는 알지 못하거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알지 못하거나 거의 알지 못한다. 저것이 삶의 기본적인 사실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짐작한다. 우리가 지닌 최고의 지식은, 우리가 2,500년에 걸쳐서 구축한 탁월한 과학적 지식이다. 그러나 자연과학들은 정확하게 추측들이나 가설들로 구성된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영어 및 독일어에는

 

(1) Wissen {지식knowledge} Vermutung {추측conjecture}

ich weiss {나는 안다I know} ich vermute {나는 추측한다

I conjecture}

 

뚜렷이 구분된다.

 

그 구분은 아주 간단하다:

 

(2) Wissen확실한(certain) 진실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Wissen확신성(sureness)이나 확실성(certainty)

암시한다.

 

이 언어들로 여러분은 진지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것을 나는 알지만 나는 전적으로 확신하지 못한다.’ 답변은 다음과 같은 터이다: ‘당신이 전적으로 확신하지 못한다면, 당신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추측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나의 첫 번째 논지는 다음과 같다:

(3) 소위 과학적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이유인즉 과학적 지식은 추측들이나 가설들로 그 추측들이나 가설들 중 몇몇이 독창적인 시험들의 십자포화를 통과했을지라도 구성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4)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짐작한다. 과학적 지식이 지식은 아닐지라도, 과학적 지식은 우리가 이 분야에서 지닌 최고의 지식이다. 나는 과학적 지식을 추측성 지식이라고 확실한 지식을 원하고 자신들이 그 지식 없이는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다소 위로하기 위하여 부른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제안이 위험스럽게 필요한데 그들에게는, 확신 없이, 확실성 없이, 권위 없이, 지도자 없이 살아갈 용기가 결여되어 있다. 아마도 우리는, 그런 사람들은 여전히 어린 시절에 빠져있다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구들이나 절친한 친구들이 필요하거나, 자신들이 모범이나 특수한 것을 이룩한 사람들로서 존경하는 사람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병든 사람을 돌보고 있다면, 그들은 흔히 권위자를 (의학적 권위자) 갈망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권위자는 없다; 이유인즉 지식은 확실한 지식 공허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진리 추구이다. 그러나 진리는 확실한 지식이 아니다.

 

(5) 진리 확실한 지식

진리 확실성.

 

무엇이 진리인지 누구나 안다. 진리는, 명제가 중요한 것을 말하는 실재에 명제가 대응하는 것이다:

 

(6) 진리 = 실재에 대한 대응, 혹은 아마도

진리 = 실제적 사실들에 대한 주장되는 사실들의 대응a.

 

그러나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단어들에 대한 사소한 논쟁은 위험하다.

(7) 우리는 충분히 자주 진리를 주장할 수 있고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a 역주: ‘실제적 사실들에 대한 주장되는 사실들의 대응의 원어 표현은 correspondence of the alleged facts with the actual facts인데 허형은 번역은 실제의 사실을 바탕으로 추정된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확실성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이유인즉 자신들이 아인슈타인이라고 혹은 괴테가 환생한 것이라는 망상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추측성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바로 지금 취리히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고 내가 말할 때 나는 아마도 진리를 말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내가 유사하게 지독한 어떤 오류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고 나는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못한다.

이제 오직 절대적인 확실성만 진정한 지식을 의미할 터이다. 우리는 결코 추측을 넘어서지 아마도 사소한 것들에 관해서는 제외하고 못하는데 적어도 자연과학들에서 넘어서지 못한다. (수학이나 형식 논리학에서는 아마도 다르겠지만, 나는 그것들에 대하여 오늘 말하지 않겠다.)

과학은 진리 추구이지 확실성 추구는 아니다. 과학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8) 모든 생명체들처럼 과학자들은, 시행착오의 방식을 이용하여 연구한다. 시행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식물왕국이나 동물왕국에서의 진화에서, 착오 혹은 더 정확하게 착오의 수정은 통상적으로 생명체의 박멸을 의미한다; 과학에서 착오의 수정은 통상적으로 가설이나 이론의 박멸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 과정은 다윈적인(Darwinian) 선택의 과정이다. 질문: 동물의 영역에서 소위 지식에, 추측이나 가설에 대응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변: 기대(expectation). 혹은 더 정확하게: 생명체가 자체의 환경에서 변화에 (혹은 불변) 대비하는 생명체의 상태. 꽃들이 꽃망울 상태에 있을 때, 꽃들은 이런 의미에서 봄 날씨를 기대하고 있다: 꽃들은,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다는 가설이나 이론을 흡수했다. 흔히 이론은 거짓이어서 꽃이 서리에 의하여 죽는다.

(9) 이런 의미에서, 식물들과 동물들에게는 무한한 양의 타고난 지식이 있다. 아기는, 보호를 받고 양육되고 곧 미소를 받을 것을 기대한다. 아기는 이런 것들을 기대할 뿐만 아니라, 아기에게는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 타고난 욕구들은 타고난 이론들이다.

(10) 모든 생명체들은 항상 고도로 능동적이다. 모든 생명체들은 능동적으로 자신들의 환경을 탐구하고 나은 삶의 조건들을 찾고 나은 세상을 찾는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들은 능동적으로 자신들의 삶의 조건들을 개선한다.

(11) 생명체는 생명을 위한 환경을 개선한다. 생명체는 그 개선행위를 수백만 년 동안 수행하고 있고 우리는 운이 좋은 계승자들이다.

이 과정이 시행 및 착오(의 제거)를 통하여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의 세상에는 많은 오류들이 또한 있다.a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Since this process takes place through trial and (the elimination of) error, there are also many mistakes in our world.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12) 문제들은 생명체와 함께 출현한다; 그리고 가치들이 있는 곳에만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살아가는 환경들에 대한 가치평가들.

이제 나는, 지식론과 과학철학에 관하여 내가 설명하고 싶었던 것의 끝에 오고 있다.

(13) 과학은 문제들과 동시에 시작한다. 과학은, 대담하고 창의적인 이론들을 통하여 그 문제들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이론들의 대다수는 허위이거나/동시에 시험될 수 없다.a 가치가 있고 시험될 수 있는 이론들이 오류들을 탐색할 것이다. 우리는 오류들을 발견하여 그 오류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과학이다: 과학은, 자체가 오류 수정이라는 엄격한 통제 하에 두는 거칠고b 흔히 무책임한 관념들로 구성된다.

질문: 이것은 아메바들이나 다른 하등 생명체들에서와 동일한 과정이다. 아메바와 아인슈타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답변: 아메바는 자신이 오류를 저지를 때 제거된다. 아메바에게 의식이 있다면 아메바는 오류들을 두려워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오류들을 탐색한다. 그의 이론이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이 의식적으로 탐구하여 비판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언어, 특히 인간 언어의 산물인 인간의 글쓰기 덕분이다. 아인슈타인은 어떤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연필은 나보다 더 지성적이다.’ 표현되는 것이나 훨씬 낫게는 서술되는 것이, 우리가 비판하여 오류들을 탐색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언어로 언명된c 이론은, 기대들과 유사하지만 기대들과 전혀 다르기도 한 것이 되는데 기대들은 모든 식물들과 동물들의 한 부분이다.

(14) 자연과학의 방식은, 오류들을 의식적으로 탐색하여 의식적으로 비판하여 그 오류들을 수정하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그런 비판은 비개인적이어야 하고 문제의 이론들이나 가설들만을 겨냥해야 한다.

이것으로 나는 나의 지식론에 관한 언급들을 끝낸다. 이제 나는 동물 언어 이론과 구체적으로 인간의 언어 이론으로 선회하는데 그 이론은 나의 강좌의 두 번째 부분이다. 세 번째 부분은, 함축적인 지침과 관련된 타고난 욕구를d 다루고 네 번째 부분은 평화의 문제를 다룬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 great majority of theories are false/or untestable.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거친의 원어는 wild인데 허형은 번역은 대담하며이다.

c 역주: ‘언명된의 원어는 formulated인데 허형은 번역은 형상화된이다.

d 역주: ‘함축적인 지침과 관련된 타고난 요구의 원어 표현은 the inborn need for implicit guidance인데 허형은 번역은 절대적 교시敎示이다.

 

II

 

나는, 내가 훌륭한 심리학자 칼 뷜러(Karl Bühler)에게서 빌려온 모형으로써 시작하겠다. 뷜러는 언어의 세 가지 기능들을 구분한다. 처음 두 가지 기능들은, 많은 동물들과 모든 인간들 가운데서 발견되고 세 번째 기능은 인간들 가운데서만 발견된다.

하위 기능은 표현 기능인데 그 기능은, 표정들이나 꼬리의 움직임들이나 다양한 형태의 소리 지르기를 본질로 한다. 이 표현적인 움직임들은, 생명체의 내부 상태의 증상들로서 간주될 것이다.

(부언. 유물론자들과 행동주의자들은 이것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내부 상태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들을 행동에 국한시킬 것을 제안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류임이 곧 밝혀질 수 있다. 온도계는 자체의 행동에 의하여 외부 온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체 내부의 상태를 표시한다: 진폭이 커지면서 진동하는 분자들은, 금속 막대가 늘어나는 결과를 낳는다. 행동주의자들의 이념이 옳다면, 우리는 이 내부 상태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터이고 금속 막대가 늘어나는 것을 가열의 효과로서 설명만 할 터이다.)

동물도 자체의 얼굴이나 꼬리의 움직임을 통하여, 다른 동물이 거기에 있어 그 움직임에 반응하지 않을지라도, 자체의 내부 상태를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동물이 정말로 반응한다면, 표현적인 움직임은 신호가 된다. 뷜러의 모형에서 두 번째인 이 발표 기능(announcement function)’은 신호적 기능일 것이고 그 기능이 상호적이라면 우리는 동물들 간의 의사소통을 경험한다. 물론 이 수준에서의 의사소통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또한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인간 언어를 배우기 전의 유아들이나 구체적인 인간 언어를 공유하지 않지만 얼굴표정들이나 신호들이나 지시를 통하여 자신들을 이해시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

뷜러의 세 번째 기능인 서술{Darstellung} 기능은 특별히 인간의 언어에 고유한데, 그 기능에는 기술하거나 뷜러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사실들을 재현하는 서술들이 있다.

뷜러의 논지들 중 한 가지는, 고등 기능에 항상 하등 기능이 동반한다는 것이다. 새가 경계 울음을 낼 때, 이것은 사교적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내부 상태의 표현으로서 역할을 한다. 언어의 기능들에서 우리가 높이 올라갈수록 언어는 점점 더 복잡해진다.

뷜러만큼 멀리 간 언어이론가는 없다고 나는 개략적으로 지적하겠다. 대부분의 언어이론가들은 표현에 관하여 말하고 몇몇 언어이론가들은 사회적 의사소통에 (경계 울음의 사례가 밝히는 바와 같이, 자연스럽게 매우 실용적인 기능들을 지닐) 관하여 말한다. 명령들이나 초청들 또한 이 범주에 놓인다. 그러나 인간 언어에 결정적인 것과 인간 언어에 있는 많은 놀라운 것들은, 인간 언어가 사실들을 기술할 수 있다는 점과 그런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진술들이 참이거나 허위일 것이라는 점을 안 언어이론가는 없다. 이 거대한 진보적 발걸음을 통해서만a 발화(發話: utterance)가 객관적이 되고 사실적인 비판이 시작된다. 비판은, 진술들이나 이론들의 진실성이나 허위성에 관련될 때만 합리적이다b.

여기서 나는, 뷜러의 언어이론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개괄적인 제시를 끝내겠다.

나 자신은 뷜러가 말하는 언어의 기능들에 몇 가지 기능들을 추가하였는데 무엇보다도, 비판적 기능이며 다시 말해서, 명제들의 진실성이나 허위성에 대한 비판적 토론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아메바와 어떻게 다른지를 내가 말했을 때, 비판적 기능의 큰 중요성을 나는 또한 강조했다.

사실상 인간 언어의 비판적 단계에는 틀림없이 논리적으로 독단적 단계가 앞선다는 것을 나는 자주 강조했다. 독단이c, 일종의 배경으로서 확립될 때만 우리는 비판을 시작할 수 있고 나중에만 독단c 자체가 비판적 토론의 배경 비판에 포함될 수 있다. 먼저 견고한 체계가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우리는 그런 체계들 몇 가지를 대비하고 그 체계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III

 

나는 이제 세 번째 부분에 온다.

나는 나의 15번째 논지로써 시작하겠다.

(15) 인간 언어들을 포함한 동물 언어들은 많은 타고난 욕구들을 전제한다: 예를 들어, 능동적인 자기-표현에 대한 욕구와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에 몰두하려는 욕구 및 이 문제들에서도 시행착오에 의하여 배우려는 욕구. 그런 타고난 욕구들이 없다면, 그리고 시행착오를 통한 능동적 학습이 (새끼고양이들의 질주하기가 좋은 사례이다) 없다면 고등동물들이 생존한다는 것은 불가능

 

a 역주: ‘이 거대한 진보적 발걸음을 통해서만의 원어 표현은 Only through this huge step forward인데 허형은 번역은 단순한 표현이 아닌 진술의 성격을 띠어야 비로소이다.

b 역주: ‘합리적의 원어는 rational인데 허형은 번역은 논리적이다.

c 역주: ‘독단의 원어는 dogma인데 허형은 번역은 독단론이다.

 

할 터이다.

(16) 능동적인 학습을 통하여 습득되는 지식뿐만 아니라 동물들과 인간의 타고난 지식은 기대들로 구성된다. 충족되지 않은 기대들은 난제들이나 문제들로서 경험되는데 그것들은 다시 실험들인 능동적 학습으로 연구 이어진다.

(17) 동물 언어와 인간 언어 모두를 능동적으로 학습하는 것은 매우 높은 정도의 제안 감응성(提案 感應性: suggestibility)을 띤다. 복제 능력은 충분하지 않다. 비록 근접할지라도, 심지어 복제에 감정이입을 더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포함된다.a 우리는 지금, 의사소통하는 동일한 종(: species)의 다른 구성원들의 소망들이나 평가들에 맞추려는 타고난 깊은 욕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만이 청어들의 대량 이동이나 벌들의 무리들이나 심지어 모기들의 무리들을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특정 동물들이 얼마나 감응적(感應的: suggestible)인지를 우리는 안다 (추측성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닭은 분필선(chalk line)에 의하여 최면에 걸릴 수 있다.

(18) 언어를 배우려는, 말하려는, 기술하려는, 의사소통하려는 타고난 욕구들에 인간의 언어들은 근거한다. 인간의 언어들은 주로, 언어와 연결되어, 제안 감응성(提案 感應性: suggestibility)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타고난 욕구의 결과이다.

(19) 이 모든 것은 우리 주변의 세상을 발견하려는, 그 세상에 관하여 배우려는 그리하여 알고자하는 우리의 강력한 욕구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다. 인간의 무리들은 신화들(myths), 치료주술사들(medicine-men) 그리고 성직자들(priests)을 만들어낸다. 적당한 과정에서 이 욕구를 강화할 내부의 갈등이 일어나는데 그 갈등은, 우리가 실제로 알지 못하거나 아는 게 거의 없다는 느낌으로 인정되지 않은b 느낌이다. 안전에 대한 혹은 동료들이나 조력자들에 의한 확신에 대한 강력한 욕구가 일기 때문에, 그 욕구는 공통적인 독단을 지녀서 그 독단의c 진실성을 서로에게 제안할 정도로 또한 강력할 것이다. 그 욕구는 함축적인d 교시에 대한 욕구이다. 불확실성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a 역주: 앞의 세 문장의 원문은 Active learning of both animal and human language assumes a very high degree of suggestibility. The ability to cops is not enough. More is involved even than in copying plus empathy, although that is getting close.인데 허형은 번역은 동물의 언어나 인간의 언어를 능동적으로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고차원적인 피암시성(제언에 쉽게 넘어가는 성질) 감정이입의 요소가 더해진 모방이 설명에 더 가깝긴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요소가 더 개입되어 있다.’이다.

b 역주: ‘인정되지 않은의 원어는 unacknowledged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c 역주: ‘공통적인 독단독단의 원어 표현은 common dogmadogma인데 허형은 번역은 보편적의 교의교의이다.

 

독단은 광신적인 믿음이 된다.

이것이, 1차 세계대전 시작에서 전쟁 정신병인a 전쟁 열병(war fever)이 발생한 방식이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라는 주제를 다루기 전에, 예술에 관하여 그리고 현대 예술에 관하여 나는 몇 마디 말을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최고의 예술은 종교적인 예술임을 안다: 대성당들,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 마태수난곡(St Matthew Passion), 모차르트와 베토벤 및 슈베르트의 미사곡들.

오늘날 종교예술은 어떤 상황인가?

가짜 종교가 오늘날 자체를 확립했다고 우리가 추정한다면 많은 것이 설명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 우리의 세상, 적어도 우리의 사회적 세상이 지옥이라는 가짜 종교.

나는 종교에 대하여 전혀 적대적이 아니다. 나의 종교는, 세상의 찬란함에 대한 교설이다b; 놀라운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에 대한 교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절망하는 사람들의 공포와 고통에 대한 교설; 인간의 역사에서 출현하여 반복적으로 계속 출현하는 선과 악의 규모에 대한 교설; 우리가 사람들의 생명을, 특히 혹심한 삶을 겪는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는 유쾌한 정보에 대한 교설. 나는 다른 것을 모른다. 그리고 과학적인 진리 추구가 나의 종교의 한 부분일지라도, 찬란한 과학적 가설들은 종교가 아니다. 그 가설들을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대 예술은, 현대 예술의 이 황당한 믿음에 의하여 설명된다: 세상의 사악함 그리고 우리가 스위스, 독일, 영국과 북미에서 살아야 하는 사회적 질서의 사악함에 대한 믿음에 의하여 설명된다. 도처에서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지옥에서 산다고 믿으라고 그리고 지성주의적(intellectualistic) 논증들이 제시되고 현대 예술의 도움이 주어져 설득 당한다. 결과들은 무엇일까? 어린이들에게는 실제로 정말로 지도자들과 모범들, 독단들 그리고 확고한 일상이 필요하다. 나중에 청소년들로서 그들은 자신들에게서 지도자, 독단들 그리고 전지한(全知: all-knowing)’ 이념들을 제거하기 시작할 수 있고 제거하기 시작해야 한다. 정말로 저것은 아주 쉽다. 여러분 자신들이 어떤 것도 믿도록 설득 당하지 않도록 물론 나에 의해서도 설득 당하지 않도록

 

d 역주: ‘함축적인의 원어는 implicit인데 허형은 번역은 절대적인이다.

a 역주: ‘전쟁 정신병의 원어 표현은 war psychosis인데 허형은 번역은 전쟁에 미친 집단이다.

c 역주: ‘찬란함에 대한 교설의 원어는 the doctrine of the splendours인데 허형은 번역은 밝음과 어두움의 공식이다.

 

. 어떤 역사책으로부터도 노예제도를 폐지한 우리의 시대가, 우리에게 역사

적 지식이 있는 최고의 시대가 아닌지를 여러분은 남의 도움 없이 배울 수 있다. 우리는 물론 많은 오류들을 저질렀고 예를 들어, 우리의 끔찍한 이념들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저지른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천국이라는 제안이 없다면, 훨씬 더 나쁜 세상에 살고 있는데, 자신들의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의 국가가 천국이라고 제안한다. 사실은 저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우리보다 더 만족한다. 제안에 바라는 욕구는 큰 힘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위하여 싸우고 있을 때, 진리도 큰 힘이다.

 

IV

 

나는, 독단들과 이념들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위험한 감수성의 인식론적이고 생물학적이며 언어적인 뿌리들을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 감수성의 뿌리들 중 한 가지 뿌리는 아주 단순하게a, 비겁함이다. 이제 나 또한 비겁하여 특출한 용기를 가장하고 싶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 영웅적인 행위들을 계속해서 촉구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지구상에 영구적 평화를 확립하는 커다란 문제는, 해결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강조하겠다.

이것이, 칸트의 저서 영구적 평화에 관하여(On Perpetual Peace)의 주제이다. 그것은 훌륭하고, 슬프며 탁월하게 고무적인 저서이다.

평화에 대한 주요 장애물은 원자폭탄이 아니라는 것이 나에게 분명하게 보인다.

내가 위대한 원자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했을 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1952년이었다 원자폭탄이 틀림없이 평화를 보전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다. 그러나 결국 그는 지금까지 옳았다.

나는 평화로 향하는 오직 한 가지 매우 어려운 길을 본다. 그것은 먼 길이다. 아마도 이 길을 따라서 조치를 취하기 오래 전에 핵전쟁이 있을 것이다. 지식인들은 대부분 최고의 의도들을 지녔는데, 먼저 다소 더 겸손하고 지도적 역할을 하지 않도록 설득 당해야 한다. 새로운 이념들도 아니고 새로운 종교도 아니다. 대신: ‘다소 더 많은 지성적 겸손이다.

우리 지식인들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더듬으며 따라간다.

 

a 역주: ‘아주 단순하게의 원어 표현은 quite simply인데 허형은 번역은 두 말할 것 없이이다.

 

리들 중 과학자들인 사람들이 다소 더 겸손하고 무엇보다도 덜 독단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은 과학, 인간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유망한 창조물들 중 하나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지식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식인들의 겸손 결여인 지식인들의 전횡은 아마도 지구상에서의 평화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최고의 희망은, 지식인들이 오만할지라도 지식인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오류들을 저지를 것이다. 그러나 다음 가설이 참일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이념이 없으면 전쟁이 없다. 이념들에 반대하는 투쟁은 여하한 경우에도 수행할 가치가 있는 투쟁이다.

여러분에게 내가 말한 것을 믿지 말라고 그리고 나에게는 대대적인 축하로 끝내려는 소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한 번 더 요청함에 의하여 나는 끝내고 싶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념들에 도사리고 있는 커다란 위험들을 지적하기를 원할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진화적 생물학과 지식의 구조에 은닉되어 놓여있는 듯이 보이는 지식, 믿음 그리고 상호 제안에 대한 위험한 욕구에 나는 여러분의 주의를 일깨우고 싶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