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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리크(MASARYK)와
열린사회*a
60년 만에 (그리고 그 세월은 모든 사람에게 어려운 시기였다) 프라하에 다시 오게 된 것: 이것은 훌륭한 경험이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인 1912년과 1913년에 나는 비엔나로부터 프라하를 방문했고 또한 전쟁 기간에도 몇 번 방문했다. 그리고 프라하가 중부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내가 결정한 것은 1934년 말엽이었다. 이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이 변했다.
60년 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위대한 설립자이자 그 공화국을 해방한 대통령인 토마 가리크 마사리크(Tomás Garrigue Masaryk)는 흐라차니 성(Hradschin Castle)에서 집무하고 있었다. 나는 마사리크를 크게 존경한다. 그는 사망 후 내가 열린사회의 주요 선구자들로 지칭한 사람들 중에서 한 분이었다. 그는 이론과 실제 모두에서 열린사회의 선구자였다 ㅡ 정말로 에이브러햄 링컨과 윈스턴 처칠 사이에서 그 사회의 선구자들을 중 가장 위대한 선구자였다.
지금은 패배하여 빈궁해진 오스트리아 제국의 후속 국가 중에서 마사리크가 만든 국가가 유일하게 성공한 국가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재정적으로 성공한 국가이고 산업적으로도 성공한 국가였으며 정치적, 교육적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성공한 국가였다; 그래서 그 국가는 잘 방어되었다.
새로운 국가가 ㅡ 결국, 혁명의 결과로 ㅡ 그렇게 평화롭고 그렇게 성공적이고 한 사람의 그렇게 많은 창조적인 업적이었던 적은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큰 난제들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마사리크의 철학과 그의 지혜와 그의 개성이 가져온 결과였는데 그런 것들에서 개인적인 용기와
* 1994년 5월 25일 프라하의 찰스대학교(Charles University)의 명예박사 수여식에서 행한 강연.
a 역주: 이 장의 원제목은 MASARYK AND THE OPEN SOCIETY인데 허형은 번역은 ‘열린 사회의 힘’이다.
진실성과 개방성이 그렇게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이것은 정말로 당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도주의나 박애주의도 또한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a
마사리크의 특수한 생애가 역사가들에 의하여 긴밀하게 연구되었기를 나는 기대한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이야기들이나 일화들인 것을 가지고 프라하에 왔는데 그의 전기 작가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개연성이 높다. 두 가지 이야기들 모두가, 아직도 존재할 서류들을 연구하는 데 관심을 갖는 사람에 의하여 적어도 부분적으로 검증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내가 13세이던b 1차 세계대전 동안인 1915~16년 겨울에 내가 최초로 마사리크의 이름이 언급된 것을 들은 기묘한 상황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의 부친은 비엔나에서 변호사였고 3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둔 슈미트(Schmidt) 가족이 우리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이었다. 한 명의 아들은 장교로 직업군인이었다; 또 다른 아들인 칼 슈미트(Karl Schmidt) 박사는 당시 30세에 가까운 법률가였다; 그리고 세 번째 아들인 오스카(Oscar)는 학교에서 나와 같은 반에서 급우였다. 칼 슈미트 박사는 자주 우리를 만나러 와서 저녁 식사를 같이하며 머물렀다. 어느 날 저녁 오스트리아 제국 군대 장교의 전시 군복을 입고 자신의 당시 임무가 국가반역죄 사건들을 조사해서 국가반역자들을 군사 법정에 세우는 것이라고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조사하고 있던 매우 흥미로운 사건을 우리에게 말했다: 비엔나 대학의 66세 난 철학 교수 토마 마사리크 박사의 사건인데 그는 당시 영국이나 미국에 거주하면서 국가독립을 위한 체코와 슬로바크 운동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매우 명백하게 국가반역죄를 짓고 있었다 ㅡ 그러나 슈미트는 탁월한 사람이라고 아주 은밀하게c 계속해서 말했다.
자신은 마사리크의 저서들, 특히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관계들에 관한 저서 한 권을 읽고 있었고 그 저서가 매우 인상적이라고 슈미트는 우리에게 말했다. 자신의 주제에 열정을 보이면서 슈미트는 이 믿기 어려운 반역자, 최고의 학식과 교양을 지닌 사람, 지도적인 철학자, 윤리 교사, 위대한 자유주의자 그리고 그가 자신의 국민으로서 간주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이룩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건 사람에 관하여 강연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대항하여, 프랑스와
a 역주: 이 두 문장의 원문은 This is indeed what it was.와 But humanism, or humanitarianism, also played a dominant role.인데 허형은 번역은 ‘진정, 그렇게 말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 시대의 인도주의, 박애주의도 큰 몫을 한 것이 사실이다.’이다.
b 역주: ‘13세’의 원어 표현은 thirteen years old인데 허형은 번역은 ‘열다섯 살’이다.
c 역주: ‘아주 은밀하게’의 원어 표현은 in strictest confidence인데 허형은 번역은 ‘확신에 차서’이다.
영국과 소련 및 미국에서 살던 체코인들로부터 그리고 또한 러시아에서 전쟁포로가 된 체코인 오스트리아 군인들로부터 마사리크가 해외에서 조직하고 있던 군대에 대하여 나중에 슈미트는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이것은 특별한 경험이었고 그 경험은 78년이 지나서도 내 눈앞에서 생생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경험은 오스트리아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당시 전쟁 중이었다: 특별법으로 인하여 의회의 역할이 불가능했고 오스트리아의 수상 슈튀르크(Stürgkh) 백작은 독재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전쟁 전 자유주의적인 분위가 비엔나에 아직도 살아있었다. 여기에 반역죄를 추적하도록 임명된 법률가이자 동시에 육군 장교가 있었고 그는, 우연히 우리를 방문할 때 반역자에 대한 자신의 수사 진척 사항과 자신의 감탄에 관하여 평범한 시민들이었던 우리에게 비밀리에 알려줌에 의하여 분명히 스스로 반역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ㅡ 독재와 계엄령 상태에도 불구하고 ㅡ 알고 있었다. 1년 후 러시아에서 시작되어 지금 우리가 ‘현대적 독재’로 지칭하는 저 무서운 것을 초래한 상황과 차이점이 얼마나 큰가!
이것이 1916년 비엔나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국이 민족통합주의적 민족주의와 대치했던 몇몇 지역들에서는 국가 테러가 지배했다.a 작은 독재자들인 관료들은 도시들의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ㅡ 동시에 그들은 두려워했다. 그들은 비밀리에 테러로 ㅡ 심지어 고문으로 ㅡ 지배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 모두를 동일한 특별한 정보제공자인 반복해서 찾아오던 손님인 칼 슈미트 박사로부터 알았다.
슈미트는, 승승장구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마사리크를 발견하면 처형하게 되어있던 사건에 대비하던 자신의 영웅인 마사리크의 움직임들에 관해서 우리에게 모두 말해주었다. 그러나 1916년 경b 그런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임이 심지어 나에게도 분명했다: 동맹국들이(Central Powers)c 전쟁에서 패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은, 심지어 오스트리아 정부의 몇몇 관료들도 항복하기를 원했다는 것과 오스트리아는 주로 독일의 침략이 두려워서 전쟁을 계속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이야기의 끝이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ut in some regions where the authorities faced irredentist nationalism, state terror ruled.인데 허형은 번역은 ‘그러나 권력자들이 민족통일주의를 등에 업고 독재로 전향한 곳들에서는 공포 정치가 지배하고 있었다.’이다.
b 역주: ‘1916년 경’의 원어 표현은 by 1916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c 역주: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 대항하여 싸웠던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터키 및 불가리아의 동맹을 지칭하는 표현인데 허형은 번역은 ‘중심세력’으로 괄호 안에 넣었다.
거의 20년 후 슈슈니크(Schuschnigg) 총리가 오스트리아에서 독재할 때 나는 다시 우연히 토마 마사리크에 관하여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비엔나 대학에서 나는 그리스 연구학자인 하인리히 곰페르츠(Heinrich Gomperz) 교수의 제자였다가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나치들의 무리에 의하여 돌푸스(Dollfuss) 총리가 살해된 후에 슈슈니크가 총리가 되어, 모든 교수들과 교사들을 포함한 국가 및 지방 정부의 공무원들은 자신이 애국전선(Patriotic Front)으로 지칭한 조직에 가입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 조직은 독일과의 (이미 히틀러의 독재 치하에 있던) 합병(Anschluss)에 반대하는 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만 회원들로서 받아들였다. 모든 대학교수들이 (특히 나치당원들이었던 교수들) 서명했다. 한 명의 교수가 예외였는데 하인리히 곰페르츠로 그의 가족이 독일 출신이었고 그의 문화적 배경과 그리스 연구학문으로 인하여 그리스 연구학자들이 많던 독일과의 연합을 편애했다. 그 자신은 유대인 혈통이어서 히틀러의 폭력적 인종 이론을 ㅡ 그리고 폭력적 관행들 ㅡ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높은 독일 문명을 신뢰했고 히틀러를 틀림없이 곧 사라질 정치적 별종으로 간주했다; 그는 아마도 히틀러를 많이 고려하는 것이 자신의 체면에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이것 대부분에서 곰페르츠는 유감스럽게도 틀렸다. 그러나 슈슈니크의 애국전선에 그가 서명하지 않아서 그는 해고되었고 소득이 끊겼다; 그리고 언론검열로 인하여 이 사건은 신문에 발표되지 못했다. 아무도 곰페르츠의 해고 소식을 듣지 못했다. 소문이 나에게도 도달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그가 전화를 걸어와서 우리는 만났다. 그때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에게 말했고 자신이 미국에 이민하기로 ㅡ 그 비싼 여행비를 감당할 돈이 자기에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ㅡ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프라하로 가서 돈을 빌리려고 자신의 옛 동료이자 친구인 마사리크를 만났다. 마사리크는 자신의 개인적인 저금에서 선물로 돈을 마련해주고 빌려주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정치적 요소가 개입되면 혹시 친-독일적이거나 심지어 친-히틀러적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공금도 자신은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곰페르츠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곰페르츠는 마사리크와의 만남이 얼마나 훌륭했고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를 나에게 말해주었다.
마사리크를 20세기 유럽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영웅 두 명의 한 명으로서 나는 항상 칭송했다: 나는 마사리크와 처칠을 의미한다.
마사리크의 체코슬로바키아는 유럽에서 발전한 모든 사회들 중에서 가장 열린사회였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 체코슬로바키아는 겨우 20년 동안 존속했다. 그러나 얼마나 어렵고 동시에 얼마나 탁월한 세월이었던가! 최단 시간 안에 이 열린사회는 유럽에서 견고한 경제와 가장 견고한 군사방어 체제를 구축했다. 그다음에 마사리크의 체코슬로바키아는 더 오래된 두 개의 열린사회들에 ㅡ 영국과 프랑스인데 당시 유화론자들(宥和論者들: appeasers)에 의하여 다스려졌다a ㅡ 의하여 파괴되었다. 그래서 마사리크가 여전히 생존했었더라면 그들이 협력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파괴할 수 없었을 터이라고 우리는 아마도 추정할 것이다. 히틀러는 여전히 엄포를 놓고 있었고, 마사리크는 엄포에 대들었을 터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열린사회 구조 안에 구축된 불필요한 취약점이 처음부터 있었다. 소위 ‘민족 자결’의 원칙을 나는 언급하고 있는데 서양에서는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획득한 원칙이다 (그리고 그 원칙은 심지어 지금도 이 권위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하면 이 ‘원칙’은 유럽에서 전혀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었을 텐데 왜냐하면 유럽에서는 심지어 영국, 아일랜드 혹은 사이프러스와 같은 섬들도 민족 자결을 주장하는 정치지도자들을 지닌 몇몇 소위 민족들이 인구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사리크의 열린사회는 이 민족적 주장들에게 사려 깊은 도덕적 및 정치적 답변을 제시할 수 없었다. 여러분의 국가가 다시 이 압력을 받게 된 것은 오직 아주 최근의 일이고 여러분의 국가는 잘 계획된 이론적 및 도덕적 방어책을 지니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분의 국가는 분열되어야 했다. 결과들이 어떨지를 아무도 모른다.
물론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동족 민족에게는 산업적 협력을 목적으로 엄청난 이점이 있다. 그러나 유럽 어디에서 여러분은 그런 민족을 발견하는가? 정치적 및 교육적 수단에 의하여, 소수민족들과 방언들에 대한 억압을 통하여 단일 민족이 생긴 극소수의 국가들을 제외하여 유럽은 그와 같지 않을 따름이다. 이것은 특히 독일과 프랑스에 적용되지만 심지어 이 두 나라에서도 중요한 소수민족들이 있고 정말로 거의 모든 나라에 소수민족들이 있다. 유럽에 남겨진 예외는 아이슬란드다 (그리고 아마도 몰타).
평화와 문화적인 삶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유명한 ㅡ 아니면 악명높다고 내가 말할까? ㅡ ‘민족 자결의 원칙’의 비실용성과 비인간성에 관하여 세상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 원칙은 지금 인종적 테러리즘이라는 궁극적 공포로 타락했다.
우리는 그런 공포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역사는 금과 석유를 위하고 부유함과 지배를 위한 탐욕에 의하여 휘몰려 폭력적이고 두렵기만 하다는 냉소
a 역주: ‘당시 유화론자들(宥和論者들: appeasers)에 의하여 다스려졌다’의 원어 표현은 then governed by the appeasers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이 유화론자들은 히틀러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유화론자 정치가들을 의미한다.
적 견해에 우리가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에 대한 이 냉소적 견해는 사실이 아니다. 유럽의 역사는 아테네의 법률을 개혁한 솔론(Solon)의 평화로운 혁명으로 시작된다. 그 혁명에 의하여 솔론은, 자유인이었던 저 노예들을 해방했는데 그 노예들은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지 못할 때 자유를 잃었다. 솔론의 혁명으로 인하여 아테네에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았다. 거기서 미국까지 그리고 링컨까지는 긴 여정이었는데 링컨은, 남부 연합 주들에서 흑인 노예들을 해방하는 데 성공한 매우 혹독한 전쟁에서 적어도 6십만 명의 백인 병사들의 마지막 병사로서 쓰러졌다.
이 사건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탐욕과 폭력의 끝없는 역사에서 두 가지 예외들만은 아니다. 더 정확하게 그 사건들은, 자유와 정의를 위한 우리의 끊임없는 싸움에서 흔히 우리 자신의 오류들을 통하여 우리가 겪은 많은 패배와 좌절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성공작 중에서 ㅡ 인정되는 바와 같이, 그다지 흔한 성공작들은 아니다 ㅡ 두 가지 성공작들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다시 좌절들을 겪고 있을 때 우리의 최신 성공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랑스가 함락된 후에 표면적으로 희망이 없던 히틀러에 대한 처칠의 성공적인 항전과 마사리크가 태평양과 미국대륙을 가로질러 시베리아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자신의 용사 6만 명과 돌아와 많은 사람들이 폭력으로 사망한 이후에 다시 일어날 정도로 위대한 공화국이자 열린사회를 세웠던 것과 같은, 믿어지지 않는 자유와 개방성과 인간애의 정신 실천을 우리는 기억 속에 새롭게 간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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