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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향의 세계 - 인과성에 대한 두 가지 새로운 견해

이윤진이카루스 2021. 5. 14. 10:21

성향의 세계 - 인과성에 대한 두 가지 새로운 견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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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향의 세계:

인과성에 대한 두 가지

새로운 견해

(A Word of Propensities:

Two New Views

of Causality)

 

 

 

 

 

 

 

 

 

 

 

 

Thoemmes Antiquarian Books Ltd

85 Park Street, Bristol BS1 SPJ 출판

 

 

 

 

 

 

 

 

 

 

 

 

 

 

 

 

 

 

 

 

 

 

 

 

 

 

 

역자의 주석

 

이 저서는 두 가지 강좌 내지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데 즉, 성향의 세계: 인관성에 대한 두 가지 새로운 견해(A World of Propensities: Two New Views of Causality)진화론적 지식론에 대하여(Towards an Evolutionary Theory of Knowledge)이다. 이 저서는 국내외에서 구매가 불가능하여 역자는 이 저서의 pdf 판본을 인터넷에서 내려 받았는데 첫 번째 강좌 내지 논문만 내려 받을 수 있었고 두 번째 강좌 내지 논문인 진화론적 지식론에 대하여는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었는데 역자는 왜 그 내용이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첫 번째 강좌인 성향의 세계2012년에 번역하여 역자의 블로그, 칼 포퍼 경의 카테고리에 올린 1996년에 재인쇄된 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 II부 확률에 대한 경향 해석 1의 내용과 중복되는 듯하다.

두 번째 강좌 내지 논문의 내용인 진화론적 지식론에 대하여(Towards an Evolutionary Theory of Knowledge)는 단행본으로 1978년경에 출판된 칼 포퍼 경의 저서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에 이미 기술된 내용이 아닐까 역자는 추측한다. 역자는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을 이미 번역하여 역자의 블로그, 칼 포퍼 경의 카테고리에 올렸다.

역자가 인터넷 서핑을 통하여 성향의 세계의 한국어 번역본을 찾아보았으나 번역된 기록조차도 없어서 역자의 번역을 대조하거나 검토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누락, 오역이나 탈자 및 오자를 3자를 통하여 발견하여 수정할 수 없다. 아울러, 성향의 세계의 한글번역본에는 역자가 임의대로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밑금을 그은 부분이 있지만 독자들은 그 부분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

 

20215월 역자

 

 

 

 

 

 

 

 

 

 

 

 

 

 

 

사랑하는 나의 아내 헤니(Hennie)

기억하여 헌정됨

 

 

 

 

 

 

 

 

 

 

 

 

 

 

 

 

 

 

 

 

 

 

 

 

 

 

 

신사 숙녀 여러분,

 

몇 가지 개인적인 기억들과 개인적 신념 고백으로 나는 시작하고 그다음에 나의 강좌 주제로 선회하겠다.

 

내가 최초로 국제철학회의에 참석한 때는 54년 전 19348월 프라하에서였다. 나는 그 회의에서 감흥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회의에 앞서서 프라하에서 또 다른 회의가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의 주관으로 열렸는데 그는 자신이 비엔나 학파(Vienna Circle)를 위하여 주관한 예비 회의(그는 사전회의[Vorkonferenz]’로 지칭했다) 나를 친절을 베풀어 초청했다.

 

나는 나의 저서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교정쇄를 가지고 프라하에 왔다. 그 저서는 3개월 후 비엔나에서 출판되었고 25년 후에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출판되었다. 그 저서는 프라하에서 두 명의 폴란드 철학자들인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ski)와 타스키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아돌프 린덴바움(Adolf Lindenbaum)의 아내인 Janina Hosiasson-Lindenbauma 의하여 강독되었다. Janina Hosiasson과 그녀의 남편은, 5년 후 나치들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자신들이 지식인 엘리트(Fürerschrift)로 묘사한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말살할 때 살해되었다: 영어로 ‘intellectual élite’이다. 타스키는 프라하에서 비엔나로 갔는데 비엔나에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철학적으로 그것은 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친구관계가 되었다. 이유인즉 타스키로부터,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논리적인 옹호 가능성과 그 진리의 힘을 내가 배웠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이론인데, 거의 동시에 독자적으로 타스키와 괴델(Gödel)이 도달했던 듯이 보인다. 그 이론은 1930년 타스키에 의하여 최초로 출판되었는데 그것에 대하여 괴델은 타스키의 우선권을 물론 인정했다. 그것은 객관적인 진리에 사실들에 대한 서술의 대응으로서의 진리 관한 그리고 절대적 진리에 관한 이론이다: 모호하지 않게 언명된 어떤 서술이 한 가지 언어로 참이라면 그 서술을 다른 언어로 올바르게 번역하는 것도 또한 참이다. 이 이론은 상대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모든 유행성 이론들에 대하여 훌륭한 방어벽이다. 그리고 그 이론 덕분에 나는 허위와 허위의 제거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오류들로부터, 우리의 실수들로부

 

a 역주: 한글 표기를 알 수 없음.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진리추구와 같은 과학에 대하여 우리는 배울 수 있다, 게다가 그 이론 덕분에 우리는 정말로 그 이론 때문에 우리는 진리확실성을 구분할 수 있고 구분해야 한다. 나의 나쁜 기억력에도 불구하고, 프라하에서 알프레드 타스키 및 Janina Hosiasson과 내가 나눈 대화들 몇 가지를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그녀가 몇 년 동안 연구하고 있던 분야인 확률론적 귀납론을 내가 거부한 것에 그녀가 공포는 아닐지라도 놀란 것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논문들 몇 편을 읽으라고 주었는데 나는 그 논문들이 라이헨바흐(Reichenbach)의 이론보다 훨씬 낫고 훨씬 더 책임감 있게 논증된 것을 발견했다. 내가 최대한 신중하게 그녀의 연구를 돌보아서, 가능하면 그녀가 얻은 결론들을 나의 결론들과 맞추는 방식을 찾아야겠다고 나는 결심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논증들이 나의 논증들을 반증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을지를 알려고 시도해야겠다고. 곧 나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확률론적 귀납론은 라이헨바흐의 노선들에서보다 그녀의 노선들에서 낫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부언하여 라이헨바흐 또한 프라하에 있었다; 그러나 카르납(Carnap)이 나를 그에게 소개하려고 했을 때 그는 나와 대화하기를 거부했고 심지어 악수도 거부했다. 다른 참석들 중에서 나는 물론 오토 노이라트, 루돌프 카르납과 필립 프랑크(Philipp Frank)를 기억하는데, 내가 비엔나 학파의 실증주의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 모두와 친했다. 슐릭(Schlick)은 며칠 후에 왔다고 나는 믿는다. 와이즈만(Waismann)과 칠젤(Zilsel)이 참석했는지 나는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

 

예비 회의 과정에서 라이헨바흐는 확률론적 귀납법에 관한 논문 한편을 강독했고 나는 답변했다. 나의 답변은 그의 논문과 함께 학술지 Erkenntnis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나의 답변은 25년 후에 나의 저서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영어본에 (그리고 또한 그 판본의 독일어본 2판본에) ‘소위 귀납의 논리가설들의 개연성에 관하여’(‘On the so-called “Logic of Induction” and the “Probability of Hypotheses”’)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카르납은 당시 그 후 몇 년 동안 전적으로 나의 편에 섰는데 특히 귀납론에 관해서였다 (그리고 또한 나와 나의 저서에 대한 라이헨바흐의 개인적인 태와 관련하여); 그리고 나의 저서가 3개월 후에 출판되었을 때, 그는 자신과 라이헨바흐가 공동 편집자이던 Erkenntnis지에 매우 호의적인 비평을 썼을 뿐만 아니라, 라이헨바흐가 Erkenntnis지의 동일한 호에 나에게 대한 긴 공격과 카르납의 비평에 반대하는 비판적 독백을 실었을 때 자신과 나를 옹호했다.

 

카르납과 나는 당시,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을 토대로 개연성에 관한 공동 연구 프로그램에 동의 같은 것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수학적 확률계산을 만족시키는 물리학 특히 양자이론의 확률론적 가설들에서 사용되는 바와 같은 확률과, 다른 한편으로는 소위 가설들이 지닌 개연성이나 가설들에 대한 확인 등급(degree of confirmation)이나 (내가 지금은 그렇게 지칭하는 것을 선호하는 바와 같이) 가설들에 대한 입증 등급(degree of corroboration)을 우리는 구분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강력한 논증들 없이, 가설에 대한 확인 등급이나 입증 등급이 확률계산을 만족시킨다고 전제하지 않고 이 문제를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에서의 나의 논증들을 고려하여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서 정말로 핵심적인 문제로서 간주하기로 우리는 합의했다.

 

이것이 1934년과 1935년에 도달한 우리의 토론 상태였다. 그러나 15년 후 카르납은 자신의 새로운 두꺼운 저서 확률의 논리적 근거(Logical Foundations of Probability)를 나에게 보냈는데 그 저서를 펴보고 그 저서에서 그의 명시적 출발점은 정반대임을 확인 등급은 확률계산의 의미에서 확률이라는 적나라하고 논증되지 않은 전제 나는 알았다. 나는, 자신의 아들이 문선명 교도가 된 아버지가 틀림없이 느끼는 감정을 경험했다; 물론 문선명 교도들들 당시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스키에 의하여 옹호된 바와 같이, 카르납이 진리를 자체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포기하지 않을 것을 고려하여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 정말로 그는 포기한 적이 없다.

 

괴델이 얻은 중요한 결론들이 비-상대주의적 의미를 얻은 것은 진리에 대한 이 견해이다. 이 견해로 인하여 내가 얻은 결론들도 비-상대주의적 의미를 얻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신사 숙녀 여러분, 이 언급들은 알프레드 타스키에 대한 나의 감사 표시로서 그리고 신념의 고백으로 받아들이시라: 상대주의에 대한 나의 반대와, 타스키에 의하여 복원되어 그와 괴델에 의하여 몇 가지 수학적 문제들에 적용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론을 내가 5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수한 표현으로 받아들이시라. 그리고 나는 이 신념의 고백에, 음악과 예술 다음으로 과학이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계몽적인 업적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나의 신념을 덧붙이고 싶다. 현재 과학을 폄하하려고 노력하는 그렇게 소란스러운 지식인들의 유행을 나는 혐오하고, 우리 시대에 생물학자들과 생화학자들에 의하여 이룩되어 우리의 아름다운 지구 전체에 걸쳐서 의약품을 통하여 고통을 받는 이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된 놀라운 결과들을 나는 크게 칭송한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모든 인간의 다른 기획물처럼 과학도 인간의 오류가능성으로 고통을 겪는다. 우리의 오류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하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얻는 결과들은 확실할 리가 없고 그 결과들은 심지어 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오류들로부터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위대한 과학자들은, 우리의 오류가능성을 객관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추측성 지식으로 바꾸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유일한 것은, 과학의 놀랍고도 흔히 참인 결과들을 확실하다고 믿지 않고도 그 결과들을 가장 크게 칭송하며 과학을 용감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려는 시도였다. 과학의 결과들은, 시험되었을 것이지만 확증되지 않은 가설들로 남는다. 물론 그 결과들은 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들이 참이 아닐지라도, 그 결과들은 훨씬 나은 결과들로 길을 여는 탁월한 가설들이다.

 

우리의 이론들이자 우리의 가설들은 우리의 모험적인 시도들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그것들 대부분은 오류들로 판명된다: 우리의 시험들에 충격을 받아 그 이론들의 허위성이 밝혀질 것이다. 가장 엄격한 시험들로도 우리가 반증할 수 없는 저 이론들을 우리는 참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정말로 저 이론들은 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시험들이 그 이론들을 여전히 허위로 판정할지도 모른다.

 

대담하고 모험적인 이 이론화 방식은, 엄격한 시험이 뒤따르는데, 생명체가 더 높은 형태들로 진화함에 따라서 생명체 자체의 생활방식이다: 그것은 시행과, 시험들을 통한 오류노출과 오류제거의 방법이다. 생명체가 새로운 세계들과 새로운 땅들과 바다와 공기 및 공간을 정복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과학도 새로운 세계들을 정복한다: 새로운 땅들, 바다, 공기 및 공간. 우리가 알려고, 이해하려고 겨냥하는 것은 세계이자 우주이다. 모든 과학은 우주론이다. 모든 과학은 세계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려는 시도이다. 원자들에 관하여, 분자들에 관하여. 살아있는 생명체들에 관하여 그리고 지구상에서의 생명의 근원이라는 수수께끼들에 관하여. 사고의, 인간 정신의 근원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의 정신들이 작용하는 방식들에 관하여.

 

이것들은 커다란 과제들이다; 거의 불가능한 과제들. 그러나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대담한 시도들에서 거의 불가능한 진보를 이룩했다. 나의 생애를 통하여, 이 시도들 중 몇몇은 원거리에서 그리고 다른 시도들은 심지어 가까운 장소들에서 내가 목격하여 나는 정말로 매우 운이 좋았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양자물리학과 생물학 분야인 이 모험에 심지어 참여도 했다.

 

이제 나는 나의 핵심적인 문제에 인과성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견해 변화 왔다. 1927년경까지 물리학자들은 예외 없이, 세상은 거대하고 고도로 정밀한 시계장치라고 믿었다. 훌륭한 프랑스 철학자이자 물리학자 겸 생리학자인 데카르트는 그 시계장치를, 기계적으로서 묘사했다: 모든 인과관계는 압력이다. 그것은 최초의 그리고 가장 분명한 인과관계론이었다. 나중에 약 1900년대부터 계속해서 세계는 전기적 시계장치로서 간주되었다. 그러나 두 가지 경우들 모두에서 세계는 이상적으로 정확한 시계장치로서 간주되었다. 태엽들이 서로를 밀거나 아니면 전자석들이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서로 당기거나 반발했다. 이 세계 안에는 인간이 결정할 여지가 없었다. 우리가 활동하고 계획하고 서로 이해하고 있다는 우리의 느낌들은 망상이었다. 퍼스(Peirce)라는 훌륭한 철학자를 제외하고 이 결정론적 견해를 감히 논쟁거리로 삼은 철학자는 없었다.

 

그러나 1927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와 동시에 시작되어 양자물리학에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 세밀한 과정들로 인하여 시계장치가 부정확해진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객관적인 비결정성들이 있었다. 물리이론은 확률들을 불러들여야 했다.

 

내가 하이젠베르크 및 다른 물리학자들과 어떤 심각한 의견불일치를 겪은 것은 여기였는데, 심지어 나의 영웅인 아인슈타인과도 심각한 의견불일치를 겪었다. 이유인즉 그들 대부분이, 확률들이 우리의 지식부족과 관련되고 그리하여 우리의 정신상태와 관련된다는 견해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관론적인 확률론을 채택했다. 이것과 반대로 나는 객관론적인 이론을 채택하고 싶었다. 이로 인하여 나는 주로 수학적인 문제들의 무리에 다다랐다; 그 매력이 바로 오늘까지 나에게 남아있는 문제들.

 

수학적 확률론은, 주사위 던지기와 동전 던지기 혹은 여러분의 기대수명 추산하기와 혹시 보험을 목적으로 같은 것들을 다룬다. 여러분이 앞으로 20년을 살 것의 확률은 얼마인가? 이것에는 자체의 작은 수학적 문제들이 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오늘부터 20년을 살 것이라는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2008년에도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확률은, 여러분이 생존한다면 2008824일에 그 확률이 1이 될 때까지 매일 그리고 매주 여러분 대부분에게 증가한다. 그러나 여러분이 오늘부터 매일 앞으로 20년 동안 생존할 확률은 여러분이 살아가는 매일 매주에 따라서, 그리고 재채기와 기침을 할 때마다 점점 내려간다; 그리고 여러분이 사고에 의하여 사망하지 않을지라도, 여러분의 실제 사망 몇 년 전에 확률이 0에 근접할 개연성이 없지 않다. 물론 여러분은 0이 가장 낮은 확률이고 1이 가장 높은 확률임을 안다; 그리고 동전앞면 나오기의 확률이 동전뒷면 나오기의 확률과 같아서 이 경우의 수 각각에 1/2의 확률이 있는 것처럼, 1/2은 발생하거나 똑 같이 쉽게 발생하지 않을 경우의 수의 확률이다.

 

수학적 확률이론은, 여러분이 알 것과 같이, 양자물리학에서 그리고 정말로 모든 과학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학에서 확률이론을 내가 접한 이래, 나는 확률론의 적어도 일곱 가지 다른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리고 내가 만족스럽고 매우 단순한 해결책들에 도달하는 것은 수십 년이 지나서였을 뿐이다. 이 해결책들 중 한 가지는 내가 확률에 대한 성향해석(the propensity interpretation of probability)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해석을, 35년 이상 연구한 후인 1956년에야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 이론은 더욱 성장하여 내가 그 이론이 지닌 우주론적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겨우 지난 해였다. 우리가 성향의 세계(a world of propensities)에 산다는 사실과 이 사실로 인하여 우리의 세계가 과학들의 앞선 상태들에 의하여 밝혀지는 세계보다 더 흥미롭고 더 안락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의미한다.

 

확률에 대한 성향해석(the propensity interpretation of probability)을 나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싶다: 이것을 목적으로 나는 동전던지기로 되돌아가겠다.

 

고전적인 확률론은, 다음 정의(定義: definition)을 토대로 강력한 이론체계를 세웠다: ‘한 가지 경우의 확률은, 모든 동등한 가능성들의 숫자에 의하여 나누어져 선호되는 가능성들의 숫자이다.’ 그리하여 고전적 이론은 단순히 가능성들에 관해서였다; 그리고 동전뒷면 나오기경우의 확률은 12로 나누지는 것일 텐데 왜냐하면 전부 두 가지 동등한 가능성들이 있고 한 가지 가능성만 뒷면의 경우에 선호적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한 가능성은 뒷면에서 선호적이 아니다. 유사하게 결점이 없는 주사위를 사용하여 6 미만의 짝수를 던질 가능성은 26으로 나누는 것인데 그것은 물론 1/3과 동일하다. 이유인즉 6면이 있어서 6 가지 동등한 가능성들이 있고 이 가능성들 중 오직 두 가능성들만, 다시 말해서 24가 표시된 면들만 ‘6 미만의 짝수가 나타나는경우에 선호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사위에 무게가 실렸거나 동전이 구부러졌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고전적 이론에 따라서 가령, 파스칼(Pascal)의 시대나 라플라스(Laplace)의 시대에 주사위의 여섯 가지 가능성들과 동전의 두 가지 가능성들이 동등한 가능성들이라고 우리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그런 경우에 동등한 가능성들이 없기 때문에, 고전적인 숫자의 의미에서 우리가 여기서 확률들을 말할 수 없다.

 

물론 파스칼은, 무게가 실린 주사위가 도박에서 속임수를 목적으로 발명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상 나무 주사위 속에 작은 납 조각을, 가령, 숫자 6을 지닌 면 가까이에 삽입한다면 이 숫자가 정품 주사위를 던질 때 나타나는 것보다 덜 자주 나타나서 반대 면의 숫자가 더 빈번하게 나올 것임을 모든 사람이 알았다. 여전히 6 가지 가능성들이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들은 동등한 가능성들이 아니라 이제 무게가 실린 가능성들이다; 동등하지 않거나 그 불평등이나 다른 무게가 평가될 가능성들로 무게가 정말로 측정될 가능성들.

 

더 일반적인 확률론이 그런 무게가 실린 가능성들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동등한 가능성들의 경우들이, 무게가 실린 가능성들의 특별한 경우들로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 심지어 분명하다: 분명히, 동등한 가능성들은 그 무게들이 우연히 동등한 무게가 실린 가능성들로서 간주될 수 있다.

 

그래서 무게가 실린 가능성들이라는 관념은 더 일반적인 확률론에 근본적이다. 그 관념은, 심지어 운을 걸고 하는 게임들인 도박이라는 더 일반적인 이론에도 필요하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관념이 모든 과학들에도 물리학에도, 생물학에도 그리고 특정 햇수를 사람이 생존하는 확률과 같은 문제들에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들 모두는, 엄밀하게 동질적이고 균형적으로 만들어진 주사위나 동전들이나 룰렛들을 사용하는 도박의 경우들과 매우 다르고 그 경우들보다 더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일반화에는 극복될 수 없는 난제가 없다: 동등한 가능성들이 부재한 경우에, 주사위에 무게가 실리는 경우에서처럼 특정 가능성들 및 확률들이 다른 가능성들 및 확률들보다 더 크거나 더 무겁다고 우리는 여전히 말할 것이다.

 

발생하는 주요 문제는 이렇다: 무게가 실린 가능성들의 실제 무게를 우리가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혹은 한 쌍의 저울들과 같은 도구 존재하는가? 우리가 숫자적 가치들을, 동등하지 않은 가능성들에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는가?

 

분명한 답변은: 있다, 통계적 방법이다; 있다, 주사위 던지기의 경우에서처럼 문제의 확률론적 경우들을 야기하는 상황을 우리가 반복할 수 있다면; 아니면 (햇볕이나 비의 경우에서처럼) 문제의 경우들이, 우리의 간섭 없이, 반복된다면. 그런 반복들의 숫자가 충분히 크다면, 우리는 통계를 가능성들의 무게를 재는 방법으로서, 그리고 가능성들의 무게들을 측정하는 방법으로서 이용할 수 있다. 혹은 다소 더 명시적으로, 더 크거나 더 작은 경우들의 빈도, 가설적으로 부여된 무게가 정말로 합당한 가설인지에 대한 시금석으로서 이용될 것이다. 그것을 더 단순하게 표현하면, 경우의 빈도를 상응하는 가능성의 무게를 측정하는 것으로 우리는 간주하여 브라이튼(Brighton)에서 6월에 비가 오는 일요일이 여러 해에 걸쳐서 관찰되어서 평균적으로 6월에 일요일 5일 중에서 하루가 비가 올 것이라면 그 확률이 1/5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래서 다양한 가능성들의 다양한 무게들을 측정하기 위하여 우리는 통계적 평균들을 이용한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하고 직설적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제 정말로 중요한 요점들이 온다.

(1) 내가 말할 것이 참이라면 무게가 실린 특정 주사위를 던져서 2가 나오는가능성의 무게를 우리가 측정하여 그 무게가 0.1666 = 1/6 대신 겨우 0.15임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주사위를 사용하여 (혹은 충분히 유사한 주사위를 사용하여) 던지는 구조에는, 정품 주사위에 의하여 밝혀지는 경향보다 더 작은 2가 나오는경우를 실현하는 경향이나 성향이 틀림없이 내재된다. 그리하여 나의 첫 번째 요점은, 어떤 경우를 실현하는 경향이나 성향은 일반적으로 모든 가능성에 내재적이고 모든 단일 던지기에 내재적이라는 것이고 아주 여러 번 던져서 실제로 실현되는 상대적 빈도의 도움을 받아서 이 경향이나 성향의 척도를 우리가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제의 경우가 실제로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를 알아냄에 의하여 이 경향이나 성향의 척도를 우리가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그래서 발생하는 경우의 가능성을 말하는 대신에, 반복되어서 특정 통계적 평균을 내는 내재적 성향을 우리는 아마도 더 정확하게 말할 것이다.

(3) 이제 이것은, 추가적으로 반복된다면 반복되고 반복된다면 모든 관련 조건들이 안정상태로 유지된다는 조건으로 통계가 그 다음에 안정성을 향한 경향을 정말로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자침의 경향이나 성향이 북쪽을 향한다는 (자침이 떠맡을 초기 위치로부터) 경향이나 성향을, (a) 자침의 내부 구조, (b) 우리의 지구에 의하여 자침과 함께 운반되는 보이지 않는 힘의 장(the invisible field of forces) 요컨대, 물리적 상황의 불변적 양상들에 의하여 우리가 설명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a) 주사위의 내부 구조와 (b) 지구가 주사위와 함께 운반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장(: field) (c) 마찰, 기타에 의하여 요컨대, 물리적 상황의 불변적 양상들에 의하여 안정된 통계적 빈도들을 낳는 (시작 수열로부터) 주사위를 사용한 던지기들의 수열이 지닌 경향이나 성향을 설명한다: 모든 단일 던지기에 영향을 미치는 성향들의 장(: field).

 

조건들이 안정상태로 유지된다면, 안정되는 통계적 평균들의 경향은 우리의 우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중 한 가지 특징이다. 그 특징은 성향이론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가능성들 이상인 무게가 실린 가능성들이 존재하지만 실재적인 경향들이나 성향들이 존재한다는 이론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고: 다양한 등급들로 모든 가능성들에 내재적이며 통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힘들(forces)과 같은 것이고 자체들을 실현하는 경향들이나 성향들.

 

이것이 확률론에 대한 객관적 해석이다. 성향들은 단순히 가능성들이 아니라 물리적 실재들이라고 전제된다. 그것들은 힘들(forces)이나 힘들의 장들(fields of forces)만큼 실재적이다. 그리고 역순도 성립한다: 힘들(forces)은 성향들(propensities)이다. 힘들은 물체들을 움직이는 성향들이다. 힘들은 가속하는 성향들이고, 힘들의 장들은 공간의 어떤 지역에 분배되어 아마도 이 지역에 걸쳐서 (어떤 주어진 근원으로부터 유래하는 거리들[distances]처럼) 지속적으로 변하는 성향들이다. 그것들은 실재적이다, 그것들은 존재한다.

 

수학적 확률들, 0에서 1까지 숫자적 가치들을 띠는 척도들이다. 0은 불가능성으로서, 1은 확실성으로서, 1/2은 완벽한 비결정성으로서 그리고 1/21 사이의 가치들은 가령 7/10 확률이 높은 것으로서 해석된다.

 

물리적 성향들은 다소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성향 1, 작용 중인 고전적 힘의 특별한 경우이다: 그것이 효과를 낳은 때 원인. 성향이 1 미만이라면, 이것은 다양한 반대 방향들에서 끌어들이지만 아직 실재적인 과정을 야기하거나 통제하지 않는 경쟁하는 힘들(forces)의 존재로서 상상될 수 있다. 그리고 가능성들이 지속적인 것보다 분리된 것일 때마다, 이 힘들은 분리된 가능성들을 향하여 이끌리는데 그 가능성들에는 화해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숫자 1숫자 없음을 의미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향 0들은 전혀 성향들이 아닐 뿐이다. (내가 어떤 저술가의 저서들 몇 권을 읽었고 그 숫자가 0이라고 그 저술가에게 말한다면, 나는 그 저술가를 오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저서들을 한 권도 읽지 않았. 유사하게 성향 0은 성향을 의미하지 않는.) 예를 들어, 정품 주사위 두 개를 사용하여 다음에 던질 때 숫자 14을 얻을 성향은 0이다: 그런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아서 성향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적 의미에서 힘들(forces)은 아이작 뉴튼(Issac Newton)에 의하여 물리학과 우주론에 도입되었는데 그에게는 물론 이 관념을 향하여 자신들의 방식들 느끼고 있던 선배들이 있었는데 특히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였다. 뉴튼에 의한 힘들(forces)의 도입은, 물리학에서 보이지 않거나 숨겨져 있거나 신비한실체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대를 받았을지라도, 커다란 성공작이었다. 정말로 버클리(Berkeley) 주교는, 보이지 않는 실체들과 신비한 특성들을 자연에 도입한 것에 대하여 뉴튼을 공격함으로써 과학의 실증주의적 철학을 세웠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리고 이 철학에서 특히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와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뉴튼의 힘 이론(theory of forces)에는 특히 인력 이론 엄청난 설명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론은 특히 외르스테드(Ørsted), 패러데이(Faraday)와 맥스웰(Maxwell) 그 다음에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더욱 발전했는데 아인슈타인은 뉴튼의 힘들(forces)을 자신의 구부러진 시공간 이론(theory of curved spacetime)에 의하여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성향들의 도입은 힘들(forces)이라는 관념을 다시 일반화하고 확대하는 것에 해당한다. 힘들(forces)이라는 관념이 버클리와 마흐 및 헤르츠의 실증주의적 후계자들에 의하여 반박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향들이라는 관념도 버클 리가 신비한 특성들로 지칭한 것을 물리학에 도입하는 것으로서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다시 배척된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성향들이나 객관적 확률들의 이론을 수용했지만 그 이론을 개선하려고 (내가 생각하기에 다소 성급하게) 시도했다. 성향들은 주사위나 동전처럼 대상 안에 내재한 속성들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되고 상황에 (물론 대상이 한 부분을 차지하는) 내재한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고 나는 강조했다. 성향 이론의 상황적 양상은 중요하고, 양자이론의 실재론적 해석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나는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1/21/6의 성향들은 동전이나 주사위의 근본적인 균형 속성들이라고 주장하고 1년 더 혹은 20년 더 생존할 성향은 남녀 신체와 건강상태 구조의 근본적 속성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한 가지 강력한 논증으로서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은,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이 견해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이는 생명보험사의 생존지표를 제시했다.

 

그러나 생존 성향이 건강상태의 속성이 상황의 속성이 아니라는 견해는 심각한 오류로 쉽게 밝혀질 수 있다. 사실상 건상상태는 매우 중요하다 상황의 중요한 면이다. 그러나 누구나 병이 들거나 사고에 관련될 것과 같이, 누가 그런 약품을 먹을 위치에 실제로 들건 아니건 의학의 진보로 가령, 강력한 새로운 약품의 발명 (항생제들과 같은) 인하여 모든 사람의 생존 전망들이 변한다. 상황으로 인하여 가능성들이 변하고 그리하여 성향들이 변한다.

 

이것이 완벽한 반례(反例: a counterexample)라고 그래서 더 많은 것이 언급될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례는 조금 확대될 것이다. 새로운 발명품은 적어도 처음에 값비쌀 것인데 그로 인하여, 어떤 사람의 근본적인 건강상태가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의 지갑 상태나 가능한 건강 보호기관의 재정 및 분명히 그 기관의 의료진의 특성 또한 중요해진다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게다가 성향들에 대한 나의 최초 발표에서, 탁자 상판에 합당한 구멍이 뚫렸다면 동전이 앞면으로 평평한 탁자에 떨어질 성향은 분명히 수정된다는 것을 나는 지적했다. 유사하게 탁자 상판이 대리석으로 된 것이라기보다는 매우 신축적이라면 혹은 그 상판에 모래가 깔려있다면 무게가 실린 동일한 동전은 다양한 성향들을 지닐 것이다.

 

물론 실험물리학자 모두는, 그가 얻는 결과들이 온도나 습기의 존재에 얼마나 많이 좌우되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전형적인 몇몇 실험들은 성향들을 상당히 직접적으로 측정한다; 예를 들어, 프랑크-헤르츠(Franck-Hertz) 실험은, 기체원자들과 상호작용하는 전자들의 성향이 전자들의 전압이 올라감에 따라서 어떻게 거의 불연속적으로 변하는지를 측정한다.

 

양자이론에 대한 고전적 실험들 중 한 가지 실험인 프랑크-헤르츠 실험은 증가하는 전압에 대한 이 상호작용의 의존을 연구한다. 전압이 올라갈수록 전자들의 전류 강도가 서서히 올라가고 그 다음에 별안간 떨어진다; 그 강도는 훨씬 더 높은 준위(level)로 서서히 다시 올라가고 다시 별안간 떨어진다. 이것은, 기체원자들의 분리된 여기(勵起: excitation) 상태들에 단계적으로 도달하는 단일 전자들의 결과로서 해석된다. 여기서 전압의 외부 조건의 변화는 결정적인 독립 변수이다; 그리고 서로 상호작용하는 전자들과 원자들의 변하는 성향들은, 그것들이 변하는 전압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기록된다.

 

이런 종류의 실험에 그리고 많은 이런 종류의 원자적 실험들 관하여, 가령 주사위 던지기 실험이나 몇 가지 통계적 문제들에 (가령 생명 보험 목록들) 대하여 충분할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 확률계산과 반대로 상대적 혹은 조건적 확률계산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절대적 확률 계산으로의 명제는

 

(1) p(a) = r

 

서술되고 a 경우의 확률은 r이다로 읽힌다. (여기서 r은 실수[real number]0r1이다.) 이것은 상대적 혹은 조건적 확률 명제인

 

(2) p(a,b) = r

 

대비를 이루는데 b 상황에서 (혹은 주어진 조건 b에서) a 경우의 확률은 r이다로 읽힌다.

 

변하지 않는 (혹은 그 변화들을 우리가 무시할) 상황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다면, 최종적으로 조건들을 기술하여 우리는 절대적 확률들이나 절대적 성향들로써 연구할 수 있다. 그리하여 a(예를 들어 1년 안에 붕괴하는 특정 종류의 방사능 원자의) 확률이 b(예를 들어 붕괴하는 또 다른 종류의 원자의) 확률보다 100배 더 크다고 여러분이 진술한다면, 여러분은 ab 모두에 대하여 불변적이고 안정적인 조건들을 전제할 (그리고 예를 들어 이 원자들 중 한 원자가, 느린 중성자들에 의하여 방사선에 노출되는 결정체의 한 부분이라고 전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크-헤르츠 실험에서, 정말로 확정된 방식으로 (전압이 서서히 증가함에 따라서) 변하는 조건들에 성향이 의존하는 것에 우리는 관심을 갖는다.

 

많은 다른 양자 실험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프랑크-헤르츠 시험의 한 가지 양상은, 관련된 전자들이 그렇게 많이 있기 때문에 조건들이 변할지라도 성향들을 우리가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계적 측정과 관련하여, 많은 숫자의 전자들은 길게 반복되는 수열들을 대체하기에 아주 충분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많은 종류의 경우들에서 이것은 사실이 아니어서 성향들이 측정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관련 상황이 변하여 반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진화론에서 우리의 선조들 중 몇몇이 지녔던 다양한 성향들이 침팬지들과 우리 자신들을 낳았다는 데 유효할 터이다. 이런 종류의 성향들은 물론 측정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상황이 반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성향들이 존재한다고 우리가 상상하고 그런 성향들을 사변적으로 추산하는 것을 아무 것도 막지 못한다.

 

요약하면: 물리학에서 성향들은 물리적 상황 전체의 속성들이고, 때때로 심지어 상황이 변하는 특정 방식의 속성들이다. 그리고 화학에서의 성향들, 생화학에서의 속성들 그리고 생물학에서의 속성들로 마찬가지다.

 

이제 변하는 우리의 실재적 세상에서, 상황은 그 상황과 함께 가능성들 그리하여 성향들이 항상 변한다. 그것들은, 우리나 다른 생명체들이 또 다른 가능성보다 한 가지 가능성을 선호한다, 틀림없이 변한다; 혹은 우리가 이전에 한 가지 가능성을 보지 못한 곳에서 우리가 그 가능성을 발견한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바로 그 이해함으로 인하여 변하는 세상의 조건들이 변한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들, 우리의 선호들, 우리의 동기들, 우리의 희망들, 우리의 꿈들, 우리의 환상들, 우리의 가설들, 우리의 이론들로 인해서도 변하는 세상의 조건들이 변한다. 우리의 올바른 이론들이 통상적으로 더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지라도, 심지어 우리의 잘못된 이론들로 인하여 세상이 변한다. 이 모든 것은, 결정론이 오류일 따름이라는 사실에 해당한다: 결정론의 모든 전통적 논증들은 시들어 사라졌고 비결정론과 자유 의지가 물리과학 및 생물과학의 한 부분이 되었다.

 

우리의 행동들을 결정하는 동기론과, 이 동기들이 반대로 앞선 동기들과 기타 등등에 의하여 동기화되거나 초래된다는 이론은 정말로 동기화되는 인간적 관심사들에서 결정론이라는 이념을 확립하려는 소망에 의하여 동기화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성향들의 도입과 동시에, 결정론이라는 이념은 증발한다. 과거의 상황들로,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혼합적이든, 인하여 미래의 상황이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의 상황들에 의하여, 미래의 상황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결정하지 않고 미래의 상황에 영향을 미치며 변하는 성향들이 결정된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경험들은 우리의 소망들과 우리의 노력들을 포함하여 경우에 따라서 때로는 더 많게 그리고 때로는 더 적게 성향들에 기여할 것이다. (날씨의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나의 소망들은 햇빛이 난 내일에 기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소망들은 런던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 편을 내가 잡는 데 많이 기여할 수 있다.)

 

이 모든 경우들에서, 성향 이론으로 인하여 우리는 객관적 확률론을 다룰 수 있다. 우리가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완전히 별도로, 미래는 객관적으로 확정되지 않았. 미래는 열려있: 객관적으로 열려있. 과거만 확정되었다; 과거는 실제화되었고 과거는 사라졌다. 현재는, 성향들이 실제화되는 지속적 과정으로서 기술될 수 있다; 혹은 더 은유적으로, 성향들을 동결하거나 구체화하는 지속적 과정으로서. 성향들이 자체를 실제화하거나 실현하는 반면, 성향들은 계속되는 과정들이다. 성향들이 실현될 때, 성향들은 더 이상 실재적 과정들이 아니다. 성향들은 동결되고 과거가 그리고 비실재적이 된다. 변하는 성향들은 객관적인 과정들이고 그 성향은 우리의 지식 부족과 관계가 없다; 우리의 지식 부족이 물론 매우 클지라도, 그리고 특정 과오가 변하는 상황의 중요한 부분일지라도.

 

성향들은, 뉴튼의 인력처럼, 보이지 않고 그 인력처럼 작용할 수 있다: 성향들을 실제적이고, 성향들을 실재적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일종의 실재를 단순히 가능성들에게, 특히 무게가 실린 가능성들에게 그리고 특히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그 운명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결정될 뿐이고 아마도 먼 미래에 결정될 뿐인 가능성들에게 귀속시킬 수밖에 없다.

 

성향들에 대한 이 견해로 인하여 우리는 세상을 구성하는 과정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세계 과정. 세계는 더 이상 인과적 기계가 아니다 세계는 이제 가능성들을 실현하여 펼치는 과정과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하여 펼치는 과정으로서, 성향들의 세계로서 보일 수 있다.

 

새로운 원소들인 새로운 원자핵들이, 온도와 압력의 극한적인 물리적 조건 하에서 생성되는 물리적 세계에서 이것은 매우 분명하다: 너무 불안정하지 않다는 조건으로만 생존하는 원소들. 그리고 새로운 원소들인 새로운 핵들과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들이 만들어지는데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을 뿐인 가능성들이다. 결국 우리 자신이 가능성을 띤다.

 

물리학의 세계는 비결정론적임을 우리는 얼마 동안 알았다. 물리학의 세계는 오랫동안 결정론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다음 양자 비결정론이 수용된 이후, 방사성 원자들과 같은 최고로 작은 물체들에게만 아주 적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비결정론은 통상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로 판명되었

 

a 역주: ‘변하는 성향들은 객관적인 과정들이고 그 성향은 우리의 지식 부족과 관계가 없다; 우리의 지식 부족이 물론 매우 클지라도, 그리고 특정 과오가 변하는 상황의 중요한 부분일지라도.’라는 저자의 주장은, 앞의 문장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경험들은 우리의 소망들과 우리의 노력들을 포함하여 경우에 따라서 때로는 더 많게 그리고 때로는 더 적게 성향들에 기여할 것이다.’, 등등의 표현과 상충하는 듯이 보인다.

 

. 소립자들이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화학반응들의 그리하여 고전적인 질량효과들의 확률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특히 일본인 화학자 겐이치 후쿠이(Kenichi Fukui)의 발견을 통하여 비점유 경계 궤도함수들(unoccupied frontier orbitals)이 화학반응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지금은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것들은 비실현가능성들일 뿐이다 아마도 드브로이 공파들(empty de Broglie waves). 아무튼 그것들은 인력과 유사한 성향들이다.

 

화학적 진화를 훑어보자. 특히 생화학의 진화에서, 모든 새로운 화합물은 합성하려는 새로운 추가 화합물들을 위한 가능성들을 만들어낸다고 널리 인정된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가능성들. 가능성 공간은 (non-zero 가능성들의 공간) 증가하고 있다. (부언하여, 모든 공간들은 가능성 공간들이다.)

 

그리고 이 성장의 배후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될 수 있는 자연법칙과 같은 것이 숨어있는 듯이 보인다: 모든 non-zero 가능성들, 심지어 작은 non-zero 성향만 부착되는 non-zero 가능성들은 그렇게 할 시간이 있다면 결국 실현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충분히 긴 기간에 걸쳐서 조건이 충분히 자주 반복되거나 불변 상태라면. 이 법칙은, 다양한 가능성 공간들에 일종의 공간 혐오(horror vacui)(아마도 일종의 드브로이 공파 혐오[horror of empty de Broglie waves]로 그리하여 성향들은 활동성 인력[active attractive forces]과 같다.) 있다고 서술하는 것에 해당한다.

 

새로이 합성된 화합물의 생성이 나중에 합성하는 새로운 화합물들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생성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모든 새로운 성향들은 항상 새로운 가능성들을 생성한다.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들은, 다시 새로운 가능성들을 생성하기 위하여, 실현되는 경향을 띤다. 우리의 성향들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창조적이다.

 

이 경향들과 성향들은 생명체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하여 생명체가 크게 펼쳐졌고 생명체의 진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생명체의 진화는 지구상에서 생명체를 위한 나은 조건들을 그리하여 새로운 가능성들과 성향들을 초래했다; 옛 형태들과 그리고 서로, 크게 다른 생명체의 새로운 형태들을 초래했다. 이 모든 것은, 가능성들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 일종의 실재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능성들에 부착되는 숫자적 성향들은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실재성의 생성되고 있는 실재성 이 위상에 대한 척도로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가능성들이 결국 실현될 수 있고 부분적으로 실현될 것인 한, 열린 미래는 경쟁하는 많은 가능성들과 함께 어느 정도 약속으로서 그리고 유혹으로 그리고 미끼로서 이미 현존한다. 미래는 이런 정도로 매순간마다 활동적으로 현존한다.

 

압력들로써 혹은 모두 과거에 과거에 우리를 발로 차고 발로 차서 우리를 미래 속으로 넣은, 사라진 과거 존재하는 더 추상적인 원인들로써 작용하는 체제를 우리 앞에 세우는 옛 세계 그림은, 성향들로 구성된 우리의 비결정론적 세계에서 더 이상 합당하지 않다. 인과관계는 성향의 특별한 경우일 뿐이다: 실현을 위한 1이자 결정하는 요구 혹은 힘과 대등한 성향의 경우.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뒤에서, 과거로부터 발로 차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매혹하고 우리를 유혹하는 미래의 매혹과 미끼와 경쟁하는 미래의 가능성들이다. 이것이 생명체를 그리고 정말로 세계를 끊임없이 펼치는 것이다. (뉴튼의 힘도 인력[매력적인 힘들: attractive forces]임을 기억하라!)

 

이제 나는 인과관계로 선회한다. 성향들에 관하여 언급된 것에 비추어, 두 가지 언급들이 인과관계에 관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보기에 새로운 언급들.

 

첫 번째 언급은, 인과관계의 결정론적 압력 이론에 관한 언급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운동은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운동은 운동자(mover)에 의하여 설명된다. 이 관념은, 데카르트의 세계에 대한 시계구조 이론에서 해명되고 상술된다. 세계는, 그 안에서 한 가지 톱니바퀴의 한 톱니가 인접한 톱니바퀴의 톱니를 미는 기계적 시계구조이다. 바퀴들이 완벽하기 때문에 운동의 손실이 없다. 원동자(the first mover)는 제1 원인(the first cause)이고 모든 인과관계는 압력(push)이다. 뉴튼은 여전히 이 노선들 위에서 생각하고 있어서, 그가 광학(Optics)에서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인력(attractive pull)을 압력(push)으로 환원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르사쥬(Lesage)와 반대로, 르사쥬 형태의 이론은 작동하지 않을 것임을 그는 깨달았다. 그래서 인과관계에 대한 데카르트의 일원론적 압력 이론은 나를 밀고 너를 당긴다(push-me-pull-you) 이론으로 대체되었다: 처음에는 심지어 뉴튼 자신에게도 충격적이었지만, 심지어 포우프(Pope)같은 시인에게도 여전히 고도로 직관적인 이론으로.

 

패러데이(Faraday)와 맥스웰(Maxwell)은 세계-시계의 전화(電化: electrification)을 준비했다. 압력(push)은 더 이상 인력(pull)과 대칭적이 아니었고 외르스테드(Ørsted)의 힘들(forces)은 매우 중요한 추가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외르스테드(Ørsted)의 힘들(forces)은 핵심적이 아니어서 나를 밀고 너를 당긴다(push-me-pull-you) 세계의 직관적인 특징을 실제로 파괴한다. 물리학은 이제 추상적이 된다: 외르스테드(Ørsted)의 힘들(forces)로 인하여 장(: field) 이론이 불가피해진다. 그래서 새로운 물리학은 이론물리학(theoretical theory)’이나 이론물리학(theoretische Physik)으로 지칭되었다; 먼저 나는 베를린에서, 헬름홀츠 원(Helmholtz circle) 안에서 생각한다. 그것은, 물리적 세계의 추상적이자 은닉되고 불변적인 구조적 속성들을 기술하려고 시도했다. 원인(Cause), 수용된 이론에 상대적으로 초기조건들에 의하여 기술된 사건들의 상태가 되었다. 결과(Effect), 초기조건들이 존재하면서 이론이 예측할 저 사건이나 저 사건들의 상태였다.

 

이 연역적 관계 때문에, 이론이 존재하면서 원인이 주어진 결과의 확률이 1이라는 것은 사소하다:

 

p (결과, 원인) = 1

 

이것은 사소하다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성향들의 세계에서, 다음 견해를 초래한다, 미래에 일어날 것은 가령, 내일 정오 어느 정도까지 열려있다. 자체들을 실현하려고 시도하는 많은 가능성들이 있지만 현존하는 상태들을 고려하면 매우 높은 성향을 지닌 가능성들은 없다. 내일 정오가 다가올 때, 부단히 변하는 상태들 하에서, 이 성향들 중 많은 성향들은 0이 될 것이고 다른 성향들은 매우 작아질 것이다; 그리고 남은 성향들 중 몇몇 성향들은 증가했을 것이다. 정오에 실현되는 저 성향들은, 당시 존재하는 상태들이 관여하면서 1이 될 것이다. 몇몇 성향들은 지속적으로 1로 움직일 것이다; 다른 성향들은 불연속 도약으로 1로 움직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첫눈에 보이기에 인과적 및 비인과적 경우들을 여전히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정오의 조건들의 궁극적 상태를 성향들의 궁극적 실현의 원인으로서 우리가 간주할지라도, 세계에 대한 이 견해에는 데카르트적인 옛 결정론적 압력에서 남은 것이 없다.

 

이것이, 성향들의 이론에 비춘 인과관계에 관한 나의 첫 번째 언급이다. 그러나 첫 번째 언급을 보완하기 위하여 두 번째 언급이 필요하다.

 

우리의 이론물리학에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세계에 있는 불변적인 구조적 속성들에 대한 다소 추상적인 우리의 기술에는, 우리가 결정론적 특징을 띤 자연법칙들로 지칭할 것들과 프랑크(Franck)와 헤르츠(Hertz)에 의하여 기술된 것들과 같이 우리가 확률론적인 특징을 띤 자연법칙들로 지칭할 다른 것들이 있다. 먼저 결정론적인 법칙들을 가령, 케플러의 법칙들인데 그 법칙들은 너무 이심적이 아닌 행성 타원들(not too excentric planetary ellipses)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바라보자; 혹은 가령, 보어(Bohr)의 탁월한 1921년 주기계(periodic system) 이론.

 

우리의 세계의 구조적 속성들을 기술하는 이런 종류의 이론이 지닌 위상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가설들로, ‘우주 조화(Harmony of the Universe)의 비밀들을 발견하려는 케플러의 커다란 문제 혹은 러더포드(Rutherford) 핵들(nuclei)을 둘러싼 자신의 전자론을 통하여 원소들의 주기계(periodic system)를 설명하는 보어의 문제와 같은 몇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흔히 성공적이지 않은) 도달된 가설들이다. 그것들이 탁월한 가설들이라고 이 거장들의 위대한 업적을 완전히 칭송하여 나는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들이 가설들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케플러의 법칙들이 뉴튼과 아인슈타인에 의하셔 수정된 사실과 보어의 이론이 동위원소 이론에 의하여 수정된 사실로부터 안다.

 

가설들이기 때문에 이것을 시험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가설들에게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한 것은, 시험들과 밀접하게 일치한 것이었다.

 

이제 그런 이론들은 어떻게 시험되는가? 분명히 실험들을 수행함에 의하여. 그리고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모든 간섭하고 방해하는 성향들을 배제하거나 0으로 줄이는 인위적 조건들을 자유로이 창조함에 의하여.

오직 우리의 행성들의 체계만, 무관한 모든 기계적 간섭으로부터 그렇게 잘 분리되어 그 체계는 독특하고 자연스러운 실험실 실험이다. 여기서, 내부적 방해들만 케플러 법칙들의 정밀성에 간섭한다. 케플러는, 이 문제들에 관하여 예를 들어 3체 문제(three-body problem)의 해결불가능성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했고, 그 문제들을 해결함에서 근사법(approximation method)을 뉴튼이 창조한 것은 뉴튼 이론이 지닌 한 가지 영광이었다. 그는, 행성들의 방해하는 성향들이 서로 간섭하는 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그 성향들을 조절했다.

 

대부분의 실험실 실험들에서, 온도변화들이나 정상적인 공기의 습도와 같은 많은 무관한 영향들을 우리는 배제해야 한다. 혹은 극한의 온도들이라는 가령, 절대온도 0에 가까운 인위적 환경을 우리는 조성해야 할 것이다. 이것에서 우리는 전적으로 우리의 가설적 통찰의 영향을 받아 우리 세계의 이론적 구조로 들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들을 야기하는 우리의 실험적 오류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결과들은 자유롭게 반복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만족스럽다; 그리고 우리가 간섭하는 성향들을 배제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조건으로만 이것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것은, 우리의 행성 체계를 제외하고 실험실이 아닌 세계에서 그렇게 엄격하게 결정론적인 법칙들이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행성들의 움직임들과 같은 특정 경우들에서, 우리의 이론들이 분리시킨 힘들의 벡터적(vectorial) 총화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사건들을 우리는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가령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실제적 사건에서,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재적인 사과들은, 강조하여, 뉴튼의 사과들이 아니다. 실재적 사과들은 통상적으로 바람이 불 때 떨어진다. 그리고 꼭지를 약화시켜 바람 때문에 반복되는 움직임이 뉴튼 사과의 무게와 함께 꼭지의 끊어짐을 초래하는 생화학적 과정에 독특한 상황에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를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도록 막는 생화학적 과정들의 확률론적 특징을 주요한 이유로, 우리가 분석할 수는 있지만 상세하게 계산할 수는 없는 과정 의하여 과정 전체가 시작된다. 우리가 혹시 계산할 수 있는 것은, 다음 한 시간 안에 떨어질 사과의 특별한 유형이 지닌 성향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날씨가 악화한다면 그 사과가 다음 주 안에 떨어질 개연성이 매우 높을 것이라고 우리는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떨어지는 뉴튼의 사과를 실재론적으로 바라본다면, 그 사과에는 결정론이 없다. 그리고 변하는 우리의 정신상태들에는 결정론이 훨씬 더 없는데 예를 들어 우리가 지닌 소위 동기들 중에서 많은 동기들에서 그렇다. 결정론적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의향은, 물체들에 압력을 가하는 사람들인 운동자들(movers)로서의 우리의 행위들에서 유래한다: 우리가 지닌 데카르트주의로부터.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다. 이것은 이념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역학적 (혹은 결정론적) 혼돈에 대한 수학의 새로운 결과들에 의하여 지금 뒷받침된다.

 

심지어 역학의 고전적 (혹은 결정론적’) 체계를 전제로, 움직임들이 빠르게 완전히 예측불가능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혼돈스러운움직임들을 우리가 얻을 것임을 이 새로운 이론이 밝혔는데 어떤 특별하지만 아주 단순한 초기조건들로부터 우리가 얻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든 기체의 분자 혼돈과 같은 결정론적물리학 안에서의 사실들을 우리는 이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런 사실들을 전제할 필요도 없고 또한 그런 사실들을 도출하기 위하여 양자물리학을 불러들일 필요도 없다.

 

이 논증은 내가 보기에 유효하다. 그러나 때때로 이 논증과 연결된 한 가지 해석은 내가 보기에 유효하지 않다. 그 해석은, 심지어 우리의 세상이 비결정론적이거나 혼돈적으로 보이는 곳에서도 우리의 세상이 실제로 결정론적이라고 우리가 전제할 것이라고 혹은 우리가 전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결정론적인 표면 배후에는 결정론적인 실재가 숨겨져 있다고. 이 해석을 나는 오류로서 간주한다. 이유인즉 증명된 것은, 고전물리학이 표면적으로만 (혹은 첫눈에) 결정론적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넓은 분야의 문제들이 고려되면 고전물리학의 결정론이 비결정론적으로 판명되는 반면, 뉴튼의 2체 문제(two-body problem)와 같은 특별한 종류의 문제들에만 고전물리학의 결정론이 들어맞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견해를 나는 적어도 1950년 이래 지지했다; 나의 논문 양자물리학과 고전물리학에서의 비결정론[Indeterminism in Quantum physics and in Classical Physics]’ (영국 과학철학지[BJPS] 1950) 및 나의 저서, 열린 우주[The Open Universe] (1982)과 아다마르[Hadamard]의 몇 가지 중요한 결론들과 비교하라.)

 

요컨대, 물론 많은 가능성들이 자연법칙이나 확률법칙에 의하여 배제될지라도 우리의 물리적 세계도 우리의 물리이론들도 결정론적이 아니다: 많은 0 성향들이 있다. 그리고 심지어 매우 작으면서 0이 아닌 성향들도, 그 성향들이 기회를 갖기 전에 상황이 변한다면,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상황이 완전히 불변적인 경우가 없다는 사실로 인하여, 매우 낮은 특정 성향들이 실현되는 적이 없어 보이는 이유가 설명된다. 주사위던지기에서 비커를 흔드는 것에는 던지기들을 서로 독립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다. 그러나 그 비커 흔들기는 정말로 더 많은 일을 수행한다: 비커 흔들기는, 매우 낮은 성향들이 실현되기 위한 수학적 조건인 물리적 조건의 불변성을 방해할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아마도,

극도로 비개연적인 경향은 이론에 따라서 그 경향이 틀림없이 발생할 것보다 실제로 훨씬 덜 발생한다는 몇몇 실험가들의 주장이 설명될 것이다. 확률론적으로 유관한 모든 조건들이 실제로 불변적으로 유지된다고 우리는 보장할 수 없다.

 

미래는 열려있다. 미래가 항상 열려있었다는 것은, 특히 생명체의 진화관련 경우에서 분명하다. 생명체의 진화에 거의 무한한 가능성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가능성들은 주로 배타적인 가능성들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단계들은, 많은 가능성들을 파괴하여 배타적인 선택들이었다. 결과적으로 비교적 극소수의 성향들만 실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현된 성향들의 다양성은 놀랍다. 우발적인 사건들, 특정 가능성들을 향한 생명체들의 선호행위들은 선호행위들이 혼재했던 과정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생명체들은 나은 세상을 찾고 있었다. 여기서 선호된 가능성들은, 정말로, 유혹들이었다.

 

나 자신의 긴 생애를 바라보며, 내가 17세가 된 해부터 나를 지속적으로 이끌었던 주요 유혹들은 이론적 문제들이었음을 나는 발견한다. 그리고 이 유혹들 가운데서, 과학에 관한 그리고 확률에 관한 문제들이 매우 중요하면서 우려를 자아냈다. 그 문제들은 선호들이었다. 해결책들은 우연적이었다.

 

서문에서 나의 저서까지의 개략적인 마무리 구절은, 이 모든 것을 젊은 과학도들에 교육에 적용할 것이다.

 

과학으로 향하는 혹은 저 문제라면, 철학으로 향하는 오직 한 가지 길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를 만나는 것, 문제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 아름다움과 사랑에 빠지는 것; 죽음이 당신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그 아름다움과 결혼하는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행복하게 사는 것 여러분이 또 다른 그리고 훨씬 더 매혹적인 문제를 만나지 않는다면 혹은 정말로, 여러분이 해결책을 얻지 못한다면. 그러나 여러분에 정말로 해결책을 얻을지라도, 여러분은 혹시 난해할지라도 매혹적인 문제 아이들로 구성된 전체 가족의 존재를 발견하고 여러분은 기뻐할 것이고 그 가족의 복지를 위하여 여러분은 목표를 세우고 여러분 시간이 끝날 때까지 연구할 것이다.

 

 

진화론적 지식론에

대하여

(Towards an Evolutionary

Theory of Knowle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