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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철학자가 되었나?*a
친애하는 이나모리(Inamori) 회장님,
저명한 이나모리 재단의 회원님들,
저명한 손님 여러분,
친애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여기 와서 1992년도 교토상(Kyoto Prize) 수상자들인 우리의 말을 경청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함으로써 내가 시작해도 되겠지요? 여러분은 틀림없이 우리 세 명 모두에게 우리 생애에서 가장 중대하고 행복한 시간의 하나를 축하하러 여기 왔습니다.
우리 각자는 두 강좌를 열기로 되어있다고 나는 아는데 그 강좌들 중에서 오늘 강좌가 첫 번째이다. 두 번째 강좌가 우리 각자의 연구 분야에서 전문가들에게 흥미로울 것인 반면, 내가 제공하는 오늘 강좌는 우리의 삶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가 주요 연구를 수행한 특수한 분야들에 우리가 우리의 관심과 우리의 열망을 바친 일이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관하여 여러분에 알려주어야 한다.
이제 나의 특별한 경우에서 불행하게도 오늘의 강좌와 관련된 이 형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여러분에게 나는 경고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철학자로서 여기 여러분 앞에 서있다; 그리고 나는 영국에서, 일본에서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 철학자로서 알려져 있다. 나에게 커다란 토교상이 수여된 것은 ‘20세기의 철학사상’이라는 분야에서이다. 그러나 나의
* 1992년 11월 11일 교토에서 모리스 빈센트 윌크스(Maurice Vincent Wilkes)와 (고등과학기술에서) 야스토미 니시츠카(Yasutomi Mishzuka)와 (기초과학에서) 함께 교토상(the Kyoto Prize)의 수상식에서 행한 연설.
a 역주: 이 장의 원문 제목은 HOW I BECAME A PHILOSOPHER WITHOUT TRYING인데 허형은 번역은 ‘문제들과 사랑에 빠졌더니, 어느 날 철학자가 되어 있더라’이다.
긴 생애에서 ‘내가 철학자가 되고 싶다’라거나 심지어 ‘나는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또한 나는 나의 생애에서 나 자신을 철학자로도 만족스럽게 바라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ㅡ 몇몇 전문적인 철학자들을 포함하여 ㅡ 이 부류로 나를 분류하기로 결정하여 나를 철학자로서 등급을 매긴다면, 내가 그렇게 계획하지도 않았고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이 발생했다.
물론 나의 생애의 어떤 단계에서 내가 채택하기를 원했던 직업을 나는 결정했다; 그리고 다소 망설인 후에 나는 교사가 되고 싶다고 마음을 정했다. 처음에 나는 초등학교교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나는 중등학교 교사가 ㅡ 수학, 물리학, 화학 및 생물학 교사 ㅡ 되고 싶었다. 이 목표를 염두에 두고 1918년 나는 16살에 학교를 자퇴하고 비엔나 대학의 수학 및 물리학과에서 소위 ‘특별한’a 학생이 되었다. 3년 후 나는 ‘평범한’ 학생이 되었고 그 후 7년이 지난 1928년 나는 철학박사 학위와 수학, 물리학, 화학 및 생물학 교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박사 논문을 칼 뷜러(Karl Bühler)를 지도교수로 심리학에서 작성했는데 그는 아동 심리학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내가 교육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심리학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 분야에서 나에게는 몇 가지 관념들이 ㅡ 내가 생각하기에 박사학위에 아주 충분한 ㅡ 있었다. 대조적으로 수학과 물리학 분야들을 내가 아주 높이 평가해서 이 탁월하고 어려운 두 가지 분야들에서 실제로 독창적인 나 자신의 관념을 틀림없이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감행을 했더라면 그리고 나 자신을 미래의 학교교사로 내가 간주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수학과 물리학을 나의 연구 분야들로 만들었을 터이다.
몇 년 후 이 두 분야에서 내가 독창적인 몇 가지 관념들을 정말로 가졌음을 아마도 내가 즉시 언급해야겠다: 그것은, 수학 안에서는 그 관념이 주로 확률이론의 공리화(公理化: axiomatization)에서였고 속론(束論: lattice theory)으로b 불리는 분야 안에서였다; 예를 들어 (하[下: meet]) 반속(半束: semi-lattice)에 근거하여 정의된 상대적 측정함수를 지닌 반속을 여러분이 지닌다면 그 반속은 상한(上限: join)을 정의하자마자 분배적이 된다는 정리에 ㅡ 확률 이론에서, 속론에서 그리고 양자물리학에서 흥미로운 정리 ㅡ 대하여 나는 최초로 증명했다.c 그리고 물리학의 양자역학 분야에서 몇 가지 독창적인
a 역주: “소위 ‘특별한’”의 원어 표현은 so-called 'extraordinary'인데 허형은 번역은 “‘영재’”이다.
b 역주: ‘공리화’와 ‘속론’의 허형은 번역은 각각 ‘공론화’ 및 ‘격자 이론’이다.
관념들이 나에게 있었다. 그리고 양자역학은 당시, 내가 박사학위를 받기 겨우 1년 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에 의하여 창안된 새로운 이론이었다. 이 하이젠베르크의 창안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그 창안은, 곧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의 파동역학에 의하여 대체되는 듯이 보였다: 슈뢰딩거의 파동역학 매우 다르게 보였지만 (거의) 대등한 결과들을 낳았고 더 직관적인 접근방식이었다. 나는 1935년에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를 모두 만났고 슈뢰딩거가 1961년에 사망할 때까지 친구로 남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의 가족의 친구이다.
여기서 나는 잠깐 중단하고 싶다. 내가 너무 많은 분야들에서 연구해서, 이 분야들 중 어떤 분야에서 창조적인 선도자에게 필요할 종류의 전문화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을 알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선도적 위치에 혹시 도달할 것이라고 잠시라도 생각하지 않고 여러 해 동안 나는 이 모든 주제들을 열렬히 공부했다. 이 다양한 주제들이 나에게 일깨워준 타오르는 흥미와 열정 때문에만 나는 공부했다. 그리고 또한 내가 어느 날 나의 제자들에게 이 흥미와 열정을 불어 넣어주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분야들 중 어떤 분야에서 발견자로서, 혹은 연구자로서 아니면 과학의 발전에서 선도자로서 내가 생애를 바라보았다면 물론 아마도 열 가지 다른 분야들에서 연구하는 나의 방식은 완전히 미친 짓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야망이 없었다; 적어도 매우 최근까지 ㅡ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를 독일어로 1934년 말경 출판할 때까지 ㅡ 그런 야망이 없었다.
나의 능력을 그렇게 많은 분야들에 쪼개어 소모하는 것에 관하여 내가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모든 것에 또 다른 고백을 추가해야겠다. 나의 집안은 음악 가족이었다. 나의 외조부모는 비엔나에서 음악친구들의 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로 알려진 조직의 공동 설립자였다. 19세기 중반에 비엔나에 있는 음악클럽홀(Musikvereinsaal)로 오랫동안 세계에서 최고로 유명한 연주홀인 빌딩에서 그 협회는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그 연주홀은 주로 베토벤의 교향곡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나는 여섯 살에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for example, I gave the first proof of the theorem that if you have a (meet) semi-lattice with a relative measure function defined on it, then it becomes distributive upon defining the join ㅡ a theorem of interest in probability theory, in lattice theory, and in quantum physics.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고, 수학적 전문용에 대하여 역자도 정확한 한글 번역을 알지 못한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를 나의 이상으로 삼고 작곡을 시작했다. 이 작곡들 대부분이 실종되었지만 한 작품인 오르간을 위한 푸가가, 작곡된 지 거의 70년 만에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있는 에스코리알 궁(Escorial Palace)에서 올해 7월에 초연되었다.
이제 나는, 내가 여기에 철학자로서 서있다는 사실과 나의 모든 연구 가운데서 내가 아직 철학연구를 여러분에게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주지시켜야겠다.
내가 7살이나 8살 때 내가 최초로 철학적 질문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무한성의 개념과 우주의 무한성을 나에게 설명해달라고 나의 부친에게 요구했다. 무한성을 상상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내가 알았다고 그래서 내가 설명을 원한다고 나는 말했다. 나의 부친은 자신의 두 형제 중 한 명에게 물어보라고 나에게 충고했는데 그 형제로부터, 실제적이거나 칸토적(Cantorian) 무한성과 대조적으로, 전문적으로 잠재적이거나 아리스토텔레스적 무한성으로 지칭되는 것에 대하여 정말로 탁월한 설명을 나는 들었다.a 그것은 거의 완벽하게 나를 만족시킨 설명이었다. 그 후 칸토적 무한성으로 인하여 나는 다소 당혹했고 그 후 늘 그랬다.
훨씬 더 많은 철학적 문제들이 다가왔다. 내가 10살 되던 해 ‘삶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나 자신과 나의 학교급우들에게 삶은 촛불 같은 산화과정이라고 ㅡ 내가 나중에 발견한 바, 그리스 철학자 에페소의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여 처음 상상된 것과 같이 ㅡ 제시했다. 철학적 문제들은, 심지어 내가 철학서적을 읽기 시작하기 전에 나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그 서적들 중 많은 서적들이 나의 부친의 서재에 있었다. 내가 읽기를 시도한 첫 번째 그런 저서는, 완전히 실패했을지라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었다. 나는 한 단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저서가 어떤 문제들을 다루려는 목적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곧, 쇼펜하우어가 저술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라는 (혹은 ‘의지와 관념으로서의[as Will and Idea]’b) 제목의 저서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설명한 또 다른 책이 나의 부친의 서재에 있는 것을 알았고, 내가 올바르게 기억한다면 이것은 내가 읽고 정말로 공부한 최초의 철학서였다 (적어도 최초의 매우 두꺼운 철학서였다).
a 역주: 이 문장에서 ‘칸토적’은 허형은 번역에 ‘칸트철학의’로 번역되었고, ‘전문적으로’의 원어는 technically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아래 문장의 ‘칸토적’도 역시 허형은 번역은 ‘칸트철학의’이다.
b 역주: 괄호 안의 부분은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나에게 쇼펜하우어는 난해했지만 나는 그로부터 많을 것을 배우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쇼펜하우어와 칸트를 읽었다. 내가 칸트를 독해할 수 있게 되자마자 나는 쇼펜하우어보다 칸트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칸트는, 나를 여러 해 동안 괴롭혔던 많은 미해결 문제들을 나에게 남겨주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철학자가 된다는 생각이 ㅡ 나의 독서를 주로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저서들과 같은 저서들에게 집중한다는 의미에서나 혹은 철학을 나의 직업으로 삼고 나 자신이 철학적 책들을 저술한다는 의미에서 ㅡ 나에게 떠오른 적은 없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나에게 떠올랐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그 생각을 거부했었을 터이다.a 이유인즉 몇 가지 철학적 문제들에 내가 흥미를 느꼈지만, 나 자신이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내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체계와 같은 철학체계는 나에게 매혹적으로 보였지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야심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형이상학적 이론들이 참이라고 믿지 않았다. 또한 가르치는 것과 같은 유용한 일을 나는 하고 싶었다. 게다가 나는 물리학에서의 문제들이 더 매력적임을 알았고 다윈론은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훨씬 더 확신을 주었다. 이로 인하여 내가 많은 철학 서적들을 읽었을지라도 내가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된다. 이마누엘 칸트와 별도로, 나는 최고의 그리스 철학자들의 한 무리를 사랑했고 존경했다: 소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인데 특히 헤라클레이토스, 제노파네스(Xenophanes) 그리고 파메니데스(Parmenides)였다. 나는 또한 자신의 동료 아테네 시민들로 구성된 500명의 배심원들에 의하여 사형을 당한 아테네 시민이었던 소크라테스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의 변론은 자신의 제자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변명(The Apology of Socrate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철학적 작품이다.
캐비넷 제작과 같은 기술을 내가 숙련할 수 있다면 교사로서의 내가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저것도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오스트리아의 공식 국가자격증을 받고 자격을 갖춘 캐비넷 기술자가 되었다.
철학적 문제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의식적 해결책으로서 내가 기술할 것에 내가 도달한 것은 캐비넷 기술자의 의자에 앉아서 작업하던 중이었다. 그 문제는 고전음악에 대한 우리 서양 체제의 ㅡ 음조, 화성, 대위법(對位法: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d if it had occurred to me, I certainly should have rejected it.로 가정법 과거의 문장이기 때문에 certainly가 들어갈 필요가 없고 주절의 should have rejected는 ‘거부했어야 한다’라는 과거의 미실현 의무를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should를 would로 써야 한다.
counterpoint) ㅡ 근원과 관련되었다. 나는 그 문제를 기록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그 해결책에 관하여 말한 적도 없다; 그러나 50년 후인 1969년에 나는,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라는 제목의 자서전적 저서의 한 짧은 장(章)에서 그 문제를 기술했는데 그 저서는 몇 년 후인 1974년에 출판되었다. 서양음악의 근원에 관한 1919년 아니면 1920년의 매우 오래된 나의 이론이 유명한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에 의하여 동시에 발표된 이론과 거의 동일하다는 말을 1992년 5월에 듣고 나는 놀랐다.
내가 이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유는, 그 이야기가 나의 생애 전체의 특징임을 내가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고전학에서의 내가 얻은 제한적인 결론들도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관한 새로운 역사관련 이론들을 초래한) 그리고 철학에서 (인식론과 지금은 소위 과학철학에서 혹은 언어의 근원론과 민주주의 이론에서와 같이 사회철학 및 정치철학에서) 내가 얻은 제한적인 결론들은 일반적으로 ‘연구’로 기술되는 저 과정에 의하여 통상적으로 도출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었을 과정이었다. 먼저 나는 아마도 처음에는 피상적으로 그다음에는 더 깊이 한 가지 주제에 익숙해지는데 왜냐하면 내가 어떤 문제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ㅡ 곧 몇 가지 경우들에서, 몇 년 후에는 다른 경우들에서 아마도 심지어 다른 분야들에서 몇 가지 새로운 문제들에게 나는 더 많은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ㅡ 문제나 관념이 나의 정신에서 구체화될 것이고 강력한 연구로 이어질 것이다; 저것은, 내가 문제에 관하여 강력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과 흔히 새로운 관념에 비추어 그 문제를 설명하여 단순화하려고 시도한다는 의미이고 문제 자체의 특징이 상당히 변할 것이다. 잠정적인 해결책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강력하게 연구하면 이 해결책은 변하는 문제와 상호작용하여 상당히 변할 것이다.
때때로 이 모든 것은 나의 정신 속에서만 발생하고 제시된 해결책은 서술되는 적이 없다; 혹은 그 해결책은, 내가 앞에서 기술한 한 가지 경우에서와같이, 50년 후에 서술된다. 다른 때에는 내가 그 과정의 다양한 단계들에서 기록들을 적어두거나 내가 도표를 그릴 것이다. 때때로 내가 주요 결론들에 빠르게 도달하지만 새로운 결론들을 재빨리 발표한 적은 없다. 매우 자주 나는 나의 결론을 전혀 발표하지 않고 그 결론에 관하여 나의 친구들이나 제자들에게 말할 따름이다. 아니면 나는 내가 도달한 결론을 여러 통의 편지를 통하여 친구에게 보내어 그의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때때로 나는 내가 얻은 결론을 여러 해 동안 ㅡ 혹은 최악으로는 영원히 ㅡ 잊는다. 반대로 나의 청중들 모두가 그렇게 해로운 방법을 채택하지 말도록 나는 권유하고 싶다.
이것이 누구도 모방하기를 내가 충고해야 할 방법이 아닐지라도, 나는 그 방법을 사용하면서 나의 모든 생애를 개인적으로 매우 행복하게 살았다고 나는 고백한다. 그러나 나와 같이 연구했고 나를 위하여 일했으며 나의 연구에 탁월한 도움을 주었던 고인이 된 나의 아내는 나의 연구 방식으로 지독한 고통을 받았다. 그것은, 열심히 연구해도 결과들이 나온다고 보장할 수 없는 방식이다. 나는 틀림없이 열심히 연구했고 나의 아내도 그랬다. 예를 들어 두 권으로 저술된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보라. 그 저서는 나의 구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새롭고 수정된 독일어본으로 방금 출판되었고 그래서 나는 번역본을 수정하기 위하여 그 저서를 검토해야 했다. 그 두 권의 저서에는 몇 가지 새로운 부록들이 붙었는데 지금은 1000쪽이 넘는다; 그리고 그 두 권의 저서에는 그렇게 많은 자료들과 그렇게 많은 제안들 및 논증들이 담겨있어 내가 그것들 모두를 서술할 수 있었다는 것에 나는 놀란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 저서를 22차례 교정했으며 항상 그 책을 명료하게 만들고 단순화하려고 노력했고 나의 아내는 전체 원고를 5번 타이프하고 다시 타이프했다 (낡고 오래된 타자기로). 그다음에 1945년에 그 저서가 출판되기까지 2년 3개월이 걸렸다. 안 되지, 나는 나의 방식을 권유할 수 없다.
나의 첫 번째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가 1934년에 출판될 때 (그 저서의 영어본 제목은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이다a) 나는 학교교사였다. 내가 처음 그 저서를 썼을 때, 완성된 원고는 1934년에 최종적으로 출판된 판본보다 2배 이상 길었지만 출판인은 내가 정확하게 얼마나 그 저서를 줄여야 하는지 나에게 말했다. 나는 1919-20년 겨울에 이 저서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을 발전시켰다; 다시 말해서, 나는 14년에서 15년 동안의 개념을 다루었는데 처음에는 그 저서를 출판하겠다는 의도가 조금도 없었다.
1919년 6월과 7월에 나는 칼 마르크스의 이론들을 크게 비판하게 되어서 그 이론들이 참인지 허위인지에 관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하기 위하여 나는 그 이론들을 철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중요한 연구를 떠맡는 것을 나의 의무로 나는 간주했다. 나는 겨우 17살이었고 물론 내가 알아낸 것들에 누가 귀를 기울일 것이거나 내가 이 주제에 관하여 아마도 말해야 할 여하한 것에 흥미를 느낄 것이라고 나는 결코 기대하지 않았다. 인류를 위하여 중대한 위험으로 내가 간주했던 이론의 진실성에 관하여 나 자신을 만족시키려고만 하여 나는 그 연구를 떠맡았다. 이 연구들의 결과는 25년 후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a 역주: 괄호 안의 이 부분은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그 적들에 발표되었다. 이 저서가 1945년에 출판된 이래 이 저서가 지속적으로 인쇄되었을지라도, 그 저서는 마르크스주의와 소련제국을 약화시키는 데 작은 역할만 했다; 예를 들어 고인이 된 나의 친구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의 저서 노예로의 길(The Road to Serfdom)과 같은 유명한 저서들보다 훨씬 더 작은 역할. 하이에크는 올해 3월에 사망했다.
1919-20년 겨울 동안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나의 비판적 연구들의 아주 초기에, 여러 해 뒤인 1934년 나의 첫 번째 출판된 저서인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출판으로 이어진 몇 가지 문제들을 나는 확인했다. 영어본(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은 25년이 지나서 출판되었다. (내가 최초로 완성한 저서인 인식론의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rkenntistheorie]은 1933년에서 1979년까지 출판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었다; 다시 말해서, 46년 동안.)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은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에 의하여 그다음에 발표되었는데 그는 당시 학술지 Economica의 편집인이었다. 그는 그 저서를 1944년과 1945년에 연속 기고문의 한 편으로서 발표했는데 겨우 10년 후에 처음에는 이탈리아어본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영어, 그다음에는 많은 다른 언어들로 저서로서 출판되었다; 일본에서는 1961년에 세 가지 판본들로 출판되었고 1965년과 1966년에는 두 가지 판본이 추가되었다. 1960년대에는 몇 가지 다른 일본어 번역본들이 나왔고 1973년에는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일본어본으로 나왔다. 일본에서의 후속 출판본들에 관해서 나는 그다지 잘 알지 못한다. 이 세 가지 저서들 모두는, 1919-20년 겨울에 시작된 나의 초기 연구 몇 가지들의 최근 결과물들이었다; 그 저서들 모두는 지식론이자 인식론이고 과학철학에 관한 저서들로서 기술될 수 있다 (비록 두 번째와 세 번째 저서가 역사와 역사과학의 철학에 관한 저서들이었을지라도).
이제 나는 이 저서들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내가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비판적 정신으로 ㅡ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한 것이 참인지 허위인지를 알아내려는 정신 ㅡ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체계가 과학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론체계에는 자연과학의 위상과 권위가 있다고; 뉴튼의 중력이론과 위상과 유사한 위상. 자연과학들의 위상과 권위에 대한 현대적 공격들에 여러 해 앞선, 당시 이 주장은 매우 중요했다. 당시 이론에 과학의 위상이 있다는 주장은 이론이 참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이론의 진실성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서 서양에서 당시 과학에는 엄청난 명성이 ㅡ 다른 것과 다른 명성 ㅡ 있었다.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라는 ㅡ 혹은 아마도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 이론이라고 우리는 보다 명백하게 말해야 한다 ㅡ 주장은 그리하여 매우 중요했다. 이유인즉 그 주장은 당시, 마르크스주의는 참이어서 이 과학 분야에서 혹시 전문가들에 의해서를 제외하고 모든 비판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1919년 가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다음 역사적 기간이나 세계 기간으로서 오기 마련이라는 것이 (당시 나는 그것을 믿지 않기 시작했는데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논증들이 내가 보기에 매우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참인지 아닌지의 주장과 별개로,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라는 주장을 나는 검토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먼저 다음 문제를 다루기로 결심했다: 마르크스주의가, 뉴튼의 중력론처럼 (내가 크게 칭송한), 과학이라는 것이 참인가 허위인가? 이 문제로 인하여 나는 기뻐했는데 이유인즉 내가 나 자신을 미래의 물리학 교사로서 간주했고 어떤 물리학 교사도 물리학이나 화학에 과학의 위상을 부여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ㅡ 혹은 훨씬 낫게, 무엇으로 인하여 자연과학으로 주장되는 여하한 것이 진정한 과학이 되는지a ㅡ 알아야 한다고 내가 느꼈기 때문이다. 혹은 매우 다른 말로: 왜 나는 천문학을 존중하지만 점성학을 경멸하는가? 그래서 (내가 혐오한) 마르크스주의라는 문제를 내가 사랑한 물리학을 ㅡ 특히 뉴튼의 우주론 ㅡ 포함한 더 일반적인 문제로 대체할 수 있어서 나는 매우 기뻤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과학철학자로 만든 것은 이 문제였다.
나는 겨우 17세였고 내가 비엔나대학의 수학원(Mathematical Institute of the University of Vienna)의 회원이었지만 이와 같은 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은 틀림없이 오래된 문제라고 그리고 비엔나대학의 모든 훌륭한 교수들은 ㅡ 아무튼 모든 물리학자들 ㅡ 틀림없이 그 문제에 익숙하여 틀림없이 해답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여, 그 문제에 관하여 생각함에 의해서만 나는 출발했다. 그러나 수학 학술회의들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들이 토론되어서 나의 문제와 같은 문제를 제기할 기회가 있었다. 나의 동료 학생들 몇 명에게 그 문제를 내가 언급하려고 할 때, 그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먼저 다음과 같은 규정을 시도하여 출발했다: 주장이나 서술은, 그
a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or better still, what makes any allegedly natural science a genuine science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주장이나 서술이 증명될 수 있다면, 과학에 속한다; 혹은 동일한 표현이지만 그 주장이나 서술이 참인 명제로 증명될 수 있다면. 그러나 심지어 출발하기 전에도 나는 이 규정이 틀림없이 만족스럽지 못하여 나은 것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기하학에서 유명한 유클리드의 공리들(公理들: axioms)과 공준들(公準들: postulates) 및 정의들(定義들: definitions)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당시a 공준들과 공리들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았다.) 이것들은, 분명히 기하학에 ㅡ 기하학은 정말 과학이다! ㅡ 속할지라도, 증명될 수 없는 것으로서 규정된다. 게다가 선택된 공리들과 공준들 및 정의들은 바로 기하학의 토대들이다: 그것들로부터, 기하학의 모든 명제들이 도출되어 정리들이 된다.
단지 나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하여 심지어 해결책을 다루기 시작하기 전에, 수학과 같은 순전히 형식적인 이론체계들과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과 지질학 및 또한 지리학과 같은 소위 경험적 자연과학들을 내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곧 알았다.
그래서 나는 수학원(the Mathematical Institute)에서 ‘공리학(axiomatics)’으로 지칭되던 것, 다시 말해서 공리체계들에 대한 일반론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이 체계들에 관하여 최고의 전문가는 다비트 힐베르트(David Hilbert)였다. 10년 후 내가 교사 시험을 위하여 수학논문을 써야 했을 때, 나는 그 논문을 공리학을 주제로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곧, 한편으로는 순전히 형식적 체계와 (논리학이나 수학과 같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목적이 실재를 언급하는 ㅡ 혹은 더 정확하게,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과 같이 실재적인 것을 기술하거나 설명하는 ㅡ 이론을 구분하여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순수수학과 중력이론을 그리고 그다음에 뉴튼의 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비교하게 되었다. 이 이론들과, 다양한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그 이론들에 관하여 제기된 주장들을 매우 진지하게 나는 공부했다. 오직 그 문제들에 대한 나의 타오르는 흥미 때문에, 그리고 여기저기서 내가 새로운 분야를 또한 개척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나는 이 모든 연구를 수행했다.
당시 나에게는 심지어 초등학교에서도 교사직을 얻는다는 여하한 전망도 없었다. 나는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대의 군인으로서 싸우기에는
a 역주: ‘당시’의 원어 표현은 In those days인데 허형은 번역은 ‘요새는’이고 ‘공준’의 번역은 ‘기본원리’이다.
1년 나이가 어렸다; 그리고 교사들이 이용할 수 있었던 모든 직위들은, 전적으로 온당하게, 전쟁에서 혹은 포로수용소에서 귀환한 교사들을 위한 몫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어린이들을, 대부분 버려진 어린이들을 위한 기관들에서 ㅡ 무보수로 ㅡ 일자리를 얻었다. 나중에 운이 좋게 나는, 수학에서 심리학 및 철학까지 아주 다양한 과목들에 대하여 비엔나 대학의 모든 종류의 학생들에게 개인과외를 제공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들 가운데는 미국인 학생들이 몇 명 있었다; 그리고 당시 미국 달러화가 강세였고 오스트리아의 화폐는 약세여서 이런 형태의 개인과외는 쌍방에게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가르치는 방법을 (그리고 또한 가르치지 않는 방법) 배우는 훌륭한 기회들을 경험했다.
이런 종류의 생활은 당시 비엔나에서 전혀 예외적이 아니었다. 반대로 경제적 상황으로 인하여 그런 종류의 생활은 드물지 않았다. 1923년 비엔나시가 앞으로는 심지어 비엔나의 초등학교들에도 새로 세워진 시립 교사원(Pedagogic Institute)을 수료한 교사들만 고용할 것이라고 발표했을 때, 나와 다른 사람들이 이 새로 세워진 교사원에 가입할 자격에 응모하였는데 그 교사원은 비엔나대학의 부속기관이었다.
당시 비엔나의 학생들은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교사원에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마지막에 (월급이 하찮은) 가르치는 직업을 얻을 좋은 전망이 있었다.
나는 교사원에서 매우 흥미로운 2년 동안 학생으로 있었다. 우리는 교사원과 비엔나대학 모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나의 동료 학생들 중 몇 명은 수업과정이 매우 어려운 것을 알고 나 자신이, 교사원장에게 비공식적이고 알리지 않은 채, 교사원에서 ㅡ 분명히 무보수로 ㅡ 나의 동료 학생들에게 강좌를 열었다. 공식적으로 강의가 비어있을 때 나는, 교사원의 학생들로서 그들이 출석해야 하는 비엔나대학의 강의들 중 몇 가지 강의들을 따라가기 어려운 학생들에게 나는 강좌들과 학술회의들을 제공했다. 우리에게는 비엔나대학에서 합격해야 하는 많은 중간시험들이 (‘Colloquia’로 불리는) 있었기 때문에, 내가 제공하는 강좌는 이 비엔나대학의 시험들을 위한 특별한 준비과정들이 되었다. 비엔나대학의 교수로서 우리를 가르치던 유일한 교수이던 심리학자 교수 칼 뷜러(Karl Bühler)는 나의 강좌들을 알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내가 나의 수업들을 위하여 그의 실험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그의 허락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중에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준비를 시켰던 학생들의 무리가 자신이 출제한 시험에서 최고의 성적을 올린 무리였다고 말했다.
교사원에서의 나의 비공식적 강좌들 가운데는, 중등학교에서 라틴어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라틴어 과정들이 있었다. 당시 비엔나대학은 모든 학생들에게 라틴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요구했다. 이 언어를 성인이 된 학생들 각자에게 가르침으로 인하여 나는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그것은, 훨씬 뒤에 인간의 언어에 관한 나의 (매우 개괄적인) 이론의 한 부분이 된 언어에 관한 견해들에서 필수적인 경험이 되었는데 그 이론은 심지어 지금도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교사원을 떠난 다음에 또 5년이 걸려서 나는 먼저 초등학교교사로 또 1년이 지나서 중등학교교사로 임용되었다. 이 기간에 나는, 오늘날 과학철학에 속한다고 언급될 수 있는 주제들에 관하여 많은 논문들을 ㅡ 그 논문들은 1930년경 옷장 전체를 채웠다 ㅡ 작성했다. 이 논문들은 하나도 출판을 목적으로 제출된 적이 없다.
1930년 초등학교교사로서 출발하기 바로 전, 나는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인 헤르베르트 파이글(Herbert Feigl) 교수를 만났는데 그는 나와 동갑이었고 당시 미국에서 철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철학자들로 구성된 소위 ‘비엔나학파(Vienna Circle)’의 회원이었다. 밤새도록 나의 이론을 들은 후에 그는 그 이론들을 내가 책으로 서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논문 작성을 중지하고 1934년 가을에 나의 저서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출판으로 이어진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에는, 과학적 지식론과 그 지식의 성장 및 내가 나중에 많이 개선한 확률론과a 양자역학에 대한 비판적 해석이 담겼다. (이것에 관하여, 몇 가지 중요한 요점들이 그 후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재발견되었다.) 나의 저서는 즉각 성공작이 되었다. 물론 이 성공은, 독일에서 히틀러의 독재체제와 독일 대학에 대한 히틀러의 황폐화에도 (전쟁의 위협은 말할 것도 없이)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저서에서 토론된 문제들과 같은 추상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사고할 수 있던 사람들로 구성된 작은 동아리에 국한되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주요 국가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미국으로부터도 탁월하다는 비평을 나는 받았고 폴란드와 영국 그리고 심지어 독일의 대학들로부터 강의요청을 곧바로 받았다. 동시에 나는 또한, 내가 당시 가르치고 있던 학교의 몇몇 나치 교사들로부터 그리고 또한 매우 큰 권한을 가지고 있던 학교 검열관으로부터 협박들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영국에서 온 강의초청을 수락하고 영국 이민을 결정했다. 영국에서의 강의들 또한 성공작이어서 1937년 뉴질랜드에서 나는 대학교수직을 얻
a 역주; ‘확률론’의 원어 표현은 a theory of probability인데 허형은 번역은 ‘개연성 이론’이다.
었다. 당시 뉴질랜드대학의 부속대학이던 캔터베리대학(Canterbury University College)의 철학과 강사직을 나는 받았다. 그 대학은 지금 캔터베리대학(the University of Canterbury)이다.a
나는 학교교사에서 전문직 철학자로 진화하여, 철학을 나의 연구주제로 선택한 적 없이 ㅡ 사실상 철학자가 되려고 노력한 적 없이 ㅡ 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래서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했는가? 답변은 다음과 같다: 내가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 적이 없을지라도, 나 자신의 것으로 내가 취한 문제들로 인하여 나는 어쩔 수 없이 많을 것들을 공부해야 했는데 그중에 철학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모든 것이 내가 사랑하는 문제들 덕택이라고 말해야겠다. 나는 다음과 같은 나의 첫 번째 문제와 사랑에 빠졌다: 이론이 지닌 경험-과학적 특징에 대한 기준을 발견하는 방법. 그리고 내가 해답을 발견한 후에 나는 다양한 문제들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문제들 가운데 고대 그리스에 관한 역사성 문제들이 ㅡ 호메로스와 제노파네스(Xenophanes)와 파메니데스 및 플라톤에서 현대까지: 칸트, 헤겔과 마르크스까지 그리고 흐루시초프와 고르바초프까지 ㅡ 있다.
나는 틀림없이, 나 자신의 공부 방식을 추종될 사례로서 누가 채택하기를 격려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해야겠다. 그러나 모든 진지한 학생들과 특히 모든 진지한 과학도들에게 자신이 정말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이 삶을 바칠 준비가 된 아름다움 문제를 주목하라고 나는 권유할 수 있다. 이 태도로 인하여 그가 해결책을 찾으려고 반복적으로 노력하는 일과, 대부분의 경우들에서 그의 노력들이 성공할 수 있기 전에 흔히 배가되어야 할 그의 노력들에 대하여 비판적이 되는 일이 쉬워질 것이다.b 그 노력들이 성공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노력들은 그의 자신에 의하여 아주 진지하게 의문시되어야 하는데 이유인즉 그 노력들에는 일반적으로 개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어느 곳에서, 그가 자신의 소위 상대성 이론을
a 역주; 앞의 두 문장의 원문은 I took up my appointment as a lecturer in philosophy at Canterbury University College, then a part of the University of New Zealand. It is now the University of Canterbury.인데 허형은 번역은 ‘나는 캔터베리 대학Canterbury University College의 철학과 강사직을 받아들였고, 뉴질랜드 대학University of New Zealand의 시간제 강사 자리도 수락했다.’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attitude will make it easy for him to try again and again to find a solution, and to be critical of his own efforts which, in most cases, will frequently have to be redoubled before they can be successful.인데 허형은 번역은 ‘이러한 자세는 해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깨지는 과정의 어려움을 덜어 줄 것이며, 자신의 연구 노력을 비판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성공하려면 대개 한 번쯤 좌절했다가 추스르고 노력을 배가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이다.
(그리하여 중력에 대한 기하학적 이론이 된) 일반화하려고 노력하던 1905년부
터 1915년까지 자신이 몇 분마다 해결책과 관련하여 가망 있던 관념을 버렸다고 우리에게 말한다.a 우리 자신의 오류가능성에 대한 부단한 의식과, 우리가 지닌 주요 문제와 그 문제가 초래하는 많은 문제들과 다른 부수적 문제들에 대한 무한한 헌신에 대한 부단한 자의식 ㅡ 이것이, 내가 충심으로 여러분에게 확실하게 권유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다음 충고로 이 연설을 끝내고 싶다: 여러분이 아무리 해결책을 내고 행복할지라도, 그 해결책을 최종적으로 결코 간주하지 말라. 훌륭한 해결책들은 있지만, 최종적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고안하는 모든 해결책들에는 오류가능성이 있다.
이 원칙은 자주 한 가지 형태의 상대주의로 오해되었지만, 이 원칙은 상대주의와 정반대이다. 우리는 진리를 찾고, 진리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데 허위성도 그렇다. 그러나 문제에 대한 모든 해결책 때문에 훨씬 더 깊은 문제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나의 충고가 창조적이고 행복한 삶으로 가는 여러분의 길에 이정표가 되길!
여러분, 경청하고 인내해주셔서 나는 감사한다.b
a 역주: 이 문장에서 괄호 안의 원문 표현은 which thereby became a geometrical theory of gravitational forces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고, ‘일반화하려고’의 원어 표현은 to generalize인데 허형은 번역은 ‘정립하는’이다.
b 역주“ 이 문장은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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