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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구조의 신화, 과학과 합리성을 옹호하여, 서문 및 1장 과학적 혁명의 합리성

이윤진이카루스 2021. 6. 24. 13:26

이론구조의 신화, 과학과 합리성을 옹호하여 서문 및 1장 과학적 혁명의 합리성, 선택 대(對) 지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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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구조의 신화

(THE MYTH OF THE

FRAMEWORK)

 

과학과 합리성을 옹호하여

(In defence of science and rationality)

 

 

칼 포퍼

 

M. A. Notturno 편집

 

 

 

루틀리쥐 출판사

런던 및 뉴욕

 

 

 

초판본 1994

 

문고본 1996

 

 

 

 

 

 

 

 

 

 

 

 

 

 

 

 

 

 

 

 

 

 

 

 

 

 

 

베르너 바움가르트너

(Werner Baumgartner)에게

 

 

 

 

 

 

 

 

 

 

 

 

 

 

 

역자의 주해

 

본 원서의 한글 번역본을 인터넷에서 검색한 결과, 역자는 번역된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저자의 글을 편집자가 모아서 출간했기 때문에 원서의 중요성이 떨어져서 한글 번역본이 아직 나오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993년의 아래 저자의 주해에 서술된 이 논문들에서 언급되는 것 중 얼마간은, 나의 다른 저서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들에는 그렇게 익숙하지 않을 많은 것이 또한 있다고 나는 믿는다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역자는 이 원서가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무튼 역자 외에 다른 사람이 본 원서를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자로서는 참고할 한글 번역본도 없어서 역자의 번역을 대조, 비교, 수정할 대상이 없다. 따라서 역자의 번역에 많은 오류가 있을 것이 역자로서 염려된다. 게다가 본 원서는 아직 인터넷에서 원본을 무료로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원서를 구매하지 않는 한, 독자들은 역자의 번역을 원문과 대조할 길이 없는데 원서를 독해할 수 있는 독자가 구태여 역자의 번역을 읽을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역자의 번역은 책으로 출판되지 않고 역자의 블로그에 등재되는 관계로 원서에 기재된 원서 내용관련 쪽수는 맞지 않는다. 다만 원서의 참고 문헌의 쪽수를 적시하는 경우는 당연히 그 쪽수가 옳다.

번역에서 역자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자의적으로 밑금을 그었는데 독자는 구애될 필요가 없다.

 

20215월 번역을 시작하며

서울에서 역자

 

 

 

 

 

 

 

목차

 

 

 

저자의 주해, 1993 ix

감사의 말 xi

서문 xii

 

1 과학적 혁명의 합리성 1

2 이론구조의 신화 33

3 이성인가 혁명인가? 65

4 과학: 문제, 목표, 책임 82

5 철학과 물리학 112

6 과학자의 도덕적 책임 121

7 역사철학에 대한 다원론적 접근 130

8 모형, 도구 그리고 진리 154

9 인식론과 산업화 185

 

편집자 후기 210

참고문헌 213

인명색인 215

주제색인 220

 

 

 

 

 

 

 

저자의 주해, 1993

 

 

나는 나 자신을, 과학이나 철학에서 전문가로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평생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하여 중요한 것을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과학적 지식과, 그 지식이 야기하는 인간의 합리성은 항상 오류가 가능하거나 오류에 종속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인류의 자존심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유인즉 인간은, 내가 아는 한, 우주가 모두 무엇과 관련되는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그렇게 하기를 그리고 우리의 모든 기여의 심각한 한계들을 우리가 또한 인식하기를!

여러 해 동안 나는 과학들에서 지식적 유행들을 반대하여, 그리고 철학에서 지식적 유행들에 훨씬 더 반대하여 논증했다. 유행을 타는 사상가는 주로 자신의 유행에 사로잡힌 포로여서, 열린 정신뿐만 아니라 자유 및 정치적 자유를 우리의 생명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로 간주하지는 아닐지라도 매우 큰 가치들 중 하나로서 나는 간주한다.

오늘날 과학들에서 전문가들의 전문적 지식과 권위의 도움을 받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고, 철학에서 과학과 합리성을 폄훼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 흔히 과학과 합리성에 대한 이 폄훼는, 과학과 합리성에 대한 잘못된 이론 전문화, 전문가 그리고 권위를 통하여 과학과 합리성을 말하는 이론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과 합리성은 실제로 전문화 및 전문가 권위의 도움과 관계가 없다. 반대로 이 지식 관련 유행들은 실제로 과학과 합리성 모두에게 장애물이다. 이유인즉 유행을 타는 사상가가 자신의 유행에 사로잡힌 포로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전문가는 자신의 전문화에 사로잡힌 포로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합리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지식적 유행들과 전문화들이 없는 상황이다.

오늘날 전문가들의 권위의 도움은, 전문화된 우리 지식의 거대함에 의하여 때때로 용인된다. 그리고 그 권위의 도움은, 전문화와 전문가들 및 권위를 통하여 과학과 합리성을 말하는 철학 이론들에 의하여 때때로 옹호된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 전문가들의 도움은 용인되어서도 안 되고 옹호되어서도 안 된다. 반대로 전문가들의 권위의 도움은, 현재 상태와 지식 관련 유행 관련하여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권위의 도움은, 우리가 얼마나 무식한지와 그 무식이 동시에 얼마나 크게 많은 분야들에서 일하는 사람들 때문인지를 솔직하게 인정함에 의하여 공격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권위의 도움은, 지식 관련 유행들과 전문화 및 권위의 도움에 의하여 생산되는 정통성이 지식의 죽음이라는 인식과 지식의 성장은 온전히 의견 불일치에 의존한다는 인식에 의해서 또한 공격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한 권의 얇은 저서에 과학과 합리성을 옹호하여 서술된 몇 편의 논문들을 모아놓은 것에 대한 나의 변명이다.

 

이 저서에 실린 논문들은 원래 다양한 시점들에서 비-전문가 청중들을 위한 강좌들로서 마련되었다. 결과적으로 그 논문들은 흔히 철학에 대한 나의 일반적인 접근방식의 내력을 담고 있었고, 그 논문들은 또 다른 논문에서 더 상세하게 다루어진 어떤 요점에 대한 간략한 토론들을 담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 논문들이 이 저서에 수집되었을 때,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다. 두 가지 논문 사이에 분명한 중복이 있던 곳에서 구절들을 삭제함에 (그 논문들의 구조를 너무 많이 해치지 않고 이것이 이행될 수 있다면) 의하여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이 논문들에서 언급되는 것 중 얼마간은, 나의 다른 저서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들에는 그렇게 익숙하지 않을 많은 것이 또한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아무튼 나는, 모든 요점과 모든 논증들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간단하고 분명하게 만들려고 나는 노력했다.

이 저서에는, 이 저서의 부제목에 의하여 내가 지적하고자 했던 그리고 나의 글들을 적어도 지난 60년 동안 고취한 신념이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과학적 지식은 그 지식의 오류가능성에 불구하고 인간이 지닌 합리성의 가장 위대한 업적들 중 한 가지 업적이라는 그리고 우리가 지닌 항상 오류 가능한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함을 통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상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이해할 수 있고 혹시 심지어 세상을 낫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이다.

 

K. R. P.

켄리(Kenley), 서리(Surrey), 1993

 

 

 

 

감사의 말

 

 

캘리포니아 주 스탠포드대학의 후버재단(Hoover Institution)에 의하여 1986에 습득된 나의 논문들로부터 이 저서를 편찬하려는 생각은, 나의 친구인 생화학자 베르너 바움가르트너(Werner Baumgartner) 박사가 나의 전망을 미국 과학자들에게 알리고자 하여 나왔다. 그는 또한 자신의 생각을 점차 수행하면서 조치를 시작했고 그 조치를 유지했다. 그는 이아누스 재단(Ianus Foundation)으로부터 재정적 도움을 받았고 마크 노투르노(Mark Notturno) 박사의 학문적 도움을 받았는데 그는 나중 단계들에서 자신의 아내 Kira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이 논문들과 강좌들을 선택하고 편집하는 업무를 열정적으로 담당했다. 나는 이 저서의 출판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깊이 감사한다.

 

K.R.P.

켄리(Kenley), 서리(Surrey), 19943

 

 

 

 

 

 

 

 

 

 

 

 

서문

 

 

이 저서에 수록된 모든 혹은 거의 모든 논문들은, 합리성과 합리적 비판을 옹호하려고 서술되었다. 그것은 한 가지 사고방식이고 심지어 한 가지 삶의 방식이다: 비판적 논증들을 들으려는, 자기 자신의 오류들을 찾으려는 그리고 그 오류들로부터 배우려는 결의.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음 두 행에서 내가 언명하려고 했던 (아마도 1932년에 최초로) 자세이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고 당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노력에 의하여 우리는 진리에 근접할 것이다.’

 

이탤릭체로 여기서 인용된 이 두 행은 1945년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II24, ‘이성에 대한 반란[The Revolt Against Reason]’의 두 번째 쪽) 최초로 실렸다; 그리고 나는 그 두 행을, 내가 중요하다고 간주함을 지적하기 위하여, 이탤릭체로 서술했다. 이유인즉 이 두 행은 나의 도덕적 신조들의 매우 핵심적인 부분을 요약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었다. 그 신조들이 요약하는 견해를 나는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로 불렀다.

그러나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두 행에 눈을 감은 듯이 보였다: 내가 아는 한, 나를 비판하는 사람 누구도 그 두 행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인용하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나의 저서에 도덕적 원칙이나 윤리적 추론이 없다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나의 비판적 합리주의가 독단적이라고 너무 독단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의 비판적 합리주의를, 더 근본적으로 비판적이고 더 명시적으로 정의(定義)된 입장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도가 정의(定義)의 특징을 지녔기 때문에 이 시도는 자체의 합당성에 관하여 끝없는 철학적 논증들을 초래했다. 내가 나의 도덕적 신조로서 의도한 두 행을 비판적 합리주의에 대한 독단적 해석 가능성을 배제한 것으로 내가 보았던 두 행 주목한 사람을 나는 발견한 적이 없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이라고 그 두 행은, 그다음 문단에서 그 두 행에 귀속시킬 모든 것을 독자들이 의식하게 만들기에는 분명히 너무 간략하다고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곳에서 내가 지적하는 모든 것은 이 두 행에 그리고 더 많은 것에 정말로 담겨있음을 여러분이 동의하기를 나는 희망한다.

이것이, 반세기가 지나서 내가 그 두 행을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 두 행에는, 요컨대, 단지 철학적이 아닌 평범한 영어로 표현된 신념의 고백을 담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평화에 대한, 인간성에 대한, 관용에 대한, 겸손에 대한, 자신의 오류들로부터 배우려는 시도에 대한 신념; 그리고 비판적 토론의 가능성들에 대한 신념. 그것은 이성에 대한 호소였다; 저 두꺼운 저서의 모든 쪽들로부터 말하기를 내가 희망한 호소.

내가 이 두 행을 언명하는 관념이, 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지만, 나치당 제복을 입고 권총을 찬 카린티아(Carinthia) 나치당의 젊은 당원 때문이었음을 내가 밝힌다면 아마도 흥미로울 것이다. 이 젊은이가 당신은 무엇을 논증하고 싶은가: 나는 논증하지 않는다: 나는 방아쇠를 당긴다!’고 나에게 말한 때는 틀림없이 1933년에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해 가까운 시기였다. 그는 아마도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이 경험 이래 60여 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경험이 발생한 곳에서, 상황이 향상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국경지대인 당시 카린티아-유고슬라비아 국경지대였던 곳에서 인종적 도발이라는 핑계로 방아쇠를 당기려는 결의가 지독한 정도로 증가했다. 논증에 대한 비이성주의의 공격은 60여 가지 방식으로 이 60년 동안에 계속되고 있었다. 인종적 도발이라는 핑계는 가장 야비하고 가장 역겨운 핑계이지만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 핑계는 가장 오래되었다. 이것은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에게는, 사태가 악화할 역사적 경향이 여기에 혹은 다른 곳에 있다고 인정할 필요가 없다.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은 우리다.

이런 이유로, 중요한 원칙이 성립한다: 낙관론자로 남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아마도 나는 이것을, 이 서문이 끝나기 전에 몇 마디 말로 설명해야 한다.

미래는 열려있다. 미래는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고 예측될 수도 없다 우연을 제외하고. 미래에 놓여있는 가능성들은 무한하다. ‘낙관론자로 남은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라고 내가 말할 때, 이것에는 미래의 개방성뿐만 아니라 우리가 수행하는 모든 것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미래에 기여하는 것 또한 포함된다: 우리 모두는 미래에 발생할 것에 책임을 진다.

그리하여 사악한 것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은 세상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1

 

과학적 혁명의 합리성

 

선택 대() 지시

 

 

이 스펜서 강좌(Spencer lectures)의 연재물의 제목인 과학에서의 진보와 진보 장애물은 그 연재물의 담당자들에 의하여 선정되었다. 이 제목은, 과학에서의 진보가 좋은 것임과 진보에 장애물은 나쁜 것임을 아주 최근까지 거의 모든 사람에 의하여 믿어진 입장 암시하는 듯하다. 내가 나중에 간략하게 언급할 사소하고도 약간 분명한 유보사항들이 있지만, 나는 즉각 이 입장을 내가 수용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겠다. 물론 다루어지는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어려움에서 기인하는 장애물은 환영을 받는 도전들이다. (정말로 많은 과학자들은, 핵에너지를 사용하는 문제가 사소한 것이고 이론의 새로운 혁명적 변화가 없다고 판명되었을 때,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과학에서 정체는 저주일 터이다. 그러나 과학적 발전은 혼합된 축복일 뿐이라는 보드머(Bodmer) 교수의 제안에 나는 동의한다. 그 제안을 직시하자: 몇 가지 극도로 드문 예외들이 있을지라도, 축복은 혼합되어 있다.

나의 말은 두 부분으로 나뉠 것이다. 1부는 (I-VIII) 과학의 진보에 집중하고 2부는 (IX-XIV) 사회적 진보 장애물의 몇 가지에 집중한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를 기억하여, 주로 진화론적 관점에서부터 더 정확하게, 자연선택론의 관점으로부터 과학에서의 진보를 나는 토론하겠다. 1부의 말미에서만 (, VIII) 논리적 관점으로부터의 과학의 진보가 토론되어 과학에서의 진보에 대한 두 가지 합리적 기준이 제시될 것인데 그 기준은 나의 강좌의 2부에서 필요할 것이다.

 

과학적 혁명의 문제들. 과학에서 과학적 진보와 진보 장애물(Problems of Scientific Revolution. Scientific Progress and Obstacles to Progress in the Sciences), 허버트 스펜서 강좌 1973(Herbert Spencer Lectures 1973), 롬 하레이(Rom Harré) 편집, 클래른든 출판사(Clarendon Press), 옥스퍼드, 1975년에 처음 출판됨. 나는 트롤스 에거스 한센(Troels Eggers Hansen), 마이클 샤래트(Michael Sharratt) 목사, 허버트 스펭글러(Herbert Spengler) 박사 그리고 마틴 웬햄(Martin Wenham) 박사에게 이 강좌에 대한 비판적 언급과 관련하여 감사하고 싶다.

2부에서 나는 과학에서의 몇 가지 진보 장애물을 토론하겠는데 더욱 특히 이념적 장애물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합리적 진보 기준의 통제를 받는 과학적 혁명과 다른 한편으로는 드물게만 합리적으로 옹호될 수 있는 이념적 혁명의 구분을 토론함에 의하여 나는 마치겠다 (XI-XIV). 내가 보기에 이 구분은 충분히 흥미로워서 나의 강좌가 과학적 혁명의 합리성으로 지칭될 수 있다. 여기서 물론 과학적이라는 단어가 강조되어야 한다.

 

I

 

이제 나는 과학에서의 진보로 선회한다. 이념적 혹은 진화론적 관점으로부터 나는 과학에서의 진보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과학에서의 진보를 검토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관점이라고 나는 제안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물학적 접근방식은, 나의 강좌의 전반부에 대하여 두 가지 주요 관념들을 소개하는 편리한 방식을 제공한다. 그 관념들은 지시(instruction)라는 관념과 선택(selection)이라는 관념이다.

생물학적 혹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과학이나 과학에서의 진보는 인간이라는 종()에 의하여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방식으로 간주될 것이다: 새로운 환경적 서식처들에 침입하기 위하여 그리고 심지어 새로운 환경적 서식처들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이로 인하여 다음 문제들이 출현한다.

우리는 적응과 관련하여 세 가지 단계들을 구분할 수 있다: 유전적 적응, 적응 행위적 학습 그리고 과학적 발견 (과학적 발견은 적응 행위적 학습의 특별한 경우이다). 나의 강좌의 이 부분에서 나의 주요 문제는, 과학적 수준에서 그리고 유전적 수준과 행위적 수준이라는 다른 두 가지 수준들에서 진보나 적응의 전략들 사이의 유사성과 차별성을 조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에 의하여 그리고 선택에 의하여 각 수준에서 수행되는 역할을 검토함에 의하여 나는 적응의 세 가지 수준들을 비교하겠다.

 

II

 

여러분의 눈을 가린 채 이 비교의 결과로 여러분은 안내하기 위하여 나는 나의 논지를 즉각 발표하겠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수준들의 근본적인 유사성을 주장하는 논지이다.

세 가지 수준들 모두에서 유전적 적응, 적응 행위 그리고 과학적 발견적응의 구조는 동일하다.

이것은 다소 상세하게 설명될 수 있다.

적응은, 세 가지 수준들 모두에게 기본적인 계승된 구조로부터 출발한다: 생명체의 유전자 구조. 그 구조에, 행위적 수준에서 생명체가 사용할 수 있는 행위 유형들의 내부 저장고가 대응하고 과학적 수준에서 우세한 과학적 추측들이나 이론들이 대응한다. 세 가지 수준들 모두에서 이 구조들은 항상 지시에 의하여 전달된다: 유전적 및 행위적 수준들에서 암호화된 유전적 지시를 복제함에 의하여 그리고 행위적 및 과학적 수준들에서 사회적 전통 및 모방에 의하여. 세 가지 수준들 모두에서, 지시구조의 내부로부터 나온다. 돌연변이들이나 변종들 혹은 오류가 발생하면 그것들은 새로운 지시들인데 그 지시들 또한 환경으로부터인 외부로부터 보다는 구조의 내부로부터 나타난다.

이 계승된 구조는 특정 압력이나 도전이나 문제에 노출된다: 선택 압력에, 환경적 도전에, 이론적 문제에 노출된다. 반응으로, 적어도 부분적으로 무작위적인 방법들에 의하여 유전적으로 혹은 전통적으로 계승된 지시들의 변종들이 생성된다. 유전적 수준에서, 이것들은 돌연변이들이고 암호화된 지시의 재결합들이다. 행위적 수준에서, 그것들은 잠정적 변종들이고 저장고 내부의 재결합들이다. 과학적 수준에서, 그것들은 새롭고 혁명적인 잠정적 이론들이다. 세 가지 수준들 모두에서, 우리는 새로운 잠정적인 시행 지시들을 혹은 간략하게, 잠정적 시도들 얻는다.

이 잠정적 시도들이, 다소 무작위적인 방식으로 개별적 구조 내부에서 시작되는 변화들임은 중요하다. 그것들은 환경으로부터인 외부로부터의 지시에 기인하지 않는다는 견해는, 매우 유사한 생명체들이 때때로 매우 다른 방식들로 동일한 새로운 환경적 도전에 반응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약하게 뒷받침된다 할지라도).

다음 단계는, 이용 가능한 돌연변이들과 변종들로부터 선택하는 단계이다: 적응이 되지 않는, 새로운 잠정적 시도들의 돌연변이들과 변종들은 제거된다. 이것은 오류제거의 단계이다. 다소 잘 적응된 시행 지시들만 살아남아서 나중에 계승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행착오의 방식에 의한 혹은 더 좋게, ‘시행과 오류제거의 방식에 의한 적응을 말할 것이다. 오류제거 혹은 적응되지 못한 시행 지시들의 제거는 또한 자연선택으로도 지칭된다. 그것은 일종의, 세 가지 수준들 모두에서 작용하는 부정적 정보교환(feedback)’이다.

일반적으로 시행과 오류제거의 방식을 적용하여, 혹은 자연선택을 적용하여 도달되는 적응의 평형 상태가 없음이 주목될 수 있다. 먼저 문제에 대한 완벽하거나 최적의 시행 해결책들이 제시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그리고 이것은 더 중요하다 새로운 구조들이나 새로운 지시들의 출현에는, 환경적 상황에서의 변화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환경적 요소들이 관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압력들과 새로운 도전들 그리고 새로운 문제들이, 생명체 내부에서 출현한 구조적 변화들의 결과로서 출현할 것이다.

유전적 수준에서 변화는 유전자의 돌연변이일 것인데 결과적으로 효소의 변화이다. 이제 새로운 효소의 망(: network), 유전자 구조에 더 익숙한 환경을 형성한다. 따라서 이 익숙한 환경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생명체와 더 먼 환경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그리고 나아가 새로운 선택 압력들 출현할 것이다.

행위적 수준에서도 동일한 것이 발생한다. 이유인즉 새로운 종류의 행위 채택이, 대부분의 경우에 새로운 생태적 서식지의 채택과 동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선택 압력들이 발생할 것이고 새로운 유전적 변화들이 발생할 것이다.

과학적 수준에서, 새로운 추측이나 이론의 잠정적 채택으로 인하여 한두 가지 문제들이 풀릴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많은 새로운 문제들이 변함없이 열릴 것인데 이유인즉 혁명적인 새로운 이론이 새롭고도 강력한 감각기관과 꼭 마찬가지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가 중요하다면 새로운 문제들은 옛 문제들과 다를 것이다: 새로운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깊이의 수준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상대성에서 발생했다. 이것은 양자역학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극적으로 분자생물학에서 바로 지금 발생하고 있다. 이 경우들 각각에서, 새로운 이론에 의하여 예기치 않은 문제들의 새로운 지평들이 열렸다.

이것이 과학이 진보하는 방식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그리고 우리의 진보는, 우리의 옛 문제들을 우리의 새로운 문제들과 비교함에 의하여 최고로 측정될 수 있다. 이루어진 진보가 크다면, 새로운 문제들은 이전에 꿈도 꾸어지지 않은 특징을 지닐 것이다. 더 심오한 문제들이 있고 그런 문제들이 더 많을 것이다. 지식에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만큼 더 분명하게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무지의 방대함을 감지할 수 있다.

이제 나는 나의 논지를 요약하겠다.

내가 고찰하고 있는 세 가지 모든 수준들인 유전적 그리고 행위적 및 과학적 수준들에서, 지시에 의하여 전달된 유전자 암호를 통해서든 전통을 통해서든 계승된 구조들을 이용하여 우리는 작용하고 있다. 세 가지 수준들 모두에서, 구조 내부로부터의 변화된 시도들에 의하여 새로운 구조들과 새로운 지시들이 출현한다: 잠정적 시도들에 의해서인데 그 잠정적 시도들은 자연선택이나 오류제거에 종속된다.

 

III

 

지금까지 나는, 세 가지 수준들에서의 적응 구조가 작용함에서 유사성들을 강조했다. 이로 인하여 다음과 같이 분명한 문제가 제기된다: 차이점들은 어떤가?

유전적 및 행위적 수준 사이의 주요 차이점은 이렇다. 유전적 수준에서의 돌연변이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자의적일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맹목적이다. 먼저 그 돌연변이들은 전혀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다. 두 번째, 돌연변이의 생존은 추가적 돌연변이들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데 심지어 그 돌연변이들의 발생 빈도나 확률들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어떤 돌연변이의 생존으로 인하여 어떤 종류의 돌연변이들이 미래의 경우들에서 혹시 생존할지가 결정될지라도). 행위적 수준에서 시도들도 다소 자의적이다. 그러나 그 시도들은, 언급된 두 가지 의미 중 어떤 의미에서도 더 이상 완벽하게 맹목적이 아니다. 먼저 시도들은 목적을 지향한다. 그리고 두 번째, 동물들은 시도의 결과로부터 배울 것이다: 동물들은, 실패로 이어진 시도 형태의 유형을 피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동물들은, 그 유형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경우들에서도 심지어 그 유형을 피할지도 모른다.) 유사하게, 동물들은 성공으로부터 또한 배울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성공적인 행위가 합당하지 않은 경우들에서도 성공적인 행위는 반복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정 정도의 맹목성은 모든 시도들에 내재되어 있다.

행위적 적응은 보통 강력한 능동적 과정이다: 동물과 특히 유희에 몰두하는 새끼 동물 심지어 식물도 능동적으로 환경을 탐사하고 있다.

활동은 주로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되는데 내가 보기에, 유전적 수준과 행위적 수준 사이에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나는 여기서, 형태 심리학자들(Gestalt psychologists)통찰(insight)’로 지칭하는 경험인 많은 행위적 발견들을 동반하는 경험을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통찰이 동반되는 발견도 오류일지도 모른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시도, 심지어 통찰을 지닌 시도도 추측이나 가설의 특징을 띤다. 쾰러(Köhler)가 말하는 유인원들이 때때로 통찰을 지니고,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잘못된 시도로 판명되는 것을 떠올림이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위대한 수학자들도 때때로 직관에 의하여 잘못 영향을 받는다. 그리하여 동물과 인간은 자신들의 가설들을 시험해야 한다. 그들은 시행과 오류제거의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쾰러 및 소프(Thorpe), 문제를 해결하는 동물들의 시도들은 일반적으로 완전히 맹목적은 아니라는 의견을 같이한다. 동물 앞에 문제가 발생해도 가설들을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극단적인 경우들에만, 불편한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하여 동물은 다소 맹목적이고 자의적인 시도들을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 시도들에서도, 유전적 돌연변이들과 재조합들의 맹목적인 자의성과 뚜렷이 대조되어, 목표 지향성은 보통 감지될 수 있다.

유전자 변화와 적응적 행위 변화 사이의 또 다른 차이점은, 전자(前者)가 경직되고 거의 변할 수 없는 유전자 구조를 항상 확립한다는 것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후자(後者), 독단적으로 고수되는 각인(imprinting)’(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의 경우에 근본적으로 그러하다 상당히 경직된 행위 유형을 또한 때때로 초래하지만 다른 경우들에는 차별화나 수정을 가능케 하는 유연한 유형을 초래한다. 예를 들어 후자(後者)는 탐구적 행위나 파블로프(Pavlov)자유 반사(freedom reflex)’로 지칭한 것을 초래할 것이다.

과학적 수준에서 발견은 혁명적이고 창조적이다. 정말로 특정 창조성은 모든 수준들에, 심지어 유전적 수준에도 귀속될 것이다: 다양한 지시 구조들에 내장된 강력한 보수적 경향들이 있을지라도, 새로운 시도들은 새로운 환경들과 그리하여 새로운 선택 압력들을 불러오면서 모든 수준들에서 새롭고 혁명적인 결과들 창조한다.

유전적 적응은 물론, 몇 세대의 최저로, 가령, 한두 세대 시간 안에서만 작용할 수 있다. 매우 빠르게 번식하는 생명체들에게서, 이것은 짧은 시간이어서 행위적 적응을 위한 여지가 없을 따름일 것이다. 더 서서히 번식하는 생명체들은, 빠른 환경적 변화들에 자신들을 조절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행위적 적응을 고안한다. 그리하여 그 생명체들에게는 행위 저장고가 필요한데 범위의 크기가 작거나 큰 행위의 유형들이 들어있다. 그 저장고와 이용 가능한 행위 유형들의 범위는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되는 것으로 전제된다. 그리고 지적된 바와 같이 새로운 유형의 행위에, 새로운 환경적 서식지의 선택이 포함될 것이기 때문에 행위의 새로운 유형들은 정말로 유전적으로 창조적일 것이다. 이유인즉 행위의 새로운 유형들은, 나중에 새로운 선택 압력들을 결정하고 그리하여 유전적 구조의 미래 진화를 간접적으로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발견의 수준에 두 가지 새로운 양상이 출현한다. 가장 중요한 양상은, 과학적 이론들이 언어적으로 언명될 수 있다는 것과 그 이론들이 심지어 발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적 이론들은 우리 외부의 대상들이 된다: 검토에 개방된 대상들. 결과적으로 그 과학적 이론들은 이제 비판에 공개된다. 그리하여 잘 맞지 않는 이론의 채택으로 인하여 우리가 생존에 부적당하게 되기 전에, 우리는 잘 맞지 않는 이론을 제거할 수 있다. 우리의 이론들을 비판함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 대신에 우리의 이론들이 죽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아주 중요하다.

또 다른 양상도 역시 언어와 연관된다. 그 양상이 이야기하기를 고취하고 그리하여 창조적 상상력을 고취한다는 것은 인간 언어가 지닌 한 가지 참신함이다. 과학적 발견은, 설명적으로 이야기하기인 신화 만들기 및 시적(詩的) 상상력과 비슷하다. 상상력의 성장으로 인하여 물론, 과학에서 사람 상호간 비판과 같은 어떤 통제의 과학자들의 우정이 있고 적대적이기도 한 협력인데 부분적으로 경쟁에 근거하고 부분적으로 진리에 근접하려는 공동 목표에 근거한다 필요성이 커진다. 이것과, 지시와 전통이 수행하는 역할은 진보에 대한 사회적 장애물들에 관하여 혹은 진보에 근본적인 사회적 위험들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이 언급될 수 있을지라도 과학의 진보에 근본적으로 관련된 주요 사회학적 요소들을 망라한다고 나는 본다.

 

IV

 

과학에서의 진보나 과학적 발견은 지시선택에 좌우된다고 나는 제안했다: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이거나 역사적 요소에 좌우되고 시행과 오류제거의 혁명적 이용에 좌우되는데 그 이용에는 엄격한 경험적 검토들이나 시험들이 다시 말해서, 이론들이 지닌 가능한 취약점들을 조사하려는 시도들로 그 이론들을 반증하려는 시도들 포함된다.

물론 과학자들 개개인은 자신의 이론을 반증하기보다는 확립하기를 소망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에서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이 소망으로 인하여 과학자는 쉽게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게다가 과학자가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이론을 비판적으로 스스로 검토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대신해서 그렇게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간주될 유일한 결과들은, 그 이론을 반증하려는 흥미로운 시도들이 실패하는 것이 경쟁하는 이론들 중 최고의 이론에 비추어 그런 반례들(反例)이 가장 기대될 반례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 될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 개개인이 좋아하는 이론을 선호하여 편향된다 할지라도 과학에 커다란 장애가 생길 필요는 없다. 그러나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가 다음과 같이 서술해서 매우 현명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관념들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사람들은 발견들을 이룩하기에 그다지 적당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은, 귀납적 접근방식과 반대로, 과학에 대한 비판적 접근의 한 부분이다 라마르크(Lamarck)의 접근방식과 반대로, 다윈의 혹은 제거주의적(eliminationist) 혹은 선택주의적 접근방식의 한 부분. 귀납주의적이거나 라마르크적 접근방식은, 외부로부터의 지시나 환경으로부터의 지시라는 관념으로써 작용한다. 그러나 비판적이거나 다윈적 접근방식은 오직 내부로부터의 지시구조 자체의 내부로부터의 지시 허용한다.

사실상 나는, 구조의 외부로 부터로 나오는 지식과 같은 것은 없다고, 또는 정보의 흐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우리의 감각기관들에 각인되는 것은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모든 관찰에 이론이 스며들어 있다. 순수하고 이해가 배제되고 이론이 없는 관찰은 없다. (이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상상력을 조금 발휘하여, 인간의 관찰을 개미나 거미의 관찰과 비교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우리의 이론들로 인하여 우리의 관찰이 왜곡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프란시스 베이컨은 걱정했는데 옳았다. 이로 인하여 그는, 과학자들의 정신으로부터 모든 이론들을 정화함에 의하여 과학자들은 편견을 피해야 한다고 과학자들에게 충고하기에 이르렀다. 유사한 충고들이 여전히 주어진다. 그러나 객관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백지상태의 정신에 의존할 수 없다. 비판에, 비판적 토론에 그리고 실험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 객관성은 좌우된다. 그리고 우리는 특히, 우리가 지닌 바로 감각기관들이 편견들에 해당하는 것들을 포함함을 인정해야 한다. 이론들이 감각기관들과 비슷하다고 나는 이전에 (II절에서) 강조했다. 이제 나는, 우리의 감각기관들이 이론들과 비슷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우리의 감각기관들은 적응적 이론들을 포함한다 (토끼와 고양이의 경우에 밝혀진 바와 같이). 그리고 이 이론들은 자연선택의 결과이다.

 

V

 

그러나 스펜서(Spencer)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다윈이나 월리스(Wallace)도 외부로부터의 지시가 없음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순전히 선택론적 논증들로써 연구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들은 라마르크의 노선들 위에서 빈번히 논증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잘못을 저질렀던 듯이 보인다. 그러나 다윈론에게 가능한 한계들에 관하여 생각해보면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유인즉 우리는, 우세한 이론에 대하여 가능한 대안들을 항상 탐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가지 요점이 지적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 번째 요점은, 습득된 특징들의 (신체 훼손들과 같은) 유전적 계승에 반대하는 논증인데 그 논증은, 유전자 구조와 생명체의 나머지 부분인 신체가 상당히 분명하게 구분되는 유전적 구조의 존재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유전적 구조 자체는 틀림없이 진화의 나중 산물이어서 이 유전적 구조에는 정교함이 덜한 종류의 다양한 다른 구조들이 틀림없이 앞서 존재했다. 게다가 어떤 매우 특별한 종류의 신체 훼손은 더욱 특히, 방사선에 의한 유전자 구조의 훼손들 계승된다. 그리하여 태초의 생명체가 누드(naked) 유전자였다고 우리가 전제한다면, 이 생명체가 수행한 모든 치명적이 아닌 신체 훼손은 계승되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은, 이 사실이 유전적 적응을 설명하거나 유전적 학습을 설명하는 데 자연선택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는 제외하고 어느 정도 기여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요점은 이렇다. 우리는, 특정 환경적 압력들에 대한 신체의 반응으로서 어떤 화학적 돌연변이 인자가 만들어져 소위 자발적 돌연변이율이 증가한다는 바로 그 잠정적인 추측을 고려할 것이다. 적응이 여전히 돌연변이들의 제거에 의해서만 다시 말해서, 자연선택에 의하여 진행될 터이라도 이것은 일종의 반()-라마르크적 효과일 터이다. 물론 자발적 돌연변이율이 적응적 진화에 충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추측에는 많은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점들은 여기서 단지 다윈론에 대한 너무 독단적인 고집에 반대하는 경고로서 이루어졌다. 물론 다윈론이 심지어 과학적 수준에서도 옳다고, 그리고 이 수준을 넘어서도 다윈론이 옳다고 나는 정말로 추측한다: 다윈론은 심지어 예술적 창조의 수준에서도 옳다고 나는 정말로 추측한다. 새로운 사실들이나 새로운 효과들을 복제함에 의하여, 혹은 그 사실들과 그 효과들을 관찰로부터 연역적으로 추론함에 의하여, 혹은 환경에 의한 지시라는 다른 방식에 의하여 우리는 그 사실들이나 그 효과들을 발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시행과 오류제거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가 말하는 바와 같이, ‘창조가 조합에 선행한다(making comes before matching)’: 새로운 시행 구조를 능동적으로 생성함이, 제거하는 시험들에 그 생성함을 노출하는 것에 앞선다.

 

VI

 

그리하여 내가 제안하는 바, 과학이 진보하는 방식을 다소 닐스 예르너(Niels Jerne)와 맥팔레인 버넷 경(Sir Macfarlane Burnet)의 항체 형성론(theories of antibody formation)의 노선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 초기 항체 형성론들은, 항원(抗原: antigen)이 항체 형성에 부정적 형판(template)으로 작용한다고 전제했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지시인 침입하는 항체로부터의 지시가 있음을 의미할 터이다. 예르너(Jerne)의 근본적인 관념은, 항체가 항원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지시나 정보는 문자 그대로 타고난다는 것이었다: 그 지시나 정보는 혹시 돌연변이적 변종들의 저장고에 종속될지라도, 유전자 구조의 일부라는 것이었다. 그 지시나 정보는 유전자 암호에 의하여, 항체들을 생성하는 특화된 세포들의 염색체들에 의하여 운반된다. 그리고 면역반응은, 항체-항원 복합체에 의하여 이 세포들에게 주어지는 성장-자극의 결과이다. 그리하여 이 세포들은, 지시를 받기보다는 침입하는 환경의 도움을 받아 (다시 말해서, 항원의 도움을 받아) 선택된. (과학적 이론들의 선택과의 그리고 수정 유사점은 예르너에 의하여 분명히 밝혀졌는데 그는 이와 관련하여 키에르케고르와 메노[Meno]에서의 소크라테스를 언급한다.)

이 언급으로써 나는 과학에서의 진보에 관한 생물학적 양상들에 대한 나의 토론을 끝낸다.

 

VII

 

진화에 관한 허버트 스펜서의 우주론적 이론들에 당황하지 않고, 이제 나는 구조 내부로부터의 지시시도들의 제거에 의한 외부로부터의 선택 사이의 대조가 드러내는 우주론적 중요성을 개괄하려고 노력하겠다.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먼저 세포 안에서의 유전자 구조인 암호화된 지시의 존재 및 다양한 화학적 하부구조들의 존재를 주목할 것인데 후자(後者)는 무작위적인 브라운운동을 하고 있다. 유전자가 자기 복제하는 지시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나아간다. 다양한 하부구조들은 무작위적인 방식으로 (브라운운동에 의하여) 유전자에게 운반된다. 맞지 않은 하부구조들은 DNA 구조에 부착되지 못한다. 맞는 하부구조들은 (효소들의 도움을 받아) 정말로 부착된다. 이 시행과 선택의 과정에 의하여, 일종의 유전자 지시의 사진 음판(photographic negative)이나 도움체(complement) 형성된다. 나중에 이 도움체는 원래 지시로부터 분리되어, 유사한 과정에 의하여 자체의 음판(negative)을 다시 형성한다. 이 음판의 음판은, 원래 양성(positive) 지시의 동일한 복제가 된다.

자기 복제의 기초를 이루는 선택적 과정은 빠르게 작동하는 구조이다. 그 과정은 본질적으로, 화학적 합성의 대부분의 사례들에서 그리고 또한 특히 결정화(crystallization)와 같은 과정들에서 작동하는 동일한 구조이다. 그러나 기초를 이루는 구조가 선택적이고, 무작위적인 시도들에 의하여 그리고 오류제거에 의하여 작동할지라도, 그 구조는 분명히 선택이라기보다는 지시 과정의 일부로서 기능한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관련된 움직임들의 무작위적 특징 때문에 조합(matching) 과정들은 매번 다소 다른 방식으로 생길 것이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결과들은 정확하고 보수적이다: 결과들은 본질적으로 원래 구조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제 우리가 우주적 규모로 유사한 과정들을 찾는다면, 많은 문제들을 개방하는 기묘한 세계에 대한 그림이 출현한다. 그것은 이원론적인 세계이다: 혼란스럽게 분배된 움직임을 지닌 구조들의 세계. 작은 구조들은 (소위 기초입자들과 같은) 더 큰 구조들을 구축한다. 그리고 이것은, 압력과 온도의 특별한 조건 하에서 주로 작은 구조들의 혼란스럽고 무작위적인 움직임에 의하여 발생한다. 더 큰 구조물들은 원자들, 분자들, 결정체들, 생명체들, 별들, 태양계들, 은하계들 그리고 은하성단들(銀河星團: galactic clusters)일 것이다. 이 구조들 중 많은 구조들은, 구름 속의 물방울들이나 용액 속의 결정체들처럼 seeding 효과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 구조들은 지시에 의하여 성장하여 증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조들은 선택에 의하여 지속되거나 사라질 것이다. 생명체들의 유전자 구조를 구성하고 그와 함께 생명체들의 지시사항들을 구축하는 비주기적 DNA 결정들과 같은, 그 구조들 중 몇몇 구조들은 거의 무한히 드물어서 우리는 아마도 매우 귀중하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 이원론은 매혹적이다. 모든 미시적 및 거시적 수준들에서 비교적 안정된 구조들로 혹은 더 정확하게 구조적 과정들로 구성되고 분명히 혼란스럽고 무작위적으로 분배된 운동 속에 놓인, 모든 수준들에서 하부구조들로 구성되는 물리적 세계에 대한 기묘한 이원론적 그림을 나는 의미한다: 이 구조들과 하부구조들이 지탱되고 그 구조들과 하부구조들이 지시를 통하여 seed하며 선택과 지시를 통하여 성장하고 증식할 구조의 한 부분을 제공하는 무작위적 운동. 이 매혹적인 이원론적 그림은, 양자역학적 비결정론 때문에 작은 것에서는 비결정론적으로서의 그리고 거시-물리학적 결정론 때문에 큰 것에서는 결정론적으로서의 세계에 대하여 잘 알려진 이원론적 그림과 양립될 수 있지만, 그 그림과 전혀 다르다. 사실상 지시를 실행하여 안정성과 같은 것을 세상에 도입하는 구조들의 존재는 양자 효과들에 크게 의존하는 듯이 보인다. 뒷받침하는 무작위 운동들에 관하여 우리가 고전적인 브라운운동과 분자혼돈(molecular chaos)에 대한 고전적인 가설의 도움을 받는 반면, 원자적 및 분자적 그리고 결정체적 및 유기체적 수준에서 그리고 심지어 별의 수준에서의 구조들에 대해서 이것은 성립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무질서에 의하여 지탱되는 질서에 대한, 그리고 무작위에 의하여 지탱되는 구조에 대한 이 이원론적 그림에서, 양자 효과들과 고전적 효과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더 전통적인 그림들에서의 역할에 거의 반대인 것으로 보인다.

 

VIII

 

지금까지 나는, 주로 생물학적 관점에서 과학에서의 진보를 고찰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다음 두 가지 논리적 요점들이 결정적이다.

먼저, 새로운 이론이 발견이나 진보 단계가 되기 위해서 그 이론은 이전 이론들과 충돌해야 다시 말해서, 그 이론은 적어도 몇 가지 상충하는 결과들을 산출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 관점에서, 새로운 이론이 이전 이론들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이론은 이전 이론을 전복시켜야 한다.

이 의미에서 과학에서의 진보는 혹은 적어도 두드러진 진보 항상 혁명적이다.

나의 두 번째 요점은, 과학에서의 진보란 단순히 축적성이라기보다는 혁명적일지라도 특정 의미에서 항상 보수적이다: 새로운 이론은 아무리 혁명적일지라도, 이전 이론의 성공을 항상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 이론이 성공한 저 모든 경우들에서, 새로운 이론은 이전 이론을 내놓은 결과만큼 훌륭하거나 가능하면 나은 결과들을 산출해야 한다. 그리하여 옛 이론보다 새로운 이론이 다르고 나은 결과들을 산출하는 다른 경우들이 가급적 있어야 하는 반면, 이 경우들에서 이전 이론은 새로운 이론에 대하여 훌륭한 근사치로 나타나야 한다.

내가 서술한 두 가지 논리적 기준들에 관한 중요한 요점은, 그 기준들로 인하여 우리가 심지어 그 새로운 이론이 시험되기 전에도 그 새로운 이론이 시험을 통과한다면 옛 이론보다 나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이전 이론과 비교되는 이론의 특징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과 같아서 진보의 기준과 같은 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것은, 과학에서의 진보가 합리적으로 평가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가능성으로 인하여, 과학에서 진보적 이론들만 흥미로운 것으로서 간주되는 이유가 설명된다. 그리고 이 가능성으로 인하여, 과학적 사실의 문제로서 과학사가 대체로 진보의 역사임이 설명된다. (과학은, 이렇게 언급될 수 있는 인간적 노력의 유일한 분야인 듯이 보인다.)

전에 내가 제안한 바와 같이, 과학적 진보는 혁명적이다. 정말로 과학의 좌우명은 다음과 같은 칼 마르크스의 좌우명이 될 수 있을 터이다: ‘영원한 혁명(Revolution in permanence)’. 그러나 과학적 혁명들은, 원칙적으로 새로운 이론이 이전 이론보다 나은지 아닌지가 합리적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합리적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오류를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많은 방식들이 있다.

매우 흥미로운 오류의 한 가지 사례가 디랙(Dirac)에 의하여 보고된다. 슈뢰딩거(Schrödinger)는 지금 자신의 이름으로 지칭되는 유명한 비-상대론적 방정식 발견하여 발표하기 전에, 나중에 클라인-고든 방정식(the Klein-Gordon equation)으로 지칭된 전자에 관한 상대론적 방정식을 알았지만 발표하지 않았다. 상대론적 방정식이, 이전 이론에 의하여 해석된 바와 같이 실험적 결과들과 일치하는 듯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 방정식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불일치는 경험적 결과들에 대한 잘못된 해석 때문이었고 상대론적 방정식에서의 오류 때문이 아니었다. 슈뢰딩거가 그것을 발표했더라면 그의 파동역학과, 하이젠베르크 및 보른(Born)의 행렬역학(行列力學: matrix mechanics) 사이의 대등성이라는 문제는 아마도 출현하지 않았고 현대 물리학의 역사는 아마도 매우 달랐을 터이다.

과학적 진보의 객관성과 합리성은 개인적인 객관성 및 과학자의 합리성에 기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틀림없이 분명하다. 위대한 과학과 위대한 과학자들은, 위대한 시인들처럼, 흔히 비합리적인 직관들에 의하여 영감을 받는다. 위대한 수학자들도 마찬가지다. 푸앵카레(Poincaré)와 아다마르(Hadamard)가 지적한 바와 같이, 수학적 증명은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결정적으로 심미적 특징을 지닌 영감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적인 시도들에 의하여 발견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고 중요하다. 그러나 분명히 그로 인하여, 결과인 수학적 증명이 비합리적이 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제시된 증명은 비판적 토론을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 경쟁하는 수학자들에 의한 그 증명의 검토를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수학적 발명가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나 직관적으로 도달한 결과들을 합리적으로 검토하게 될 개연성이 높아진다. 유사하게, 세계 체계의 조화(harmony)에 대한 케플러의 아름다운 피타고라스적 꿈들로 인하여 그의 세 가지 법칙들이 지닌 객관성이나 시험가능성 혹은 합리성이 무효화되지 않았다 또한 이 법칙들이, 설명적 이론에게 제기한 문제의 합리성도 무효화되지 않았다.

이로써 나는 과학의 진보에 관한 나의 두 가지 논리적 언급을 끝낸다. 이제 나는 나의 강좌의 2부로 계속해서 나아가겠고 그와 함께, 부분적으로 사회학적으로서 기술될 언급들과 과학의 진보에 대한 장애물들과 관련되는 언급들로 나는 나아가겠다.

 

IX

 

과학의 진보를 가로막는 주요 장애물들은 사회적 특성을 지녔다고, 그리고 그 장애물들은 두 부류들로 구분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제적 장애물들과 이념적 장애물들.

경제적인 면에서 가난이 장애물이 될 것임은 하찮은 말일 것이다 (훌륭한 이론적 및 실험적 발견들은 가난에도 불구하고 이룩되었을지라도). 아무튼 최근 풍요 또한 장애물이 될 것임은 상당히 분명해졌다. 너무 돈이 많으면 이념들을 추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심지어 그런 역경 하에서도 진보 이룩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정신은 위험에 처했다. 과시적인 과학은 훌륭한 과학을 파괴할 것이고, 폭발적으로 많은 발표는 관념들을 죽일 것이다. 관념들은 아주 드문데 관념의 홍수 속에서 침몰할 것이다. 그런 위험은 크게 실재하고 그 위험에 대하여 상술할 필요는 없지만 양자역학의 초기 영웅들 중 한 사람인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의 말을 인용할 것이다:과학정신이 변질되었다.’

이 장()은 정말 슬픈 장이다. 그러나 이 장은 너무나 명백해서 나는 과학의 진보를 가로막는 경제적 장애물들에 관하여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대신 나는 이념적 장애물들 중 몇 가지를 토론하겠다.

 

X

 

이념적 장애물들에 관하여 가장 널리 인정되는 것은, 이념적이거나 종교적인 불관용인데 보통 독단 및 상상력 결여와 연결된다. 역사적 사례들은 매우 잘 알려져서 그 사례들을 내가 길게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억압으로 인하여 진보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조르다노 브루노(Giodarno Bruno)의 순교와 갈릴레오의 재판이 결국, 종교재판이 과학의 진보에 반대하여 이룩할 수 있었던 것보다 과학의 진보를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아리스타쿠스(Aristarchus)와 독창적인 지동설이라는 기묘한 경우로 인하여 아마도 다른 문제가 열린다. 자신의 지동설 때문에 아리스타쿠스는, 스토아학파인 클레안테스(Cleanthes)에 의하여 불경죄로 고소를 당했다. 그러나 이것에 의하여 그 이론의 말소가 설명되지 않는다. 또한 그 이론이 너무 대담했다고 언급될 수도 없다. 아리스타쿠스의 지동설은 최초로 설명되고 100년 후 적어도 한 명의 크게 존경을 받은 천문학자에 (셀레우쿠스[Seleucus]) 의하여 뒷받침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어떤 모호한 이유로, 그 이론에 대한 극소수의 간략한 보고서들이 살아남았다. 반대 관념들을 유지하려고 해도 너무 자주 실패하는 명백한 결과가 여기에 있다.

상세한 설명이 어떠하든, 그 실패는 아마도 독단과 불관용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관념들은 귀중하게 여겨져야 하고 그래서 신중하게 육성되어야 한다 특히 그 관념들이 다소 거칠다할지라도. 새로운 관념들의 참신함을 위해서우리가 그 관념들을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관념이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 새로운 관념을 억누르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한다.

다윈이나 멘델(Mendel)의 이론에 앞서서, 진화의 관념과 같이 무시된 관념들에 대한 많은 사례들이 있다. 이 무시된 관념들의 역사로부터, 진보에 대한 장애물들에 관하여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경우는, 비엔나의 물리학자 아르투르 하스(Arthur Haas)인데 그는 1910년에 부분적으로 닐스 보어에 앞선 이론을 발표했다. 하스는, J.J. 톰슨(Thomson)의 원자 모형에 대한 수량화에 근거하여 수소 스펙트럼 이론을 발표했다. 러더포드(Rutherford)의 모형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하스는 스펙트럼 상수들(常數: constants)을 도출할 목적으로 플랑크의 적용양자(quantum of action)를 원자론에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었던 듯이 보인다. 하스는 톰슨의 모형을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스 자신의 추론에서 성공할 뻔했다. 그리고 막스 야머(Max Jammer)가 상세하게 설명하는 바와 같이, 하스의 이론이 (조머펠트[Sommerfeld]에 의하여 진지하게 취급된) 닐스 보어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비엔나에서 그 이론은 즉각 배척되었다. 그 이론은, 비엔나 대학 물리학과의 교수 중 한 명이었던 에른스트 레커(Ernst Lecher)(그의 초기 실험들은 하인리히 헤르츠에게 인상을 남겼다) 의하여 터무니없는 농담으로서 조롱당했고 공개적으로 폄훼 당했는데 그 교수의 다소 무미건조하고 그다지 감흥도 없었던 강의들을 나는 약 8~9년 후에 들었다.

훨씬 더 놀라운 경우가 역시 야머에 의하여 기술되는데, 1905년에 최초로 발표된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이론으로 아인슈타인은 그 이론으로 1921년에 노벨상을 받게 되지만 1913년에 배척된 것이다. 광양자 이론이 이렇게 배척되자 아인슈타인을 프러시아 과학원의 회원으로 추천하는 탄원서에 한 구절이 출현했다. 그 서류는 막스 플랑크(Max Planck), 발터 네른스트(Walther Nernst) 그리고 다른 두 명의 유명한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서명되었는데 크게 칭찬하면서 아인슈타인의 작은 실수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이론에 있을 것이라고 그들이 분명히 믿었던) 아인슈타인에 반대하여 주장되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다. 같은 해에 밀리컨(Millikan)에 의하여 실행된 엄격한 실험을 통과한 이론을 배척하는 이 확실한 방식에는, 틀림없이 해학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은 과학의 역사에서 명예로운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하는데, 심지어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전문가들에 의한 다소 독단적인 배척도 매우 자유주의적인 정신을 지닌 평가와 밀접하게 관련됨을 보여준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오류라고 믿는 것을 억압하려고 꿈도 꾸지 않았다. 정말로 아인슈타인의 작은 실수에 대한 변호의 표현방식은 매우 흥미롭고 계몽적이다. 탄원서의 유관 구절은 아인슈타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한다: ‘예를 들어 그의 광양자(light quanta) 가설에서처럼, 아인슈타인이 때때로 사념들에서 너무 멀리 나아갔을 것이라고 해서 그를 너무 배척해서는 안 된다. 이유인즉 누구도, 실제로 참신한 관념들을 때때로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심지어 자연과학들 중에서 가장 정밀한 과학에 도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잘 언급된 것이지만 억제된 표현이다. 우리는 항상 오류를 저지를 위험을 무릅쓰며, 또한 오해되거나 오판되는 덜 중요한 위험도 무릅쓴다.

그러나 심지어 위대한 과학자들도 때때로 상황을 심각하게 오판하는 반면, 자신들이 매우 확신하는 것을 방지할 자기-비판적 태도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 사례는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제한된 정도의 독단은 진보를 위하여 필요하다. 낡은 이론들이 고집스럽게 방어되는 심각한 생존투쟁이 없으면, 경쟁하는 이론들은 자체가 지닌 용기를 다시 말해서, 설명력과 진리 내용 보일 수 없다. 그러나 불관용적인 독단은 과학에 대한 주요 장애물들 중 한 가지 장애물이다. 정말로 대안론들을 토론함에 의하여 그 대안론들을 생존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새로운 대안론들을 체계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대안론들이 없을 때마다 우세한 이론이 너무 배타적이 될 때마다 우려해야 한다. 문제의 이론이 독점과 같은 것을 획득하면 과학의 진보에 대한 위험은 많이 증가한다.

 

XI

 

그러나 훨씬 더 큰 위험이 있다: 심지어 과학이론도, 종교 대체물이자 아집적인 이념인 지식적 유행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로써 나는, 나의 강좌의 두 번째 부분으로 과학적 진보에 대한 장애물들을 다루는 부분에 과학적 혁명과 이념적 혁명의 구분에 온다.

이유인즉 독단이라는 항상 중요한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이념적 관용이라는 문제뿐만 아니라, 다르고 내가 생각하기에 더 흥미로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과학과 이념의 특정 연계로부터 정말로 존재하지만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과학과 이념을 융합하여 과학적 혁명과 이념적 혁명을 혼동했던 연계 출현하는 문제를 나는 의미한다.

과학자들을 포함한 지식인들에게 이념들과 지식적 유행에 속아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 때에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종교의 쇠퇴에 그리고 아버지의 역할이 없어진 우리 사회에 만족하지 못하여 무의식적인 종교적인 욕구 때문일 개연성이 높다. 여러분이 그 운동들에 눈을 뜨자마자 그 종교적 특징이 뚜렷한 양상을 띤, 지식적으로 과시적이고 공개적으로 비종교적인 운동들의 상당한 숫자를 나는 나의 일생동안 목격했는데 다양한 전체주의적 운동들과 전혀 별개였다. 이 많은 운동들 중에서 최고의 운동은, 아인슈타인이 아버지라는 인물로서 고취된 운동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지닌 항상 겸손하고 고도로 자기-비판적인 태도와 그의 친절성과 관용 때문에 그 운동은 최고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아인슈타인의 이념적 혁명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양상들에 관하여, 나는 나중에 몇 마디 말을 하겠다.

나는 본질주의자가 아니어서 나는 여기서 이념들의 본질이나 특성을 토론하지 않겠다. 나는 단지, 매혹적으로 판명되는 그리고 과학자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에게 흥미를 부여하는 세상에 대한 -과학적 이론이나 신조 혹은 견해에 대하여 이념이라는 용어를 내가 사용할 것이라고 매우 일반적이고 모호하게 서술하겠다. (그리하여, 가령 인도주의적이거나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매우 도움이 되기도 하고 또한 매우 파괴적인 이념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과학과 이념, 그리고 나아가 과학적 혁명이념적 혁명을 뚜렷이 구분하여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념들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말할 필요가 나에게 없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사례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 구분을 상술하겠다.

이 사례들로 인하여, 확립된 과학이론을 새로운 과학이론에 의하여 합리적으로 전복시킨다는 의미에서의 과학과 심지어 몇 가지 과학적 결과들을 흡수하는 저 이념들을 포함하여 이념들의 사회적 아집이나 혹시 사회적 수용에 관한 모든 과정들을 구분함이 중요하다는 것이 밝혀질 것을 나는 희망한다.

 

XII

 

첫 번째 사례로서 나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과 다윈적 혁명을 선택하는데 왜냐하면 이 두 가지 경우들에서 과학적 혁명이 이념적 혁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사회적 다윈론이라는 이념을 무시할지라도, 두 가지 혁명들 모두에서 우리는 과학적 및 이념적 구성요소들을 구분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적 및 다윈적 혁명들이,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를 변화시킨 한, 이념적이었다. 그 혁명들은, 각각이 지배적인 과학이론을 전복시켰던 한, 분명히 과학적이었다: 지배적인 천문학적 이론과 지배적인 생물학적 이론.

코페르니쿠스적 및 또한 다윈적 이론의 이념적 충격은 매우 컸는데 왜냐하면 그 이론들 각각이 종교적 교리와 충동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이것은 우리 문명의 지성사에 매우 중요하여 예를 들어 과학사에 반향을 불러왔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종교와 과학 사이에 긴장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와 다윈 모두의 이론들이 종교와 충돌했다는 역사적 및 사회학적 사실은, 그들에 의하여 제시된 과학이론들에 대한 합리적 평가와 전혀 무관하다. 논리적으로 그 평가는, 그 두 가지 이론들 각각에 의하여 시작된 과학적 혁명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리하여 과학적 혁명과 이념적 혁명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데 특히 이념적 혁명들이 과학적 혁명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저 경우들에서 그렇다.

더욱 특히 코페르니쿠스의 이념적 혁명이라는 사례로 인하여, 심지어 이념적 혁명도 합리적으로서 기술된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과학에서 진보에 대한 그리하여 합리성에 대한 논리적 기준이 우리에게 있는 반면, 과학 외부의 진보나 합리성에 관한 일반적인 기준과 같은 것이 우리에게 있는 듯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 외부에 합리성에 대한 기준들과 같은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서는 안 될지라도). 예술에서 (그리고 과학에서) 많은 현대주의(modernism) 운동들과 또한 예술에서 많은 의고주의(擬古主義: archaism) 운동들에 나의 의견으로 예술과 (혹은 과학과) 관련이 없는 가치들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지성적으로 무미건조한 의하여 밝혀지는 바와 같이, 수용된 과학적 결과들에 근거를 두는 심지어 과시적인 지식적 이념도 비합리적일 것이다. 정말로 이런 종류의 많은 운동들은, 너무 진지하게 고려되지 말아야 하는 유행일 뿐이다.

과학적 혁명과 이념적 혁명을 구분을 상술하는 나의 과제로 나아가서, 나는 이제 이념적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주요 과학적 혁명들의 몇 가지 사례들 제시하겠다.

패러데이(Faraday)와 맥스웰(Maxwell)의 혁명은, 과학적 관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혁명만큼 위대했고 아마도 더 위대했다: 그 혁명은 뉴튼의 핵심적인 학설을 중심력(central forces)이라는 학설 밀어냈다. 그러나 그 혁명은 물리학자들 전체 세대를 고취시켰을지라도, 이념적 혁명을 초래하지 않았다.

J.J. 톰슨(Thomson)의 전자 (이론) 발견도 또한 주요 혁명이었다. 100년이나 된 원자의 불가분 이론을 뒤엎자, 그 과학적 혁명은 쉽게 코페르니쿠스의 혁명과 비교될 수 있게 되었다: 톰슨이 그 발견을 발표하자, 과학자들은 톰슨이 자기들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발견으로 인하여 이념적 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발견으로 인하여, 물질 분야에서 지배를 위하여 2400년 동안 싸우고 있던 두 가지 적대적인 이론들 모두가 불가분 원자 이론과 물질의 연속성 이론 전복되었다. 이 중요한 발전이 지닌 혁명적 중요성을 평가하면, 그 발전으로 인하여 원자에 전기뿐만 아니라 구조가 도입되고 그리하여 물질의 구성에 도입되었음을 여러분이 기억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또한 1925년 및 1926년 하이젠베르크와 보른의, 드 브로이의, 슈뢰딩거와 디랙의 양자역학은 본질적으로 톰슨 전자 이론을 수량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톰슨의 과학적 혁명은 새로운 이념을 낳지 않았다.

또 다른 두드러진 사례는 1911년 러더포드(Rutherford), 1903J.J 톰슨에 의하여 제시된 원자 모형을 뒤엎은 것이다. 러더포드는, 원자에 의하여 점유된 공간 전체에 양전하가 틀림없이 분배된다는 톰슨의 이론을 수용했다. 이것은, 가이거(Geiger)와 마스덴(Marsden)의 유명한 실험에 대한 그의 반응으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그들은, 매우 얇은 금박지판에 알파 입자들을 발사했을 때 알파 입자들 중 몇몇이 2만 개의 입자마다 약 하나 단순히 튀겨나가기보다는 금박지판에 의하여 반사된 것을 발견했다. 러더포드는 믿지 못했다. 그가 나중에 말한 바와 같이:그것은 내 생애에 나에게 발생한 최고로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15인치 포탄을 종이 티슈 한 조각에 쏘고 그 포탄이 돌아와서 당신을 맞히는 것인 양 거의 믿어질 수 없었다.’ 러더포드의 이 언급은, 완전히 혁명적인 그 발견의 특징을 드러낸다. 러더포드는, 그 실험이 톰슨이 원자 모형을 반증했음을 깨닫고 자신의 원자핵 모형으로 그 원자 모형을 대체했다. 이것이 핵과학의 시작이었다. 러더포드의 모형은 심지어 물리학자가 아닌 사람들 가운데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 모형은 이념적 혁명을 촉발하지 않았다.

물질 이론의 역사에서 가장 근본적인 과학적 혁명들 중 한 가지 혁명은 심지어 정확한 의미로 인정된 적이 없다. 나는 물질에 관한 전자기 이론을 의미하는데 그 이론은 톰슨이 전자를 발견한 후에 우세하게 되었다. 양자역학은 이 이론의 한 부분으로 떠올랐고, 완벽성1935년에 그리고 다시 1949년에 아인슈타인에 반대하여 보어에 의하여 옹호된 것은 본질적으로 이 이론이었다. 그러나 1934년 유카와(Yukawa), 40년 동안 문제없이 지배한 후에 물질의 전자기 이론의 전복을 초래한 핵력(nuclear forces)에 대한 새로운 양자이론적 접근방식을 개괄했다.

이념적 혁명을 촉발하지 못한 많은 다른 주요 과학적 혁명들이 예들 들어, 멘델(Mendel)의 혁명 (나중에 다윈론을 사멸에서 구원해준) 있다. 다른 주요 과학적 혁명들은 X-, 방사능, 동위원소 발견 그리고 초전도체의 발견이다. 이 모든 것들에는 상응하는 이념적 혁명들이 없었다. 또한 크리크(Crick)와 왓슨(Watson)이 이룬 돌파구에서 기인하는 이념적 혁명을 나는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

 

XIII

 

매우 흥미로운 것은 소위 아인슈타인의 혁명이라는 나는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혁명을 의미하는데 그 혁명은 지식인들 가운데서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나 다윈론의 혁명이 지닌 지식적 영향에 비견될 수 있는 영향을 발휘했다 경우이다.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이 이룩한 많은 혁명들 가운데서 여기서 유관한 두 가지 혁명들이 있다.

첫 번째 혁명은 특수상대성인데 그 상대성은, 로렌츠 불변성(Lorentz invariance)으로 갈릴레오 불변성(Galileo invariance)을 대체하면서 뉴튼 동력학을 전복시켰다. 물론 이 혁명은,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기준을 만족시킨다: 옛 이론들은, 광속(光速: the velocity of light)과 비교되어 작은 속도들에게 근사치로서 유효한 것으로 설명된다.

이 과학적 혁명과 연관된 이념적 혁명에 관하여, 한 가지 요소가 민코프스키(Minkowski)에게서 기인한다. 우리는 이 요소를 민코프스키 자신의 말로 서술할 것이다. ‘내가 여러분 앞에 놓고 싶은 시공간은... 근본적이다. 그리하여 공간 자체로는 그리고 시간 자체로는 단순한 그림자들로 사라질 운명이고 일종의 두 가지의 통합만 독립적인 실재를 보전한다고 민코프스키는 서술했다. 이것은 지성적으로 전율을 일으키는 서술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과학이 아니다: 이것은 이념이다. 이것은 아인슈타인 혁명의 이념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자신은 이것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사망하기 2년 전 그는 코르넬 란쵸슈(Cornelius Lanczos)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우리는 그렇게 많이 알고 이해하지는 못한다. +++-[민코프스키 서명의] 지닌 4차원은 후자(後者) 범주에 속한다.’

이념적인 아인슈타인 혁명의 한 가지 더 의심스러운 요소는 조작주의(操作主義: operationalism)나 실증주의라는 유행이다 아인슈타인 자신이 동시성의 조작적(operational) 정의(定義)에 관하여 서술한 것 때문에 책임이 있을지라도 아인슈타인이 나중에 배척한 유행. 아인슈타인이 나중에 깨달은 바와 같이 조작주의가 논리적으로 옹호될 수 없는 교설일지라도 그 후 물리학에서 그리고 특히 행동주의적 심리학에서 조작주의의 영향력은 컸다.

로렌츠 변환(Lorentz transformations)에 관하여, 그 변환이 동시성에 관한 전이성(轉移性: transitivity)의 유효성을 제한한다는 것이 이념의 한 부분이 된 듯하지 않다: 전이성 원리는 한 체계에서 또 다른 체계로의 전이에 무효가 되는 반면, 각 관성체계 안에서 유효하다. 또한 그 원리는, 일반상대성 혹은 더욱 특히 아인슈타인의 우주론이 선호된 우주적 시간의 도입과 결과적으로 선호된 국지적 시공간 틀의 도입을 허용하는 이념의 한 부분도 되지 않았다. 일반상대성은 가장 훌륭한 과학적 혁명들 중 한 가지 혁명이라는 게 나의 견해인데 왜냐하면 일반상대성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잘 시험된 이론과 중력과 태양계에 대한 뉴튼의 이론 충돌했기 때문이다. 일반상대성은 틀림없이 뉴튼의 이론을 근사치로서 포함하지만 몇 가지 요점들에서 뉴튼의 이론과 반대가 된다. 일반상대성은, 감지될 수 있는 이심율(離心率: eccentricity)을 지닌 타원형 궤도에 대하여 다양한 결과들을 산출한다. 그리고 일반상대성은, 광속의 6/10을 능가하는 속도로 중력장의 중심에 접근하는 물리학적 입자는 (광양자 포함) 뉴튼 이론에서처럼 중력장에 의하여 가속되지만 감속된다는 다시 말해서, 무거운 물체에 의하여 인력이 작용하지만 반발력이 작용한다는 놀라운 결과를 포함한다.

매우 놀랍고 흥미로운 이 결과는 시험들을 통과했지만 이념의 한 부분이 된 듯이 보이지 않는다.

과학적 (이념적과 반대로) 관점에서 아인슈타인의 일반적인 이론으로 아마도 매우 중요한 것은, 뉴튼의 이론을 이렇게 뒤엎고 수정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요점 대 요점으로 뉴튼의 이론과 비교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뉴튼의 이론을 근사치로서 보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참이라고 믿은 적이 없다. 그는 1922년에 자신의 이론이 통과하는 단계에 불과하다고 말하여 코르넬 란쵸슈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단기성(短期性: ephemeral)’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는 레오폴트 인펠트(Leopold Infeld)에게, 자신의 이 장방정식(場方程式: field equation) 오른편이 (에너지-운동량 텐서[energy-momentum tensor]) 지푸라기처럼 약한 반면 왼편은 (곡률텐서[curvature tensor]) 바위처럼 단단하고 말했다.

일반상대성의 경우에 상당한 이념적 영향력을 지녔던 이념은, 굽은 4차원 공간이라는 이념이었던 듯이 보인다. 이 이념은, 과학적 혁명과 이념적 혁명 모두에서 틀림없이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이념적 혁명으로부터 과학적 혁명을 구분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게 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혁명이 지닌 이념적 요소들은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리하여 과학사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 영향은 모두 좋은 것은 아니었다.

먼저 아인슈타인이 인식론적 방법 및 특히 조작적 방법들을 본질적으로 이용하여 자신이 얻은 결과에 도달했다는 신화는 과학에 파멸적인 효과를 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러분이 얻은 결과들을 특히 좋은 결과들 꿈을 꿔서 여러분이 얻는지 아니면 블랙커피를 마셔서 얻는지 아니면 심지어 잘못된 인식론으로부터 얻는지는 무관하다.) 두 번째 그 신화는, 그 세기에 두 번째로 훌륭한 혁명적 이론인 양자역학이 특히 자체의 인식론적 깊이와 관련하여 틀림없이 아인슈타인의 혁명보다 낫다는 믿음을 초래했다. 내가 보기에 이 믿음은 양자역학의 위대한 창시자들 중 몇몇에게 영향을 미쳤고 또한 분자생물학 창시자들 중 몇몇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 믿음으로 인하여 양자역학에 대한 주관론적 해석이 우세하게 되었다: 내가 거의 40년 동안 싸우고 있던 해석. 나는 여기서 상황을 기술할 수 없지만 양자역학의 현란한 업적을 (그 업적 때문에 우리는 그 업적이 심각하게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인식하는 반면 양자역학에 대한 정통적 해석은 물리학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이념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사실상 그 해석은 현대주의적 이념의 한 부분이고 그 해석은 과학의 진보에 심각한 장애물인 과학적 유행이 되었다.

 

XIV

 

과학적 혁명과, 그 혁명과 때때로 연관되는 이념적 혁명을 내가 분명히 구분했기를 나는 바란다. 이념적 혁명은 합리성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합리성을 해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념적 혁명은 흔히 지식적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 이념적 혁명이 과학적 혁명과 연관될지라도 이념적 혁명은 고도로 비이성적인 특징을 지닐 것이어서 의식적으로 전통과 단절될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혁명은 아무리 근본적일지라도 실제로 전통과 단절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혁명은 자체보다 앞선 혁명들을 틀림없이 보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학적 혁명들이 합리적인 이유이다. 이것으로 나는 물론, 혁명을 일으킨 위대한 과학자들이 전적으로 이성적인 존재들이라거나 그런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여기서 과학적 혁명의 합리성을 논증하고 있었을지라도 내가 추측하는 바는, 개별 과학자들이 불편부당하고 편견이 없다는 의미에서 객관적 및 합리적이 될 터이라면 우리는 틀림없이 정말로 제거될 수 없는 장애물에 의하여 막힌 혁명적인 과학의 진보를 발견할 것이라는 점이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