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A. L. Fisher

H.A.L. 피셔(Fisher), 유럽사, 서문 및 1권 고대 및 중세의 서언

이윤진이카루스 2021. 5. 25.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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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의 역주

 

역자가 아는 바, 본 저서는 유럽사로서 매우 중요한 저서이다. 그러나 역자가 인터넷에 검색한 결과 한국어로 번역된 흔적이 없었다. 따라서 역자의 번역을 다른 한글 역서와 비교하고 대조하여 수정 및 보완을 거칠 수 없었기 때문에 역자의 번역은 오역과 누락이 없을 수 없다. 다행히 원서를 인터넷에서 내려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박학한 독자들이 본 역서의 미심쩍은 부분을 대조하여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도록 원서 부분도 뒤에 붙였다.
또한 역자는 가능한 한 원서의 많을 부분을 번역하겠지만 피셔의 원서가 방대하기 때문에 완역할 가능성도 적고 굳이 완역이 필요할지 의심스럽다. 그래서 원서의 중요한 부분을 역자 임의대로 선택하여 번역하고 중요하다고 역자가 판단하는 부분을 밑금으로 표시하며, 원서에 인용된 참고문헌의 쪽수를 제외하고 역서에 표시된 원서의 쪽수 표시는 역자가 역자의 블로그에 역서를 게재하기 때문에 서로 맞지도 않아서 무의미하다.


                                                                                                     2021년 5월, 서울에서 역자

 

 

 

 

 


유럽사

 

 

 

 

 


성스러운 행복
(LAETITIAE SACRUM)

 

 

 

 

 

 

 

유럽사


H. A. L. 피셔(FISHER) 저

 


한 권으로 된 전편

 

 

에드워드 아놀드(EDWARD ARNOLD)
출판사


초판본, 1916년

 

 

 

 

 

 

 

 


BILLING AND SONS 사 GUILDFORD AND LONDON
PRESS 사 인쇄

 


                                                             서문

 

나는 이 저서를 신석기 인류로 시작하여 스탈린과 무스타파 케말(Mustapha Kemal), 무솔리니(Mussolini)와 히틀러로 끝낸다. 이 거칠고 험난한 경계선들 사이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기억하기에 즐겁고 인간의 자존심을 과찬하는 몇 가지 전망들, 아리안 족들의 생기를 불어넣는 유입, 그리스인들의 창조성 만개, 로마에 의한 긴 평화, 기독교 윤리를 청소하는 조류, 야만인들 침공 이후 고전 학문에 대한 점진적 재발견, 항해를 통한 신대륙 발견, 18세기의 합리주의 그리고 19세기의 인간애와 과학. 그러나 한 가지 지식적인 흥미가 나에게 거부되었다. 즉, 내가 역사에서 인지한 책략이자 리듬이며 미리 결정된 형태보다 더 현명하고 더 박식한 사람들. 이 조화들은 나로부터 감추어졌다. 나는, 파도가 이어지는 것처럼, 이어지는 위기만을 볼 수 있는데 한 가지 커다란 사실로 그 사실이 독특하기 때문에 그 사실에 관한 일반화들이 있을 수 없고 역사가에게 한 가지 안전한 규칙만 있을 수 있다: 인간의 운명들이 전개되면서 역사가가 우발성과 미예측성의 작용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냉소주의나 절망의 교설이 아니다. 진보에 관한 사실은 역사라는 페이지에 크고 명백하게 쓰여있다: 그러나 진보는 자연법칙이 아니다. 한 세대가 획득한 토대를 다음 세대가 잃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사고는, 재앙과 야만성을 초래하는 통로들로 흘러들어갈지도 모른다.
나의 시작 주제들은 그리스와 로마, 야만과 기독교이다. 신대륙의 발견과 식민지화, 민족 국가들의 발흥과 자본주의 체제의 완전한 발전은 지구상에서 6천년 동안의 문명화된 생활을 의식하면 뒤늦지만 여전히 상대적으로 최근의 일이다. 증기기관과 전기는 훨씬 더 최근의 일이다. 지금부터 2000년 동안 이 두 가지 과학적 발명품들은 인간의 역사에서 “거대한 분수령(Great Divide)”로서 간주될지도 모른다.
III권은, 좁은 한 가지 의미에서가 아니라 프랑스인들과 네덜란드들과 스칸디나비아인 및 미국인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영국과 영연방들에서 지금 견고하게 확립된 시민적이고 정치적 및 종교적 자유의 체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자유주의적(Liberal)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여, 자유주의적 실험을 기술한다. 그리고 자유를 더 넓은 이 의미에서 실험적으로서 내가 말한다면, 내가 자유를 폄훼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인즉 내가 미덕 자체를 그만큼 빨리 폄훼할 터이기 때문에) 19세기를 통하여 토대를 얻은 다음에 자유의 물결이 지금은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서 별안간 퇴조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따름이기 때문이다.a 그러나 노예상태의 확산이, 그 확산에 여하한 이익들이 동반된다할지라도, 어떻게 축하할 문제가 될 수 있는가? 건강한 사람에게는 마약이 필요하지 않다. 한 민족의 도덕적 척추가 부러질 때만 깁스붕대가 필요악이 될 것이다.
확대된 참고서적들에 대하여 독자들은 다음을 참고하라: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 고대, 중세 및 현대 역사(Cambridge Ancient, Mediaeval and Modern Histories), 기본(Gibbon)의 로마제국의 쇠퇴와 함락(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의 J. B. 버리(Bury) 판본에 인용된 권위자들. 라비스(Lavisse)의 프랑스 역사(Histoire de France), 스텁스(Stubbs)의 영국 헌법사(Constitutional History of England) 및 다른 표준적 역사서들. 각 장(章)의 말미에서, 선호에 의하여 현대적이고 영어나 프랑스어로 접근될 수 있는 몇 가지 도해 서적들을 주지시키려고 나는 집중했다.
나의 아내, 레오폴드 위컴 레그(Leopold Wickham Legg) 씨 및 데이비드 오그(David Ogg) 씨에게 교정쇄를 검토해준 그들의 커다란 친절에 감사한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속대학인 올 소울즈 대학(All Souls College)의 D. A. 라일리(Reilly) 씨에게, 처음 장들(chapters)와 관련하여 몇 가지 유용한 제안들을 주어서 나는 감사한다: 그리고 저서의 나중 부분에 귀중한 많은 자문을 주어서 나의 오랜 친구인 리처드 로지(Richard Lodge) 경에서 감사하는데 그는 80 나이에도 역사관련 판단과 정보에 대한 자신의 현저한 재능들을 온전히 지니고 있다.

H. A. L. 피셔(FISHER).

 

 

 

 

 


a 역주: 이 저서의 출판년도가 1916년임을 고려하라

 

 

 


                                                       1권

                                                  고대 및 중세

 

 

 

 

 

                                                            서언

 

우리의 그리스 문명. 현재 유럽은 채권자이다, 이전에 유럽은 채무자였다. 로마는 그리스의 유산을 전달한다. 동양 지역들이 서양으로 침투한다. 기독교는 백인의 종교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분리되었고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의 시험, 불가리아인, 헝가리인 그리고 핀란드인의 기독교 수용과 유대인과 아랍인 및 터키인의 기독교 배척. 유럽 문명은 정신적이지 인종적이 아니다. 유럽 통합의 문제.

우리 유럽인들은 그리스의 자손이다. 우리의 문명은, 에게 해 동부의 찬란한 도시 생활에 뿌리를 두는데 그 근원의 흔적들을 잃은 적이 없고, 인간이라는 족속의 다른 위대한 문명들로부터 중국과 인도와 페르시아와 셈족으로부터 우리가 구분되는 특징을 우리에게 남긴다. 유럽의 형성기 종족들이 사용하던 언어가 산스크리트어 및 페르시아어와 친척 관계라고, 서양이 동양에서 빌려왔고 동양은 서양에서 빌려왔다고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상호 침투는 아주 복잡하고 미묘하며 지속적이어서 우리의 문명에서의 유럽적 요소들을 외국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들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는 틀림없이 가망이 없다고 학자들은 우리에게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폭넓은 사실이 남는다. 유럽 문명이 있다. 우리는 유럽인을 만날 때 그를 안다. 유럽인을 중국인이나 인도인이나 페르시아 인을 구분하는 일은 쉽다.
그래서 우리의 문명은 독특하다: 우리의 문명은 또한 도처에 파고들고 우세하다. 땅의 면적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미국은 유럽을 능가하고, 인구에서는 거대하고 안정된 아시아의 소작농이 유럽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 모두를 합친 것보다 많다. 그러나 세계를 포괄적으로 살펴보면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 유럽인들의 거주지들이나 유럽인들의 정신이 작용하는 흔적들이 있음이 밝혀질 터이다. 서반구에서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인구에서 작고, 중요하지 않으며 줄어들고 있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백인들에 의하여 경제적 편리를 위하여 도입되었다. 북미와 남미에는 주로 유럽에서 온 식민지 개척자들이 거주한다. 호주아시아(Australasia)는 영국인들의 것이다. 아프리카의 정치적 방향은, 나일 강 하류 지역들이 모호하게 배제되면서, 유럽의 손에 떨어졌다. 아시아에서 경우가 다르지 않다. 유럽의 정치적 영향은, 심지어 인도나 팔레스타인에서처럼 직접적인 유럽의 통제로 구체화되지 않는 곳에서도, 분명하다. 국체(nationality)라는, 자유와 진보라는,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적 교육이라는 이념들은 혁명적이고 광범위한 결과들을 초래하며 서양에서 동양으로 통과했다.
게다가 세계가, 비교될 수 없는 현대과학의 재능들을 빚지는 사람은 유럽 사람이다. 지식을 통한 자연 정복에 아시아인들이 기여한 바는 무시될 정도이고 아프리카인들이 (이집트인들을 제외하고) 기여한 바는 없다. 인쇄기와 망원경, 증기기관, 내연기관과 항공기, 전보와 전화, 무선방송과 영화, 축음기와 텔레비전은 유럽 혈통의 백인들에 의하여 이룩된 연구의 결과이다. 생리학에서의 모든 주요 발견들과 혈액순환 및 호흡의 법칙들과 기타 등등도 그렇다. 현대 문명 생활의 재료적 구조는 유럽민족의 지성적 용감성과 집착의 결과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과학적 발견의 분야에서의 이 놀라운 우수성은 항상 존재했던 것이 아니고 항상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지구상에 존재한 세월의 길이에 의하여 판단되면 유럽 백인종들의 상승세는 매우 최근의 현상이다. 유럽은 항상 가르치는 자가 아니었고 아시아는 항상 학생이 아니었다. 이 관계들이 역전되는 때가 있었고 유럽 (태양이 지는 땅) 사람들은, 바빌론과 이집트의 훨씬 더 오래되고 더 호화로운 문명들에 의하여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 문명이 동양 문명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규모를 토론하는 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다. 큰 규모의 고고학적 증거들이 지금, 이오니아 문명에 대한 우리의 초기 기록들보다 오래전에 동양의 기술과 재주들이 지중해 주변에 거주하던 민족들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제안을 뒷받침하여,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으로 끝내자. 그러나 유럽 문예의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했을 때 그 새벽으로 인하여 동양적이 아닌 사회가 드러난다. 호메로스의 운문은, 기원전 12세기경 지중해 동부 연안에 두드러진 서양 문명이 있었다는 충분한 증거이다.
저 순간부터 유럽인의 정신이 지닌 생존 가치가 확실해졌다. 그리스 문명은 호메로스 시대의 종교에 근거하는데 힘을 키우면서 성장했다. 그리스 문명은 페르시아의 힘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리스의 자유도시들이 마케도니아의 힘에 굴복했을 때 그리스 문화의 영향은 알렉산더의 군대에 의하여 동쪽으로 인더스 강까지 전파되었다.
알렉산더의 임무는 결국 로마제국에게 이전되었는데 로마제국은 로마제국을 공격한 외부의 야만인들로부터 위험에 대항하여 서양 문명을 400년 동안 방어했다. 그러나 로마군이 외부의 적들로부터 국경을 지킬 수 있었을지라도, 동양적 종교들의 서양 침투를 막을 여유는 없었다. 오래된 고전적 신들(deities)은, 이시스(Isis)와 미트라스(Mithras)와 태양신 앞에서 후퇴했고 이 신들은 나중에 그리스도에게 권좌를 넘겼다.
기독교의 창시자는 아람어를 말하는 갈릴리 인이었고 유대 전통으로 양육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모국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다. 거의 시작부터 기독교는, 유대인들로부터 계승된 하나의 진리와 지독하고 임박한 운명으로부터의 유일한 구원 수단이라는 자체의 열정적인 주장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자체의 단순한 갈릴리의 신성함과 민주주의적 이상들에 의해서도 가난한 자들의 영혼을 얻어 유럽의 종교가 되었다. 유대인의 뿌리에서 탄생한 종교지만, 1세기의 그리스적 분위기에서 정말로 빨리 예루살렘의 율법적 엄격함에서 분리되어 그리스 사상의 특징에 섞여들었다! 기독교 성경들의 언어는 그리스어였다. 기독교 신앙, 기독교 의식, 기독교 조직의 두드러진 어휘도 ㅡ 사도, 복음서, 교회, 교구, 주교, 사제, 부제(副祭: deacon)와 무수히 많은 것들이 심지어 로마에서도 기독교회에게 라틴어이기 전에 그리스어였고 그리스어는 신학에서도 공식 언어였고 지방조직에서도 그랬다 ㅡ 역시 그렇다. 할례라는 동양적 의식은, 자신의 시대에 가장 훌륭한 그리스 작가였던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세계를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데 치명적인 장애물이라고 할례를 거부했는데, 할례로 인하여 처음에 로마인의 정신에서 혼동되기 쉬운 두 가지 종파들이 명백하게 구분되었다. 기독교도와 유대인은 분리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십자가형 이야기가 우아하게 단순하고 애처롭게 언급되면서 기도교도들이 모이는 곳마다 널리 알려지게 되어 그 분리가 심해졌고 예루살렘에서 몇몇 사제들과 장로들의 범죄가 기독교교회들에 의하여 유대인종 전체에 가해졌다. 그리하여 초기 복음서 저자인 성 마가(St. Mark)가 오늘날 악의는 없을지라도 반(反)-셈족 저술가의 노선에서 첫 번째인 것으로 많은 유태인들에게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 기독교에서 유대교와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유럽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험이자 새로운 조직 원칙이었다. 기독교도가 된다는 것은, 말하자면, 유럽 민족들의 동료 위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비기독교라는 것은 추방자와 적이 되는 것이었다. 유럽 역사의 많은 부분은, 동양과 서양 사이의 세속적인 갈등을 본질로 하는데 그 갈등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들로 시작하여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긴 결투의 형태로 재개되었고 그 결투의 최근 단계는 1923년 로잔 조약(the Treaty of Lausanne)에 의하여 끝났다. 얼마나 유명한 이름들이 ㅡ 교황 우르바노 II세와 고드프리 드 부이용(Godfrey de Bouillon), 살라딘과 사자왕 리처드, 상 루이(St. Louis)와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The Cid), 술레이만 1세(Soleyman the Magnificent)와 외젠 드 사부아 공자(Prince Eugène), 무스타파 케말과 그리스 수상 베니젤로스(Venizelos) ㅡ 저 세속적인 전쟁과 관련되는가! 무슬림과 기독교 세계의 작용 및 상호작용은 유럽 역사의 거대한 주제들 중 하나다.
기독교적 시험이 유럽적 동료애의 표시로서 수용되자, 오래전에 확립된 유럽 인종들과 이런저런 때 유럽대륙에서 거주지를 이룩한 저 아시아 인종들 사의 관계들이 필연적으로 결정되었다. 불가리아 인들과 헝가리인들 및 핀란드인들은, 다양한 정도의 호의로 유럽의 종교를 수용했다. 언어와 신체 유형에서 그 인종들이 동양적이고 야만적인 근원의 표시를 지녔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 인종들은 해를 입지 않았다. 종교는 외국에서의 발원을 속죄하고 그 인종들에게 유럽적 형제애의 권한을 부여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세 가지 동양적 인종들이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 인종들은 계속해서 유럽 땅에서 비-기독교적 신앙을 유지했다.
유대인들은 박해를 받았고, 아랍인들은 점차 스페인에서 쫓겨났으며, 터키인들은 오랜 전쟁 후에 그리스본토와 섬들로부터 그리고 발칸반도의 거의 작은 부분에서 추방되었다.
이 뚜렷이 대조되는 세 가지 종족들 중에서 오직 한 가지 종족만 유럽인들의 생활에 주요하고 영구적인 영향을 미쳤다. 터키인들에게는 이념들이 없었고 그들은 현세대까지 아시아 고원지대의 유목민들에게 합당한 사고와 생활 방식을 유지했다. 아랍인종들로부터 중세 유럽은, 의학과 과학과 역사 및 철학에 대하여 중요한 것을 배웠는데 그 학문들은 당시에 유용했고 지금은 대체된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서 유럽은 구약성경을 빌려왔는데 구약성경은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기독교 교리의 부분으로 수용되어 서양 인종들의 삶에 아마도 다른 책보다 더 깊이 파고들었다. 이 성경의 거대한 몸체로부터, 다른 부분들이 야만시대의 도덕들을 반영하는 반면 어떤 부분은 고귀한 도덕적 아름다움의 높이까지 오르면서 유럽인들은 세대를 이어 자신들의 이념들을 도출했다; 하느님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역사적 질서에 대한 관념들뿐만 아니라 상고시대에 대한 관념들과 먼 옛날 동양적 사회의 전형적인 특성에 대한 관념들도 유럽인들은 도출했다. 구약성경의 영향이라고 모두 좋은 것은 아니었다. 구약성경이 성자(聖者)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었다할지라도, 구약성경은 너무 자주 박해자의 폭력에 용기를 불어넣었다.
유대인들의 성경이 지닌 힘과 별도로 그리고 유대인들이 받았던 잔인한 박해들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유럽의 경제에서 독특한 위치를 스스로 이룩했다. 기원후 70년 로마황제 티투스(Titus)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이후 이 신중하고 재능이 있는 동양 민족은 세계의 기독교 사회를 통하여 퍼져나가 지금은 유럽에서 약 1천 1백만 명 그리고 미국에서 4백만 명에 달한다.
여러 해 동안 자비의 문은 그들에게 폐쇄되었다. 그들은 추방자들로서 간주되어 가장 명예로운 직업들과 책임감들로부터 금지되어 전염병이 도는 더러운 유대인 집단거주지에서 억지로 거주했다. 항상 무시당하고 주기적으로 약탈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재난을 당하거나 두려움에 떨 때에는 피에 굶주린 살인적이고 무지한 군중들의 표적이 되어 유럽의 유대인들은 중세기들 통하여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을 견디어냈다. 18세기가 되자 나은 상황이 시작되었다. 종교적 관용이라는 햇빛이 중부 및 서부 유럽에 비치자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이 허용되었다. 기독교 국가가 후의를 보이자 유대인들은 예술, 과학 및 문학에 고귀하게 기여하여 충분히 보상했다. 마침내 서양의 활기차고 번영하는 민족들로부터 격려를 받고 유대인들은 주변 사회의 수준으로 올라가 그 수준의 정신으로 교육을 받고 그 수준의 색채를 띠었으며 그 수준의 욕구들 몇몇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양과 서양의, 아리안 족과 셈족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은 여전히 남았고 190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던 자신들의 작고 태양이 내리쬐어 메마른 고국으로부터 처음 추방되어 서양에서 피난처와 미래를 찾을 때만큼 그 차별은 감지될 수 있었고, 심지어 지금도 독일인들을 뒤흔든 인종적 히스테리의 난폭한 발작에서처럼 그 차별은 야만스러운 탄압을 분출하기 쉽다.
그 후 인종은 유럽사에 통일하는 요인으로 들어온 적이 없다. 유럽의 인종들은 항상 스스로 서로 다르다는 느낌을 가졌고 자신들은 다른 것처럼 항상 행동했다. 유럽에 어떤 형태의 조직이나 일관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들은, 인종적 통합에 근거한 적이 없고 규모에서 우리가 유럽적으로서 기술하기로 동의한 지리적 지역에 국한된 적도 없다. 알렉산더의 제국은 인도까지, 로마제국은 유프라테스 강까지, 교황의 영역은 지구의 극한 지역들까지 펼쳐졌다. 국제연명은 부연하여 유럽에 평화를 위한 조직을 제공하는데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와 캐나다 및 호주아시아(Australasia)를 포함하는 정도의 규모이다.
우리가 특히 유럽적으로 지적하는 종류의 문명은, 인종이라는 토대에 근거하지 않고 사상과 업적 및 종교적 소망의 계승에 근거한다고 귀결된다.
이 계승에 유럽의 모든 인종이 두드러지고 특별한 기여를 제공했다. 그것이 유럽이 흥미로운 이유이다. 유럽 문명에는, 셈족과 인도인들 혹은 중국인의 특징과 구별되는 어떤 특징이 있지만 우리가 지켜보는 동안 그 특징은 천 가지 다양한 색깔과 색조로 사라지고 인종끼리 달라지고 국가끼리 달라지고 지방끼리 달라져 윌트셔(Wilshire) 사람들은 도싯(Dorset) 사람들과 특정 세부사항들에서 뚜렷이 대비되며 심지어 이웃한 마을들도 서로 외국인들로 본다.
이 차이점들은 해결되지 않는다. 자기 의지를 지닌 활기찬 민족들에게 공통적인 체계를 부과하려는 유럽의 커다란 시도들은 하나하나 붕괴했다. 로마제국은 독일인들에 의하여 좌절했다. 역사시대에 통일을 위하여 작동했던 영향력들 중에서 단연코 가장 강력한 영향력은, 먼저 그리스인들과 라틴인들 사이 불화에 의하여 그다음에는 신교인 북쪽의 반란에 의하여 깨졌다. 세속적인 관념들의 어떤 체계도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데 더욱 성공하지 못했다. 유럽은, 프랑스 혁명의 평등주의적 계획에 의하여 통일되기를 거부했다. 동등하게 유럽은 지금, 러시아 공산주의의 철석같은 프로그램도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첫 세기 이래 항상, 통일의 꿈은 현장 위에서 맴돌며 정치가들과 민족들의 상상력을 홀렸다. 그 차이점들이 그렇게 많고 그렇게 뿌리 깊은 유럽의 민족들이 자신들의 공동이익 추구와 갈등 회피를 위하여 어떤 안정된 조직으로 어떻게 아주 잘 결합될 것인지가, 세계의 미래 복지에 관한 어떤 문제에도 가장 크게 관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