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A. L. Fisher

유럽사, 1권 2장 여명기의 그리스

이윤진이카루스 2021. 7. 1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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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여명기의 그리스

 

그리스인들의 도래. 호메로스의 시대. 지리적 특징들. 도시국가들. 신정체제의 부재. 정치적 발전의 연속적 단계들. 아테네와 스파르타. 이오니아의 도시들. 식민지 운동.

 

한 가지 놀라운 운명의 작용에 의하여 세계의 연대기에서 독창성을 지닌 한 민족이 역사의 완벽한 빛을 받으며 출현한 것은 유럽인종들 중에서 최초의 인종이다. 역사의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인종적으로, 근원적으로, 언어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하나라고 믿었는데 이 모든 면에서 잘못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을 하나로서, 그리고 우수한 문화에 의하여 그들 주변의 야만인 세계의 어두운 배경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간주했다는 사실은 현대 분석가들에 의하여 감지된 사실보다 더 중요한데 그 사실은 세계의 모든 위대한 민족들처럼 그리스인들도 자신들의 풍요로움을 많은 지역들에서 끌어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누구였고 궁극적으로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확실한 지식의 문제라기보다는 박식한 지식의 문제이다. 기원전 1000년 경 새벽이 밝아오자 아리안 혈통의 사람들이, 길게 연속적으로 종족적으로 침투한 결과로서, 정착하는데 그 침투는 소아시아의 해안지역에서 그리고 에게 해의 섬들에서 또한 지금은 그리스로 지칭되는 땅에서 지속되었을 것이다.

지중해의 일조량이 풍부한 지역의 서부에서, 섬들에서 그리고 그리스 본토에서, 침입자들은 오랫동안 정착되고 생활의 기술에서 진보된 업적에 의하여 멀리 기원전 15세기까지 뛰어난 문명을 발견했다. 이 더 오래된 미노아나 에게 해의 민족들과 아카이아인들 및 도리아인들이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침입자들이 연속적으로 종족적으로 이동한 명칭들이기 때문에) 다양한 부분들에서 뒤섞여 원주민이 제공해야 했던 모든 문화를 취했지만 도처에서 자기들 자신의 풍요롭고 유연한 언어와 정치적 이념들 및 제우스 숭배를 펼쳤다. 그러나 이 고대 시대에 대하여 우리에게는 얼마나 아는 게 없는가! 이 연속적인 초기 이동에 (기원전 1200-900) 대한 그리고 민족들의 널리 퍼진 이동과 재조정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갈등들에 대한 연대기는 없는 반면, 에게 해의 문명은 북쪽에서 내려온 이주자들의 압력을 받아서 분열되었고 이오니아인들 및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 본토로부터 밀려나 소아시아 연안에서 정착지들을 건설했다. 후기 미케네의 군주들이 그리스인들이었는지도 우리는 심지어 알지 못한다. 진실한 지식 대신에 전설과 추측이 틀림없이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유례없는 기념비가, 방대하고 모험적인 동요기에 남는다. 그리스에서 모든 것이 바다관련 삶에 유혹되는데, 태양이 내리쬐는 언덕들과 부족한 평야들과 작고 안전한 항구들과 섬들의 배치가 말하자면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통로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바다로 진출했다. 그들은 에게 해를 건너서 더 멀리 떨어진 해안에서 정착했으며 헬레스폰드 입구까지 몰래 올라가서 싸움이 필요할 때는 이곳 아시아의 민족들과 싸웠다. 거대한 아카이아인들의 연맹과 트로이의 프리지아인들 사이의 한 가지 그런 전쟁으로 (기원전 1194-84) 인하여, 그리스의 음유시인들에게 한 가지 주제가 떠올랐는데 그 주제 위에 많은 후속 세대들의 운문적 상상력이 끝없이 수를 놓았다. 그리스의 음유시인들이 지녔던 운문적 재료를 구체화하고 변화시키고 확장하는 키오스(Chios) 섬 출신 맹인 시인이었던 호메로스의 작품 일리아드(Iliad)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전설이라는 안개 속에 묻혔다. 주인공들은 영웅의 형태를 띠고 신들(gods)은 싸움에 참여했으며 쟁점은, 그리스인들의 단합된 힘과 아시아의 힘 사이의 싸움으로서 묘사된다. 현대의 역사유물 수집가들에게 청동기 시대의 에게 해 문명을 생생한 색깔로 묘사하는 일리아드는 정보로 가득하다. 미케네의 항구였던 티린스(Tiryns)의 폐허에서 역사유물 수집가는 호메로스가 묘사한 왕의 방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이 탁월한 서사시의 집합체는 기이한 유물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그 집합체는, 사라졌고 더 영웅적이던 세계에 대한 성경이었고 서책들 중에서 서책이었으며 한 인종의 전통들과 종교들을 담고 있었고 전쟁과 이주 및 발견의 저 위대한 시대의 유서였는데 그 성경으로부터 크게 성공적인 문명이 태어날 운명이었다.

우리들에게 이 이오니아의 운문은, 자체의 예술적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유럽언어의 초기 생존 표본으로서도 귀중하다. 우리의 공통적 문화는 호메로스에게서 유래한다. 특정 넓은 세부사항들에서 세상에 대한 그의 전망은 우리의 전망이기도 하다. 일리아드에 의하여 호메로스가 스미르나(Smyrna)와 에베소(Ephesus)의 풍광에 익숙하고 서양을 희미하게 인식한다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생애 대부분을 아시아 연안에서 보냈을 개연성이 있을지라도 호메로스의 운문들에서는 동양주의의 흔적이 없다. 일리아드에서 행동의 무대는 그리스의 용병들이 침투한 아시아의 내륙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중해 동부에서 이루어져서 물결이 이는 바다가 항상 시야에 들어온다. 삶의 쾌락, 인간의 존엄 감정, 개인적으로 현달하려는 열렬한 갈망, 쾌활함, 호기심 그리고 모험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의 창조적 특징들이고 유럽의 행운들을 만들 운명이었는데 호메로스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존심이 강하고 자유로우며 자신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올림포스 산에 대하여 행복을 느낀다. 신들(gods)은 인간의 친구들이자 동반자들이었고 매우 인간적으로 남성과 여성에게 즐거움을 제공했지 이집트나 인도에서처럼 괴물 같은 동물들이 아니었다. 왕은 동양적인 폭군이 아니고 동등한 지배자들의 무리에서 우두머리였다.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 왕이었던 아가멤논은 선동적 군인이었던 테르시테스(Thersites)의 견제를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들 중 한 가지 풍광인 그리스의 경치에는 분명히 드러나는 자체의 선과 색깔의 유혹 아래로 인간에 대한 엄혹한 규율이 숨어있다. 기후가 온화한 북부에서 계절들이, 감지될 수 없는 단계들에 의하여 서로 녹아들었고 여름은 너무 덥지 않으며 겨울은 너무 춥지 않아서 인간 활동의 연중 방해를 받지 않고 일상적으로 흐른다. 그런 기후지역들에서 강은 강둑을 만들면서 평탄하게 혹은 거의 평탄하게 흐르고 잘 자란 목재로 구성된 숲은 둥근 언덕들을 덮거나 평원의 경작지와 너른 목초지가 산재한다. 그리스에는 완벽하게 대조되는 기후가 있다. 여기서 혹독한 추위의 겨울은 실제 비가 오지 않는 여름과 뚜렷이 구분되는데 여름의 열기는 여름에 부는 북--동 바람에 의하여 완화될 따름이다. 북부 유럽의 의미로, 강이 있는 곳에는 겨울비가 내리는 동안 사납게 급류들이 굽이치고 긴 여름 가뭄 동안에는 암반이 말라서 하상에서 침묵한다. 메마른 산괴가 무너진 이곳저곳에 작고 평탄한 경작지 평야가 있다. 그러나 목재 숲은 없다. 그리스는 올리브와 능수버들의 땅이고 노간주나무와 협죽도(夾竹桃)의 땅이다. 플라타너스, 보리수 및 상수리나무는 많지 않다.

그렇게 부족한 땅으로 인하여 약탈과 해적질, 식민지화와 전쟁의 유혹이 항상 일었다. 그리스 정착민들은 겨울추위에 동면하지만 봄이 오고 처음 꽃이 피면 야외토론회를 개최하여 능동적으로 삶을 영위하고 힘든 농업일과 기계적인 노동을 하면서 궁핍한 세상의 압박감을 받았다. 그리스 풍광의 청량감과 푸른 하늘과 대비를 이루는 두드러진 산등성이들은 빈곤이라는 유령과의 힘든 싸움에 도움에 되지 못했다. 양과 염소를 국경선에서 강탈하려는 시도는 아마도 규칙적인 소규모 여름 전쟁으로 이어졌는데 이 초기에는 해적질이나 무역이라는 평화로운 방법들에 의한 보다 합법적인 활동만큼 흔한 사건이었다. 전쟁과 약탈에 의하여 물품을 취하려는 것은 공동체의 농사와 목축에 필요한 보충 행위였다. 그것은 범죄라기보다는 국가 경제의 한 부분이었다. 사람은 살기 위하여 먹어야 한다. 농작물이 부족하면 사람은 훔치거나 전쟁을 벌이거나 이주해야 한다.

조직적인 식민지화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기원전 750년에서 550년까지) 그리스인들은 공공생활은 교육에서 영구적인 가치를 부여한 형태를 띠었다. 초기 정착민들은 산재한 마을들에서 반은 유목민이고 반은 농부들로 살았다: 그러나 점차 편리함과 방어에 집중하게 되었다. 도시들이 높고 방어 가능한 암반 위 그리고 해변에서 떨어진 곳에 건설되어 해적의 급습을 피했다; 그리고 도시와 동시에, 그렇게 드문 힘과 강렬함을 지닌 정치의식이 발전하여 그리스 세계는 그 의식을 망각할 수 없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호의적인 기후와 지리적 환경에 큰 도움을 받았다. 언덕자락에 자리를 잡고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인근 국가들과 별도의 생활을 유지했고 자체의 제도들을 발전시켰으며 매우 잘 두드러진 특징을 습득하여, 언어와 종교의 모든 공동 결속에도 불구하고, 마르세이유 사람이 파리 사람과 혹은 요크셔 촌뜨기가 서머셋셔의 촌뜨기와 혼동되지 않는 것처럼 스파르타인과 아테네인 및 테베인은 혼동될 수 없었다.

언덕의 다른 편에 사는 이웃에 대하여 지리에 의하여 초래된 무관심은 시민들 자신들 사이의 결사로 인한 친목에 의하여 상쇄되었는데 우리는 유럽의 북부에서 그와 유사한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스 시민은 공공의 눈으로 살았다. 화창한 계절에는 하루 종일 문밖으로 나가서 이웃과 이야기하고 배심원 역할도 하고 극장에 앉거나 자신의 직업을 수행했다. 지식인들의 대결, 추문의 전파, 혹은 정치적 자유와 시민의 자존심 발전에 그렇게 호의적이었던 사회는 없었다: 어떤 사회보다 더 웅변에 환호하고 비판에 열성적이었으며 훌륭한 사람이 지지하는 인상적인 예술들에 개방적이었고, 애국심이 더 행복하게 절제되었고 애국심이 필요한 순간에 더 열정적이었고 전 시민이 참여했다. 질시와 폄훼가, 어느 정도의 정치적 이상과 나란히 만연했는데 정치적 이상은 어떤 나라도 능가하지 못했다.

그리스인들이 조직적인 사제들의 마비성 통제를 벗어난 것은 아마도 이 솔직하고 공개적인 생활의 결과이다. 그리스인들은 책이나 교회에 종속된 적도 없고 사제들의 권위를 빙자한 시민 간의 싸움에 당혹한 적이 없다. 엘리우시스 제전(the mysteries of Eleusis)이나 델피의 사제들도 이 자유로운 호기심이 풍부한 영특한 인종의 상상력을 압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미신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그 미신 중 몇몇은 어둡고 원시적이었지만 많은 미신은 가볍게 믿어졌으며 운문의 천재성에 의하여 승화되었는데 이유인즉 그들이 먼 과거의 반쯤 전설적인 인물들과 열정과 식욕 같은 올림포스의 신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하늘과 바다와 개천 및 숲 등 도처에서 신들(: divinities)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들에 귀중하거나 인상적이거나 무섭게 보였던 모든 것은 신적(神的) 영예를 받았던 것 같다 의술의 신() 아에스쿨리피우스(Aesculapius)의 뱀은 그의 성역인 에피다우루스(Epidaurus)를 찾아오는 환자들에 의하여 건강에 대한 완전한 관리자로서 간주되었는데, 지구와 하늘 사이의 조정자인 아폴로나 원시적 사랑의 신인 아프로디테(Aphrodite) 못지 않았고 아프로디테는 그리스인들이 에게해 해안에 도달하기 오래 전에 지중해 사람들의 심장을 통제하여 그녀의 제국을 확보했다. 그러나 더욱 특별히, 충심은 도시 자체의 수호신으로 향했다.

그다음에 종교가 애국심에 파고들었지만 정치에는 크게 파고들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커다란 전쟁들은 종교적 문제로 발발한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로 발발했다. 아테네에 적들을 불러들인 것은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Athena)가 아니라 그녀의 적들이 기술과 무기에서 느끼는 거대하고 야심찬 권력에 대한 질투심이었다.

그래서 그리스의 작은 도시국가들에서, 노예제 폐지와 사회구조 및 권력의 큰 변화와 같은 사회적 혁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대인에게 의미를 지닌 세속적 정치의 기교와 관행이 자라났다. 저 생동하고 변하는 사회에서 정권의 형태들이 빠르게 만들어지고, 변하고 폐기되었다. 모든 실험이 가능했고, 모든 이념이 토론에 부쳐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158가지 그리스 법률을 연구하여 얻는 경험을 요약하는 정치에 관한 포괄적 논문에서, 결코 낡을 수 없는 정치적 지혜를 담은 설명서를 세계인들은 본다. 유럽 정치철학의 뿌리는 이 고대시대의 관행과 사념에서 발견될 수 있다.

군주제, 귀족정치, 금권정치와 그 후에는 민주정치로 이어진 전제정치와 같은 것들이 개괄적으로 말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정치적 발전에서 연속적인 5 단계들이었다. 긴 목록이지만 한 가지 교훈으로, 누락된 정치체제가 표시되어 옹호될 것이다. 옛 아시아적 유형의 폭정으로 신정체제이고 세습적이며 절대적인 독재체제는 없었다. 전형적인 그리스 독재자는, 그 후 나폴레옹처럼 혹은 고대 시실리의 몇몇 독재자들처럼 무기와 폭력으로 권력으로 밀치고 들어가지 않았다. 그 그리스 독재자는 피압박민들의 보호자로서 그리고 귀족정치의 특권에 대한 적대자로서 나타났다. 그가 폭군이었을지라도, 그는 관습의 껍질을 깨고 외국과 상업 및 더 넓은 관계를 촉진했으며 민주주의적 자유를 위한 길을 닦은 선동정치가이기도 했다. 아테네의 문화 및 자유의 발전에서, 계몽군주인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us)는 자신의 선배였던 현명한 입법가 솔론(Solon)만큼 그리고 아테네 민주주의의 창립자인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만큼 기여했는데 클레이스테네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의 독재체제가 끝났을 때 권력에 올랐다.

평화로운 토론을 거쳐 정치적 결정들이 다수표결에 의하여 수용되었을 때 인간사의 합리적 질서유지에서 커다란 진전이 이룩되었다. 모든 문명화된 정치적 삶의 뿌리인 이 진전이 그리스의 도시들에 의하여 이룩되었고 가장 두드러지게 아테네에 의하여 이룩되었는데 아테네에서 자유의 제도들이 가장 빨랐고 가장 완벽하게 발전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에는 투표와 유명한 사람의 추방 및 시민법정과 공직의 빠른 순환보직과 같은 많은 요점들이 있는데 그것들로 인하여 현대 비평가들의 입술에는 미소가 떠오른다. 그 비평가들은 얼마나 유치한가, 얼마나 아마추어식인가, 얼마나 비효율적인가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이것들이 세밀하게 검토될수록, 그런 것은 정치적 자유의 필수적인 대가였다는 것이 더욱 명백해진다. 민주주의는, 풍부한 보상 기회에 의하여 매력적이 될 따름인 도박이다. 아테네의 제도들에서 그렇게 논리적으로 수행된 기회균등의 원칙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내재하는 정의감과 더 오래된 문화에서 귀중한 것의 도움을 받았고 더 가까운 동양의 관습을 또한 흡수하여 리디아인들로부터 주화를 가져왔고 바빌론과 이집트로부터 천문학 체계를 가져와 평화 시의 기술에서 급격한 진보를 성취했다.

그리스인들의 식민지 운동은, 현시대의 이주와 구분되는 특징에 의하여 나타난다. 그리스의 식민지는 국가가 주도했는데 흔히 도시국가의 과잉인구나 문제가 되는 인구를 제거하려는 욕심에서 촉진되었고, 식민지 주민들은 개인적인 재물 추구자들로서가 아니라 자매도시의 거주자로서 그리고 위엄이 있고 공적인 기획이 요구하는 상황에 의하여 총총히 길을 떠났다. 델피의 신탁이 식민지 운동을 허락했고, 아폴로의 선의가 없거나 델피의 사제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정보가 없었으면 성급함과 불경(不敬: impiety) 때문에 아마도 오류로 보였을 터인 사업을 그 신탁이 격려했으며, 후대의 바티칸이나 유럽협조체제(the Concert of Europe)처럼 경쟁하는 사업들의 영역을 정했다.

밀레토스(Miletus)에서 시작된 일련의 식민지들은 남부 러시아의 풍요로운 옥수수밭들과 내륙의 모피 거래업자들 및 금광업자들의 수확물을 이용했다. 키레네(Cyrene)는 북아프리카의 요충지였고 마르세이유는 갈리아지방의 요충지였으며 코린트의 시라쿠사(Syracuse), 로도스 섬의 젤라(Gela), 메가라의 셀리누스(Selinus) 등 번창하는 식민지 무리는 시실리 계곡들의 무한한 옥토의 요충지였다. 6세기 중반 에브로 강(Ebro)에서 드네프르 강(Dnieper)까지 지중해와 폰토스(Pontus) 연안은 그리스 식민지들로 둘러싸였다.

여러 세기 동안 자신들만 문명세계를 구축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럽인들의 혹은 더 정확하게 지중해 연안에 거주했던 유럽민족들의 저 관습적인 작은 부분이었다. 그리스라는 신성한 지역 밖에서 그들은 야만적인 암흑의 그림자만 보았다. 아시아에 관해서는 고대에 알려진 것이 없었고 베니스 사람인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가 13세기 말에 알려질 때까지도 그랬다. 심지어 알렉산더 대왕도 중국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했다. 거대한 사막지역들이, 방대한 지역을 차지한 질서 잡힌 중국사회를 지중해 해역의 활발한 해양인들 및 무역업자들과 갈라놓았다. 지구상의 두 가지 주요 문명들이 서로 알지 못한 채 성장했다. 단테는 13세기 지리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를 반영하여 예루살렘을 지구의 중심에 두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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