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A. L. Fisher

유럽사, III장 그리스와 페르시아

이윤진이카루스 2021. 7. 29. 16:48

피셔, 유럽사 1권 III장 그리스와 페르시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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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그리스와 페르시아

 

페르시아인들에게 점령당한 리디아. 카르타고의 도전. 이오니아의 반란. 페르시아 전쟁. 그리스 승리의 실제적 중요성. 아테네 제국의 발흥. 페리클레스.

 

6세기 중반까지 그리스 세계는 자체의 내분 분열보다 더 무서운 위험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스 인종의 분산은 어디에서도 심각하게 도전을 받지 않았다. 시칠리아와 마그나 그라에키아(Magna Graecia)에서, 트리폴리와 이집트에서 그들의 정착지들은 일천한 역사의 위험에도 살아남았다. 심지어 야만족들이 사는 거대한 내륙지방이 있는 소아시아에서 이오니아의 해안촌락들에게는 번영이 거의 방해를 받지 않는 기간이 있었다. 바다에서 셈족인 페니키아인들은 유럽의 남부 통로들에 오랫동안 익숙했는데 어쩔 수 없이 적수를 받아들였다.

육지에서는 알리아테스(Alyattes) 왕과 그의 아들 크로이소스(Croesus)가 다스리는 리디아가, 자신들의 문화보다 더 세련된 문화에 매혹되었다. 리디아 왕국이 생존하는 한, 소아시아의 이곳 지방들은 알렉산더 정복의 이전 기간보가 그리스의 영향에 아마도 더 노출되었다. 그리스인 여행자들은 리디아의 수도인 사르디스(Sardis)에 들락거렸다. 리디아의 군주에 의하여 그리스의 신탁에 도움이 요청되었고 풍부한 보상이 주어졌다. 다시 반세기가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에게 주어졌다면 소아시아는 크게 그리스화가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난폭한 역사에서 풍부한 저 재앙들 중 한 가지 재앙이 그곳에서 겹쳤다. 별안간 (기원전 546), 오랫동안 기적적인 부유함과 권위로서 간주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폐위되고 수도는 공격을 받아 정복되자 그리스인들은 놀랐다. 승자는 페르시아인 키로스(Cyrus: Kurush)였는데 그의 방대한 제국은 그 후 오래지 않아서 이집트 정복에 의하여 확장되어 강국 아시리아의 폐허 위에 건설되었다. 리디아라는 완충지대 국가가 사라지자 그리스 세계는 최초로 조직화되고 공격적인 동양의 군주제와 대면하게 되었다. 다음 200년 동안 페르시아의 위협은 그리스 정치에서 지배적인 요인이었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 사이의, 폭정과 자유 사이의, 이란의 불 숭배와 그리스 다신론의 자유롭고 다양한 역할 사이의 싸움이었다. 자체의 시작 단계들을 경험한 그리스인들의 세대에게는 위험에 처한 것이 자유와 법과 발전으로 보였다. 그리스가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의 무력을 물리친 위대한 시절 동안에 젊은이였던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는, 동양적 야만성에 대한 아테네 민주주의의 승리에 의하여 생성된 찬사로 가득하다.

이유인즉 충돌이 발생했을 때 아테네는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의 개혁 덕분에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테네가 즉각적으로 그리스의 해군 및 지성의 수도가 되어서 아테네의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침략자들의 처음 공격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는 아시아의 군대에 대항하는 힘은 그리스의 집단적 에너지라기보다는 아테네에서 새로 발견된 자유에 의하여 방출된 힘으로 보였다.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드라마가 동쪽에서 진행되는 동안,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은 무역과 상업에서 오랫동안 교육을 받고 당시는 정치적 확장 과정에 착수한 동양적 권력인 카르타고와 마주했다. 카르타고의 페니키아인들은 서부 지중해에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스페인 해안에서 자리를 잡았고, 그들의 영향력은 사르데냐에서 우세했으며 그들은 즉각 에트루리아의 해적들과 연합하고 페르시아의 왕궁과 밀접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렇다면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에 대한 카르타고의 공격이, 그리스에 대한 페르시아의 침공과 틀림없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은 단순히 우연이 아니다. 동부의 테르모필레와 살라미스 전투라는 영예로운 시기에 시칠리아에 있는 히메라(Himera)에서 카르타고인들이 패배했다. 각각의 전선에서 그리스인들은 아시아 민족에 의하여 공격을 받았다; 각각의 경우에 패배를 계속 맛본 것은 아시아의 힘이었다.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 이후 그리스가 페르시아의 점령을 받은 적이 없고 히메라 전투 이후 시칠리아가 카르타고인들에게 도전을 받지 않았을지라도, 두 곳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정복될 때까지 휴전이 반복되면서 지구전이 되었다. 그리고 시라쿠사 참주들의 재산과 군사력 모두가 카르타고인들을 서부 시칠리아에서 휩쓸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페르시아 전쟁은, 다리우스의 지방영주들에 대항한 소아시아에 있는 이오니아 도시들의 반란에 아테네와 에레트리아(Eretria)가 지원해서 발생했다 (521-485).

이 유명한 전쟁의 시작 단계들은, 그리스에 재앙이 닥친다는 느낌으로 커졌다. 다리우스는 이오니아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유럽철학의 아버지인 탈레스의 탄생지인 밀레투스는 인구가 모두 추방되어 남자는 살해되고 여성과 아이들은 la 보내졌다. 그리고 소아시아가 그렇게 잔인하게 진압되고 트라키아(Thrace)와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에 굴복한 이후 강력한 함대가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징벌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나아갔다.

그리스가 통합되었더라면, 침입자를 물리치는 문제는 아마도 여전히 중대하고 심지어 필사적으로 보였을 터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역사에서 당시도 그리고 후대에도 공동의 목표로 분열되지 않는 충성심으로 단일 지도자 밑에서 모든 그리스의 힘이 단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기원전 490년의 결정적인 여름에 유명한 마라톤 들판에서 페르시아군을 공격하여 무찌르는 임무는 플라타이아(Plataea)라는 작은 마을에서 온 소부대의 도움을 받은 겨우 9천명의 아테네인들에게 떨어졌다.

이 놀라운 승리로 전쟁이 끝났다. 아테네가 방어됨을 발견하고 페르시아의 함대는 고국을 돌아갔고 10년이 지나서야 다리우스의 후계자인 크세르크세스(Xerxes)가 공격을 재개할 위치에 놓였다. 저 귀중한 10년 동안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의 희귀한 통찰에 의하여 고취되고 라우리움(Laureion) 광산의 은 발견에 도움을 받아서 피레우스(Piraeus) 항구와 해군을 강화하여 480년에 공격이 떨어졌을 때 그리스의 도시들 가운데서 아테네가 바다에서 최고이고 스파르타가 땅에서 최고였다.

새로운 침략은 모든 경우에 계획된 특징이 드러나는데 그리스인들은 경계하여 포괄적으로 공동 방어 전략을 세웠다. 거대한 아시아의 군대는 5백만의 군사력이라는 소문으로 과장되었고 다양한 무기와 장비를 갖추었는데 아토스(Athos) 반도를 관통하는 운하인 헬레스폰드를 가로지르는 부교도 있었다 이 가공할 전쟁 장비들은 이전 경험들 모두를 뛰어넘는 위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할지라도, 그리스 모두가 한 마음이었던 것은 아니다. 코린트지협에 소집된 31개 도시국가들의 회의에는 북쪽 대표들이 두드러지게 많이 참석하지 않았다. 이 회의에서 몇몇 도시국가들은 반대의 의사를 표했고 다른 도시국가들은 미래의 위험을 두려워했다. 심지어 스파르타도 그리스의 문턱에서 침략자를 저지하는 행동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펠로폰네소스에서 자신의 위치를 방어하는 데 더 관심을 쏟았다. 그리스 동부로 들어가는 관문이 테르모필레 통로는 군대가 아니라 분견대에 의하여 방어되었는데 그들의 용기와 실패로 끝난 희생은 유럽에서 불멸의 기억들 중에 속한다.

용감한 스파르타인들의 마지막 군인이 전사하자, 페르시아인들은 장애물이나 방해 없이 아티카로 진군했는데 왜냐하면 스파르타의 주력군대가 페르시아의 진군을 막는 대신에 해협을 가로질러 방어벽을 쌓는 데 전념했기 때문이다. 아테네인들이 역사상 최고의 결심들 중 한 가지 결심을 한 것은 당시였다. 스파르타의 도움을 확신하지도 못하고 자신들도 밀레투스의 운명을 당한 것이라는 매우 분명한 결정상황으로 지상에서는 피할 곳도 없고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아테네인들은 바다에서 구원을 찾기로 결심했다. 아크로폴리스에 남겨진 작은 수비대를 제외하고 전체 아테네인들은 배에 실렸고, 여성과 어린이들이 이웃 섬들에 보내진 반면 아테네의 가용 시민들은 함대에 승선하여 적과 결판을 내려고 각오했다. 해협으로 후퇴하려는 비겁한 결정은 아테네인 테미스토클레스의 재능에 의하여 극복되었다. 그리스의 해군 동맹군들이 살라미스와 본토 사이의 좁은 해협에서 페르시아군과 싸우기 위하여 출항한 것은 그의 덕분이었다.

200척의 아테네 3단 갤리선이 스파르타와 다른 아테네 연맹도시들로부터 온 더 작지만 상당한 분견대들의 도움을 받은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인들은 크세르크세스 대왕 자신이 참전한 가운데 회복 불가능한 재앙을 맞이했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가 아시아로 퇴각했지만 그의 군대는 테살리아에서 겨울을 보내고 479년에 공세를 재개했다. 전투는 플라타이아(Plataea)에서 벌어졌다. 다시 그리스인들은 공격했고 이번에는 스파르타인들이 선봉에 섰는데 다시 동양인들은 패퇴했다. 군사지도자들도 부족하고 싸움도 못하여 그들의 총사령관인 마르도니우스가 살해당한 채 병력이 소진되어 아시아의 군대는 그리스에서 철수하고 10년 이상을 그리스에 드리워졌던 커다란 위협은 마침내 끝났다. 그 전쟁의 나중 단계들은 바다나 아시아 땅에서 치러졌다.

마라톤, 살라미스, 플라타이아는 각각 세계의 결정적인 전투들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정말로 그 전투들은 결정적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수용되는 의미에서 결정적은 아니었다. 다리우스가 마라톤 전투에서 이겼거나 크세르크세스가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이겼더라면, 그리스 도시들의 자유롭고 두드러진 삶은 최종적으로 쇠퇴했을 터이다. 수사(Susa)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수사에서 그리스를 통치한다는 것은, 고대 세계의 여하한 국가가 지닌 자원의 범위도 벗어났을 터이다. 페르시아인들은 정복된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에게 어떤 형태의 자유를 부여하는 지혜를 이미 알았고 소아시아에서 정치적이었던 것은 유럽에서 훨씬 더 정치적이었다. 페르시아의 대왕이 승리했더라면 대왕은 그리스인 지지자들로 구성된 아첨배들에서 필요한 것이 없었을 터이다. 다리우스는 히피아스(Hippias)를 추방한 아테네의 통치에 그를 복원시켰을 터이다. 크세르크세스는, 테살리아의 왕자들이나 보에티아의 참주들이 자신의 손짓에 순응하는 것을 발견했을 터이다. 페르시아를 좋아하는 그리스인들을 통하여 시행된 느슨한 페르시아 지방 영주의 지배는, 아마도 그리스의 본질적인 자유와 제도들 중 많은 것들 보전했을 터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10년 동안 그리스 승리들의 실제적인 중요성은, 정치 분야에서라기보다는 정신의 영역에서 발견될 수 있다. 작은 민족이 거대한 제국을 패퇴시켰다. 정신적인 것이 은혜를 베푸는 신들(gods)의 도움을 받아, 부유함과 수적 우세와 물질적 힘을 이겼다. 오만은 억제되었다; 권력의 자만심은 추락했다. 아테나 여신은 필요한 시간에 자신이 선택된 사람들을 보호했다. 뒤이은 행복감으로 인하여, 문학과 예술에서 훌륭한 주제들과 업적들이 성장했는데 예술 자체의 아름다움과 다양성 그리고 인간적 매력의 영원성이 그렇게 놀라워서 유럽인들의 교육에 들었던 모든 요소들 중에서 예술이 아마도 사상의 자유와 취향의 연마에서 가장 많은 일을 실천했다.

플라타이아 전투에 이어진 47년은, 아테네 제국의 발흥에 의하여 그리고 인류의 영원한 감사를 아테네에 부여한 예술적 상상력의 저 위대한 운동에 의하여 표시된다. 마라톤에서 갑옷보병(hoplite)로서 싸웠던 아이스킬로스(Aeschylus)페르시아인들(Persae)”을 창작하고 나중에는 (458) 자신의 유명한 3부작 비극 오레스테이아(Oresteia)”를 창작한 것은 이 기간 동안이었다. 소포클레스의 천재성이 아테네의 무대에서 최초로 상연된 것은 당시였다. 저 황금기의 아테네인들에게는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 이후에 모든 것이 틀림없이 가능한 듯이 보였다. 에게해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에서 최고인 해군력을 보호막으로 간주했고 델로스동맹에 가입했는데 그 동맹은 아테네의 주도권을 묵시적으로 수용하고 함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비용을 분담했다. 그 함대는 승리한 극소수의 도시국가 국민들에게 주어져, 찬란한 행운이 적당하게 이용되었지만 아테네는 몇몇 방향들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나치게 사용했다는 비난을 그리고 다른 몇몇 방향들에서는 다른 동맹국들을 압박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이집트 원정은 불가피하게 실패로 끝났고, 454년 동맹의 공동 재산이 델로스로부터 아테네로 이전됨에 따라 동맹의 기금이 아테네의 치장에 쓰일 것이라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의심이 일었다. 그러나 모든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리스 역사에서 찬란한 시대였다. 페르시아인들은 에우리메돈(Eurymedon)의 바다와 육지 모두에서 다시 패했고 448년에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광물이 풍부한 섬인 타소스(Thasos)를 점령하자 아테네 제국의 재정적 배후가 강화되었다. 조공에 투덜대던 섬주민들에게, 비용이 너무 많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에게 아테네의 정책 집행자들은 인기가 있든 없든 아테네 제국은 마침내 임무를 완수했다고 답변할 수 있었다. 아테네는 에게해 연안을 그리스인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462년부터 계속해서 아테네의 행정은 천재적인 예지력을 갖춘 사람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페리클레스는 민주주의자였고 제국주의자였으며 그리하여, 당시 아테네에서 지배적인 정치사상의 두 가지 주요 조류들에 완전히 공감했다; 그러나 그는 드믄 재능을 아테네의 정치적 및 경제적 국면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특징 및 예술적 업적에 관련해서도 자신의 국가에 대한 두드러진 이상 또한 지녔던 듯이 보인다. 그는 아테네의 영향력이 널리 퍼지기를 원해서, 황량한 에욱시네(Euxine)해에서 포도밭으로 뒤덮인 남부 이태리의 언덕들까지 아테네인 정착민들을 심었다; 그러나 모국은 자체가 지닌 공공 기념물들의 찬란함과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지배적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 또한 그의 철학의 한 부분이었다. 순간적인 영감으로 그는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파괴된 아테네와 엘레우시스(Eleusis)의 사원들을 복구하기로 결심하여, 이 복구와 전시 행위를 아테네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찬란함으로 만들 것을 결심했다. 훌륭한 건축가 한 명과 훌륭한 조각가 한 명이 가까이서 그의 야망을 도왔다. 유명한 아테나 여신상은 그 후 오랫동안 파괴된 상태였지만 조각가 페이디아스(Pheidias)가 조각한 프리즈(frieze)가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우리는 여전히 건축가 익티누스(Ictinus)의 천재성을 칭찬할 것인데 그는 파르테논 신전의 우아한 균형미를 고안했다.

 

 

 

참고서적

 

G. B. Grundy : The Great Persian War. 1893.

R. W. Livingstone (편집) : The Legacy of Greece. 1921.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 IV.

Herodotus, A. D. Godley 번역. (Loeb Classical Libary.) 4 vols.

G. Glotz and R. Cohen : Histoire Grecque.

E. Cavaignac : Histoire de l'Antiquité. 3 vols. 191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