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A. L. Fisher

유럽사, IV장 아테네와 스파르타

이윤진이카루스 2021. 8. 22. 12:23

피셔, 유럽사 1권 IV장 아테네와 스파르타 (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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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아테네와 스파르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 아테네와 스파르타. 전쟁의 처음 10. 시라쿠사 정벌. 아테네의 패배. 영구적인 결과. 아테네 문학의 빛과 명성.

 

아테네가 페리클레스의 계몽적 통치하에 그리스 문명의 수도로서 정착하자마자 아테네는,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궁극적으로 커다란 재앙들과 지중해 세계에서 아테네의 정치적 영향의 소멸을 초래한 전쟁에 빨려들었다.

아테네 제국은 두 세대 동안 찬란하게 성장했는데, 지방의 자유를 억압함에 의하여 떠오른 모든 정치적 국가의 운명을 맛보았다. 내부로부터 아테네는 달가워하지 않는 시민들의 불만에 노출되었고 외부로부터는 질투하는 적대 국가들의 적대감에 노출되었다. 더 보수적인 그리스 국가들에게는, 단 하나의 도시가 휘두르도록 주어진 그렇게 많은 권력을 보면 경계할 것이 있었다. 아테네는 해양을 지배했다. 아테네의 함선들은 크리미아와 사이프러스, 이집트와 키레네(Cyrene)의 농작물을 호송했다; 그 함선들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닫고 열 수 있었으며 서부 지중해로 밀고 들어갔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외국인 인구에 대하여 식량을 확보할 필요로 인하여 확장 정책이 요구되었고 지금 일본이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우려를, 페리클레스가 통치하는 해양제국 아테네가 마주했을 때 그 우려를 스파르타와 코린트의 시민들이 주목했는데 해양제국 아테네는 시작이 매우 최근이고 발전이 매우 빨랐으면 압박 가능성이나 공격 가능성이 아주 무시무시했다.

전쟁 분위기가 한번 조성되면 전쟁이 일어나는 특정 환경은 상대적으로 관련이 없다. 도리아 지역의 코린트와 코린트의 강력한 식민지 코르푸(Corcyra)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두 도시는 아테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테네는, 서부의 시장들과 관련하여 강력한 상업적 적수에 대응하여 코르푸를 지원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을 알았다. 해전이 그리스 서부 해안의 시보타(Sybota)에서 벌어졌는데 아테네의 함선들은 한편에서 싸웠고 메가라의 함선은 다른 편에서 섰다. 전쟁이 불길하게 커졌다. 메가라와 코린트는 스파르타 동맹의 동맹국들이었는데 스파르타가 명예로운 우두머리였다. 두 국가는 페리클레스에 의하여 쓰라리게 모욕을 당했다. 메가라는 아테네 제국의 항구들에 입항이 금지되었다. 코린트는 아테네의 조공 동맹국이던 포티다이아(Potidaea)를 공격해서 상처를 입었는데 코린트의 식민지기도 했던 포티다이아는 페리클레스의 요구에 의하여 코린트인 행정관들을 해고하거나 자체의 성벽을 허물기를 거부했었다. 이 심각한 과정들에서 페리클레스가 유지한 고집스러움은, 15년에 걸친 평화로움에 대한 기록과 매우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어 페리클레스의 애인인 아스파시아(Aspasia)가 메가라의 법령을 주도했다거나 위대한 정치인 페리클레스가 개인적인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전쟁이 뛰어들었다는 것과 같이 그 고집스러움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묘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그의 인내심이 바닥이 났고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간주하여 그가 위기를 촉발하기 위하여 자신의 기회를 붙잡았다는 것이 더 개연적이다.

당시 27년 전쟁에 돌입하려던 그리스의 지도적 두 국가를 구분하는 것보다 더 예리한 대조는 상상하기가 가능하지 않을 터이다. 의도적인 신중함이 스파르타의 특징이었고 활기차고 진취적인 대담성이 아테네의 특성이었다. 스파르타인은 조국을 사랑했고 아테네인은 외국 땅에서 멀리 모험을 찾았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모든 참주 정당들은, 자신들의 자연스러운 지도자로서 그리고 귀족주의적 대의명분에 대한 주요 지지와 지원으로서 보수적인 스파르타를 바라보았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 본토에서든 섬들에서든 민주주의자들에게든 멀리 떨어진 트라키아(Thrace)나 시칠리아나 소아시아의 도시들에서든, 아테네가 정말로 자유 수호자로서가 아니라 고국에서 평등 옹호자로서 우뚝 섰다; 그리하여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전쟁은 이해관계와 관습의 갈등뿐만 아니라 정치적 원칙 자체의 사악함에 추가하여 정치적 원칙의 대립이 포함되었는데 그리스 도처에서 지역적 파당의 감정을 고취하여 혁명들을 초래했고 그 혁명 중 몇몇은 크게 잔혹하여 수치스러웠다.

모든 세부적인 특징과 기질에서 그렇게 서로 반대이던 민족들 사이의 전쟁이, 저 비용이 많이 드는 전투들의 시대에 날카롭고 짧았던 것은 아마도 예상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육지 국가고 아테네는 해양 국가였다. 아테네인들에게는 육지에서 스파르타인들을 압도할 수 있는 군대가 없었고 스파르타에는 전쟁 초기에 바다에서 아테네인들과 결판을 내기에 충분히 강력한 해군력이 없었다. 사실상 아테네는 섬이었다. 아테네의 국고와, 아테네의 식량 및 조선 물자들은 해외에서 아테네로 왔다. 수입 창출적인 제국은 민주주의의 함대를 유지했고 난공불락의 요새를 보수했다. 그렇게 준비된 국가는 강력한 위치에 놓였다. 적국은 아티카의 농산물을 황폐화시켰을 것이지만 아테네의 소망에 반하여 아테네를 굶주리게 만들어 항복시키거나 육지전투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 비용이 많이 드는 10년 동안의 전쟁이 끝났지만, 결정적인 우위는 어느 쪽에서도 얻지 못했다. 아테네인들은 주로 그리스의 북서 해안의 바다와 육지에서 몇 가지 승리를 얻었다;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군사기지 세 곳을 세웠고 스팍테리아(Sphacteria) 섬의 스파르타군을 포로로 잡았다. 이것들은 아테네에게 중요한 업적이었지만, 스파르타군이 매년 아티카를 공격하자 아테네에서 인구가 과잉되어 430년에 역병이 크게 번지고 6년 후에 칼키디케에 있던 요충지이자 부유한 식민지였던 암피폴리스(Amphipolis)를 잃음과 함께 보이오티아 들판에서 패배하여 (델리움 전투) 상쇄되었다. 부유하고 보수적인 노예소유자인 니키아스(Nikias) 같은 합리적인 사람들은, 물질적인 이득이 생기지 않는 전쟁의 어리석음을 오랫동안 보았다; 그러나 기원전 429년 페리클레스가 사망한 이래 아테네의 정치 통치권은, 자신의 이름을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승리의 시대에 제공한 현명한 귀족이자 철학자였으며 페리클레스보다 더 거칠고 더 폭력적이며 일반인에게 더 가까운 새로운 유형의 정치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피혁 거래상이었던 클레온과 등잔 제조업자였던 휘페르볼로스(Hypebolus)에게는, 끝장까지 싸운 시민들의 전쟁이 삶의 절정이었다. 그렇게 전쟁은 스파르타에 의하여 다소 망설이며 코린트와 아테네에 의하여 생사의 문제로서 계속 수행되었고 니키아스의 영향을 통하여 평화조약이 마침내 체결되었다. 그러나 평화조약 체결과 그 조약의 준수는 별개의 것이었다. 니키아스 조약에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스파르타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 중 몇몇으로 특히 코린트와 메가라 및 보이오티아가 묶이기를 거부했다는 것과 스파르타도 그들을 묶을 수도 없고 묶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평화 정신이 실제로 아테네에서 우세했더라면 주적을 새롭게 도발하지 않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참신하고 눈부신 유명인사가 아테네의 정치적 지평선에 떠올랐다. 알키비아데스는 젊고 아름다우며 영리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스승 소크라테스로부터 수용된 규약들에 도전하는 것을 배웠고, 그의 천부적 우아함과 뒤섞인 사고와 연설의 매혹적인 과감성으로 인하여 시민들의 눈에 그는 높은 책임에 적합하게 보였다. 420년 알키비아데스는 장군으로 선출되었고,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새로운 동맹국들을 찾아서 나중에 유명한 휴양지가 되었지만 이와 관련하여 스파르타의 우방국으로서 유일하게 중요한 에피다우로스(Epidaurus)를 공략하기 위하여 아르골리스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아마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의 정신 때문이었다. 그 공략은 실패로 끝났다. 아테네와 아르고스의(Argive) 군대는 만티네아(Mantinea)에서 완패했고, 아테네는 어쩔 수 없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밖에서 다음 군사적 모험을 추구했다.

시칠리아의 그리스 도시 중에서 뛰어나고 결과적으로 이웃들 간에 두려움과 질투의 원인이 된 것은 코린트의 식민지 시라쿠사였다. 코린트의 자매 도시 중에서 가장 큰 도시들을 정복하고 점령하여 코린트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것은, 아테네의 주전파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는 생각이었다. 무엇이 정말로 그렇게 큰 포획물로부터 나오지 않았겠는가? 시라쿠사를 점령하면 아마도 시칠리아를 통제하게 되고 이론 인하여 나중에 카르타고를 획득하여 지중해 서부에서 해상권을 얻는 것이다. 427년 레온티노이 출신의 고르기아스(Gorgias of Leontini)의 웅변에 감동되어 아테네인들은 시라쿠사로 원정군을 보냈다; 그러나 그 원정은 관심 없이 수행되어 효과가 없었다. 매우 다른 것은 9년 후 또 다른 시칠리아 도시의 매력에 주어진 반응이었다. 알키비아데스의 열렬한 상상력이 당시 영향력을 발휘했고 세제스타(Segesta)의 요청으로 그리스 최대의 함대가 피레우스 항을 떠나 서쪽으로 항해했다.

이 원정에서 필사적인 것은 없었다. 대규모 함대의 지원을 받은 3만 명의 아테네군은 즉각적이고 단호한 공격으로 시라쿠사를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최고사령관 직을 니키아스에게 맡기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는, 처음부터 혐오적이었던 바와 같이, 자신의 전쟁 수행에서 무능했다. 그의 긴 실수 목록에는, 뒤이은 재앙이 다른 원인보다 틀림없이 더 많이 치부된다.

동등하게 심각한 것으로 판명된 또 다른 어리석은 실수가 있었다. 원정 전야에 헤르마(Hermae)로 알려진 어떤 고대 조각상들의 훼손에 의하여 아테네 시민들의 정신이 크게 동요했다. 이 나쁜 불경죄는 누구의 탓이었을까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원정에 합류했다. 그에게는 많은 적이 있었고 그는 자유 사상가로 알려졌으며 그의 부재 동안에 명예훼손의 구름이 몰려들어 마침내 그를 재판에 소환하려는 결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아테네를 향해서가 아니라 스파르타를 목적지로 떠났고 향후 8년 동안 그는 자신의 훌륭한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이 태어나 도시를 모욕했다. 스파르타가 아티카의 땅에 위치한 강력한 요충지인 데켈리아(Decelea)를 점령하여 요새화한 것은 그의 충고에 근거했는데 그로 인하여 스파르타는 자신의 영토의 광산들과 농장들에서 나온 자원을 아테네로부터 빼앗을 수 있었다. 스파르타인들이 시라쿠사를 구하고 싶다면 방어전을 지휘하는 장군을 보내야 한다고 스파르타인들에게 말한 사람도 다시 알키비아데스였다. 그의 충고는 수용되었고 니키아스의 무능에 이득을 본 귈리포스(Gylippus) 장군은 아테네에게 그리고 아테네 연관 국가 모두에게 그들이 전쟁 동안 겪은 가장 큰 재앙을 내렸다.

이 사건의 반향은 문명 세계 전체에 느껴졌다. 키오스(Chios)에서 시작된 반란은 아테네의 섬 동맹들 가운데로 퍼졌지만, 훨씬 더 심각했던 것은 페르시아가 스파르타 편에서 전쟁에 개입한 것이었다. 저울추는 당시 아테네인들에게 불리하게 어느 때보다도 더 무겁게 기울었다. 그들의 은 광산들이 폐쇄된 반면, 새로운 공급원이 아테네인들의 적수에게 열렸다. 스파르타인들은 망설이지 않고 이오니아의 도시들을 자신들의 새로운 동맹들에게 주었고, 뤼산드로스(Lysander)에게서 군사적 및 정치적 재능에서 뛰어난 제독의 자질을 발견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강조할 위치에 놓였다. 그동안 아테네에서는 정치적 및 헌법적 변화가, 하늘이 낮아지거나 밝아지는 것처럼 서로 이어졌다. 참주정치가 시도되었다가 폐기되었고, 전쟁을 끝낸 아에고스포타미(Aegospotami) 해전에서 함대의 최종적인 패배를 아테네가 겪은 것은 정치선동가들의 통치하에서였는데 그 정치선동가들은 두 가지 공정한 평화제의를 거부했다. 해군도 없어지고 외국 재산도 빼앗겼으며 요충지들이 함몰되자 페리클레스는 희망이 좌절되는 쓴맛을 보았다. 승리한 국가들은 자기들의 취향에 따라서 행정부를 세웠고, 승리를 위하여 큰 도박을 하여 판돈을 잃은 절망적인 민주주의 정파 자리에 참주정이 세워졌다.

이 길고 우울한 전쟁 동안에 아테네가 잃은 것은 지나치게 많아서, 당시 아티카의 인구를 참고해도 1914-19181차 세계대전에서 심지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의 손실보다 많았다. 역병만 17천명의 병사들을 앗아간 것으로 추산된다. 시칠리아에서 4만 명이 전사했다; 게다가 이 현저한 재앙들은 매년 사망자들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초래했는데 함정은 10척씩 그리고 5척씩 그리고 더 많이 사라졌고 전사한 군인들은 수천수만이었다.” 아테네 함대의 노꾼들 중 상당한 부분이 고용된 노예들이었을 것이라는 사실과 아테네군에 종속된 동맹국 파견군들과 용병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참작할지라도 희생자들은 엄청났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렇게 큰 역할을 수행한 오래된 귀족 가문들은 더 추악한 이 전쟁에서 멸망했고 증가하는 숫자의 외국인들은 시민권을 획득하여 이소크라테스(Isocrates)의 말을 빌리면 아테네에는 새로운 민족이 있었다.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인들에게 빚진 예술과 문학과 철학에 대한 찬란한 업적을 우리가 반추할 때, 전쟁을 통하여 이 재능 있는 사람들의 큰 부분이 파괴된 것은 역사의 중대하고 회복 불가능한 재난 중 한 가지 재난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불필요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비극은, 세계의 최고 걸작품 중 한 가지 걸작의 주제를 형성했다는 사실로부터, 그 비극이 받을 주목의 공정한 몫 이상을 받았다. 투키디데스의 천재성으로 인하여, 아테네 힘의 쇠퇴와 함께하는 많은 사소한 세부사항에 불멸성이 생겼다. 아테네인들이 자신들의 초기 이점을 던져버린 연속적인 긴 파멸적 실수들은, 이 아테네인의 추방 시기에 중대하고 감동적인 웅변을 통하여 다시 언급되지만 타고난 엄격성과 영혼의 위대성에 의하여 추방 시기에 서술되어 편협함에서 승화한다. 코르푸(Corcyra)에서의 혁명에 관한, 전쟁 2년 차 아테네에서의 역병에 관한, 스팍테리아(Sphacteria)의 포획에 관한 그리고 시라쿠사 원정에 관한 이야기와 그 전쟁의 기초를 이루며 독자들의 정신에 와닿은 도덕적 쟁점들과 함께하는 연설들로 인하여 투키디데스가 서술한 저서에 비극의 색채가 드러난다. 러나 실제로 인류에게 중요했던 것은 아테네의 파괴가 아니고 아테네의 생존이다; 아테네의 정치적 실패가 아니고 아테네의 지성적 및 예술적 승리이다. 죽음을 몰고 오는 스파르타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석수장이였던 소크라테스는 인류가 수용한 관습에 도전하여 도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과학의 토대를 쌓았다. 아테네의 청중들이 디오니수스 야외극장에 몰려가 합리주의자였던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우아한 시가에서 혹은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자였던 아리스토파네스의 뛰어난 기지에서 민중선동과 전쟁 주장론에서 환호한 것은 이 고통스러운 긴장의 동일한 시기였다. 에우리피데스가 메데이아(Medea)를 저술한 것은 전쟁의 첫해였고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완성하는 것은 전쟁의 두 번째 해였으며 27년 동안의 전쟁에서 14년이 그 단계의 연대기에서 유사하게 기억될 수 있는 반면, 세상에 대하여 자체의 생생함과 탁월함을 여전히 보존하는 연극들의 생성에 의하여 두 가지 가장 암울한 시기가 각각 표시되었다. 스파르타인들이 데켈레아(Decelea)를 요새화하고 아테네인들이 시라쿠사 항구 해전에서 궤멸된 413년에 에우리피데스는 타우리스(Tauris)와 엘렉트라(Electra)에서 이피게니아(Iphigenia)를 저술했다. 아에고스포타미(Aegospotami) 해전에서의 운명적인 해는 (405) 유사하게 두드러진다. 그 해에 에우리피데스의 아름다운 백조 시가인 바카에(Bacchae)가 나왔고 아마도 고대 희극 중 가장 재미있는 개구리(Frogs)가 나온 해이다.

아테네가 그리스 교육에 봉사한 것은 인정되어 보상을 받았다. 아테네의 함대가 길고도 혹독한 전쟁 말기에 아에고스포타미 해전에서 파괴되었을 때, 아테네가 멜로스라는 작은 섬에 부과한 동일한 지독한 벌과금을 스파르타는 열정적인 분노의 경련을 일으키며 아테네에게 아마도 부과했을 것이다. 스파르타는 아마도 아테네를 초토화하여 아테네 시민들을 살육하였거나 노예로 삼았을 것이다. 아테네의 독재에 의하여 고취된 살벌한 증오에서 이 잔인성은 인기가 있었을 터이고 실제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심지어 스파르타도 그리스 문명의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느낄 수 밖에 없는 존경심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아테네는 자체의 미덕들이 고려되어 보존되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한 가지 경우에서만은 아니었다. 70년 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테베를 파괴하여 핀다로스의 집만 남고 놓자 테베인들을 구조하기로 작정한 아테네가 알렉산더의 공격에 노출되었을 때, 그렇게 많은 창조성을 지닌 성역인 아테네에 대한 동일한 존경심이 공격 계획에 끼어들었다 ㅡ

 

그래서 슬픈 엘렉트라의 시인이 지닌 반복된 분위기에는

아테네의 성벽을 완전한 폐허로부터 구출하는 힘이 있었다.

 

 

참고문헌

 

투키디데스, Crawley 번역, (Everyman’s Library.) 1910.

E. Abbott : Pericles and the Golden Age of Athens. 1891.

Grote : A History of Greece.

J. B. Bury : A History of Greece. 1922.

A. E. Zimmern : The Greek Commonwealth. 1911.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 V.

B. W. Henderson : The Great War between Athens and Spar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