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문화충돌과 자기 초월

이윤진이카루스 2021. 6. 2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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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서술들이 번역될 수 없다는 가능성은, 콰인(Quine)존재론적 상대성으로 지칭한 것으로부터 우리가 도출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결과에 관한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번역불가능성에 대한 콰인의 다양하게 두드러지지만 다소 선험적인 논증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간 언어들은 사실상 합리적으로 상호 번역될 수 있다. 물론 몇몇 언어들은 나쁘게 상호 번역될 수 있다 ㅡ 아마도 존재론적 상대성 때문에, 아마도 다른 이유들 때문에. 예를 들어 우리의 유머감각의 도움을 받는 것이나 지역적으로 잘 알려진 역사적 사건에 대한 언급은 전혀 번역될 수 없을 것이다.

 

XI

 

참석자들이 세계의 다양한 지역들에서 모여 다양한 언어들을 말한다면 이 상황으로 인하여 합리적 토론이 틀림없이 매우 어려워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난제들이 흔히 극복될 수 있음을 나는 발견했다. 런던경제대학에서 나에게는 유럽과 미국 출신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중동,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그리고 일본 출신이기도 한 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두 편에서 조금 인내심을 발휘한다면 그 난제들은 통상적으로 극복될 수 있음을 나는 발견했다. 극복되어야 할 주요 장애물이 있을 때마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서양의 관념들로 교화한 결과들이었다. 나쁘게 서양화된 학교와 대학에서의 독단적이고 무비판적인 가르침과 특히 서양의 장광설에서의 그리고 어떤 서양의 이념에서의 훈련은, 나의 경험으로 문화적이거나 언어적 차이점보다 합리적 토론에 대하여 훨씬 더 중대한 장애물들이었다.

이 경험들로 인하여 나는, 충돌하는 문화들 중 한 가지 문화가 자체를 보편적으로 우수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문화충돌은 자체의 큰 가치를 잃을 것이고 그 한 가지 문화가 다른 문화에 의하여 그렇게 간주된다면 훨씬 더 큰 가치를 읽을 것이라는 암시를 받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문화충돌의 큰 가치가 파괴될 것인데 이유인즉 문화충돌의 큰 가치는, 문화충돌이 비판적 태도를 일깨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더욱 특히, 두 가지 문화들 중 한 가지 문화가 자체의 열등성을 확신하게 되면, 상대방으로부터 배우려는 비판적 태도가 일종의 맹목적으로 수용으로 대체될 것이다: 신앙주의적이고 실존주의적인 철학자들에 의하여 그렇게 자주 기술되는 바와 같이, 새로운 마술 단체나 개종으로의 맹목적인 투신.

존재론적 상대성은 비록 편이한 의사소통에 장애물일지라도, 어둠 속으로 갑자기 뛰어드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분히 서서히 극복될 수 있다면 문화충돌의 훨씬 더 많은 중요한 경우들에서 엄청난 가치로 증명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유인즉 그것은, 문화충돌에서 상대방들이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편견들로부터 ㅡ 예를 들어 그들의 언어의 논리적 구조에 고착되었을 이론들을 무의식적으로 당연시함으로부터 ㅡ 자신들을 해방시킬 것을 의미한다. 그런 해방은 문화충돌에 의하여 일깨워지는 비판의 결과일 것이다.

그런 경우들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우리 자신의 언어와 혹은 우리가 잘 아는 몇몇 다른 언어들과 비교하고 대조한다. 이 언어들에 대한 비교연구에서 우리는 통상적으로 우리 자신의 언어를 메타언어(metalanguage)로서 ㅡ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의 언어를 포함하여 연구의 대상들인 언어들에 대하여 우리가 사용하여 말하고 그 대상들인 언어들을 비교하는 언어로서 ㅡ 사용한다. 연구되고 있는 언어들을 대상 언어들이다. 연구를 실행하면서 다른 언어들이 그 존재를 당연시하는 실체들의 종류를, 우리 자신의 언어로 ㅡ 가령 영어 ㅡ 된 규칙들과 습속들(usages)이 완전히 포착하거나 기술할 수 없으므로, 우리 자신의 언어가 다소 편협할 그 규칙들과 습속들의 집합이라고 우리는 비판적인 방식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대상언어로서 영어의 한계들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는 것은, 메타언어로서의 영어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비교연구에 의하여,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저 한계들을 정확하게 초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흥미로운 요점은, 우리가 이것에서 성공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언어를 초월하는 수단은 비판이다.

워프(Whorf) 자신과 그의 추종자 몇 명은, 우리 언어의 구조적 규칙들에 형성된 감옥인 일종의 지식적 감옥 안에 우리가 산다고 제안했다. 내가 그 은유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갇혀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기묘한 감옥이라고 부언했을지라도 나는 기꺼이 이 은유를 수용한다. 우리는 문화충돌을 통하여 그 감옥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 바로 이 의식으로 인하여 우리는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우리가 충분히 열심히 노력한다면, 새로운 언어를 공부함에 의하여 그리고 그 언어를 우리 자신의 언어와 비교함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의 감옥을 초월할 수 있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그 결과는 새로운 감옥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감옥은 훨씬 더 크고 더 넓은 감옥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그 감옥으로부터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더 정확하게, 우리가 그 감옥으로부터 고통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자유롭게 그 감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리하여 훨씬 더 넓은 감옥으로 다시 탈출할 것이다.

감옥들은 이론구조들이다. 그래서 감옥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론구조의 신화에 반대할 것이다. 그들은, 또 다른 세계로부터 오며 또 다른 이론구조로부터 온 상대방과의 토론을 환영할 것인데 이유인즉 그 토론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그들이 느끼지 못한 속박들을 발견할 기회와 이 속박들을 떨칠 기회 및 그리하여 자신들을 초월할 기회가 그들에게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감옥으로부터의 이 탈출은 일상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 탈출은 오직 비판적 노력과 창조적 노력의 결과일 수 있다.

ㅡ 칼 포퍼, ‘이론구조의 신화, 과학과 합리성을 옹호하여(The Myth of the Framework, In Defence of Science and Rationality)’, 1996, II장 이론구조의 신화, 50~52쪽 ㅡ

 

The possibility that some statements are untranslatable is, I suggest, about the most radical consequence we can draw from what Quine calls 'ontological relativity'. Yet in spite of Quine's various striking but somewhat a priori arguments against translatability, most human languages are in fact reasonably inter-translatable. Of course, some languages are badly inter-translatable - perhaps because of ontological relativity, perhaps for other reasons. For example, an appeal to our sense of humour, or an allusion to a locally well-known historical event, may be completely untranslatable.

 

XI

 

It is obvious that this situation must make rational discussion very difficult if the participants are brought up in different parts of the world and speak different languages. I have found that these difficulties can often be surmounted. I have had students in 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not only from Europe and America but also from various parts of Africa, the Middle East, India, Southeast Asia, China, and Japan. And I have found that the difficulties could usually be conquered with a little patience on both sides. Whenever there was a major obstacle to overcome, it was, as a rule, the result of indoctrination with Western ideas. Dogmatic, uncritical teaching in bad Westernized schools and universities, and especially training in Western verbosity and in some Western ideology were, in my experience, much graver obstacles to rational discussion than any cultural or linguistic gap.

These experiences also suggested to me that culture clash may lose some of its great value if one of the clashing cultures regards itself as universally superior, and even more so if it is so regarded by the other: this may destroy the greatest value of culture clash, for the greatest value of culture clash lies in the fact that it can evoke a critical attitude. More especially, if one of the parties becomes convinced of its inferiority, then the critical attitude of trying to learn from the other will be replaced by a kind of blind acceptance: a blind leap into a new magic circle, or a conversion, as it is so often described by fideist and existentialist philosophers.

I believe that ontological relativity, though an obstacle to easy communication, can prove of immense value in all the more important cases of culture clash if it can be overcome not by a sudden leap into the dark, but sufficiently slowly. For it means that the partners in the clash may liberate themselves from prejudices of which they are unconscious from taking theories unconsciously for granted, theories which, for example, may be embedded in the logical structure of their language. Such a liberation may be the result of criticism awakened by culture clash.

What happens in such cases? We compare and contrast the new language with our own, or with some others we know well. In the comparative study of these languages, we use, as a rule, our own language as a metalanguage that is, as the language in which we speak about, and compare, the languages which are the objects under investigation, including our own language. The languages under investigation are the object languages. In carrying out the investigation, we are forced to look upon our own language say English in a critical way, as a set of rules and usages which may be somewhat narrow since they are unable completely to capture, or to describe, the kinds of entities which the other languages assume to exist. But this description of the limitations of English as an object language is carried out in English as a metalanguage. Thus we are forced by this comparative study to transcend precisely those limitations which we are studying. An the interesting point is that we succeed in this. The means of transcending our language is criticism.

Whorf himself, and some of his followers, have suggested that we live in a kind of intellectual prison, a prison formed by the structural rules of our language. I am prepared to accept this metaphor, though I have to add to it that it is an odd prison as we are normally unaware of be imprisoned. We may become aware of it through culture clash. But then, this very awareness allows us to break out of the prison. If we try hard enough, we can transcend our prison by studying the new language and by comparing it with our own.

Admittedly, the result will be a new prison. But it will be a much larger and wider prison. And again, we will not suffer from it. Or rather, whenever we do suffer from it, we are free to examine it critically, and thus to break out again into a still wider prison.

The prisons are the frameworks. And those who do not like prisons will be opposed to the myth of the framework. They will welcome a discussion with a partner who comes from another world, from another framework, for it gives them an opportunity to discover their so far unfelt chains, to break these chains, and thus to transcend themselves. But this breaking out of one’s prison is clearly not a matter of routine: it can only be the result of a critical effort and of a creative eff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