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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구조의 신화, 과학과 합리성을 옹호하여 3장 부록 1974년 프랑크푸르트학파

이윤진이카루스 2021. 7. 19. 19:24

부록 1974년 프랑크푸르트학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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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974:

프랑크푸르트학파

 

나는 1930년대에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해서 처음 들었지만 그 학파의 출판물을 성실하게 읽는 것에 반하여 어떤 실험적 독서로 근거를 삼기로 결정했다.

1960, 나의 글 이성인가 혁명인가?’에 다시 설명된 바와 같이 튀빙겐에서 열린 회의에서 토론회를 개최해달라는 요구를 나는 받았고 아도르노가 나의 논문에 답변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로 인하여 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발간물들, 특히 아도르노의 저서들을 읽으려고 또 다시 시도했다.

아도르노의 저작물 대부분은 세 그룹으로 나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취향에 맞지 않음을 나는 발견했다. 나에게는 그 저작물들이 비엔나의 작가인 칼 크라우스(Karl Kraus)를 모방한 것처럼 읽혔다 그 저작물들은 크라우스의 유머감각이 결여되어서 나쁜 모방이었다. 나는 나의 비엔나 시절에 이런 종류의 글을 알고 정말 혐오했다. 나는 그런 글을, 자체를 문화적 엘리트로 간주하는 도당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문화적 속물근성으로 생각했다. 이 논문들은, 부언하여, 자체가 사회적으로 무관하다는 특징을 드러낸다.

그다음에 인식론이나 철학에 관한 저서들의 두 번째 그룹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가 영어로 헛소리(mumbo-jumbo)’(독일어로는 Hokuspokus) 지칭할 종류의 것으로만 보였다.

물론 아도르노는 마르크스주의자뿐만 아니라 헤겔주의자였다. 그리고 나는 두 가지 모두에 반대하고 특히 헤겔주의에 반대한다.

마르크스에 관하여, 내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많은 요점들에서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사상가로서 그리고 나은 세상을 위한 투사로서 그를 크게 존경한다. 나는 그의 이론들을 상당히 상세하게 비판했다. 그는 특히 이해하기가 항상 쉽지는 않지만 이해될 수 있도록 그는 항상 최선을 다한다. 이유인즉 그에게는 말할 것이 있고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도르노에 관하여, 나는 그의 철학 대부분에 동의할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의 철학을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 모든 혹은 거의 모두가 내가 보기에 말뿐이다. 그에게는 말할 게 전

 

197312월 나는 BBC에 의하여 19741월에 방송될 그들의 프로그램에 사용하기 위하여 소위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주제로 내가 인터뷰에 응할지 질문을 받았다. 나는 간략한 논문을 (나에게 5분만 말할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이런 형태로 방송되지 않은) 준비했는데,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나의 자세에 관한 나의 논문 이성인가 혁명인가1부에서 내가 언급한 몇 가지 비평을 담았다.

 

 

혀 없고 그는 그것을 헤겔주의적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의 글에 대하여 세 번째 그룹이 있다. 이 세 번째 그룹에 속하는 논문들은 주로 우리가 사는 시대에 대한 불평들이다. 그 논문들을 그의 두려움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그의 자신이 지칭하는 바와 같이 그의 고민과 그의 깊은 침울함을 표현한다. 아도르노는 비관론자였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그가 말하기를, 정치가로서 자신을 놀라게 한 사건 이후 그는 인류에게 절망해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구원의 복음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저버렸다. 그것은, 이 논문들로부터 들리는 최악의 절망적인 목소리이다 비극적이고 불쌍한 목소리.

그러나 아도르노의 비관론이 철학적인 한, 그 비관론의 철학적 내용은 없다. 아도르노는 의식적으로 명확성에 반대했다. 어떤 곳에서 그는 심지어, 돌일 철학자 막스 쉘러(Max Scheler)가 괴테의 마지막 말을 언급하여 더 많은 암흑(mehr Dunkel) 요구했음을 승인하여 언급하는데, 괴테는 더 많은 빛(mehr licht) 요구했다.

아도르노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어떻게 더 많은 암흑 요구를 지지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마르크스는 틀림없이 계몽사조에 찬성했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Horkheimer)와 함께, 계몽사조라는 바로 그 관념이 그 사조의 내부 모순들에 의하여 암흑으로 우리가 지금 처해있다고 주장되는 암흑 통한다는 것을 자신들이 증명하려고 애쓰는 계몽사조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간했다. 이것은 물론 헤겔주의적 관념이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같은 사회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인본주의자가 어떻게 그런 낭만주의적 견해들로 복귀하여 더 많은 빛보다 더 많은 암흑이라는 격언을 선호할 수 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아도르노는 모호하고 심지어 그리스의 신탁과 같은 글들을 의도적으로 발표함에 의하여 자신의 격언을 기초로 행동했다. 독일 철학의 19세기 전통에 의해서 그리고 내가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Open Society)에서 지칭한 바와 같이 그리스의 신탁과 같은 철학의 발흥소위 독일의 관념론자들 학파의 발흥 의해서 그것은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 자신은 이런 전통에서 양육되었지만 그 전통에 대항하여 강력하게 반대했고, 자본론에서 그 전통에 관하여 그리고 변증법에 관하여 내가 항상 칭찬한 비평을 내놓았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체의 신비화하는 형태로 변증법은 독일에서 지배적인 유행이 되었다.’ 변증법은 아직도 독일에서 지배적인 유행이다. 그리고 변증법은 아직도 자체의 신비화하는 형태로있다.

그러나 나는 호르크하이머에 관하여 몇 마디 말을 또한 하고 싶다. 아도르노와 비교되면 그의 글은 명확성 자체이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의 소위 비판적 이론은 공허하다 내용이 없다.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적 이론(Kritische Theorie)의 편집자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이것은 그 편집자에 의하여 다소 인정된다: ‘호르크하이머의 구상을 이해될 수 있는 (‘eingängige’) 명제들의 형태로 표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모호하고 독창적이지 못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주의만 남는다; 호르크하이머는 옹호될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데 그것은 이전에 낫게 언급된 적이 없다. 그의 견해들은, 내가 동의할 수 있는 견해들을 포함하여 객관적으로 흥미롭지 못하다고 언급될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에게서 나는,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몇 가지 명제들을 발견했다. 나는 심지어 호르크하이머 자신의 궁극적 목표들에 동의할 수 있다. 그의 저서 비판적 이론2권에서 그는 유토피아 이론을 배척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자유인들의 공동체로서의 미래 사회라는 관념에는... 모든 [역사적] 변화를 통하여 우리가 충실해야 할 내용이 있다.’ 나는 물론 자유인들의 사회라는 관념인 이 관념에 (그리고 또한 그 관념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관념에) 동의한다. 그것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을 고취한 관념이다. 불행하게도, 호르크하이머에게는 이 이상적인 목표에 더 근접하는 방법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말할 조금이라도 흥미로운 것이 없다.

사실상, 논증도 없고 역사적 사실들에 저항하여 호르크하이머는 우리의 소위 사회적 체제를 개혁할 가능성을 배척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언급에 해당한다: 현재 세대가 고통을 받아 멸망하도록 하라 이유인즉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추악함을 드러내어 우리를 압박하는 유산자계급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적 이론의 내용 전체이다.

우리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난은 의미가 있다. 이유인즉 마르크스의 이론은 나은 미래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약속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의하여 철회되는 바와 같이, 철회된다면 그 이론은 공허하고 무책임해진다. 이것이,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아도르노가 판단한 이유이다. 이유인즉 삶은, 당장 나은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즉각적인 미래를 위하여 우리가 일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실제로 삶아갈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추악함과 천박함을 과장하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세상은 추악하지만, 매우 아름답기도 하다; 비인간적이지만 매우 인간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상은 커다란 위험들로 위협을 받는다. 가장 큰 위험은 세계대전이다. 거의 동등하게 커다란 위험은 인구폭발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훌륭한 것이 많다. 이유인즉 선의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자신들이 그리하여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들이 생각한다면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걸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고통을 완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개별적인 인간의 자유를 증대하기 위하여 우리는 당장 많을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역사의 여신이 혹은 혁명의 여신이 인간사에 나은 환경을 도입하도록 기다려서는 안 된다. 역사 그리고 또한 혁명은 쉽게 우리를 실망시킬 것이다. 역사와 혁명은 정말로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실망시켰고 아도르노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당장 실행될 수 있고 실행되어야 하는 것에 관하여 우리는 관념들을 생성해서 비판적으로 시험해야 한다 그리고 당장 그렇게 하라.

레이몽 아롱의 표현으로 요약하면, 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글들을 지성인들의 아편으로서 간주한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