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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물리학
물질 구조에 대한 몇 가지 형이상학적 사념이
이론물리학 및 실험물리학에 미치는 영향
다음 언급에는, 과학이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그리고 아무튼 현대 과학에는 철학의 고전적 문제들 몇 가지에 관하여 ㅡ 특히 오래된 물질의 문제에 관하여 ㅡ 말할 중요한 것이 철학자에게 있다는 중요한 논지를 예시할 의도가 있다. 나에게는 물질 문제의 특정 양상들을 토론할 의도가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문제들 중 몇 가지가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및 칸트와 같은 사변적 철학자들의 협력에 의하여 풀렸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지적할 의도가 있는데 그들 모두는 잠정적인 해결책들일지라도 중요한 해결책들을 제시함에 의하여 도움을 주었고 그리하여 패러데이와 맥스웰과 아인슈타인과 드 브로이 및 슈뢰딩거와 같은 물리학의 실험과학자들과 이론가들의 연구를 위한 길을 닦았다는 것이다.
물질 문제의 내력은, 이전에 두드러지게 맥스웰에 의하여 개괄되었다. 그러나 맥스웰이 유관한 철학적 및 물리학적 관념들의 내력을 개괄할지라도, 문제 상황의 내력과 해결책들이 시도되면서 그 문제 상황이 남긴 영향을 받아서 문제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의 내력을 그는 제시하지 않는다. 내가 이제 채우고 있는 것은 이 공백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물리학 전체를 본질주의적이거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몸체나 물질의 정의(定義)에 근거시켰다: 몸체는 자체의 본질이나 실체의 의미에서 연장된다; 그리고 물질은, 자체의 본질이나 실체의 의미에서, 연장(extension)이다. (그리하여 물질은 정신과 반대로 연장된 실체인데, 정신은 실체를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강도[强度: intensity]이다.)
XII차 국제 철학회의 보고서, 베네치아, 1958년, 2권, 피렌체, 1960년 367-74쪽에서 처음 발표된 논문의 수정본. 이 논문은, 나의 오래된 친구이자 아인슈타인의 프라하 이론물리학 회장직의 계승자이며 논리적 실증주의자들로 구성된 비엔나학파의 주요 회원이던 필립 프랑크(Phillip Frank)에 의하여, 그 철학회의에 제출된 보고서에 대한 비판적 답변으로서 작성되었다.
몸체나 물질이 연장과 동일하기 때문에, 모든 연장인 모든 공간은 몸체나 물질이다: 세계는 가득 차서 빈 곳이 없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이해하는 바의 파메니데스(Parmenides)의 이론이다. 그러나 가득 찬 세계에서는 움직임이 있을 수 없다고 파메니데스가 결론을 내린 반면, 데카르트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eus)로부터 한 가지 의미를 수용하는데 그 의미에 따르면 운동이 물이 담긴 양동이에서 가능한 것처럼 가득 찬 세계에서도 운동이 가능하다: 찻잔의 찻잎들처럼 물체들은 가득 찬 세계에서 움직일 것이다.
이 데카르트의 세계에서 모든 인과관계는 접촉에 의한 행위이다: 그것은 밀치기(push)이다. 물질로 가득 찬 세계(plenum)에서는 연장된 몸체가, 다른 몸체들을 밀침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 모든 물리적 변화는, 시계 안의 톱니바퀴들처럼 혹은 소용돌이들처럼 작용하는 구조들을 통해서 틀림없이 설명될 수 있다: 서로를 밀치는 다양한 움직이는 부분들. 밀치기는 기계적 설명인 인과관계의 원리이다. 원격작용은 있을 수 없다. (뉴튼 자신은, 원격작용이 터무니없다고 때때로 느꼈고 다른 때는 원격작용이 초자연적이라고 느꼈다.)
이 테카르트적인 사변적 역학 체계는, 순전히 사변적인 근거들을 토대로 라이프니츠에 의하여 비판을 받았다. 라이프니츠는 근본적인 데카르트의 등식 몸체 = 연장을 수용했다. 그러나 자신의 등식이 환원 불가능하고 자명하며 ‘명백하고 뚜렷하다’고 그리고 그 등식이 밀치기에 의한 행위라는 원리를 수반한다고 믿었던 반면, 라이프니츠는 이 모든 것을 의문시했다: 어떤 몸체가 또 다른 몸체를 관통하는 대신 그 몸체를 밀쳐서 따라간다면, 이것은 두 가지 물체들 모두가 관통에 저항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저항은 물질에 (혹은 몸체들에) 틀림없이 본질적이다 ㅡ 이유인즉 그 저항으로 인하여 물질이나 몸체가 공간을 채울 수 있고 그리하여 데카르트의 의미에서 연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우리는 이 저항이 힘(forces) 때문인 것으로서 설명해야 한다: 몸체에는 ‘말하자면 자체의 상태를 유지하고... 변화의 원인에 저항하는 힘과 의향’이 있다. 상호관통에 저항하는 힘이 있다: 반발력. 그리하여 몸체나 물질은, 라이프니츠의 의미에서, 반발력에 의하여 채워진 공간이다.
이것은, 데카르트적인 몸체의 본질적 속성 ㅡ 다시 말해서 연장 ㅡ 그리고 데카르트적인 밀치기에 의한 인과관계의 원리 양쪽 모두를 설명하는 이론에 대한 프로그램이다.
몸체나 물질이나 물리적 연장이, 공간을 채우는 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의 이론은 원자론처럼 물질의 구조에 대한 이론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원자론을 (그가 매우 젊었을 때 신뢰했던) 배척했다. 이유인즉 당시 원자는 매우 작은 몸체이자 매우 작은 물체의 조각이고 매우 작은 연장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의 연장과 관통 불가능성은 더 큰 몸체들에 대해서와 같이 원자들에게도 정확하게 동일했다; 연장된 원자들은 물질의 속성들 중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 연장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공간의 한 부분이 반발력에 의하여 ‘채워진다’고 언급될 수 있는가? 라이프니츠는 이 힘들(forces)이 연장되지 않은 점들(points)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그리하여 연장되지 않은 점들(points)인 단자들(單子들: monads)에 위치한 것으로서 (그 힘들이 그 점들[points]에서 나온다는 의미에서만 ‘위치한’) 상상한다: 그것들은, 자체의 중심들이 이 연장되지 않은 점들[points]인 중심력들이다. (강도[强度: intensity]가 한 점[point]에 부착되기 때문에, 가령 힘[force]의 한 점[point]에서 곡선의 기울기에 (혹은 ‘의향’), 다시 말해서 미분[differential]에 비교될 수 있다: 힘들[forces]은, 자체의 강도[强度: intensity]가 물론 숫자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고 표현될 수 있을지라도, 미분들 이상으로 ‘연장된’다고 언급될 수 없다; 그리고 연장되지 않은 강도들[强度들: intensities]이기 때문에 힘들[forces]은 데카르트의 의미에서 ‘물질적’일 리가 없다.) 그리하여 연장된 공간 조각은 ㅡ 기학학적 의미에서 몸체 (부피 적분) ㅡ 그 조각이 기하학적 점들(points)이나 자체에 속하는 ‘단자들’에 의하여 ‘채워지는’ 의미에서 이 힘들(forces)에 의하여 ‘채워진다’고 언급될 것이다.
데카르트에게서 같이 라이프니츠에게 공백은 있을 수 없다 ㅡ 공백은 반발력이 없는 공간일 터이고 그 공간은 점유에 저항하지 않을 터이기 때문에 그 공간은 물질에 의하여 즉각 점유될 터이다. 우리는 아마도 외교관 라이프니츠의 이 이론을, 물질에 대한 정치적 이론으로서 기술할 것이다: 몸체들에서는, 주권국가들처럼, 틀림없이 반발력에 의하여 옹호되는 경계선들이나 한계들이 있다; 그리고 물리학적 공백은, 정치적 권력의 공백처럼, 둘러싼 몸체들에 (혹은 국가들) 의하여 즉각 점령될 터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 그리하여 반발력의 작용에서 생기는 일반적인 압력이 세계에 있다고 그리고 심지어 움직임이 없는 곳에서도 존재하는 힘들(forces)의 평등 때문인 역동적인 평형상태가 틀림없이 있다고 우리는 혹시 말할 것이다. 데카르트가 평형을 운동 부재로서만 제외하여 설명할 수 없었던 반면, 라이프니츠는 평형을 ㅡ 그리고 또한 운동의 부재 ㅡ 동등하고 반대인 힘들(forces)에 (그 강도[强度: intensity]가 매우 클) 의하여 역동적으로 유지되는 것으로서 설명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물질론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비판에서 성장한 point-atomism의 (혹은 단자들[單子들: monads]의) 교설에 대해서 그만큼만 하자. 그의 교설은 분명히 형이상학적이다. 그리고 그의 교설은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을 초래한다: 몸체들에 대한 (데카르트적) 연장을 힘들(forces)의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설명하는 연구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은 보스코비치(Boscovitch)에 (칸트가 그보다 앞섰다) 의하여 상세하게 수행되었다. 칸트와 보스코비치의 공헌은, 뉴튼 역학에 대한 원자론의 관계에 관하여 내가 먼저 몇 마디 말을 한다면, 아마도 더 잘 평가될 것이다.
엘레아-플라톤 학파의 그리고 데카르트 및 라이프니츠의 무-공백(no-vacuum) 이론에는 한 가지 커다란 난제가 ㅡ 몸체들의 압축가능성과 탄력성 ㅡ 있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의 ‘원자와 공백(atoms and the void)’ (이것은 원자론의 암호였다) 이론은 주로 이 난제를 충족시키려고 고안되었다. 물질의 다공성(多孔性: porosity)인 원자들 사이의 공백으로 인하여 물질의 압축 및 연장 가능성이 설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뉴튼의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역학으로 인하여 탄력성에 대한 원자론적 이론에 새롭고 중대한 난제가 발생했다. 원자들은 물질의 작은 조각들이었고 압축가능성과 탄력성이 공백에서의 원자들의 움직임에 의하여 설명되려면, 원자들은 자체가 압축될 수도 탄력적일 수도 없었다. 원자들은 틀림없이 절대적으로 압축될 수 없고 절대적으로 견고하고 절대적으로 비탄력적이었다. (이것이 뉴튼이 원자들을 상상한 방식이다.) 다른 한편으로, ㅡ 뉴튼의 역학 이론처럼 ㅡ 힘들(forces)을 가속에 비례하는 것으로서 (유한한 시간 단위 안에서) 설명한 역학 이론에 따라서 비탄력적 몸체들 사이에는 밀치기도 접촉에 의한 작용도 있을 수 없었다. 이유인즉 절대적으로 비탄력적인 몸체에 의하여 또 다른 그런 몸체에 주어지는 밀치기는 틀림없이 즉각적일 (동시에 그 순간에 유한한 규모를 지닐) 터이고, 즉각적인 유한한 가속은 무한히 큰 힘들(forces)을 포함하는 무한한 가속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직 탄력적인 밀치기만 유한한 힘들(forces)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밀치기는 탄력적이라고 우리가 전제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가, 비탄력적인 원자 이론 내부에서 탄력적인 밀치기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면, 접촉에 의한 작용을 우리는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그 자리에 원자들 사이의 단거리 반발력이나 단거리 작용이나 근접 작용으로 혹시 지칭될 것을 우리는 놓아야 한다: 원자들은 틀림없이, 감소하는 거리에 비례하여 급격히 증가하는 (그리고 거리가 0이 될 때 무한하게 될 터인) 힘들(forces)로써 서로 반발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물질에 대한 역학 이론의 내부적 논리에 의하여, 핵심적인 반발력을 역학에 수용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힘을 수용한다면, 원자론의 두 가지 근본적인 전제 중 한 가지 전제가 ㅡ 원자들은 연장된 작은 몸체들이라는 전제 ㅡ 필요 없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원자들을 라이프니츠의 반발력 중심들로 대체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원자들을 라이프니츠의 연장된 점들(points)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원자들을 라이프니츠의 단자들(單子들: monads)과 동일시할 수 있는데 단자들은 반발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원자론의 다른 근본적인 전제를 유지해야 할 듯하다: 공백(the void). 원자들이나 단자들 사이의 거리가 0으로 향한다면 반발력이 무한으로 향하기 때문에, 단자들 사이에 틀림없이 유한한 거리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질은, 분리된 중심들이 있는 공백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기술된 단계들은 칸트에 의하여 그리고 보스코비치에 의하여 수용되었다. 그들은, 라이프니츠와 데모크리토스 및 뉴튼의 관념들을 종합했다고 언급될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이론과 같은 이론은 물질의 구조 이론이고 그리하여 물질 이론이다. 연장된 물질이 여기서 설명되는데 물질이 아닌 것에 의하여 설명된다: 힘들(forces) 및 단자들과 같은 연장되지 않은 실체들로 힘들(forces)이 나오는 연장되지 않은 점들에 의하여. 데카르트의 물질 연장은, 더욱 특히, 고도로 만족스러운 정도로 이 이론에 의하여 설명된다. 정말로 그 이론은 더 많은 일을 한다: 평형 연장(equilibrium extension)뿐만 ㅡ 인력 및 반발력 모두의 힘들(forces)이 평형일 때 몸체의 연장 ㅡ 아니라 외부의 압력이나 충격이나 밀치기에서 변하는 연장을 설명하는 것은 연장에 대한 역학적 이론이다.
데카르트의 물질이론과 라이프니츠의 물질에 대한 역학적 설명 프로그램에 관하여 거의 동등하게 중요한 또 다른 전개상황이 있다: 칸트-보스코비치 이론이, 반발력과 인력이 주어진 기초입자들로 구성된 연장된 물질이라는 현대적 이론에 개괄적으로 앞서는 반면, 이 두 번째 전개상황은 패러데이-맥스웰의 장(fields) 이론의 선두주자이다.
이 전개상황에서 결정적인 단계는, 칸트가 물질은 불연속적이라는 교설을 부정하는 칸트의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토대(Metaphysical Foundations of Natural Science)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칸트 자신은 자신의 단자론(Monadology)에서 그 교설을 지지했었다. 그는 이제 이 교설을, 물질의 역학적 연속성(dynamic continuity of matter)라는 교설로 대체한다. 그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우주의 특정지역에서 (연장된) 물질의 존재는, 관통을 막을 수 있는 힘들(forces)인 (혹은 적어도 저 장소에서 인력과 압력을 합친 것과 동등한 힘들[forces]) 저 지역에서 반발력들의 존재로 구성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물질이, 반발력이 방사되는 단자들로 구성된다고 전제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이유인즉 물질은, 이 단자들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단자들로부터 나오는 힘들(forces)이 충분히 강력해서 다른 물질을 막는 곳에 존재할 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질은 동일한 이유로, 문제의 물질 조각에 속하는 (그리고 그 물질 조각을 구성한다고 주장되는) 두 가지 단자들 사이의 어떤 점에 존재할 터이다.
이제 이 논증의 장점들이 무엇이든, 아무튼 연속적인 (그리고 탄력적인) 것에 대한 ㅡ 힘들(forces)의 존재를 본질로 하는 실체에 대한 ㅡ 모호한 관념을 시험하려는 (그리고 아마도 더 구체적으로 만들려는) 제안에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이유인즉 이것은, 연속적인 물질의 관념으로 가장한 힘들(forces)의 연속적인 장(field)의 관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연장된 물질에 대한 그리고 탄력성에 대한 이 두 번째 역학적 설명이, 푸아송(Poisson)과 코시(Cauchy)에 의하여 수학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 내가 보기에 흥미롭다. 그리고 맥스웰에게서 기인하는 패러데이의 힘들(forces)의 장(field)이라는 관념의 수학적 형태가, 아마도 칸트의 연속성 이론에 관한 코시의 형태의 전개로서 기술될 것임도 내가 보기에 흥미롭다.
그리하여 보스코비치의 이론과 칸트의 두 가지 이론은, 데카르트의 연장된 물질을 설명하는 역학 이론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프로그램을 진전시키려는 두 가지 중요한 시도로서 기술될 것이다. 그 이론들은, 물질의 구조에 대한 모든 현대적 이론들의 합동 선조들로서 기술될 것이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아인슈타인과 드 브로이 및 슈뢰딩거의 그리고 또한 ‘물질과 장(field)에 대한 이원론’의 이론들. (이 이원론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마도 물질을 생각함에서 조악한 데카르트적이고 비-역학적인 모형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보일 바와 같이, 그렇게 심오하지 않다.) 데카르트적 전통에서 ㅡ 헬름홀츠(Helmholtz)를 통한 칸트적 전통에서 ㅡ 도출되는 또 다른 중요한 영향은, 원자를 에테르의 소용돌이로서 설명하는 관념이라고 ㅡ 켈빈 경(Lord Kelvin) 의 원자모형과 J.J. 톰슨(Thomson)의 원자모형을 초래한 관념 ㅡ 언급될 것이다. 그 관념이 러더포드에 의하여 실험적으로 반증되자 현대적 원자이론으로서 기술될 것이 시작된다.
내가 개괄한 전개상황의 가장 흥미로운 양상들 중 한 가지 양상은, 이 형이상학적 사변들이 비판에 민감한 것으로 판명되었단 사실과 함께 그 관념이 지닌 순전히 사념적인 특징이다: 그 사념들이 비판적으로 토론될 수 있었다는 사실. 이 토론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소망에 의하여 그리고 인간의 지성은 적어도 세상을 이해하려고 시도하여 혹시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는 희망이자 신념에 의하여 고취되었다. 그리고 세상의 문제들 중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사변적 해결책이 실험적으로 반증되자 그 문제는 핵과학으로 변했다.
버클리(Berkeley)에서부터 마흐(Mach)까지 실증주의는 이 사변들에 항상 반대했다. 그리고 브라운운동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결과로서 물질의 원자 구조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이 실험될 수 있는 물리 이론으로 변했을 때 (1905년 이후) 물질에 (그에게 형이상학적 ‘본질’일 뿐이었고 무의미하지는 않을지라도 불필요한 것과 같은) 대한 물리 이론은 있을 수 없다는 견해를 마흐가 여전히 지지한 것을 보면 매우 흥미롭다. 그 원자론이 누구에 의해서도 진지한 의심을 더 이상 받지 않을 때 마흐의 이 견해들이 영향력의 최고점에 도달했다는 것과 지도적인 핵물리학자들 중 특히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및 파울리에게서 그 원자론이 아직도 매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아마도 다소 역설적이고 틀림없이 더 흥미롭다.
그러나 이 위대한 물리학자들의 탁월한 이론들은, 물리적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려는 시도의 결과이고 이 시도들의 결과를 비판하려는 시도들의 결과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이론들은, 그들 및 다른 실증주의자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것과 대비될 것이다: 우리가 원칙적으로 물질의 구조에 관하여 어떤 것도 이해하기를 희망할 수 없다는 것; 물질 이론은 틀림없이 영원히 전문가의 사사로운 일로 남는다는 것 ㅡ 전문적인 사항들로, 수학적 기교들로 그리고 ‘의미론’으로 싸인 수수께끼; 과학은 철학적이거나 이론적 흥미가 없는 도구에 지나지 않고 ‘기술적이’거나 ‘실용적’이거나 ‘도구적’ 중요성만 띤다는 것. 나는 이 ‘포스트-합리주의적’ 가르침을 신뢰하지 않는다.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시도들에서 ㅡ 그리고 특히 이 위대한 물리학자들의 시도들 ㅡ 이룩된 진보보다 어떤 것도 더 인상적일 수 없을 터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을 여러 번 수정할 것이고 심지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는 길을 발견한 듯이 보인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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