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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구조의 신화, 과학과 합리성을 옹호하여 4장 과학 - 문제, 목표, 책임

이윤진이카루스 2021. 8. 7. 16:00

이론구조의 신화, 과학과 합리성을 옹호하여 4장 과학- 문제, 목표, 책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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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과학:

문제, 목표, 책임

 

 

 

I

 

인간의 지식 역사에는 고무적인 면뿐만 아니라 실망스러운 면도 있다. 이유인즉 우리는 그 역사를, 고집스럽게 믿어지고 흔히 불관용 및 광신과 결합된 편견과 독단의 역사로서 간주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그 역사를 종교적이거나 유사 종교적인 광기의 역사로서 기술할 것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우리가 경험한 거대한 파괴적 전쟁들 대부분이 종교적이거나 이념적 전쟁들이 있었음이 ㅡ 아마도 칭기즈칸의 전쟁들은 두드러지게 예외적인데 그는 종교적 관용의 모형이었던 듯이 보인다 ㅡ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나 심지어 종교전쟁들에 대한 슬프고 암울한 그림에도 더 밝은 면이 있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무수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념들인 이념들을 위하여 ㅡ 그들이 참이라고 믿었던 이념들 ㅡ 살고 죽을 각오가 되어있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사실이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라기보다는 이념적 동물로 보인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과학의 역사, 심지어 르네상스 이래 그리고 특히 프랜시스 베이컨 이래 현대 과학의 역사가 하나의 예시로 수용될 것이다. 베이컨에 의하여 시작된 운동은 종교적이거나 반()-종교적인 운동이었고 베이컨은 과학이라는 세속화된 종교의 예언자였다. 그는 하느님이라는 명칭을 자연이라는 명칭으로 대체했지만 다른 것들 거의 모두를 바꾸지 않고 남겨두었다. 하느님에 대한 과학인 신학은 자연에 대한 과학으로 대체되었다. 하느님의 율법들은 자연법칙들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하느님의 권능은 자연의 힘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나

 

1963417, 뉴저지주 아틀란틱 시에 개최된 실험생물학을 위한 미국 협회 연맹의 47차 연례 모임의 총회에서 행한 강좌의 수정본으로 1963연맹 회, 22, 961-72쪽에 최초로 발표됨.

 

중에 하느님의 의도와 하느님의 심판은 자연선택으로 대체되었다. 신학적 결정론은 과학적 결정론으로 대체되었고 숙명의 책은 자연에 대한 예측 가능성으로 대체되었다. 요컨대 하느님의 전능과 전지(全知: omniscience), 자연의 전능으로 그리고 자연과학의 실제적인 전지로 대체되었다.

deus sive natura라는 표현이 ㅡ 아마도 하느님, 혹은 동일한 것으로, 자연으로 번역될 ㅡ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스피노자에 의하여 가끔 사용된 것은 또한 이 시기에서였다.

베이컨에 따르면 자연은 하느님처럼 가장 큰 것에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물체의 본성을, 혹은 그가 때때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물체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 자연에 대한 새로운 과학의 목표이거나 과제였다. 자연이라는 책이 열려있는 책이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 필요한 유일한 것은 편견이 없는 순수한 정신으로 자연이라는 여신에게 접근하는 것이었고 자연은 기꺼이 그녀의 비밀들을 내놓을 것이었다. 다른 일이 없는 몇 년만 나에게 다오 그러면 나는 과제를 ㅡ 자연이라는 책 전체를 충실하게 모방하여 새로운 과학을 서술하는 과제 ㅡ 완성하겠다고 베이컨은 다소 신중하지 못하게 소리쳤다.

불행하게도, 베이컨은 자신이 구하던 연구 허락을 받지 못했다. 큰 재단들이 존재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말하기 유감스럽지만, 자연과학은 여전히 미결정 상태였다.

베이컨의 오활하고 아마추어적인 낙관론은, 자신의 저서 New Atlantis에서 베이컨에 의하여 구상된 중앙 연구소를 모방한 왕립협회(The Royal Society)를 설치한 훌륭한 아마추어 과학자들에게 격려와 영감의 근원이 되었다.

베이컨은 과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크게 고취한 예언자였지만 그는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그의 새로운 신학이 불러온 영감과 영향력은 적어도 자신과 동시대인인 갈릴레오만큼 크고 지속적이었는데 갈릴레오는 아마도 현대 실험과학의 진정한 창시자로서 기술될 것이다. 더욱 특히, 자연과학의 본질에 관한 베이컨의 오활한 견해와, 한편으로는 새로운 자연과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옛 신학 및 철학 사이에 그에 의하여 그어진 구분이나 구획설정은 과학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주요 독단이 되었다. 그것은,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과학자들도 우리의 시대까지 악착같이 고수한 독단이다. 그리고 이 독단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몇몇 과학자들이 기꺼이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겨우 최근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베이컨의 독단은, 관찰의 최고 장점들과 이론적 사념의 사악함을 주장한다. 나는 이 독단을 간략하게 관찰주의(observationism)’으로 지칭하겠다.

베이컨에 따르면, 새로운 자연과학의 방법적 본성이나 본질은 옛 신학으로부터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으로부터 그 본성이나 본질을 구분하여 구획설정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사람은 조급하다. 사람은 빠른 결과들을 원한다. 그래서 사람은 결론들로 도약한다.

이것은 낡고 사악하고 사변적인 방법이다. 베이컨은 그 방법을 정신의 예상 방법으로 지칭했다. 그것은 거짓 방법인데 이유인즉 그 방법이 편견들을 낳기 때문이다. (‘편견이라는 용어는 베이컨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베이컨의 새로운 방법은, 지식으로 향하는 진정한 방법으로서 그리고 힘으로 향하는 길로서도 그에 의하여 추천되는데 이렇다. 모든 편견을, 미리 생각된 모든 관념을, 모든 이론을 ㅡ 종교, 철학, 교육이나 전통이 우리에게 전달했을 모든 저 미신들이나 우상들ㅡ 우리는 우리의 정신으로부터 제거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정신으로부터 편견들과 불순한 것들을 제거했을 때, 우리는 자연에 다가갈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우리를 오도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인즉 우리를 오도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우리 정신의 불순물들인 우리 자신의 편견들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이 순수하다면, 우리는 자연의 책을 왜곡하지 않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물들을 잘못 제시하지 않고 왜곡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눈을 뜨고 사물들을 인내하며 관찰하여 우리의 관찰사항들을 신중하게 서술하기만 해야 하고 관찰된 사물의 본성이나 본질은 우리에게 밝혀질 것이다.

이것이 베이컨의 관찰 및 귀납의 방법이다. 요약하면: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관찰인 훌륭하고 순수한 관찰은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 사변과 이론은 나쁘고 그것들은 모든 오류의 근원이다. 더욱 특히, 사변과 이론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연의 책을 잘못 읽게 ㅡ 즉, 우리의 관찰사항들을 오역하게 ㅡ 된다.

베이컨의 관찰주의와 모든 이론적 사고 형태들에 대한 그의 적대감은 혁명적이었고 그렇게 느껴졌다. 그것들은 과학이라는 세속화된 새로운 종교의 전쟁구호가 되었고 자체가 가장 깊이 간직한 독단이 되었다. 이 독단은 과학의 관행 및 이론 모두에게 거의 믿어질 수 없는 영향을 미쳤고 이 영향력은 아직도 우리 시대에 강력하다.

이 독단이, 베이컨의 동시대 과학자의 일반적인 믿음을 표현하지 않음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다시 한번 베이컨을 갈릴레오와 간략하게 대비하겠다.

과학철학자인 베이컨은 아주 일관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적대시했다. 이론화하지 말고 당신을 눈을 뜨고 편견 없이 관찰하라 그러면 당신은 태양이 움직이는 것과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위대한 과학자이자 코페르니쿠스의 세계 체계를 옹호한 갈릴레오는 아리스타쿠스(Aristachus)와 코페르니쿠스에게 존경심을 표했는데 정확한 이유가 그들은 충분히 대담하게, 우리 자신이 관찰로부터 안다고 믿는 모든 것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또한 부정하는 사변적 이론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도 갈릴레오의 두 가지 세계 체계들에 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the Two World Systems)로부터 한 구절을 인용할 것이다:

 

[지동설] 가설을 생각하여 그 가설이 참이라고 믿은 이 사람들의 정신의 위대함에 대하여 나의 찬사를 아무리 강력하게 표현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 자신의 감각들에 의한 증거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순전히

지성의 힘에 의하여 그들은, 감각경험이 그들에게 명백하게 밝혔던 것보다 이성이 그들에게 알려준 것을 선호했다... 아리스타쿠스와 코페르니쿠스가 어떻게 이성으로 하여금 감각을 정복할 수 있게 할 수 있었고 감각에 대항 하여 이성을 그들의 믿음의 여왕으로 만들 수 있었는지를 숙고할 때 나의 놀람은 끝이 없다고 나는 반복하여 말한다.

 

 

이것은, 대담하고 순전히 사변적인 과학이론들로 인하여 우리의 편견들로부터 우리가 해방될 방법에 대한 갈릴레오의 증언이다. 베이컨은 반대로, 이 새로운 이론들이 사변적인 편견들이라고, 이론적 사고는 항상 편견을 초래한다고, 이론적 사고를 포기해야만 우리 자신이 편견들로부터 해방되는 데 도움을 받는다고 그리고 사고로는 결코 이것이 이룩될 수 없다고 믿었다.

베이컨의 독단을 비판하여 그 독단을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실험적인 과학의 매우 다른 견해에 의하여 대체하는 데로 선회하기 전에, 나는 베이컨에 관하여 최종적인 언급을 하고 싶다.

베이컨은 과학자가 아니라 예언가였다고 나는 제안한다. 실험적 과학이라는 개념을 그가 전파했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그가 산업혁명을 예견하여 고취했다는 의미에서도 또한 그는 예언가였다. 그에게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과학과 기술의 시대이기도 할 산업시대에 대한 상상력이 있었다. 화약과 비단의 우연한 발견을 언급하여, 다른 유용한 물질들과 재료들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탐사하는 가능성과 과학을 통하여 사람이 비참함과 빈곤으로부터의 구원을 발견할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리하여 과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는, 지구상에 천국을 ㅡ 새로운 지식의 도움을 받아서 사람들이 스스로 창조할 나은 세상을 ㅡ 새롭게 약속했다. 지식은 힘이라고 베이컨은 말했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ㅡ 신들(gods)과 같은 사람이라는 ㅡ 이 위험한 관념은, 과학이라는 종교가 우리의 세상을 변모시킨 가장 영향력이 있는 관념 중 한 가지 관념이었다.

 

II

 

이제 나는, 베이컨의 반()-이론적 독단과 과학에 대한 그의 견해를 매우 간략하게 비판하겠고 그다음에 과학에 대한 ㅡ 그리고 특히 실험과학에 대한 ㅡ 나 자신의 견해로 선회하겠는데 나의 견해로 베이컨의 견해를 대신할 것을 나는 제안한다.

 

1 우리의 정신으로부터 우리가 마음대로 편견들을 제거하여 과학적 발견

이전에 그리고 과학적 발견에 대비하여 미리 생각된 모든 관념이나

이론들을 제거한다는 관념은 오활하고 틀렸다. 우리의 특정 관념들이

ㅡ 평평한 지구나 움직이는 태양이라는 관념들과 같은 ㅡ 편견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배우는 것은 주로 과학적 발견을 통해서이다. 우리가 믿는

신념 중 하나가 편견이었다는 것은 과학의 진보로 인하여 우리가 그

신념을 버린 다름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한다. 이유인즉 이

진보를 기대하여 우리가 편견들을 인식할 수 있을 터인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2 당신 자신으로부터 편견을 없애라라는 규칙은 그리하여, 한두 가지

시도를 시행한 후에 당신이 성공했다고 생각할 위험한 결과만 ㅡ 물론

당신이 당신의 편견들과 독단들, 특히 당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편견들과

독단들을 악착스럽게 고수할 결과들을 초래하는 ㅡ 낳을 수 있다.

3 게다가 베이컨의 규칙은 당신의 정신으로부터 모든 이론을 제거하라!’

였다. 그러나 그렇게 순화된 정신은 순수한 정신만이 아닐 터이다:

정신은 텅 빈 정신일 터이다.

4 흔히 우리가 이론들을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이론들을

사용하여 활동한다. 이 사실의 중요성은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경우에, 우리가 믿는 이론들을 명시적으로

정식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유인즉 이론으로 인하여, 대안 이론들을

찾아서 한 가지 이론과 또 다른 이론을 비판적으로 차별화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5 순수한 관찰과 같은 것은, 다시 말해서 이론적 구성요소가 없는 관찰은

없다. 모든 관찰은 ㅡ 그리고 특히 모든 실험적 관찰 ㅡ 이런저런 이론에

비춘 사실들의 해석이다.

이 마지막 비평으로 나는 결정적인 요점에 ㅡ 내가 베이컨의 문제

지칭하고 싶은 요점 ㅡ 다다른다. 그 요점은 이렇다.

6 베이컨은, 관찰된 사실들을 이론들에 비추어 해석하는 일반적인 경향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는 이 경향의 실제적인 위험들을 예리하게 알고

있었다. 관찰된 사실들을 미리 상상된 이론들이나 편견들에 비추어

우리가 해석한다면, 실제적인 사실들이 무엇이든, 우리의 관찰들에

의하여 이 편견들을 우리가 확인하거나 강화하기 쉽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리하여 편견들로 인하여 우리는 경험들로부터 배울 수 없게

된다: 편견들은,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과학의 발전에 통과 불가능한

장애물을 형성한다.

 

그 요점은 아주 중요해서 몇 가지 사례들로 예시되어야 한다.

베이컨에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이와 같다. 사람들이 어떤 종교적 신조를 ㅡ 가령, 우리의 세상을 선한 힘과 악한 힘 사이의 싸움터로서 보는 조로아스터나 마니교의 이단설 ㅡ 믿게 하라. 그러면 그의 모든 관찰은 자신의 신앙에 부합할 따름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결코 경험에 의하여 자신의 신앙을 수정할 수도 없고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신학적 사례에 대하여 현대에 세속적인 유사한 것이 있다.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그리고 현대 역사는 도덕적인 프롤레타리아와 사악한 부르주아 사이의 갈등의 역사라는 이론을 신뢰하는 사람을 생각하라. 그가 이 이론을 믿는다면, 그가 관찰하거나 경험하는 모든 것과 신문들이 보도하거나 보도하지 않는 모든 것이 그에 의하여 이 믿음을 통하여 해석될 것이고 그리하여 그 믿음을 강화하는 경향을 띨 것이다.

혹은 세 번째 사례를 생각하라. 정신분석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임상적 관찰들(clinical observations)’로 자신들이 지칭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이 관찰들이 변함없이 정신분석적 이론을 확증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임상적 관찰들은 항상 해석된다: 그 관찰들은, 확립된 정신분석 이론에 따라서 해석된다. 이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관찰들로 인하여 이론이 확증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당한가? 혹은 그 질문을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여: 정신분석적 용어들로 우리가 해석할 수 없을 터인 인간의 행위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요라면, 상상가능한 모든 관찰은 정신분석 이론에 비추어 해석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 관찰은 그리하여 정신분석 이론을 확증하는 듯이 보일 것이라고 우리는 관찰에 앞서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관찰에 앞서서 언급될 수 있다면 이런 종류의 확증은 진정으로 경험적이라거나 관찰적이라고 기술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베이컨이 느낀 난제이다. 그가 고안할 수 있었던 그 난제로부터 유일한 도피구는, 우리의 정신으로부터 모든 이론을 제거하여 순수한관찰을 고수하라는 비실용적인 제안이었다.

 

III

 

이것으로써 나는 그 문제에 대한 나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기 위하여 베이컨의 견해들을 떠나겠다. 나는 먼저 베이컨의 문제에 대하여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하겠다.

나의 해결책은 두 가지 단계들로 구성된다.

먼저, 자신의 이론이 실험이나 관찰에 의하여 확증된다고 주장하는 모든 과학자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질문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실제로 그 결과들에 도달된다면, 나의 이론을 반증할 터인 관찰이나 실험의 가능한 결과들을 나는 기술 할 수 있는가?

아니라면 나의 이론은 분명히 경험적 이론이 아니다. 이유인즉 상상가능한 모든 관찰이 나의 이론과 일치한다면, 특정 관찰에 대하여 그 관찰이 나의 이론을 경험적으로 확증한다는 주장을 할 자격이 나에게 없기 때문이다.

혹은 요컨대, 나의 이론이 혹시 반증되거나 오류로 판정될 방법을 내가 말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나의 이론에 경험적 이론의 특징이 있다고 나는 주장할 수 있다.

경험적 이론과 비-경험적 이론 사이의 구획설정에 대한 이 기준을 나는 또한, 오류판정 가능성의 기준이나 반증가능성의 기준으로 지칭했다. 그 기준은, 반증 불가능한 이론들이 허위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그 기준은 그 이론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기준은, 특정 이론에 대하여 가능한 반증이 어떨지를 우리가 기술할 수 없다면 저 이론은 경험과학의 분야 밖에 놓여있는 것으로서 간주될 것임을 정말로 의미한다.

반증가능성이나 오류판정 가능성의 기준은, 시험가능성의 기준으로도 지칭될 것이다. 이유인즉 어떤 이론을 시험하는 것은, 기계를 시험하는 것처럼, 그 기계의 결함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도저히 결함이 발견될 수 없고 반증될 수 없다고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고 있는 이론은, 시험될 수 없다.

과학이론들의 역사에는 과학발전의 어떤 단계에서 시험이 가능하지 않았지만 나중 단계에 시험이 가능해진 많은 사례가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아주 분명해졌다. 분명한 사례는 원자 이론이다. 현대 물리학 이론 안에서 상세하게 토론될 자격이 있을 터인 한 가지 사례는, 중성미자(neutrino) 이론이다.

이 이론이 파울리(Pauli)에 의하여 처음 제기되었을 때, 그 이론은 분명히 시험될 수 없었다. 한때는 중성미자가 그렇게 정의(定義)되어서 그 이론이 시험될 수 없다고 심지어 언급되었다. 30년 후 그 이론은 시험 가능함이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자체에 대한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했음이 밝혀졌다. 이것은, 시험될 수 없는 이론들은 무의미하다고 말하거나 (흔하지만 나의 견해라고 잘못 치부되는 견해) 그 이론들에는 인식적 중요성이 없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경고가 된다.

어떤 이론이 지닌 경험적 특징의 기준에 대해서는 이만큼만 하자. 그것으로 베이컨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그렇게 베이컨의 염려를 초래했던 관찰적 확증에 대한 저 정당화될 수 없는 주장 중에서 많은 주장을 우리는 배척할 수 있다.

반증가능성이나 오류판정 가능성이나 시험가능성의 기준은, 베이컨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첫 단계일 따름이다. 우리가 안 바와 같이, 이 단계는 자신의 이론이 실험이나 관찰에 의하여 확증된다고 주장하는 과학자에게 당신의 이론은 반증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함에 의하여 시작된다. 그리고 어떤 실험이나 관찰을 당신은 반증으로서 수용할 터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이 만족스럽다면, 그럴 경우에만 우리는 베이컨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는 데서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 단계는 이것에 해당한다.

관찰들이나 실험들은, 그것들이 이론에 대한 엄격한 시험들이라는 조건으로만 ㅡ 혹은 달리 표현하여, 그것들이 이론을 반증하려는 진지한 시도들로부터, 특히 경쟁하는 이론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포함하여 우리의 모든 지식에 비추어 이 결점들이 아마도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에서 그 결점들을 발견하려는 시도로부터 ㅡ 어떤 이론을 입증하는 것으로서 수용될 수 있다.

이것이 원칙적으로 베이컨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 해결책은 다음 것에 해당한다. 이론과 관찰의 합치는, 이론이 시험될 수 없다면 그리고 그 합치가 이론을 시험하는 진지한 시도의 결과로서 밝혀지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효과가 없다. 그러나 이론을 시험하는 것은 그 이론이 지닌 약점들을 발견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론을 시험하는 것은 그 이론을 반증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론은, (원칙적으로) 반증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시험이 가능하다.

 

IV

 

몇 가지 사례들을 살펴보자. 정신분석은, 가능하거나 상상될 수 있는 특정 형태의 인간 행위가 사실상 정말로 발생한다는 조건으로만 반증될 수 있게 될 터이다.

뉴튼의 중력이론은 예를 들어 극도로 시험 가능한데 왜냐하면 그 이론의 섭동이론(theory of perturbations)이 케플러의 행성 궤도들부터의 특정 편차들을 예언하고 이 예언이 반증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도 극도로 시험 가능한데 왜냐하면 그 이론이 뉴튼의 행성 궤도들로부터의 특정 편차들을 예언하고 이 예언은 반증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은 또한, 광선의 곡률과 강력한 중력장에서 원자시계들의 감속을 예언하고 다시 이 예언들을 반증될 것이다.

다윈론에는 난제가 있다. 라마르크 이론이 반증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반증된 (라마르크가 구상했던 종류의 습득된 적응들이 세습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반면, 우리가 무엇을 자연선택론에 대하여 가능한 반증으로서 고려해야 할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특히, 실제 생존에 의하여 적합성을 정의(定義)하는 적합성에 대한 통계적 정의를 우리가 수용한다면 최적자 생존이론은 불필요하고 반증될 수 없다.

다윈의 최고 업적은 이렇다고 나는 믿는다. 의도적인 적응으로 보이는 것이 어떤 구조에 ㅡ 예를 들어 자연선택이라는 구조와 같은 ㅡ 의하여 설명될 것임을 그가 밝혔다는 점이다. 이것은 엄청난 업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구조가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지자마자, 다윈적 구조가 유일하게 가능한 구조라는 믿음을 육성하기보다는 대안적 구조들을 구축하려고 시도하고 그다음에 양쪽 구조들 사이에서 결정할 어떤 결정적인 실험들을 발견하려고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혹은 실험적 연구에 더 긴밀하게 관련된 이론을 사례로 들자: 시냅스 전달 이론(the theory of synaptic transmission). 화학적 전달 이론(the chemical theory of transmission)(경쟁적인 전기적 이론에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아세틸콜린(acetylcholine)이 근육섬유의 접합부에 인공적으로 적용되었을 때, 엄격한 시험을 통과했다. 그것이 발화신경(firing nerve)과 같은 충격을 유발한다는 사실은 화학적 이론을 뒷받침하여 주장될 수 있었다.

여기서 제시된 견해는, 과학에서 관찰과 실험의 결정적인 기능이 비판이라고 말함에 의하여 요약될 것이다. 관찰과 실험은 어떤 것도 결론적으로 확증할 수 없는데 이유인즉, 이런저런 사실에 대한 체계적인 잘못된 해석을 통하여 체계적인 오류의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찰과 실험은 과학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에서 틀림없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본질적으로 그것들은 더 취약한 이론들을 우리가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방식으로 그것들은, 잠시만일지라도, 생존하는 이론을 ㅡ 즉, 엄격하게 시험되었지만 반증되지 않은 이론을 ㅡ 뒷받침한다.

 

V

 

과학에 대한 현대적 견해는 ㅡ 과학이론들이 본질적으로 가설적이거나 추측성이라는 그래서 심지어 최고로 입증된 이론도 나은 근사치에 의하여 전복되어 대체될 것이라는 견해 ㅡ 아인슈타인 혁명의 결과라고 나는 믿는다.

이유인즉 뉴튼의 중력이론보다 더 성공적인 이론이나 더 잘 시험된 이론이 없었기 때문이다. 뉴튼의 중력이론은 지구역학과 천체역학 모두를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이론은 여러 세기 동안 두 분야에서 매우 엄격하게 시험되었다. 위대한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푸앵카레는 그 이론이 참이라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ㅡ 이것은 물론 모든 사람의 믿음이었다 ㅡ 그 이론은 정의(定義)에 의해서도 참이라고 그래서 그 이론은 인간의 진리탐구의 끝까지 물리학의 영원한 토대로 남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푸앵카레는, 자신이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의 선배였다는 ㅡ 혹은 자신이 선배에 근접했다는 ㅡ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믿었다. 바로 마지막까지 뉴튼 이론의 엄청난 권위를 예시하기 위하여 나는 이것을 언급한다.

이제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이, 대부분의 물리학자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뉴튼 이론에 대한 개량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미결정 상태로 남겨질 것이다. 그러나 당시 뉴튼이 설명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추가하여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설명했으며, 뉴튼의 이론이 실패한 듯이 보였던 결정적인 시험 중 적어도 한 가지 시험을 통과한 대안적 이론이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로 인하여 자체의 분야에서 뉴튼이 차지했던 독특한 위치가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뉴튼의 이론은, 탁월하고 성공적인 이론의 추측으로 그리고 다른 가설들과 경쟁하는 한 가지 가설로 그리고 그 수용 가능성이 결정되지 않은 문제인 가설로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튼 이론의 권위를 파괴했고 그와 함께 훨씬 더 중요한 것을 ㅡ 과학에서의 권위주의 ㅡ 파괴했다.

나와 동시대인들인 여러분은, 과학이라는 세속적인 종교에 의하여 주장되던 완벽한 권위의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가설들은 과학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인정되었지만 가설들의 역할은 자기주도 학습적이어서 일시적이다: 과학 자체는 지식의 몸체로 믿어졌다. 과학은 가설들로 구성되지 않고 증명된 이론들로 ㅡ 뉴튼의 이론과 같은 증명된 이론들 ㅡ 구성되었다.

막스 플랑크(Max Planck)가 야망을 지닌 젊은이였을 때 어느 유명한 물리학자가 물리학이 자체의 궁극적 완성에 도달하려고 한다는 그래서 이 분야에서 더 이상 위대한 발견이 이룩될 수 없다는 언급으로 플랑크가 물리학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플랑크가 말하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 흥미롭다.

과학의 이 권위주의적인 기간은, 아인슈타인의 혁명 덕분에 영원히 지나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아인슈타인 자신이 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참이라고 믿지 않았음을 ㅡ 그 이론이 뉴튼의 이론보다 진리에 더 근접했다고, 그리고 훨씬 나은 근사치와 물론 또한 참인 이론이 (발견된다면) 틀림없이 나중에 일반상대성을 한 가지 근사치로서 포함할 터이라고 그가 믿었을지라도 ㅡ 주목하면 흥미롭다. 다시 말해서, 아인슈타인은 바로 처음부터 자신의 이론들이 지닌 본질적으로 추측성인 특징에 관하여 확신했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과학에 관하여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아인슈타인 이전의 과학이라는 종교의 한 부분이었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이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두드러진 사람은 미국인 철학자 찰스 S. 퍼스(Charles S. Peirce)였으며 그는 아인슈타인 이전에, 과학에는 모든 인간적 노력들의 오류가능성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퍼스의 오류가능주의는 주로 아인슈타인의 혁명 이후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VI

 

과학적 지식은 권위주의적이라는 이론으로부터 반()-권위주의적이고 비판적 이론으로의 변화가 아주 최근의 일이라는 것을 내가 단지 강조하고 싶기 때문에 나는 이 역사적 사실들을 언급했다. 이로 인하여 또한, 과학의 방법은 본질적으로 비판적 토론의 방법이자 경쟁하는 추측들이나 가설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방법이라는 견해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실험과학들에 부적합한 것으로 여전히 느껴지는 이유가 ㅡ 신중한 실험실 연구에 근거한 것이 단순히 가설적 위상 이상의 위상을 지니는 이유가 ㅡ 설명된다.

이 견해와 싸우기 위하여 나는 화학으로부터 한 가지 사례를 선택할 것이다. 여러분이 중수(heavy water)의 발견 이전에 화학의 어느 분야가 가장 안전한지를 ㅡ 혁명적인 새로운 발견들에 의하여 뒤집히거나 수정될 개연성이 최저인지 ㅡ 실험화학자에게 질문했다면 그는 거의 틀림없이 물의 화학(the chemistry of water)이라고 대답했을 터이다. 사실상 물(water)은 물리학의 근본적인 단위들 가운데 하나의 단위인 그램(gram)의 정의(定義)에 사용되었는데 센티미터-그램-(second) 체계의 한 부분을 형성했다. 수소와 산소는, 모든 원자 무게들의 결정에서 이론적이고 실용적인 토대로서 이용되었다.

이 모든 것은 중수(heavy water)의 예기치 않은 발견에 의하여 완전히 뒤집혔는데 그로부터 우리는, 과학의 어느 부분이 다음에 수정되어야 할지를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다는 교훈을 배울 것이다.

혹은 물리학으로부터 훨씬 더 가까운 사례를 고려하라: the parity of breakdown. 이것은, 많은 관찰이 ㅡ 입자 자취들(particle tracks)의 사진들 ㅡ 있었다는 것이 사건 이후에 판명된 저 경우 중 한 가지 경우인데 그 관찰들로부터 우리는 결과를 아마도 읽어 냈지만, 그 관찰들은 무시되었거나 잘못 해석된 것으로 판명된 경우 중 한 가지 경우이다. 이전 양전자(positron)가 발견되었을 때, 그리고 이것 이전에는 중성자가 발견되었을 때 아주 동일한 일이 발생했다. 훨씬 더 오래전 X-선 발견 이전에는, X-선이 결과적으로 도움을 받아 발견된 크룩스관(Crooks Tube)의 발명자인 크룩스(Crooks)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발생했다.

 

VII

 

이제 나는, 몇 가지 논지들에서 내가 말하고 있던 논쟁의 대상인 모든 것들을 재진술함에 의하여 나의 강좌의 첫 부분을 요약할 것인데 그것을 나는 최선을 다하여 도전적인 형태로 표현하겠다.

 

1 모든 과학적 지식은 가설적이거나 추측성이다.

2 지식의 성장, 특히 과학적 지식의 성장은 우리의 착오로부터 배우는

것을 본질로 한다.

3 과학의 방법으로 지칭되는 것은, 우리의 착오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을 본질로 한다: 먼저, 위험을 무릅씀에 의하여, 대담하게

착오를 저지름에 의하여 ㅡ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 및 비판적 검토에 의하여.

4 이 비판적 토론에서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논증들 가운데, 실험적

토론에서 유래하는 논증들이 있다.

5 실험들은 이론에 의하여 부단히 영향을 받는데, 실험자가 흔히

의식하지 못하는 직감들에 의하여, 실험적 착오들의 가능한 근원들에

관한 가설들에 의하여 그리고 무엇이 유용할지에 관한 희망이나

추측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이론적 직감에 의하여 나는, 특정

종류의 실험들이 이론적으로 유용할 것이라는 추측들을 의미한다.)

6 과학적 객관성으로 지칭되는 것은, 비판적 접근방식을 본질로 할

따름이다: 여러분이 애호하는 이론을 선호하여 편향되어 있다면

여러분의 친구나 동료 몇 명이 (혹은 이 사람들이 아니라면 다음

세대의 몇몇 연구자들이) 여러분의 업적을 열심히 비판할 ㅡ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이 애호하는 이론들을 반증할 ㅡ

ㅡ 것이라는 사실을 본질로 할 따름이다.

7 이 사실로 인하여 여러분을 틀림없이 스스로 여러분 자신의 이론들을

반증하려는 노력이 고취된다 ㅡ 다시 말해서, 이 사실로 인하여

여러분에게는 어떤 규율이 부과될 것이다.

8 이것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오류일 터이다. 객관성을 낳은 것은 개별 과학자의

객관성이나 공평성이 아니라 과학 자체의 객관성이나 공평성이다

(‘과학자들의 다정하고-적대적인 협력으로 지칭될 것 ㅡ 즉, 상호

비판에 대한 과학자들의 용의).

9 개별 과학자들이 독단적이나 편향적이 되는 것에 대하여 심지어

방법론적 정당화와 같은 것이 있다. 과학의 방법이 비판적 토론의

방법이기 때문에, 비판된 이론들이 악착스럽게 옹호되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유인즉 이런 방식으로만 우리가 그 이론들이

지닌 실제적인 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판이 저항에

부딪힌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비판적 논증의 힘을 완전히 알 수

있다.

10 과학에서 이론들이나 가설들이나 추측들에 의하여 수행되는 근본적인

역할로 인하여 시험될 수 있는 (혹은 오류로 판정될 수 있는) 이론과

시험될 수 없는 (혹은 오류로 판정될 수 없는) 이론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11 상상가능한 특정 사건들이 사실상 발생하지 않을 것임을 주장하거나

의미하는 이론만 시험될 수 있다. 시험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을 사용하여 정확하게 이론이 우리에게 발생할 수 없다고

알려주는 이 사건들을 초래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12 그리하여 시험 가능한 모든 이론은 특정 사건들의 발생을 금지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이론은 자체가 경험적 실재에 한계를 설정하는 한,

실재에 관하여 말한다.

13 그리하여 시험 가능한 모든 이론은 이런저런 것들이 발생할 수

없다는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열역학 제2법칙은, 두 번째

종류의 영구히 움직이는 기계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서

언명될 수 있다.

14 어떤 이론도, 그 이론이 원칙적으로 경험적 세계와 충돌할 수 없다면

경험적 세계에 관하여 우리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하게 이론이 반증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15 시험가능성에는 등급들이 있다: 더 많은 것을 주장하고 그리하여 더

큰 위험을 무릅쓰는 이론이, 주장하지 않는 이론보다 낫게 시험될 수

있다.

16 유사하게 시험들은 더 엄격하거나 덜 엄격한 것으로서 등급이 매겨질

수 있다. 질적(qualitative) 시험들은,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수량적

시험들보다 덜 엄격하다. 그리고 더 정확한 수량적 예측들에 대한

시험들은, 덜 정확한 예측들에 대한 시험들보다 더 엄격하다.

17 과학에서 권위주의는, 자체의 이론들을 확립하는 다시 말해서

증명하거나 검증하는 개념과 관련되었다. 비판적 접근방식은 자체의

추측들을 시험하는 다시 말해서 반증하려고 시도하거나 오류로

판정하려고 시도하는 개념과 관련된다.

 

VIII

 

이제 나는 이 강좌의 두 번째 부분으로 문제들과 과학에서 그 문제들의 역할에 집중하겠다.

과학은 관찰로 시작된다고 베이컨이 말하고 이 말은 베이컨의 신앙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다. 그 말은 아직도 널리 수용되고, 심지어 물리학과 생물학 분야에서의 최고 교재 중 몇몇에 대한 서문에서 여전히 지겹도록 반복된다.

나는 이 베이컨의 공식을 또 다른 공식에 의하여 대체할 것은 제안한다.

과학은 이론으로써, 편견들과 미신들과 신화들로써 시작한다고 나는 잠정적으로 말할 것이다. 혹은 더 정확하게, 신화가 도전을 받아 붕괴할 때 ㅡ 다시 말해서, 우리의 기대 중 몇 가지가 좌절될 때 ㅡ 과학은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이 문제들, 실용적인 문제들이나 이론적 문제들로써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의 논지를 더 충실하게 전개하기 전에, 나는 기대라는 용어에 관하여 몇 마디 말을 할 것인데 그 용어를 나는 방금 사용했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서, 우리가 또 다른 계단을 (거기에 없던) 기대하거나 반대로 우리가 다른 계단을 기대하지 않은 (실제로 계단 하나가 있었던 반면) 일이 때때로 발생한다. 우리가 착각했다는 불쾌한 발견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무의식인 특정 기대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발견으로 인하여 그런 무의식적인 기대들이 수천 가지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밝혀진다. 유사한 사례는 이렇다: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방안에 우리가 앉아서 일한다면, 우리는 시계가 갑자기 멈춘 것을 알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시계가 계속 째깍거리기를 기대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ㅡ 우리가 시계 소리를 듣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면, 동물들도 기대된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면 유사하게 자신들의 행동을 임박한 사건들에 맞추고 당황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배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대는 과학 이전의 수준에서 추측이나 (임박한 사건에 관한) ‘이론으로 우리가 지칭하는 것에 대응한다고 우리는 말할 것인데 그 추측이나 이론은 우리가 과학적 수준에서 그렇게 지칭한다.

과학의 방법들에 관한 그리고 특히 관찰의 역할에 관한 나의 견해들에서 나는 찰스 다윈과 아인슈타인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과 의견을 달리한다. 아인슈타인은 부언하여, 이 문제들에 관한 자신의 견해들을 1933년 옥스퍼드에서 이론물리학의 방법들에 관하여(On the Methods of Theoretical Theory Physics)라는 제목으로 수행된 자신의 허버트 스펜서 강좌(Herbert Spencer Lecture)에서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 강좌에서 그는 청중들에게, 자신의 방법들이 귀납적이라고 말하는 저 과학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고 말했다.

내가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이 문제들에 관하여 거의 모든 사람과 의견을 달리하기 때문에, 내가 여러분에게 확신을 줄 것이라고 나는 희망할 수 없고 나는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지도 않겠다. 내가 시도하는 유일한 것은, 이 문제들에 관하여 통상적인 견해들과 크게 다른 견해들을 믿는 몇몇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과 다윈 및 아인슈타인과 같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에 속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주지시키는 것이다

내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나의 논지는 우리는 관찰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문제들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실용적인 문제들로부터이거나 난관에 부딪히는 이론으로부터 ㅡ 다시 말해서, 제시되었다가 좌절된 이론인 특정 기대들.

우리가 어떤 문제에 직면하자마자,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시도에 의하여 나아간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에 대하여 해결책을 상상하거나 추측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우리는, 통상적으로 다소 취약한 우리의 해결책들을 비판하려고 시도한다. 때때로 상상이나 추측은 당분간 우리의 비판이나 우리의 실험적 시험들을 견디어낼 것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우리의 추측들이 반증될 있다는 것이나 그 추측들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그 추측들이 우리의 문제를 부분적으로만 해결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리고 심지어 최고의 해결책들도 ㅡ 최고로 탁월하고 창조적인 정신들의 가장 엄격한 비판에 대항할 수 있는 최고의 해결책들 ㅡ 새로운 난제들인 새로운 문제들을 곧 초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리하여 추측과 반증이라는 수단에 의하여 ㅡ 우리의 이론들에 대한 혹은, 더 일반적으로, 우리의 기대들에 대한 반증에 의하여 ㅡ 우리가 옛 문제들로부터 새로운 문제들로 나아감에 따라서 우리의 지식이 성장한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여러분들 중 몇 명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문제들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들은 틀림없이 관찰과 실험의 결과였다고 여러분은 여전히 생각할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감각들을 통하여 인상들을 받기 전에 우리의 정신은 빈 상태인 공백으로 백지상태(tabula rasa)이기 때문이다 ㅡ 이유인즉 우리의 감각들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 우리의 지성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싸우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유서 깊은 관념이다. 모든 동물은 많은, 특별히 무의식적인 기대들을 지니고 ㅡ 다시 말해서 가설들과 그리하여 가설적 지식과 밀접하게 대응하는 것을 지니고 ㅡ 태어난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 타고난 지식을 크게 믿을 수 없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이런 의미에서 항상 시작부터 타고난 지식이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 타고난 기대들인 이 타고난 지식은, 좌절된다면, 우리에게 첫 번째 문제를 야기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식의 성장은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이전 지식의 ㅡ 이전 기대들이나 가설들의 ㅡ 수정과 교정으로 구성되는 것으로서 기술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관찰이 기대와 문제에 틀림없이 앞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형세를 반전시키고 있다. 그리고 관찰은 분명히 때때로 몇 가지 문제들에 ㅡ 예를 들어 우리의 기대들 몇 가지를 좌절시켰거나 우리의 이론들 몇 가지를 반증한 관찰로부터 생기는 문제들에 ㅡ 앞설지라도 나는 심지어 논리적인 이유들 때문에 모든 문제에 관찰이 선행할 수 없다고 나는 심지어 주장한다.

이제 이 사실은 ㅡ 관찰이 모든 문제에 선행할 수 없다는 ㅡ 여러분의 허락한다면 여러분 자신을 실험적 주제들로 이용하여 내가 수행하고 싶은 간단한 실험에 의하여 예시될 것이다. 나의 실험은 여러분에게 당장 관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협조하여 관찰하고 있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러나 여러분들 몇 명이 관찰하는 대신에 다음과 같이 물을 강력한 충동을 느낄 것을 나는 우려한다: ‘당신은 내가 무엇을 관찰하기를 원하는가?’

이것이 여러분의 반응이라면, 나의 실험은 성공적이다. 이유인즉 내가 예시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은, 관찰을 하기 위하여 관찰에 의하여 우리가 혹시 결정할 수 있을 명확한 문제를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을 때 이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관찰이 틀림없이 어떤 견해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누구도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기이한가...’.

내가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관찰은 기대나 가설 뒤에 온다는 나의 논지가 지닌 진실성을 나는 여러분에게 확신시키기를 희망할 수 없다. 그러나 지식은 ㅡ 특히 과학적 지식 ㅡ 관찰로부터 시작된다는 유서 깊은 교설에 대하여 대안이 존재한 것임을 내가 여러분에게 밝힐 수 있었기 나는 정말로 희망한다. (모든 지식은 지각이나 감각이나 감각-자료들로부터 시작한다는 훨씬 더 유서 깊은 교설은 물론 나도 배척하지만, 부언하여, ‘지각의 문제들이 철학의 혹은 더 정확하게 인식론의 존경 받는 부분을 형성한다고 여전히 널리 간주되는 사실의 근저에 놓여있다.)

 

IX

 

이제 우리가 문제를 알게 되는 방식을 다소 더 밀접하게 바라보자.

우리는 문제로써 ㅡ 난제로써 ㅡ 시작한다고 나는 말한다. 그 문제는 아마도 실용적인 문제거나 이론적인 문제이다. 그 문제가 무엇이든, 우리가 문제를 처음 조우할 때 우리는 분명히 그 문제에 관하여 많을 것을 알 수 없다. 기껏해야 우리에게는, 우리의 문제가 무엇으로 구성되는지에 관하여 모호한 개념만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합당한 해결책을 생성할 수 있는가? 분명히 우리는 생성할 수 없다. 우리는 먼저 문제를 더 잘 숙지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나의 답변은 매우 간단하다: 매우 부적당한 해결책을 생성함에 의하여, 그리고 이 부적당한 해결책을 비판함에 의하여. 이런 방식으로만 우리는 문제를 이해하게 될 수 있다. 이유인즉 문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이유를 ㅡ 더 명백한 해결책들이 작용하지 않는 이유 ㅡ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명백한 해결책들을 생성해서 그 해결책들이 작용하지 않는 이유를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문제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나쁜 해결책들로부터 다소 나은 해결책들로 나아갈 것이다 ㅡ 항상 우리에게 다시 추측할 능력이 있다면.

시행과 오류제거에 의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의 이 방법의 매우 사소한 사례는 상당히 큰 숫자를 ㅡ 가령 22376 ㅡ 또 다른 상당히 큰 숫자로 ㅡ 가령 2784 ㅡ 나누는 문제이다. 우리의 통상적인 방법은 첫 번째 몫을 추측하는 것이고 ㅡ 우리의 추측은 몫이 7일 것이다 ㅡ 우리의 추측이 옳은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추측이 7이었다면, 우리가 틀렸음을 그리고 우리가 78로 바꾸어야 함을 우리는 쉽게 발견한다. 덜 사소한 많은 수학적 문제들이 있고 그 문제들을 푸는 표준적 방법은 추측으로 시작하여 저질러진 오류를 후속적으로 수정하는 것이다.

이 사례들로 인하여, 시행과 오류제거의 방법이 소위 (그러나 나의 의견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반복에 의한 귀납의 방법과 전혀 다름이 틀림없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들은 흔히 혼동되었다.

간단한 수학적 문제들에서 해답은, 몇 번의 시행과 착오들 이후에 혹은 심지어 시행과 착오 한 번 후에, 항상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수학적 문제들에 (그 문제 중 몇몇은 해결 불가능한)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경험과학들에서의 문제들에 대하여 틀림없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최고의 방법은 문제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배우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지라도, 먼저 추측에 의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그다음에 우리가 저지른 오류들을 정확히 지적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 처리에 의하여 의미되는 바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문제를 충분히 길게 그리고 충분히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면, 어떤 종류의 해결책이 전혀 충분하지 않은지 (왜냐하면 그 해결책이 문제의 요점을 놓칠 따름이기 때문에) 그리고 해결하려는 진지한 시도에 의하여 어떤 종류의 요건이 충족되어야 할 터인지를 우리가 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 문제를 알기 시작하고 이해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문제의 지맥들인 문제의 하위-문제들과 다른 문제들에 대한 그 문제의 관련성을 우리가 알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 우리의 잠정적인 해결책들은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ㅡ 즉, 비판적 토론에 ㅡ 제출되고 아마도 심지어 출판될 것이다.

혹은, 여러분이 실험자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해결책을 시험하는 데로 이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실험과 관련된 실용적인 문제의 해결책이라면 여러분은 다양한 실험들에서 그 해결책을 시험할 것이다. 그것이 추측인 가설이라면, 여러분은 실험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 추측이나 가설을 시험할 것이다.

이 실험적 시험들은 물론 다시, 비판적으로 문제를 처리하는과정의 한 부분이다: 문제를 알기 시작하는, 문제에 친숙해지고 실제로 익숙해지는 그리하여 아마도 어느 날 만족스럽고 조명하는 해결책을 발견하는 자신의 기회들을 개선하는 과정의 한 부분.

이것이 어떠할지라도 내가 주장하고 싶은 실제로 중요한 요점은 이렇다. ‘문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면, 나의 답변은 진지한 문제를 ㅡ 그 문제가 지금 실험과 관련된 순전히 실용적인 문제이든 이론적인 문제이든 ㅡ 이해하는 것을 배우는 단 한 가지 길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실패하는 것이다. 쉽고 명백한 어떤 해결책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한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그 문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유인즉 문제는 난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는 이 난제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문제에 대하여 쉽고 명백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알아냄에 의하여 이루어질 따름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여러 번 시도하고 실패했을 때만 우리는 문제를 알게 된다. 그리고 실패가 ㅡ 수용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해결책들을 생성하는 시도들 ㅡ 길게 이어진 이후에 우리는 심지어 이 특정 문제에 전문가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새로운 해결책을 ㅡ 예를 들어, 새로운 이론 ㅡ 제시할 때마다 그 해결책이 우리가 시험해서 실패한 저 해결책 중 한 가지 해결책이거나 (그리하여 그 해결책이 작용하지 않는 이유를 우리가 설명할 수 있을) 한 가지 새로운 해결책일 것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우리가 우리의 실패한 노력으로부터 그렇게 잘 알고 있는 저 표준적 난제들을 그 해결책이 적어도 극복할 것인지 극복하지 못할 것인지를 우리는 재빨리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요점은,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해결하지 못할지라도 그 문제와 씨름을 했음에 의하여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울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시도를 많이 할수록, 우리는 문제에 관하여 더 많이 배울 것이다 ㅡ 우리가 매번 실패할지라도. 이런 방식으로 문제에 ㅡ 즉, 문제가 지닌 난제들에 ㅡ 완전히 익숙해지고, 심지어 난제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보다 그 문제를 해결할 나은 기회를 우리가 갖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 모두는 우연의 문제이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이해뿐만 아니라 행운도 필요하다.

그리하여 문제들로 시작하여 문제로 끝나고 문제들과의 씨름을 통하여 진보하는 과학 자체처럼, 개별 과학자도 또한 자신의 문제로 시작하고 끝나며 문제와 씨름한다. 게다가 문제와 씨름을 하는 동안, 개별 과학자는 문제 이해하기를 배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문제를 변화시키기도 할 것이다. 강조점이 변함에 따라서 모든 차이점이 나타날 것이다 ㅡ 우리의 이해하기에 뿐만 아니라 문제 자체에도 나타날 것인데 문제의 풍요성 및 중요성과 흥미로운 해결책에 대한 전망들에도 나타날 것이다. 과학자가 이 변화들과 변환들을 의식하고 그것들을 무의식적으로나 은밀하게 이룩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이유인즉 문제의 재언명으로 인하여 문제의 해결책 거의 전부가 우리에게 흔히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X

 

과학적 지식의 방법론이나 이론과 관련된 문제들의 중요성에 대한 나의 견해는 아마도, 다음 고찰들에 의하여 요약될 것이다.

지식론은 ㅡ 그리고 특히 과학적 지식론 ㅡ 다음 두 가지 논지들의 충돌에 의하여 우리가 더 잘 이해하게 될, 역설 가까운 것에 부단히 직면한다.

첫 번째 논지: 우리의 지식은 방대해서 인상적이다. 실용적인 중요성을 띤 셀 수 없이 많은 세부사항들과 사실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인간사회들을 포함하여 죽었고 살아있는 주제들에 대하여 놀라운 지성적 통찰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많은 이론과 설명들을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두 번째 논지: 우리의 무지는 무한해서 압도적이다. 우리가 습득하는 모든 새로운 지식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무지의 방대함에 더욱 눈을 뜨는 데 도움을 받는다.

이 두 가지 논지들 모두는 참이고 그 논지들이 충돌하여 우리의 지식-상황이 규정된다.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무지 사이의 긴장은 지식의 성장에 결정적이다. 그 긴장은 지식의 발전을 고취하고, 그 긴장은 항상-움직이는 지식의 경계선들을 결정한다.

문제라는 단어는 이 긴장의 또 다른 명칭일 ㅡ 혹은 더 정확하게, 그 긴장의 다양한 구체적 사례들을 지적하는 명칭 ㅡ 뿐이다.

위에서 내가 제안한 바와 같이, 문제를 해결하려다 우리가 실패함을 통하여 문제는 출현해서 성장하고 중요해진다. 혹은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여, 문제를 알게 되는 유일한 방식은 우리의 오류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 이전의 지식과 과학적 지식에 적용된다.

과학의 방법에 대한 나의 견해는 매우 간단하여 그 방법이 우리의 오류들로부터 과학 이전의 학습 방법을 체계화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비판적 토론으로 지칭되는 장치에 의하여 그것을 이룩한다.

과학적 방법에 대한 나의 전체 견해는, 그 방법이 이 세 가지 단계들로 구성된다고 언급함에 의하여 요약될 것이다:

 

1 우리는 어떤 문제를 우연히 발견한다.

2 예를 들어 어떤 이론을 제시함에 의하여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3 우리의 오류들로부터, 특히 우리의 잠정적인 해결책들을 비판적으로

토론함에 ㅡ 새로운 문제들로 이어지는 경향을 띤 토론 ㅡ 의하여 우리가

더 잘 이해하게 된 우리의 오류들로부터 우리는 배운다.

 

혹은 세 단어들로: 문제들 ㅡ 이론들 ㅡ 비판.

이 세 가지 단어들로 합리적 과학의 전체 과정이 요약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XI

 

문제들과 문제들의 성장을 상당히 상세하게 토론하고 나는 이제 이론들로 선회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토론하겠다: 우리가 과학적 이론을 이해한다고 말하면 의미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많이 토론되었고, 이론들 이해하기에 관하여 우리가 조금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ㅡ 우리가 이론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개념은 낡았다고 ㅡ 제안되었다. 나 자신과 같이 이해하기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시계처럼 조악한 구조들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문제의 과정에 대하여 그림을 그리거나 모형을 제작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해하기를 의미한다고 또한 제안되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현대 물리학은 더 이상 시계 작동 구조들에 혹은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과정들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지적된다. 이것으로부터, 이론 이해하기의 개념은 낡았다고 결론이 ㅡ 내가 믿는 바, 틀린 ㅡ 내려진다. 그리고 이 결론은,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몇몇 생물학자들에 의해서도 널리 수용된다.

나는 그 결론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론 이해하기가 문제 이해하기보다 더 낡아야 하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직관으로 이해되거나 시각화될 모형들이나 그림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가 기술한 과정인 문제 이해하기.

이론 이해하기의 의미는 이론을 특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이것은 중요한 명제이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적은 명제이다.

가령 뉴튼 이론의 요점은 무엇인가? 그 요점은,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법칙들 설명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이론을 초래한 문제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론은 소용없다 ㅡ 다시 말해서, 이론은 이해될 수 없다.

혹은 수소원자에 관한 보어(Bohr)의 이론을 (1913) 사례로 들라. 이 이론은 모형을 기술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직관적이고 가시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또한 매우 당혹스러웠다. 직관적 난제 때문이 아니라, 맥스웰과 로렌츠의 이론과 반대로 그리고 잘 알려진 실험적 효과들과 반대로 그 이론이, 주기적으로 움직이는 전자인 움직이는 전하가 전자기장의 간섭을 항상 만들어낼 필요가 없어서 항상 전자기파들을 방출할 필요가 없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이 난제는 논리적인 것이었다 ㅡ 다른 이론들과의 충돌. 그래서 이 난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보어가 그 난제를 대담하게 수용하여 앞선 그리고 잘 확립된 이론들로부터 혁명적인 방식으로 이탈한 이유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어의 이론을 이해한다고 언급될 수 없다.

그러나 보어의 이유들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문제를 ㅡ 러더포드(Rutherford)의 원자모형을 빛의 방사 및 흡수 이론과 그리하여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이론 그리고 원자 스펙트럼의 이산포(離散布: discreteness)와 결합하는 문제 ㅡ 이해하는 것이다. 보어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의 본질은 직관적으로 그 문제를 시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이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문제들에 친숙해지는 것이고 해결책이 지닌 설명력 및 그 해결책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해결책이 큰 풍요로움을 지닌 완전히 새로운 문제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론이나 추측이 더 만족스럽거나 덜 만족스러운지 아닌지, 혹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이론이 해결하기 시작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일견 수용될 수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는 주로 순전히 연역적 논리의 문제이다. 그것은,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논리적 결론들을 알게 되는 문제이고 이 결론들이 (a) 원하는 해결책을 낳는지 아닌지 그리고 (b) 바람직하지 못한 부산물들을 ㅡ 예를 들어 어떤 해결될 수 없는 역설인 어떤 부조리 ㅡ 야기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문제이다.

 

XII

 

이 단계에서 이론들의 수용에 ㅡ 과학철학자들에 의하여 검증의 문제로서 많이 토론된 ㅡ 대하여 중요한 것을 말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우선 나는, 이론이나 추측의 수용에 관한 문제를 많이 과장된 문제로서 (이론들에 대한 검증이나 검증가능성을 내가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완전히 별개로, 그러나 이것은 나는 여기서 토론하지 않겠다) 간주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

한 가지 사례만 고려하라;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제시하고, 격렬한 비판에 부쳤고 그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 이론을 옹호했으며, 그 이론은 중요한 발전이라고 그리고 그 이론은 뉴튼 이론에 대한 개량으로서 수용되어야 한다고 그는 제안했다 ㅡ 그러나 거의 모든 과학철학자가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수용된이라는 저 의미에서 그는 스스로 그 이론을 수용한 적이 없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과학철학자들은, 주로 수용된 이론들로 구성된 지식의 무리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보기에 완전히 잘못되었고, 베이컨이 1600년에 믿었던 것이고 막스 플랑크가 나에게 알려준 바와 같이 몇몇 유능한 물리학자들이 1900년에도 여전히 믿었던 것으로 우리가 과학의 과제를 완성하는 단계에 막 놓였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당시 우세하던 권위주의적 과학에 대한 꿈의 잔재이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과학철학자는 수용된(accepted)’이나 수용될 수 있는(acceptable)’이라는 용어들을, ‘신뢰된(believed in)’이나 신뢰될 가치가 있는(worthy of being believed in)’의 대체어로서 사용한다. 참이고 그리하여 신뢰될 가치가 있는 많은 이론들이 과학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에 따르면, 이 가치 있음은 과학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유인즉 과학은 이 가치 있음을 긍정적으로 정당화하거나 확립하려고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과학은 주로 이 가치 있음을 비판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과학은 가장 존경을 받을 수 있고 아름다운 자체의 이론들의 전복을 승리로서, 발전으로서 간주하거나 간주해야 한다. 이유인즉 어떤 훌륭한 이론으로부터 그리고 그 이론의 실패로부터 우리가 아주 많이 배우지 않고 우리는 그 이론을 전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이론이 전복되면 항상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새로운 이론이 아직 전복되지 않았을지라도, 보어의 이론에서 우리가 안 바와 같이, 그 이론은 새로운 문제들을 초래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이론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문제들의 특징과 풍요성 및 깊이가 그 이론이 지닌 내재적인 과학적 흥미에 대한 최고 척도들이다.

요컨대 이론들의 수용이라는 문제는 사소한 문제의 위상으로 전락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이유인즉 과학은, 신뢰들의 체계로서라기보다는 성장하는 문제들의 체계로서 간주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들의 체계에 대하여, 이론이나 추측을 잠정적으로 수용하는 의미는 추가적인 비판의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것을 넘지 않는다.

 

XIII

 

지금까지 나는 귀납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과학적 방법에 관하여 ㅡ 그리하여 귀납에 관하여 ㅡ 철학자의 말을 들으려고 온 사람들 몇 명을 실망시킬까 내가 우려하지 않을 터라면 나는 틀림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귀납적 방법이나 귀납적 과정과 같은 것이 있다고 내가 믿지 않는다고 ㅡ 정말로 내가 여기서 기술한 저 비판적 토론 및 시도된 반증들의 방법에 대하여 여러분이 귀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지 않는다면 ㅡ 나는 이제 말하겠다.

나는 결코 단어들에 관하여 말싸움을 하지 않아서 여러분이 비판적 토론의 방법을 귀납으로 지칭하기를 원해도 나는 물론 심각하게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과거에 귀납으로 지칭된 바 있는 것과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이유인즉 비판적 토론의 방식은 어떤 것도 확증하지 않는 반면, 귀납은 항상 이론이나 일반화를 확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귀납의 판결은 항상 그리고 변함없이 증명되지 않는. 귀납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ㅡ 게다가 이것을 귀납은 드물게 한다 ㅡ 특정 이론이 이용 가능한 최고의 이론으로 (다시 말해서, 검토와 토론에 부쳐진 지금까지 최고의 이론) 보인다는, 그 이론이 자체가 해결하기로 의도된 문제의 많은 부분을 해결하는 듯이 보인다는 그리고 그 이론이 우리가 고안할 수 있던 가장 엄격한 시험들에서 살아남았다는 판결을 툭 내뱉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긍정적인 판결은 우리의 비판적 토론에 비추어 이론은 지금까지 얻어진 진리에 대한 최고의 근사치로 보인다 것에 해당한다고 우리가 말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이론이 참으로서 (다시 말해서, 사실들에 부합하는 것으로서나 실재에 대한 합당한 기술로서) 물론 확증되지 않는다.

사실상 진리에 대한 나은 근사치라는 개념은, 비판적 토론의 주요 기준이기도 하고 그 토론의 결과로서 우리가 도달하기를 희망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우리의 다른 기준들 가운데 이론의 설명력과 이론의 단순성이 있다.

과거에 귀납이라는 용어는 주로 두 가지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첫 번째 의미는 반복적 귀납이다 (혹은 나열에 의한 귀납). 이것은 흔히 반복되는 관찰들과 시험들로 구성되는데 그것들은, 어떤 일반화나 이론을 입증하는 논증에서 전제들로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종류의 논증이 무효라는 것은 명백하다: 흰 백조를 아무리 많이 관찰해도, 모든 백조는 희다가 (혹은 흰색이 아닌 백조를 발견할 확률은 낮다) 입증되지 않는다. 동일한 방식으로 지구상에서 수소 원자들의 스펙트럼을 아무리 많이 관찰해도, 모든 수소 원자들을 동일한 종류의 스펙트럼을 방사한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고찰하면, 후자(後者) 일반화와 추가적인 이론적 고찰들로 인하여 도플러 변이(Doppler shifts) 및 아인슈타인의 중력 적색변이를 도입하여 우리가 그 일반화를 수정해야 한다는 의미가 생길 것이다.

그리하여 반복적 귀납은 끝난다: 그 귀납은 어떤 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귀납이라는 용어가 과거에 사용된 두 번째 주요 의미는 제거적 귀납이다 ㅡ 허위 이론들을 제거하거나 반증하는 방법에 의한 귀납. 이것은 일견, 내가 옹호하고 있는 비판적 토론의 방식과 매우 유사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배우 다르다. 이유인즉 베이컨과 밀(Mill) 및 제거적 귀납의 방법을 주창한 다른 사람들이, 허위 이론들 모두를 제거함에 의하여 우리가 최종적으로 참인 이론을 확립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경쟁하는 이론들의 숫자가 무한하다는 사실을 ㅡ 특정 순간에 고찰을 위하여 우리 앞에는 통상적으로 확정된 숫자의 이론들만 있을지라도 ㅡ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통상적이라고 말하는데 이유인즉 때때로 무한한 숫자가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뉴튼의 인력 역제곱 법칙을 우리가 수정하여 숫자 2와 조금 다른 힘에 의하여 제곱을 대체해야 한다고 제안되었다. 이 제안은, 뉴튼 법칙에 대하여 무한 숫자의 조금 다른 수정들을 우리가 고려해야 한다는 제안에 해당했다.

모든 문제에 대하여 논리적 해결책이 항상 무한하다는 사실은, 과학철학에 대한 결정적인 사실이다. 그 사실은, 과학을 그렇게 극도로 흥미로운 모험으로 만드는 것 중 하나이다. 이유인즉 그 사실로 인하여 일상적일 뿐인 방식들이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의 의미는, 항상 엄격한 비판과 엄격한 시험들에 의하여 통제될지라도 과학자들은 상상력과 대담한 개념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실로 인하여 또한 부언하여, 과학의 목표가 단지 관찰된 사건들 사이나 관찰들 (혹은 더 나쁘게는 감각자료들’) 사이에서 상호관계들을 입증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가 드러난다. 과학에서 우리가 겨냥하는 것은 훨씬 더 많다. 우리는 평범한 경험의 세상 배후에 있는 새로운 세상들의 발견을 목표로 한다: 아마도 미세하거나 미세 이하의 세계와 ㅡ 중력의, 화학의, 전기의 그리고 핵의 힘들(forces)로 아마도 다른 것들로 환원될 수 있고 다른 것들은 환원될 수 없는 ㅡ 같은. 과학의 해방적인 힘에 그렇게 많은 것을 추가하는 것은 이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자 이 새롭고 꿈도 꾸어지지 않은 가능성들의 발견이다. 상호관계 계수들(correlation coefficients)은 우리의 관찰사항들을 상호 관련시키기만 한다면 흥미롭지 못하다. 그것들은 이 세계들에 관하여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배우는 데 도움에 된다는 조건으로만 흥미롭다.

 

XIV

 

나는, 나의 강좌의 이 부분을 실용적인 제안으로써 마치고 싶다.

내가 귀납적 양식(the inductive style)으로 지칭한 과학적 논문 쓰기에서 아직도 살아있는 전통이 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그것을 안다고 확신하며, 여러분들 몇 명은 아직도 그 전통을 따를 것이다. 그 전통의 매우 잘 알려진 형태는, 처음에 실험적 배치들 다음에 관찰사항들을 기술함에 의하여 논문을 작성하는 것인데 아마도 그것들을 연결하여 가설로써 결론을 내리는 (작은 인쇄물로) 것이다. 이 귀납적 혹은 베이컨적 양식에는 길고 영예로운 내력이 있다: 훌륭하고 세상을 뒤흔드는 논문들이 이 양식으로 작성되었다 ㅡ 예를 들어 페니실린에 대한 자신의 최초 관찰을 보고하는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경의 논문.

그러나 플레밍이 효과들을 관찰만 한 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가 안다: 그는 사전에 많은 것들 알았다. 그는 에를리히(Ehrlich)의 소망에 대하여 알았고, 항생제에 관한 가능성이 생물학자들에 의하여 여러 해 동안 토론되었다. 그리고 플레밍 부인은 한 논문에서 고인이 된 자신의 남편이 이 문제들에 그리고 그런 항생제의 의학적 가능성들에 얼마나 흥미를 지녔던지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플레밍은 우연한 일을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우연한 일인 한, 잘 준비된 정신에게 ㅡ 이런 종류의 우연한 일의 중요성과 바람직함을 의식하는 정신 ㅡ 발생한 우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플레밍의 논문을 읽은 오활한 독자는 그것을 생각하지 못할 터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통적인 귀납적 양식의 결과인데 그 양식 자체가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의 결과로 발생한다.

이제 나는 내가 제시하고 싶은 실용적인 제안은 이렇다. 우리는 당연히 자신들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과학자들에게 최고의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통적인 양식과 전혀 다른 양식인 새로운 양식을 고취할 수 있어야 할 터이다.

이 새로운 양식으로 작성된 논문은 아마도 다음 형태일 것이다:

그 양식은 연구가 시작되기 이전에 현재 상태로 문제 상황에 대한 간략하고 분명한 서술로써, 그리고 토론에서 지금까지 도달된 입장에 대한 간략한 탐색으로써 시작할 터이다. 그다음에 그 양식은, 연구에 동기를 부여한 문제와 관련된 짐작이나 추측을 개괄적으로 서술하는 데로 나아가서 연구가 어느 가설들을 시험하기를 희망했는지를 말할 터이다. 그다음 그 양식은, 가능하다면 실험적 배치들을 선택한 이유들을 추가하여 그 배치들과 결과들을 개괄할 터이다. 그리고 시험들이 성공적이었는지, 문제 상황이 저술가의 견해에서 변했는지 그리고 변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변했는지를 서술할 요약문으로 그 양식은 끝날 터이다. 이 부분에는, 있다면 새로운 가설들과 아마도 그 가설들이 시험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어떤 언급이 또한 담길 터이다.

논문들은 이런 양식으로 서술되었고, 그 논문 중 몇 편은 나의 제안에 근거했다. 그 논문들 모두가 편집자들에 의하여 친절하게 수용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도의 전문화로 인하여 훨씬 더 높은 바벨탑이 막 건설되려는 과학의 현재 상황에서 이 새로운 비판적 양식과 같은 것으로 귀납적 양식을 대체한다는 것은, 연구의 다양한 분야들 사이에서 상호 이해관계와 상호 접촉이 보전될 수 있거나 더 정확하게 재창조될 수 있는 극소수의 방법 중 한 가지 방법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지성적인 비전문가의 관심이 이런 방식으로 또한 재점화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토론에서 좌우되는 제안일 뿐이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토론되어야 한다. 이유인즉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오랫동안 많은 토론이 있었던 듯이 보이지 않기 ㅡ 아마도 약 400년 전 심지어 베이컨 이래 ㅡ 때문이다.

 

XV

 

나는 이제, ‘책임으로 제목이 붙은 나의 강좌의 간략한 마지막 부분에 왔다.

내가 우려하는 바, 오늘날 과학자들의 인간적 혹은 사회적 책임들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핵폭탄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말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래서 나는 먼저 핵폭탄을 끝장내고 싶은데 이유인즉 내가 정말로 토론하고 싶은 것은 핵폭탄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핵전쟁의 위험을 경시하는 것은 나와 거리가 멀다. 그 위험은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무시무시하고 이런 종류의 전쟁을 피할 전망들은 우리가 소망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우 불쾌한 상황을 최선으로 처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오랫동안 우리는 핵폭탄의 그림자 아래서 살아야 할 개연성이 높아 보이고, 내가 알 수 있는 한 우리 대부분이 할 수 있을 유일한 것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능한 한 우리가 피해야 하는 것 중 한 가지는 그 상황에 대하여 신경질을 내어 이 위험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소리쳐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도로들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교통사고들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데는 매우 상당한 이유가 있고 우리 모두는 운전자들로서 혹은 보행자들로서 때때로 실수들을 저지르기 쉽다. 그러나 매우 작은 숫자의 정치적 및 군사적 지도자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핵전쟁의 위험에 관하여 합당한 일을 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유능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취하고 있는 것과 상당히 반대인 노선을 나는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주 최근에 흥미로운 정기간행물 원자력과학자들의 보고서(The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에서 주요 기고문 한 편이 발표되었는데 그 기고문은 먼저 운명론과 결정론에 반대하는 철학적 논증을 전개하고 계속해서 우리 모두가 발생할 예정인 것에 책임이 있다고 ㅡ 상황이 매우 시급하고 필사적이라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그 상황에 대하여 중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ㅡ 결론을 맺었다.

글쓴이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특정 상황에 따라서 자신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그가 생각했다고 나는 상상한다.

이 글쓴이가 틀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백만의 시민들이 자신들은 핵폭탄에 대하여 무슨 일인가 해야 했을 따름이라고, 핵전쟁을 막기 위하여 자신들이 무슨 일인가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무책임하고 시민으로서 자신들의 의무에서 실패할 터이라고 느끼기 시작한다는 것은 도움이 될 터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런 종류의 감정이 (내가 개인적으로 신경질적이라고 기술하고 싶을 터인) 일어나는 것도 핵공격의 위험을 높일 개연성이 크다고 나는 느낀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삶에 관한 사실은, 실천될 수 있는 무엇이든 우리가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우리가 우연히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때때로 우리가 관련되는 것이다.

나는 독단적이 되고 싶지 않아서 어떤 실용적인 제안도 아주 신중하게 토론되어야 한다. 이것은 물론, ‘일방적인 군축으로 지칭되는 제안에도 성립한다. 내가 항상 버트런드 러셀을 철학자로서 크게 찬양했을지라도, 일방적인 군축과 같은 제안들에는 그런 제안을 추천할 여하한 것도 없다고 나는 느낀다. 일방적인 군축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정치선전에서 더 성공적이어서 저항하려는 우리의 의지가 심각하게 약화된다면 그들이 쉽게 핵공격을 촉발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결코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이상하다. 결국 우리에 의하여 향유된 불안한 핵 평화 18년은 크게 싸우려는 우리의 각오 때문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시 말해서, 실제적인 경험으로 보면 핵무장은 위험할지라도 핵전쟁의 발발을 저지할 ㅡ 아마도 군축이 이루어지도록 충분히 긴 시간 동안 ㅡ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인하여, 전쟁에서 한 국가만이 핵폭탄을 보유한다면 전쟁을 끝내기 (다른 편이 핵병기를 구축하기로 ㅡ 혹은 재구축하기로 ㅡ 결심하기 전에, 가능하면, 빨리 끝내기) 위하여 그 국가는 핵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할 개연성이 높은 것이 밝혀졌다.

심지어 운명론에 대한 최소한의 의향도 없이, 이 위험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최선을 다하여 그 위험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나는 유명한 거리의 시민처럼 느낀다.

그러나 핵폭탄과 전혀 별개로, 순전히 평화로운 방식들로 우리가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그리고 더욱 특히 과학자들이 할 수 있는 많은 일이 현재의 불편한 상황과 관련하여 있다.

우리 사회와 러시아인들의 사회 양쪽 모두에 공통적인 배경이 ㅡ 과학이라는 세속화한 종교 ㅡ 있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지식을 통하여 인간이 자신을 해방시킬 ㅡ 인간이 편견과 편협함으로부터 자신의 정신을 해방시킬 ㅡ 베이컨의 신념인데 계몽사조 동안에 자라났다.

모든 훌륭한 관념처럼,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이라는 이 관념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명백한 위험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위대한 관념이다. 아무튼 우리는 그 관념을 포용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관념을 연마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지라도, 우리가 틀림없이 그 관념을 지금 거부한다면 굶주림에 의하여 인류의 큰 부분이 죽음에 몰린다.

마르크스주의는 스스로 과학이라고 부른다. 내가 다른 곳에서 밝히려고 노력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과학으로 칭하면서 마르크시즘은 과학에 그리고 지식을 통한 자기 해방이라는 관념에 경의를 표한다. 마르크시즘이 지닌 힘의 많은 부분이 이 사실과 관련된다.

아무튼 마르크시즘은, 잔인한 독재와 자유 및 개별적 인간에 대한 오만한 경멸을 낳았을지라도, 우리 자신들처럼 지식을 통한 ㅡ 과학의 성장을 통한 ㅡ 자기 해방이라는 관념에 몰두한다.

그래서 여기에 평화로운 경쟁의 분야가 있고, 우리가 그 분야에 진심으로 뛰어든다면 우리가 실패할 수 없는 분야이다. 이 경쟁에서 과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물론 자신의 특정 분야들에서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편협한 전문화의 위험을 피하는 것이다: 과학의 다른 분야들에 불타는 관심을 갖지 않은 과학자는, 과학의 문화적 과제인 저 지식을 통한 자기 해방에 대한 참여에서 자신을 배제시킨다. 세 번째 과제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분야와 자신의 업무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고, 이것은 쉽지 않다. 그것의 의미는, 과학적 전문어를 ㅡ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거의 그 전문어가 문장(紋章: a coat of arms)이나 옥스퍼드 말투인 양 자존심을 갖는 ㅡ 최소한으로 감소시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자존심은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자존심은 잘못된 것이다. 가능한 한 항상 간단하고 명백하며 겸손하게 최선을 다하여 스스로 배우는 것과, 너무 심오하여 분명하고 간단하게 표현될 수 없는 지식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암시를 질병처럼 피하는 것이 우리의 자존심이어야 한다.

이것이 과학자들의 가장 크고 가장 시급한 사회적 책임 중 한 가지 책임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가장 큰 책임일 것이다. 이유인즉 이 과제가 열린사회 및 민주주의의 생존과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과학이 전문가들의 폐쇄된 집합의 배타적 소유가 된다면, 열린사회와 (다시 말해서, 반대의견들에 대한 관용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견을 존중하기도 하는 관념에 근거한 사회) 민주주의는 (다시 말해서, 열린사회의 보호에 전념하는 형태의 정부) 번성할 수 없다.

문제에 대한 현재 토론의 상태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가능한 한 명백하게 항상 서술하는 습관은, 과학을 ㅡ 다시 말해서, 과학적 관념들을 ㅡ 낫고 더 널리 이해되도록 만드는 중요한 과제에 대하여 많은 도움이 될 터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