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인식론과 산업화
프랜시스 베이컨은, 사고방식 변화의 결과로서 생산 형태의 변화를 그리고 인간에 의한 효과적인 자연 통제를 고대했다.
칼 마르크스
I
그의 주요 작품들의 유명하고 고도로 극적인 한 구절에서, 철학자들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역순으로 왕들은 ㅡ 혹은 독재적 통치자들 ㅡ 완벽하게 훈련된 철학자들이어야 한다고 플라톤은 요구한다. 철학자들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제안으로 인하여 많은 철학자들이 기뻐했는데 그들 중 몇몇은 그 제안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제안이 매력적임을 알지 못한다. 내가 가장 현명한 사람과 최고 사람의 독재를 포함하여 여하한 형태의 전제나 독재에 반대한다는 사실과 아주 별도로, 내가 보기에 철학자들은 그 직위에 특히 잘 맞지 않는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건국자이고 최초의 대통령이며 철학자-왕이라고 우리가 혹시 말할 토마스 마사리크(Thomas Masaryk)의 경우를 예로 들어라. 마사리크는 완벽하게 훈련된 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정치인이자 훌륭하고 찬사를 받을만한 사람이었다.
1959년 6월 13일 스위스의 성 갈렌 대학(The University of St Gallen), 경제학부에서 독일어로 진행된 강좌인데 ‘유럽: 유산과 미래 과제(Europe: Inheritance and Future Tasks)’라는 제목의 연속 강좌에서 ‘유럽역사에서 몇 가지 근본적인 전환점들에 미친 철학의 영향(The Influence of Philosophy upon some Fundamental Turning Points in the History of Europe)’이라는 주제였다. Ordo, 30, (F.A. 폰 하이에크를 위한 기념논문집), Gustav Fischer Verlag 출판사, 슈투트가르트 및 뉴욕, 1979년에서 수정되어 최초로 출간되었다. 제레미 셔머는 주석에서 참고사항들을 제공했다. 칼 마르크스, 자본론, I권, 13장, 2절에서 (Everyman's Library 판본, J.M. Dent & Sons Ltd., 런던, E.P. Dutton & Co. Inc., 뉴욕, 1930년 및 후속 인쇄본들의 413쪽 이하에 있는 각주. Lawrence & Wishart, London/Progress Publishers 출판사, 모스크바 판본, 1963년 및 후속 인쇄본들, 368쪽의 각주 2와 비교하라) 좌우명이 인용되었다.
그리고 그가 만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유래 없는 정치적 업적이었다. 그러나 구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체도 부분적으로 마사리크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유럽의 재앙과 세계의 재앙이 밝혀졌다. 이유인즉 이 해체에 뒤이은 불안정으로 인하여, 주로 나치즘이 발흥하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심지어 마사리크 자신이 건국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몰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반(反)-민족적...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해체되어야 한다’는 (그 자신의 말을 사용하여) 마사리크의 교설이 잘못된 철학적 교설로부터 도출되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민족국가라는 철학적 원칙으로부터 도출되었다는 것. 그러나 정치적 민족주의인 이 원칙은 불행하고 심지어 악의적인 구성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룩하기가 불가능한 원칙이기도 하다. 이것은, 민족들이 ㅡ 이 원칙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미에서 ㅡ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족들은 이론적 구축물들이고, 민족들이 구축되는 이론들은 유럽에 전적으로 부적절하고 전혀 적용될 수 없다. 이유인즉 민족주의라는 정치적 이론은, 동시에 언어학적 무리들이기도 하면서 군사적 관점에서 방어될 수 있는 자연 경계선들을 지닌, 지리적으로 통합되고 응집적인 지역에 또한 우연히 거주하는 인종적 무리들이 ㅡ 공동 언어와 공동 영역, 공동 역사와 공동 문화 및 공동 운명에 의하여 단합된 무리들 ㅡ 있다는 전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 무리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경계선은, 민족국가 이론에 따르면, 틀림없이 새로운 민족국가들의 경계선을 형성한다.
‘민족자결’이라는 마사리크-윌슨(Masaryk-Wilson) 원칙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은 이 이론이었고 그 이론의 이름으로 복수언어 국가인 오스트리아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그런 지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ㅡ 적어도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정말로 신대륙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한 가지 토속어만 사용되는 지리적 지역은 극소수다: 거의 모든 지역에는 언어적 혹은 ‘인종적’ 소수가 있다. 심지어 마사리크 자신이 새롭게 건국한 민족국가에도, 자체의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몇몇 언어적 소수집단들이 포함되었다. 그래서 민족국가라는 원칙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파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히틀러가 해방자의 역할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이 원칙 때문이었고, 그로 인하여 서양은 혼란에 빠졌다.
민족주의라는 이념이 철학적 이념이라는 것은 나의 현재 주제에 중요하다. 그 이념은 통치권 이론에서 ㅡ 국가권력은 분할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론 ㅡ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다스리는 초인간적 통치자라는 관념에서 나왔다. 루소는 왕을 인민으로 대체하여 그 견해를 뒤집었을 따름이다: 그는 인민으로 민족을 ㅡ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초인간적 민족 ㅡ 만들었다. 그리하여 정치적 민족이론은, 절대군주론을 철학적으로 뒤집어서 생겼다. 이 전개상황의 내력은 내가 보기에 많은 철학적 관념들의 발흥에 특징적이고, 그 내력으로 인하여 철학적 관념들은 어느 정도 유보되면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교훈이 나의 뇌리에 들어왔다. 그 내력으로 인하여 우리는 또한, 정치적 자유라는 이념이자 언어적 및 종교적 소수들의 보호라는 이념이며 민주주의라는 이념과 같은 근본적인 이념들이 있다는 것을 배우는데, 그것들은 심지어 옹호될 수 없는 철학적 이론들에 의하여 옹호될 때도 근본적이다.
마사리크와 같이 칭찬 받을만한 사람이자 훌륭한 정치가가 특정 철학적 이념들에 이끌려 그렇게 중대한 실수를 ㅡ 옹호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조건 하에서 정치가로서 자신의 업적을 거의 파괴하게 마련이기도 한 ㅡ 저질렀다는 사실 모두는, 철학자들이 통치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요구에 반대하는 강력한 논증에 해당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또 다르며 전혀 다른 논증을 플라톤에 반대하여 제시할 수 있을 터이다: 철학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스리고 있기 ㅡ 사실상,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실제 사실에서 그만큼 더 ㅡ 때문에 플라톤의 요구는 불필요하다고 우리는 또한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이유인즉 세상은 관념들에 의하여 다스려진다는 논지를 내가 개진하고 싶기 때문이다: 좋은 관념들과 나쁜 관념들 모두. 그리하여 세상은 저 관념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에 의하여 ㅡ 즉, 전문적인 철학자들에 의해서는 드물지라도 철학자들에 의하여 ㅡ 다스려진다.
실제로 통치자들은 철학자들이라는 논지는 물론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1838년에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당신들 자존심에 찬 행동하는 사람들이여, 이것을 주목하라! 당신들은,
흔히 최고로 겸손하게 은둔하면서 자신들을 가장 좋아하는 과업에 임명한
사상가들의 무의식적인 도구들일 뿐이다.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Maximilien Robespierre)는 장 자크 루소의 수족이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는, 자신의 탁월한 자유 정치철학서인 자유의 구축(The Constitution of Liberty)에서 오늘날 우리에 대한 이 관념의 유관성과 자유의 전통에서 그 관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례에 의하여 철학적 관념들이 지닌 정치적 권력이 예시된다. 마르크시즘은 철학이다: 마르크스 자신이, 자본론에 설명된 자신의 이론을 훌륭한 칸트 이후 철학 체계의 최후 체계로서 아주 올바르게 기술한 검토서를 자랑스럽게 인용했다. 그의 사후 34년 만에 레닌이라는 사람으로 그의 권력 장악이 나타났는데, 루소가 사후 16년 만에 로베스피에르라는 사람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의 거의 정확한 반복이다.
물론 정통적인 마르크시즘은, 이념들이 지닌 정치적 권력이라는 논지를 부인한다: 그 마르크시즘은, 이념들에서, 주로 기술적이고 산업적 발전의 불가피한 결과들 본다. 처음에 변하는 것은 생산기술이라고 마르크스는 가르친다. 이것에 의존하여, 사회의 계급구조가 변할 것이고 우세한 이념들이 뒤따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부구조 전체가 변했을 때, 정치권력의 체계도 또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ㅡ 정치적 이념들에 있는 권력이라는 우리의 논지를 부정하는 ㅡ 역사에 의하여 반증된다. 예를 들어 1917년 이후의 러시아 역사를 고려하라. 그곳에서 처음 나타났던 것은 권력 장악이었다 ㅡ 즉,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마지막에 왔어야 할 것. 그다음에 레닌의 거대한 이념이 왔다: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전력화(electrification)가 덧붙은 것이라는 이념.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력화, 산업화, 그리고 소위 경제적 ‘하부구조’의 강제적인 변화가 왔다. 이 변화는 그리하여 위에서부터, 새로운 권력 도구인 새로운 계급 독재에 의하여 강제된다.
나중에 나는, 최초의 산업혁명이 ㅡ 영국의 산업혁명 ㅡ 또한 철학적 관념들에 의하여 고취된 것을 밝히려고 노력하겠다.
철학에 의한 정치권력 장악에 ㅡ 순전히 민주주의적 수단에 의한 권력 장악 ㅡ 대한 완전히 다른 사례는 하이에크 의하여 내가 주목하게 되었다. 영국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1873년 자신이 사망한 후 곧 출간된 자신의 저서 자서전(Autobiography)에서, 1830년 경 자신의 동아리는 (소위 철학적 급진파[philosophical Radicals])는 다음 프로그램을 채택했다고 서술했다: ‘노동인구 전체에게 높은 임금으로 완전고용을 확보함’에 의하여 그들은 인간사회에서 향상을 이룩하고자 한다. 사망 후 72년 만에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오늘날 어떤 정당도 감히 그의 프로그램에 도전하지 못할 터이다.
II
철학적 이념들이 ㅡ 게다가 흔히 아주 해롭거나 미숙하거나 완전히 어리석은 철학적 이념들 ㅡ 지닌 정치권력은, 우리를 좌절시키고 심지어 우리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 개연성이 높은 사실이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가 겪는 거의 모든 전쟁이 이념적 전쟁들이라는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을 터이다: 종교적 전쟁들이거나 이념적-종교적 박해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비관적이어서는 안 된다. 다행히도 훌륭하고, 인간적이며 현명한 철학적 이념들이 또한 있다. 우선 종교적 관용이라는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견해와 다른 견해들을 존중하는 이념이 있다. 그리고 정의(正義: justice)와 자유라는 철학적 이념들이 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그것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희생했다. 그리고 우리가 이념적 전쟁들을 언급한다면 제네바에 있는 국제적십자의 난센 국제 난민 사무소(Nansen Aid)와 같은 평화의 십자군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그 사무소는 1921년-1922년에 기아에 의한 죽음으로부터 1백만의 소련 시민들을 구조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구상의 평화라는 이념은 종교적 이념일 뿐만 아니라 철학적 이념이기도 한 것과 국제연맹이라는 세계 연합의 이념을 최초로 언명한 사람은 이마누엘 칸트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평화라는 이념은, 이념들이 지닌 정치권력이라는 우리의 논지에 대한 훌륭한 사례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에 의하여 그리고 3차 세계대전의 위협에 의하여 우리가 강박증에 걸렸다할지라도 중요한 것을 ㅡ 1918년 이래 유럽이 평화라는 이념을 근본적인 것으로서 인정했다는 사실 ㅡ 간과하는 경향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심지어 무솔리니와 히틀러도 자신의 이념이 공공연하게 공격적이었는데 우세한 여론의 의하여 어쩔 수 없이 평화의 친구로서 자세를 취했고 자신들이 시작한 전쟁을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비난했다. 그들이 이렇게 여론에 굴복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평화를 이룩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력했는지가 밝혀진다. 평화라는 이념에 의하여 1918년에 성취된 도덕적 승리를 우리가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그 승리가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승리로 인하여 평화를 성취하려는 의지가 ㅡ 평화를 위한 도덕적 전제조건인 의지 ㅡ 생겼다.
평화라는 이념의 이 승리는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가 사망한 지 거의 400년이 되어서야 그의 늦은 승리로서 간주될 수 있다. 기독교 유럽에게 기독교 인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분명히 알기 위하여, 저 위대한 음악가이자 시인이며 악에 대항하여 싸운 마틴 루터에 의하여 에라스무스에게 가해진 공격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루터는, 평화라는 이념이 관용이라는 이념과 연결된다고 알았기 때문에, 에라스무스와 싸웠다: ‘내가 이 난리들을 보지 않았더라면 [루터는 전쟁과 유혈사태를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이 없다고 나는 말하겠다. 그러나 지금 내가 정말로 그 난리들을 볼 때, 나의 가슴이 기쁘다...’. ‘이 난리들을 진정시키려는 소망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포기하고 억누르려는 소망이다’라고 루터는 서술했다. 그리고 평화와 이해하기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호소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비탄을 멈추라, 치유하려고 [세상의 병] 애쓰는 것을 멈추라! 이 전쟁은 우리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전쟁이다. 그가 그 전쟁을 시작했고, 그가 그 전쟁을 유지하여 그의 말씀에 대한 모든 원수들이 우리의 발아래서 똥이 될 때까지 그 전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에라스무스와 그의 친구들에게 개인적인 용기가 결여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에라스무스의 친구들이자 에라스무스처럼 관용의 옹호자였던 토마스 모어경과 존 피셔(John Fisher)는, 주로 로마가톨릭의 순교자로서 가 아니라 더 정확하게 인본주의라는 이념의 순교자로서 야만성과 자의적 통치 및 폭력에 대한 반대자로서 죽었다고 나는 믿는다.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를 평화와 관용을 위한 세력으로서 간주한다면, 우리는 에라스무스의 정신적 승리를 증언한다.
III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언명될 철학을 향한 태도를 여러분에게 제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선량한 신앙과 사악한 신앙이 ㅡ 인간 선량함이나 인간의 사악함을 고취하는 신앙들 ㅡ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선량한 철학적 이념들과 사악한 철학적 이념 및 참된 철학적 이론과 허위인 철학적 이론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앙 같은 것이나 철학 같은 것을 존경해서도 안 되고 타매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비판적이고 선택적인 정신으로써 우리는 종교적 이념들과 철학적 이념들을 평가해야 한다. 이념들이 지닌 가공할 힘으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중대한 책임감이 부과된다. 우리는 부주의하게 이념들을 수용해서도 안 되고 거부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이념들을 비판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내가 방금 언명한 태도는 많은 사람에게 명백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태도는 전혀 일반적으로 수용되지도 않고 심지어 일반적으로 이해되지도 않는다. 그 태도는 원래, 더 정확하게, 특수하게 유럽이나 서구의 태도이다 ㅡ 비판적 합리주의의 태도. 그것은, 유럽 철학의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전통의 태도이다.
물론 비판적 사상가들은 유럽 외부에 존재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비판적이거나 합리주의적인 전통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럽에서 비판적이거나 합리주의적 전통으로부터 궁극적으로 유럽의 과학이 성장했다.
그러나 심지어 그 전통이 현대 과학을 낳기 전에, 비판적 전통으로 인하여 유럽의 철학이 태어났다. 혹은 더 정확하게, 유럽의 철학은 유럽의 비판적 합리주의만큼 오래되었다. 이유인즉 두 가지 모두 밀레토스의 탈레스(Thales)와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에 의하여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무비판적 및 심지어 반(反)-비판적인 역류들이 ㅡ 두 가지 모두 합리주의적이고 반(反)-합리주의적 ㅡ 유럽의 철학 자체 안에서 계속 형성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실존주의’라는 반(反)-합리주의적 철학이 커다란 유행을 누리고 있다.
실존주의는, 실제로 중요한 문제들에서 아무것도 증명될 수 없다고 그리하여 사람은 항상 결정들을 ㅡ 근본적인 결정들 ㅡ 내려야 할 필요성에 직면한다고 주장하는데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증명될 수 없다는 그리고 증명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기껏해야 수학적 및 논리적으로 자명한 서술들로 구성된다는 주장에 아무도, 심지어 가장 무비판적이고 오활한(naive) 합리주의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터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자유롭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서술하는 것은 ㅡ 비판적 합리주의자이자 계몽사조의 탁월한 철학자인 이마누엘 칸트가 매우 명백하게 알았던 사실 ㅡ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물론 이 서술은 우리에게, 우리의 근본적인 결정이 무엇으로 판명될지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합리주의를 찬성하여 결정할지 혹은 반대하여 결정할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에라스무스 및 소크라테스와 함께 합리적인 논증들을 듣는 것을 선호하여 결정할지 ㅡ 우리의 추가적인 결정들을, 그런 논증들에 대한 비판적이고 신중한 고찰에 의존하고 자기-비판적인 숙고에 의존하도록 만들어서 ㅡ 혹은 비합리주의적인 실존주의라는 마술 동아리에 성급하게 뛰어들거나 더 정확하게 반(反)-합리주의적 ‘몰입’인 마술 소용돌이에 성급하게 뛰어들지.
저것이 어떠할지라도, 24세기 전 유럽 철학이 비판적 합리주의와 자기-비판을 선호하기로 결정했을 때 유럽 철학은 근본적인 결정을 내렸는데 자체와 유럽의 근본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이 자기-비판적 전통이 없었다면 철학적 반(反)-합리주의의 현재 유행은 아마도 발생할 수 없었을 터이다: 비판적 합리주의가 쉬지 않고 자체를 비판한다는 것은 그 합리주의의 전통들 중 한 가지 전통일 따름이다.
IV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나의 주제와 큰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론일 뿐이다. 이유인즉 유럽의 역사에 미친 유럽 철학을 짧은 한 시간에 개괄하는 과제로 인하여 내가 몇 가지 어렵고 상당히 근본적인 결정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세 가지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들에 국한시키기로 결심했다. 유럽역사의 가장 두드러지고 특징적인 세 가지 세력의 발흥에서 매우 미숙한 한 가지 철학 이론이, 수행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역할을 나는 토론하고 싶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세 가지 세력들은 다음과 같다:
1 우리의 산업문명;
2 우리의 과학과 그 영향; 그리고
3 개인적 자유라는 우리의 이념.
그리하여 산업화, 과학 및 자유라는 이념이 나의 주요 주제들이다. 미국 문명을 유럽 문명의 분파로서 우리가 취급한다면 그것들이 특징적으로 유럽적 주제들이라는 것은 상당히 명백하다. 그것들이 철학과 연결되는 방식은 아마도 덜 명백하다.
흥미로운 정도로 그것들은 매우 특징적인 유럽식 지식론이나 인식론과 관련된다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제안이다: 플라톤이 현상의 세계를 그림자들의 ㅡ 현상의 세계 배후에 숨겨진 실재 세계에 의하여 비치는 그림자들 ㅡ 세계로서 묘사한 자신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 자신이 기술한 저 이론과 관련된다는 것. 인정되는 바, 우리가 결코 지식을 배울 수 없는 세상에 대한 플라톤의 믿음은 아마도 ‘인식론적 비관론’으로 지칭될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럽을 넘어 멀리 퍼졌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 믿음을, 오래된 이오니아의 비판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정신에 완전히 맞추어, 월등한 인식론적 낙관론으로 보충했다. 그리고 이 인식론적 낙관론은 우리 서구 문명의 한 부분으로 남았다. 그 낙관론은, 과학 즉 숨겨진 실재 세상에 관한 실제적 지식은 틀림없이 매우 어려울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우리들 몇몇에게는 도달될 수 있다는 낙관론적 이론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사람이란 현상의 세계 배후에 숨겨진 실재를 발견할 수 있고, 신적(神的: divine) 계시라는 도움 없이도 자기 자신의 비판적 이성이 지닌 힘에 의하여 그 실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거의 믿어질 수 없는 그리스 합리주의의 낙관론이다: 르네상스 합리주의의 ㅡ 유럽 합리주의의 ㅡ 낙관론. 호메로스는, 아마도 다소 반어법을 이용하지만, 여전히 아홉 명의 뮤즈 여신들의 권위에 의지했다. 뮤즈 여신들은 그의 원천이자 그의 지식에 관한 신적(神的: divine) 원천이다. 유사하게 유대인들과, 중세기에는 아랍인들 및 기독교도들이 자신들이 지닌 지식의 근원으로서 하느님이 내리는 계시라는 권위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은 아마도 탈레스와 동시에 시작하여 논증했다. 그들은, 비판적 논증의 그리하여 이성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이성이, 숨겨진 실재에 대한 비밀들을 밝힐 수 있는 것으로서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인식론적 낙관론’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이 낙관론적 태도는 유럽에서 거의 예외적으로 존재했다고 나는 믿는다: 2세기나 3세기 동안 그리스 문명에서 그리고 3세기나 4세기 동안 유럽 및 미국의 르네상스에서.
산업화, 과학 그리고 자유라는 나의 세 가지 주제에 대응하여 나는 이제 나의 세 가지 주요 논지들을 언명할 수 있다. 한 문장으로 요약되어 그 논지들은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유럽의 산업화, 유럽의 과학 그리고 유럽의 자유라는 이념, 다시 말해서, 내가 목록화한 유럽 문명의 저 특징적이고 근본적인 양상들 모두는 내가 ‘인식론적 낙관론’으로 지칭한 것의 산물이다.
이제 나는, 나의 세 가지 주요 주제들 각각에 대한 이 논지를 증명하려고 시도하겠다.
V
유럽이나 서양 문명의 현저한 특징을 이해하려고 내가 노력할 때, 한 가지 특징이 나의 생각에 떠오른다. 유럽 문명은 산업적 문명이다. 그 문명은 산업화에 크게 근거한다. 그 문명은, 근육이 아닌 엔진들인 에너지원들을 이용한다. 이 문명에서 유럽 문명과 미국 문명은 다른 모든 거대한 문명들과 근본적으로 다른데 그 거대한 문명들은 주로 농업적이거나 농업적이었고 그 산업은 육체노동에 의존했다.
다른 문명들 모두로부터 우리 문명을 그렇게 분명하게 구분하는 다른 특징은 없다고 ㅡ 아마도 유럽의 과학을 제외하고 ㅡ 나는 생각한다. 문학, 예술, 종교, 철학 그리고 심지어 초보적 자연과학이 다른 문명들 모두 예를 들어 인도와 중국의 저 문명에서 자체의 역할을 실행한다. 그러나 대규모 중공업은, 산업의 형태로서 그리고 정말로 생활 방식으로서 독자적인 듯하다. 유럽과, 그 중공업을 유럽으로부터 이어받은 세계의 저 지역들에서만 우리는 그런 중공업을 발견한다.
산업주의처럼, 과학 성장은 유럽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거의 동시에 발전했기 때문에, 산업이 과학 발전의 산물인지 혹은 (마르크시즘이 말할 바와 같이) 과학이 산업화의 산물인지라는 질문이 출현한다.
이 두 가지 해석들 모두가 참이 아니라고, 그리고 과학과 산업 모두가 내가 ‘인식론적 낙관론’으로 지칭한 저 철학의 산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르네상스 이래 항상 산업 발전과 과학 발전이 밀접하게 연결되었고 밀접하게 상호작용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각각은 서로에게 빚을 졌다. 그러나 이 상호작용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우리가 묻는다면 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바로 처음부터 이 상호작용은 일어나게 되어있는데 이유인즉, 그 상호작용이 새로운 철학적이거나 종교적 이념에서 ㅡ 철학자들, 즉 지식이 있는 자들이 또한 권력을 휘둘러야 한다는 플라톤적 이념의 기이한 새로운 변종 ㅡ 유래했기 때문이다. 저 이론의 기이한 새로운 변종은, 지식은 힘이라는 ㅡ 자연을 지배하는 힘 ㅡ 격언으로 표현된다.
르네상스 이래 발생한 산업발전과 과학발전 모두는 이 철학적 이념의 ㅡ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이념 ㅡ 실현이라는 것이 나의 논지이다.
자연에 대한 지배라는 이념은, 인식론적 낙관론의 신플라톤주의적(Neo-Platonist) 설명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우리는 그 이념을 신플라톤주의자인 레오나르도(Leonardo)에게서 발견하고, 우리는 그 이념을 베이컨에게서 다소 과시적인 형태로 발견한다. 베이컨은 훌륭한 철학자가 아니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는 몽상가였고 새로운 산업 사회 및 과학 사회에 대한 예언자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는 세속화된 새로운 신앙을 창시했고 사회혁명 및 과학혁명의 창조자가 되었다.
VI
세부사항으로 들어가기 전에, 인식론적 낙관론에 대한 이 특정 해석에 관한 나 자신의 견해를 나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싶다.
나 자신은 합리주의자이다, 그리고 인식론적 낙관론자이다. 그러나 나는, 베이컨이 설립자인 저 막강한 합리주의적 신앙에 대한 친구가 아니다. 이 신앙에 대한 나의 반대론은 순전히 철학적이다. 그래서 이 신앙은 현재의 잔존물과 ㅡ 핵폭탄에 대한 지식적 흐지부지 (또는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성장으로 생기는 바람직하지 못하고 의도되지 않은 다른 결과들과) ㅡ 전혀 관계가 없음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자연의 지배라는 신앙이자 지식은 힘이라는 이념에 대한 나의 반대론은, 아주 간단하게, 지식은 힘보다 훨씬 나은 것이라는 점이다. ‘지식은 힘이다’(‘nam et ipsa scientia potestas est)’라는 베이컨의 공식은 지식을 광고하려는 시도였다. 그 공식은 힘이란 항상 좋은 것임을 당연시하고, 지식을 얻기 위해 필요한 불쾌한 노력을 실천한다면 여러분은 힘을 통하여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액튼 경(Lord Acton)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가 옳았다고 나는 믿는다: ‘권력에는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물론 나는, 권력이 길들어질 수 있다는 것인 권력이 때때로 매우 좋은 일들에 ㅡ 예를 들어, 훌륭한 외과의의 손에서 ㅡ 사용될 것임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심지어 외과의들도 환자들이 그들의 권력을 느끼도록 만들려는 유혹에 드물지 않게 굴복하는 것을 나는 염려한다.
칸트는 예전에, 진실성과 정직성이 최고의 행동지침이라는 격언에 관하여 두드러지게 비평했다. 이것은 의심스럽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진실성이 다른 행동지침보다 낫다는 것을 자신은 의심하지 않는다고 부언했다. 지식이 모든 권력보다 낫다는 나의 언급은, 칸트의 이 언급의 변종일 따름이다. 과학자에게는 권력이 아니라 진리만 중요하다. 권력에 신경 쓰는 사람은 정치가이다.
자연에 대한 지배라는 이념은 아마도 본질적으로 중립적이다. 그 이념이 우리의 동료 인간들을 돕는 경우인 의학적 진보의 경우나 굶주림과 참혹함에 대한 싸움의 경우일 때, 나는 물론 자연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서 나오는 권력을 환영한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지배라는 이념에는 또 다른 요소가 ㅡ 권력에 대한 의지와 같은 것으로 지배하려는 의지 ㅡ 흔히 포함되어 나는 우려한다. 그리고 지배하는 이념에 나는 호의적으로 적응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이념은 신성모독이자 오만이다. 사람은 신(神)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결코 자연을 지배할 수 없다. 산속에서 자신이 정복해야 하는 적수들만 보는 ㅡ 감사의 감정과 자연에 직면하여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이라는 느낌을 알지 못하는 ㅡ 등산가는,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권력은 유혹이며, 심지어 자연을 지배하는 권력이나 위세도 항상 유혹이다. 초모룽마(Chomo Lungma) ㅡ 에베레스트 ㅡ 정상에서 셰르파 텐징(Tenzing)이 느꼈던 것은 나은 것이었다: ‘초모룽마여, 나는 감사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베이컨에게로 돌아가자. 합리적 혹은 비판적 관점에서 베이컨은 훌륭한 과학철학자가 아니었다. 그의 글은 개괄적이고 과장적이며, 모순적이고 경박하며 미숙하다. 그리고 귀납에 대한 그의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는 이론은, 그가 전개한 한 (이유인즉, 그 이론의 대부분이 계획으로만 남았고 그 후 계속해서 계획으로만 남았기 때문에) 과학의 실제적인 과정과 관계가 없다. (이것을 매우 강조하여 지적한 사람은 훌륭한 화학자인 유스투스 리비히[Justus Liebig]였다.) 베이컨은, 코페르니쿠스의 혹은 길버트(Gilbert)의 혹은 그의 동시대인인 갈릴레오 및 케플러의 이론적 접근방식을 이해한 적이 없다. 또한 그는 과학과 관련한 수학적 개념들의 중요성을 이해한 적이 없다. 그러나 현대 철학자 누구도 베이컨의 영향력과 경쟁할 수 없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많은 과학자들은 여전히 그를 자신들의 정신적인 아버지로 간주한다.
VII
이로 인하여 나는, 내가 베이컨의 역사관련 문제라고 칭하는 문제에 다다른다: 어떻게 우리는, 이 논리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전혀 중요하지 않은 철학자의 거대한 영향력을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간략하게 암시했다. 내가 언급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베이컨은 현대 과학의 정신적 아버지이다. 그의 과학철학과 그의 귀납론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합리주의적 교회의 ㅡ 일종의 반(反)-교회 ㅡ 설립자나 예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암반 위가 아니라 과학 및 산업 사회라는 ㅡ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에 근거한 사회 ㅡ 상상과 약속 위에 건설되었다. 베이컨의 약속은, 지식을 통한 인간 해방이라는 약속이다.
그의 이상향인 뉴 아틀란티스(The New Atlantis)에서 베이컨은 그런 사회를 묘사했다. 저 사회를 다스리는 집단은, 자신이 ‘솔로몬의 집’으로 부른 기술관료적 연구소이었다.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The New Atlantis)가, 현대 ‘거대과학(Big Science)’의 확실하지만 너무나 즐거운 면모들에 선행할 뿐만 아니라 훌륭한 과학자가 얻을 권력과 영예와 재산의 무제한적인 꿈들에서 그 면모들을 초월한다는 것을 주목하면 흥미롭다. ‘살로몬 가의 시조들(Fathers of Salomon's House)에 대한 한 가지 기술 중 교황의 과시 이상의 기술을 ㅡ 즉, 연구 지도자들에 대한 기술 ㅡ 고려하라:
그날이 오자, 그가 들어왔다. 그의 키는 중간 정도고 나이는 중년이었으며
매력적이었으며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모습을 지녔다. 그는 멋진 검은 천의
의복을 입었는데 소매가 넓고 망토가 있었다.... 그의 장갑은 보석으로...
치장되었다; 그리고 구두는 복숭아색의 벨벳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바퀴가 없는 풍요로운 가마를 탔는데 들것 모양이었다; 양쪽에 말 두
마리가 끌었는데 수놓은 푸른 벨벳으로 풍요롭게 묶여있었다; 그리고 같은
복장을 입은 두 명의 하인이 양편에 있었다. 가마는 히말라야 삼목으로
만들어졌고, 금박이 입히고 수정으로 장식되었다; 앞쪽 가로 목은
사파이어로 되어 가장자리는 금으로 장식되고 뒤쪽은 여러 색깔의
에메랄드 같았다. 금으로 된 태양도 있었는데 위와 중간에서 빛났다;
그리고 앞쪽 위에는 금으로 된 아기천사가 날개를 폈다. 가마는 푸른색
금실로 짠 천으로 뒤덮였다. 그의 앞에는 50명의 시종이 있었는데 모두
젊은이들로 다리 중간까지 내려오는 헐거운 흰색 공단 옷을 입었다;
흰색 비단 스타킹과 푸른 벨벳 구두를 신었다; 모자는 푸른 벨벳이었는데
다양한 색깔의 깃털로 장식되어 모자 띠처럼 꽂혔다. 가마 앞 다음 열에는
두 사람이 모자를 쓰지 않고 발까지 내려오는 린넨 옷을 입었는데
허리띠를 두르고 푸른 벨벳 구두를 신었다; 한 명은 주교지팡이를 들고
나머지 한 명은 목동 막대기 같은 것을 들었다; 그것들은 금속이
아니었지만 주교지팡이는 balm-wood였고 목동 막대기는 히말라야
삼목이었다. 가마의 앞이나 뒤에 마부는 없었다: 요동과 소란을
피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의 가마 뒤에는, 도시 단체들의 관료들과
우두머리들이 따랐다. 그는 일종의 푸른색 비단 방석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발아래는 다양한 색깔의 기묘한 비단 양탄자가 깔렸는데 페르시아
제품 같았지만 훨씬 더 우아했다. 그는 지나가면서 맨손을 들었는데
침묵을 지키면서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에 있는 덜 의문스러운 다음 구절은 여기서 흥미로울 것이다:
또한 우리의 희망들은, 지금까지 실행된 실험들 중 몇 가지가 그런 것들에 대하여 아무도 이전에 관점을 가지지 않았다는 그런 종류라는 사실에
의하여 고양된다; 더 정확하게 그 희망들은 불가능한 것들로서 경멸스럽게
제외되었을 터이다.
화력무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 무기들의 효과를 기술하여 어떤 발명품이
만들어졌는데 그 발명품을 사용하여 심지어 가장 큰 성벽들과 성채들도
원거리 공격으로부터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을 터이라고 말했다면
사람들은 전적으로 합당하게 현존하는 기계들 및 장치들의 힘을 이용하는
다양한 방식들과 어떻게 우리가 무게를 늘리고 바퀴들을 더 달아서
그것들을 강화하거나 타격의 숫자를 늘릴지에 관하여 아마도 숙고했을
터이다; 그러나 아무도, 별안간 그리고 격렬하게 확대하여 폭발하는 화공을
꿈꾸지 않았을 터이다; 우리는 반대로 그런 것을 완전히 폐기했을 터인데 왜냐하면 아무도 그것에 대한 사례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베이컨은 나아가 유사한 표현방식으로 비단의 발견과 선원용 나침반을 토론하는데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발견된 것과 닮았거나 유사하지 않지만, 반대로
상상력의 모든 통로로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탁월하고 유용한 많은 것을 자연은 여전히 무릎에 가지고
있다는 많은 희망이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앞선 발명품들과 동시에
발생한 바와 꼭 마찬가지로, 세기의 간접적인 과정에서 그것은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어지는 방법의 도움을 받아서 이것들은
훨씬 더 확실하고 빠르게 발견될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것들은 아마도
즉각적으로 설명되어 기대될 것이다.
신기관(Novum Organum)에서 나온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베이컨의 약속의 특징이다: 나의 새로운 길, 나의 새로운 방식을 따르라 그러면 여러분은 지식과 권력을 빠르게 얻을 것이다. 정말로 베이컨은, 우주에 대하여 중요한 정보 모두를 포함하는 백과사전이 곧 완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2-3년만 주어지면 자신은 자연에 대한 전체 서적을 통독할 수 있었어 새로운 과학의 과업을 완성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베이컨이 틀렸다는 것은 ㅡ 과업의 규모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새로운 방법에 관해서도 ㅡ 말할 필요도 없다. 그가 제시하고 있던 방법은, 길버트(Gilbert)의 또는 갈릴레오의 혹은 케플러의 새로운 과학의 방법과 또는 보일(Boyle)의 그리고 뉴튼의 나중 발견과 전혀 무관하다.
그러나 과학적 미래에 대한 베이컨의 약속은 탁월하고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영국 과학과 영국 산업혁명에 ㅡ 먼저 유럽으로 그리고 나중에 미국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서 세계를 베이컨적 이상향으로 정말로 변모시킨 산업혁명 ㅡ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영국 왕립협회(the Royal Society)와 나중에 영국 과학진흥협회(the 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는 (그리고 훨씬 뒤에 미국 협회[the American Association]), 협동적이고 조직된 연구라는 베이컨의 이념을 이룩하려는 의도적 시도들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1663년 영국 왕립협회(the Royal Society)의 두 번째 헌장에서 유래하는 구절을 인용하면 흥미로운데 그 구절은 아직도 효력을 유지한다. 그 구절에는, 회원들의 연구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영광에 따라서 그리고 인류의 이익에 따라서 실험의 권위에 의하여 자연물들에 대한 그리고 유용한 기술들에 [즉, 산업기술] 대한 과학들’을 촉진해야 한다고 적혀있다. 이 구절의 결론은 베이컨의 학문의 진보(The Advancement of Learning)에서 거의 원문 그대로 가져왔다.
그리하여 이 실용적-기술적 태도는 시작부터 인도주의적 목표들과 결합되었다: 일반적인 복지의 증대와 결핍 및 가난에 대한 싸움. 영국과 유럽의 산업혁명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혁명이었는데 베이컨이 예언자 노릇을 했다. 그 혁명은, 지식과 연구를 통하여 당시까지 너무 느린 기술의 진보를 가속화하려는 관념에 의하여 고취되었다. 그 혁명은 지식을 통한 물질적인 자기-해방이라는 이념이었다.
VIII
그러나 우리는 중요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터이다. 지식은 힘이라는 이념인 응용지식이라는 이념은 이미 중세기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나? 철학자의 돌(the Philosopher's Stone)에 대한 탐색인 권력욕과 연금술에 부합하는 점성술이 있지 않았나?
그 반론은 중요하고, 우리가 인식론적 낙관론을 영향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서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이유인즉 저 독특한 낙관론이 중세 연금술사들과 점성술사들에게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기에 고대에 한번 알려졌지만 나중에 잊힌 비법을 탐색했다. 그들은 오래된 양피지들에서 지혜에 대한 열쇠를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지혜라는 잊힌 보물들을 사냥하는 데서 옳았을 것이다. 그들 그렇게 열성적으로 추구하고 있던 것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고대 로마와 아우구스티누스 황제의 평화이거나 혹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비판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철학의 대담성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이것이 어떠하든, 베이컨은 (그리고 르네상스) 이 요점에 관하여 다르게 느꼈다. 베이컨은 ‘자연의 마술’을 신뢰한 연금술사이자 ‘마법사(magus)’였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이 새로운 지혜에 대한 열쇠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ㅡ 이것이 결정적이다. 베이컨의 낙관론을 구분 짓는 것은 이 새로운 자심감이다 ㅡ 고대인들의 비밀스런 지혜에 소개될 필요 없이 자연의 신비들을 밝힐 능력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그의 경우에, 전혀 정당화되지 않은 자신감. 이 능력은 신적(神的: divine) 계시와 독립적이고 고대 현자들의 비밀 글에서 신비한 것들의 노출과 독립적이다. 그리하여 베이컨의 약속은, 기획과 자신감을 격려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 약속은 지식 탐색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그래서 신적(神的: divine) 계시 및 고대 전통으로부터 독립적이 되라고 격려한다.
IX
베이컨 자신은 (그리고 그와 함께 많은 르네상스 현자들) 두 가지 세계에 속했다: 그는, 어떤 잃어버린 비밀에 대한 권위적인 신앙과 결합된 옛 신비주의 및 마술 언어의 세계인 (네오-플라톤적) 고대인들의 지혜(Wisdom of the Ancients)에 속했다. 동시에 그는, 우리의 지혜를 증대시켜 그리하여 우리의 능력을 추가적으로 증대시키는 우리 자신의 반(反)-권위적인 확신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속했다. 이로 인하여 베이컨의 예언자적 전언(傳言: message)은, 새로운 종교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계몽사조의 새로운 전언으로 성장하기에 적당했다. 유럽 계몽사조의 이 전언은 아마도 다소 모호한 공식으로 요약될 것이다: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ㅡ 하느님에 의하여 우리에게 부과된 책임에 대한 서술로서 그리고 때때 세속적이고 부성이 없어진(父性이 없어진: fatherless) 자기-해방이자 자기-독립에 대한 선언문으로서 때때로 아주 진지하게 고찰된 공식.
기독교는 아마도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더 많이 신도들에게, 다가올 삶을 기대하라고,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희생하라고 항상 가르쳤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유럽의 ‘미래상에 대한 정신병(the futurity neurosis)’으로 아마도 지칭될 생활 태도의 초석을 놓았다. 그것은 항상, 현재에서보다 미래에 더 많이 사는 방식이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자 미래에 대한 기획과 다가올 나은 삶에 대한 투자로 중독된 방식이다. 인식론적 낙관론은, 독립심이라는 자체의 고유한 관념과 ㅡ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ㅡ 함께 기독교를 세속화하여, 기독교의 미래상에 대한 정신병을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통한 그리고 미래의 새로운 지식에 참여함을 통한 ㅡ 새로운 지식의 성장 ㅡ 자기-해방이라는 이념으로 변모시켰고 동시에 새로운 권력과 새로운 재산획득을 통한 자기-해방이라는 유관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이념으로 변모시켰다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이상향처럼, 베이컨의 이상향은 천국을 지구상에 내리려는 시도였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향이 독립심을 통한 권력과 재산증대를 약속하고 새로운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을 약속하는 한, 그 이상향은 아마도 자체의 약속을 지킨 (지금까지) 하나의 이상향이다. 정말로 그 이상향은 그 약속을 거의 믿을 수 없는 정도까지 지켰다.
X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아마도 나의 프로그램을 상기시킬 것인데 그 프로그램은, 유럽 역사의 세 가지 특징적인 세력들의 발전에서 철학적 관념들에 의하여 그리고 더 정확하게 인식론적 낙관론에 의하여 실행된 결정적인 부분을 개괄하는 것이었다:
1 우리의 산업 문명;
2 우리의 과학과 그 과학의 영향; 그리고
3 개인적 자유라는 우리의 이념.
이제 나는 저 세 가지 요점 중에서 첫 번째 요점에서 떠나겠다 ㅡ 내가 그 요점을 망라했기 때문이 (그것은 내가 한 강좌에서 망라할 수 있을 주제가 아니다) 아니라 단지 내가 나의 두 번째 요점인 현대 과학의 진화로 옮겨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내가 지적한 바와 같이, 과학과 산업 및 기술의 진화는 상호작용을 했고 서로를 풍요롭게 했다. 이제 나는, 이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중요한 비대칭이 드러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현대 과학 없이 현대의 산업발전이 생각될 수 없게 된 반면,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과학은 주로 자주적이다. 산업의 필요성이 자체의 발전에 자극이었고 어떤 자극도 환영 받고 유용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과학자가 다른 무엇보다도 더 많이 원하는 것은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자가, 다룰 흥미로운 문제들과 그 문제들을 다룰 수단을 자신에게 제공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감사할지라도 과학자가 원하는 것은 지식이고 우리의 지식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XI
르네상스의 과학은, 이오니아인들과 피타고라스학파 및 플라톤주의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그리고 원자론자들과 기하학자들의 그리스 우주론에 대한 직접적인 연속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방법은, 그들의 이 선배들이 실행한 비판적이고 합리적이며 가설적인 방법이다. 가설들은 창안되어 비판된다. 비판의 영향을 받아서 가설들은 수정된다. 수정되어도 만족스럽지 못하면 가설들은 폐기되고 새로운 가설들이 개진된다. 한 가지 전형적인 사례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우주론이 수정되고 부수적 가설이 붙어 주전원(周轉圓: epicycles)이 된 것이다. 그것들이 너무 번거롭게 되자, 코페르니쿠스가 아리스타쿠스(Aristarchus)의 지동설 우주론을 재발견했다. 지동설 가설 또한 중대한 난제를 초래했다. 그러나 그 난제들은 케플러와 뉴튼에 의하여 의기양양하게 풀렸다. 그리하여 과학의 방법은, 대담하게 잠정적 가설들을 개진하여 그 가설들을 비판적 시험에 부치는 것으로 구성된다. 아인슈타인 이래 우리는, 과학의 방법이 결코 확실성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유인즉 뉴튼이 옳든 아인슈타인이 옳든, 우리가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적어도 한 가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뉴튼의 이론이 우리의 태양계 안에서 그리고 심지어 태양계를 넘어서 거의 모든 천문학적 현상들을 가장 정밀하게 예측하여 거둔 믿을 수 없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은 가설과 추측일 따름이고 아마도 허위 이론이라는 것.
그리하여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우리는, 과학이 확실한 지식이라기보다는 가설들이나 추측들만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가설들을 탐구하는 겸손한 프로그램으로 인하여 과학자들은 아마도 고무되지 않았을 터이다: 그 프로그램으로 인하여 과학이라는 기획이 아마도 시작되지 않았을 터이다. 사람들이 소망했고 추구한 것은 지식이었다 ㅡ 확실하고 의심될 수 없는 지식. 그러나 확실한 지식을 탐색하는 동안, 과학자들은 말하자면 가설적이고 추측성이며 비판적인 방법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유인즉 확실하든 아니든 지식은 비판을 견디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지식이 견디어내지 못한다면, 폐기되어야 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합리적 비판이라는 훈련에 몰두하는 동안 새로운 추측들을 시험하는 데 그리고 자신들의 상상력을 극도로 사용하는 데 익숙해지는 일이 발생했다.
오늘날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이라는 관념을 포기했을지라도, 우리는 진리 탐구라는 이념을 전혀 포기하지 않았다. 반대로, 우리의 지식이 확실하지 않다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의 추측들이 참인지를 우리가 결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어떤 가설이 참이 아니라는 것이나 적어도 그 가설이 경쟁하는 가설들보다 진리에 대한 나은 근사치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할 때, 우리는 그 가설을 폐기할 것이다. 가설들은 결코 검증될 수 없지만 오류로 판정될 수 있다. 가설들은 비판되고 시험될 수 있다.
이 비판적 방법을 고취하는 것은 참된 이론들에 대한 탐구이다. 진리라는 규제적 이념이 없다면, 비판은 무의미할 터이다.
길버트(Gilbert)와 갈릴레오, 토리첼리(Torricelli)와 보일(Boyle)의 실험적 방법은 이론들을 시험하는 방법들이다: 이론이 실험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그 이론은 오류로 판정되어 수정되거나 또 다른 이론에 의하여 ㅡ 다시 말해서, 시험에 더 적당하거나 적어도 동등하게 적당한 이론에 의하여 ㅡ 대체되어야 한다.
과학의 방법에 대해서 이만큼만 하자. 그 방법은 비판적이고 논증적이며 거의 회의적이다.
XII
그러나 이 방법의 훌륭한 거장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지식에서 절대적인 확실성에 도달할 가능성을 신뢰했다. 인식론적 낙관론의 근본적인 해석에 의하여 그들을 고취되었다 (베이컨이 그 해석에 의하여 고취된 바와 같이). 그 해석으로 인하여 그들은 성공에서 성공으로 이끌려갔다. 그러나 그 해석은 무비판적이어서 논리적으로 옹호될 수 없었다.
르네상스의 이 근본적이고 무비판적인 인식론적 낙관론을, 우리는 진리는 명백하다는 신념으로서 기술할 수 있다. 진리는 발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진리가 우리 앞에 밝혀지자마자, 우리가 그것을 진리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 진리를 도저히 오해할 수 없다. 그리하여 자연은 열린 책이다. 혹은 데카르트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하느님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이 이론은, 플라톤의 상기이론(theory of anamnesia)과 ㅡ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가 숨겨진 실재를 알고 있었다는 그리고 우리가 우연히 그것을 혹은 아마도 심지어 그것의 희미한 그림들을 보자마자 우리는 그것을 다시 인식한다는 이론 ㅡ 밀접하게 관련된다.
진리가 명백하다는 관념은, 가장 큰 중요성을 띤 철학적 관념이다 (혹은 아마도 심지어 종교적 관념). 그것은 낙관론적 관념이고 아름답고 희망찬 꿈이며 진정으로 고상한 이념이다. 그리고 그 관념 안에 티끌 같은 진리가 있을 것임을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틀림없이 티끌 이상이 아니다. 이유인즉 그 관념이 틀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주 간단한 것들에 대해서도, 반복적으로 우리는 진리를 우리의 손아귀에 쥐고 그 진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훨씬 더 자주 우리는, 사실상 우리가 오류들에 뒤얽혀 있는 반면, 명백한 진리를 인식했다고 확신한다.
근본적인 인식론적 낙관론자들은 ㅡ 플라톤, 베이컨, 데카르트 등등 ㅡ 물론, 우리가 때때로 오류를 진리로 오해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래서 명백한 진리라는 교설을 구조하기 위하여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오류의 발생을 설명했다.
플라톤의 오류 이론은, 우리의 탄생이 은총으로부터의 일종의 인식론적 타락이라고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는 우리 지식의 최고의 부분을 잊어버리는데 그 부분은 우리가 진리와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것이다. 유사하게 베이컨은 (그리고 데카르트) 우리의 개인적인 결점들에 의하여 오류가 설명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명백한 진리에 우리의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눈을 뜨는 대신에, 편견들에 우리가 고집스럽게 매달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류를 저지른다. 우리는 인식론적 죄인들이다: 심지어 진리가 눈앞에서 명백할 때도 진리를 감지하기를 거부하는 무감각한 죄인들. 그리하여 베이컨의 방법은, 우리의 정신으로부터 편견들의 제거를 본질로 한다.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편견 없는 정신이자 순수한 정신이며 편견이 제거된 정신이다.
이 이론으로써 나는 근본적인 인식론적 낙관론에 대한 최종적 언명에 도달했다. 그 이론은 매우 중요하다. 그 이론은 현대 과학의 주춧돌이 되었다. 그 이론으로 인하여 과학자는 진리의 사제가 되었고 진리 숭배는 일종의 신성한 예배가 되었다.
진리에 대한 이 존경은 정말로 유럽문명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중한 특징들 중 한 가지 특징이라고 그리고 그 존경은 과학에서보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더 확고하고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고 나는 믿는다. 그 존경은, 우리가 과학이라는 보물창고에서 발견하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보물이자 내가 믿기에 그 보물을 기술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멀리 초월하는 보물이다.
그러나 베이컨의 오류 이론은, 자체의 바람직한 결론들에도 불구하고, 옹호될 수 없다. 그리하여 그 이론이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들을 또한 초래했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나의 세 번째 및 마지막 요점들과 관련하여 나는 이 결과들 중 몇 가지를 토론하겠는데 요점들로 나는 이제 온다 ㅡ 자유의 발전인 유럽의 자유주의의 발전에 대한 인식론적 낙관론의 중요성 분석.
XIII
나의 두 번째 요점을 토론하면서 나는, 어느 정도로 인식론적 낙관론이 현대 과학의 발전에 책임이 있는지를 밝히려고 노력했다. 동시에 나는, 인식론적 낙관론을 토론하고 이 독특한 철학을 평가하고 비판하려고 노력했다.
이제 우리가 현대 자유주의의 발전에 눈을 돌릴 때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 자유주의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말할 계획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내가 그 자유주의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나는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진술하고 싶다. 정말로 내가 그 자유주의 많은 결점들을 잘 의식하고 있는 반면, 민주주의는 인류의 역사에서 지금까지 태어난 최고이고 가장 고귀한 사회생활의 형태라고 나는 정말로 생각한다 ㅡ E.M. 포스(Forster) 및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와 함께. 나는 예언자가 아니고 어느 날 민주주의가 파괴될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사실상 생존하든 아니든, 우리는 민주주의의 생존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제 나는, 민주주의적 사회의 진행을 유지하는 추진력은 내가 방금 개괄한 독특한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진리의 신성함이 일시적으로 편견들에 의하여 가려질 수 있을지라도, 진리는 명백하다는 과도하게 낙관론적인 믿음과 함께 진리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
이 독특한 철학은 물론 베이컨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 그 철학은 거의 모든 종교 전쟁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ㅡ 각각의 편이 다른 편을, 우매하다고, 명백한 진리를 거부한다고,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 악마가 들렸다고 간주하여.
XIV
과도한 인식론적 낙관론에는 자체에 반대하는 두 가지 매우 다른 철학이 있다: 지식의 가능성에 절망하는 비관론과, 오류를 저지른 것이 인간임을 그리고 광신주의는 통상적으로 자기 자신의 의심하는 목소리를 큰소리로 눌러버리려는 시도임을 깨닫는 비판적 낙관론. 20세기까지 비판적 낙관론자들은 드물었다. 소크라테스, 에라스무스, 존 로크, 이마누엘 칸트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이 가장 위대한 사람들에 속했다.
종교개혁에서 우리 시대까지 자유주의의 발전은, 거의 전적으로 무비판적이고 과도한 인식론적 낙관론의 영향을 받아서 이룩되었다: 명백한 진리라는 이론. 이 이론으로 인하여 자유주의는 두 갈래 길로 나아갔다. 첫 번째 길은 종교개혁에서 종교적 자유의 요구로 곧장 나아갔다. 두 번째 길은, 명백한 진리라는 이론에서 몇 가지 실망을 통하여, 진리에 반대하는 음모가 존재한다는 이론으로 나아갔다. 이유인즉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명백한 진리를 ㅡ 그렇게 분명히 보일 수 있는 저 진리 ㅡ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젊고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정신들에게 진리에 대하여 눈을 가리려고 그 정신들 속에 교활하고도 체계적으로 심어진 허위 편견들이 원인이라고 논증되었기 때문이다. 진리에 반대하는 음모자들은, 물론, 경쟁하는 교회들의 사제들이었다: 신교도들의 생각에는 가톨릭 교회였고 역순도 성립했다.
명백한 진리라는 잘못된 교설에 근거했을지라도 이 두 번째 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자유에 대한 타당하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요구로 그리고 보편적이고 세속적인 초등교육에 대한 요구로 ㅡ 문맹이라는 그리고 종교적 보호라는 암흑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은 명백한 진실을 보지 못할 수 없다는 근거로 ㅡ 이어졌다.
그리고 그 두 번째 길은 마침내, 보통선거로 이어졌다. 이유인즉 진리가 명백하다면, 사람들을 오류를 저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진리를 인식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한 것과 올바른 것을 또한 인식한다.
이 전개상황은 훌륭하고 옳다고 ㅡ 그 전개상황의 이론적 토대에 있는 주요 약점이, 과도한 인식론적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ㅡ 나는 믿는다. 그러나 16세기 및 17세기의 지독한 종교전쟁들을 초래하고 폭력적인 혁명들과 내전들의 공포를 초래한 것은 이 이론적 근거의 약점이었다. 여기 서양에서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마침내 우리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 인간이라는 소크라테스의 통찰에 다다른다, 우리는 더 이상 광신주의자들이 아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자신의 결점들과 오류들을 너무 기꺼이 인정할 따름이다. 이 통찰은 우리에게 늦게 왔을지라도 축복이다. 그러나 모든 축복들처럼, 그것은 혼합된 축복인데 이유인즉 그 축복에는 우리의 생활방식들 특히 이 교훈을 잘 배운 사람들의 저 생활방식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역사관련 개괄의 마무리에 왔고, 결론적으로 나는 한 가지 추가적인 언급만 덧붙이고 싶다: 우리가 틀릴지도 모른다는 소크라테스-에라스무스적 통찰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틀림없이 공격적인 전쟁이 금지된다. 그러나 우리의 결점들과 오류들을 우리가 의식한다고 해서 자유를 옹호하는 우리의 싸움이 금지되어서는 안 된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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