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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구조의 신화, 과학과 합리성을 옹호하여 8장 모형, 도구 그리고 신화

이윤진이카루스 2021. 9. 18. 15:01

이론구조의 신화, 과학과 합리성을 옹호하여 8장 모형, 도구 그리고 진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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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형, 도구 그리고 진리

 

                                     사회과학에서 합리성 원칙의 위상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관한 나의 견해들을 여러분에게 제시해달라는 초청을 내가 받았을 때, 나는 정말로 매우 영예롭게 느꼈다. 그러나 다음 이유들 때문에 나는 다소 불편함을 또한 느꼈다.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관한 나의 견해들은, 내가 경제 이론을 칭찬한 결과이다: 이론경제학의 방법을 일반화하려고 노력함에 의하여 약 25년 전 나는 나의 견해들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경제학자들로서 여러분이 나의 견해가 하찮음을 ㅡ 완전히 구식을 아닐지라도 ㅡ 발견할 것이라는 나의 걱정을 여러분은 이해할 것이다.

내가 이 강좌의 약 3분의 1을 일반적인 과학의 방법론에 할애하고 또 3분의 1(2절에서 7절까지) 사회과학의 방법에 고유한 문제들에 할애하고 나머지는 (8절에서 11절까지) 도구주의적 과학철학에 ㅡ 우리의 이론들은 도구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여전히 유행하는 실용주의에 관한 저 철학 이론 ㅡ 대한 공격에 할애하게 된 것은 이 걱정이었다. 이것에, 이론들이 우리의 진리탐구에서 ㅡ 혹은 보다 명시적이고 보다 겸손하게, 점점 더 깊어지는 문제들에서 (여기서 점점 더 깊어지는, 우리가 알게 될 것과 같이, ‘진리에 점점 가까워지는을 의미한다) 대한 점점 나아지는 해결책들을 우리가 탐구하는 데서 ㅡ 단계들인 나의 견해들을 나는 대조시키겠다.

 

 

1963226일 하버드 대학 경제학부에서 행한 강좌에 근거함. 강좌는 끝난 다음에 수정되었고 새로운 두 가지 절이 (12 13) 1963년 및 1964년에 추가되었다. 이 논문의 발췌문이 프랑스어로 E.M. Claassen 편집, 경제체제의 철학적 토대: 자크 뤼프의 원문과 그를 기리는 요약 논문들(Les Fondements philosophiques de systèmes économiques: Textes de Jacques Rueff et essais rédigés en son honneur)에서 합리성과 합리성 원칙의 위상(La rationalité et le statut du principe de rationalité)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논문은, 특정 사소한 수정사항과 주석들의 추가 및 주석들에 표시된 바와 같은 몇 가지 다른 추가사항들과 별도로, 변경되지 않았다.

 

 

1. 문제, 이론 그리고 비판

 

내가 개괄할 예정인 사회과학들의 방법들에 관한 견해들은 간략하게 이렇다. 사회과학들에 합당한 방법들은, 자연과학들이 교과서들에 의하여 전통에 의하여 그리고 자연과학자들 및 사회과학자들 다수에 의하여 통상적으로 기술되는 바와 같이 자연과학들의 방법들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이 교과서들과 이 전통들 및 이 과학자들 모두가 자연과학들이 방법들에 관하여 철저히 틀렸다는 이유로만, 그렇다. 자연과학들의 방법들에 대하여 우리가 합당한 이해를 하자마자, 자연과학들의 방법들과 사회과학들의 방법들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자연과학들에 대한 주요 이해하기는, 과학은 ㅡ 혹은 과학자는 ㅡ 관찰과 자료들이나 사실들이나 측정사항들의 수집으로부터 시작하여 거기서 이것들을 연결하거나 상호 관련짓는 데로 나아가서 ㅡ 어떤 방식으로 ㅡ 일반화와 이론들에 도달한다는 믿음에 놓여 있다.

한 유명한 과학자가 이 견해를 제시한 어떤 모임에서 내가 의장이던 때를 나는 기억한다. 과학은 측정하여 결과들을 상호 관련짓는 것일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대영박물관에 있는 저서들의 길이와 폭과 두께 및 무게를 측정하는 계획에 대한 허락을 우리가 요구해야 한다고 ㅡ 이 측정들 사이의 가능한 상호관계들을 연구하기 위하여 ㅡ 나는 제안했다. 처음 세 번의 측정들이나 네 번의 측정의 산물 사이에서 우리는 틀림없이 강력한 긍정적 상호 관련 사항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예측했다.

이 계획은 왜 터무니없는가? 왜냐하면 흥미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계획이, 과학적 문제로부터라기보다는 자료 수집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획이 당시의 더 시급한 문제들을 조명할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연구는 자료 수집과 동시에 시작되지 않고 유망한 문제를 ㅡ 현재 문제 상황 안에서 중요한 문제인데 그 문제는 우리의 이론에 의하여 전적으로 지배들 받는다 ㅡ 민감하게 선택함으로써 시작된다.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의 방법들도, 과학은 항상 문제로 시작해서 문제로 끝난다는 것을 우리가 수용한다면, 최고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과학의 진보는 본질적으로 자체가 지닌 문제들의 진보에 놓여있다. 그리고 그 진보는, 과학적 문제의 증가하는 세련됨과 풍요로움과 비옥도 및 깊이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다.

과학적 문제들 앞에는 물론 과학 이전의 문제들이 그리고 특히 실용적인 문제들이 선행한다. 심지어 아메바에게도 문제들이 있다고 우리가 전제하면 안전할 것이다. 이유인즉 모든 생명체에게는 내장된 기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들은, 아주 특징적으로, 이 기대 중 몇 가지가 좌절되었을 때 나타난다.

우리가 문제들로써 시작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사전 지식이 ㅡ 예를 들어, 기대들의 형태로 ㅡ 모두 없는데 어떻게 혹시 문제들이 있을 수 있는지 여러분은 물을 것이다. 이 질문은 유관성이 아주 높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것도 없이, 말하자면, 순전히 결백한 생각으로써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는 적이 없다는 것이 나의 답변이다. 지식 성장의 본질은 항상 앞의 지식을 수정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과학은, 과학 이전 지식인 과학 이전의 신화들(myths)과 과학 이전의 기대들(expectations)로써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들 자체에는 시작들(beginnings)’이 없다. 그것들은 생명체가 시작될 때 시작된다’. 그리고 심지어 생명체의 시작에도 문제들이 ㅡ 생존에 관한 문제들 ㅡ 있다. 그리하여 지식이 결백한 정신에, 혹은 백지상태나 빈 칠판에 최초로 새겨진 적은 없다. 어떤 종류의 앞선 지식인 어떤 종류의 기대가 없으면 새로운 지식이 없을 뿐이고, 그런 앞선 지식이나 기대를 토대로 새로운 지식은 수정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수정된 지식들은, 특히 앞선 지식이 문제에 부딪힐 때 ㅡ 예를 들어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 기대가 문제를 야기했을 때 ㅡ 발생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특정 지식의 항목과 특히 과학 이론을 이런저런 문제에 대한 잠정적 해결책으로서 그리고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하는 것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이론들의 비옥도와 깊이는, 그 이론들이 야기하는 새로운 문제들의 비옥도와 깊이에 의하여 측정될 개연성이 높다.

모든 문제가 어떤 종류의 지식으로부터 출현하고 그리하여 그 문제에는 지식이 전제된다는 것을 내가 인정했기 때문에, 과학은 문제로 시작하여 문제로 끝난다는 나의 언급이 과학은 지식으로 시작하여 지식으로 끝난다는 언급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을 터인지 여러분을 물을 것이다. 나의 답변은, ‘그렇다 ㅡ 지식에 의하여 여러분이, 문제없고 정해진 지식이라기보다는 문제 있고 가설적이거나 잠정적인 지식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면 (내가 그러한 바와 같이) ㅡ 이다.’ 정해진 지식은 성장하지 않는다. 나 자신은, 과학이 이론으로 시작하여 이론으로 끝난다고 흔히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론이라는 용어를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했는데, 그 용어가 신화들(myths) 및 모든 종류의 기대들과 추측들을 포함하는 의미에서이다. 나는 그 용어를, 정해졌거나 증명되었거나 입증된 이론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적이 없는데 이유인즉 그런 이론이 존재한다고 내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론은 항상 가설적이거나 추측성으로 남는다. 이론은 항상 추측으로 남는다. 그리고 문제로 시달리지 않은 이론은 없다.

그러나 과학이 문제들로 시작해서 문제들로 끝난다는 언급은 아마도, 과학은 이론들로 시작해서 이론들로 끝난다는 언급보다 조금 더 정보성이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을 알기 위하여 어떤 이론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잠시 고려하자.

어떤 이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이론을, 특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이것은 중요한 명제이고, 극소수의 사람이 이해하는 명제이다. 이론에서 해결하려는 의도가 있는 문제는 실용적인 문제거나 (소아마비나 인플레이션에 대한 치료제나 예방책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이론적 문제일 ㅡ 다시 말해서, 설명의 문제 (어떻게 소아마비가 유전되는지 혹은 어떻게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지와 같은) ㅡ 것이다.

가령 뉴튼 이론의 요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케플러 법칙들과 동시에 갈릴레오 법칙들을 도출하고 그리하여 저 정도까지 설명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나는 여기서, 왜 뉴튼 자신이 자신의 이론을 설명적으로서 간주하지 않았는지의 문제를 검토하지 않겠다.) 이론을 초래한 문제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론은 무의미하다 ㅡ 즉, 이론은 합당하게 이해될 수 없다. 유사하게, 신고전(neo-classical) 경제학과 관련한 경기위축과 실업에 의하여 제기된 문제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케인즈의 이론을 틀림없이 무의미하게 보이고 완벽하게 이해될 수 없다. 케인즈의 이론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로서 이해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것으로부터 여러분은, 적어도 과학 이해하기의 ㅡ 즉, 과학 이론들을 이해하기 ㅡ 관점에서 문제들은 이론들에 앞선다. 이것이, 과학은 문제로 시작하여 문제로 끝난다고 말함에 의하여 내가 여러분에게 상당한 힘과 적용가능성을 지닌 단순한 공식을 제공하고 있다고 내가 믿는 이유들 중 한 가지 이유이다.

물론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틀림없이 질문한다: 문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젊은 과학자가 문제로써 시작해야 한다면. 그는 어떻게 문제를 이해하는 입장에 놓일 수 있는가? 그리하여 어떻게 그는 문제로써 시작할 수 있는가?

나의 답변은,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를 이해하는 것을 배우는 한 가지 방법만 실제로 있다는 것이다 ㅡ 그리고 그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동시에 실패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들릴 것이다. 이유인즉 우리가 심지어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를 어떻게 우리가 해결하려고 시도할 수 있는가? 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문제를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틀림없이 ㅡ 혹은 거의 틀림없이 ㅡ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패가 확실하다고 해서 우리에게 시도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전거 타기를 배우거나 바이올린 연주를 배우는 것과 같은 실용적인 문제를 사례로 들라. 아마도 몇몇 귀재들을 예외적으로 하고, 아직 자전거 타기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하기 쉽다.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라는 문제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몇 번 실패한 후에 그들은 난제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문제 이해하기는 이 특정 난제가 어떤 것인지를 인식하는 것일 따름이다.

실용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이론적 문제들이 생겨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 타기라는 실용적인 문제로 인하여, 어떻게 그리고 왜 타는 사람이 균형을 유지하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적인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악기를 만드는 실용적인 문제로 인하여, 음향학 이론이 전개될 것이다. 이제 모든 그런 이론에서 새로운 문제들이 반복적으로 출현할 것이다. 이것들은 아마도, 우리가 몇 가지 이유들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발견하는 설명들처럼 내부적 난제들이거나 이론과 사실들 사이의 충돌일 것이다. 이론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우리의 시도들이 초래하는 결과로서 진화한다.

대부분의 이론적 문제들이, 이론으로 인하여 우리가 좌절하여 그 이론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수정이 필요한 경우들로부터 출현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처음에 새로운 이론을 이해하지못하는 정확한 이유이다: 우리의 이론은 (, 우리가 중요한 것을 알고 있는 이론인 옛 이론) 불충분하고 우리는 그 이론에서 무엇이 틀렸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론을 조절하거나 수정하거나 아니면 그 이론을 또 다른 이론에 의하여 대체하려고 시도함에 의하여 점점 더 문제 이해하기를 잘 배울 수 있다. 우리 앞에 높인 문제를 우리가 이해하지못한다면, 분명히 이 시도들은 성공하지 못하기 쉽다. 그러나 나의 논지는, 우리 자신의 시도들을 ㅡ 우리의 실패들 ㅡ 비판함에 의하여 우리의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점점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문제의 난점들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배운다. 실용적이고 과학 이전의 문제들에 관해서와 같이, 우리의 실수인 우리의 실패들로부터 정보교환(feedback) 방법과 같은 것에 의하여 우리는 배운다.

과학의 방법에 대한 나의 견해는 매우 간략하게, 우리의 오류들로부터 배우는 과학 이전의 방법을 나의 견해가 체계화한다는 것이다. 비판적 토론으로 지칭되는 장치에 의하여 나의 견해는 그렇게 한다.

과학적 방법에 대한 나의 견해 전체는, 그 견해가 이 네 단계로 구성된다고 말함에 의하여 요약될 것이다.

 

1 우리는 어떤 문제를 선택한다 ㅡ 아마도 그 문제를 우연히 발견함에

의하여.

2 어떤 이론을 잠정적 해결책으로 제안함에 의하여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3 우리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 토론을 통하여 우리의 지식은 성장하는데

우리의 오류 중 몇 가지를 제거함에 의해서이고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문제들과 우리의 이론들 및 새로운 해결책들에 대한 필요성을 이해하는

것을 우리가 배운다.

4 심지어 우리의 최고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토론해도 항상 새로운

문제들이 드러난다.

 

또는 이 네 단계를 네 단어로 표현하면: 문제들 ㅡ 이론들 ㅡ 비판들 ㅡ 새로운 문제들이다.

이 네 가지 매우 중요한 범주 중에서 과학에 매우 특징적인 것은 비판을 통한 오류-제거이다. 이유인즉 우리가 과학의 객관성 그리고 과학의 합리성이라고 모호하게 지칭하는 것은, 과학적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의 모습들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기 위하여, 과학적 이론에 대한 비판적 토론의 목적들에 관하여 확신하는 일이 중요하다. 과학적 이론에 대한 비판은 항상, 이론 내부에 있는 실수나 결점이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래서 제거하려는) 시도이다. 그 비판은, 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의 이론구축을 우리가 통제하는 부정적 정보교환(negative feedback)이다. 그 비판은, 이론에 수용 가능한 결론들이 있음을 밝히거나 이론이 해결하려고 착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밝히거나 이론이 극복하는 난제들보다 더 심한 난제들을 이론이 제기하여 문제를 변경할 뿐임을 밝히거나 아니면 그 이론이 경쟁하는 이론들 몇 가지보다 더 열등할 것임을 ㅡ 즉, 이론이 예를 들어 취약하거나 더 복잡함을 ㅡ 밝히려고 시도한다.

이것이 과학적 비판의 목적이다. 과학적 비판이 밝히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을 주목하는 일이 중요하다. 과학적 비판은, 문제의 이론이 증명되었음을 밝히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유사하게 과학적 비판은, 문제의 이론이 입증되지 않았거나 정당화되지 않았음을 밝히려고 시도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이론은 입증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언하여 과학적 비판은, 문제의 이론에 고도의 개연성이 (확률 계산의 의미에서) 있음을 밝히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ㅡ 왜냐하면 이론에는 고도의 개연성이 (확률 계산의 의미에서)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비판적 토론에서, 검토되고 있는 이론을 입증하거나 심지어 뒷받침하도록 혹시 이용될 논증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이론이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이론 자체를 공격한다. 이론의 결론들, 이론의 설명력, 이론의 일관성 및 다른 이론들에 대한 그 이론의 양립가능성을 과학자들은 검토하고 그것들에 도전한다.

 

우리가 과학적 객관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학적 이론은 독단으로서 수용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모든 이론은 잠정적이어서 항상 엄격한 비판에 ㅡ 오류 제거를 겨냥하는 합리적인 비판에 ㅡ 노출된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다.

과학의 합리성에 관하여, 이것은 비판적 토론의 합리성일 따름이다. 정말로 내가 생각하기에, 잘 진행된 비판적 토론의 사례보다 합리성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관념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비판적 토론은, 한 가지 목표에 전적으로 몰두한다면, 잘 진행된다: 특정 이론이, 특정 문제에 대하여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주장에서 결점을 발견하는 것. 비판적 토론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은, 이론을 부단히 반증하려고 시도하거나 적어도 이론이 자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체의 주장을 부단히 반증하려고 시도한다.

비판적 토론이 한 번에 한 가지 이상의 이론을 항상 다룬다는 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유인즉 심지어 한 가지 이론의 장점들이나 결점들을 평가하려고 시도하면서 비판적 토론은 문제의 이론이 진전인지를 판단하려고 항상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이론이, 당시까지 우리가 설명할 수 없었던 것들을 설명하는지 ㅡ 다시 말해서, 더 오래된 이론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러나 물론 한 번에 경쟁하는 한 가지 이상의 이론들이 흔히 (사실상 항상) 있는데 그 경우에 비판적 토론은 그 이론들의 상대적 장점들과 결점들을 평가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더 오래된 이론들은 비판적 토론에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특히 토론의 배경 지식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저 이론들이다 ㅡ 당분간 비판되지 않지만, 토론이 발생하는 구조로서 사용되는 이론들. 그러나 이 배경 이론 중 단 한 가지 이론도 어느 때도 도전을 받을 것이며 (동시에 너무 많이는 아닐지라도) 그리하여 토론의 전면으로 부상할지도 모른다. 항상 배경이 있을지라도, 배경의 특정 부분은 어느 때도 자체의 배경 특징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비판적 토론은, 본질적으로 두 가지 이상의 이론들의 (통상적으로 두 가지 이상) 장점들과 결점들의 비교한 것이다. 토론되는 장점들은 주로 이론들의 설명력이다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다소 상세하게 토론된) ㅡ 이론들이 사태를 설명하는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고, 이론들이 높은 가치를 지닌 특정 다른 이론들 및 옛 문제들을 조명하고 새로운 문제들을 제안하는 그 이론들의 힘을 결합하는 방법. 주요 결점은, 경쟁하는 이론이 설명할 수 있는 실험 결과들에 의한 모순을 포함한 모순.

이로부터, 비판적 토론이 흔히 결정되지 않을 것임과 잠정적 수용가능성에 대한 매우 확정적인 기준들이 존재하지 않음이 알려질 것이다: 과학의 경계선이 매우 유동적이라는 것.

그리하여 과학적 토론의 결과는, 결정적으로 토론되고 있는 이론 중 어떤 이론도 우리가 검증할 (혹은 심지어 오류로 판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ㅡ 이것은 지금쯤 틀림없이 명백하다 ㅡ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론들 중 한 가지 이론이 자체와 경쟁하는 이론들에 대하여 분명한 이점들을 지니는 듯이 보인다고 우리가 말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도 또한, 아주 흔히 결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운이 좋다면, 이론 중 한 가지 이론이 다른 이론들보다 더 큰 장점들과 더 작은 결점들을 지닌다는 결론에 우리가 때때로 도달할 것이다. (이 경우에 몇몇 사람들은, 그 이론이 수용된다고 ㅡ 물론 당분간만 ㅡ 말한다.)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의 과정을 이렇게 분석함으로부터, 우리가 그 이론을 으로 수용함에서 정당화된다는 의미에서 이론이 정당화되는지의 문제를 그 토론이 결코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틀림없이 분명하다. 기껏해야 비판적 토론은, 문제의 이론이 최고로 이용 가능하거나 달리 표현해서 그 이론이 진리에 가장 근접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론들을 서로 비교한다는 (그리고 진리와 비교하지는 않는데 진리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의미에서 단지 상대적으로우리가 이론들을 판단할 수 있을지라도, 이것의 의미는 우리가 상대주의자들이라는 (‘진리는 상대적이다라는 유명한 표현의 의미에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론들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판단하기에 (미지의) 진리에 가장 근접하는 이론을 우리가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진리라는 (‘절대적진리라는) 관념은 우리의 토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실행한다. 그것은 우리가 지닌 주요 규제적인 관념이다. 진리에 도달했다는 주장을 우리가 결코 정당화할 수 없을지라도, 한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진리에 더 근접한다고 왜 판단되어야 하는지 몇 가지 훌륭한 이유들이나 정당화를 우리는 흔히 제시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에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동등하게 적용할 의도가 있다. 이 단계에서 나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차이점들에 ㅡ 혹은 차이점들이라고 주장되는 ㅡ 관한 문제와 다소 관련될 수 있을 터인 한 가지 언급만 부언하겠다.

비판의 ㅡ 다시 말해서,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의 ㅡ 가장 효과적이고 중요한 형태 중 한 가지는, 관찰과 실험 및 추정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어떤 이론의 결론들이 특정 사실들과 (혹은 특정 관찰들이나 측정들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밝힐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그 이론에 반대하는 강력한 논증이 생긴다. 특히 오류로 판정하는 실험이 어떤 경쟁하는 이론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면 우리는 심지어 그 이론을 죽일 것이다. 그러나 관찰과 실험 및 측정은, 어떤 이론에 대한 비판적 토론의 맥락에서만 흥미롭다. 그것은 과학의 출발점도 아니고 자료들도 아니다.

그러나 관찰과 실험 및 측정은, 수용된 어떤 이론을 반증함에 의하여, 새로운 문제를 초래할 수 있고 그리하여 새로운 전개 방식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오류로 판정하는 실험은, 경험적 과학들에서 새로운 문제들이 출현하는 특징적인 방식 중 한 가지 방식이다. 그러나 다른 특징적인 방식들이 있다. 예를 들어 내부적 난제들이 이론 내부에서 탐지될지도 모른다. 혹은 우리가 다양한 문제들을 아주 성공적으로 다루어서 그 문제들 각각을 어떤 다른 이론에 의하여 해결하였지만, 이 이론 중 몇 가지가 상호간에 양립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상황을 수용할 것인 반면, 다른 사람들은 여기서 중요한 문제를 ㅡ 화해 방식을 발견하는 문제나, 새롭고 더 포괄적인 이론을 발견하는 나은 문제 ㅡ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고유성이라는 문제를 나아가 토론하기 전에, 나의 방법론이 관찰과 실험 및 측정에 귀속시키는 유일한 기능은 비판을 돕는 ㅡ 즉, 우리의 오류들을 발견하는 데서 돕는 ㅡ 중요하지만 겸손한 기능임을 나는 반복해서 말하고 싶다.

이것으로써, 내가 믿기에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모두에 공통적인 비판적 방법들인 것에 대한 나의 매우 일반적인 언급들 나는 끝내고 이제 나는, 사회과학들의 방법들의 고유성 몇 가지를 제시하는 데 도움을 줄 몇 가지 요점들로 나아간다.

 

2, 모형과 상황

 

나의 강좌의 두 번째 부분에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유사성 몇 가지와 차이점 몇 가지도 나는 설명하려고 시도하겠다.

설명과 예측이라는 두 가지 문제들을 구분함에 의하여 나는 시작하고 싶다.

 

1 첫 번째 종류는, 한 가지나 상당히 작은 숫자의 단일 사건들

설명하거나 예측하는 종류이다. 자연과학들로부터의 사례는 다음 월식은

(혹은 다음 두 번이나 세 번의 월식들) 언제 발생할 것인가?’일 터이다.

(사회과학들로부터의 사례는 미드랜드(Midlands)나 서부 온타리오

(Western Ontario)에서 다음 실업률 증가가 언제 발생할 것인가?’

터이다.)

2 두 번째 종류는, 사건의 특정 종류나 유형을 설명하거나 예측하는

종류이다. 자연과학들로부터의 사례는 월식은 왜 반복적으로 그리고

만월일 때만 발생하는가?’일 터이다 (사회과학들로부터의 사례는

건설업에는 왜 계절적 실업의 증감이 일어나는가?’일 터이다.)

 

이 두 가지 종류의 문제들 사이의 차이점은, 두 번째 문제가 모형 구축 통하여 아주 쉽게 해결되는 반면 첫 번째 문제는 모형 구 없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뉴튼의 섭동이론의 구조 안에서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특정 보편적 법칙들과 (우리의 경우에는 뉴튼의 운동법칙들) 몇 가지 유관한 초기조건들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초기조건들은 우리의 경우에, 특정 순간에 세 가지 천체들의 ㅡ 태양, 지구 및 달 ㅡ 질량과 속도 및 지름이다 (이 세 가지 천체 중 유일하게 하나만 ㅡ 태양 ㅡ 빛을 낸다는 정보로써).

두 번째 유형의 문제를 고찰하기 위하여, 우리는 실제적인 기계적 모형을 구축하거나 투시도를 참고할 것이다. 제한된 우리의 목적과 관련하여, 그 모형은 정말로 매우 개괄적일 것이다. 그 모형은 태양을 재현하는 고정된 등불, 태양을 원으로 선회하는 (타원형은 우리의 개략적인 모형과 관련하여 너무 미세할 것이다) 작은 목재 지구와 지구를 공전하는 작은 달로 구성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가 필수적일 터이다: 두 가지 움직임들의 평면들이 서로를 향하여 틀림없이 그렇게 기울어져서 우리가 때때로 월식들을 얻지만 모든 보름달에서는 얻지 못한다.

나는 이것을 개략적인모형으로 부르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실제 상황이나 실제 뉴튼 역학을 재현한다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궤도들의 타원형을 참작하지도 않고 궤도들의 섭동도 참작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자체의 운동을, 뉴튼의 운동의 법칙들로부터라기보다는 아마도 인간의 손으로부터 혹은 감긴 스프링으로부터 혹은 아마도 작은 전동 모터로부터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체의 목적에 매우 잘 부합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제기된 설명의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개략적인 모형에 대한 비판적 토론으로 인하여, 그러나, 틀림없이 지구와 달은 실제 세상에서 어떻게 추진력을 얻는가?’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과 동시에 우리는 다시 뉴튼의 운동법칙들로 온다. 그러나 초기조건들을 우리의 해결책에 도입할 필요는 없다. 두 번째 종류의 문제에 (사건들의 유형들에 대한 설명) 관한 한, 초기조건들은 모형 구축에 의하여 완벽하게 대체될 것이다: 이것에는 전형적인 초기조건들이 포함된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 결과에 도달한다.

첫 번째 종류의 설명이나 예측이 ㅡ 즉, 단일 사건들에 대한 설명이나 예측 ㅡ 보편적 법칙들과 동시에 초기조건들로써 작용하는 반면, 두 번째 종류의 설명과 예측은 ㅡ 즉, 전형적인 사건들에 대한 설명과 예측 ㅡ 모형들로써 작용하는데 그 모형들은 전형적인 초기조건들과 같은 것을 재현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모형이 움직이거나 작동하게 만들고 싶으면 혹은 우리가 말할 바와 같이, 우리가 모형을 활성화하고싶으면 ㅡ 다시 말해서, 모형의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작용할 방식을 우리가 재현하고 싶으면 ㅡ 후자(後者)에게도 또한 보편적 법칙들이 필요하다.

활성화법칙들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은, 인력(the force of attraction)을 태양계 모형에 포함시키려는 르 사주(Le Sage)의 시도를 고찰한다면, 보일 것이다. 르 사주는 (그리고 그 이전에는 뉴튼), ‘우주가 사방으로 움직이는 빠른 입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오늘날 우리가 우주 방사선으로 지칭하는 것을 생각하라) 상상했고 이 입자들의 충격으로 인하여 무거운 질량들이 서로를 향하여 몰려드는데 왜냐하면 이 질량들 각각이 우박 폭풍으로부터 다른 질량들을 부분적으로 보호하며 우박 폭풍 속에서 우산과 같이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상상했다. 이것은, 뉴튼의 역제곱 법칙을 모형의 확대로부터 도출하려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틀림없이 그 역제곱 법칙을 활성화법칙으로서 간주해야 하는) 시도이다. 그러나 심지어 여기서도 우리에게는 활성화 법칙들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적어도 우주입자들의 일정 비율이 반사된다기보다는 흡수되는 법칙과 같은 것을 전제해야 한다. 활성화 법칙들을 모형의 구조적 속성들로 환원하려는 다른 시도들에도 동일한 것이 성립한다. 그런 시도들은 매우 성공적일 것이지만, ‘활성화법칙들 모두모형들이나 구조들로 결코 환원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뉴튼 이론에 의하여 답변될 수 있는 모든 특수한 질문들이 원칙적으로, 보편적인 운동법칙에 초기조건들을 보태어 사용함에 의해서만 태양계 모형을 구축하지 않고 답변될 것임을 알면 흥미롭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의 문제로서, 모형들은 대부분의 이론 전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실행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 및 케플러는 모두 모형제작자들이라는 것과 뉴튼 이론은 케플러의 모형에 어떻게 활성화되었는지를 ㅡ 그 모형의 요소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했고, 그 모형의 움직이는 구조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ㅡ 여러분에 상기시키면 충분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시대에, 러더포드(Rutherford)의 원자 모형과 보어(Bohr)의 원자 모형은 양자역학에 여러 해 앞서서 왔는데 양자역학은 그 모형들의 활성화로 지칭될 이론을 (확률론적) 제공했다.

그리하여 모형은, 특정 요소 각각에서 전형적인 관계에 놓인 그 요소들에 덧붙여 특정 상호작용에 대한 보편적 법칙들로 ㅡ 활성화법칙들 ㅡ 구성된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먼저 모형들로써 작동하고 그 모형들은, 기본적인 작동구조와 함께, 두 번째 종류의 몇 가지 문제들을 ㅡ 즉, 몇 가지 전형적인 사건들을 설명할 ㅡ 해결할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물리과학들에서도 모형에게는 기계적 모형일 필요가 없음을 우리는 또한 안다. 케플러는 틀림없이, 자신의 태양계 모형의 구조에 관하여 사색했다. 그러나 그가 그 모형을 ㅡ 즉 그 모형의 요소들과 그 요소들의 움직임들 ㅡ 상당히 잘 확립된 것으로서 간주한 반면, 그는 그 모형의 작용 방식이나 활성화를 실제로 미지의 것으로서는 아닐지라도 매우 가설적으로서 간주했다. 그리고 우리가 뉴튼 역학을 말할지라도, 뉴튼 자신과 그의 동시대인들은 원거리 작용을 비-역학적인 것으로서 간주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이해되는 바로서의 모형들은 이론들로 지칭되거나 이론들을 포함한다고 언급될 것인데 왜냐하면 모형들은 문제들을 ㅡ 설명의 문제들 ㅡ 해결하려는 시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이론들 모두가 모형들은 아니다. 모형들은 보편적 법칙들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초기조건들을 재현한다. 그리하여 모형들에는, ‘활성화하는보편적인 상호작용의 법칙들에 의하여 ㅡ 여기서 지적된 의미에서의 모형들이 아닌 이론들에 의하여 ㅡ 보충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예를 들어, 특히 유기화학자들에 의하여 구축된 잘 알려진 분자들의 모형에 의하여 예시될 것이다. 원자들의 배열을 재현하는 분자들의 모형들은, 화학결합을 재현하는 막대기들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막대기들은, 분자들이 결합된다고 우리가 추측하는 활기를 불어넣은 법칙들인 법칙들을 (혹은 공명[共鳴: resonance]) 재현하지 않는다. 이 법칙들은, 자체의 차례에서, 모형들에 의하여 재현될 것이다. 그러나 이론의 모형 유형이 끝나는 어느 곳에서, 다양한 부분들의 상호작용이나 모형을 구성하는 구조들을 다스리며 활기를 불어넣는 순전히 추상적인 법칙들이 온다.

자연과학들에서 모형들에 관해서는 그만큼만 하자.

이제 사회과학들은 어떠한가? 자연과학들에서 내가 모형들의 중요성에 관하여 말한 것은 사회과학들에서의 모형들에도 성립한다는 논지를 나는 제시하고 싶다. 사실상 모형들은 여기서 훨씬 더 중요한데 왜냐하면, 보편적 법칙들 및 초기조건들에 의하여 개별 사건들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뉴튼의 방법이 이론 사회과학들에서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형들은 거의 항상 전형적인 상황들이나 조건들을 구축하는 방법에 의해서 ㅡ 즉, 모형들을 구축하는 방법에 의해서 ㅡ 작동한다. (이것은, 자연과학들보다 사회과학들에 하이에크의 용어사용법으로 상세한 설명이 더 적고 원칙적 설명이 더 많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그러나 이론 사회과학들에서 모형들의 역할이나 기능은 아마도, 우리가 그 모형들을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이론 사회과학과 역사 사회과학 모두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 행위와 사회 상황을 통하여 사건들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 용어는 사회 상황이다.

사회과학들에서 구체적인 역사적 사회 상황에 대한 기술은, 자연과학들에서 초기조건들에 대한 서술과 대등하다. 그리고 이론 사회과학들의 모형들은 본질적으로 전형적인 사회 상황의 재구축에 대한 서술들이다.

나의 견해로 사회 상황이라는 관념은, 사회과학들의 방법론에서 근본적인 범주이다. 사회과학들에서 설명에 관한 모든 문제에는 사회 상황의 분석이 필요하다고 나는 심지어 말하고 싶다.

 

3. 상황 분석의 사례

 

한 가지 사례의 도움을 받아서 내가 사회 상황에 대한 상황적 분석이나 사회 상황의 논리, 더 간략하게 상황적 논리로 지칭하는 것을 나는 설명하고 싶다.

나의 표준적 사례 중 한 가지 사례는 보행자인데 그를 리처드라고 부르고 그는 기차를 타고 싶어서, 움직이는 차량들과 주차된 차량들 및 다른 교통수단으로 밀집된 도로를 건너려고 서두른다고 하자. 우리가 설명하고 싶은 것이 리처드가 길을 건너면서 그의 다소 불규칙한 움직임들이라고 전제하자.

우리가 언급해야 할 명백한 상황적 요소들은 무엇인가? 먼저 주차된 다양한 차량들이 ㅡ 물리적 물체들과 장애물들인데 리처드의 움직임에 특정 물리적 제한들을 설정한다 ㅡ 있다. 그 다음에 움직이는 차들과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많은 목적들 가운데 충돌을 피하는 목적이 있다고 우리가 전제한다면, 그들은 가능한 리처드의 움직임들에 유사한 제한들을 설정한다.

그러나 상황에는 리처드의 움직임들에 대한 설명과 동등하게 유관한 추가적인 요소들이 있다: 도로교통법, 경찰 규정들, 교통신호들, 횡단보도들 그리고 다른 그런 사회제도들. 교통신호나 횡단보도 같은 사회제도들 몇몇은 물리적 물체들과 연결되고 그 물체들 안에 포함된다. 교통경찰관 같은 다른 사회제도들은 인간의 몸체들에 포함된다. 그러나 도로통행법과 같은 다른 사회제도들은 더 추상적인 특성을 띤다 ㅡ 그러나 차량들과 같이 물리적 물체들이든 움직이는 차량들과 관련된 운동보전의 법칙과 같은 물리법칙들이든 (‘금지사항들) 그것들이 정확하게 장애물들인 양 리처드는 그것들을 경험할 것이다. 사실상 우리의 움직임들과 행동들에 제한을 설정하거나 장애물들을 만들어내는 저 모든 것들이 거의 물리적 물체들이나 장애물들인 양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나는 사회제도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을 나는 제안한다. 사회제도들은 거의 문자 그대로, 우리 서식처 가구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우리에 의하여 경험된다.

그러나 리처드의 움직임들을 우리가 설명하고 싶으면, 물리적 및 사회적 공간에서 다양한 물리적 및 사회적 장애물의 위치파악보다 더 많은 일을 우리는 행하여야 한다. 정말로 어떤 물체가 리처드의 움직임에 대하여 장애물이 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리처드에게 특정 목적들을 ㅡ 가령 서둘러서 도로를 건너는 목적 ㅡ 귀속시켜야 한다. 다음에 우리는 그에게, 지식이나 정보의 특정 요소들을 ㅡ 저 지식으로 인하여, 예를 들어, 그가 교통신호나 교통경찰의 신호를 해석할 수 있는 사회제도들에 대한 저 지식 ㅡ 귀속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언어는 한 가지 사회제도이고 시장, 가격, 계약 그리고 법원도 그렇다.)

이제 몇몇 사회과학자들은, 우리가 리처드에게 이 정보나 이 목적들과 같은 것들을 귀속시킬 때 우리는 심리학적 전제들로써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터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리학자는, 리처드가 실제로 도로를 건너는 목적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지 혹은 더 정확하게 심리학적 의미에서 그의 유일한 목적이 그의 기차를 놓치지 않은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가 이 한 가지 관념에 의하여 완전히 몰입되지 않았는지를 심지어 질문할 것이다. 도로를 건너거나 한쪽 발을 다른 발보다 먼저 디디거나 걸으면서 자신의 균형을 유지하거나 자신의 서류가방을 잡는 것과 같은 부차적인 목적들은, 주어진 조건 하에서 기차를 타는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전제조건들인 중간 목적들로서 우리가 그것들을 논리적 분석에 의하여 인정할지라도,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모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리처드의 목적들과 리처드의 지식을, 심리학적 방법들에 의하여 발견되는 심리학적 지식들로서가 아니라 객관적 사회 상황의 요소들로서 취급할 것을 나는 제안한다. 기차를 타는 그의 실제적인 심리학적 목적을 우리의 특정 문제 해결과 무관한 것으로서 취급할 것을 나는 제안하는데 그 특정 문제 해결은, 그의 목적이 ㅡ 그의 상황적 목적ㅡ 안전과 양립될 수 있게 빠르게 도로를 건널 필요뿐이다. 유사하게, 그의 사념들에서 베르디와 산스크리트어가 얼마나 큰 역할을 실행하는지 그가 도로를 건너는 바로 그 순간에 그가 어떻게 베르디 오페라의 구절을 흥얼거렸는지 혹은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 한 구절의 번역 적합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심리학적 조사가 밝힐 수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리처드의 일반적인 지식에 ㅡ 가령 베르디의 오페라에 대한 그의 취미나 특정 산스크리트 원서에 대한 그의 지식 ㅡ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상황과 유관한 정보나 지식에만 (도로교통법에 대한 그의 지식과 같은) 우리는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하여 상황 분석에는 몇 가지 물리적 물체들과 그 물체들의 속성들 및 상태들 몇 가지, 몇 가지 사회제도들 및 그 사회제도들의 속성들 몇 가지, 몇 가지 목적들 그리고 지식의 몇 가지 요소들이 포함될 것이다.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이 분석을 고려하여, 리처드가 거리를 건널 때 그의 움직임들을 우리는 설명하거나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여기서 우리에게 있는 것은 단일한 경우라기보다는 전형적인 경우인 모형이다. 우리의 문제가 변하고 우리가 어느 날 단일한 사건을 (가령, 특정 날에 리처드가 어떻게 그리고 왜 교통에 막혀서 자신의 기차를 놓쳤고 그리하여 훌륭한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Otello] 공연을 놓쳤거나 불교협회의 흥미로운 모임을 놓쳤는지) 설명하는 데 흥미를 가질지라도, 우리의 상황 분석 방법으로 인하여 리처드는, 유관한 상황을 공유할 누군가로 항상 변하고 그의 개인적인 생활 목적들과 그의 개인적인 지식은 전형적인 상황적 모형의 요소들로 환원되는데 그 모형은 구조적으로 유사한 사건들의 방대한 집합을 원칙적으로 설명할’ (하이에크의 용어를 사용하여) 수 있다.

나의 논지는, 이 방식으로만 우리가 사회적 사건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건을, 충분한 법칙들과 초기조건들의 도움을 받아서 설명할 그 법칙들과 초기조건들이 우리에게 이용 가능한 상태로 있는 적이 없기 때문에 오직 이 방식으로).

이제 상황 분석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모형이 주어진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태양계의 모형을 활성화하는 뉴튼의 보편적 운동법칙들에 무엇이 여기서 대응하는가? 혹은 달리 표현하여, 사회적 상황에 대한 모형은 어떻게 활성화되는가?

 

4. 심리학주의

 

여기서 통상적인 오류는, 인간 사회의 경우에 사회적 모형의 활성화는 인간의 참된 내부 자아(anima) 혹은 정신(psyche)에 의하여 제공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여기서 그리하여 뉴튼의 운동법칙을 일반적인 인간의 심리학 법칙들에 의하여 혹은 아마도 우리의 상황에 행위자들로서 참가하는 개인적인 등장인물들과 유관한 개인적인 심리학 법칙들에 의하여 우리가 대체해야 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몇 가지 이유들 때문에 오류이다. 첫째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리처드의 구체적인 심리학적 경험들을, 우리가 목적들이나 지식으로 지칭한 것들과 같은 몇 가지 추상적이고 전형적으로 상황적인 요소들에 의하여 우리는 이미 대체했다. 두 번째 상황 분석을 활성화하기위하여,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이나 대행인들은 적당하게 혹은 합당하게 ㅡ 즉, 상황에 맞추어 ㅡ 행동한다는 전제만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은 상황 분석의 핵심적 요점이다. 물론 내가 사용하는 상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바와 같이 상황에는, 이미 모든 관련된 목적들과 모든 이용될 수 있는 관련된 지식이 특히 이 목적들을 이룩하기 위하여 가능한 다양한 수단들과 관련하여 포함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하여 한 가지 활성화 법칙만 ㅡ 상황에 맞추어 합당하게 행동하는 원칙인데 그것은 분명히 거의 공허한 원칙이다 ㅡ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문학에서 합리성 원칙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지는데, 셀 수 없이 많은 오해들을 초래한 명칭이다.

여러분이 소위 이 합리성 원칙을, 내가 여기서 채택한 관점에서 본다면, 항상 혹은 주로 아니면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경험적이거나 심리학적 주장과 그 원칙이 관련이 없음을 여러분은 발견할 것이다. 그 원칙은, 오히려 우리의 이론적 노력 전체인 우리의 설명적 이론 전체를 상황 분석에 ㅡ 모형에 ㅡ 쑤셔 넣어야 한다는 방법론적 상정(想定: postulate)의 한 가지 양상이나 결과로 판명된다.

우리가 이 방법론적 상정을 채택한다면, 활성화 법칙은 결과적으로 일종의 제로-원칙(zero-principle)이 된다. 이유인즉 그 원칙은 다음과 같이 서술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황에 대한 모형을 구축하자마자, 행위자들은 모형의 관계들 안에서 행동한다고만 혹은 행위자들이 상황 안에 함축된 것을 실행한다고만 우리가 전제한다. 이것은 부언하여, ‘상황적 논리라는 용어가 언급하기로 의도된 것이다.

합리성 원칙의 채택은 그리하여, 방법론적 상정의 부산물로서 간주될 수 있다. 그것은 경험적인 설명적 이론인 시험될 수 있는 가설의 역할을 실행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이 분야에서, 경험적인 설명적 이론들이나 가설들은, 더 정확하게, 우리의 다양한 상황 분석들이자 우리의 다양한 모형들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더 합당하거나 덜 합당할 것은 ㅡ 토론되고 비판될 것이며 그 합당성이 때때로 심지어 시험될 것이며 그리하여 이것들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우리가 우리의 오류들로부터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은 ㅡ 이것들이다.

모형에 대한 시험들은 쉽게 얻어질 수 없고 통상적으로 매우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난제는 심지어 물리과학들에서도 출현한다. 그 난제는 물론, 모형들이 항상 그리고 반드시 다소 개략적이고 도식적인 과도-단순화들이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모형들의 축약성에는 비교적 낮은 등급의 시험가능성이 수반된다. 이유인즉 차이점이 불가피한 축약성에 기인하는지 혹은 모형에 있는 오류에 기인하는지를 결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험에 의하여 두 가지 경쟁하는 모형들 중 어느 모형이 나은지를 우리는 때때로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과학들에서 상황 분석에 대한 시험들은 때때로, 역사관련 탐구에 의하여 제공될 수 있다.

 

5. 추가 사례들

 

나는 도로를 건너려는 리처드의 사례를 다소 상세하게 다루었는데 왜냐하면 경제학에서, 사회인류학에서, 권력정치학의 사회학에서 그리고 사회역사나 정치역사에서 사용되는 바의 상황 분석의 거의 모든 유관 요소들이 그 사례에 포함된다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

익숙한 사례를 들면, 고전적 경제이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완전 경쟁 이론이다. 그 이론은, 이상화된 혹은 과도하게 단순화된 사회 상황에 ㅡ 구매자들과 판매자들이 판매되는 상품들의 물리적 품질들에 대하여 동등하게 정보를 받는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이라는 제도적 구조 안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의 상황 ㅡ 대한 상황 논리로서 전개될 것이다. 유사하게 순수 독점이론이나 복점(複占: duopoly) 이론은, 이상화된 특정 사회 상황에 대한 상황 논리일 뿐이다.

예를 들어 사회인류학에 관해서도 유사한 언급이 적용될 것이다. 사회인류학은, 사회 구성원의 전형적인 행위들이 합당한 것으로서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게 되는 방식으로 사회의 문제들뿐만 아니라 제도적 및 전통적 구조를 기술하려고 노력한다 (혹은 노력해야 한다). 부분적으로 제도적 구조 자체와 그 구조의 변화들을, 예를 들어 두 가지 문화들의 충돌들과 같은 특정 역사관련 상황들에서 수용된 결과로서 (통상적으로, 의도되지 않은 결과) 설명하려고 사회인류학은 또한 노력한다. (고대 그리스의 많은 놀라운 발전이 문명 충돌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음이, 예를 들어, 압데라의 헤카타이오스[Hecataeus of Abdera]가 남긴 작품의 드문 단편 글들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6. 문제 상황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설명적 사회과학들 특히 경제이론과 사회인류학의 방법론에 대한 간략한 개괄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히 역사관련 설명들에도 적용되는데 그 설명들은 항상 상황의 합리적인 재구축으로써 작동한다.

아마도 이 방법론에 대한 최고의 분야는 과학사이다. 여기서 대행인의 ㅡ 창조적 과학자 ㅡ 상황은, 그가 문제 상황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봄에 의하여 그 문제 상황을 물론 재구성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과학 분야에서 발견하는 문제 상황이다. 우리는 이것은 일반화하여 우리가 역사를 설명하거나 이해하고 싶을 때마다 우리는 역사를 문제 상황들의 역사로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7. 도구와 진리: 사회 이론들의 허위성

 

이제 나는 나의 강좌의 마지막 부분으로 선회한다. 이것에서 나의 의도는 먼저, 실용주의를 선호하는 특정 논증들을 전개하는 것이지만 나중에 내가 실용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내가 이론들을 진리로 향하는 단계들로서 간주한다는 것을 설명하겠다.

합리성 원칙은 경험적이거나 심리학적 명제의 역할을 실행하지 않는다는 나의 주장을 그리고 더욱 특히 합리성 원칙은 사회과학들에서 어떤 종류의 시험에 종속된 것으로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나의 주장을 여러분을 기억할 것이다. 시험들은 이용될 수 있을 때, 특정 상황 분석인 특정 모형을 시험하는 데 사용된다 ㅡ 그러나 상황 분석의 일반적인 방법을 시험하는 데는 사용되지 않고 이런 이유 때문에 합리성 원칙을 시험하는 데도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을 유지하는 것이 그 방법의 일부이다. (일반적인 방법은 논증될 수 있을지라도, 시험될 수는 없다. 그 방법을 선호하는 주요 논증은, 다른 방법들보다 그 방법이 낫게 시험될 수 있는 설명적 가설들을 ㅡ 추측성 상황 모형들 ㅡ 낳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험으로 인하여 특정 모형이 또 다른 모형보다 덜 적합하다는 것이 밝혀지면 두 가지 모형이 합리성 원칙으로써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 원칙을 버릴 경우가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언급으로 인하여, 합리성 원칙이 빈번하게 선험적이라고 선언된 이유가 설명된다. 그리고 정말로, 그것이 경험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무엇일 수 있을 터인가?

이 요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합리성 원칙이 선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 원칙이 선험적으로 타당하거나 선험적으로 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들이 틀림없이 틀렸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이유인즉 합리성 원칙은 내가 보기에 분명히 허위이다 ㅡ 이와 같이 표현될 심지어 자체의 가장 취약한 제로 언명(zero formulation)에서도 그렇다: ‘대행인들은 항상, 자신들이 놓인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매우 쉽게 알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합리성 원칙에 따라 항상 행동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 위하여, 교통체증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혹은 주차할 곳이 없거나 전혀 없을 때 자신들의 차량을 주차하려고 간절히 애쓰는 초조한 운전자들을 우리가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희망대로 되지 않는데도 희망하면서, 그 진보가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심리학적 구조에 따라서 우리가 행동할지라도 우리는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식과 재능에서 ㅡ 이것들은 상황의 한 부분이다 ㅡ 뿐만 아니라 상황을 평가하거나 이해함에서도 분명히 방대한 개인적인 차이점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몇몇 사람들이 합당하게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참이 아닌 원칙은 허위이다. 그리하여 합리성 원칙은 허위이다. 이것으로부터 탈출구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그 원칙이 선험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해야 한다.

이제 합리성 원칙이 허위라면, 이 원칙과 모형의 결합으로 구성되는 설명 또한, 문제의 특정 모형이 참일지라도, 허위이다.

그러나 그 모형은 참일 수 있는가? 여하한 모형도 참일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리학에서든 사회과학들에서든 여하한 모형도 틀림없이 과도하게 단순화된 것이다. 그 모형은 많은 것을 생략하고 그 모형은 틀림없이 많은 것을 과도하게 강조한다.

태양계에 대한 뉴튼의 모형을 고려하라. 뉴튼의 운동법칙이 참이라고 우리가 전제할지라도, 그 모형은 참이 아닐 터이다. 그 모형에 몇 가지 행성들이 포함될지라도 ㅡ 부언하여 질량점들(mass-points)의 형태로인데 그 질량점들은 실제의 것들이 아니다 ㅡ 그 모형에는, 태양광선의 압력도 우주방사선의 압력도 포함되지 않는다. 행성들의 자기적(磁氣的: magnetic) 속성들도, 이 자력들의 움직임에서 나와서 그 행성의 이웃을 초래하는 전기장들(electrical fields)도 그 모형에는 심지어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ㅡ 매우 중요하게 ㅡ 그 모형에는, 태양계의 물체들에 미치는 원거리 질량들의 영향력을 재현하는 것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 모형은, 모든 모형처럼, 방대하게 과도한 단순화이다.

매우 성공적인 과학 이론들은 과도한 단순화이면서 운이 좋은 것임을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보편적 법칙들의 정확성을 반드시 의문시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법칙들이 사실들을 과도하게 단순화하고 그리하여 사실들을 참되게 재현하지 않는 것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모두에서 모형들을 구축함에서 전적으로 불가피한 듯이 보인다.

사회과학에서 자연과학의 보편적 법칙들과 다소 유사한 역할을 실행하는 합리성 원칙이 허위라면, 그리고 게다가 상황 모형 역시 허위라면 사회 이론의 두 가지 구성요소들 모두가 허위이다. 그러나 내가 틀림없이 그렇게 하는 바와 같이, 상황 분석 방법을 사회과학의 합당한 방법으로서 우리가 유지하고 싶으면 그리고 과학은 진리를 탐구한다는 견해를 우리가 유지하고 싶으면 우리는 절망적으로 곤경에 처하지 않는가?

 

8. 도구주의

 

내가 말하고 있던 것에 기뻐할 (다소 성급하게) 한 무리의 철학자들이 있다: 실용주의자들이나 도구주의자들. 이유인즉 우리의 과학 이론들을 사용하여 우리는 순수 지식을 ㅡ 혹은 진리 ㅡ 겨냥해서는 안 된다는 혹은 겨냥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신조이기 때문이다: 과학 이론들 도구에 ㅡ 다시 말해서, 예측이나 실용적인 적용을 위한 도구들 ㅡ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이론들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을 제공하거나 이해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는 우리는 스스로를 기만한다는 것.

그리하여 도구주의자들은 기뻐할 것인데 이유인즉 내가 말한 모든 것이 그들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심지어, 내가 지적한 난제들이 오래된 이야기라고, 그리고 적어도 닐스 보어 이래 도구주의는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거의 보편적으로 수용되었다고 지적할 것이다.

닐스 보어의 권위 때문에 물리학자들 가운데 도구주의가 매우 유행하게 되었음을 이제 나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유행의 유혹에 저항한 사람들의 명단에는 아인슈타인, 드 브로이 그리고 슈뢰딩거가 포함된다. 이로 인하여 나에게는, 나도 역시 반()-도구주의자임을 (또는 내가 혹시 말할 바와 같이, 실재론자) 고백할 용기가 생긴다. 내가 지금까지 도구주의를 물리 과학들에 대한 철학으로서만 비판했을지라도, 사실상 나는 다른 곳에서 도구주의의 신조와 상당히 상세하게 싸웠다.

()-도구주의자들인 우리는 무엇을 주장하는가? 과학 이론이 처음 창안되었을 때 즉각적으로 혹은 나중에 모든 종류의 실용적인 문제들에 적용될 것임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과학 이론들이 도구들이라는 ㅡ 실제적 도구이거나 잠재적 도구 ㅡ 주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 이론들은 도구들은 아니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이유인즉 우리가 과학으로부터 우리의 세상 구조에 관한 중요한 것을 배울 것이라고 우리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과학 이론들이, 이해될 수 있어서 우리의 세상 이해하기를 확대할 정말로 만족스러운 설명들을 제공할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ㅡ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점이다 ㅡ 진리에 근접한다는 것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심지어 중간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과학이 진리를 겨냥하거나 진리에 더 근접한다고 주장한다.

그 쟁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표현될 수 있다: 과학 이론들은 도구에 지나지 않고 혹은 내가 제안하는 바와 같이, 그 이론들은 우리의 세상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려는 시도들로서 혹은 적어도 진리에 더 근접하려는 시도들로서 간주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진리에 관하여 그렇게 피상적으로 말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라고 여러분은 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고 할지라도, 진리에 접근하는 것에 관하여 혹은 진리에 더 근접하는 것에 관하여 그렇게 피상적으로 말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

이것들은 중요한 반론들이다. 먼저 나는 진리라는 단어의 유의미성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싶다.

 

9. 진리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빌라도(Pilate) 질문에 대하여 답이 없다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믿는 것은 이상하다. 이유인즉 결국 수천 곳의 법원에서 수천 명의 증인이 매일 진실을 말하라는 훈계들 듣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그들로부터 기대되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인다.

사실상 다음과 같은 질문에는 오래된 답변이 있다: ‘주장이나 명제나 서술이나 이론이나 신념은 언제 참인가?’ 답변은: ‘주장이 사실들에 부합하거나 사실들과 일치한다면 참이다.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사실들과 부합한다고 말하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 또한 만족스럽게 답변되었다 ㅡ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알프레트 타스키(Alfred Tarski)에 의하여.

나는 물론 여기서 타스키의 이론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그의 이론은, ‘(snow)은 푸르다잔디는 붉다라는 서술들이 허위인 반면 (snow)은 희다잔디는 녹색이다라는 서술들은 참이라는 상식적인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는 이론이라고 말하면 충분하다.

타스키의 이론은, 당혹감 없이 허위라는 단어들을 그 단어들의 평범한 의미에서 사용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언어가 지닌 표현들의 풍요성에서 우리의 평범한 유럽 언어들과 비교될 수 있는 그 언어에, 진리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이 ㅡ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어진 명제에 대하여 그 명제가 참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을 일반적인 방법 ㅡ 있을 리가 없음을 그 이론은 또한 보여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통상적으로 어떤 서술이나 어떤 이론에 대하여 그것이 참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일 것이고 흔히 실제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버지라는 용어의 유의미성이 부성(父性: fatherhood)을 발견하는 데서 어떤 난관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그러나 진리라는 용어의 유의미성도 이것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가 언어로부터, 내일이 되면 어제라는 용어가 의미할 것과 다른 것을 오늘에 의미하는 용어인 어제와 같은 모호한 용어들을 제거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몇 가지 추가적인 유사한 예방조치들을 취한다면, 이 정화된 언어로 된 모든 서술은 제3의 가능성 없이 참이거나 허위일 것임이 타스키의 이론으로부터 귀결된다. 게다가 우리의 언어로 우리에게는 부정의 작용이 있을 수 있어서 어떤 명제가 참이 아니라면 그 명제의 부정은 참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모든 명제 중에서 절반은 참일 것이고 나머지 절만은 허위일 것임이 밝혀진다. 그리하여 참인 명제들이 어느 것인지를 발견하는 큰 수고를 겪을지라도, 많은 참인 명제들이 있음을 것임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10. 진리에 대한 근접

 

이제 나는 두 번째 문제로 ㅡ 우리가 진리에 대한 근접이나 진리에 대한 더 근접에 관하여 우리가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지 혹은 어떤 이론에 관하여 그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나은 근사치라고 말하는 것이 유의미할 수 있는지 ㅡ 선회한다.

나는 상당한 시간 동안 이 문제를 다루어서 나는 답변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타스키의 진리 개념과 몇 가지 다른 순전히 논리적인 개념들의 (특히 역시 타스키에게서 기인하는 논리적 내용이라는 개념) 도움을 받아서, ‘αb보다 진리에 대하여 나은 근사치이다αb보다 진리와 더 유사하다라는 관계에 대하여 순전히 논리적인 정의(定義: definition)를 제시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정의는 (나의 저서 추측과 논박에서 발견될), 대부분의 정의처럼,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정의가 한 가지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많이 의심을 받는 αb보다 진리에 대하여 나은 근사치이다표현은 틀림없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

이론들의 수열을 형성하여 나중 이론들이 진리에 (미지의) 대하여 점점 더 나은 근사치들로 보이는, 경쟁하는 이론들에 관한 많은 사례가 물리학에 있다.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의 모형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보다 진리에 대하여 나은 근사치로 보이고, 케플러의 모형은 코페르니쿠스의 모형보다 진리에 대하여 나은 근사치로 보이며 뉴튼의 모형은 훨씬 더 나은 근사치로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모형은 다시 나은 모형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중력 이론을 참인 이론으로서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하면 매우 흥미롭다. 반대로 그는, 자신의 중력 이론은 참일 리가 없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이론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의 생애 30여 년을 보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론이 뉴튼의 이론 및 다른 이론들보다 (밀른[Milne]의 이론과 같은) 진리에 대하여 나은 근사치라고 그는 항상 믿었다.

 

11. 도구주의에 대한 답변

 

이제 나는, 도구주의에 대한 답변으로써 나의 강좌를 마치겠다. 나는 매우 간략하게 답변하여 나 자신을, 사회 이론들의 알려진 허위성에 의하여 제기된 문제에 국한하겠다.

이 강좌의 앞부분에서 사회과학들의 방법들에 대한 나의 기술을, 도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철학에 대한 확인으로서 환영했을 저 도구주의자들에게 답변할 위치에 이제 내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답변은 이렇다: 사회과학들과 그 과학들의 방법들에 대한 나의 견해가 옳다면, 사회과학들에서 설명적 이론은 참으로 기대될 수 없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반()-도구주의자들이 곤경에 빠질 필요가 없다. 이유인즉 저 방법들로 인하여 경쟁하는 이론들이나 모형 중 어느 것이 진리에 대하여 나은 근사치인지를 우리가 비판적으로 토론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저 방법들이 매우 훌륭한 방법들일 것임을 도구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밝힐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회과학들에서의 상황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순수 지식을 추구함에서 우리의 목적은,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기이다 ㅡ 어떻게-질문들(how-questions)과 왜-질문들(why-questions)에게 답변하는 것 (그러나 ‘...은 무엇인가?’ 형태의 사이비-질문들은 아니다). 이것들은, 설명을 제시함에 의하여 답변되는 질문들이다. 그리하여 순수 지식에 대한 모든 문제는 이론적 문제들이다: 그것들은 설명의 문제들이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실용적인 문제에서 시작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예를 들어 빈곤과 싸우기 위하여 무슨 일이 이룩될 수 있는가?’ 같은 실용적인 문제로 인하여 사람들은 왜 빈곤한가?’ 같은 순전히 이론적인 문제가 생겼고 그곳에서부터 임금과 물가 등등에 대한 이론이 생겼다 ㅡ 다시 말해서, 순수 경제이론이 생겼는데 그 이론은 물론 자체가 새로운 이론들을 부단히 만들어낸다. 이론의 전개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들은 ㅡ 그리고 특히 미해결 문제들 ㅡ 증가하고 그 문제들은, 우리의 지식이 증가할 때 항상 그러한 바와 같이, 차별화된다.

 

12. 합리성과 합리성 원칙의 위상

 

합리성 원칙에 관한 나의 견해들은 세밀하게 질문되었다. ‘상황에 대하여 합당하게 행동하는 원칙(, ‘합리성 원칙에 대한 나 자신의 설명의) 위상에 관하여 내가 말한 것에 얼마간의 혼란이 없는지 나는 질문을 받았다. 그 원칙이 방법론적 원칙이 되기를 내가 원하는지 혹은 경험적 추측이 되기를 내가 원하는지 내가 결정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전적으로 옳다. 그 원칙이 방법론적 원칙이라면, 왜 그 원칙이 경험적으로 시험될 수 없으며 왜 그 원칙이 경험적으로 허위가 될 수 없을 터인지는 (성공적이거나 성공적이지 못한 방법론의 한 부분만 될 수 있을 터) 분명할 것이다. 그 원칙이 경험 가능한 추측이라면, 그 원칙은 다양한 사회 이론들의 ㅡ 모든 사회 모형의 활성화 부분ㅡ 한 부분이 될 터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 그 원칙은 틀림없이 어떤 경험적 이론의 한 부분이 될 터이고 저 이론의 나머지와 함께 틀림없이 시험될 터이고 부족한 것으로 밝혀지면 거부될 터이다.

이 두 번째 경우는, 합리성 원칙의 위상에 대한 나 자신의 견해에 더 잘 부합하는 경우이다. 나는 행동의 적합성 원칙을 (, 합리성 원칙) 모든 혹은 거의 모든 시험될 수 있는 사회 이론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간주한다.

이제 어떤 이론이 시험되어 결점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 이론의 다양한 구성요소 중에서 어느 구성요소를 그 이론의 실패에 대하여 설명될 수 있게 우리가 만들 것인지를 우리는 항상 결정해야 한다. 나의 논지는, 합리성 원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론의 ㅡ 즉, 모형 ㅡ 나머지를 설명될 수 있게 만들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건전한 방법론적 방책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나은 이론들 탐구에서 우리가 합리성 원칙을, 반증에서 제외된 논리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원칙인 양 다루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 원칙이 오류로 판정될 수 없는 것으로서, 또는 선험적으로 타당한 것으로서. 그러나 이 표면적이 모습은 오해를 초래한다. 내가 지적한 바와 같이, 합리성 원칙은 진리에 대한 충분한 근사치일지라도 심지어 나의 최소한 언명에서도 실제로 허위라고 믿을 충분한 이유들이 있다. 그리하여 내가 그 원칙을 선험적으로 타당한 것으로서 취급한다고 언급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이론의 붕괴 때문에 합리성 원칙을 비난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훌륭한 방책이자 훌륭한 방법론적 장치라고 나는 믿는다. 이유인즉 우리의 상황 모형을 우리가 트집 잡는다면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원칙을 유지하는 방책이 우리 방법론의 한 부분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 방책을 선호하는 주요 논증은, 우리의 모형이 우리 행동의 적합성 원칙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정보가 풍부하여 훨씬 더 시험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엄격하게 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한다: 우리는 이것을 이미 알고 있다. 게다가 허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형은 통상적으로 충분히 진리에 근접한다: 우리가 우리의 이론을 경험적으로 반증할 수 있다면 그 이론의 붕괴가 통상적으로 상당히 급격하고 합리성 원칙의 허위성이 기여하는 요인일지라도, 주요 책임은 보통 모형에게 귀속될 것이다. 또한 합리성 원칙을 또 다른 원칙에 의하여 대체하려는 시도는, 우리의 모형-구축에서 완전한 자의성을 초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한 가지 이론을 전체로서만 시험할 수 있다는 것, 시험의 본질은 많은 것을 공유할 두 가지 경쟁하는 이론 중에서 나은 이론 발견하기라는 것 그리고 그것들 대부분은 적합성 원칙을 공통으로 지닌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13. ‘비합리적행동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토론한 바와 같이, 상황 논리에 의하여 규정된 행동에 대한 근사치로서가 아니라 그 행동으로부터의 추론으로서 특정 행동에 우리가 관심을 둔다고 상상하라. 우리의 문제가. 자신의 상황에 부적절하게 행동하는 사람의 행동들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상상하라.

처칠은 세계 위기(The World Crisis)에서 전쟁들은 승리가 아니라 패배일 따름이라고 ㅡ 실제로 전쟁들은 무능에서의 경쟁들이라고 ㅡ 말했다. 이 언급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사회적 및 역사적 상황들에 대한 일종의 모형이 주어지지 않는가: 우리 행동들의 적합성이라는 합리성 원칙에 의해서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부적합성에 의하여 활성화되는 어떤 모형?

답변은, 대부분의 전쟁지도자들의 행동들이 그들이 상황을 보는 바로서의 상황에 적절한 것으로서 이해될 수 (적어도 충분한 근사치로) 없다기보다는 대부분의 전쟁지도자들은 그들의 과업에 부적절함을 처칠의 말이 의미한다는 것이다.

전쟁지도자들의 행동들을 (더 부절적하거나 덜 부적절한)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우리는 상황에 대한 그들 자신의 견해보다 더 넓은 견해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이 상황을 보는 바와 같이 (그들의 제한된 경험, 그들의 제한된 목적이나 과장된 목적 그들의 제한되거나 지나치게 흥분된 상상으로써) 그 상황으로 인하여 어떻게 그리고 왜 그들은 자신들이 행동했던 것과 같이 행동하게 되었는지를 ㅡ 다시 말해서, 상황 구조에 대한 그들의 부적절한 견해에 맞추어 적절하게 ㅡ 우리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룩되어야 한다. 처칠 자신은 이 해석 방법을 사용하여 크게 성공하는데, 예를 들어 오친렉-리취

(Auchinleck-Ritchie) 팀의 실패에 대한 자신의 신중한 분석에서 그렇다.

 

우리가 미치광이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할 때마다, 가능한 것의 한계까지 우리가 합리성 원칙을 사용하는 것은 나에게 흥미롭다. 가능한 한 미치광이의 목표들에 (편집광적일) 의하여 그리고 그가 근거를 두고 행동하는 정보에 의하여 ㅡ 다시 말해서, 그의 신념들에 (강박관념들, , 그렇게 악착같이 믿어지는 허위 이론들이어서 그 이론들이 실제로 수정될 수 없게 되는) ㅡ 의하여 우리는 그 미치광이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미치광이의 행동들을 그렇게 설명하면서 우리는 그 행동들을, 문제 상황에 대한 그 자신의 더 편협한 견해를 포함하는 문제 상황에 대한 우리의 더 넓은 지식을 통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그의 행동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견해에 ㅡ 미칠 정도로 잘못된 그의 견해 ㅡ 따른 그 행동들의 적합성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심지어 어떻게 그가 미칠 정도로 잘못된 자신의 견해에 도달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어떻게 특정 경험들로 인하여 세상에 대한 원래 정상적인 그의 정신이 부서져 그가 또 다른 견해를 ㅡ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정보에 따라서 그가 전개할 수 있었을 가장 합리적인 견해 ㅡ 채택하게 되었으며, 반증하는 사례들의 압력을 받아서 이 새로운 견해가 즉각 붕괴할 것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어떻게 그가 이 새로운 견해를 수정 불가능하게 만들었어야 했는지를 우리가 설명할 것인데 그 반증하는 사례들로 인하여 그는 자신의 세상에 대한 해석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가 알 수 있는 한) ㅡ 합리적인 관점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도 예방되어야 하는 상황인데 왜냐하면 그 상황으로 인하여 합리적 행동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비이성적 행동을 발견한 사람으로서 흔히 기술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고 게다가 매우 피상적인 해석이다. 신경증의 전형적인 근원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상황 모형과 동시에 합리성 원칙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하는 우리의 설명 도식에 완전히 속한다. 이유인즉 그가 신경증을, 어린이가 이해할 수 없어서 극복할 수 없었던 상황 밖에서 신경증은 최고의 탈출구였기 때문에 초기 어린 시절에 채택된 태도로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경증 채택은 어린이의 합리적 행위가 ㅡ 합리적인 것으로서, 가령, 자동차에 치일 위험에 직면했을 때 뒤로 펄쩍 뛰어 자전거를 탄 사람과 충돌하는 사람의 행위로서 ㅡ 된다. 그러므로 신경증 채택은, 어린이가 자신에게 즉각적이나 명백하거나 혹은 아마도 더 작은 악으로 보인 것을 ㅡ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견디기가 더 쉬운 ㅡ 선택했다는 의미에서 합리적이다.

여기서 나는 프로이트의 치유 방법에 대하여, 그 치유 방법이 그의 진단 방법이나 설명보다 훨씬 더 합리주의적이라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이 말하지 않겠다 (이유인즉 그 치유 방법이, 성인이 어린이로서 자신에 일어난 것을 완전히 이해하자마자 그의 신경증을 사라질 것이라는 전제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모든 것을 합리성 원칙을 통하여 설명한다면,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이나 동어반복적이 되지 않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유인즉 우리가 합리성 원칙을 참으로 인정하여 그 원칙을 진리에 대한 충분한 근사치로서만 이용하는 반면, 항진명제는 명백하게 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러하다면,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구분에는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정신적 건강과 정신적 질환의 구분에?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주요 구분은, 건강한 사람의 신념들을 수정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신념들을 수정하려는 특정 각오를 드러낸다. 그는 내키지 않게만 그렇게 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건들의, 다른 사람의 의견들의 그리고 비판적 논증들의 압력을 받아서 자신의 견해들을 기꺼이 수정한다.

이것이 그러하다면, 확고하게 고착된 견해들을 지닌 사람인 몰입하는사람의 정신상태는 미치광이의 정신상태와 유사하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고착된 그의 모든 견해가 당시 이용 가능한 최고의 견해와 우연히 일치한다는 의미에서, 그 모든 고착된 견해들은 합당할것이다. 그러나 그가 몰입해 있는 한, 그는 합리적이 아니다: 그는 어떤 변화인 어떤 수정에 저항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정확한 진실을 소유할 리가 없기 때문에 (누구도 소유하지 못한다) 그는 심지어 크게 잘못된 신념들에 대한 합리적 수정에 저항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신념들에 대한 수정이,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자신의 생애에 광범위하게 인정될지라도, 그는 저항할 것이다.

그리하여 몰입과 비이성적 신념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비이성주의자들로서 (혹은 포스트-이성주의자들[post-rationalists]) 기술할 때 나는 그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그들이 추론을 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은 비이성주의자들이다. 이유인즉 그들은, 자신들의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없는 것으로 자신들을 만드는 데서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광증의 포로들로 스스로 만드는 데서. 그 행동의 채택을 우리가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채택으로서 설명할 (정신과 의사를 좇아서), 행동에 의하여 그들은 자신들을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그들이 두려움 ㅡ 그들이 그 견해를 자신들의 전체 생애의 토대로 만들기 (혹은 그들이 그 견해를 만든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이 감히 포기하지 못하는 견해를, 비판에 의하여 포기하도록 강요당하는 두려움 ㅡ 때문에 스스로 저지르는 행동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채택. ‘자유로운 몰입과 광신주의는 ㅡ 광증과 매우 유사할 수 있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ㅡ 그리하여 최고로 위험한 정도로 관련된다.)

요약하면: 개인적인 태도로서의 합리성과 (원칙적으로 정신이 온전한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합리성 원칙을 우리는 구분해야 한다.

개인적인 태도로서의 합리성은 자신의 신념들을 수정하려는 각오의 태도이다. 지성적으로 가장 고도로 발달한 자체의 형태에서, 그것은 자신의 신념들을 비판적으로 토론하려는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비판적 토론에 비추어 그 신념들을 수정하려는 각오이다.

다른 한편으로 합리성 원칙, 사람들이 이런 의미에서 합리적이라는 ㅡ 사람들이 항상 합리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 ㅡ 전제와 관계가 없다. 우리의 설명적 상황 모형들을 거의 모두 활성화하는 것은 오히려 최소한의 원칙이고, 그 원칙이 참이 아님을 우리가 알지만 진리에 대한 충분한 근사치로서 간주할 충분한 이유들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히려 최소한의 원칙이다 (우리의 문제 상황들을 우리가 아는 바처럼 그 상황들에 대한 우리의 행동들의 적합성만을 그 원칙이 전제하기 때문에). 그 원칙을 채택함으로써, 우리의 모형들이 지닌 자의성이자 우리가 이 원칙 없이 지내려고 시도하면 정말로 변덕스럽게 되는 자의성이 상당히 감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