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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1권 9장 탐미주의, 완벽주의, 유토피아주의 (번역 수정본)

이윤진이카루스 2022. 5. 14. 14:54

열린사회와 그 적들 1권 9장 탐미주의, 완벽주의, 유토피아주의 (번역 수정본) (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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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탐미주의, 완벽주의,

유토피아주의

 

 

 

 

우선 모든 것을 파괴해버려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온전함을 실현하기 전에

우리의 저주받은 문명은 전부 사라져야 한다.’ ‘무르랑(Mourlan)’, 뒤 가르(DU GARD)티보가의 사람들(Les Thibauts)에서

 

플라톤의 강령에 내재한 것에는 정치에 대한 매우 위험한 접근방식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접근방식을 합리적인 사회공학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은 실제로 매우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플라톤식 접근방식은 유토피아적 공학(Utopian engineering)의 접근법으로 기술될 수 있는데, 유일하게 합리적이라고 내가 간주하고 점진적 공학(piecemeal engineering)이라는 이름으로 기술될 또 다른 종류의 사회공학과 반대가 된다. 유토피아식 접근방식은 철저한 역사주의에 대한 ㅡ 우리가 역사의 과정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암시하는 급진적으로 역사주의적인 접근방식에 대한 ㅡ 명백한 대안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위험하다; 동시에, 유토피아적 접근은 인간의 개입을 허용하는 플라톤의 역사주의처럼 덜 급진적인 플라톤의 역사주의에 대하여 필요한 보완책으로 보인다.

유토피아적 접근방식은 다음과 같이 기술될 것이다. 어떤 합리적 행동에도 틀림없이 어떤 목표가 있다. 합리적 행동은, 자체의 목표를 의식적이고 일관되게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정도로, 그리고 그 수단을 이 목표에 따라서 결정하는 것과 동일한 정도로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합리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한다면, 목표 선정은 우리가 해야 할 최초의 일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실제적 또는 궁극적 목표를 결정하는 데 신중해야 하는데, 그 궁극적 목표와 궁극적 목표로 가는 도중에서 만나는 실제로 수단일 뿐인 중간 혹은 부분적 목표를 우리는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이 구분을 무시한다면, 이 부분적 목표가 궁극적 목표를 촉진할 것 같은지 질문하는 것을 우리가 또한 틀림없이 무시하고 따라서 우리는 틀림없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데 실패한다. 이 원칙들이 정치활동의 영역에 적용되면, 그 원칙들로 인하여 우리가 실제 행동을 취하기 전에 우리가 궁극적인 정치적 목표 혹은 이상적 국가를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고 요구된다. 적어도 개략적 개념으로라도 이 궁극적 목표가 결정될 때만, 우리가 겨냥하는 사회의 청사진 같은 것을 우리가 소유했을 때만, 우리는 그 실현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나 수단을 고려하여 실제로 행동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수 있다. 이것들은 합리적으로 지칭될 수 있는 실제 정치적 움직임의, 그리고 특히 사회공학의 필수적인 예비조치이다.

이것이 요컨대 내가 유토피아적 공학이라고 부르는 방법론적 접근방식이다. 그 접근방식은 설득력이 있고 매력적이다. 사실상, 그 접근방식은 역사주의적 편견에 감염되지 않았거나 그 편견에 대항하여 반응하는 모든 사람을 현혹하는 방법론적 접근방식의 일종일 따름이다. 이로 인하여 그 접근방식은 그만큼 더 위험해지며, 그 접근방식을 비판하는 일이 그만큼 더 시급해진다.

유토피아적 공학에 대한 자세한 비판으로 나아가기 전에, 나는 사회공학에 대한 또 다른 접근방식, 이름하여 점진적 공학(piecemeal engineering)이라는 접근방식을 개괄하고 싶다. 점진적 공학이란 내가 방법론적으로 건전하다고 생각하는 접근방식이다. 이 방식을 채택하는 정치인은 자신의 생각에 앞서서 사회에 관한 청사진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을 것이며, 인류가 어느 날 이상적인 국가를 구현하여 지구상에서 행복과 완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희망하거나 희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완성이란, 조금이라도 도달될 수 있다면, 요원하다는 것과 인간의 모든 세대와 또한 현재 살아가는 세대에게 주장이 있다는 것을 그는 인식할 것이다; 아마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제도적 수단이 없기 때문에 행복하게 되는 요구보다는, 예방될 수 있는 곳에서는 불행해지지 않을 요구.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 가능한 모든 도움을 제공받을 청구권을 지닌다. 점진적 공학가는 따라서 사회의 최대 궁극적 선()을 추구하여 그 선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보다는 사회의 가장 크고 가장 시급한 악()을 추적하고 대항하여 싸우는 방법을 채택할 것이다. 이 차이점은 단순히 언어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사실상, 그 차이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인류를 향상하는 합리적인 방법과, 실제로 실험된다면 쉽게 인간 고통의 무참한 증가를 야기할 방법 사이의 차이이다. 그것은 어느 때도 적용될 수 있는 방법과 그 방법을 옹호하면 상황이 더 호전될 훗날까지 끊임없이 연기하는 행동이라는 수단이 쉽게 되어버릴 방법 사이의 차이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실제로 성공적이었던 문제를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곧 밝혀지는바, 러시아도 포함하여) 개선하는 유일한 방법과 시도된 곳마다 이성을 대신해서 폭력사용이 일어날 뿐이며 그 자체를 포기하지 않으면 원본 청사진을 포기할 수밖에 없던 방법 사이의 차이이다.

자신의 방법을 옹호하여, 점진적 공학가는 고통과 불의와 전쟁에 대항하는 체계적인 싸움은, 어떤 이상을 세우기 위한 싸움보다, 다수 사람들의 인정과 동의에 의하여 지지되기가 더 개연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 아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회적 악()의 다시 말해서 사회적 상황의 존재는 비교적 잘 설정될 수 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리 바꾸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상적인 사회에 대하여 추론하기는 무한히 더욱 어렵다. 사회생활은 몹시 복잡해서 대규모로 사회공학을 할 목적으로 만든 청사진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거나 혹은 아무도 없다; 그 청사진이 실용적인지; 그 청사진이 실제 향상을 이룩할지; 그 청사진이 어떤 종류의 고통을 포함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청사진의 실현을 위한 수단은 무엇일 것인지. 이것과 반대로, 점진적 공학을 위한 청사진들은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그것들은 단일한 제도들에 관한, 예를 들어 건강보험과 실업보험, 혹은 중재 재판정이나 불황대비 예산책정이나 교육개혁에 관한 청사진이다. 그 청사진이 잘못되면,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고 재조정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 청사진은 덜 위험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논란의 소지가 적다. 그러나 현존하는 악과 그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수단에 관하여 합리적인 합의를 이루는 것이, 이상적인 선()과 그 선을 실현하는 수단에 관하여 합리적인 합의를 이루는 것보다 더 쉽다면, 프로그램을 실행함에서 열정과 폭력 대신에 점진적 방법을 사용함에 의하여 즉, 이성의 사용에 의하여 모든 합리적인 정치적 개혁 중에서 가장 큰 실제적 난제를 극복할 것이라는 희망이 더 많다. 합리적인 타협에 다다를, 그리하여 민주주의적 방법에 의하여 개선을 이룩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타협[compromise]’은 추악한 말이지만 그 말의 합당한 사용법을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중요하다. 사람으로서 우리는 상황과 이해관계 등등의 영향에 저항해야 할지라도, 제도는 불가피하게 그런 것들과의 타협의 결과이다.)

저것과 반대로, 전체로서 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사용하여 이상적인 국가를 구현하려는 유토피아적 시도로 인하여, 강력한 중앙집권화된 소수 통치가 요구되고 그리하여 독재체제가 발생하기 쉽다. 나는 이것을 유토피아적 접근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생각한다; 이유인즉 내가, 통치력의 원리에 관한 장에서, 권위적인 통치란 매우 가증스러운 정부 형태라는 것을 밝히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저 장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몇 가지 요점으로 인하여 유토피아적 접근방식에 반대하는 훨씬 더 직접적인 논증들이 우리에게 제시된다. 인자한 독재자가 직면하는 난제들 중 한 가지 난제는 자신이 취한 조치의 효과가 자신의 선의(善意)와 일치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드 토크빌[de Tocqueville]100여 년 전에 분명하게 안 바와 같이). 그 난제는 권위주의란 비판을 틀림없이 억누른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인자한 독재자는 자신이 취한 조치에 관하여 불평을 쉽사리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견제가 없다면, 자신이 취한 조치가 원했던 인자한 목표를 성취했는지 그는 알아낼 수 없다. 그런 상황은 유토피아적 공학가에게 훨씬 더 악화할 것이 틀림없다. 사회 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랜 기간에 걸쳐 상당한 불편을 초래할 커다란 사업이다. 따라서 유토피아적 공학가는 많은 불평에 귀를 막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부당한 반대의견을 억누르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는, 레닌처럼, ‘달걀을 깨지 않고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로써, 유토피아적 공학가는 합당한 비판 또한 틀림없이 일관되게 억누른다. 유토피아적 공학가가 당면하는 또 다른 난제는 독재자의 후계자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7장에서 나는 이 문제의 몇 면모를 언급했다. 유토피아적 공학으로 인하여, 똑같이 인자한 후계자를 찾으려고 시도하는 인자한 독재자가 직면하는 난제와 흡사하지만 훨씬 더 심각한 난제가 나타난다 (7장의 주석 25 참조). 바로 그러한 유토피아적 사업의 포괄성 때문에 한 사회공학가나 한 무리의 공학가의 일생동안에 그 목표를 실현할 개연성이 없어진다. 그리고 후계자가 동일한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이상을 위하여 사람들이 겪은 모든 고초는 헛수고가 된 것이다.

이 논증이 일반화가 되면 유토피아적 접근방식에 추가 비판이 나오게 된다. 이 접근방식은, 원본 청사진이 아마도 어느 정도 조정은 되고 그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 사업의 기초로 남는다고 우리가 전제할 때만, 실용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이고 정신적인 혁명의 시간 될 것이고, 정치적 분야에서 새로운 실험을 하고 새로운 경험을 쌓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념과 이상(理想)이 변하리라고 예상된다. 원본 청사진을 만들었던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국가로 보였던 것이 그들의 후계자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저것이 인정되면, 접근방식 전체가 붕괴한다. 처음에 궁극적인 정치적 목표를 설정하고 그다음에 그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는 것은, 그 목표가 실현과정에서 상당히 변할 것임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허사이다. 지금까지 취해진 조치들이 새로운 목표의 실현으로부터 실제로 벗어난다는 것이 어느 순간에도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목표에 따라서 진로를 수정한다면, 우리는 동일한 위험에 빠지게 된다. 치른 모든 희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진전도 이룩하지 못할 것이다. 점진적 타협으로 실현하는 것보다 요원한 이상(理想: ideal)을 한걸음에 달려가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그 이상이 매우 요원하다면, 취해진 조치가 그 이상으로부터 벗어나는지 혹은 그 이상을 향하고 있는지 말하기가 심지어 어렵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과정이 갈지자() 모양으로 진행되거나, 헤겔이 사용한 은어(隱語)변증법적으로진행되거나, 혹은 전혀 분명하지 않게 계획되면, 이것은 특히 그렇다. (이것은 목적이 얼마나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되고 다소 유치한 질문과 관련이 있다. 어떤 목적도 모든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주장은 차치하고, 상당히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목적으로 인하여 더 멀리 떨어진 이상[理想]이 정당화할 수 없을 터인 일시적 조치가 정당화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일보한 두 가지 전제들, (α) 이 이상이 무엇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합리적인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과 (b) 그 이상을 실현하는 최상의 방법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합리적인 방법이 존재한다는 전제와 함께, 유토피아적 접근방식이란 하나의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이상에 대한 플라톤적 믿음에 의해서만 구제될 수 있음을 우리는 이제 안다. 그렇게 원대한 전제만이 유토피아적 방법론은 완전히 무용지물이라고 선언하는 우리를 막을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심지어 플라톤 자신과 가장 열정적인 플라톤주의자도 (α)가 확실히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궁극적 목표를 결정하는 합리적인 방법은 없고, 그와 같은 것은 어떤 종류의 직관뿐임을. 그러므로 유토피아적 공학가들 사이의 의견차는, 합리적인 방법이 없어서 이성 대신에 힘의 사용, 즉 폭력을 틀림없이 야기한다. 어떤 분명한 방향으로 진보가 조금이라고 이룩된다면, 그것은 채택된 방법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채택된 방법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공은 지도자의 탁월함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수한 지도자란 합리적인 방법으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운에 따라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비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상이란 실현될 수 없다고, 이상은 틀림없이 늘 유토피아로 남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나는 이상을 비판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독단적으로 선언되었던 많은 것들이, 예를 들어 시민들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제도 설립 즉, 국가 내부에서 범죄 예방을 위한 제도 설립이 실현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유효한 비판이 아닐 터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무력 침략이나 위협 같은 국제범죄 예방을 위한 동일한 제도 설립이 흔히 유토피아적이라고 낙인이 찍혔지만, 심지어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유토피아적 공학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하는 것은 사회를 전체로서 재건할 것을 권하는데,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진 경험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 실제 결과를 계산하기 어려운 싹쓸이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 야심적인 요구를 실현하는 데 필요할 사실적 지식 같은 것을 우리가 전혀 지니고 있지 않을지라도, 유토피아적 공학은 사회 전체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계획을 세울 것을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기획에 실제적인 경험이 부족하고 사실에 대한 지식은 경험에 근거하여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지식을 소유할 수 없다. 현재, 대규모의 공학에 필요한 사회학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다.

이 비판을 고찰하면, 유토피아적 공학가는 실제 경험의 필요성과 실제 경험에 근거한 사회적 기법의 필요성을 인정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실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실험을 두려워해서 우리가 움츠린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더 많이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유토피아적 공학가는 항변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유토피아적 공학이란 사회에 실험적 방식을 적용하는 것뿐이라고 아마도 부언할 것이다. 실험은 싹쓸이 변화를 포함하지 않고는 수행될 수 없다. 그 실험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사는 현대 사회의 독특한 특성 때문에, 대규모일 것임이 틀림없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에서의 실험은, 한 공장이나 마을 혹은 어느 지역에 국한된다면, 매우 절실하게 필요한 실재론적인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을 터이다.

유토피아적 공학을 지지하는 그런 주장은, 옹호될 수 없다고 광범위하게 믿어지는 편견 다시 말해서 사회적 실험은 대규모여야 한다는 편견인 사회적 실험이 실재론적 상황에서 수행되려면 사회 전체를 포함해야 한다는 편견을 드러낸다. 그러나 점진적 사회 실험은 작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실재론적 상황인 사회 한 가운데서 수행될 수 있는데 다시 말해서 사회 전체를 혁명화하지 않고도 가능하다. 사실상, 우리는 그런 실험을 늘 하고 있다. 새로운 종류의 생명보험, 새로운 종류의 조세제도, 새로운 형법 개혁의 도입 모두는 사회를 전체적으로 재구성하지 않고도 사회 전체를 통하여 큰 반향을 불러오는 사회적 실험이다. 심지어 새로운 가게를 열거나, 극장표를 예약하는 사람도 작은 규모로 일종의 사회적 실험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사회적 상황에 관한 모든 지식은 이런 종류의 실험을 수행함으로써 얻어진 경험에 근거한다. 우리가 반대하는 유토피아적 공학가가, 사회주의에서의 실험이란 실험실 상황에서 예를 들어 격리된 마을에서 실행된다면 가치가 없을 터라고 주장한다면, 옳은데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자 하는 바는 평범한 사회적 상황 하의 사회에서 사건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사례로 인하여 유토피아적 공학가의 편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가 밝혀진다. 그는 우리가 사회 전체 구조로 실험할 때 그 전체 구조를 개조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는 보다 작은(modest) 실험을 단지 작은(small) 사회의 전체 구조를 개조하는 실험으로서만 구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많이 배울 수 있는 종류의 실험은 한 번에 한 가지 사회제도를 바꾸는 것이다. 이유인즉 이런 방법으로서만 다른 제도의 구조 속에 제도를 맞추는 방법과 제도들을 조정하여 우리의 의도에 따라서 그 제도들이 작동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우리가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만 미래의 개혁 의지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 분명한 심각한 반향을 모험하지 않고, 실수를 저질러서 우리가 저지른 실수로부터 우리는 배울 수 있다. 게다가 유토피아적 방식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희생이 치러진 청사진에 대한 위험한 독단적 애착이 틀림없이 발생한다. 강력한 이해관계가 실험의 성공과 틀림없이 연계된다. 이 모든 것은 실험의 합리성 혹은 실험의 과학적 가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점진적 방식으로는 반복 실험과 지속적인 재조정이 가능하다. 사실상, 점진적 방식으로 인하여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실수를 변명하고 넘어가려고 들거나 자신들이 항상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는 대신에, 자신들의 실수에 조심하기 시작하는 다행스러운 상황이 아마도 초래될 것이다. 이것은 ㅡ 유토피아적 기획이나 역사주의적 예언이 아니고 ㅡ 과학적 방식의 비결 전부는 실수로부터 배우려는 각오이기 때문에, 과학적 방식을 정치에 도입하는 것을 의미할 터이다.

예를 들어 이 견해들은 사회공학과 기계공학을 비교함으로써 입증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유토피아적 공학가는 물론 기계 기술자가 간혹 심지어 매우 복잡한 기계류를 전체로서 계획한다고,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청사진은 특정 종류의 기계류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 기계류를 생산하는 공장 전체를 포함하며 미리 계획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나의 대답은 자신이 충분한 경험을, 다시 말해서 시행착오에 의하여 개발된 이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계 기술자는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가 될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계 기술자는 이미 모든 종류의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가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다시 말해서, 그가 점진적 방식을 적용하여 습득한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가 새로 만들어내는 기계류는 아주 많은 작은 개선의 결과이다. 그는 보통 먼저 모형을 만들어, 그 모형의 여러 부품에 많은 점진적 조정을 한 다음에야 생산을 위한 자신의 최종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간다. 유사하게, 자신의 기계를 생산하기 위한 그의 계획은 많은 경험을, 즉 옛 공장에서 이루어진 많은 점진적 개선을 결합한다. 대량의 즉, 대규모 방식은 점진적 방식이 우리들에게 먼저 많은 자세한 경험을 제공하는 곳에서, 그리고 심지어 그때에도 단지 이 경험의 영역 안에서만 효력을 발휘한다. 청사진에만 근거하여 새로운 엔진을 생산하는 데로 나아갈 준비가 된 제조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청사진이 처음에 모형을 만들어 그 모형을 가능한 한 많은 작은 조정에 의하여 개발되지않고 가장 우수한 전문가에 의하여 만들어질지라도.

정치에서 플라톤의 이상주의에 대한 이 비판과 마르크스가 유토피아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대조하는 것이 아마도 유익하다. 마르크스의 비판과 나의 비판에 공통적인 것은 둘 다 더 많은 실재론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우리 둘은 유토피아적 계획이 그 계획들이 구상되는 방식으로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데 왜냐하면 사회적 행동은 예상되는 결과를 정확하게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행동하면서 배우고 ㅡ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배워야 하고 ㅡ 그래서 우리의 견해를 수정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 때문에 점진적 접근방식이 무효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차이점이 있다. 유토피아주의를 논박하면서, 마르크스는 사실상 모든 사회공학을 비난한다 ㅡ 이 요점은 이해되지 못한다. 그는 사회란 우리가 지닌 합리적 계획에 따라서가 아니라 역사법칙에 따라서 틀림없이 성장하기 때문에, 사회제도의 합리적인 기획에 관한 믿음을 완전히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역사적 과정의 산고(産苦)를 더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모든 사회공학에 반대하여 급진적으로 역사주의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아마도 내가 비현실적이라고 공격한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일지라도, 유토피아주의에는 플라톤의 접근방식에서 유난히 특징적이고 마르크스가 반대하지 않는 한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싹쓸이 유토피아주의이자, 사회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전체로서 다루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회악의 근원까지 파헤쳐야 한다는, 우리가 (뒤 가르[Du Gard]가 말하는 바와 같이) ‘세상에 온전함을 가져오기를희망한다면 불쾌한 사회제도를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신념이다. 그것은, 요컨대, 비타협적인 급진주의(radicalism)이다. (독자들은 내가 이 급진주의라는 용어를 ㅡ 요즘 관습적으로 쓰이는 자유적 진보주의의 의미가 아니라 ㅡ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는자세를 규정하기 위하여 그 원래 의미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것이다.) 플라톤과 마르크스 두 사람은 전체 사회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종말론적 혁명을 꿈꾸고 있다.

이 싹쓸이, 플라톤식 접근방식의 이 극단적 급진주의는 (그리고 마르크스식 접근방식의 극단적 급진주의 또한) 자체의 탐미주의와, 즉 우리들의 세상보다 조금 낫고 더 합리적일 뿐 아니라 그 세상의 모든 추악함이 없는 세상을 건설하려는 욕망과 연계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엉성하게 조각을 덧댄 낡은 옷이 아니라 정말로 아름답고 새로운 세계인 완전히 새로운 가운. 이 탐미주의는 매우 이해될만한 견해이다; 사실상, 나는 우리 대부분이 완벽에 관한 그런 꿈으로 고통을 당한다고 믿는다. (왜 우리가 그런 꿈으로 고통을 당하는지 그 몇 가지 이유는 다음 장에 나오리라고 나는 희망한다.) 그러나 이 탐미적 열정은 이성(理性)에 의해서, 책임감에 의해서, 그리고 도움을 주려는 인도주의적 충동에 의해서 억제될 때만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탐미주의적 열정은 신경증이나 병적 흥분상태로 발전하기 쉬운 위험한 열정이 된다.

이 탐미주의가 플라톤에게서 보다 더 강하게 표현된 곳을 우리는 발견하지 못한다. 플라톤은 예술가였다; 그리고 다수의 최고 예술가들처럼, 그는 모형인 자기 작품의 신성한 원형을 시각화하여 그 원형을 성실하게 복제하려고노력했다. 앞장에 인용된 많은 인용구들로 인하여 이 요점이 예시된다. 플라톤이 변증학으로서 기술하는 것은 주로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닌 세상에 대한 지적(知的) 직관이다. 그가 주장하는 훈련된 철학자는 아름답고 정의롭고, 선량한 것의 진실을 보고, 천상에서 지상으로 그 진실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다. 플라톤에게 정치란 왕의 예술이다. 그 정치는 예술이다 ㅡ 우리가 말하는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라는, 혹은 상황을 처리하는 기술이라는 은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단어의 보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예술. 그것은 음악이나 회화, 혹은 건축과 같이 구성의 예술이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치가는 아름다움을 위하여 도시들 구상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항의를 해야겠다. 인간의 삶이 예술가가 지닌 자기표현을 위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너무 많이 방해가 되지 않는 한, 모든 사람에게는 원하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정형화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내가 탐미주의적 충동에 많이 공감할지라도, 예술가는 다른 재료에서 표현할 것을 나는 제안한다. 정치는 평등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꿈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과 불의로 고생하는 사람을 돕는다는 필요성에 굴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목적에 부합하는 제도를 구축하는 필요성에 굴복해야 한다.

플라톤의 철저한 급진주의, 즉 싹쓸이식 행동에 대한 요구와 그의 탐미주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관찰하면 흥미롭다. 아래의 구절들은 매우 특징적이다. 플라톤은 신성한 것과 교감하는 철학자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가 자신이 지닌 천상의 영상을 도시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실현하려는.. 충동에 의하여 압도당할 것이라고 처음 언급한다 ㅡ 그 설계자가 신성한 것을 자신의 모형으로 지니고 있는 예술가가 아니라면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도시. 설계자들의 관하여 상세한 설명을 요청받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그들은 도시와 사람들의 인격을 화포(canvas)로 생각할 거야, 그리고 그들은 우선 자신들의 화포를 깨끗하게 만들 거야 ㅡ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다른 사람과 달라질 요점이지. 그들에게 깨끗한 화포가 주어지지 않거나, 그들 자신이 화포를 청소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도시나 개인에게 작업을 시작하지 않을 거야 (그들은 법률도 제정하지 않지).’

플라톤이 화포 청소(canvas-cleaning)에 관하여 말할 때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조금 나중에 설명된다. ‘그게 어떻게 이루어질까?’라고 글라우콘(Glaucon)이 묻자, 소크라테스는 대답한다, ‘열 살 이상의 모든 시민은 도시로부터 추방되어 시골 어느 곳으로 이송되어야 해; 그리고 부모의 예절이나 버릇의 영향을 받지 않은 아이들은 맡겨져야지. 그 아이들은 우리가 기술한 [진실로 철학의] 방식으로, 그리고 법률에 따라서 교육되어야지.’ (물론 철학자들은 추방될 시민들에 포함되지 않아: 그들은 교육가로 남고, 그 철학자가 임무를 수행하도록 돕는 시민이 아닌 사람들도 아마도 남는다.) 동일한 정신으로 플라톤은 정치가(Statesman)에서 왕의 정치학(Royal Science of Statesmanship)에 따라서 통치하는 왕족 통치자에 관하여 말한다: ‘그들이 법률에 의해서든 아니면 법률 없이 복종하거나 불복하는 백성을 통치하게 되든;... 그리고 그들이 국가의 시민 얼마를 살해하거나 이주시킴 [혹은 추방함‘]으로써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를 정화하든... ㅡ 그들이 과학과 정의(正義)에 따라서 진행하고 국가를... 보전하고 국가를 과거보다 낫게 만든다면, 이런 형태의 정부는 올바른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되어야 한다.’

이것이 예술가-정치인이 나아가야 하는 길이다. 이것이 화포 청소(canvas-cleaning)가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현존하는 제도와 전통을 근절해야 한다. 그는 정화하고 숙청하고, 쫓아내고, 추방하고 죽여야 한다. (‘말살하다[liquidate]’가 그것에 대한 무서운 현대적 용어이다.) 플라톤의 진술은 모든 형태의 철저한 급진주의의 비타협적 태도에 ㅡ 타협을 거부하는 탐미주의자의 비타협적 태도에 ㅡ 대한 정말로 참된 기술이다. 사회란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워야 한다는 견해로 인하여 폭력적 조치들이 매우 쉽게 발생한다. 그러나 이 모든 급진주의와 폭력은 비현실적이며 헛되다. (이것은 러시아의 발전 사례로 밝혀졌다. 소위 전쟁 공산주의라는 화포 청소가 야기한 경제파국 후에, 레닌은 그 원칙이나 기법을 의식적으로 공식화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실제로 일종의 점진적 공학인 자신의 신경제 정책(New Economic Policy)’을 도입했다. 그는 그렇게도 많은 인간의 고통을 낳으며 뿌리가 뽑혀버린 구상의 특징 대부분을 복원함에 의하여 시작했다. 화폐, 시장, 소득격차, 그리고 사유재산이 ㅡ 잠시 심지어 생산에서 사기업까지 ㅡ 도입되었고, 이 기초가 재설립된 후에야 개혁의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플라톤의 탐미주의적 급진주의의 근거를 비판하기 위하여, 우리는 두 가지 다른 요점들을 구분할 것이다.

첫 번째 것은 이렇다. 우리의 사회체제에 대하여 그리고 그 체제를 또 다른 체제로 바꿀 필요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사람이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전에 깨끗하게 지워져야 하는 화포(canvas)에 그려진 그림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몇 가지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차이점 하나는 화가와 공동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삶을 가능케 하는 제도뿐 아니라 화가 및 나은 세상에 대한 화가의 꿈과 계획 그리고 화가가 생각하는 건전성과 도덕성의 기준 모두가 사회체제, 즉 지워져야 할 그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화포를 청소하려면, 그들은 자신과 자신이 지닌 유토피아적 계획을 파괴해야 할 터이다. (그리고 그다음에 따라올 것은 아마도 아름다운 플라톤식 이상[理想]의 복제품이 아니고 혼란일 터이다.) 정치적 예술가는 아르키메데스처럼 지렛대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자신이 집착할 수 있는 사회 밖의 장소를 소리쳐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란 재건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틀림없이 작동한다. 이것이 사회공학에서 더 많은 경험을 습득할 때까지 우리가 사회제도를 점진적으로 개혁해야 하는 간단한 이유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더 중요한 두 번째 요점, 즉 급진주의에 내재하는 비이성주의에 다다른다. 모든 문제에서 우리는 시행착오에 의하여, 실수를 저지르고 개선함에 의하여 배울 수 있을 따름이다; 영감(靈感)이 경험에 의하여 통제된다면 매우 귀중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영감에 의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의 사회를 완전히 재건하면 즉각 작동되는 체제가 생겨날 터라고 전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오히려 경험 부족 때문에, 작은 조정을 오랫동안 그리고 힘들여 실전해나가는 과정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는 많은 실수가 저질러질 터라고 우리는 예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 적용을 지지하는 점진적 공학이라는 저 합리적 방식에 의하여. 그러나 이 방식을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하다고 혐오하는 사람들은, 깨끗한 화포로 새롭게 시작하기 위하여 그들이 새로 건설한 사회를 다시 지워야 할 터이다; 그리고 동일한 이유로 새로운 시작이 완벽을 또한 초래하지 않을 터이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하고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할 터이다. 처음에 급진적 화포청소(canvas-cleaning)를 해본 후에야, 이것을 인정하여 점진적 개선이라는 보다 제한적인 방식을 채택할 마음을 먹는 사람은 그들이 취한 처음의 싹쓸이식이고 폭력적인 조치들이 완전히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탐미주의와 급진주의로 인하여 틀림없이 우리는 이성을 버리게 되고, 이성을 정치적 기적을 바라는 난폭한 희망으로 대체하게 된다.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에 도취되어 나타나는 이 비이성적 태도를 나는 낭만주의(Romanticism)라고 부른다. 낭만주의는 과거에서나 미래에서의 천상의 도시를 추구한다; 낭만주의는 자연으로 돌아가라’, 혹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라고 설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이성보다는 우리의 감정에 호소한다. 심지어 지구상에 천국을 만들겠다는 최상의 의도를 가지고도, 낭만주의는 지옥을 만들어낼 뿐이다 ㅡ 인간만이 동료 인간을 위하여 마련하는 그 지옥.

 

 

주석

로제 마르탱 뒤 가르(Roger Martin Du Gard)의 저서 티보가의 사람들(Les Thibaults)에서 유래하는 좌우명은 영어본의 (1914년 여름, 런던, 1940) 575쪽에서 인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