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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1권 8장 철학자 왕 (번역 수정본)

이윤진이카루스 2022. 5. 3.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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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철학자 왕()

 

 

 

 

그리고 국가는 기념비를 세울 것이다... 그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리고 반신(半神)인 그들에게 제물이 바쳐질

것이다,... 은총의 복을 받아서 신처럼 되어버린 사람들로서...

                                                      플라톤.

 

 

 

 

 

 

플라톤의 신조와 소크라테스의 신조 사이의 대비는 내가 지금까지 밝힌 것보다 훨씬 더 크다. 플라톤은 철학자에 대한 정의(定義)에서 소크라테스를 따랐다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누구를 진정한 철학자라고 부르는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국가(Republic)에서 읽는다. 그러나 그 자신이 이렇게 서술할 때, 그의 말에는 전혀 신빙성이 없다. 그도 이 서술을 실제로 신뢰하지 않는데, 이유인즉 그가 다른 장소에서 거짓말과 속임수를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 통치자가 갖는 제왕적 특권이라고 직설적으로 선언하기 때문이다: ‘도시의 이익을 위하여 적과 자신의 시민 모두를 속이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어떤 사람의 일이라면, 도시의 통치자들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이 특권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도시의 이익을 위하여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집단적 효용성 원칙에 호소하는 것이 궁극적인 윤리적 고찰임을 우리는 다시 발견한다. 전체주의적 도덕성은 모든 것, 심지어 철학자에 대한 정의(定義)인 철학자의 이데아도 배척한다. 정치적 편의에 관한 동일한 원칙에 의하여 피통치자는 사실을 말할 것을 강요당하리라는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통치자는 다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적발하면.. 그 때 도시에 상처를 입히고 도시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를 도입했기 때문에 통치자는 그를 처벌할 것이다... ’ 겨우 이렇게 사소하게 예기치 못한 의미에서만 플라톤이 주장하는 통치자는 철학자 왕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I

플라톤은 자신이 주장하는 집단적 편의 원리를 성실성의 문제에 적용하는데, 의사의 사례에 의하여 예시한다. 플라톤은 자신의 정치적 임무를 사회라는 병든 몸뚱이를 치료하는 사람, 혹은 구원하는 사람으로 시각화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사례는 잘 선정되었다. 이것과 별도로, 그가 의술에 할당하는 역할로 인하여, 국가의 이익이 시민 부모의 결혼에서부터 시민의 무덤에 이르기까지 시민의 삶을 지배하는, 플라톤이 주장하는 도시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조명된다. 플라톤은 의술을 정치의 한 형태로 해석하거나, 혹은 그 자신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그는 의술의 신() 아스쿨라피오스(Aesculapius)를 정치가로 간주한다. 의술은, 생명의 연장을 그 목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이익만을 그 목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그는 설명한다. ‘합당하게 통치되는 모든 공동체에서, 각자는 국가 안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특정한 일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각자는 수행해야 하고, 누구에게도 병에 걸려 치료하는 데 쓸 시간이 없다.’ 따라서, 의사에게는 자신의 일상적인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사람을 치료할 권리가 없다; 이유인즉 그런 사람은 자신과 국가에게 무익하기 때문이다’. 이것에 추가되는 생각은 그러한 사람에게는 아마도 똑같이 병에 걸릴 자식과 또한 국가에 짐이 될 자식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노인이 되어서 플라톤은 개인주의에 대한 자신의 증폭된 증오에도 불구하고, 보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의술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는 심지어, 자유시민을 노예처럼 다루는 의사에 대하여, ‘자신의 의지가 법률인 참주처럼 명령을 내리고 그다음에 다음 노예-환자에게로 달려간다고 불평하며, 적어도 노예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치료 시에 보다 친절하고 인내하라고 호소한다.) 거짓말과 속임수의 쓸모에 관해서, 플라톤은 이것들이 오직 의술로서만 유용하다고 촉구한다; 그러나 국가의 통치자는 강한 약을 처방하는 용기를 지니지 못한 몇몇 평범한 의사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철학자로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인 철학자 왕은 왕으로서 보다 용감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 까닭은 그가 매우 많은 거짓말과 속임수를 처방할피통치자의 이익을 위하여 결심이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플라톤은 서둘러 부언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고 플라톤의 의술에 대한 언급에서 다시 우리가 알게 되는 바와 같이, 이것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를 의미한다. (칸트는 예전에 매우 다른 정신으로, ‘성실은 정책보다 낫다는 문장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반면 성실이 가장 좋은 정책이라는 문장은 정말로 의심스러울지도 모른다고 언급했다.)

플라톤은 통치자들에게 강한 약을 사용하라고 촉구하면서 어떤 거짓말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크로스먼(Crossman)은 플라톤이 선전, 피통치자 다수의 무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기교 의미한다고 옳게 강조한다. 분명히, 플라톤은 이것들을 첫 번째로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통치자들은 완전히 계몽된 지식인층이어야 하는 반면, 선전용 거짓말은 피통치자에게 소비용으로 의도되었을 따름이라고 크로스먼이 제시할 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소크라테스의 지성주의와 유사한 어떤 것에 대한 플라톤의 완전히 단절이, 심지어 통치자 자신들이 적어도 몇 세대 뒤에는 자신들의 가장 큰 선전용 거짓말을 혹시 믿게 되리라는 자신의 희망을 두 번이나 그가 표현한 곳에서 가장 명백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 속의 금속이라는, 그리고 대지에서 태어난 자라는 신화(Myth of the Metals in Man and of Earthborn)로 알려진 그의 인종주의, 즉 그가 주장하는 피와 흙의 신화(Myth of Blood and Soil)를 나는 의미한다. 여기서 플라톤의 공리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원리로 인하여 모든 것, 심지어 진실을 알, 그리고 진실을 요구할 통치자의 특권도 거부되는 것을 우리는 안다. 통치자 자신도 선전용 거짓말을 신뢰해야 한다고 그가 소망하는 동기는, 그 거짓말이 지니는 건전한 효과의 증폭, 즉 주인 인종의 통치를 강화하여 궁극적으로 모든 정치적 변화를 중지시키려는 그의 희망이다.

 

II

플라톤은 자신이 말하는 피와 흙의 신화(Myth of Blood and Soil)를 사기극이라고 직설적으로 시인하며 소개한다. ‘, 그렇다면 정말로 방금 전에 우리가 언급한 매우 편리한 거짓말 중 하나를 혹시 꾸며낼 수 있을 터인가? 우리가 운이 좋다면, 군주다운 거짓말 하나의 도움으로 받아 심지어 통치자들 자신들을 설득할 것이지만 아무튼 도시의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제외하고라고 국가(Republic)의 소크라테스는 말한다.설득하다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을 주목하면 흥미롭다. 거짓말을 믿도록 어떤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더 정확하게, 그 사람을 오도하거나 속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운이 좋다면, 우리는 심지어 통치자 자신들 속일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그 글귀의 솔직한 냉소와 더 어울릴 터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설득이라는 단어를 매우 빈번하게 사용하여, 여기서 사용된 사례로 인하여 다른 구절들의 의미가 밝혀진다. 그것은, 유사한 구절들에서 그가 선전용 거짓말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특히 그가 정치가란 설득과 권력 모두를 사용하여통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옹호하는 곳에서.

자신의 군주다운 거짓말을 선언하고 나서, 플라톤은 자신의 신화를 설명하는 데로 곧장 나아가는 대신, 처음에는 자신의 정의(正義) 발견에 앞서는 긴 서문과 다소 흡사한 긴 서문을 전개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의 불안을 나타내는 징표이다. 그는 뒤에 이어지는 제안이 독자로부터 많은 호의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듯싶다. 그 신화 자체는 두 가지 관념을 소개한다. 첫 번째 관념은 모국의 방어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도시의 전사들이 조국의 땅에서 태어난’, 즉 토착민으로서 자신들의 어머니인 조국을 방어할 각오가 되어있다는 관념이다. 이 오래되고 유명한 관념은 분명히 플라톤의 주저함에 대한 이유가 아니다 (대화의 표현은 교묘하게 주저함을 암시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야기의 나머지인 두 번째 관념은 인종주의의 신화이다: ‘().. 통치할 수 있는 사람에게 황금을 넣어주었고, 보조원들에게는 은을, 그리고 농부와 다른 생산 계급에게 철과 구리를 넣어주었다.’ 이 금속들은 세습되어, 인종적 특징이 된다. 이 구절에서 플라톤은 주저하며 처음으로 인종주의를 도입하는데, 자녀들이 부모의 금속들과 비교하여 또 다른 금속의 혼합물로써 태어날 가능성을 그는 참작한다; 그는 여기서 다음 규칙을 발표한다고 인정되어야 한다: 하층 계급 하나에서 자녀들이 금과 은의 혼합물로써 태어난다그들은 수호자로 지명될 것이고.. 보조원으로 지명될 것이다.’ 그러나 이 양보는 국가(Republic)의 나중 구절들에서 (그리고 또한 법률[Laws]에서), 특히 위 5장에서 부분적으로 인용된 인간의 추락과 숫자 이야기에서 취소된다. 이 구절로부터 천한 금속들의 여하한 혼합물도 고위 계급에서 제외됨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혼합 가능성과 신분에서 상응하는 변화는, 귀족으로 태어났으나 퇴보하는 자식은 밀려 내려가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고 천하게 태어난 아이가 신분 상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금속의 혼합이 틀림없이 파멸을 야기하는 방식은 인간의 추락 이야기의 결말 구절에 기술된다: ‘쇠는 은과 섞이고 구리는 금과 섞일 것이다, 그리고 이 혼합물로부터 변종과 불합리한 잡종이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태어날 때마다 이것들은 갈등과 적의(敵意)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불화가 어디서 생기든, 이것이 그 불화의 족보와 탄생을 우리가 기술해야 하는 방식이다. 대지에서 태어난 자들의 신화가, ‘도시는 쇠와 구리로 수호될 때 틀림없이 멸망한다는 날조된 신탁의 예언을 냉소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끝난다는 것을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이다. 자신의 인종주의를 즉시 더 급진적인 형태로 제시하기를 플라톤이 주저한다는 것은 그 인종주의가 플라톤 시대의 민주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경향에 얼마나 반대가 되었는지를 그가 알고 있었음을 가리킨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피와 흙의 신화가 선전용 거짓말이라고 플라톤이 직설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우리가 고려하면, 그 신화에 대하여 논평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다소 당황스럽다. 예를 들어 애덤(Adam)은 이렇게 서술한다: ‘그 신화가 없다면, 국가에 대한 현재의 개괄은 불완전할 터이다. 우리는 도시의 영원함을 위하여 어떤 보장을 요구한다..; 그리고 플라톤이 저 보장을 이성보다는 신념에서 틀림없이 발견했던 것보다 플라톤의.. 교육의 우세한 도덕적 및 종교적 정신과 더 조화를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터이다.’ 플라톤이 선전용 거짓말을 옹호한 것보다 플라톤의 전체주의적 도덕성과 더 조화를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이것이 완전히 애덤이 의미했던 것은 아닐지라도). 그러나 어떻게 종교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비평가가 암시적으로, 종교와 신념이 기회주의적 거짓말의 수준에 있다고 선언할 수 있는지 나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상 애덤의 비평은, 사실이 아닐지라도 종교의 교리는 매우 이롭고 필수적인 정치적 고안이라는 홉스(Hobbes)의 규약주의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고찰로 인하여 플라톤이 결국 사람들이 혹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규약주의자였음이 우리에게 밝혀진다. 규약주의자로 일컬어지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가 적어도 법률은 우리가 만든 것인데 신적(神的) 영감의 도움을 받아서 만들어진다고 믿었던 반면, 그는 심지어 규약에 의하여신앙을 세우는 일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가 종교적 믿음이란 날조일 뿐이라고 인정하는 솔직함을 지니고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한다). 소피스트들의 체제전복적인 규약주의에 대항하여 플라톤이 싸운 것에 대하여, 그리고 궁극적으로 종교에 근거한 정신적 자연주의를 정립한 것에 대하여 플라톤을 칭찬하는 플라톤 비평가들이 규약이나 더 정확하게 조작을 종교의 궁극적 근거로 만들어버리는 그를 왜 비난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상, 그의 고취된 거짓말에 의하여 밝혀진 바와 같이 종교에 대한 플라톤의 자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에 치욕스러운 피의 정권을 세웠던 30인의 참주 중 지도자였던 자신이 사랑했던 삼촌 그리티아스(Critias)의 자세와 실제로 동일하다. 시인이었던 크리티아스는 선전용 거짓말을 찬미한 최초의 사람이었는데, 그의 조작을 플라톤은 국민을 설득하기위하여, 즉 국민을 협박하여 복종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종교를 날조하는 현명하고 교활한 사람을 찬양하는 강압적 운문으로 기술했다.

 

그때, 현명하고 교활한 사람이 온 것 같았다,

()에 대한 두려움을 처음으로 창안한 자...

그는 매우 매혹적인 교설인 이야기를 만들었다,

거짓말하는 지식의 장막에 의하여 진실을 감추고.

그는 무서운 신()들이 사는 곳을 말했다,

회전하는 천공 위, 그곳에서 뇌성이 울린다

그리고 번개의 무서운 섬광이 눈을 멀게 만든다...

그는 그렇게 공포의 사슬로 사람들을 묶는다;

아름다운 곳에 사는 신들로 사람들을 에워싸고,

그는 자신의 마술로 사람들을 매혹하고 기를 꺾어 놓는다

그리하여 무법은 법률과 질서로 변했다.’

 

크리티아스(Critias)의 견해로, 종교는 위대하고 영리한 정치가의 군주다운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플라톤의 견해는 국가(Republic)에서 (그 저서에서 그는 신화란 거짓말이라고 직설적으로 시인한다) 신화를 소개하는 데서와, 의식(儀式)과 신을 설정하는 것이 위대한 사상가의 문제라고 말하는 법률(Laws)에서 두드러지게 흡사하다. 그러나 이것이 플라톤의 종교적 자세에 관한 진실 전부일까? 이 분야에서 그는 기회주의자일 뿐이었을까, 그리고 그의 초기 작품의 매우 다른 정신은 단지 소크라테스의 것이었을까? 나는 직감적으로 심지어 나중 작품에 간혹 더 진솔한 종교적 감정이 표현되어 있을 것이라고 느끼지만, 물론 이 문제를 확실하게 결정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플라톤이 종교적 문제를 정치와 관련하여 생각하는 곳마다, 그의 정치적 기회주의로 인하여 다른 모든 감정이 휩쓸려버린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법률(Laws)에서 신()에 관한 정직하고 명예로운 사람들의 견해가 국가가 믿는 견해와 다르다면 심지어 그 사람들에게도 가장 혹독한 처벌을 플라톤은 요구한다. 그들의 영혼은 종교재판가들의 야간 위원회에서 다루어져야 하고, 그들이 승복하지 않거나 그들이 범죄를 다시 저지른다면, 불경죄는 사형을 의미한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바로 저 죄목으로 희생된 것을 잊었던가?

이런 주장들을 고취하는 것은, 종교적 신앙과 같은 것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주로 국가 이익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핵심적인 종교적 원리에 의하여 지적된다. 신들(gods)은 선과 악 사이의 갈등, 즉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의 갈등으로 설명되는 갈등에서 잘못된 편에 서는 모든 사람들을 혹독하게 처벌한다고 그는 법률(Laws)에서 가르친다. 그리고 신들(gods)은 인간에게 능동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단순한 방관자들이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신들(gods)을 달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도를 올리거나 제물을 바친다고 그들이 감동하여 처벌을 삼가지 않는다. 이 가르침의 뒤에 있는 정치적 관심은 명백하고, 국가는 정치-종교적 독단의 여하한 부분에 관한 모든 의심, 그리고 특히 신()은 처벌을 삼가지 않는다는 교설에 관한 의심을 억압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요구에 의하여 그 정치적 관심은 훨씬 더 명백해진다.

플라톤의 기회주의와 거짓말에 관한 그의 이론으로 인하여 물론 그가 말하는 것이 해석하기 어렵게 된다. 그는 정의(justice)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어느 정도까지 신뢰했을까? 그는 자신이 설교한 종교적 교설의 진실성을 어느 정도까지 신뢰했을까? 그는 다른 (정도가 약한) 무신론자들에 대하여 처벌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혹시 무신론자였을까? 이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할 희망을 우리가 가질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플라톤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 어렵고, 방법론적으로 불건전하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모든 변화를 중지시킬 시급한 필요가 있다는 그의 믿음에 관한 근본적인 충심은 의문시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10장에서 이 문제로 돌아가겠다.) 다른 한편으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진리 사랑을, 주인 계급 통치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더 근본적인 원리에 종속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플라톤의 진리 이론이 그의 정의(正義: justice) 이론보다 다소 덜 급진적이라는 것을 주목하면 흥미롭다. 정의(正義: justice)는 그가 주장하는 전체주의적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실제로 정의(定義: define)되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물론 진리의 개념을 동일한 공리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형태로 정의하는(定義: define) 것이 가능했을 터이다. 나의 국가 이익에 부합하는 모든 것은 신뢰되어야 하고 그러므로 으로 지칭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신화는 참이라고 플라톤은 말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면 진리에 대한 다른 기준은 틀림없이 없다. 이론적으로, 유사한 조치가 실제로 헤겔의 실용주의적 후계자에 의해서 취해졌다; 실제로, 그 조치는 헤겔 자신과 그의 인종주의자 후계자에 의하여 취해졌다. 그러나 플라톤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인정할 정도로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헤겔학파가 취한 조치는 소크라테스의 동료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없었을 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III

플라톤이 주장하는 최상의 국가에서 진리의 이데아가 수행하는 역할은 이쯤 해두자. 그러나 정의(Justice)와 진리는 별도로 하고, 순전히 전체주의적으로서 그리고 역사주의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플라톤의 정치강령을 해석한 것에 대하여 6장에서 제기된 반대이론을 우리가 일소하고 싶으면, 우리는 아직도 선(), (), 그리고 행복 같은 몇 가지 추가적인 이데아들을 고찰해야 한다. 이 이데아들을 토론하기 위한 접근방식과 또한 앞장에서 부분적으로 토론된 지혜 이데아에 대한 접근방식은, 우리가 진리 이데아를 토론함에 의하여 도출된 다소 부정적인 결과를 고찰함에 의하여 이룩될 수 있다. 이유인즉 이 결과로 인하여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왕은 더 대담해져서 거짓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철학자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정의(定義)한다면 왜 철학자들이 왕이 되어야 하고 왕이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플라톤은 요구할까?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변은 물론 플라톤이 철학자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사실상 매우 다른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가 주장하는 철학자란 지혜를 헌신적으로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만한 지혜 소유자임을 우리는 앞장에서 것을 알았다. 그 철학자는 박식한 사람인 현자(賢者)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요구하는 것은 학식의 지배이다 내가 이름을 붙인다면 학식정치(sophocracy). 이 요구를 이해하기 위하여, 어떤 종류의 기능으로 인하여 플라톤이 말하는 것처럼 그가 주장하는 국가의 통치자는 지식의 소유자, 완전히 자격을 갖춘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알아내려고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고찰될 기능은 두 가지 주요 무리로 나뉠 수 있는데 즉, 국가의 창건과 관련된 것과 국가 보전과 관련된 것이다.

 

IV

철학자 왕의 최우선 기능은 도시의 창건자와 입법자의 기능이다. 이 과제를 위하여 철학자가 플라톤에게 왜 필요한지는 분명하다. 국가가 안정되려면, 국가는 국가에 대한 신성한 형상이나 이데아의 진실한 모조품이어야 한다. 그러나 최고의 과학인 변증법에 능통한 철학자만이 천상의 원형을 보고 복제할 수 있다. 이 요점은 플라톤이 철학자의 통치권을 위하여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국가(Republic)의 그 부분에서 많이 강조된다. 철학자는 진리 알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부분들만이 아니라 전체 보기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감지될 수 있는 것들과 그것들의 아름다운 소리와 색깔 및 형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실제적 본성을 보고 찬양하기를 원한다 아름다움의 형상이나 이데아를. 이런 방식으로, 플라톤은 철학자에게 새로운 용어를 부여하는데 형상과 이데아라는 신성한 세계를 사랑하고 내다보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의미이다. 그런 상태로, 철학자는 도덕적인 도시의 창건자가 되는 사람이다: ‘신적(神的: divine)인 것과 교감하는 철학자는 이상적인 도시와 그 도시에 사는 이상적인 시민들에 관한 자신의 천상의 영상을.. 실현하려는 충동으로 압도될 것이다. 그는 신성한 것을 자신의 모형으로가진 설계가나 화가를 닮았다. 오직 진정한 철학자만이 도시의 기본설계를 그릴수 있는데, 이유인즉 그들만이 눈을 이리저리, 모형에서 그림으로, 다시 그림에서 모형으로 굴림으로써 원형을 볼 수 있고 모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체제를 그리는 화가로서, 철학자는 선()과 지혜의 빛에 의하여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두 가지 관념과 그 관념의 중요성에서 철학자가 도시의 창건자로서 하는 역할에 관하여 몇 가지 언급이 추가될 것이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의 이데아는 형상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높은 것이다. 그것은 형상이나 이데아라는 신성한 세계에서 태양인데, 다른 모든 것들을 조명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근원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지식과 모든 진리의 근원이거나 원인이다. 그러므로 선()을 보고, 감상하고, 아는 능력은 변증론자에게 필수 불가결하다. ()의 관념은 형상의 세계에서 태양이자 빛의 근원이므로, 그 관념 때문에 철학자이자 화가인 사람은 자신의 대상을 감지할 수 있다. 그 기능은 그러므로 도시 창건자에게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순전히 형식적인 이 정보가 우리가 가진 전부이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선()의 이데아는 이곳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윤리적 혹은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 지침이 선()의 이데아를 이용하지 않고 도입되는 유명한 집단주의적 도덕규범을 별도로 하고, 어떤 행동이 선량하거나 어떤 행동이 선()을 낳는다는 말을 우리는 듣지 못한다. ()은 목표라는, 모든 사람이 선()을 갈망한다는 언급은 우리가 가진 정보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이 공허한 형식주의는 필레보스(Philebus)에서 훨씬 더 뚜렷한데, 거기에서 선()척도중용의 이데아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플라톤이, 자신의 유명한 강의 ()에 관하여에서, ()통일체로서 생각되는 확정된 것의 부류로서 정의(定義)하여 교육을 받지 못한 청중을 실망시켰다는 보고를 내가 읽었을 때 나는 그 청중들과 같은 심정이었다. 국가(Republic)에서, 플라톤은 자신이 ()에 의하여 의미하는 바를 설명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우리가 습득하는 유일한 실제 암시는 4장 첫머리에 언급된다 ()은 보전하는 모든 것이고 악은 부패나 쇠퇴를 낳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은 선[]의 이데아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사물들을 관념들과 닮게 만드는 사물들의 속성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은 사물들의 불변하는, 정지된 상태이다; ()은 정지된 사물들의 상태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치적 전체주의를 크게 뛰어넘지 않는 듯싶다; 그리고 플라톤의 지혜 이데아를 분석하면 동일하게 실망스러운 결과가 생긴다. 우리가 안 바와 같이 지혜는 플라톤에게 자신의 한계에 대한 소크라테스식 통찰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지혜는 우리 대부분이 기대하는 인간성이나 인간사(人間事)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도움을 주려는 이해심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현명한 사람은 우수한 세상의 문제에 깊이 몰두하여 인간사(人間事)를 내려다 볼 시간이 없다.. ; 그들은 질서정연하고 측정된 것을 쳐다보며 그것들에게 집착한다’. 인간을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올바른 종류의 배움이다: ‘철학적 본성은, 영원히 존재하며 생성과 쇠퇴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지 않는 실재를 자신들에게 밝혀주는 저 종류의 학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플라톤이 지혜를 다루는 것도 변화 중지라는 이상(ideal)을 넘어갈 수 있는 듯이 보이지 않는다.

 

V

도시 창건자의 기능을 분석하여도 플라톤의 교설에서 새로운 윤리적 요소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분석으로 인하여 도시 창건자가 철학자여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밝혀졌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철학자가 영원한 통치권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가 완전히 정당화되지는 못한다. 그로 인하여 철학자가 최초의 입법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설명될 뿐, 그가 영원한 통치자로서 필요한 이유는 설명되지 못하는데 특히 후속 통치자들이 어떤 변화도 도입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철학자가 통치해야 한다는 요구를 완벽하게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러므로 우리는 나아가 도시의 보전과 연관된 과제들을 분석해야 한다.

일단 창건되면 국가는, 주인 계급의 단결에 금이 가지 않는 한 계속해서 안정될 것임을 우리는 플라톤의 사회학 이론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 계급의 양육은 최고 권력을 보존하는 위대한 기능이자 국가가 존재하는 한 지속되어야 하는 기능이 된다. 그로 인하여 철학자가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정당화되는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이 기능 안에서 두 가지 다른 활동을 구분한다: 교육에 대한 감독과 우생학적 양육에 대한 감독.

왜 교육 감독관은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가? 국가와 그 교육제도가 창건되면, 왜 경험이 많은 장군이나 군인-왕이 교육을 맡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교육제도는 군인뿐만 아니라 철학자도 길러내야 하며 그래서 감독관으로서 군인뿐만 아니라 철학자도 필요하다는 대답은 명백하게 불만족스럽다; 이유인즉 교육 감독관으로서 그리고 영원한 통치자로서 철학자가 필요하지 않다면, 교육제도가 새로운 철학자를 길러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교육제도에 대한 요구들로 인하여 플라톤이 주장하는 국가에서 철학자의 필요성이 정당화될 수도 없고, 통치자는 철학자여야 한다는 요구가 또한 정당화될 수도 없다.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목적과는 별도로, 플라톤이 주장하는 교육이 개인주의적 목적을 띤다면 물론 사정이 다를 터이다; 예를 들어, 철학적 능력 그 자체를 위하여 개발하려는 목적. 그러나 우리가 앞장에서 본 바와 같이, 플라톤이 독립적인 사고 같은 것을 허용함에 대해서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우리가 알 때; 그리고 우리가 이제 이 철학교육의 궁극적인 이론적 목표가 단지 이 이데아를 논리 정연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의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었음을 알 때, 우리는 이것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플라톤이 또한 아테네의 음악교육을 제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우리가 안 4장을 기억한다면 이 인상은 강화된다. 플라톤이 통치자의 철학교육에 부여하는 커다란 중요성은 다른 이유에 의하여 순전히 정치적 이유에 의하여 설명되어야 한다.

내가 알 수 있는 주요 이유는, 통치자의 권위를 극한까지 증대시키기 위한 필요성이다. 보조원에 대한 교육이 바르게 작용한다면, 훌륭한 군인이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은 도전받지도 않고 도전받을 수도 없는 권위를 세우기에 불충분할 것이다. 이것은 더 높은 권위에 근거해야 한다. 플라톤은 그 권위를, 자신이 주장하는 통치자들에서 자신이 전개하는 초자연적이고 신비로운 권력이라는 권위에 근거시킨다. 그 통치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 그들은 또 다른 세상에 속하며 신성한 것과 소통한다. 그러므로 철학자 왕은, 우리가 헤라클레이토스와 관련하여 언급한 제도인 종족적 제사장-왕을 부분적으로 닮은 듯 보인다. (제사장-왕이나 의술인이나 무당 제도는 그들이 지니고 있던 놀라울 정도로 우활한[迂闊: naive] 종족적 금기로써 고대 피타고라스 종파에게 영향을 또한 미친 듯하다. 피상적으로, 이것들 대부분은 심지어 플라톤 이전에 폐기되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권위가 초자연적인 것에 근거한다는 피타고라스 종파원들의 주장은 남았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주장하는 철학교육에는 확정된 정치적 기능이 있다. 그 철학교육은 통치자들에게 표시를 붙이고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장벽을 세워놓는다. (이것은 우리 시대까지 고등교육의 주요 기능으로 남았다.) 플라톤이 말하는 지혜는 주로 영구적인 정치적 계급 통치를 확립하기 위하여 습득된다. 그 지혜는 정치적 의술로서 기술될 수 있다; 그 지혜를 소유한 사람인 의술인에게 신비로운 능력을 부여하는 정치적 의술’.

그러나 이것은, 국가에서 철학자가 갖는 기능에 관한 우리의 질문에 대한 완전한 대답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왜 철학자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변했다는 것과, 우리가 이제 무당이나 의술인의 실제 정치적 기능에 관하여 유사한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은 자신이 전문화된 철학적 훈련을 고안했을 때, 어떤 확정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입법자의 임시 기능과 유사한 통치자의 영구적 기능을 찾아야 한다. 그런 기능을 발견할 유일한 희망은 주인 인종을 양육하는 분야에 있는 듯하다.

 

VI

왜 철학자가 영구적인 통치자로 필요한지 알아내는 최선의 방법은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철학자에 의해서 영구적으로 통치되지 않는 국가에는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플라톤은 이 질문에 분명히 답변했다. 국가의 수호자들이, 심지어 매우 완벽한 국가의 그들도, 피타고라스의 지식과 플라톤의 숫자를 알고 있지 못하면, 수호자 인종과 국가는 틀림없이 쇠퇴한다.

인종주의는 그리하여 플라톤의 정치강령에서 사람들이 처음 보고 예상할 터인 것보다 더 중추적인 역할을 차지한다. 플라톤의 인종 혹은 혼인 숫자가 그의 기술적(記述的) 사회학에 대한 배경인 플라톤의 역사철학이 구성되는 배경(애덤[Adam]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제공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 숫자는 플라톤이 철학자의 통치권을 정치적으로 요구하는 배경을 제공한다. 4장에 플라톤이 주장하는 국가의 목축업자, 즉 가축을 기르는 사람의 배경에 관한 언급된 것 이후에, 우리는 아마도 그가 주장하는 이 양육하는 왕이라는 것을 아주 쉽게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철학자가 결국 철학적 양육가로 판명된다는 것은 여전히 어떤 사람에게는 놀라운 일일 것이다. 과학적 양육, 예를 들어 수학적-변증법적이며 철학적인 양육의 필요성은 철학자의 통치권에 대한 권리 주장의 배후에 있는 주장이 전혀 아니다.

어떻게 인간 파수견의 순수 혈통을 얻는가라는 문제가 국가(Republic)의 앞부분에서 강조되고 상술되는 것이 4장에서 밝혀졌다. 그러나 왜 오직 진짜이자 완전히 자격을 갖춘 철학자만이 유능하고 성공적인 정치적 양육가가 되어야 하는지 그 합당한 이유를 우리는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개나 말이나 새를 기르는 모든 사람이 아는 바와 같이, 합리적인 양육이란 어떤 정형, 자신의 노력에서 지침이 될 목표, 그가 교배와 선택의 방식으로 접근을 시도할 이상(理想)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런 기준이 없다면, 그는 어느 후손이 충분히 훌륭한지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훌륭한 후손나쁜 후손의 차이점을 말할 수 없게 될 터이다. 그러나 이 기준은 플라톤이 양육하고자 하는 인종에 관한 플라톤의 이데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진정한 철학자인 변증법 학자만 도시의 신성한 원형을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신성한 원형을 인간의 형상이나 이데아 볼 수 있는 것은 변증법 학자뿐이다. 오직 변증법 학자만이 이 모형을 모방할 수 있으며, 하늘로부터 땅으로 불러 내릴 수 있고, 이곳에서 실현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에 관한 이데아인 왕의 이데아이다. 그 이데아는, 몇몇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것을 재현하지는 않는다; 그 이데아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개념이 아니다. 그 이데아는, 오히려, 인간의 신()과 같은 원형이며 불변하는 초인(超人)이다; 그것은 초()-희랍인이며, 주인을 초월한다. 철학자는, ‘가장 항구적이고, 가장 남성적이며, 그리고, 가능성의 한계 안에서, 가장 아름답게 형성된 인간.. : 고귀하게 태어나고, 경외감을 일으키는 인격을 지닌 인종으로서 플라톤이 기술하는 것을 지구상에서 구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이 아니라면 신()과 같은..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조각된 천부적으로 왕권과 지배를 맡을 운명인 군주 인종 남녀 인종이어야 한다.

우리는 철학자 왕이 지니는 두 가지 근본적인 기능이 비슷함을 안다: 철학자 왕은 도시의 신성한 원형을 복제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신성한 원형을 복제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지닌 천상의 영상을, 도시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에게서 실현할수 있고, 그럴 충동을 지닌 유일한 사람이다.

플라톤이 동물사육의 원칙이 인종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처음으로 주장하는 동일한 장소에서, 그가 주장하는 통치자에게 평범한 우수성을 초월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를 암시하는지 이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동물을 사육하면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동물을 기르지 않는다면, 당신은 기르는 새나 개의 종이 빠르게 쇠퇴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것으로부터 사람은 동일하게 신중한 방식으로 양육되어야 한다고 추론할 때, ‘소크라테스는 소리친다: ‘맙소사!.. 동일한 원칙이 인종에게도 적용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탁월한 우수성을 우리의 통치자로부터 요구해야 하는가!’ 이 외침은 의미심장하다; 그 외침은 통치자란 자신들만의 신분을 가지고 자신들만의 훈련을 받아서 탁월한 우수성을 지닌 계급을 구성할 것이라는 최초의 한 가지 암시이다; 그러므로 그 외침으로 인해서 통치자는 철학자여야 한다는 주장에 우리가 대비하게 된다. 그러나 그 구절은 인종의 의사로서 거짓말과 기만을 실행하는 것이 통치자의 의무여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한, 훨씬 더 의미심장하다. ‘당신이 기르는 동물의 떼가 최고의 완벽성에 도달하려면거짓말은 필수적이라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그 까닭은 우리가 수호자 떼를 실제로 불화가 없이 유지하고자 한다면, 통치자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비밀이 유지되어야 하는 조치가 이것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의술로서의 거짓말을 실행하는 데 더 많은 용기를 내라고 통치자들을 유혹하는 일은 (위에 인용됨) 이와 관련하여 이루어진다; 그 유혹으로 인하여 독자는, 플라톤에 의하여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된 다음 요구에 대비하게 된다. 통치자란 젊은 보조원들을 짝짓기 시킬 목적으로, ‘실망한 사람들이.. 통치자가 아니라 자신의 악운(惡運)을 비난하도록, 교묘한 투표제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통치자들은 은밀히 투표를 조작하여야 한다고 그는 포고한다. 책임 수용을 피하기 위한 이 비열한 충고 직후에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서 말함으로써, 플라톤은 자신의 위대한 스승을 중상모략한다),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 의하여 곧 수용되어 상술되고, 그러므로 우리가 글라우콘(Glaucon)의 포고령이라고 부를 제안을 내놓는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 용감한 자의 소망에 복종하는 의무를 남녀 모든 사람에게 부과하는 야만적인 법률을 나는 의미한다: ‘전쟁이 지속되는 한,.. 아무도 그에게 “No”라고 말하지 못한다. 따라서 군인이 남녀를 불문하고 어떤 사람에게 성행위를 하고자 한다면, 이 법률로 인하여 그는 용기의 대가를 얻기 위하여 더욱 열성적이 될 것이다.’ 국가는 그럼으로써 두 가지 뚜렷한 이득을 얻는다고 선동 때문에 더 많은 영웅이 생겨나고, 또 그 영웅으로부터 더 많은 숫자의 아이들이 태어나서 영웅이 더 많아진다 신중하게 지적된다. (후자[後者] 이득은, 장기적 인종 정책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이득으로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서 표현된다.)

 

VII

이러한 종류의 양육을 위해서는 특별한 철학적 훈련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철학적 양육은 쇠퇴의 위험을 상쇄하는 데 자체의 주요 역할을 수행한다. 이 위험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서, 완전히 자격을 갖춘 철학자가 필요한데, 즉 순수 수학 (입체기하학을 포함하여), 순수 천문학, 순수 화성학, 그리고 모든 학문의 최고 업적인 변증법으로 훈련을 받은 철학자가 필요하다. 수학적 우생학의 비밀인 플라톤식 숫자의 비밀을 아는 사람만이 추락 이전에 향유된 행복을 인간에게 돌려줄 수 있고 인간을 위하여 그 행복을 보존할 수 있다. 글라우콘의 포고령이 발표된 다음에 (그리고 플라톤에 따르면 주인과 노예를 구분하는 것에 상응하는, 그리스인과 야만인을 자연적으로 구분하는 일을 다루는 막간 다음에), 플라톤이 자신의 중추적이며 가장 이목을 끄는 정치적 요구로 철학자 왕의 통치권 신중하게 표시하는 교설이 발표될 때, 이 모든 것이 기억되어야 한다. 이 요구만으로 사회생활의 악을 끝낼 수 있다고 그는 가르친다; 악의 더 숨겨진 근원인 인종의 구성원에 만연한 악, 인종쇠퇴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만연한 악, 즉 정치적 불안정을 끝낼 수 있다고. 이것이 그 구절이다.

그래, 이제 나는 이전에 가장 큰 파도에 비유했던 화제에 뛰어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나에게 비웃음의 소용돌이를 몰고 오리라고 예견할지라도, 나는 말을 해야 한다. 정말로, 나는 바로 이 파도가 내 머리 위에서 부서져서 비웃음과 비방의 야단법석이 되는 것을 이제 볼 수 있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 이야기를 하시오라고 글라우콘(Glaucon)은 말한다. ‘그들의 도시에서, 철학자들에게 왕의 힘이 주어지지 않으면, 않으면, 또는 지금은 왕이나 참주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진짜이자 완전히 자격을 갖춘 철학자가 되지 않으면; 그리고 정치적인 힘과 철학, 이 두 가지가 융합되지 (오늘날 이 두 가지 중 하나만을 향한 자신들의 자연적인 취향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힘으로 억압당하는 반면)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친애하는 글라우콘(Glaucon)이여, 안식은 있을 수 없어; 그리고 악은 도시에서 멈추지 않고 만연할 것이야 인종에게서도 멈추지 않고 만연할 것이라고 나는 믿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여기에 대하여 칸트는 현명하게 대답했다: ‘왕이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거나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날 것 같지 않다; 권력의 소유로 인하여 이성의 자유로운 판단이 변함없이 타락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바람직하지도 않을 터이다. 그러나 왕이 왕 같은, 즉 스스로를 다스리는 사람들 철학자들을 억압하지 않고, 공개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철학자들에게 남겨주는 것이 필수적이다.’)

플라톤의 중요한 이 구절은 전체 저서에 대한 열쇠로서 완전히 적당하게 기술되었다. 그 마지막 말, ‘인종에게서도 멈추지 않고 만연할 것이라고 나는 믿어는 이곳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중요성을 띤 뒷생각(afterthought)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플라톤을 이상화하는 습관이, 플라톤은 여기서 자신의 구원 약속을 도시라는 범위에서 인류 전체라는 범위로 확대하며 인류애에 관하여 이야기를 한다는 해석을 낳았기 때문에, 이 말들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국가와 인종, 그리고 계급의 구분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인류애라는 윤리적 범주는 플라톤에게는 완전히 무관하다고 언급되어야 한다. 사실상, 평등주의적 신조에 대한 플라톤의 적대감인 소크라테스의 옛 제자이자 친구인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를 향한 그의 자세에서 보이는 적대감에 관하여 우리는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안티스테네스는 또한 알키다마스(Alcidamas)와 리코프론(Lycophron)처럼 고르기아스(Gorgias) 학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평등주의적 이론을 안티스테네스가 모든 인간의 형제애라는, 그리고 보편적 인간 제국의 형제애라는 교설까지 확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신조는 국가(Republic)에서 그리스인과 야만인의 천부적 불평등을 주인과 노예의 천부적 불평등과 상호 관련지음으로써 공격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검토하고 있는 주요 구절의 바로 앞에서 이 공격이 시작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이유와 다른 이유 때문에, 플라톤은 인종에서 만연한 악에 대하여 언급할 때 자신의 독자들이 이 장소에서 충분히 익숙할 터인 이론인 국가의 복지는 궁극적으로 통치계급 개별 구성원의 본성에 달려있다는 자신의 이론을 언급한다고 전제하면 안전할 듯하다; 그리고 그들의 본성과 그들 인종이나 자손의 본성은 개인주의적 교육이라는 악에 의하여, 훨씬 더 중요하게는 인종적 쇠퇴에 의하여 나중에 위협을 당한다고 전제하면 안전할 듯하다. 플라톤의 언급은, 신성한 안정과 변화 및 부패라는 악의 대립에 대한 분명한 언급함과 함께, 숫자와 인간의 추락 이야기의 전조가 된다.

플라톤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요구를 밝히는 이 핵심적인 구절에서 자신의 인종주의를 틀림없이 언급한다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그 까닭은 우생학의 전제조건인 그 모든 과학에서 훈련을 받은 진짜이자 완전히 자격을 갖춘 철학자가 없다면, 국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숫자와 인간의 추락에 관한 자신의 이야기에서, 플라톤은 쇠퇴한 수호자들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첫 번째이자 치명적인 태만의 죄악 한 가지는 우생학에서 인종의 순수성을 지켜보고 시험함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수호자로서 자신들의 과제에 완전히 부적합한 통치자들이 결정될 것이다; , 인종의 (당신의 인종일 뿐만 아니라 헤시오도스의 인종이기도 한) 금속인 금과 은, 그리고 청동과 철을 지켜보고 시험하라는 과제.’

그 모든 것을 야기하는 것은 신비로운 결혼 숫자에 관한 무지이다. 그러나 그 숫자는 의심할 바 없이 플라톤 자신의 발명품이다. (그 숫자는 순수한 화성학[和聲學: harmonics]을 상정하는데, 순수한 화성학은 나중에 국가[Republic]가 집필될 때 새로 나타난 과학인 입체기하학을 상정한다.) 그리하여 플라톤 자신을 제외하고 누구도 진정한 수호자 자격의 비밀을 알고 그 열쇠를 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한 가지 일을 의미할 수 있다. 철학자 왕은 플라톤 자신이며, 국가(Republic)는 왕권에 대한 권리 주장이다. 그가 그랬던 바와 같이 철학자라는 그리고 아테네의 마지막 왕인 순교자 코드로스(Codrus)의 후손이자 합법적인 후계자라는 주장을 자신에게서 연결하여 그가 자신의 몫으로 생각했던 권력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권리 주장인데 플라톤에 따르면 코드로스는 자신의 자녀에게 왕국을 보전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했다.

 

VIII

이 결론이 내려지자마자, 그렇지 않았더라면 관련성이 없었을 터인 많은 것들이 연결되고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당시의 문제와 인물들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찬 플라톤의 저서는 현재 상황에서 저자 플라톤에 의하여 이론적 논문으로서보다는 화제 중심의 정치 선언문으로서 의도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가(Republic)가 정부에 대한 이론적 토론을 단순히 집대성해놓은 것이 아니라.. 쉘리(Shelly)처럼 세상을 개혁하려는 열정으로 불타는 한 아테네인에 의하여 제기된 실제 개혁에 관한 진지한 계획이라는 것을 망각한다면, 우리는 플라톤을 더할 나위 없이 불공정하게 대하는 것이다라고 A. E. 테일러(Taylor)는 말한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사실이며, 우리는 이런 사고 하나 만으로부터, 자신이 주장하는 철학자 왕을 기술하면서 플라톤이 동시대 철학자 몇 명을 분명히 생각했으리라고 결론을 내렸을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국가(Republic)가 집필되던 때는, 아테네에는 아마도 철학자라고 주장한 세 명의 뛰어난 사람만 있었다: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와 이소크라테스(Isocrates), 그리고 플라톤 자신. 우리가 이점을 염두에 두고 국가(Republic)라는 저서에 접근한다면, 우리는 철학자 왕의 특징을 토론하는 데에서 플라톤에 의하여 개인적인 언급을 담고 있는 것으로 분명하게 표시된 긴 구절이 있음을 즉각 발견한다. 그 구절은 인기 있는 인물, 즉 알키비아데스(Alcibiades)를 분명히 언급하면서 시작하여 한 이름을 (테아게스[Theages]라는 이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플라톤 자신인 소크라테스를 언급하며 끝난다. 그 결과는 극소수만이 철학자 왕의 자리에 적합한 진정한 철학자로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귀족으로 태어난 알키비아데스는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었지만, 그를 구하려는 소크라테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철학을 버렸다. 버려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어, 철학은 무가치한 지원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대상물이 되었다. 결국, ‘철학과 연계될 가치가 있는 사람은 겨우 몇 명만 남았다’. 우리가 다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무가치한 지원자들이란 안티스테네스와 이소크라테스와 그들의 학파라는 것을 (그리고 플라톤이 철학자 왕과 관련된 핵심적인 구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플라톤이 힘으로 억압했다 주장하는 동일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예상해야 할 터이다. 그리고 정말로, 이 예상을 입증하는 독립적인 증거가 있다. 유사하게, ‘가치 있는 몇 명의 사람에는 플라톤과, 아마도, 그의 친구 몇 명이 (아마도 디오[Dio]) 포함되리라고 우리는 예상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이 구절이 계속되면서 플라톤은 여기서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음이 드러난다: ‘이 작은 무리에 속하는 사람은.. 다수 사람의 광기와, 모든 공적인 일이 일반적으로 부패함을 볼 수 있다. 철학자는.. 야수들이 있는 우리 속의 사람과 같다. 다수 사람들이 저지르는 불의를 그는 저지르지 않지만, 야만인들의 세상으로 에워싸여 있기 때문에 그의 힘은 홀로 자신의 싸움을 계속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도시나 친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 전에 살해될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점을 올바르게 고찰한 다음에, 그는 자신의 평화를 지키며 자신의 일에만 노력을 한다..’. 이 심술궂고 가장 비()-소크라테스적인 단어들에 표현된 강한 분노로 인하여 그 단어들이 플라톤 자신의 말임이 분명히 밝혀진다. 그러나 이 개인적인 고백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 고백은 다음 말과 비교되어야 한다: ‘노련한 항해사가 서투른 선원에게 자신의 명령을 받아들이라고 간청해야 하는 것은 자연과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현명한 사람이 부자의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참되고 자연스러운 과정은, 부유하건 가난하건, 병든 자가 의사 집 문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통치를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통치할 수 있는 사람의 집 문을 에워싸야 한다; 그리고 통치자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피통치자들에게 자신의 통치를 수용하라고 간청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에서 누가 거대한 개인적인 자만심의 소리를 놓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 당신들의 천부적 통치자인, 통치하는 방법을 아는 철학자 왕인, 내가 있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당신들이 나를 원하면, 당신들이 나에게 와야 하고, 당신들이 고집을 부리면 나는 당신들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에게 간청하지는 않겠다.

플라톤은 사람들이 오리라고 믿었던가? 많은 위대한 문학작품처럼, 국가(Republic)에 의하여 그 저자가, 절망의 기간을 오락가락하면서, 성공하리라는 유쾌하고 과도한 희망을 경험했다는 흔적이 밝혀진다. 간간이, 적어도 플라톤은 사람들이 찾아오리라고 희망했다; 자기 저서의 성공으로 인하여, 자기 지혜의 명성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몰려오리라고. 그다음에 다시, 그는 사람들이 자극을 받아 분노에 찬 공격을 할 따름이라고 느꼈다; 그가 자초할 유일한 것은 비웃음과 비방의 홍수심지어 아마도 죽음 것이라고.

그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는 별을 따려 하고 있었다 ()과 같아지려고. 나는 간혹 플라톤을 향한 열광의 일부가, 그가 많은 은밀한 꿈을 표현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닌지 의아해한다. 심지어 야망에 반대하여 플라톤이 주장하는 곳에서조차도, 우리는 그가 야망에 의하여 고취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철학자에게는 야망이 없다고 그는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통치할 운명이지만, ‘철학자는 통치를 조금도 갈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시된 이유는 그의 신분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신성한 것과 교감하는 사람은 자신이 있는 높은 곳에서 인간들에게로 하강하여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 그는 열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부적인 통치자와 구세주로서 그는 올 준비가 되어있다. 불쌍한 인간들에게 그가 필요하다. 그가 없다면 국가는 분명히 멸망하는데 그 까닭은 그만이 국가를 보전하는 비결을 쇠퇴를 막는 비결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왕의 통치권 배후에 권력 추구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직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통치자에 대한 그 아름다운 초상화는 자화상이다. 우리가 이것을 발견한 충격으로부터 회복되었을 때, 우리는 경외감을 불어넣는 초상화를 새롭게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으로 우리가 약간 강화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다지 무서운 것이 아님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그 초상화의 인간적인, 정말로, 그것의 너무나 인간적인 특징을 감지하기 시작할 것이다. 최초의 왕권 대신에, 최초의 철학 교수직을 정립한 데 만족해야 했던 플라톤에게 우리는 다소 미안한 감정조차 갖기 시작할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꿈, 자신의 모습을 따서 그가 형성했던 왕의 이데아를 실현할 수 없었던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으로 강화되면, 자신의 모습을 따서 위대한 개라는 자신의 왕 이데아를 형성하는 (그러나 결국 자신이 위대한 개라는 것을 행복하게 발견하는) 그레이트데인(Great Dane) 종인 개 토노(Tono)에 관한 추악한 다크스훈트(Ugly Dachshund) 이야기라는 플라톤 학설에 대한 천진스럽고 무의식적인 작은 저 풍자의 우울한 닮은꼴을 우리는 플라톤의 이야기에서 발견하기조차 할 것이다.

철학자 왕이라는 이 관념은 인간의 왜소함에 대한 얼마나 큰 기념비인가! 정치가에게 자신의 권력, 우수성, 그리고 지혜에 의하여 현혹되는 위험을 경고했던, 그리고 정치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는 모두 허약한 인간이라는 것 가르치려고 애썼던 소크라테스의 소박함 및 자애로움과 그 관념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역설과 이성 및 진실의 이 세상으로부터, 마술적 권력이 현자(賢者)를 평범한 사람 위 높은 곳으로 들어 올리는 플라톤이 주장하는 현자의 왕국으로의 하강은 어떤 몰락인가! 거짓말 이용을 삼갈 정도로, 혹은 모든 무당의 유감스러운 거래를 자신의 동료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과 교환하여 양육하는 마술을 판매하는 것 무시할 정도로 충분히 아주 높지는 않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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