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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1권 7장 지도력의 원리 (번역 수정본)

이윤진이카루스 2022. 4. 10.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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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도력의 원리

 

          현명한 자가 지도하고 다스려야 하며, 무지한 자는 따라야 한다.

                                                                               플라톤.

 

 

 

   우리가 해석한 플라톤의 정치강령에 대한 특정 반대이론 때문에, 그 강령 내부에서, 정의(正義)와 선()과 미() 및 지혜와 진리 그리고 행복과 같은 도덕적 관념이 수행하는 역할을 우리는 조사해야 한다. 본 장과 다음 두 장에서 그 분석은 계속될 것이고, 그다음에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 지혜라는 관념이 수행하는 역할에 우리는 몰두할 것이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의라는 관념이 근본적으로 천부적 지도자가 다스려야 하고 천부적 노예는 노예 역할을 해야한다는 요구임을 우리는 알았다. 국가가 모든 변화를 중지시키기 위해서 국가 자체 이데아의 모조품, 혹은 그 진정한 본성의 모조품이어야 한다는 것은 역사주의적 요구의 일부이다. 정의에 관한 이 이론으로 인하여, 플라톤이 근본적인 정치문제를 누가 국가를 다스릴 것인가? 라는 질문 속에서 보았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게 밝혀진다.

 

 

                           I

   정치문제를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혹은 누구의 의지가 최고여야 하는가?’, 기타 등등으로 표현함으로써 플라톤이 정치철학에서 지속적인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앞장에서 토론된, 그가 집단주의와 이타주의를 등치함으로써 도덕철학 분야에서 그가 야기한 혼란과 그 혼란은 정말로 흡사하다. 일단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면, ‘최고로 훌륭한 자혹은 가장 현명한 자타고난 지도자혹은 다스리는 기교를 완전히 익힌 자(혹은, 아마도, ‘일반적인 의지혹은 주인 인종이나 산업 노동자혹은 인민’) 같은 대답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런 대답은, ㅡ 이유인즉 최악인 자혹은 가장 어리석은 자혹은 타고난 노예가 다스리는 것을 누가 지지할 터인가? 이기 때문에 ㅡ 그러므로 그럴듯하게 들릴지라도, 내가 폭로하려는 바와 같이, 전혀 쓸모가 없다.

   우선, 그런 대답으로 인하여 정치 이론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우리는 설득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 이론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근본적이라고 전제함으로써, 그 근본적인 문제를 뛰어넘었을 뿐임을 발견한다. 그 까닭은 심지어 플라톤의 이 전제를 공유하는 사람들도 정치지도자들이란 항상 충분히 훌륭하거현명하지’ (우리는 이 용어들의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않다는 것과, 사람이 묵시적으로 그 선량함과 지혜를 믿을 수 있는 정권을 만난다는 것이 조금도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저것이 인정된다면 정치적 사상은 처음부터 나쁜 정부에 대한 가능성을 직시해야 하지 않은지를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최악의 지도자에 대비하면서 동시에 최고의 지도자를 기대해야 하지 않은지. 그러나 이로 인하여 정치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이 생기는데, 그 까닭은 그 질문으로 인하여 우리는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새로운 질문인 어떻게 우리는 정치제도를 구성하여 나쁘거나 무능한 지도자가 너무 많은 해를 끼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까?로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옛 질문이 근본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정치권력이란 본질적으로제한되지 않는다고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그들은 누군가가 ㅡ 개인이든, 계급 같은 집단이든 ㅡ 권력을 지닌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고, 그리고 특히 자신이 가진 권력을 강화할 수 있으며, 강화함으로써 권력을 더 멀리 무제한이나 방자함에 근접시킬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들은 정치권력이란 본질적으로 주권이라고 전제한다. 이 전제가 이루어지면, 진정으로, ‘누가 주권자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만 중요한 질문으로 남게 된다.

   나는 이런 전제를 (무제한) 주권이론이라고 부를 것이고, 그 표현을 더욱 특히 보댕(Bodin)이나 루소(Rousseau), 또는 헤겔(Hegel) 같은 저술가에 의하여 제시되는 다양한 주권이론 중에서 특정 한 이론에 대하여 사용하지 않고, 정치권력이란 실제로 억제되지 않는다는 더 일반적인 전제에 대하여, 혹은 정치 권력은 실제로 억제되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에 대하여 사용하겠다; 그리고 남은 주요 문제는 이 권력을 최고인 사람의 손에 쥐여주는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이 표현을 나는 사용하겠다. 이 주권이론은 플라톤의 문제해결 방식에서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그 후 계속해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이론은 또한 예를 들어, 주요 문제가 누가 지시를 내리는가? 자본가인가, 혹은 노동자인가? 라고 믿는 현대 저술가들에 의하여 묵시적으로 전제되었다.

   자세한 비판을 시작하지 않고, 이 이론을 성급하고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진지한 반론이 있다는 것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그 이론의 관념적 장점이 무엇으로 보이든 간에, 그 이론은 틀림없이 매우 비현실적인 전제이다. 어떤 정치 권력도 제한당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사람이 인간으로 남아있는 한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가 실현되지 않는 한) 절대적이고 억제되지 않는 정치권력이란 있을 수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 모두를 지배할 충분한 육체적 힘을 자기 손아귀에 축적할 수 없는 한, 바로 그런 한도로 그는 다른 조력자에게 틀림없이 의존한다. 심지어 가장 강력한 독재자도 자신의 비밀경찰과 심복, 그리고 사형집행인에게 의존한다. 그의 권력이 크다 할지라도,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독재자가 집단끼리 대립하게 만들어 어부지리를 취하면서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그 의존은 의미한다. 독재자의 권력 외에 다른 정치권력인 다른 권력이 있다는 것과, 그래서 독재자는 오직 다른 정치권력을 이용하고 달래면서 자신의 통치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의존은 의미한다. 이로 인하여, 심지어 통치권에 관한 극단적인 경우도 완전한 통치권의 경우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것들은, 자신이 정복할 수 없는 권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적 일부를 포기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의지나 이익이 (혹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한 집단의 의지나 이익) 자신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경우들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에, 정치 권력의 제약은 이것보다 훨씬 더 심하다.

   나는 이 경험적인 요점을 강조했는데, 그 요점을 논증으로서 이용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반대론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나의 주장은, 통치권에 관한 모든 이론은 더 근본적인 문제를 ㅡ 즉, 통치자들이 갖는 권력을 다른 권력과 균형을 맞춤으로써 그들을 제도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우리가 노력해야 하지 않는지의 문제 ㅡ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견제와 균형의 이론은 적어도 신중한 고찰을 받을만하다. 이 이론에 대한 유일한 반대 논리는, 내가 아는 한, (α) 그런 통제는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 혹은 (b) 정치권력이 본질적으로 최고 권력이기 때문에 그런 이론은 본질적으로 상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독단적인 반대이론 두 가지 모두는, 사실에 의하여 반박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반대이론과 함께 몇 가지 유력한 견해가 (예를 들어, 한 계급에 의한 독재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다른 계급에 의한 독재라는 이론) 무너진다.

   통치자를 제도적으로 통제하는 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정권이란 항상 선량하지도 현명하지도 않다는 것 이상을 전제할 필요가 우리에게 없다. 그러나 내가 역사적 사실에 관한 것을 말했기 때문에, 내가 이 전제보다는 조금 더 나아가고 싶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통치자란 도덕적으로나 지적(知的)으로 평균 이상이었던 적이 없고, 흔히 평균 이하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래서 정치에서 물론 우리가 동시에 가장 훌륭한 통치자를 얻으려고 노력을 해야 할지라도, 최악의 통치자에 대비하는 원칙을 최대한으로 잘 채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모든 정치적 노력을, 우리가 탁월하거나 심지어 유능한 통치자를 얻는 데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느다란 희망에 거는 것은 내가 보기에 미친 짓이다. 이런 문제에서 나는 강한 감정을 가지지만, 그러나 통치권 이론에 대한 나의 비판이 더 개인적인 이 견해들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나는 주장하겠다.

   이 개인적인 견해들과 별도로, 그리고 위에 언급된 통치권에 관한 일반이론에 반대하는 경험적 주장과 별도로, 통치권 이론의 어떤 특정 형태와 관련된 모순을 보여주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일종의 논리적 주장이 있다; 더 정확하게, 그 논리적 주장에는 가장 현명한 자가 통치를 해야한다는 이론과 싸우는, 혹은 가장 훌륭한 자, 혹은 법률, 혹은 다수, 등등이 통치해야 한다는 이론들과 싸우는, 다르지만 유사한 형태가 주어질 수 있다. 이 논리적 주장의 한 가지 특정 형태는 너무 우활한(迂闊: naive) 형태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다수가 통치해야 한다는 원칙을 겨냥한다; 그리고 그것은 플라톤에 의하여 최초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사용되었던 유명한 자유의 역설과 다소 흡사하다.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그리고 독재자의 발흥을 이야기하면서, 플라톤은 다음 질문을 함축적으로 제기한다: 국민들이 통치해서는 안 되고 대신에 참주가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국민들의 의지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유인은 처음에는 법률에 도전함으로써 그리고 결국 자유 자체에 도전하고 독재자를 아우성치며 요청함으로써 자신의 절대 자유를 행사할 것이라고 플라톤은 제안한다. 이것은 억지스러운 가능성이 아니다; 그런 일은 몇 번 발생했다;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마다, 다수의 통치라는 원칙이나 유사한 형태의 통치권 원칙을 자신들의 정치적 신조의 궁극적 토대로서 채택하였던 모든 민주주의자들은 절망적인 지적(知的) 상황에 빠졌다. 한편으로, 그들이 채택했던 원칙은 그들에게 다수통치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반대해야 하며, 그리하여 새로운 참주정치를 반대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다른 한편으로, 동일한 원칙은 그 민주주의자들에게 다수가 결정한 어떤 결의도 수용해야 하며, 그리하여 새로운 참주의 통치를 수용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들의 주장하는 이론의 모순으로 인하여 물론 그들의 행동은 틀림없이 마비된다. 피통치자들에 의한 통치자의 제도적 통제를, 특히 다수표로 정권을 퇴진시킬 권리를 요구하는 우리 민주주의자들은 그러므로 이 요구들을 통치에 대한 자가당착적인 이론보다 나은 토대 위에 세워야 한다. (이것이 가능함이 본 장의 다음 절에 간단하게 밝혀질 것이다.)

   플라톤은 자유에 관한 그리고 민주주의에 관한 역설을 발견할 뻔했음을 우리는 알았다. 그러나 플라톤과 그의 추종자들이 간과한 것은, 통치권에 관한 이론의 모든 다른 형태들이 유사한 모순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통치권에 관한 모든 이론은 역설적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가장 현명한 자가장 훌륭한 자를 통치자로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현명한 자는 자신의 현명함에서 자신이 아니고 가장 훌륭한 자가 통치를 해야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가장 훌륭한 자는 자신의 훌륭함에서 아마도 다수가 통치해야 한다고 결정할 것이다. 심지어 법률의 지배를 요구하는 통치권 이론의 형태도 동일한 반대이론에 노출됨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의 언급인 법률은 또한 한 사람의 의지에 복종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다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것은 매우 일찍 알려졌다.

   이 간단한 비판을 요약하여, 통치권에 관한 이론은 경험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놓여있다고 사람들이 주장할 수 있고 나는 믿는다. 최소한의 주장은, 통치권에 관한 이론은 다른 가능성을 신중히 고찰하지 않고 채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II

   그리고 정말로, 통치권에 관한 역설이 없는 민주주의적 통제 이론이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밝히기는 어렵지 않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이론은 말하자면, 다수지배의 본질적 선량함이나 정당함이라는 교설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독재정치의 천박함에서 시작하는 이론이다; 혹은 더 정확하게, 내가 생각하는 이론은 독재정치를 피하고 독재정치에 저항하는 결정이나 제안 채택에 의존한다.

   이유인즉 우리는 두 가지 주요 형태의 정권를 구별할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유형은 우리가 유혈사태 없이 교체할 수 있는 정권으로 구성된다 ㅡ 예를 들어, 총선거를 통하여 교체할 수 있는 정권; 다시 말해서 사회제도는 통치자가 피통치자에 의하여 해임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사회 전통은 이 제도가 권력을 쥔 자들에 의하여 쉽게 파괴되지 않도록 보장한다. 두 번째 유형은 피통치자가 성공적인 혁명에 의하지 않고는 통치자를 제거할 수 없는,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경우에 제거가 전혀 불가능한, 정권으로 구성된다. 나는 첫 번째 유형의 정권에 대하여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속기 표찰로서, 그리고 두 번째 유형의 정권에 대하여 전제정치독재정치라는 용어를 속기 표찰로서 제안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용어사용법과 밀접하게 일치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어떤 부분도 이 표찰의 선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나는 하고 싶다; 그래서 누가 이 용법을 뒤바꾼다면 (오늘날 흔히 행하여지는 바와 같이) 나는 그가 독재정치라고 부르는 것을 지지하고, 그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할 따름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국민의 통치'로 번역함으로써 민주주의실제로혹은 본질적으로의미하는 것을 발견하려는 어떤 시도도 무관한 것으로서, 나는 배격하겠다. (이유인즉 국민이 축출하겠다는 위협에 의하여 자신들의 통치자의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할지라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들 자신이 통치하는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두 가지 표찰을 제안된 바와 같이 사용한다면, 이제 민주주의적 정책의 원리로서, 독재체제를 막기 위한 정치제도를 만들어 발전시키고 보호하는 제안을 우리는 기술할 수 있다. 이 원리는 우리가, 결점이 없거나 잘못될 수가 없는, 혹은 민주 정부에 의하여 채택된 정책이 옳거나 훌륭하거나 현명하다고 보장하는 ㅡ 심지어 자비로운 독재자가 채택한 정책보다 반드시 낫다거나 더 현명하다고 보장하는 ㅡ 이런 종류의 제도를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주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역설은 예방된다.) 그러나 민주주의 원리를 채택하는 데 함축된다고 언급될 것은, 민주주의에서 심지어 나쁜 정책의 수용도 (우리가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위하여 노력할 수 있다면) 아무리 현명하거나 자비롭다 할지도 모르는 독재체제에 복종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신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민주주의 이론은 다수가 통치해야 한다는 원칙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총선거와 대의 정권 같은 민주적 통제의 다양한 평등주의적 방법도, 항상 개선의 여지가 있으며 심지어 그 자체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을 제공하며, 잘 시험되어서 독재정치에 대한 광범위한 전통적 불신에서 독재정치에 대항하는 합리적으로 효과적인 제도적 안전장치일 뿐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로 민주주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러므로 민주주의적 투표 결과를, 올바른 것에 대한 권위적 표현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는 민주제도가 작동하도록 만들 목적으로 다수의 결정을 수용할지라도, 그는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그 결정에 대항하여 싸울 자유를 느끼며 그 결정을 수정하려고 노력할 자유를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살아가면서 다수의 투표가 민주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날을 보게 된다면, 이 슬픈 경험으로 인하여 독재체제를 피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 뿐임을 그는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독재정치에 대항하여 그가 싸우려는 결심이 약해질 필요도 없고, 그의 이론이 모순으로 증명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III

   플라톤에게 돌아가면, 그가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강조함으로써, 통치권에 대한 일반이론을 함축적으로 전제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통치자를 제도적으로 통제하는, 그리고 그들의 권력을 제도적으로 견제하는 문제는 그것에 의하여 거론되지도 못한 채 제거되었다. 관심은 제도로부터 사람에게로 옮겨갔으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이제 천부적 지도자를 선택하는 문제와 지도력을 위하여 그들을 훈련시키는 문제가 되었다.

   이 사실을 고려하여, 플라톤의 이론에서 국가의 복지가, 사람이 아닌 제도의 구축에 의존하기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책임에 의존하여, 궁극적으로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문제라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한다. 플라톤 학설에 관한 이 견해가 피상적이라고 나는 믿는다. 모든 장기적인 정치는 제도적이다. 저것을 피할 방법은 없으며, 심지어 플라톤에게도 저것을 피할 방법은 없다. 지도력에 관한 원리로 인하여 제도적 문제가 사람의 문제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도적 문제가 야기될 따름이다. 우리가 이제 알게 되는 바와 같이, 지도력에 관한 원리로 인하여 심지어 제도일 뿐인 것에 합당하게 요구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는 과제가 부과되는데 즉, 미래의 지도자를 선정하는 과제이다. 그러므로 견제 이론과 통치권 이론 사이의 대립이 제도주의(institutionalism)와 인격주의(personalism) 사이의 대립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지도력의 원리는 그 원리가 제도의 작동을 포함하기 때문에 순수한 인격주의와 거리가 멀다; 그리고 정말로 순수한 인격주의란 불가능하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제도주의 또한 불가능하다고 언급되어야 한다. 제도를 구축하려면 중요한 인간의 결정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최고의 제도도 (민주주의적인 견제와 균형 같은) 작동하려면 관련된 사람에게 상당한 정도까지 항상 의존한다. 제도는 성채와 같다. 제도는 잘 고안되어야 하고 동시에 사람도 잘 선정되어야 한다. 

   사회적 상황에서 인간적인 요소와 제도적인 요소를 구별함은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주 놓치는 요점이다. 그들 대부분은 민주주의적 제도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이 제도들이 있다고 해서 국가나 정책이, 시급하고 찬양받을만한 어떤 도덕적 기준이나 어떤 정치적 요구를 반드시 실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판자들은 자신들의 공격목표를 잘못 설정한다; 그들은 민주주의적 제도가 무엇을 하도록 기대되는지, 그리고 민주주의적 제도의 대안은 무엇이 될 터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위에서 제시된 의미로 이 표찰을 사용하면) 정치제도의 개혁을 위한 제도적 구조를 제공한다. 민주주의로 인하여 제도개혁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가능해지며, 그것으로써 새로운 제도를 고안하고 옛 제도를 조정하는 데서 이성의 사용이 가능해진다. 민주주의가 이성을 제공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시민들의 지적(知的) 그리고 도덕적 기준에 관한 문제는 큰 정도까지 개인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가 역으로 제도적 우생학과 교육적 통제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나의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이유가 아래에 제시될 것이다.) 민주국가의 정치적 결함 때문에 민주주의를 비난한다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 자신을 비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민주국가의 시민들을 비난해야 한다. 비민주국가에서, 합당한 개혁을 이룩하는 유일한 길은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하여 민주주의적인 구조를 도입하는 것이다. ‘도덕적근거로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문제와 제도적인 문제를 구별하지 못한다. 문제를 개선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민주주의의 제도는 자체를 개선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제도를 개선하는 문제는 항상 제도에 관련된 문제라기보다는 사람에 관련된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개선을 원한다면, 우리는 어느 제도를 개선하고자 원하는지 분명히 해야한다.

   정치적 문제라는 분야 내부에서는 사람과 제도 사이의 구별에 상응하는 또 다른 구별이 있다. 그 구별은 오늘의 문제와 미래의 문제를 구별하는 것이다. 오늘의 문제는 주로 사람과 관련되는 반면, 미래 구축은 반드시 제도와 관련되어야 한다. 정치적 문제를 누가 통치를 해야 하는가로 질문하여 접근한다면 그리고 플라톤의 지도력 원리가 채택되면 ㅡ 다시 말해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원리 ㅡ 미래의 문제는 미래의 지도자를 선정하기 위한 제도를 고안하는 형태를 틀림없이 띤다.

   이것이 플라톤의 교육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하나이다. 그 문제에 접근하면서, 교육이론과 교육실행을 자신이 주장하는 지도력 이론과 연결함으로써 교육이론과 교육실행을 플라톤이 완전히 타락시키고 교란했다고 나는 주저 없이 말하겠다. 발생한 피해는 아마도 집단주의를 이타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윤리학에 가해진 피해보다, 그리고 통치권 원리를 소개함으로써 정치 이론에 가해진 피해보다 훨씬 더 크다. 미래의 지도자를 선정하고 지도력을 기르기 위하여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교육의 과제여야 (더 정확하게, 교육제도의 과제) 한다는 플라톤의 전제는 아직도 대체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교육제도에 제도의 범위를 지나치는 과제를 부과함에 의하여, 플라톤은 교육제도의 개탄스러운 상태에 부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교육의 과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일반적으로 토론하기 전에, 나는 그가 주장하는 지도력 이론인 현명한 자의 지도력 이론을 더 자세하게 전개하고 싶다.

 

                         IV

   플라톤 이론의 몇 가지 요소가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을 개연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크라테스의 근본적 원칙 하나는 그의 도덕적 지성주의(moral intellectualism)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에 의하여 (α) 소크라테스의 선량함과 지혜의 동일시로 누구도 나은 지식을 가지고 반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그리고 지식 부족 때문에 모든 도덕적 실수가 생긴다는 그의 이론; (b) 도덕적 우월성은 교육될 수 있으며 보편적인 인간 지능 외에 그 우월성이 특별한 도덕적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그의 이론을 나는 이해한다.

   소크라테스는 도덕주의자였으며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형태의 정부건 그 결점을 비판할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으나 (그리고 정말로, 그런 비판은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할지라도, 어떤 정부에도 필요하고 유용할 터이다) 국가의 법률을 준수하는 중요성을 인정했다. 공교롭게도 그는 자신의 생애를 주로 민주주의 형태의 정부에서 보냈으며, 훌륭한 민주주의자로서 자신이 살던 시대의 몇몇 민주주의 지도자가 보였던 무능함과 허풍을 폭로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알았다. 동시에, 그는 어떤 형태의 참주정치도 반대했다; 그리고 30인의 참주 치하에서 그가 취한 용감한 행동을 우리가 고려하면, 민주주의의 지도자에 대한 그의 비판이 반()-민주주의적 성향 같은 것에 의하여 고취되었다고 전제할 이유가 우리에게 없다. 그가 (플라톤처럼) 가장 훌륭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개연성이 없지 않지만, 그의 견해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가장 현명한 자 즉, 정의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의로써 그는 평등주의적 정의를 의미했다는 것과 (앞장에서 인용된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나오는 글로 지적된 바와 같이) 그는 평등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자였다는 ㅡ 아마도 전 시대를 통하여 개인주의적 윤리에 관한 가장 위대한 주창자 ㅡ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가장 현명한 자가 통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면, 그가 분명히 박식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았음을 강조한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사실상, 그는 과거의 철학자들의 박식함이든 혹은 자신의 세대의 박식한 사람들인 소피스트들의 지식이든, 모든 전문적인 박식함에 회의적이었다. 그가 의미했던 지혜는 다른 종류였다. 그 지혜는 내가 얼마나 모르는가! 라는 깨달음이었을 따름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전혀 알지 못한다고 그는 가르쳤다. (이것은 진정한 과학 정신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플라톤이 자신을 박학한 피타고라스식 현자로 설정한 것처럼, 소크라테스의 불가지론적인 자세는 당시 과학적 성공의 부족에 의하여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이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과, 소크라테스 이전의 마술적 자세에 여전히 빠져있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그들이 다소 명예로운 주술사로, 현명하고 박식하며 은밀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하는 과학자들에 대한 그리고 과학에 대한 자세이다. 소크라테스처럼 과학자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과학자의 인식을 과학자의 지적(知的) 솔직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과학자의 과학적 수준에 대한 척도로서 받아들이는 대신, 그들은 과학자가 소유한 지식의 양에 의하여 과학자를 판단한다.)

   이 소크라테스식 지성주의는 결정적으로 평등주의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이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메논(Meno)에서, 교육을 받지 않은 노예도 심지어 추상적인 문제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로, 그가 지금 소위 피타고라스 정리라고 불리는 것의 설명을 어린 노예에게 가르치는 것을 우리는 본다. 그래서 그의 지성주의는 또한 반()-권위주의적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기예는, 예를 들어 수사학은 아마도 전문가에 의하여 독단적으로 교육이 가능하다; 그러나 진정한 지식인 지혜와 또한 덕행은 그가 산파술의 한 형태로 기술하는 방식으로만 교육이 가능하다. 배우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지닌 편견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비판을 배울 것이고, 진리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또한 스스로 결정하고, 비판적으로 자신의 결정과 자신의 통찰에 의지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을 고려할 때, 가장 훌륭한 사람, 즉 지적(知的)으로 솔직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요구가 (만약 그가 이 요구를 제기했다면) 가장 박식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권위주의적 요구나, 가장 훌륭한 사람, 즉 가장 고귀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귀족주의적 요구와 얼마나 많이 다른지는 명백하다. (심지어 용기도 지혜라는 소크라테스의 믿음도, 귀족으로 태어난 영웅이라는 귀족주의적 교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 도덕적 지성주의는 양날의 칼이다. 그 지성주의에는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면이 있는데, 그런 면은 나중에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에 의하여 발전된다. 그러나 그 지성주의에는 강력한 반()-민주주의적인 경향을 야기할 수 있는 측면이 또한 있다. 그 지성주의는 계몽에 관한, 교육에 관한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권위주의를 요구하는 것으로 쉽게 오해될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를 매우 당혹게 했던 듯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해서 자신의 결점을 알 정도로 충분히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교육을 받아야 하는 가장 큰 필요성에 놓인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것. 배우려는 각오는 본질적으로 지혜, 사실상 소크라테스 자신이 주장한 모든 지혜를 소유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유인즉 배우려고 각오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 비판적이라고 기대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을 일깨울 권위가 필요한 듯하다. 그러나 권위주의의 이 한 요소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서 권위란 그 이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강조에 의하여 훌륭하게 견제된다. 진정한 스승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결여된 자기비판을 보여줌으로써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 ‘내가 지닐지도 모르는 모든 권위는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내가 아는 데 오직 달려있다’: 이것이 아마도 소크라테스가 대중들을 그들의 독선적 수면상태에서 깨어나도록 하려던 자신의 사명을 정당화했던 방식이다. 이 교육적 사명을 그는 또한 정치적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는 도시의 정치적 삶을 개선하는 방법은 시민들을 교육하여 자기비판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이런 의미에서, 국민의 참된 이익을 증진시키는 대신 국민에게 아첨했던 사람들과 반대로, 그는 자신의 시대의 유일한 정치가라고 주장했다.

   교육활동과 정치활동을 소크라테스가 동일시한 것은, 국가가 시민의 도덕적 삶을 살펴야 한다는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으로 쉽게 왜곡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동일시는 모든 민주주의적 통제는 사악하다는 위험스럽게 신빙성이 있는 증거로서 쉽게 이용될 수 있다. 이유인즉 자신들의 임무가 교육하는 것인 사람들이 어떻게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의하여 평가를 받는가? 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더 훌륭한 사람이 덜 훌륭한 사람에 의하여 통제를 받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이 주장은 물론 완전히 반()-소크라테스적이다. 이 주장은 현명하고 배운 사람의 권위를 전제하여,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데에만 근거하여 설정된 교사의 권위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겸손이라는 관념을 훨씬 넘어선다. 이 문제에서 국가-권위는 사실상 소크라테스가 목적한 바와 정반대가 되는 것을 이룩하기 쉽다. 진보를 위한 비판적 불만족과 열성 대신에, 국가의 권위는 독단적 자기만족과 거대한 지적(知的) 만족을 낳기 쉽다. 나는 분명하게 인식된 적이 별로 없는 이 위험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크로스먼(Crossman) 같은 저술가도, 내가 믿기에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정신을 이해했는데, 자신이 아테네에 대한 플라톤의 세 번째 비판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플라톤과 의견을 같이한다: ‘교육은, 국가의 주요 책무여야 하는데, 개인의 변덕에 맡겨졌다.. 검증된 성실성을 지닌 사람에게만 맡겨져야 하는 과제가 여기에 다시 있었다. 국가의 미래는 젊은 세대에게 달려있어서, 아이들의 정신이 개인적인 취향이나 환경의 힘에 의하여 주조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미친 짓이다. 동일하게 파멸적이었던 것은 교사와 교직자 및 소피스트 강연자와 관련한 국가의 자유 방임 정책이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자유 방임 정책은 크로스먼과 플라톤에 의하여 비난을 받았는데, 몇몇 소피스트-강연자들로 하여금, 특히 그들 중 가장 위대한 소피스트-강연자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가르칠 수 있도록 만드는 극히 귀중한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 정책이 나중에 폐기되었을 때, 결과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런 문제를 국가가 통제하면 위험하고, ‘검증된 성실성을 지닌 사람을 요구하는 큰 목소리는 가장 훌륭한 사람을 박해할 결과를 쉽게 낳을 수 있다는 경고이다. (버트런드 러셀이 최근에 받은 박해는 실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근본원칙에 관한 한, 자유 방 대한 유일한 대안이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뿌리 깊은 편견의 한 가지 사례를 우리는 여기에 경험한다. 시민을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게 만드는, 그리고 자신이 지닌 특별한 흥미나 재능을 계발할 기회를 이용하도록 만드는 교육의 제공을 감독하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라고 나는 틀림없이 믿는다; 그리고 국가는 (크로스먼이 옳게 강조한 바와 같이) ‘개인에게 돈을 낼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여 그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지 않도록 또한 확실하게 감독하여야 한다. 이것이, 국가의 보호적 기능에 속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국가의 미래는 젊은 세대에게 달려있어서, 아이들의 정신이 개인적인 취향에 의하여 주조되도록 허용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전체주의로 가는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다. 가장 고귀한 형태의 자유, 즉 지적(知的) 자유를 위험에 빠뜨리는 조치를 옹호하기 위하여 국가의 이익을 가볍게 빙자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교사들 및 교직자들과 관련된 자유 방을 나는 옹호하지는 않지만, 정신을 주조하여 과학교육을 통제하는 전권을 국가 관리들에게 주어서 의심스러운 전문가의 권위라는 것을 국가의 권위로 뒷받침하고 그 권위를 권위적인 교설로서 가르치는 관습적인 관행에 의하여 과학을 파괴하고, 과학적 탐구 정신을 ㅡ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믿음에 반대가 되는 진리를 탐구하는 정신 ㅡ 파멸시키는 권위적인 정책보다는 이 정책이 무한히 더 우수하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지성주의가 근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는 것과 그 지성주의가 포함하고 있는 권위주의적 요소가 소크라테스의 지적(知的) 겸손과 과학적 자세에 의하여 최소한으로 감소하였다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플라톤의 지성주의는 이것과 판이하다. 국가(Republic)에 나오는 플라톤이 분장한 소크라테스 완벽한 권위주의의 구현이다. (심지어 자신을 비하하여 말하는 것조차도 자신의 한계 인식에 근거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역설적인 방식이다.) 그의 교육 목적은 자기비판과 일반적인 비판 정신을 일깨우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은 오히려 교화이다. 그 목적은, (법률[Laws]에서 인용된 문장을 반복하면) ‘긴 습관에 의하여 독립적으로는 어떤 것도 전혀 할 수 없게 되는 것으로 정신과 영혼을 주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예와도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는,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지적 연결고리이자 보편적 이해에 관한 매개체, 이성이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평등주의적이자 해방적인 이념인 이 이념은, 가장 엄격한 검열과 결합되어, 심지어 구두 논쟁도 지배계급이 교육적으로 독점해야 한다는 요구로 뒤바뀐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다;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러나 자신은 연구자이자 탐구자이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 이것은, 직업적으로 현명한 사람인 소피스트와 반대로, ‘철학자’, 다시 말해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지혜를 구하는 자라는 단어로 표현된다고 그는 설명했다. 정치가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가 주장했다면, 정치가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진리를 탐구하여야 하며, 자신의 한계를 자각해야 한다는 것을 그가 의미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이 원칙을 플라톤은 어떻게 바꾸었던가? 처음 보기에, 국가의 통치권은 철학자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요구할 때, 그가 이 원칙을 조금도 바꾸지 않은 것으로 혹시 보일 것이다; 특히, 소크라테스처럼, 그가 철학자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정의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에 의하여 저질러진 변조는 정말로 엄청나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더 이상 겸손한 탐구자가 아니고 그 사람은 거만한 지식 소유자이다. 훈련된 변증학자로서, 그는 지적(知的) 직감이 가능한데, 다시 말해서 영원한 천상의 형상이나 이데아를 볼 수 있었으며, 그것들과 교감할 수 있다. 보통 사람 위 높은 곳에 위치하여, 그는 자신의 지혜와 권능에서 신과 같은, 그렇지 않다면.. 신성한존재이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상적인 철학자는 전지전능에 가깝다. 그는 철학자-왕이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철학자의 모습과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상적인 철학자의 모습 사이의 대조보다 더 큰 대조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두 개의 세계 ㅡ 겸손하고 이성적인 개인주의자의 세계와 전체주의적인 반-(-)의 세계 ㅡ 사이의 대조이다.

   현명한 자가 ㅡ 진리를 소유한 자, ‘완벽하게 자격을 갖춘 철학자 ㅡ 통치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으로 인하여 물론 통치자를 선정하여 교육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순전히 인격 중심적 (제도 중심적과 반대로) 이론에서, 현명한 통치자는 자신이 지닌 지혜로 가장 훌륭한 사람을 자신의 후계자로서 충분히 현명하게 선택할 것이라고 선언함에 의해서만 이 문제는 혹시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에 대한 매우 만족스러운 접근방법이 아니다. 너무 많은 것이 통제되지 않은 상황에 달려있을 터이다; 우연한 사건으로 인하여 국가의 미래 안정성이 파괴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황을 통제하려고,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예견하고 그 일에 대비하려고 노력하면, 다른 모든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순전히 인격 중심적인 해결책은 포기되어야 하고 제도적인 해결책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미 서술된 바와 같이, 미래를 대비하여 계획을 세우려는 노력은 틀림없이 항상 제도주의를 초래한다.

 

                          V

   플라톤에 따라서 미래의 지도자를 보살펴야 하는 기관은 국가의 교육부로 기술될 수 있다. 그 기관은, 순전히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이 주장하는 사회 안에서 단연코 가장 중요한 제도이다. 그 기관은 권력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 이유만으로도, 적어도 고등교육만이라도 통치자에 의하여 직접 통제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에는 몇 가지 추가 이유가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크로스먼(Crossman)이 말하는 바와 같이, 플라톤의 견해로는 단지 최고로 현명한 전문가, 다시 말해서, 통치자 자신을 의미하는 전문가와.. 검증된 성실성을 지닌 사람에게만 지혜에 대한 고차원의 비결을 미래의 현자에게 최종적으로 전수할 주도권이 맡겨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변증법에 적용되는데, 다시 말해서 지적(知的) 직감의 기교, 신성한 원형인 형상이나 이데아를 시각화하는 기교,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상적인 표면의 세상 뒤에 존재하는 위대한 비밀을 밝히는 기교에 적용된다.

   이 최고의 교육 형태에 관한 플라톤의 제도적 요구는 무엇인가? 그 요구는 괄목할만하다. 그는 인생의 절정기가 지난 사람들만 입학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체력이 쇠약해지기 시작하고, 공공 의무나 군복무 의무의 나이가 지났을 때, 그리고 그때만 마음대로 신성한 분야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 , 최고의 변증법적 과목 분야이다. 이 놀라운 규칙에 대한 플라톤의 이유는 명백하다. 그는 사고력을 두려워한다. ‘모든 위대한 것은 위험하다 철학적 사고가 아직 늙음이 찾아오지 않은 두뇌에게 미칠 영향을 그가 두려워한다고 고백을 시작할 때 그가 한 말이다. (이 모든 것을 그는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표현하는데, 소크라테스는 젊은이와 자유롭게 대화할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며 죽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근본적인 목표가 정치적 변화를 중지시키는 것이었음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이것은 정확하게 우리가 예상해야 했던 것이다. 젊을 때, 상층 계급의 구성원은 싸울 것이다. 너무 늙어서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게 될 때, 그들은 스스로 현자가 되어 자신들이 지닌 지혜인 집단주의와 권위주의 교설을 미래 세대에 전승하기 위하여 지혜와 권위로 가득 찬 독선적인 학생이 될 것이다.

   통치자를 현란하기 짝이 없는 색깔로 치장하려고 애를 쓰는 나중의 더 세밀한 구절에서, 플라톤이 자신의 제안을 수정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제 그는 물론 매우 조심할 필요성많은 변증가를 타락시킨.. 반항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미래의 현자들이 예비적 변증학 공부를 서른 살에 시작하도록 허용한다; 그리고 그는 논쟁 사용이 허용될 사람은 훈련되고 잘 균형이 잡힌 본성을 지녀야 한다고요구한다. 이 수정제안은 확실히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근본적인 경향은 동일하다. 이유인즉 이 구절이 계속되면서, 미래의 지도자는 많은 시험과 유혹을 통과하여 쉰 살이 되기 전에 고등 철학 공부에 ㅡ 선()의 본질에 관한 변증적 심상(心象) ㅡ 소개되지 않아야 한다고 우리가 듣기 때문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저서 국가(Republic)의 가르침이다. 대화편 파메니데스(Parmenides)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는 듯한데, 이유인즉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순수철학을 얼추 성공적으로 공부하고, 관념들에 대한 이론이라는 더 미묘한 문제를 설명해보라는 요구를 받고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는 영리한 젊은이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 공부라는 높은 분야로 모험하기 전에 추상적인 사고를 하는 기교에서 더 철저하게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는 훈계를 늙은 파메니데스에게 받고 쫓겨난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이 시기상조라고 여기는 비결을 알려달라고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제자들에게 주는 플라톤의 대답을 (다른 것들 중에서) 심지어 소크라테스도 예전에는 변증술을 배우기에는 너무 어렸다ㅡ 듣는 듯싶다.

   왜 플라톤은 자신이 내세우는 통치자들이 독창성이나 창의력을 갖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대답은 명백하다. 그는 변화를 증오하며 재조정이 필요하게 될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러나 플라톤의 자세에 대한 이 설명은 충분히 심층적이지 않다. 실제로, 우리는 여기서 지도자 원리에 관한 근본적인 난제와 마주친다. 미래의 지도자를 선정하거나 교육하는 바로 그 이념은 자가당착이다. 여러분은 아마도 그 문제를 신체적 우수성이라는 분야에서 어느 정도 해결할는지도 모르겠다. 신체적 독창성이나 신체적 용기는 아마도 발견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적(知的) 우수성의 비결은 비판 정신이다. 그 비결은 지적 독립성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어떤 종류의 권위주의에 대해서도 극복될 수 없다고 틀림없이 증명되는 난제가 생긴다. 권위주의자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에 복종하고 그 영향력을 믿고 호응하는 사람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그는 평범한 사람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이유인즉 자신의 영향력에 반발하고, 그 영향력을 의심하고, 그 영향력에 감히 저항하는 사람을 그가 배제하기 때문이다. 권위자는 지적(知的)으로 용감한 사람, 다시 말해서 자신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는 사람이 가장 귀중한 유형의 사람일 것임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권위자들은 창의력을 알아보는 자신들의 능력을 항상 확신할 것이지만 이것에 의하여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자신들의 의도를 재빨리 파악하는 것뿐이어서, 그들은 영원히 이 차이점을 알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마도 유능한 군사 지도자를 선택하는 특정 어려움의 비밀을 이해할 것이다. 군사적 훈련의 요구로 인하여 논의된 난제가 증가하고 군사적 진보의 방식이란 감히 스스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제거되는 것이다. 지적 창의력에 관한 한, 복종을 잘하는 사람이 역시 지휘도 잘할 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큰 거짓이다. 정당에서도 매우 흡사한 난제가 나타난다: 정당 지도자의 충복이 유능한 후계자가 되는 경우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다소 중요한 결과에, 그리고 일반화될 수 있는 결과에 다다른다고 나는 믿는다. 탁월한 사람을 선택하기 위한 제도는 창안될 수가 없다. 제도적 선택은, 플라톤이 염두에 두었던 것과 같은 목적 즉, 변화를 중지시킬 목적을 위하여 매우 잘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우리가 그 이상을 요구한다면 잘 작동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제도적 선택은 항상 창의성과 독창성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비범하고 예기치 못한 특성을 없애버리는 경향을 항상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적 제도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물론 최상의 지도자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지라도 항상 최악의 지도자에 대비해야 한다고 이전에 언급된 것이 재확인될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도, 특히 교육제도에 최상의 지도자를 골라내는 불가능한 임무를 부여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이것이, 교육제도의 과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경향으로 우리의 교육체계가 경주코스로 바뀌고, 학업과정이 장애물 경기로 바뀐다. 학생들은 배움을 목적으로 자신의 공부에 열중하도록 격려되는 대신, 학생들은 자신의 과목과 탐구에 대한 참된 사랑을 고취 받는 대신, 자신의 개인적 경력을 위하여 공부하라는 격려를 받는다; 학생들은 자신의 승진을 위하여 제거해야 하는 장애물을 넘는 데 도움이 되는 지식만을 습득하도록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심지어 과학 분야에서도 우리의 선택 방식은 다소 조악한 형태의 개인적 야심에 대한 매혹에 근거하게 된다. (만약 열성적인 학생이 동료들에 의하여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는다면, 그것은 이 매혹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지적 지도자를 제도적으로 선정하라는 불가능한 요구로 인하여 바로 과학적 생활뿐만 아니라, 지식적 생활도 위험에 빠진다.

   매우 사실적으로 플라톤은 우리의 중등학교와 대학을 발명한 사람이었다고 언급되었다. 이 파멸적인 교육제도가 인류를 완전히 파멸시키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인류에 대한 낙관적 견해에 관한 나은 주장을 나는 알지 못하고, 진리와 온전함에 대하여 인류가 지닌 불멸의 사랑에 관한 나은 증거, 인류의 독창성과 단호함과 건강에 대한 나은 증거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게도 많은 지도자들의 사기행각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고 지성적이며 자신들의 과제에 헌신적인 많은 청년들과 노인들이 존재한다.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는 말한다, ‘가해진 악행들이 어떻게 더 분명하게 감지될 수 없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성장을 비틀고 막으려고 거의 고의로 행하여진 시도에도 불구하고 젊은 남녀가 그렇게 합리적이고 아름답게 자랐는지 나는 때때로 의아하다. 어떤 사람들은 의심할 바 없이 피해를 입었고, 그들의 일생이 끝날 때까지 그 피해로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피해가 적었거나 전혀 당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은 거의 더 나아진 것 같았다. 이유는 젊은이의 자연적인 본능이 대부분의 경우에 자기들이 받은 훈련에 대해 절대적으로 저항하여, 선생들이 무슨 짓을 할지라도 선생들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선생들이 하는 짓에 몰입하도록 만들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서 플라톤은 실제로 정치지도자를 선정하는 사람으로서도 역시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언급될 것이다.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Dionysius) 2세와 행한 그의 실험의 실망스러운 결과보다는 디오니시오스를 쫓아내는 디오(Dio)의 성공한 원정에 플라톤의 아카데미가 가담한 것을 나는 염두에 둔다. 플라톤의 유명한 친구인 디오는 이 모험에서 플라톤 아카데미의 몇몇 회원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 중 한 명이 칼리포스(Callipus)였는데, 그는 디오가 가장 신뢰하는 동료가 되었다. 디오 스스로 시라쿠사의 참주가 된 후에 그는 그의 동지인 (그리고 아마도 경쟁자인) 헤라클리데스(Heraclides)의 암살을 명령했다. 그 후 곧 그 자신은 참주 직을 찬탈한 칼리포스에게 살해당하고, 칼리포스는 참주 직을 13개월 뒤에 잃었다. (칼리포스는 나중에 피타고라스파 철학자 레프티네스[Leptines]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교사로서의 플라톤 생애에서 유일한 종류가 아니다. 플라톤의 (그리고 이소크라테스[Isocrates]) 제자였던 클레아르코스(Clearchus)는 민주지도자인체 행동하여 자신이 헤라클레아(Heraclea)의 참주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척이자 플라톤 아카데미의 또 다른 회원인 키온(Chion)에게 살해되었다. (몇몇 사람들이 이상주의자로 표시하는 키온이 곧 살해당했기 때문에 어떻게 그가 발전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플라톤이 겪었던 이것들과 흡사한 몇 가지 경험으로 인하여 ㅡ 그는 자신의 한때 제자이거나 동료 중에서 적어도 도합 아홉 명의 참주를 자랑할 수 있었다 ㅡ 절대 권력이 주어져야 하는 사람들을 선택하는 것과 연관된 특이한 난제들이 밝혀진다. 절대 권력에 의하여 부패하지 않는 인격을 지닌 사람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액튼 경(Lord Acton)의 말처럼 ㅡ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 그리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요약한다. 플라톤의 정치강령은 인격 중심적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제도 중심적이었다; 그는 지도력의 계승을 제도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정치적 변화를 중지시키고자 희망했다. 그 통제는 교육을 통해서 수행되어야 했는데 배움에 대한 권위적 견해에 ㅡ 박식한 전문가와 검증된 성실성을 지닌 사람의 권위에 ㅡ 근거한다. 이것이, 책임감이 있는 정치가란 전문가보다는 진리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그 정치가는 자신의 한계를 안다면 현명할 뿐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으로부터, 플라톤이 만들어낸 것이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