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열린사회와 그 적들, II권 12장 헤겔과 새로운 종족주의 (번역 수정본)

이윤진이카루스 2022. 8. 23. 17:58

열린사회와 그 적들, 2권 12장 헤겔과 새로운 종족주의 (번역 수정본).hwp
0.36MB

 

 

12: 헤겔과 새로운 종족주의

 

그리고 헤겔 철학은.. 너무 심오한 사상의

분석이어서 대부분 이해될 수 없었다...

J. H. 스털링(STIRLING)

 

 

I

모든 동시대 역사주의의 시조인 헤겔은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직계 후계자였다. 헤겔은 가장 기적적인 과업들을 이룩했다. 거장 논리학자로서, 그의 강력한 변증법적 방법으로써 순전히 형이상학적 비단 모자(silk hat)로부터 실제 살아있는 토끼를 꺼내는 것은 애들 장난이었다. 그리하여, 플라톤의 저서 티마이오스(Timaeus)와 그 저서의 숫자 신비주의로부터 시작하여, 헤겔은 순전히 철학적 방식으로 (뉴튼의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ia]가 발간된 지 114년 후에) 행성들이 틀림없이 케플러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증명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심지어 행성들의 실제 위치를 연역하는 일을 성취하여 화성과 목성 사이에는 행성이 위치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불행하게도, 그런 행성이 몇 개월 전에 발견되었다는 것을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유사하게, 그는 자성을 띤 쇠는 그 무게의 증가를 의미한다는 것, 뉴튼의 관성이론과 중력이론은 서로 모순이 된다는 것과 (물론 그는 아인슈타인이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의 동일성을 증명하리라고 예견할 수 없었다) 이런 종류의 많은 다른 것들을 증명했다. 그렇게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철학적 방식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당시 독일 자연과학의 후진성에 의해서 부분적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이유인즉 사실은 그것이 처음에 진지한 사람들에 (쇼펜하우어나 J. F. 프리스[Fries]같은) 의하여, 아무튼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처럼 페르시아의 왕이 되느니 한 가지 인과법칙을 발견하기를 원했던저 과학자들에 의하여 실제로 심각하게 고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헤겔의 명성은, 결국 모든 신비를 벗기는 능력이 없어서 자신들을 실망시킬 따름인 과학의 힘든 전문적 언어보다는 이 세상의 심오한 비밀로 재빨리 안내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이유인즉 황량한 형식적 논리를 대체했던 비밀 방식인 헤겔의 변증법(dialectics)이 그랬던 것과 같이, 아무것도 그렇게 쉽게, 그리고 동시에 그렇게 인상적으로 (표면적으로만 일지라도) 난해하게, 그리고 그렇게 빠르고 확실하지만 위압적으로 성공적으로 여하한 문제에도 적용될 없음을 그들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그렇게 값싸게 그리고 그렇게 과학적 훈련이나 지식 없이도 이용될 수 없었고 아무것도 그렇게 장엄한 과학적 분위기를 내지 못할 것임을 그들을 발견했다, 헤겔의 성공은 허위 시대(쇼펜하우어가 독일 관념론 기간을 기술하는 바와 같이) 시작이었으며 무책임 시대(K. 하이든[Heiden]이 현대 전체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것처럼)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지적(知的) 무책임의 시대이고 나중에는, 지적 무책임 시대의 한 가지 결과로 도덕적 무책임의 시대; 거만한 단어들의 마술에 의하여 그리고 은어(隱語)의 힘에 의하여 통제되는 새로운 시대.

먼저 독자로 하여금 헤겔의 허세적이고 황당한 은어(隱語)를 받아들이지 않게 하려고, 나는 그가 소리에 관하여, 특히 소리와 열()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발견했던 놀라운 세부설명 몇 가지를 인용하겠다. 나는 이 횡설수설을 헤겔의 자연철학(Philosophy of Nature)에서 가능한 한 충실하게 번역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이렇게 서술한다: ‘§302. 소리는 물질적 부분들을 분리하는 특정 상황에서, 그리고 이 상황을 부정(否定)하는 데서의 변화이다;ㅡ 말하자면, 단지 저 특정성의 추상적이거나 이상적인 관념성. 그러나 이 변화 자체는, 따라서, 즉각 물질적인 특정 존재의 부정(否定)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특정 중력과 응집의 실재적 관념성(real ideality), 다시 말해서 ㅡ(: heat)이다. 두드려지거나 문질려진 물체와 꼭 마찬가지로 소리를 내는 물체를 가열하는 것은 소리와 함께 개념적으로 시작되는 열()의 출현이다.’ 헤겔의 성실성을 여전히 신뢰하거나, 그의 비결이 공허함보다는 사고의 심오함인 충만이 아니었던지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이 이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을 ㅡ 유일하게 이해가 되는 문장 ㅡ 정독하기를 바라는데, 왜냐하면 이 문장에서 헤겔이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 문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일 따름이다: ‘소리를 내는 물체를 가열하는 것은.. ()이다.. 소리와 함께.’ 헤겔이 자신의 고무적인 횡설수설에 의하여 최면을 당하여 자기기만에 빠졌던지, 혹은 그가 과감하게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여 마술을 걸기 시작했던지 의문이 생긴다. 특별히 헤겔이 자신의 서신 한 통에서 써놓은 것을 고려하면 후자(後者)가 사실이어서 나는 만족한다. 그의 저서 자연철학(Philosophy of Nature)이 발간되기 몇 년 전의 날짜가 찍힌 이 서신에서, 헤겔은 친구였던 쉘링(Schelling)이 서술한 또 다른 자연철학(Philosophy of Nature)을 언급했다: ‘나에게는 수학.. 미분학, 화학에 관하여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자연철학(the Philosophy of Nature)의 횡설수설에 의하여, 사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 철학화에 의하여.. 그리고 심지어 백치 같은 환상인 환상만을 관념들로서 취급함에 의하여 나 자신이 사로잡히도록 할 수 없다고 헤겔은 뽐낸다 (그러나 이것은 허세일 뿐이다). 이것은, 적당한 청중에게 전해진다면 성공을 의미하리라고 그가 깨닫자마자 쉘링의 방식을, 다시 말해서 헤겔 자신이 모방했거나 정확하게 말해서 악화시켰던 저 대담한 허세부리기를 매우 공정하게 특징짓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헤겔이 독일철학에서 자신의 배후에 프러시아라는 국가의 권위를 업지 않고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봉건시대의 복귀기간에 임명된 프러시아국가주의의 최초 공식적 철학자가 되었다. 나중에, 국가는 또한 그의 제자들을 후원하였고 (독일에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국가가 통제하는 대학만 있다), 제자들은 서로 돕는다. 그리고 헤겔 철학이 그 제자들 대다수에 의하여 공식적으로는 부정되었을지라도 헤겔 쪽으로 기우는 철학자들이 철학교육을 지배하여, 그 후 간접적으로 심지어 독일의 중등교육을 지배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대학 중에서, 로마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의 대학들은, 홍수 속의 섬들처럼,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륙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다음에, 영국에서 그렇게 강력한 운동은 결국 틀림없이 제공할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끼던 사람들이 스털링(Stirling)헤겔의 비결(The Secret of Hegel)이라고 불렀던 것을 찾기 시작하자 그들로부터 헤겔 철학은 지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은, 물론, 헤겔이 주장하는 고등관념론과 고등도덕성에 매혹되었고 그들은 또한 제자들의 합창에 의하여 비도덕적이라고 낙인찍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유인즉 심지어 더 온건한 헤겔주의자들도 자신들의 교설들에 대하여 그 교설들은,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에 영원히 적대적인 힘으로부터 나오는 공격에 직면하여 항상.. 다시 정복되어야 하는 획득물이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탁월한 몇 명의 사람들은 (나는 주로 맥태가트[McTaggart]를 생각하고 있다) 헤겔의 수준을 상당히 넘어서 건설적인 관념론적 사고에 커다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일하게 탁월한 비평가들에게 목표를 제시하는 것 외에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유럽대륙 밖에서 특히 지난 20년 동안, 헤겔에 대한 철학자들의 흥미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헤겔에 대하여 더 많이 염려해야 하는가? 답변은, 과학자들이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진화론자들과 별도로) 많은 철학자들이 그에게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영향은 매우 강력한 힘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영향과, 특히 그의 헛소리의 영향은, 여전히 도덕과 사회철학 및 사회학과 정치학에서 (경제학만 제외하고) 매우 강력하다. 특히 역사철학자들, 정치철학자들, 그리고 교육 철학자들은 여전히 크게 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정치학에서, 이것은, 보수 중도파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극좌파와 파시스트 극우파 모두가 자기들의 정치철학을 헤겔에게 근거시킨다는 사실에 의하여 매우 강력하게 밝혀진다; 좌파는, 헤겔의 역사주의적 기획에서 나타나는 국가의 전쟁을 계급 전쟁에 의하여 대체하고, 극우파는 국가의 전쟁을 인종 전쟁에 의하여 대체한다; 그러나 양쪽 모두 다소 의식적으로 헤겔을 추종한다. (보수 중도파는 대체로 헤겔에게 진 빚을 덜 의식한다.)

이 엄청난 영향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나의 의도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보다는 이 현상과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설명으로 제안을 하겠다. 어떤 이유로, 심지어 오늘날에도, 철학자들은 마술사와 같은 분위기를 자신의 주위에 유지했다. 철학은 종교가 다루는 신비를 다루는 이상하고도 심오한 종류의 것으로 간주되지만 아기들에게 밝혀지거나 일반인에게 밝힐 수 있는 방법으로가 아니었다; 철학은 그것 때문에 너무 심오하여, 지식인들과 박식하고 현명한 사람들의 신앙과 신학으로 간주된다. 헤겔 철학은 이 관점들에 훌륭하게 들어맞는다; 헤겔 철학은, 이런 종류의 대중적 미신이 철학으로 상상하는 바로 그것이다. 헤겔 철학은 모든 것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 철학은 모든 질문에 답변을 준비해두고 있다. 그리고 정말로, 누가 그 답변이 사실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것이 헤겔이 성공한 주요 이유는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인 역사적 상황을 간단히 고려하면, 그의 영향 및 그의 철학에 대항하여 싸울 필요성이 아마도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중세의 권위주의는 르네상스와 동시에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대륙에서는, 그 권위주의의 정치적 동반자인 중세 봉건제도는 프랑스혁명 전에 심각하게 위협을 받지 않았다.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중세 봉건제도가 강화됐을 따름이다.) 열린사회를 위한 투쟁은 1789년 프랑스혁명의 이념과 동시에만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봉건 제후들은 곧 이 위험의 심각성을 경험했다. 1815년 반혁명 정당이 프러시아에서 권력을 탈환하기 시작했을 때, 그 정당은 이념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알았다. 헤겔은 이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지명되었고, 열린사회에 대한 최초의 거대한 적인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부활시킴에 의하여 그는 화답했다. 프랑스 혁명이 위대한 세대(the Great Generation)와 기독교의 항구적 이념인 모든 사람의 자유, 평등, 그리고 형제애를 다시 발견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헤겔은 자유와 이성을 적대하는 항구적 반란 뒤에 숨어있던 플라톤의 관념을 다시 발견했다. 헤겔의 학설은 종족주의의 부흥이다. 헤겔의 역사적 중요성은, 그가 말하자면 플라톤과 현대판 전체주의의 사이의 실종된 연결고리를 대변한다는 사실에서 밝혀질 것이다. 현대 전체주의자 대부분은 자신들의 이념이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많은 그 전체주의자는 자신들이 헤겔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고, 현대 전체주의자 전부는 헤겔 학설의 밀폐된 분위기 속에서 양육되었다. 그들은 국가와 역사 그리고 민족을 숭배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헤겔에 대한 나의 관점의 전제는, 물론, 내가 이 저서에서 그랬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다시 말해서 이 현대적 표식을 사용하면 전체주의적으로 그가 플라톤의 가르침을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의 법철학[Philosophy of Law]에서 플라톤에 대한 그의 비판으로부터 헤겔의 해석이 우리의 해석과 일치함이 밝혀질 수 있다.)

독자에게 헤겔이 지닌 국가에 대한 플라톤화하는 숭배를 즉각적으로 엿보게 하려고, 나는 그의 역사주의 철학을 분석하기 전에 몇 구절을 인용하겠다. 이 구절들로 인하여, 헤겔의 급진적 집단주의가 프랑스혁명 전후 결정적인 기간에 프러시아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Frederick William) 3세에게 의존하는 것만큼 플라톤에게도 의존한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 구절들의 교설은, 국가는 모든 것이며,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개인이 국가에 자신의 정신적 존재뿐 아니라 신체적 존재 또한 의지하여 모든 것을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프러시아 국가주의의 그리고 헤겔의 전언이다. ‘보편적인 것은 국가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헤겔은 서술한다. ‘국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바와 같이 신성한 이데아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국가를 신이 지구상에 발현된 것으로 숭배해야 하고, 자연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면 국가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무한히 더 어렵다고 생각해야 한다... 국가는 세상을 통하여 하느님이 행진하는 것이다... 국가는 유기체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의식(意識)과 사고(思考)는 본질적으로 완벽한 국가에 귀속된다. 국가는 자신의 의지를 안다... 국가는 실재적이다; 그리고.. 진정한 실재성은 필연적이다, 실재적인 것은 영원히 필연적이다... 국가는.. 자신을 위하여 존재한다... 국가는 실제로 존재하는 구현된 도덕적 삶이다.’ 여기 뽑아놓은 발언만으로도 헤겔의 플라톤주의와, 국가의 절대적인 도덕적 권위에 관한 그의 주장이 충분히 드러나며, 국가의 도덕적 권위는 모든 개인의 도덕성과 모든 양심을 다스린다. 그것은 물론 허세적이고 신경질적인 플라톤주의이지만, 이로 인하여 그것이 플라톤 학설을 현대 전체주의와 연결시킨다는 사실이 더욱 명백하게 밝혀질 따름이다.

이런 작업에 의하여, 역사에 끼친 그의 영향에 의하여 헤겔이 그의 천재성을 증명하지 않았는지 질문이 생길 수 있을 터이다. 우리가 천재성이라는 용어로 그렇게 많은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 우리가 지닌 낭만주의의 일부분일 뿐이기 때문에, 나는 이 질문이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것과 별도로, 나는 성공이 무엇을 증명한다고 믿지 않으며 역사가 우리의 심판관이라고도 믿지 않는다; 이런 신조들은 오히려 헤겔 학설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헤겔에 관한 한, 나는 그가 재능이 있었다고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소화되지 않은 글을 쓰는 작가이다. 심지어 그를 가장 열렬하게 옹호하는 사람들도 틀림없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의 문체는 의심할 바 없이 추잡하다’. 그리고 그가 쓴 글의 내용에 관한 한, 그는 특별히 독창성 결여에서 최고일 따름이다. 헤겔의 글은 이미 이전 사람들이 더 잘 언급된 말일 뿐이다. 그의 변명술에는 변명술적인 선배들로부터 빌려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탁월함의 흔적은 남기지 않았을지라도, 단 한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그는 이 빌려온 관념과 방법을 한 가지 목표에 바쳤다: 열린사회에 대항하여 싸우고, 그리하여 자신의 고용주인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에게 봉사하는 것. 이성에 대한 헤겔의 혼돈과 타락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부분적으로 필요했고, 부분적으로는 그의 정신상태를 우연적이지만 매우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쉽게 어릿광대가 역사 창조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더 흉악한 결과가 없다면, 헤겔에 관한 전체 이야기는 진정으로 말할 가치도 없을 터이다. ‘독일 관념론의 비극-희극적 발흥은, 그 관념론이 야기한 악랄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희극 오페라를 닮았다; 그리고 이 시작으로 인하여, 후기 영웅들 중에서 그들이 바그너의 장엄한 게르만적 오페라(Grand Teutonic Operas)로부터 도망쳤는지 아니면 오펜바하(Offenbach)의 익살극 무대로부터 도망쳤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헤겔 철학이 숨겨진 동기에 의하여, 즉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프러시아 정권을 복원하려는 이해관계에 의하여 고취되었고 그러므로 그 철학이 진지하게 고려될 수 없다는 나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는 정치적 상황을 알고 있던 사람들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며, 충분히 독립적이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극소수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자유롭게 말했다. 최고의 증인은 쇼펜하우어였는데 그 자신이 반혁명주의자는 아닐지라도 플라톤식의 관념론자이자 보수주의자였지만, 무엇보다도 진실을 간직하고 있었던 최고로 진실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당시 철학적 문제에서 발견될 수 있던 가장 유능한 심판관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쇼펜하우어는, 헤겔과 개인적으로 친교를 맺었으며 미친놈의 혀지 두뇌는 아닌 것과 같은 것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헤겔 철학의 좌우명으로 제시했는데, 그 거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묘사했다: 헤겔은, 존재하는 권력에 의하여 위에서부터 임명된 증명된 위대한 철학자로서, 어리석고 무미건조하며 구역질나고 무식한 사기꾼이었는데, 그는 완전히 미친 황당한 헛소리를 휘갈겨 써서 만들어내는 데서 오만의 극치에 도달했다. 이 헛소리는 고용된 추종자들에 의하여 불멸의 지혜로 시끄럽게 선포되었으며 그런 상태로 모든 바보들에 의하여 기꺼이 수용되었는데 그 바보들은 그리하여 역사상 가장 완벽한 찬양의 합창에 참가했다. 권력자가 헤겔에게 제공한 광범위한 정신적 영향의 분야로 인하여 헤겔은 한 세대 전체를 지적으로 타락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 쇼펜하우어는 헤겔 철학의 정치놀이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칸트에 의하여 새롭게 유명해진 철학은.. 곧 이해관계의 도구가 되어야 했다; 위로부터 국가 이익의 도구, 아래로부터 개인 이익의 도구... 이 운동의 추동력은, 이 모든 엄숙한 가식과 주장과는 반대로, 이상적이지 않다; 그 추동력은 정말로 실재적인 목표인데 즉, 개인적, 공적, 종교적, 정치적, 요컨대 물질적 이익이다... 정파적 이해관계로 인하여 지혜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펜이 강력하게 동요하고 있다... 그들은 진실을 결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철학은 국가의 편에서 도구로, 다른 편에서 소득의 수단으로 악용된다... 그리하여 진실 또한, 단지 부산물로서 밝혀지리라고 누가 실제로 믿을 수 있는가?.. 정권은 철학을 자신들의 국가 이익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삼고, 학자들은 철학을 거래로 삼는다... ’ 프러시아 정권의 급여를 받는 대리인으로 헤겔의 신분을 보는 쇼펜하우어의 관점은, 한 가지 사례를 언급한다면, 헤겔을 찬양하는 제자인 슈베글러(Schwegler)에 의하여 입증된다. 슈베글러는 헤겔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의 명성과 활동의 성취는, 오직 1818년 그가 베를린을 방문하면서 적합하게 시작된다. 여기서 그의 주위에 수많고 광범위하고, 극도로 활동적인 학파가 생겨났다; 여기에서 또한 그는 프러시아의 관료조직과 연계되어 관학(官學)으로서 자신의 철학체계를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한 정치적 영향력을 얻었다; 그러나 자신의 철학의 내적 자유와 그 철학의 도덕적 가치에 항상 이로웠던 것은 아니다.’ 슈베글러의 글을 편집했던 최초의 영국인 헤겔주의 사도인 J. H. 스털링(Stirling) 물론 국가 철학으로서의 헤겔 철학이라는.. 슈베글러의 작은 암시를 너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독자들에게 경고함에 의하여 슈베글러에 대항하여 헤겔을 옹호한다. 그러나 스털링은 몇 쪽 뒤에서, 헤겔 자신이 자기 철학의 정파 정치적이고 변명적인 기능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견해뿐 아니라 슈베글러의 사실 재현을 스털링은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또한 확인한다. (스털링에 의하여 인용된 증거로 인하여, 헤겔이 자기 철학의 이 기능에 관하여 다소 냉소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조금 후에, 다음과 같은 시적(詩的)이자 예언자적인 계시로 나아갈 때 헤겔의 비밀을 스털링은 부지불식간에 폭로하는데 그가 저술하기 전 년도인 1866년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전격전으로 공격한 것을 언급한다: ‘프러시아가 지금 빠르게 개발하고 있는 강력한 생활과 조직은 진정으로 헤겔과 특히 그의 윤리 철학 및 정치 철학 덕분이 아닌가? 보이지 않는 두뇌 속에서 성숙하는 충고가 대중으로부터 힘을 받은 손으로 벼락처럼 타격을 가하는 저 조직의 중심은 진정으로 근엄한 헤겔이 아닌가? 그러나 이 조직의 가치에 관해서, 입헌 국가인 영국에서는 우선주를 가진 주주와 채권을 가지 사람들이 만연한 상업적 부도덕성에 의하여 망하는 반면 프러시아의 철도 주식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주주는 평균 8.33 퍼센트의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실감이 날 것이라고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해야겠다. 이것은 마침내 헤겔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말해준다!’

헤겔의 근본적인 윤곽이 이제, 모든 독자에게 틀림없이 명백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헤겔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다.. ’고 스털링은 칭송을 계속한다. 나 또한 헤겔의 윤곽이 이제 명백하기를 희망하며, 스털링이 얻은 것은 헤겔적 아니고 입헌적인 영국에서 만연한 상업적 부도덕성의 위협으로부터 구조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은 적의 이론이 적의 계급이익에 의하여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를 지적할 준비가 항상 되어있다. 그 철학자들이 그 방식을 헤겔에게 습관적으로 적용하지 못하는 사실은 무엇 때문인가? 헤겔을 프러시아 절대왕정을 위한 대변인으로서 비난하는 대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은 변증법 창시자의 저술과 특히 논리에 관한 그의 저술이 영국에서 더 광범위하게 읽히지 않는 것을 ㅡ 일반적인 헤겔 철학의 장점과 특히 그의 논리의 장점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러시아와 대조적으로 ㅡ 유감스럽게 여긴다.)

헤겔의 정치적 동기라는 문제로 돌아가면, 내가 생각하기에 그의 철학이 자신이 고용된 프러시아 정부의 이익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할 충분하고도 남는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절대왕권 하에서, 그런 영향은 쇼펜하우어나 슈베글러가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함축했다; 이유인즉 지난 수십 년 동안에야 이 왕이 모든 학식은 국가의 이익에 완전히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명료함과 일관성을 보여주는 서류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학문의 세계만을 다루어 학문적 집단을 계발하는 데만 도움을 주는 추상적 과학은, 물론 국가의 복리에 가치가 없다; 그 과학을 완전히 제한하는 것은 어리석을 터이지만 일정한 한계 속에 가두어두는 것은 건강하다라는 글을 우리는 그의 교육 강령에서 읽는다. 1818년 헤겔이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반혁명의 기세는 높았고 왕은 해방 전쟁에서 자신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던 개혁가들과 민족적 자유주의자들을 자신의 정부로부터 숙청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헤겔의 임명이 철학을 건강하게 만들어 국가의 복리에 다시 말해서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그의 절대왕권의 복리에 봉사하도록 일정한 한계 속에 철학을 가두어두는움직임이 아니었던지 우리는 물을 것이다. 헤겔을 크게 예찬하는 사람이 헤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우리가 읽을 때 동일한 의문이 우리에게 제시된다: ‘그리고 1831년 죽을 때까지 사상사에서 가장 강력한 철학파 하나의 인정받는 독재자인 그는 베를린에 머문다.’ (그가 철학의 독재자일지라도 도대체 독재자가 사상의 역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상사상 결여로 대체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 폭로성 구절은 너무 사실적이다. 예를 들어, 이 강력한 학파의 단결된 노력으로 인하여 침묵을 공범으로 해서 세상으로부터 40년 동안 쇼펜하우어의 존재라는 바로 그 사실을 덮어버리는 일이 성공한다.) 헤겔이 철학을 일정한 한계 속에 가두는힘을 정말로 가지고 있어서 우리의 의문이 아주 정곡을 찔렀음을 우리는 안다.

이어지는 것에서 나는 헤겔 철학 전체가 이 의문에 대한 강조적인 답변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는 답변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다시 말해서, 프러시아주의를 위한 변명으로 그 철학을 해석한다면 헤겔 철학이 얼마나 많이 조명을 받았는지를 밝히려고 나는 노력할 것이다. 나의 분석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이 장의 2, 3, 그리고 4절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2절은 헤겔의 역사주의와 도덕적 실증주의를, 이 교설들의 다소 난해한 이론적 배경인 그의 변증법과 소위 동일철학(philosophy of identity)과 함께, 다룰 것이다. 3절은 민족주의의 발흥을 다룬다. 4절에서 버크(Burke)에 대한 헤겔의 관계에 관하여 몇 마디 말이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5절은 헤겔의 교설에 의존하는 현대 전체주의를 다룬다.

 

II

헤겔의 역사주의와 플라톤의 역사주의를 일반적으로 비교함으로써 나는 헤겔 철학의 분석을 시작할 것이다.

이데아 즉, 본질은 변화에 놓인 사물에 앞서서 존재한다고, 그리고 모든 전개의 추세는 이데아의 완성으로부터 멀어지는 운동으로서, 그러므로 추락으로서, 부패를 향한 움직임으로서 설명될 수 있다고 플라톤은 믿었다. 특히 국가들의 역사는 쇠퇴의 역사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쇠퇴는 지배계급의 인종적 쇠퇴에 기인한다. (우리는 여기서 플라톤의 관념인 인종’, ‘영혼’, ‘자연’, 그리고 본질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기억해야 한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이데아들 즉, 본질들은 변화에 놓인 사물의 안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흑은 더 정확하게 (우리가 헤겔을 정확하게 다룰 수 있는 한), 헤겔은 그것들이 변화에 놓인 사물들과 동일하다고 가르친다: ‘실제적인 모든 것은 이데아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물의 본질과 사물의 감지 가능한 모습 사이에 벌어진 틈이 플라톤에 의하여 닫힌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유인즉 헤겔이 이렇게 서술하기 때문이다: ‘본질에 대한 어떤 언급도 우리가 본질을’ (사물의) ‘존재로부터 구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본질과 비교되어 후자(後者)를 우리는 오히려 단지 모습이나 외모로서 간주한다... 모든 것에는 본질이 있다고 우리는 말했다; 다시 말해서, 사물들이란 그것들이 자체를 즉각적으로 보여주는 그것들이 아니다.’ 또한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본질들, 적어도 생명체의 본질들을 (그러므로 또한 국가들의 본질들을), 영혼이나 정신으로서 헤겔은 생각한다.

그러나 플라톤과 달리, 헤겔은 변화에 놓인 세계의 발전 추세는 이데아로부터 떨어져 부패를 향하는 추락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스페우시포스(Speusippus)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전반적인 추세는 오히려 이데아를 향한다고 헤겔은 가르친다; 그것은 진보이다. 그가 플라톤과 함께, ‘부패될 수 있는 사물들은 본질에 근거를 두고, 본질로부터 기원한다고 말할지라도, 헤겔은 플라톤에 반대하여 심지어 본질도 발달한다고 주장한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가 말하는 세상에서와같이 헤겔이 말하는 세상에서, 만물이 유전한다; 그리고 안정된 것을 얻기 위하여 플라톤에 의하여 당초에 도입된 본질이, 예외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유전은 부패가 아니다. 헤겔의 역사주의는 낙관적이다. 그가 주장하는 본질과 정신은, 플라톤이 주장하는 영혼처럼, 스스로 움직인다; 그것들은 스스로 발전하거나, 더 유행적인 용어를 사용하면, 그것들은 창발한다(emerging)’ 그리고 저기-창조적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목적인(final cause)’을 향하여 즉, 헤겔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그 자체 안에서 스스로 실현하고 스스로 실현되는 목적인을 향하여 자신들을 추진한다. 이 목적인 즉, 본질 발달의 종착이 헤겔이 절대 이데아(The Absolute Idea)’ 혹은 이데아(The Idea)’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이데아는 헤겔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 다소 복잡하다: 그것은 통틀어서 미[]이다; 인식이며 실천적 행위이다; 이해(Comprehension)이다; 최고선(the Highest Good)이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관조된 우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소한 난제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실제로 없다.) 우리는 헤겔이 주장하는 무상(無常)의 세계가 창발하거나 창조적 진화상태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세계의 각 단계는 앞선 단계를 포함하고, 그 앞선 단계로부터 각 단계는 시작된다; 그리고 각 단계는 모든 앞선 단계를 대체하여 점점 더 완벽에 접근한다. 발전에 관한 일반적인 법칙은 그러므로 진보의 법칙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알 것과 같이, 단순하고 직선적인 진보의 법칙이 아니라 변증법적인진보의 법칙이다.

앞의 인용 구절에 의하여 밝혀지는 바와 같이, 플라톤처럼 집단주의자인 헤겔은 국가를 유기체로 시각화한다; 그리고 국가에 집단적인 일반적 의지를 부여했던 루소(Rousseau)를 따라서 헤겔은 국가에게 의식적이고 사고하는 본질인 국가의 이성, ‘정신을 부여한다. 이 정신은, ‘바로 본질이 활동인데’ (그것은 루소에게 의지하고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국가를 형성하는 집단적인 민족정신이다.

본질주의자에게, 국가를 알거나 이해하는 것은 틀림없이 국가의 본질이나 정신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앞장에서 안 바와 같이, 본질과 그 잠재력은 그 실제적역사로부터만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국가와 같은 사회제도에 관한 지식을 얻는 방식은 그 역사를 혹은 그 정신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라는 역사주의적 방식의 근본적 입장에 우리는 도달한다. 그리하여 앞장에서 전개된 다른 두 가지 역사주의적 결과가 또한 뒤따른다. 민족정신이 그 숨겨진 역사적 운명을 결정한다; 그리고 존재로 창발하고자원하는 모든 민족은 역사의 무대로 들어감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다른 민족과 투쟁함에 의하여 자신의 개성이나 영혼을 주장해야 한다; 투쟁의 목적은 세계지배이다. 이것으로부터 헤라클레이토스처럼 헤겔이, 전쟁이 만물의 아버지요 왕이라고 믿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처럼, 그는 전쟁이란 정의롭다고 믿는다: ‘세계역사는 세계의 재판정이다라고 헤겔은 서술한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처럼, 헤겔은 사물들의 대조와 대립인 반대되는 것들의 양극성, 기타 등등을 일종의 전쟁으로서 그리고 자연적인 발달의 동력으로서 해석하여 이 교설을 자연의 세계까지 확대함에 의하여 일반화한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처럼, 헤겔은 반대되는 것의 통합이나 동일성을 신뢰한다; 정말로, 반대되는 것의 통합은 진화에서, ‘변증법적진보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해서 우리는 이 두 가지 헤라클레이토스의 개념인 반대되는 것의 전쟁과 그것들의 통합 혹은 동일성을 헤겔이 주장하는 변증법의 주요 관념으로서 기술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 철학은 아마도 다소 독창적이 아닌 철학일지라도, 인내할 만큼 올바르고 정직한 역사주의로서 보인다; 그리고 쇼펜하우어와 함께, 그 철학을 속임수로 기술할 이유가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겉모습은 우리가 이제 헤겔의 변증법을 분석하는 데로 방향을 바꾸면 변하기 시작한다. 이유인즉 그가 칸트를 바라보면서 이 방식을 제시하는데, 칸트는 형이상학을 공격하면서 (이 공격의 과격성은 아마도 나의 서문의 좌우명에서 측정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모든 사념들은 옹호될 수 없음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헤겔은 칸트를 반박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헤겔은 고개를 숙이고, 칸트의 견해를 왜곡하여 그 반대로 만들었다. 이것이 칸트의 변증법인 형이상학에 대한 공격이 형이상학의 주요 도구인 헤겔식의 변증법으로 변질된 방식이다.

칸트는, 자신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Hume)의 영향을 받아서, 순수한 사념이나 이성은 경험에 의하여 도저히 통제될 수 없는 분야로 감히 들어가고자 할 때마다 모순이나 이율배반(antinomies)에 빠져서 자신이 단순한 환상으로 명백하게 기술한 것을 야기하기 마련이라고 주장했다; ‘헛소리’; ‘망상’; ‘불모의 독단’; 그리고 모든 것을 안다는 겉치레 주장. 그는 모든 형이상학적 주장에는, 예를 들어 시간 속의 우주의 시작이나 신의 존재에 관하여, 대조적인 반대주장 즉, 반론(antithesis)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바, 양쪽 모두 동일한 전제로부터 출발할 것이어서 동일한 정도의 증거로 증명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다시 말해서, 경험의 분야를 떠날 때 우리의 사념은 과학적 위상을 가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모든 논증에 대하여 동등하게 유효한 반대 논증이 틀림없이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의도는 형이상학에 관한 하찮은 작가들의 저주받은 다작(多作)’을 영원히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과는 매우 달랐다. 칸트가 중단시킨 것은 합리적 논쟁을 이용하려는 하찮은 작가들의 시도였을 뿐이다; 그 작가들은 가르치려는 시도를 포기했지만, 대중에게 마술을 걸려는 시도는 포기하지 않았다 (쇼펜하우어가 표현한 바와 같이). 이러한 상황전개에 대하여, 칸트 자신도 의심할 바 없이 상당히 큰 비난을 받아야 한다; 이유인즉 그의 저서의 난해한 문체가 (오랫동안 숙고한 이후뿐이었을지라도 그는 매우 서둘러서 집필했다) 독일의 이론적 글에서의 낮은 명료성 기준을 한층 더 낮추는 데 상당히 기여했기 때문이다.

칸트 이후의 어떤 하찮은 형이상학적 저술가도 칸트를 반박하려고 시도하지 못했다; 그리고 더욱 특히 헤겔은, 심지어 영예의 위치로 칸트가 복원시킨 변증법이라는 이름을 부활시킨 것에 대하여 칸트를 과감하게 후원했다. 칸트가 이율배반을 지적하여 완전히 옳았지만, 그 이율배반에 대하여 염려해서 틀렸다고 그는 가르쳤다. 이성이 틀림없이 스스로 모순되는 것은 이성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헤겔은 주장했다; 그리고 합리성이 모순 및 이율배반으로 작용하는 것은 인간 능력의 취약성이 아니라 모든 합리성의 본질 자체이다; 이유인즉 이것이 바로 이성이 발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이성을 마치 정태적(靜態的: static)인 것인 양 분석했다고 헤겔은 주장했다; 칸트는 인류가 발전하며, 인류와 함께, 우리가 받은 사회적 유산도 발전한다는 것을 잊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즐겨 우리 자신의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사회적 유산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무리인 민족이, 역사적으로 발전한 산물일 뿐이다. 이 발전은 변증법적으로, 다시 말해서, 3박자 리듬으로 진행한다. 첫째로 정론(正論: thesis)이 제시된다; 그러나 정론은 비판을 불러올 것으로, 정론은 그 반대인 반론(反論: antithesis)을 주장하는 상대방에 의하여 부정될 것이다; 그리고 이 견해들의 싸움에서, 종합(synthesis) 다시 말해서 보다 높은 수준에서 일종의 반대된 것들의 통합이자 타협이며 화해가 도달된다. 종합은, 말하자면, 두 가지의 원래 반대되는 견해들을 대체함에 의하여 그 견해들을 흡수한다; 종합은 두 가지의 반대되는 견해들을 자신의 요소로 환원하여 그것들을 부정하고 고양하여 보존한다. 그리고 종합이 확립되자마자, 전체 과정은 방금 도달된 더 높은 수준에서 반복될 수 있다. 이것이, 요컨대, 헤겔이 변증법적 3단계라고 불렀던 진보의 3박자 리듬이다.

이것이 비판적 토론과, 그리하여 과학적 사고가 또한 때때로 진보하는 방식을 나쁘게 기술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인정할 준비와 완전히 되어있다. 이유인즉 모든 비판은 어떤 모순과 불일치를 적시함을 본질로 하며, 과학적 진보는 주로 우리가 모순을 발견하는 모든 곳에서 모순을 제거함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이란 모순은 허용될 수 없고 방지될 수 있다는 전제를 토대로 나아가 모순의 발견으로 인하여 과학자는 그 모순을 제거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이것은 의미한다; 그리고 정말로, 모순이 인정되자마자 모든 과학은 틀림없이 붕괴한다. 그러나 헤겔은 자신이 주장하는 변증법적 3단계로부터 매우 다른 교훈을 도출한다. 모순들은 그것들에 의하여 과학이 진보하기 때문에, 모순들은 허용될 수 있고 방지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매우 바람직하다고 그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이 모든 논증과 모든 진보를 틀림없이 파괴하는 헤겔식 교설이다. 이유인즉 모순들이란 피할 수 없고 바람직한 것이라면, 모순들을 제거할 필요가 없어서 모든 진보가 틀림없이 끝장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교설은 헤겔 철학의 주요 신조 중 하나일 뿐이다. 헤겔의 의도는 모든 모순들로써 자유롭게 작용하는 것이다. ‘만물은 본질적으로 모순이다라고 모든 과학의 종말뿐 아니라 모든 합리적 논증의 종말을 의미하는 견해를 옹호하기 위하여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가 모순을 인정하고 싶은 이유는 합리적인 논증을, 그리고 합리적인 논쟁과 함께 과학적이고 지성적인 진보를 중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논증과 비판이 불가능하도록 만듦에 의하여, 그는 자신의 철학을 모든 비판으로부터 안전하게 만들고 그 철학 자체가 모든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강화된 독단론으로서 확립되고 모든 철학적 발전의 정복될 수 없는 정상(頂上)으로 확립되기를 꾀한다. (우리는 여기서 최초의 전형적인 변증법적 왜곡의 사례를 경험한다; 진보의 관념은, 다윈[Darwin]을 낳은 시대에 인기를 얻었지만 보수적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았는데 왜곡되어 그 반대인 종말에 도착한 발전이라는 ㅡ 중단된 발전 ㅡ 관념이 된다.)

헤겔 철학이 의지하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인 헤겔의 변증법적 3단계에 대해서는 이 만큼만 하겠다. 그 이론의 의미는, 내가 그 이론의 적용을 다루는 데로 나아갈 때 알려질 것이다.

헤겔 철학의 두 가지 기둥 중 나머지 하나는 소위 그의 동일철학(philosophy of identity)이다. 그것 또한 변증법을 적용한 것이다. 나는 다른 곳에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그 철학을 이해하려고 시도함으로써 독자들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 이유인즉 주로, 동일철학이란 파렴치하게 모호한 표현일 따름이며, 헤겔 자신의 말을 이용하면, 그 철학은 환상, 심지어 백치성 환상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철학은 루소와 칸트뿐 아니라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과거 철학의 그림자와 메아리가 갇혀있고, 그 과거의 철학들이 순진한 구경꾼들을 혼동시키고 현혹하려고 미친 듯이 노력하며 일종의 마귀 잔치를 즐기는 미궁이다. 그 주요 개념과, 동시에 헤겔의 변증법과 그의 동일철학 사이의 연계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한 반대되는 것의 통합이라는 교설이다. ‘위로 올라가는 길과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동일하다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고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여 이것을 반복한다: ‘서쪽으로 향하는 길과 동쪽으로 향하는 길은 똑같다.’ 반대되는 것들이 동일하다는 이 헤라클레이토스식 교설은, 그리하여 헤겔 자신의 이론체계의 구성요소들로 환원되는옛 철학으로부터 나온 많은 추억들에 적용된다. 본질과 이데아, 하나와 다수, 실체와 우연, 형식과 내용, 주체와 객체, 존재와 생성, 모든 것과 아무 것도 아닌 것, 변화와 정지, 실제성과 잠재성, 실재와 표상, 물질과 정신, 과거로부터 나온 이 모든 유령들이 그 위대한 독재자의 두뇌에 출몰하는 듯한데, 반면 그는 자신의 풍선으로써, 하느님과 세계에 대한 자신이 만든 거만하고 허구적인 문제들로써 자신의 춤을 춘다. 그러나 이 광증에도 방식이 있는데 심지어 프러시아식 방식이다. 이유인즉 이 표면적인 혼란 뒤에는 절대군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철학은 기존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철학의 주요 결과는, 기존 기준 외에는 기준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선하다는 교설인 윤리적 및 법률적 실증주의이다; 그것은 힘이 정의다(might is right)라는 교설이다.

이 교설은 어떻게 도출되는가? 일련의 모호한 말을 통해서일 뿐이다. 우리가 안 바와 같이 자신이 주장하는 형상이나 이데아가 생각 속의 관념들과 전혀 다른 플라톤은, 이데아만이 실재적이라고 그리고 부패될 수 있는 것들은 비실재적이라고 말했다. 헤겔은 이 교설로부터 이념(Ideal) = 실재(Real)라는 등식을 채택한다. 칸트는, 자신의 변증법에서, ‘생각 속의 관념들이라는 의미에서 이데아(Idea)’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순수이성의 이데아(Ideas of Pure Reason)’에 관하여 말했다. 헤겔은 이것으로부터 이데아란 정신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으로 이데아 = 이성이라는 등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교설을 채택한다. 연결하여, 이 두 개의 등식이나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 모호한 표현은, 실재 = 이성이라는 등식을 낳는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헤겔은 합리적인 모든 것은 틀림없이 실재적이고, 실재적인 모든 것은 틀림없이 합리적이며, 실재성의 발전은 이성의 발전과 동일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성과 이데아의 최근 발전보다 더 높은 기준이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지금 실재적이고 사실적인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틀림없이 선할 뿐 아니라 합리적이다. (우리가 알게 될 바와 같이, 특별히 선한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프러시아 국가이다.)

이것이 동일철학이다. 윤리적 실증주의와는 별도로, 진리 이론이 또한 밝혀지는데, 부산물으로서만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을 사용하면). 그리고 그것은 매우 편리한 이론이다. 합리적인 모든 것은 실재적이란 것을 우리는 알았다. 이것은, 물론, 합리적인 모든 것은 실재성과 틀림없이 일치해야 하고, 그러므로 틀림없이 진리이다. 진리는 이성이 발달하는 동일한 방식으로 발달하고, 자체의 최근 발달 단계에서 이성을 매료시키는 모든 것은 틀림없이 또한 저 단계에 대하여 진리이다. 다시 말해서, 최신 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느껴지는 모든 것은 틀림없이 진리이다. 자명(自明)은 진실과 동일하다. 당신이 최신이라면, 당신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은 어떤 교설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 교설은 정의(定義: definition)에 의하여 참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 헤겔이 주관이라고 부르는 것 즉, 신념과 객관이라고 부른 것 즉, 진리 사이의 대립이 동일한 것으로 변한다; 그리고 반대되는 것의 이 통합으로 인하여 과학적 지식이 또한 설명된다. ‘이데아란 주관과 객관의 결합이다.. 과학은 자체와 진리의 분할이 이미 취소되었다고 전제한다.’

그의 역사주의가 건설된 지혜의 두 번째 기둥인 헤겔의 동일철학에 대해서는 이만큼만 하자. 그의 역사주의가 건설됨으로써, 헤겔의 더 추상적인 교설을 분석하는 다소 피곤한 작업이 끝난다. 이 장의 나머지는, 이 추상적인 이론을 정치에 헤겔이 실제 적용하는 것에 국한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실제 적용으로 인하여 그의 노고 전부가 변호적 목적이었음이 우리에게 더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에는 매우 주로 1789년 프랑스혁명의 이념들을 왜곡시키려는 목적이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변증법이 어떤 이념을 그 반대로 왜곡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헤겔은 완벽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변증법은 철학에서 참신한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토론 중인 주제에 관하여 보다 명료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소망을 모의실험하곤 했고, 저 의도를 지닌 모든 종류의 질문을 한 다음에, 그는 함께 대화를 나눈 사람들을 처음에 그들의 첫 인상에 의하여 옳다고 선언된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데려왔다라고 헤겔은 서술한다. 소크라테스의 의도에 관한 기술로서, 헤겔의 이 진술은 아마도 그다지 공평하지는 않다 (소크라테스의 주목적이 사람들을 그들이 전에 믿었던 것의 반대되는 것으로 변환시키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성급함을 폭로하려는 것이었음을 고찰하면); 그러나 헤겔 자신의 의도에 대한 진술로서, 실제로 헤겔의 방식이 그의 계획이 보여주는 것보다 더 서투른 것으로 판명될지라도, 이 진술은 탁월하다.

변증법의 이런 이용에 관한 최초의 사례로서, 법철학(Philosophy of Law) (§ 270)에서 헤겔에 의하여 다루어진 것처럼 사상의 자유, 과학 독립성의 그리고 객관적 진리 기준의 문제를 나는 선정하겠다. 그는 사상의 자유에 대한, 그리고 국가에 의한 그 자유의 보호에 대한 요구로서 해석될 수만 있는 것으로써 시작한다: ‘국가는 사상을 그 본질적 원칙으로서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사상의 자유와 과학은 오직 국가에서만 기원할 수 있다; 지오다르노 브르노(Giodarno Bruno)를 화형에 처하고, 갈릴레오로 하여금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도록 강요한 것은 교회였다... 그러므로 과학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과학의 목적이 객관적 진리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라고 그는 서술한다. 자신의 적들에 대한 첫인상들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유망한 출발 뒤에, 헤겔은 나아가 그들에 대한 첫인상이 옳다고 선언한 것의 반대되는 것으로 그 첫인상들을 가져와서 교회에 대한 또 다른 가짜 공격 때문에 자신의 공격 전선을 은폐한다: ‘그러나 물론 그러한 지식이 항상 과학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지식은 단순한 견해로 전락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견해에 대하여.. 그것은’ (다시 말해서 과학) ‘교회와 동일한 허세적인 요구를 ㅡ 자체의 의견과 신념에서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요구 ㅡ 제기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상의 자유에 대한 요구와,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과학적 주장의 자유에 대한 요구는 허세적으로 기술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헤겔의 왜곡에서 첫걸음이다. 다음에, 국가전복적인 견해에 직면한다면, ‘국가는 객관적 진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다; 그것으로 인하여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객관적인 진리인 것과, 객관적인 진리가 아닌 것을 누가 판단할 수 하는가? 헤겔은 이렇게 답변한다: ‘국가는 일반적으로.. 무엇이 객관적 진리로 간주될 수 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 답변과 동시에, 사상의 자유와, 자체의 기준을 설정하려는 과학의 주장은 마침내 그것들의 반대되는 것으로 전락한다.

변증법의 이런 사용의 두 번째 사례로서, 나는 헤겔이 헌정(憲政: political constitution) 요구를 다루는 방식을 선정하는데, 헤겔은 그 다루는 방식을 자신이 평등자유를 다루는 방식과 연결한다. 헌법 문제를 평가하기 위해서, 프러시아 절대왕정에는 헌법이 없었고 (왕의 절대권력과 같은 원칙을 제외하고는), 여러 독일 지방에서의 민주적 개혁의 운동 구호는 왕이 국가에 헌법을 하사해야 한다는 것이었음이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자신이 몇 년 동안 자신들을 민족으로 설정하고 헌법을 소리쳐 요구하던 저 매우 활동적이고 목소리 큰 사람들의 무리인 성급한 사람들에게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서 자신의 고문 앙실론(Ancillon)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리고 엄청난 압력을 받고 왕이 헌법을 약속했을지라도, 왕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왕에게 순진하게 헌법말을 했다가 해고당한 불운한 시의[侍醫]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이제 헤겔은 이 민감한 문제를 어떻게 다룰까? ‘살아있는 생각으로서, 국가는, 다양한 부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조직된 전체이다... 헌법은 국가권력의 이 결합이나 조직이다... 헌법은 존재하는 정의(正義: justice)이다... 자유와 평등은.. 헌법의 최종 목적이자 결과이다라고 그는 서술한다. 이것은, 물론, 시작일 뿐이다. 그러나 헌법 요구를 절대왕정을 위한 헌법 요구로 변증법적으로 변형시키는 데로 나아가기 전에, 어떻게 헤겔이 두 가지 목적과 결과인 자유와 평등을 그것의 반대가 되는 것으로 변형시키는지를 우리는 먼저 밝혀야 한다.

먼저 어떻게 헤겔이 평등을 불평등으로 왜곡하는지 알아보자: ‘시민들이 법 앞에서 평등한 것에는 위대한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헤겔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표현되어, 그것은 단지 불필요한 동어반복이다; 그 말은 일반적으로 법률적 위상이 존재한다는 것, 법률이 지배한다는 것을 진술할 뿐이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민들은.. 법률 밖에서 또한 평등한 점에서만 법률 앞에서 평등하다. 시민들이 재산, 나이, .. 기타 등등에서 소유하고 있는 저 평등만 법률 앞에서 평등한 취급을 받을 자격이 있다. 법률 자체는.. 불평등한 상황을 전제한다... 현실에서 개인의 구체적인 최고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현대 국가들에서 형태의 위대한 발전과 원숙함뿐이라고 언급되어야 한다.’

헤겔이 평등주의의 위대한 진리를 왜곡하여 그 반대로 만든 것을 이렇게 개괄하여, 나는 그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요약했다; 그리고 내가 이 장 내내 똑같은 일을 해야 할 것임을 나는 독자에게 경고해야겠다; 이유인즉 이런 방식으로만, 그의 장광설과 사고의 비약을 (병적이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 쉽게 읽을 수 있게 제시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에 자유를 고찰할 것이다. ‘자유에 관하여, 과거에는 법적으로 정의된 권리인 도시, 기타 등등의 공적 권리뿐 아니라 개인적 권리도 그것의 자유라고 지칭되었다. 실제로, 모든 진정한 법률은 자유이다; 이유인즉 법률이 합리적인 원칙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법률이 자유를 구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헤겔은 서술한다. 이제 자유한 가지 자유와 동일하고 그러므로 법률과 동일하다는 것을 밝히려고 애를 쓰는 이 주장은, 그 주장으로부터 법률이 많을수록 자유가 그만큼 더 많다고 귀결된다. 그리고 그 주장은, 틀림없이 플라톤에 의하여 처음 발견되고 앞에서 간단하게 논의된, 자유의 역설을 서투르게 (일종의 말장난에 의존하기 때문에 서투르게) 진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란 법률에 의하여 보호받고 제한되지 않으면 분명히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독재를 초래하기 때문에 무제한적인 자유는 그 반대를 초래한다고 말함에 의하여 표현될 수 있는 역설. 이 역설은, 루소에 의하여 모호하게 다시 언급되어, 칸트에 의하여 해결되는데 칸트는 각자의 자유는 제한되어야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정도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헤겔은 물론 칸트의 해법을 알고 있었지만 그 해법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저술자인 칸트를 언급하지 않고 그 해법을 다음과 같이 폄훼하여 제시한다: ‘오늘날, 각자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관련하여 자신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관념보다 더 친숙한 것은 없다; 국가가 그런 상호 제한의 조건이라는 관념; 그리고 법률이 제한이라는 관념.’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가며 칸트의 이론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를 무심한 만족감(good-pleasure)과 자기-의지로 간주하는 저 종류의 관점을 표현한다.’ 이 불가해한 비평으로써, 칸트의 평등주의적 정의론(theory of justice)은 일축된다.

그러나 헤겔 자신은, 그가 자유와 법률을 등치하는 데 사용했던 사소한 농담이 자신의 목적에 완전히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 그래서 다소 주저하면서 그는 자신의 당초 문제인 헌법의 문제로 돌아간다. ‘정치적 자유라는 용어는, 시민 사회의 특정 목적과 사업에서 자신들의 주요 역할을 다른 방식으로 발견하는 사람들이..’ (다시 말해서, 평범한 시민이) ‘국가의 공적인 업무에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흔히 사용된다. 그리고 그런 참여를 확립하는 국가의 측면에만 헌법이라는 제목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이것이 공식적으로 실행되지 않는 국가를 헌법이 없는 국가로 간주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정말로, 이것은 관습이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는가? 단지 언어적 속임수에 의하여 ㅡ 정의(定義)에 의하여: ‘용어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헌법에 의하여 우리는 일반적인 법률의 결정 다시 말해서 자유의 결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헤겔 자신은 그 주장의 충격적인 취약성을 느끼고, 절망에 빠져서 집단적 신비주의와 (루소가 만든 것) 역사주의로 뛰어든다: ‘“누구에게.. 헌법을 만드는 권한이 속하는가?”라는 질문은 누가 민족정신을 만들어야 하는가?”와 동일하다. 헌법에 관한 당신의 관념을 집단적 정신에 관한 관념으로부터 분리하라, 마치 집단적 정신에 관한 관념이 헌법 없이 현재 존재하며 과거에도 존재한 것처럼, 그러면 당신의 환상으로 인하여 당신이 그 관계를’ (, 정신과 헌법 사이의 관계) ‘얼마나 피상적으로 이해했는지가 증명된다... 그것은 민족에 내재하는 정신이며 역사이다 ㅡ 그것만이 저 정신의 역사이다 ㅡ 그것에 의하여 헌법이 과거에 만들어졌고 지금도 만들어진다고 헤겔은 소리친다. 그러나 이 신비주의는 아직도 너무 모호해서 절대주의를 정당화할 수 없다.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헤겔은 이제 서둘러서 그렇게 한다: ‘국가와 그 헌법을 보전하고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인 실제로 살아있는 총체성은 정부이다... 유기적 총체성으로 간주되는 정부에서, 주권 즉, 최고 지위는.. 국가가 지닌 모든 것을 유지하고 모든 것을 명령하는 의지이자 국가의 최고봉이며 모든 것에 스며드는 통합이다. 각 요소와 모든 요소가.. 자체의 자유로운 존재에 도달한 완벽한 국가의 형태에서, 이 의지는 한 가지 실제로 명령하는 개인의 의지이다 (명령하는 의지의 통합이 실제적 존재를 가지지 않을 다수의 의지만이 아니라); 그것은 군주제이다. 군주제의 헌법은 그러므로 발전한 이성의 헌법이다; 그리고 모든 다른 헌법은 이성의 발전과 자기-실현의 낮은 등급들에 속한다고 그는 서술한다. 그리고 한층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저서 법철학(Philosophy of Law)의 유사한 구절에서 ㅡ 앞의 인용문 모두 그의 저서 철학백과(Encyclopaedia)에서 가져왔다 ㅡ 최종적 결정.. 절대적 자기 결정은 왕의 권력과 같은 것을 구성한다’, 그리고 전체에서의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요소는.. 단 한 명의 개인인 군주이다라고 헤겔은 설명한다.

이제 알겠다. 어떻게 사람이 아무튼 모든 헌법 중에서 최고인 절대왕정으로 축복을 받는 나라에 대하여 헌법을 요구할 정도로 어리석을 수 있겠는가? 자유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너무 눈이 멀어 프러시아의 절대왕정에서 각 요소와 모든 요소가 자체의 자유 존재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은 분명히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자기들이 무엇에 관하여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프러시아는 자유의 최고봉이자 바로 보루라는 헤겔의 절대적인 변증법적 증거를 우리는 여기에서 경험한다; 프러시아의 절대주의적 헌법은 인류가 지향하는 목표(goal)라는 (어떤 사람들이 혹시 생각할 것처럼 감옥[gaol]이 아니라) 증거; 그리고 그 정부는, 말하자면, 자유의 가장 순수한 정신을 ㅡ 수용소에 넣어 ㅡ 보전하고 유지한다는 증거.

플라톤의 철학은, 예전에 국가에서 지배권을 주장했는데, 헤겔과 함께 국가의 가장 복종적인 하인이 된다.

이 역겨운 충성이 자발적으로 제공됨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절대왕정의 행복한 시절에는 전체주의적 협박이 없었다; 또한 무수히 많은 자유로운 출판물이 현재 보여주듯이, 출판검열이 그다지 효과적이지도 않았다. 헤겔이 자신의 저서 철학백과를 출판했을 때 자신은 하이델베르크에서 대학교수였다. 그리고 출판 바로 직후에 그는 베를린으로 소환되어, 그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철학의 공인된 독재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실일지라도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헤겔의 변증법 철학의 우수성이 반증되거나 혹은 철학자로서 그의 위대함이 반증되지 못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주장할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쇼펜하우어의 답변이 이미 주어졌다; ‘국가의 편에서는 도구로, 다른 편에서는 소득의 수단으로 철학은 오용된다. 그리하여 진리가, 단지 부산물로서 또한 밝혀지리라고 누가 실제로 믿을 수 있는가?

이 구절들로 인하여 우리는 헤겔의 변증법이 실제로 적용되는 방식을 엿본다. 이제 나는 변증법과 동일철학을 결합하여 적용해보겠다.

우리가 안 바와 같이, 헤겔은 만물은 무상하며 심지어 본질도 무상하다고 가르친다. 본질과 이데아 그리고 정신은 발전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발전은, 물론, 스스로 움직이고 변증법적이다. 그리고 모든 발전의 최근 단계가 틀림없이 합리적이고, 그리하여 선하고 진실한데 이유인즉 그 단계가 전 단계들 모두를 대체하면서 과거 모든 발전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만물은 점점 더 향상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실제적 발전은, 실제적 과정이기 때문에 동일철학에 따라서, 틀림없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과정이다. 이것이 역사에 또한 틀림없이 성립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역사에 숨겨진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헤겔에게, 역사란 펼쳐진 책이 된다. 그 책은 순전히 변명론이다. 그 책은 섭리라는 지혜에 호소함에 의하여 프러시아 군주제의 우월성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 책은 프러시아 군주제의 우월성에 호소함에 의하여 섭리라는 지혜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역사는 실재적인 것의 발전이다. 동일철학에 따르면, 역사는 그러므로 분명히 합리적인 것이다. 실재적 세계의 진화는, 역사가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일종의 논리적 작용이나 추론의 과정과 동일하다고 헤겔에 의하여 수용된다. 역사는 절대정신이나 세계정신의 사고 과정이라고 그는 본다. 역사는 이 정신의 발현이다. 역사는 일종의 거대한 변증법적 삼단논법이다; 말하자면, 섭리에 의하여 추론된다; 삼단논법은 섭리가 추종하는 계획이다; 그리고 도출된 논리적 결론은 섭리가 추구하는 목적이다 ㅡ 세상의 완성이다. 헤겔은 자신의 저서 역사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철학이 이용하여 역사에 접근하는 유일한 사고는 이성에 관한 단순한 구상이다; 그것은 이성이 세상의 주권자이며, 그리하여 세계 역사가 우리에게 합리적인 과정을 제공한다는 교설이다. 이 신념과 직관은.. 철학의 영역에서 가설(假說)이 아니다. 이성은.. 무한 권력;.. 무한 물질..; 무한 형상..; 무한 에너지일뿐 아니라 실체라는 것이 철학의 영역에서 증명된다. 이데아혹은 이성진리이며 영원하며 절대적으로 강력한 본질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이성은 세상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저 세상에서 이성과 이성의 영예와 영광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것도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 ㅡ 이것이,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철학에서 증명되었고, 증명된 것으로 여기에서 간주된다.’ 이 감정 분출로 인하여 우리는 멀리 가지 않는다. 그러나 헤겔이 언급하는 철학에서의 (다시 말해서 그의 저서 철학백과에서의) 구절을 우리가 찾아보면, 우리는 그의 변명적 목적을 조금 더 안다. 이유인즉 우리가 다음 글을 읽기 때문이다: ‘저 역사, 그것도 무엇보다도 보편적 역사가 본질적이고 실제적인 목적을 토대로 세워지고, 그 목적은 역사에서 실현되실제로 존재하고 미래에도 존재할 것 ㅡ 섭리의 계획; 요컨대, 역사에 이성이 있다는 것은 엄격하게 철학적인 토대 위에서 결정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본질적이고 사실상 필연적임이 밝혀져야 한다.’ 이제 섭리의 목적이 역사의 결과에서 실제로 실현되기때문에, 이 실현이 실제적인 프러시아에서 발생했다고 혹시 생각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실현이 프러시아에서 발생했다; 이성의 혹은 헤겔이 말하는 바와 같이 정신의 역사적 발전이라는 세 가지 변증법적 단계들에서, 이 목적이 어떻게 도달되는지 우리들에게 심지어 밝혀지는데 그 정신의 삶은.. 진보적 구현들의 순환이다. 이 단계의 첫 번째는 동양적 독재이고, 두 번째는 그리스와 로마의 민주정치 및 귀족정치에 의하여 형성되며 세 번째이자 가장 높은 것은 독일 군주제인데 독일 군주제는 물론 절대군주제이다. 그리고 헤겔은 자신이 미래의 유토피아적 군주제를 의미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정신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정신은 본질적으로 현재이다; 이것은 정신의 현재 형태가 앞 단계들 모두 포함하여 능가함을 필연적으로 의미한다고 헤겔은 서술한다.

그러나 헤겔은 저것보다 훨씬 더 노골적일 수 있다. 그는 역사의 세 번째 기간인 독일 군주제, 독일세계를 세 부분으로 세분하여 이렇게 말한다: ‘첫째, 우리는 종교개혁을 본질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ㅡ 우리가 중세기의 종말에 관찰했던 저 여명의 붉은 빛을 따라온 완전히 계몽적인 태양; 그 다음, 종교개혁을 계승한 상황의 펼쳐짐;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난 세기말로부터 시작되는 현대1800년에서부터 1830년까지의 (이 강좌가 실행된 마지막 해) 기간. 그리고 헤겔은 이 현재의 프러시아가 자유의 정점이자 보루이며 목표임을 다시 증명한다. ‘보편적 역사의 무대에서, 우리는 정신을 관찰하고 파악할 수 있는데, 정신은 가장 구체적인 실재에서 자체를 드러낸다고 헤겔은 서술한다. 그리고 헤겔은 정신의 본질은 자유라고 가르친다. ‘자유는 정신의 유일한 진리이다.’ 따라서 정신의 발전은 틀림없이 자유의 발전이며, 최고의 자유는 역사적 발전의 마지막 세분화를 의미하는 독일 군주제의 저 30년 동안에 틀림없이 이룩되었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는다: ‘독일정신은 새로운 세계의 정신이다. 그 정신의 목적은, 자유의 무제한적 자주 결정으로서 절대적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프러시아를 찬양한 이후에 그 정권이 공적(公的: official) 세계에 의존하고 그 최고점은 군주의 개인적인 결정이다; 이유인즉 최종적 결정은, 위에 밝혀진 바와 같이, 절대적인 필연성이기 때문이다라고 헤겔은 우리에게 확신시키고 헤겔은 자신의 저서의 완성적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이 의식이 도달한 요점이며 이것들은 자유가 자체를 실현하는 저 형태의 가장 중요한 단계들이다; 이유인즉 세계 역사는 자유의 이데아가 발전하는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는.. 정신의 실현이라는 것, 이것은 진정한 신()의 정당화이며 역사 속에서 신()의 정당화이다... 일어난 일과 일어나고 있는 일은.. 본질적으로 신()의 작품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내가 헤겔이 우리에게 신()과 프러시아를 동시에 변호한다고 말했을 때 내가 정당화되지 않았는지, 그리고 헤겔이 우리에게 지구상의 신성한 이데아로서 숭배하라고 추천하는 국가는 1800년에서 1830년까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프러시아만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은지를 나는 묻는다. 그리고 정당한 모든 일을 역겹게 왜곡시키는 이 행동을 능가함이 가능한지를 나는 묻는다; 열린사회의 이성, 자유, 평등 및 다른 이념들의 왜곡뿐 아니라 신()에 대한 성실한 신앙과 심지어 성실한 애국심의 왜곡.

진보적이고 심지어 혁명적으로 보이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지금쯤 독자에게 익숙할 사물을 왜곡하는 저 일반적인 변증법적 방식에 의하여 나아가서, 헤겔이 어떻게 최종적으로 놀랄 정도로 보수적인 결과에 도달하는지를 나는 기술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역사철학을 자신의 윤리적이고 법률적인 실증주의와 연결하여 그 실증주의에 일종의 역사주의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역사는 우리를 판결한다. 역사와 섭리로 인하여 현존하는 권력들이 생성되었기 때문에 그 권력들의 힘은 틀림없이 정당하다, 심지어 신성스럽게 정당하다.

그러나 이 도덕적 실증주의에 의하여 헤겔은 완전하게 만족하지는 못한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가 자유와 평등에 반대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는 인간의 형제애인 인도주의 즉, 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인류애에 반대한다. 양심은 맹목적인 복종에 의하여 그리고 명성과 운명이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낭만적 윤리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형제애는 전체주의적 민족주의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한다. 어떻게 이것이 실천되는지는 이 장의 3절과 특히 4절에서 밝혀질 것이다.

 

III

나는 이제 다소 이상한 이야기를 ㅡ 독일 민족주의 발흥에 관한 이야기 ㅡ 매우 간단하게 개괄하고자 한다. 의심할 바 없이 이 용어가 의미하는 경향들에는, 이성과 열린사회에 대항하는 반란과 강력한 연관성이 있다. 민족주의는, 우리가 지닌 종족적 본능과 열정 및 편견에 호소한다. 그리고 민족주의가 집단적 책임으로 대체하려고 시도하는 개인의 책임이라는 긴장으로부터 편안해지려는 우리의 향수적 열망에 민족주의는 호소한다. 정치이론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작품들, 심지어 옛 과두독재자(the Old Oligarch)의 이론 그러나 더욱 두드러지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이 단호하게 민족주의적 관점을 피력하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면 이 경향들과 일치한다; 이유인즉 이 저술들이, 열린사회와, 제국주의와 세계주의(cosmopolitanism) 및 평등주의라는 새로운 이념과 싸우려는 시도로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정치이론의 이러한 초기 전개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갑자기 멈춘다. 알렉산더의 제국과 동시에, 진정한 종족적 민족주의는 정치적 관행으로부터 영원히, 그리고 정치이론으로부터 오랫동안 사라진다. 알렉산더에서 시작하여 계속, 유럽과 아시아의 모든 문명국가는 무한히 혼합된 기원의 인구를 포함하는 제국이었다. 유럽 문명과 그 문명에 속하는 모든 정치 단위는 그 후 계속해서 국제적으로, 즉 정확하게 말해서 종족 혼합적으로 남았다. (알렉산더가 우리로부터 떨어진 만큼 다시 알렉산더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고대 수메르 제국은 최초의 국제적 문명을 이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치적 관행에 성립하는 것은 정치이론에도 성립한다; 100년 전까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 민족주의는 실제로 정치적 교설로부터 사라졌다. (물론, 종족적이어서 편협한 감정은 늘 강력했다.) 민족주의가 백 년 전에 부흥했을 때, 민족주의는 유럽의 완전히 혼합된 지역 모두 중에서 가장 혼합된 지역의 한 지역 안인, 독일 안에 그리고 특히 주로 슬라브 인구를 지니고 있었던 프러시아 안에 있었다. (겨우 백 년 전에 당시 슬라브 인구가 우세하던 프러시아가 전혀 독일국가로 취급되지 않았던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프러시아의 왕들은 브란덴부르크의 왕자들로서 독일제국의 선출권을 가진 자들이었는데, 독일 왕들로 여겨졌을지라도, 비엔나 회의[the Cogress of Vienna]에서, 프러시아는 슬라브 왕국으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1830년 헤겔은 심지어 브란덴부르크와 메클렌부르크[Mecklenburg]독일화된 슬라브인들이 살고 있다고 여전히 말했다.)

그리하여 민족국가라는 원칙이 정치이론에 재도입된 이래 짧은 시간이 지났을 따름이다.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원칙이 우리 시대에 널리 인정되어 보통 당연시되고, 흔히 무의식적으로 당연시된다. 이제 그 원칙으로 인하여, 말하자면, 대중적 정치사상이라는 함축적인 전제가 형성된다. 그 원칙은 특히 의도는 좋았지만 충분히 고찰되지 못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이래,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정치윤리의 기본적 공준(公準)으로 심지어 여겨진다. 유럽의 역사에 관하여, 모든 종류의 종족들이 이동하고 섞이는 것에 관하여, 그들의 원래 아시아의 주거지로부터 나와서 유럽대륙이라고 불리는 반도의 미로에 도달했을 때 분리되고 뒤섞인 민족들의 무수한 물결에 관하여 조금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것을 알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적용 불가능한 원칙을 제시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설명하자면, 성실한 민주주의자였던 (그리고 열린사회를 위한 모든 투사 중 가장 위대한 투사 한 명이었던 마사리크[Masaryk] 또한) 윌슨이, 순종적이고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던 인류에게 부과된 가장 반혁명적이고 노예근성적인 정치철학으로부터 나온 운동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윌슨은 플라톤과 헤겔의 형이상학적 정치이론들로 양육되어 희생물이 되고 그 정치이론들에 근거한 민족주의적 운동의 희생물이 되었다.

민족국가의 원리, 다시 말해서 모든 국가의 영토는 한 민족이 거주하는 영토와 일치해야 한다는 정치적 주장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것처럼 전혀 그렇게 자명하지 않다. 누군가가 자신이 민족성에 관하여 말을 할 때 자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다고 할지라도, 예를 들어 종교 혹은 특정 지리적 지역에서의 탄생이나 어떤 왕조에 대한 충성심 혹은 민주주의 같은 정치적 신조보다 (민주주의로 인하여 다언어 국가인 스위스의 통합적 요인이 형성된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민족성이 더 중요한 근본적인 정치적 범주로서 수용되어야 하는 이유가 전혀 분명하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종교나 영토 혹은 정치적 신조가 다소 분명하게 결정되는 반면, 아무도 민족에 의하여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실제 정치의 근간으로서 사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물론, 민족이란 특정 국가에 살거나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우리가 말한다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는 민족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지 민족이 국가에 의하여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민족국가 원칙의 포기를 의미할 터이다.) 민족이란 공동의 근원이나 공동 언어 혹은 공동 역사에 의하여 통합된다고 주장하는 어떤 이론도 실제로 수용되거나 적용될 수 없다. 민족국가라는 원칙은 적용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분명히 구상된 적도 없다. 그 원칙은 신화이다. 그 원칙은 비합리적이고 낭만적이며 유토피아적 꿈으로 자연주의에 대한 그리고 종족적 집단주의에 대한 꿈이다.

그 원칙이 지닌 내재적인 반혁명적이고 비합리적인 경향에도 불구하고, 현대 민족주의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헤겔 이전의 짧은 역사에서 혁명적이고 자유주의적 신조였다. 역사적 우연과 같은 것에 ㅡ 최초의 민족적 군대인 나폴레옹의 지휘 하의 프랑스 군대가 독일 땅을 침공하고 이 사건으로 야기된 대응 ㅡ 의하여 그 원칙은 자유의 진영에 들어갔다. 이렇게 전개된 역사를, 그리고 주인과 노예처럼 그리스인들이 야만인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플라톤이 최초로 주장한 때부터 민족주의가 속했던 전체주의 진영으로 헤겔이 민족주의를 다시 가져왔던 방식의 역사를, 개괄하면 흥미롭다.

플라톤은 불행하게도 자신의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질문함에 의하여 공식화했다는 것이 기억될 것이다: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 누구의 의지가 법률이 되어야 하는가? 루소 이전에, 이 질문에 대한 통상적인 답변은 제후였다. 루소는 새롭고 매우 혁명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제후가 아니라 민중이 통치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한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의지가 통치를 해야 한다고. 이런 방식으로, 루소는 민중의 의지인 집단적 의지, 혹은 그가 명명한 바와 같이 일반 의지(general will)’를 창안하게 된다; 그리고 민중은, 한 번 의지를 부여받으면, 초월적 개성으로 고양(高揚)되어야 했다; ‘민중 외적인 것과 관련하여’ (다시 말해서 다른 민족들에 관련하여) ‘그 초월적 개성이 단 하나의 존재, 하나의 개인이 된다고 루소는 말한다. 이 창안에는 상당한 양의 낭만적 집단주의가 있지만 민족주의를 향한 경향은 없다. 그러나 루소의 이론은 분명히 민족주의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씨앗의 가장 특징적인 교설은 다양한 민족들이 개성들로서 구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에 의하여 민족적 징집을 근거로 민중의 군대가 창설된 때 민족주의적 방향으로 커다란 실제적 발걸음이 이루어졌다.

민족주의 이론에 기여한 다음 사람들 중 하나는, 칸트의 이전 제자이자 당시 개인적인 친구였던 J. G. 헤르더(Herder)였다. 훌륭한 국가란 자연적인 국경, 즉 자체의 민족이 거주하는 장소들과 일치하는 국경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헤르더는 주장했다; 자신의 저서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사상(Ideas towards a Philosophy of the History of Mankind) (1785)에서 그가 처음 제안한 이론. ‘가장 자연스런 국가는, 단 하나의 민족적 특성을 지닌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다... 민족이란 단지 더 널리 퍼진 가족과 같은 자연스러운 성장이다... 모든 인간 공동체에서와 같이,.. 국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자연적 질서가 ㅡ 다시 말해서,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의도한 저 기능을 모든 사람이 성취하는 질서 ㅡ 가장 훌륭한 것이다라고 그는 서술했다. 이 이론은, 국가의 자연적인국경의 문제에 대한 답변, 즉 민족의 자연적인국경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따름인 답변을 하려고 노력하는데, 처음에 많은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 칸트가 헤르더의 이 저술에서 위험한 비합리적인 낭만주의를 즉각 알아챘던 것을 알면 흥미로운데, 칸트는 헤르더를 노골적으로 비판하여 그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들었다. 나는 칸트의 비판으로부터 한 구절을 인용할 텐데 왜냐하면 그 구절이 헤르더뿐 아니라 피히테와 쉘링 및 헤겔 같은 이후 예언 철학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모든 현대 철학자들을 탁월하게 최종적으로 요약하기 때문이다: ‘유추를 재빨리 집어내는 영민함과 그 유추를 이용하는 데 과감한 상상력이, 자체의 목적을 ㅡ 항상 수수께끼에 감추어진 목적 ㅡ 위한 이익을 얻기 위하여 감정들과 열정들을 매혹하는 능력과 결합된다. 이 감정들은, 강력하고 심오한 사상의 노력으로서 혹은 적어도 매우 중요한 언급의 노력으로서 쉽게 오해된다; 그리하여 그 감정들로 인하여, 냉정한 판단력이 정당화되었다고 보는 것보다 더 높은 기대가 일어난다... 동의어들이 설명들로 허위로 제시되고 풍자들이 진리들로 제시된다고 칸트는 서술했다.

독일 민족주의를 자체의 최초의 이론과 함께 제공한 사람은 피히테였다. 그가 주장하는 바, 민족의 경계선은 언어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런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서 방언의 차이점이 언어의 차이점이 되는가? 얼마나 많은 다른 언어를 슬라브족이나 독일인이 사용하는가, 혹은 차이점이 단지 방언만인가?)

특히 피히테가 독일 민족주의의 창안자 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찰하면, 그의 견해로 인하여 매우 기묘한 전개상황이 발생했다. 1793, 그는 루소와 프랑스혁명을 옹호하고 1799년 그는 여전히 이렇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프랑스 공화국만이 정직한 사람의 조국이 될 수 있다는 것, 정직한 사람이 모든 나라 중에서 이 나라에만 자신의 능력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은, 인류가 지닌 가장 소중한 희망뿐 아니라 바로 그 희망의 존재도 프랑스의 승리와 묶여 있기 때문에 명백하다... 나는 나 자신과 나의 능력 모두를 프랑스 공화국에 바친다.’ 피히테가 이 언급을 했을 때 그는 당시 프랑스인들이 관할하던 장소인 마인츠(Mainz)에 있는 대학에서 자리를 협상하고 있었다는 것이 주목될 것이다. ‘1804, 피히테는.. 프러시아에서의 직업을 떠나서 러시아로부터의 부름을 받고자 열망했다. 프러시아 정부는 그가 원하는 급여의 가치가 있다고 그를 평가하지 않아서 그는, 러시아 정부가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burg) 과학원의 교수로 임명하고 400불 루블 이상의 월급을 지급한다면 죽을 때까지 그들의 소유가 될 터이다라고 러시아 측 협상가에게 편지를 쓰면서, 러시아로부터 더 많은 인정을 기대했다E. N. 앤더슨(Anderson)은 자신의 저서인 민족주의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에서 서술한다. 계속해서 앤더슨은 ‘2년 후 세계주의자 피히테의 변신이 민족주의자 피히테로 완성되었다고 서술한다.

베를린이 프랑스인들에 의하여 점령되었을 때, 피히테는 애국심 때문에 떠났다; 앤더슨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가 프러시아 왕과 정부에 의하여 주목되기를 원했던행동. A. 무엘러(Mueller)W. 폰 훔볼트(von Humboldt)가 나폴레옹에 의하여 접대를 받았을 때, 피히테는 화를 내며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무엘러와 훔볼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그런 수치스러운 영예를 받지 않아서 나는 기쁘다.. 사람이 훌륭한 대의명분에 공개적으로 헌신한다면.. 그 사람의 양심과 분명히 또한 그 사람의 나중 성공도 달라진다.’ 이것에 관하여 앤더슨은 이렇게 비평한다: ‘사실상, 그는 이익을 보았다; 의심할 바 없이 그가 베를린 대학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이 일화의 결과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그의 행동이 보이는 애국심이 훼손되지 않고 다만 그 애국심이 올바르게 조명된다.’ 이 모든 것에, 철학자로서 피히테의 생애는 처음부터 사기극에 기초한다는 것을 우리는 추가해야 한다. 그의 최초 저술은 익명으로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Critique of All Revelatio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당시 칸트의 종교철학서가 예정되었다. 피히테의 저술은 극도로 무미건조하고 칸트의 문체를 교묘하게 모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저술이 칸트의 작품이라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만들기 위하여 소문을 포함한 모든 것이 이용되었다. 피히테가 칸트의 친절한 주선으로 출판인을 구했을 따름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그 문제는 제대로 밝혀진다 (칸트는 그 저서의 몇 쪽 이상을 읽을 수 없었다). 언론이 피히테의 저서를 칸트의 저서로 극찬했을 때, 칸트는 그 저서가 피히테의 작품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고, 피히테는 자신에게 갑자기 명성이 내려와서 예나(Jena)에서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칸트는 이 사람과 절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또 다른 선언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신이여 우리들의 친구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소서. 우리들의 적들로부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허풍이 칸트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세워진, 현대의 관념철학뿐 아니라 현대의 민족주의를 초래한 사람의 생애에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이 구별을 고집하는 것이 아마도 다소 현학적이라는 것을 내가 인정해야할지라도, 나는 피히테의 허풍과 헤겔의 협잡질을 구별함에서 쇼펜하우어를 따른다.) 전체 이야기는 흥미로운데 주로 그 이유는 그 이야기가 폭로하는 철학의 역사와 일반적인 역사때문이다. 그런 얼간이들이 진지하게 고찰된다는 추잡한 사실보다, 그런 얼간이들이 일종의 숭배 대상이 된다는, 흔히 피곤할지라도 엄숙한 연구의 대상이 된다는 (그리고 시험문제의 대상이 된다는) 추잡한 사실보다 아마도 더 웃기는 사실을 나는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허풍선이 피히테와 협잡꾼 헤겔이 데모크리토스, 파스칼,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 칸트, J. S. (Mill) 및 버트런드 러셀 같은 사람들과 동일 수준의 사람으로 취급받으며, 두 사람의 도덕적 가르침이 진지하게 고찰되어 심지어 이 다른 사람들의 도덕적 가르침보다 더 우수하다고 아마도 여겨지는 충격적인 사실만을 나는 의미하지 않는다. 철학에 대하여 찬사를 일삼는 이 역사철학가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선악의 구분은 말할 것도 없고 사색과 환상을 구분할 수도 없어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역사가 우리의 심판관이라거나, 그들이 주장하는 철학사가 다양한 사상체계들에 대한 함축적 비판이라고 감히 선언한다는 것을 나는 또한 의미한다. 이유인즉 그들의 과도한 찬사는, 그들이 주장하는 철학사에 대한 함축적 비판일 수 있을 따름이며 그리고 철학이라는 일이 그 잡소리에 의하여 영예롭게 되는 잡소리로 된 음모와 횡설수설에 대한 함축적인 비판일 수 있을 따름이 명백하다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상결핍에 정비례하고 인간의 복지에 제공되는 봉사의 양에는 반비례하여 허장성세가 성장한다는 것은 이 사람들이 즐겨 인간의 본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법칙인 듯하다.

피히테가 민족주의의 사도가 되었을 때, 본능적이고 혁명적인 민족주의가 독일 땅에서 나폴레옹의 침략에 대한 저항으로서 고조되고 있었다. (그 민족주의는 초[]-민족적 제국의 확장에 대항하는 저 전형적인 종족적 저항의 하나였다.) 민중은, 루소와 프랑스혁명의 의미로 자신들이 이해했지만 프랑스인 정복자들 없이 원했던,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했다. 민중은 왕들과 황제에게서 동시에 등을 돌렸다. 이 초기 민족주의는, 그 속에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인도주의적 갈망이 숨겨진 일종의 변장으로서, 새로운 종교의 힘을 이용하여 일어났다. ‘민족주의는 정통 기독교가 쇠퇴함에 따라서 자체만의 신비한 경험에 대한 믿음으로써 그 기독교를 대체하면서 성장했다고 앤더슨은 서술한다. 민족주의는 압박을 받는 종족인 다른 구성원들이 있는 공동체에 대한 신비한 경험이자, 기독교뿐 아니라 특히 절대 정권의 남용으로 인하여 파괴된 왕에 대한 신뢰감과 충성심을 또한 대체했던 경험이다. 그렇게 길들여지지 않고 새로운 민주주의적인 신앙은 지배계급에게, 특히 프러시아의 왕에게 커다란 짜증과 심지어 위험의 근원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위험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해방전쟁이 끝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먼저 자신의 민족주의적 고문들을 해고함에 의하여 그 다음에 헤겔을 임명함에 의하여 민족주의에 대처했다. 이유인즉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철학의 영향력이 증명되었고 그 요점은 헤겔에 의하여 합당하게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은 헤겔 자신이 하는 일의 기초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은 이제 잠재적인 조직의 본질적인 기초이다, 그리고 철학이 그리하여 지배하게 된다. 프랑스혁명이 철학으로부터 일어났다고 언급되며 그래서 철학이 세계 지혜로 기술되었던 것은 근거 없는 일이 아니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 진리일 뿐 아니라.. 세속적 문제에서 밝혀지는 바와 같은 진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혁명이 자체의 최초 충동을 철학으로부터 받았다는 주장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헤겔은 말한다. 이것은 헤겔이 자신의 즉각적인 과제를 통찰한 것 즉, 반대 충동을 내놓으려는 것을 의미한다; 최초의 충동은 아닐지라도, 그 충동에 의하여 철학이 반발의 힘을 강화할지도 모르는 충동. 이 과제의 일부는 자유, 평등, 기타 등등의 이념을 왜곡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훨씬 더 화급한 과제는 혁명적인 민족주의적 신앙을 순치하는 것이었다. 헤겔은 이 과제를 자신의 에너지를 감정을 파괴하려는 헛된 노력에 낭비하지 말고 감정을 이용하라는 파레토(Pareto)의 충고 정신으로 완수했다. 그는 솔직한 반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주의를 잘 훈련된 프러시아의 권위주의로 변형시킴에 의하여 민족주의를 길들였다. 그리고 그가 민족주의라는 강력한 한 가지 무기를 닫힌사회 진영으로 가져오는 일이 발생했는데, 그 무기는 근본적으로 닫힌사회에 속했다.

이 모든 일은 다소 어설프게 이루어졌다. 헤겔은, 정부에 아첨하려는 자신의 욕심으로, 때때로 민족주의자들을 너무 공개적으로 공격했다. ‘어떤 사람들은 군주의 주권에 반대하여 민중의 주권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중의 주권이 군주의 주권과 대비될 때, “민중의 주권이라는 말은 민중이라는 조잡한 개념으로부터 발생하는 단지 저 혼탁한 개념의 하나로 증명된다. 자신들의 군주가 없다면.. 민중은 단지 형태 없는 무리이다라고 헤겔은 법철학(Philosophy of Law)에서 서술했다. 그보다 앞서 철학백과(Encyclopaedia)에서 그는 이렇게 서술했다: ‘사적 인간의 총화가 흔히 민족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런 총화는 민족이 아니라 오합지졸이다; 그리고 그 점에 관하여, 그런 총화로서 민족이 존재하거나 힘을 얻어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한 가지 목표이다. 민족의 그런 상태는 무법과 사기약화와 야수적인 상태이다. 그런 상태에서, 민족은 폭풍우가 이는 자연의 힘이 있는 바다의 힘처럼 다만 형체가 없고 난폭하고 맹목적인 힘일 터인데, 민족이 ㅡ 정신적인 요소가 ㅡ 그러할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파멸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순수한 자유로서 기술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들을 수 있다.’ 여기에는 분명히 자유주의적인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그들을 왕은 마치 역병처럼 증오했다. 그리고 독일제국을 재건하려는 초기 민족주의자들의 꿈을 헤겔이 언급한 것을 우리가 알 때 이것은 한층 더 분명해진다: ‘제국이라는 허구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허구는 부서져서 주권국가가 되었다고 그는 최근 프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을 칭송하여 말한다. 그가 지녔던 반()-자유주의적 경향으로 인하여 헤겔은 영국을 나쁜 의미에서 민족의 가장 특징적인 사례로 언급했다. 영국의 경우를 고찰하라. 사적인 개인이 공적인 일을 우세하게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자유로운 헌법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되었다. 경험에 의하면 저 나라는 유럽의 다른 문명국과 비교하여 민형사법에서, 재산관련 법률과 자유관련 법률에서, 예술과 과학을 위한 정책에서, 가장 낙후되고 객관적 자유나 합리적인 권리는 형식적 권리와 특정 사적인 이익에 희생당한다: 게다가 이런 일은 심지어 종교에게 바쳐진 제도나 재산에서도 발생한다라고 그는 서술한다.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을 받고서만, 그리고 왕이 말한 바와 같이 국가는 물리적 힘에서 잃은 것을 지적(知的) 과단성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이념으로 베를린 대학이 설립되었던 프러시아보다 더 후진적일 수 있었던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특히 예술과 과학이 고찰될 때 정말로 놀라운 진술이다. 몇 쪽 뒤에 헤겔은 영국에서의 예술과 과학에 대하여 자신이 말했던 것을 잊는다; 이유인즉 그곳에서 역사 서술의 방식이 정화과정을 거쳐서 더 견고하고 더 성숙한 특성에 다다른 영국을 말하기 때문이다.

헤겔이 자신의 과제가 민족주의의 자유적이며 심지어 제국주의적인 경향과 싸우는 것임을 알았음을 우리는 안다. 그는 민족주의자들에게 그들의 집단주의적 요구는 전능한 국가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실현된다고, 그래서 민족주의자들이 수행할 필요가 있는 유일한 것은 국가의 힘을 강화하는 일을 돕는 것이라고 설득함에 의하여 자신의 과제를 수행한다. ‘민족국가는 그 실체적인 합리성과 즉각적인 실제성에서 정신이다라고 그는 서술한다; ‘그러므로 민족국가는 지구상에서 절대적인 권력이다.. 국가는 민중의 정신 자체이다. 실제적인 국가는 자체의 모든 특정 업무에서, 전쟁과 제도에서, 이 정신에 의하여 작동된다... 하나의 특정 민족의 자의식은 집단적 정신을.. 발달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 그 안으로, 시대정신이 자체의 의지를 투입한다. 이 의지에 거슬러서, 다른 민족정신이 어떤 권리도 가지지 못한다: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그는 서술한다.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하는 것은 그러므로 민족과 민족정신 및 민족의 의지이다. 역사는 다양한 민족정신이 세계지배를 위하여 경쟁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민족과 민족정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주역들이기 때문에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 옹호하는 개혁은 불필요하다고 귀결된다; 게다가, ‘모든 민족에는.. 자신에게 알맞아서 자신에게 속하는 헌법이 있다’. (법률적 실증주의.) 플라톤-프러시아주의식 국가숭배에 의해서 뿐 아니라 역사적 성공의 숭배인 역사숭배에 의해서도, 민족주의 속의 자유주의적 요소를 헤겔이 대체함을 우리는 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은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성공했다.) 이런 방식으로, 헤겔은 민족주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을 뿐 아니라 민족주의에 새로운 이론을 부여하기도 했다. 우리가 안 바와 같이, 피히테는 민족주의는 언어에 근거한다는 이론을 민족주의에 부여했다. 헤겔은 민족 역사론(historical theory of a nation)을 도입했다. 헤겔에 따르면 민족이란, 역사에서 활동하는 정신에 의하여 단결된다. 민족은 공동의 적에 의하여, 그리고 민족이 싸우는 전쟁의 동료애에 의하여 단결된다. (인간의 근원과 관련하여, 인종은 인간의 근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의 오류에 의하여 단결되는 인간의 집합체라고 언급되었다. 유사한 방식으로, 헤겔의 의미에서의 민족은 몇몇 사람들의 역사 관련 공동의 오류에 의하여 단결된 몇몇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이 이론이 어떻게 헤겔의 역사주의적 본질주의와 연결되는지는 분명하다. 민족의 역사는 민족의 본질 즉, ‘정신의 역사이며 역사의 무대위에서 자체를 주장한다.

민족주의 발흥에 대한 개괄을 마치면서, 나는 비스마르크의 독일제국 건설에 이르기까지의 사건에 관하여 언급할 것이다. 헤겔의 정책은 민족주의적 감정을 파괴하려는 헛된 노력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신, 그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이 유명한 수법이 다소 이상한 결과를 낳는 것으로 보인다. 중세에 기독교가 권위적 종교로 바뀌었지만 기독교의 인도주의적 경향을 완전히 억압하지는 못했다; 반복적으로, 기독교는 권위적 외피를 뚫고 나왔다 (그리고 이단으로 박해를 받았다). 이런 식으로, 파레토(Pareto)의 충고는 지배계급을 위험에 빠뜨리는 경향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줄뿐 아니라, 또한 바로 이 경향을 보존하는 데 비의도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한다. 유사한 일이 민족주의에도 발생했다. 헤겔은 독일 민족주의를 길들여서 프러시아 민족주의로 대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주장하는 프러시아주의의 한 요소로 민족주의를 환원함(그 자신의 은어를 사용하여) 의하여 헤겔은 민족주의를 보존했다’; 그리하여 프러시아는 독일 민족주의 감정을 이용하는 길로 어쩔 수 없이 나아가야 했다. 프러시아가 1866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을 때, 프러시아는 독일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그리고 독일의 지도력을 확보한다는 구실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프러시아는 크게 확장된 1871년의 프러시아를 새로운 독일제국’, 새로운 독일민족으로 ㅡ 헤겔이 주장하는 민족 역사론에 따라 전쟁에 의하여 한 단위로 합쳐진 ㅡ 선전해야 했다.

 

IV

우리 시대에, 헤겔의 신경질적인 역사주의는, 여전히 현대의 전체주의가 그 급성장을 의지하는 자양분이다. 이 장의 5절에서 밝혀질 것처럼, 헤겔의 역사주의를 사용하여 그 토대가 마련되어 지식인들은 교육을 받아 지적(知的)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지적 솔직함은 우리가 간직하는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교훈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그리고 그것은 정당한가? 헤겔의 위대함은 그가 새롭고 역사적인 사고방식의 ㅡ 새로운 역사적 의미의 ㅡ 창안자라는 사실에 놓여있다는 주장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나의 많은 친구들은 헤겔을 대하는 나의 자세에 대하여, 그의 위대함을 보지 못하는 나의 무능에 대하여 나를 비판하였다. 내가 그의 위대함을 정말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내 친구들은 물론 전적으로 옳다. (나에게 아직도 볼 수 없다.) 이 잘못을 고치기 위하여, 어디에 헤겔의 위대함이 놓여있는가? 라는 의문을 나는 상당히 체계적으로 조사하였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의심할 바 없이, 역사적 드라마의 방대함과 위대함에 관한 헤겔의 말로 인하여 역사에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의심할 바 없이, 그의 방대한 역사주의적 일반화와 시대구분 및 해석들로 인하여 몇몇 역사가들이 매료되어 그들은 가치 있고 세밀한 역사연구를 (그 연구로 인하여 거의 변함없이 헤겔의 방식뿐 아니라 헤겔이 발견한 것의 취약성이 밝혀졌다) 하도록 자극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자극적인 영향은 역사가의 업적이었을까, 혹은 철학자의 업적이었을까? 오히려 그 영향은 선전가의 업적이 아니었을까? 역사가들에게 헤겔을 철학자로서 소중히 평가하는 (조금일지라도) 경향이 있으며, 철학자들에게 그의 공헌이 (조금이라도) 역사를 이해한 것이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음을 나는 알아냈다. 그러나 역사주의는 역사가 아니며, 그리고 역사주의를 신뢰한다고 역사 이해나 역사 감각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헤겔의 위대성을 역사가나 철학자로서 우리가 평가하기를 원한다면, 사람들에게 그의 역사 감지력이 고무적인지를 우리가 자문해서는 안 되고 이 감지력에 많은 진실이 있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헤겔 철학에서 중요하고 혹시 함축적이라고 주장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관념을 나는 발견했다. 그것은 헤겔의 관념으로, 이성이 전통에 지고 있는 빚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추상적인 이성주의와 지성주의를 공격하게 된다. 그 관념은, 사람이란 무()로부터 사상의 세계를 창조하지 못하여, 공백으로 시작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그러나 그 사실을 헤겔은 자신의 논리학에서 망각한다) 대한 어떤 인식이다; 그러나 사람의 사상이란, 주로, 지적 유산의 산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어떤 인식.

이것이 중요한 점이라는 것, 누가 그것을 기꺼이 찾으려고 한다면 헤겔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요점이라고 나는 인정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그 요점이 헤겔 자신의 공로라는 것을 부인한다. 그 요점은 낭만주의자들의 공동 재산이었다. 모든 사회적 실체가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 이성에 의하여 계획된 발명품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의 변덕들로부터, 생각과 이해관계의 상호작용으로부터, 고통으로부터 그리고 열정으로부터 출현하여 형성되는 이 모든 것은 헤겔보다 오래되었다. 그것은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모든 사회제도의 작동과 관련된 전통의 중요성을 그가 파악함으로써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버크가 끼친 영향의 흔적이 헤겔에게서 발견될 수 있지만, 오직 역사적 및 진화적 상대주의라는 과장되고 옹호될 수 없는 형태로서 ㅡ 오늘날 믿어지는 것은 사실상 오늘날 진리라는 위험한 교설의 형태로, 그리고 어제 진리였던 것은 (‘믿어지는뿐 아니라 진리) 내일 허위일 것이라는 동등하게 위험한 추론의 형태로서 ㅡ 인데 확실히 전통의 중요성에 대한 평가를 고취할 것 같지 않는 교설이다.

 

V

나는 이제 헤겔 철학을 다루면서 마지막 부분, 헤겔이 주장하는 교설에 대한 새로운 종족주의나 전체주의의 의존을 분석하는 데로 나아간다.

전체주의의 발흥 역사를 쓰는 것이 나의 목적이라면, 나는 먼저 마르크스주의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이유인즉 파시즘이 부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정신적 및 정치적 붕괴로부터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게 될 바와 같이, 유사한 언급이 레닌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주요 의제가 역사주의이기 때문에, 나는 파시즘을 먼저 다루고 지금까지 발흥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역사주의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나중에 다룰 것을 제안한다.

현대 전체주의는 자유와 이성에 대항하는 지속적인 반란 내부의 일화일 뿐이다. 더 오래된 일화들로부터 현대 전체주의가 구분되는 것은 그 이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 전체주의 지도자들이 선배들의 대담한 꿈 한 가지를 성취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의해서이다; 그 지도자들은 자유에 대항하는 반란을 대중운동으로 만들었다. (물론 그 인기는, 과대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식인은 민중의 일부일 뿐이다.) 그것은, 관련된 국가에서, 또 다른 대중운동인 사회민주주의 즉, 마르크스주의의 민주주의적 해석이 붕괴함으로써만 가능해졌는데,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의 생각에서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대표했다. 이 운동이 1914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여 단호하게 저항하는 데 실패한 것은 우연만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 이 운동이 평화문제를 다루는 데, 무엇보다도 실업과 경제 불황의 문제를 다루는 데 무기력하다는 것이 명확해졌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운동이 파시스트의 공격에 저항하여 겨우 주저하며 자신을 방어했을 때, 자유의 가치에 대한 그리고 평등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았고, 자유에 대항하는 지속적인 반란은 어떤 수단을 쓰든지 다소 대중적인 후원을 얻을 수 있었다.

파시즘이 마르크스주의의 유산 일부를 넘겨받아야 했던 사실로 인하여 파시즘 이념의 원래특징 하나인 한 가지 요점이 설명되는데, 그 요점에서 파시즘이 자유에 대항하는 반란의 전통적 구조로부터 이탈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요점은 파시즘이란 초자연적인 것을 공개적으로 호소하는 데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파시즘이 반드시 무신론적이요, 신비하거나 종교적인 요소가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통하여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 퍼지자 노동계급 가운데서 인기를 겨냥했던 정치적 신조는 전통적 종교형태 어느 것에도 자체를 엮을 수 없었다. 이것이, 파시즘이 적어도 자체의 초기 단계에서 자신의 공식 이념에 19세기 진화론적 유물론의 어떤 혼합물을 추가한 이유이다.

그리하여 파시즘의 태동 공식은 모든 국가에서 똑같다: 헤겔에 19세기 유물론을 약간 보태는 것 (특히 헤켈[Haeckel]이 부여한 다소 조잡한 형태의 다윈론). 인종주의에서의 과학적요소는 헤켈(Haeckel)에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헤켈(Haeckel)1900년 어느 현상금 대회의 책임을 맡고 그 주제가 국가의 내부적 및 정치적 발전에 관하여 우리는 다윈론의 원리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이었다. 일등상은 W. 샬마이어(Schallmeyer)의 방대한 인종주의적 저술에 배당되었는데, 그는 그리하여 인종 생물학의 원조가 되었다. 이 유물론적 인종주의가, 그 매우 다른 뿌리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자연주의와 얼마나 강력하게 닮았는지를 관찰하면 흥미롭다. 양쪽의 경우에, 근본 관념은 쇠퇴란, 특히 상류계급의 쇠퇴는, 정치적 부패의 뿌리에 있다는 것이다. (열린사회의 전진에 뿌리가 있다고 읽힌다). 게다가, 피와 땅(Blood and Soil)이라는 현대 신화에는 플라톤이 말하는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신화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헤겔 + 플라톤이 아니라 헤겔 + 헤켈(Haeckel)이 현대 인종주의의 공식이다. 우리가 알게 되는 바와 같이, 마르크스는 헤겔이 주장하는 정신을 물질에 의하여, 그리고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의하여 대체했다. 동일한 방식으로, 인종주의는 헤겔의 정신대신에 물질적인 것을, 즉 피나 인종이라는 유사-생물학적 개념을 대체한다. 정신대신에, 피는 스스로 발전하는 본질이다; ‘정신대신에, 피가 세계의 주권자이며 역사의 무대에서 자신을 표출한다; 그리고 민족의 정신대신에, 민족의 피가 민족의 본질적 운명을 결정한다.

헤겔 철학이 인종주의로 실체변화를 하거나 정신이 피로 실체변화를 한다고 해서 헤겔 철학의 주요 경향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런 실체변화로 인하여 헤겔 철학에 생물학과 현대 진화론이 약간 부여되기만 한다. 결과적으로 스스로 발전하는 생물학적 본질이라는 유물론적이고 동시에 신비적 종교로서 창조적 진화의 종교와 (그 예언자는 헤겔주의자인 베르그송이었다) 매우 유사한 생각이 든다. 그 종교를 G. B. (Shaw)가 심오하게라기보다는 예언자적으로 예전에 인류를 장악했던 모든 종교의 첫 번째 조건에 일치하는 신앙: 이름하여, 그것은 틀림없이.. 초월-생물학(meta-biology)으로서 규정했다. 그리고 정말로, 인종주의라는 이 새로운 종교로 인하여 말하자면 초월-구성요소와 생물학-구성요소나 헤겔적인 신비의 형이상학과 헤켈(Haeckel)적인 유물론적 생물학이 분명히 밝혀진다.

현대 전체주의와 헤겔 철학 사이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이만큼만 하자. 대중성이라는 관점에서 이 차이점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대 전체주의와 헤겔 철학의 주요 정치적 경향들에 관한 한 이 차이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유사점으로 눈을 돌리면, 우리는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현대 전체주의의 더 중요한 관념들 거의 모두가 헤겔로부터 계승되었는데, 헤겔은 A. 지먼(Zimmern)권위주의적 운동의 무기고라고 부르는 것을 수집하여 보존했다. 이 무기 대부분이 헤겔 자신에 의하여 주조되지 않고 자유에 대항하는 지속적인 반란의 다양한 고대 전쟁 보물창고에서 그에 의하여 발견되었을지라도, 그 무기들을 재발견하고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손에 쥐여준 것은 의심할 바 없이 헤겔이었다. 여기에 이 관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몇 가지 관념들의 간단한 목록이 있다. (나는 플라톤의 전체주의와 종족주의를 생략하는데, 주인과 노예 이론에 덧붙여 그것들은 이미 논의되었다.)

(α) 국가는 국가를 창조하는 민족 (혹은 인종) 정신의 (혹은 지금은, [the Blood]) 화신이라는 역사주의적 관념 형태로의 민족주의; 하나의 선택된 민족은 (지금은 선택된 인종)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지닌다. (b) 다른 모든 국가에 대한 천적(天敵)으로서 국가는 전쟁에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해야 한다. (c) 국가는 어떤 종류의 도덕적 의무에서도 면제된다; 역사, 다시 말해서, 역사적 성공이 유일한 심판관이다; 집단적 효용성이 개인적 행동에 대한 유일한 원칙이다; 선전주의적 거짓말과 진실왜곡은 허용될 수 있다; (d) 전쟁의 윤리적관념 (전체적이고 집단주의적), 특히 늙은 민족에 대항하는 젊은 민족의 윤리적전쟁 관념; 전쟁과 운명, 그리고 매우 바람직한 상품으로서의 명성. (e) 위대한 사람, 세계사적 인물, 깊은 지식과 커다란 열정을 지닌 사람의 창조적 역할 (지금은 지도력의 원칙). (f) 영웅적 삶이라는 이상(ideal) (‘위험하게 살아라’), 그리고 소시민과 그의 삶이 지니는 얄팍한 범용함의 반대인 영웅적인 사람이라는 이상(ideal).

정신적 보고(寶庫)의 이 목록은 체계적이지도 않고 완결적이지도 않다. 그 보물 모두는 옛 세습재산의 본질적 부분이다. 그리고 그 보물들은 저장되어, 헤겔과 그의 추종자들의 저술에서뿐 아니라 독점적으로 3세대의 긴 기간 동안 그렇게 부패한 정신적 자양분을 먹은 지식인들의 정신에서도 또한 이용될 준비가 되어, 일찍이 쇼펜하우어에 의하여 지성을 파괴하는 가짜 철학언어의 악의적이고 범죄적 악용으로 인정된다. 나는 이제 이 목록의 다양한 요점들을 더 세밀하게 검토하겠다.

(α) 현대 전체주의의 교설에 따르면, 국가 같은 것은 최고의 목적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피(Blood)요 민중이요 인종이다. 고등 인종일수록 국가를 창조할 힘을 소유한다. 인종이나 민족의 최고 목표는 자체의 자기-보존의 강력한 도구로서 작용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정신 대신에 피를 대체한 것을 제외하고) 헤겔에 기인하는데, 헤겔은 이렇게 서술했다: ‘민족의 존재에서, 근본적인 목표는 국가가 되어 자체로서 국가를 보전하는 것이다. 국가로 자신을 형성하지 못한 민족에는 ㅡ 민족에 지나지 않는 엄밀하게 말해서 야만의 상태에서 존재했던 민족들처럼, 역사가 없다. 민족에게 발생하는 것은.. 국가와 관련하여 자체의 본질적 중요성을 지닌다.’ 그렇게 형성되는 국가는 전체주의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힘은 국가의 모든 기능에서 국민의 전체 삶에 퍼져야 하고 그 삶을 통제해야 한다: ‘국가는 그러므로 민족의 생활에서 모든 구체적인 요소의 근본이자 중심이다: 예술, 법률, 도덕, 종교, 그리고 과학에 관하여... 국가라는 구체적 실체 안에 존재하는.. 실체는 민중의 정신 그 자체이다. 실제적인 국가는 자체의 모든 특정 사건에서, 전쟁, 제도, 기타 등등에서 이 정신에 의하여 움직인다.’ 국가는 강력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국가의 힘과 싸워야 한다. 국가는 역사의 무대에서 자신을 주장해야 하고, 자체의 역사적 행위에 의하여 자체의 고유한 본질이나 정신과 자체의 엄격하게 정의된민족적 특성을 증명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세계지배를 목표로 해야 한다. 여기에 헤겔이 말하는 이 역사주의적 본질주의의 개요가 있다: ‘바로 정신의 본질은 활동이다; 정신은 자체의 잠재력을 실제화하고, 자체를 자체의 행위로, 자체의 작업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정신은 민족정신과 함께 한다; 자체의 역사를 구성하는 사건들과 변천들에서 존재하고 지속되는.. 것은 특징들이 엄격하게 정의된 정신이다. 저것이 자체의 작업이다 ㅡ 저것이 이 특정 민족이 실재하는 것이다. 민족은 그 민족들의 행위인 것이다... 민족은 자체의 웅대한 목표를 실현하는 데 몰두하는 한 도덕적이고, 고결하며, 활기차다... 세계사적 민족들이 최고점에 다다르는 헌법은 그 민족들에게 고유하다.. 그러므로, 고대 세계사적 민족들의 정치제도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특정 민족적 천재 각자는 보편적 역사 과정에서 단지 한 명의 개인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정신이나 민족적 천재는 세계지배에서 최종적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특정 민족의 자의식은.. 그 속에서 시대정신이 자체의 의지를 투입하는 객관적 실제이다. 이 절대적 의지에 대항하여 다른 특정 민족정신은 어떤 권리도 가지지 못한다: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

그러나 헤겔은 민족주의의 역사적이고도 전체주의적인 이론을 개발했을 뿐 아니라, 그는 또한 민족주의의 심리학적 가능성도 분명하게 예견했다. 그는 민족주의가 어떤 필요에 ㅡ 세계 속에서 자신들의 분명한 위치를 발견하여 알고자 하는, 그리고 강력한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 ㅡ 부응하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독일 민족주의의 저 두드러진 특징, 특히 영국인들을 향한 독일민족의 강하게 발전된 열등의식을 (더 최신적인 용어사용법을 사용하여) 그는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민족주의와 종족주의로써, 내가 (10장에서) 문명의 긴장(strain of civilization)으로 기술한 저 감정에 의식적으로 호소한다: 헤겔은 이렇게 서술한다, ‘모든 영국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바다를 항해해서 세계의 상권을 갖는 사람들이다; 동인도와 그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저 정신에 대한 개인의 관계는.. 정신으로 인하여 개인이 세상에서 확정된 장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ㅡ 중요한 것이 되는 것. 이유인즉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람들에게서 이미 확립되어 확고한 세계.. 자신을 소속시켜야 하는 세계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민족정신은 자체의 작업과 그리하여 자체의 세계에서 자체의 존재를 즐기고 만족을 발견한다.’

(b) 헤겔과 그를 인종주의적으로 추종하는 사람 모두에게 공통적인 이론은, 국가란 바로 그 본질에 의하여 다른 개별 국가와의 대조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독일의 주도적 사회학자 한 명인 H. 프라이어(Freyer)는 이렇게 서술한다: ‘자신의 핵심 주변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존재는 심지어 비의도적으로도 경계선을 만든다. 그리고 국경선으로 ㅡ 심지어 비의도적일지라도 ㅡ 인하여 적이 생긴다.’ 유사하게 헤겔은: ‘개인이 다른 사람에게 연계되어 있지 않다면 실제 인간이 아닌 것과 꼭 마찬가지로 국가도 다른 국가에 연계되어 있지 않다면 실제적 개별체가 아니다... 한 특정 국가의 다른 국가에 대한 관계로 인하여 열정, 이해관계, 목적, 재능, 미덕, , 불의, 악덕, 그리고 단순한 외적 기회의.. 가장 변혁적인 연극이 제시한다. 그것은 그 속에서 심지어 윤리적 전체인 국가의 독립이 우연에 노출되는 연극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합연방으로써 영구 평화를 확립하려는 칸트의 계획을 채택함에 의하여 불행한 사태를 통제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은가? 칸트의 평화 계획을 비평하면서 헤겔은 분명히 아니다라고 말한다: ‘칸트는 제후들의 동맹을 제안했다고 헤겔은 다소 부정확하게 말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요즘 말하는 민주국가의 연맹을 칸트가 제안했기 때문이다). ‘제후들의 동맹은 틀림없이 국가들의 논란을 해결한다; 그리고 신성동맹(the Holy Alliance) 아마도 이런 종류의 제도가 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국가는 개별체이다; 그리고 개별성 안에는 부정(negation: 否定)이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몇몇 국가는 자신들을 한 가족으로 구성할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연합은, 개별체로서, 틀림없이 반발을 유발하여 적을 낳는다.’ 이유인즉 헤겔이 주장하는 변증법에서, 부정은 제한과 동일하며 그리하여 국경선인 경계선뿐 아니라 반대인 적을 낳기 때문이다: ‘또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서 국가들의 행운과 행위로 인하여 이 정신들의 유한한 본성에 관한 변증법이 드러난다.’ 이 인용구절들은 법철학(Philosophy of Law)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전 작품인 철학백과(Encyclopaedia)에서, 헤겔의 이론은 현대 이론들을 앞서는데, 예를 들어 프라이어(Freyer)의 이론을 훨씬 더 밀접하게 앞선다: ‘국가의 최종 모습은 단일민족으로서 즉각적인 실제성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단 하나의 개체로서 국가는 다른 같은 개체들에 배타적이다. 그 개체들의 상호관계에서, 자의성(恣意性: waywardness)과 우연이 역할을 한다... 이 독립성으로 인하여.. 개체들 사이의 분쟁이 상호간의 폭력 관계인 전쟁상태로 환원된다... 국가의 전능(全能)이 출현하는 것은 이 전쟁상태이다.. 그리하여 프러시아의 역사가 트라이츠케(Treitschke)는 다음과 같이 헤겔의 말을 복창하여 얼마나 자신이 헤겔의 변증법적 본질주의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따름이다: ‘전쟁은 실제로 필연성일 뿐 아니라 또한 이론적 필연성인 논리학의 긴급사태이다. 국가라는 개념은 전쟁이라는 개념을 함축하는데, 이유인즉 국가의 본질은 힘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주권으로 조직된 국민이다.’

(c) 국가는 법률이다, 사법적 법률일 뿐 아니라 도덕적 법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국가는 어떤 다른 기준에 종속될 수가 없는데, 특히 시민들의 도덕성이라는 기준에 종속될 수 없다. 국가의 역사적 책무는 더 깊다. 국가에 대한 유일한 심판관은 세계역사이다. 국가에 대하여 유일하게 가능한 판단 기준은 국가 행동의 세계사적 성공이다. 그리고 이 성공인 국가의 권력과 확장은 시민들의 사적인 삶에서 모든 다른 고려사항에 우선한다; 옳은 것은 국가의 힘에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론이다; 그것은 현대 전체주의의 이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헤겔의 이론이다; 그것은 플라톤-프러시아적 도덕성이다. 국가는 윤리적 이데아의 실현이다. 국가는 드러나고, 스스로 의식하고, 본질적인 의지로서 윤리적 정신이다라고 헤겔은 이렇게 서술한다. 결과적으로, 국가 위에는 어떤 윤리적 이데아도 있을 수 없다. ‘국가들의 특정 의지들이 동의를 얻을 수 없을 때, 그것들에 대한 분쟁은 전쟁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 어떤 위반이 조약위반으로서, 혹은 존경과 명예의 훼손으로 간주될 것인지는 틀림없이 미확정된 상태로 남는다... 국가는 자신의 무한성과 명예를 자신이 지닌 모습 모두와 동일시 할 것이다.’ 이유인즉 ‘.. 국가 간의 관계는 불규칙적이고, 국가들의 차이점을 조정할 재판관이 존재하지 않기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에 대항하여 무엇이.. 옳은지를 결정할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는.. 상호합의를 맺을 수 있지만 국가는, 동시에, 이 합의보다 우월하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합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 ‘국가 간의 조약들은.. 궁극적으로 특정 주권적 의지에 의존하고, 저 이유 때문에, 국가 간의 조약들은 틀림없이 신뢰될 수 없다.’

그리하여 오직 한 가지 종류의 판결만 세계사적 행위들과 사건들에 관하여 내려질 수 있다: 그 행위들과 사건들의 결과인 그것들의 성공. 그리하여 헤겔은 본질적인 운명 절대적인 목표, 혹은 그와 동일한 것 ㅡ 세계역사의 진정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성공하는 것, 다시 말해서 힘을 위한, 세계지배를 위한 다양한 민족정신의 변증법적 투쟁으로부터 최강자로 출현하는 것이 그러므로 유일하고 궁극적인 목표이자 유일한 판단근거이다; 혹은 헤겔이 더 시적(詩的)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이 변증법으로부터 보편적 정신인 무제한인 세계정신이 세계역사의 유한한 민족에게 자체의 판결을 선언하면서 떠오른다 ㅡ 그리고 자체의 판결은 최고이다; 이유인즉 세계역사는 세계의 법정이기 때문이다.

프라이어(Freyer)는 매우 유사한 생각을 가졌지만, 그 생각을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 ‘남자답고 대담한 기풍이 역사에서 우세하다. 통제력을 가진 사람이 전리품을 얻는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끝장나는데 이유인즉.. 표적 적중을 원하는 사람은 쏘는 방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관념들은, 궁극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말의 반복일 뿐이다: ‘전쟁은.. 어떤 사람은 신으로 다른 사람은 단지 사람으로 증명하여 후자는 노예로 전자는 주인으로 바꾸어놓는다... 전쟁은 정의롭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공격을 받는 전쟁과 우리가 이웃을 공격하는 전쟁 사이에 도덕적 차이점이 있을 수 없다; 유일하게 가능한 차이점은 성공이다. 주인 인종과 주인 도덕성에 관한 예언자이자 노예제도: 그 생물학적 근거와 도덕적 정당화(Slavery: Its Biological Foundation and Moral Justification) (1923)의 저자인 F. 하이저(Haiser)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면, 침략자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경우에 왜 우리 자신이 침략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러나 심지어 이 교설도 (그 선구자는 클라우제비츠[Clausewitz]의 공격은 항상 가장 효과적인 방어다라는 유명한 교설이다) 헤겔적이다; 이유인즉 헤겔이, 전쟁을 유발하는 위반사항에 관하여 말할 때, ‘정복전쟁으로 바뀌는 방어전쟁을 위한 필요성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그는 또한 강력한 개성을 지닌 국가는, 자신이 완곡어법으로 강렬한 활동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된 시기와 장소를 발견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짜증나게 하는 경향이 더 있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나 민족에 관련된 문제에서 역사적 성공을 유일한 심판관으로 설정함과 동시에, 그리고 공격과 방어 사이의 도덕적 구분 같은 것을 부수려는 시도와 동시에, 양심의 도덕성에 반대하여 주장하는 일이 필요하게 된다. 헤겔은 자신이 거짓 도덕성에 반대하여 진정한 도덕성 혹은 더 정확하게 사회적 미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설정함에 의하여 이 일을 수행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가 단지 형식적 정직으로 또한 기술하는 거짓 도덕성이 개인적 양심의 도덕성인 반면, 진정한 도덕성은 역사주의가 조금 섞인 플라톤식 전체주의 도덕성이다. ‘우리는 거짓 도덕성에 반하여 도덕성의 진정한 원칙을, 즉 더 정확하게 사회적 미덕의 원칙을 공정하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유인즉 세계역사는, 특성상 개인적인 도덕성의 ㅡ 개인의 양심, 개인의 특정 의지와 행동양식 ㅡ 기반보다 더 높은 기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정신의 절대적 목표가 요구하고 성취하는 것인 섭리가 행하는 것은 선악의 동기가 귀속되는 것을.. 초월한다... 결과적으로 고대의 권리와 질서를 확고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살아있는 정신과 신()에 의하여 버림받은 형식적인 정직일 뿐이다라고 헤겔은 서술한다. (다시 말해서, 예를 들어 신약성경을 언급하는 도덕주의자들.) ‘위대한 사람의, 세계 역사적 인물들의 행위는,.. 무관한 도덕적 주장과 충돌하도록 내버려두어져서는 안 된다. 개인적 미덕, 올바름, 겸손, 자비심, 그리고 인내의 장황한 설명(litany)이 그 사람들에게 대항하여 제시되어서는 안 된다. 세계역사는, 원칙적으로, 도덕성이.. 놓여있는 영역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마침내, 양심의 윤리학과 함께 1789년 프랑스혁명의 이념 중 세 번째 이념의 왜곡, 형제애의 왜곡, 혹은 헤겔이 말하는 자비심의 왜곡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 플라톤-헤겔식의 역사주의적 도덕이론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역사학자 E. 마이어(Meyer), ‘국가의, 그리고 역사적 책임이라는 더 깊고 진정으로 도덕적인 요인을 무시한 채 시민의 도덕성이라는 기준으로써 위대한 정치적 업적을 판결하는 고착되고 설교하는 평가를 말한다.

그런 견해가 유지되면, 선전주의적인 거짓말과 진실 왜곡에 관한 모든 망설임이 틀림없이 사라지는데, 특히 그 망설임으로 인하여 국가권력이 성공적으로 증대된다면 그렇다. 이 문제에 대한 헤겔의 접근방식은 다소 미묘하다: ‘한 위대한 정신으로 인하여 국민을 속이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지의 문제가 공개적으로 제기되었다. 국민은 자신들의 근본적 기본에 관하여 자신들이 속임을 당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답변이다라고 그는 서술한다. (거장 도덕주의자인 F. 하이저[Haiser]는 말한다: ‘인종적 영혼이 명령하는 곳에는 오류가 불가능하다.’) 헤겔은 계속해서 말한다, ‘그러나 국민은, 이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 방식에 관하여, 스스로를 속인다... 여론은 그러므로 경멸을 받을 만큼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리하여 여론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위대한 것을 이룩하는 첫 번째 조건이다... 그리고 위대한 업적은 확실히 결과적으로 여론에 의하여 인정받고 승인된다..’ 요컨대 중요시되는 것은 항상 성공이다. 거짓말이 성공했다면 국민은 자신들의 근본적 기본에 관하여 기만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d) 국가가, 특히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도덕성으로부터 면제된다는 것을 ㅡ 국가는 초()도덕적이다 ㅡ 우리는 알았다. 그러므로 전쟁이란 도덕적 악이 아니고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라는 것을 들으리라고 우리는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이론은 이 기대를 무시한다; 헤겔의 이론은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암시한다. ‘전쟁에는 윤리적 요소가 있다는 글을 우리는 읽는다. ‘재산이나 생명과 같이 유한한 것은 우연적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 필요성은 먼저 자연의 힘이라는 형태 하에서 나타나는데 이유인즉 유한한 만물은 죽어서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리적 질서로, 국가 안에서,.. 이 필요성은 자유의 작품인 윤리적 법률로 고양된다... 전쟁은.. 이제 권리..의 한 요소가 된다... 전쟁에는 전쟁에 의하여 민족의 윤리적 건강이 보존되고 민족의 유한한 목표가 뿌리 뽑힌다는 깊은 의미가 있다... 전쟁으로 인하여 영원한 평화가 가져올 부패로부터 국민이 보호된다. 성공적인 전쟁으로 인하여 내부의 불안이 어떻게 방지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단계들이 역사에 의하여 밝혀진다... 이 민족들은, 내부갈등으로 찢어졌는데, 외국 전쟁의 결과로 국내에서 평화를 얻는다.’ 이 구절은, 법철학(Philosophy of Law)에서 가져왔는데, ‘번영의 위험에 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가르침의 영향을 드러낸다; 동시에, 이 구절은 도덕을 건강과, 윤리를 정치적 위생학과 혹은 권리를 힘과 동일시하는 훌륭한 사례이다; 이제 밝혀지는 바와 같이, 헤겔의 역사철학(Philosophy of History)에서 인용된 다음 구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로 인하여 미덕과 활기가 직접적으로 동일시된다. (이 구절은 이미 인용한 구절 뒤에 즉각 이어져서 민족주의를 사람이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한 방법으로 다루고, 그리하여 심지어 전쟁도 저 고귀한 목적을 위한 합당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사악하고 늙은 부자 국가들에 대한 젊고 가난한 국가들의 침략은 도덕적이라는 현대적 이론이 분명하게 함축된다. 민족은 민족의 웅대한 목적을 실현하는 데 몰두하는 동안 도덕적이고 올바르며 활기차다... 그러나 이것이 달성되면, 국민정신에 의하여 드러난 활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민족은 전쟁과 평화에서 아직도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지만.. 살아있는 본질적 영혼 자체는 자체의 활동을 중지했다고 언급될 것이다... 민족은 성년에서 노년기로 옮겨갈 때의 개인과 동일한 종류의 삶을 영위한다... 이 단순한 관습적 삶(시계는 태엽이 감기고 스스로 간다) 자연사를 불러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사에 의하여 개인들이 사멸하고, 그리하여 민족들이 사멸한다... 민족은 본질적으로 자연사를 했을 때 격렬한 죽음을 죽을 수 있을 따름이다라고 헤겔은 서술한다. (마지막 언급들은 쇠망 전통에 속한다.)

전쟁에 관한 헤겔의 관념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그는 심지어 기계화의 도덕적 결과들을 시각화한다; 혹은 더 정확하게, 그는 기계적인 전쟁에서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의 윤리적 정신의 결과를 본다: ‘여러 종류의 용감성이 있다. 동물이나 강도의 용기, 명예심으로부터 나오는 용기, 기사도적 용맹 등은 용기의 진정한 형태가 아직 아니다. 문명국가에서는 진정한 용기의 본질이란 통째로 국가에 봉사하는 데 헌신하여 개인이란 다수 중에서 한 명으로만 여겨지도록 하는 각오이다.’ (국민 개병제에 대한 언급) ‘개인적 용기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면모는 보편적인 것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데 놓여있다. 이 고등 형태로 인하여.. 용기는 더 기계적으로 보인다... 적대감은 분리된 개별인간에게로 아니라 적대적인 전체에게로 향한다’ (여기서 우리는 총력전[total war] 원칙을 예상하게 된다); ‘.. 개인적인 용기는 비개인적으로 보인다. 이 원칙으로 인하여 대포가 발명되었다; 그것은 우연한 발명이 아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헤겔은 화약의 발명에 대하여 말한다: ‘인류에게는 화약이 필요해서 화약은 즉시 출현했다.’ (섭리는 얼마나 친절한가!)

그러므로 칸트가 주장하는 자유인의 공동체라는 이상에 반대하여 1911년 철학자 E. 카우프만(Kaufmann)이 주장을 펼 때 순전히 헤겔주의였다: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승리하는 전쟁이 사회적 이상이다.. 국가가 자신의 진정한 특징을 발휘하는 것은 전쟁에서이다; 혹은 유명한 군사과학자E. 반스(Banse)1933년 이렇게 서술했을 때도 헤겔주의였다: ‘전쟁은 한 세대의 모든 정신적 에너지를.. 최고도로 강화한 것을 의미한다.. 전쟁은 국민 정신력의 최대 노력을 의미한다.. 정신과 행동이 함께 연결된. 정말로, 전쟁으로 인하여 인간의 영혼이 최고도에서 출현할 근거가 제공된다... 인종의 .. 의지가 전쟁에서와 같이 그렇게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루덴도르프(Ludendorff) 장군은 1935년 말을 이어간다: ‘이른바 평화시에, 정치란.. 총력전에 대비하는 한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유명한 본질주의 철학자 막스 쉘러(Max Scheler)1915년에 말한 관념을 더 정확하게 공식화할 따름이다: ‘전쟁은 가장 실제적으로 성장하고 발흥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전쟁은 정치를 의미한다.’ 동일한 헤겔의 교설이 프라이어(Freyer)에 의하여 1935년 다시 공식화된다: ‘국가는, 존재하는 첫 순간부터, 전쟁 분야에 자리를 잡는다... 전쟁은 국가행위의 가장 완벽한 형태일 뿐 아니라 국가가 둘러싸여있는 바로 그 요소이다; 지연되고, 중단되고, 위장되고, 회피된 전쟁도 물론 이 용어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대담한 결론은 F. 렌츠(Lenz)에 의하여 도출되는데, 그는 자신의 저서 가치원리로서의 인종(The Race as the Principle of Value)에서 잠정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인류가 도덕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결국 잘못된 편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물론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함에 의하여 이 터무니없는 제안을 즉시 취소한다: ‘우리는 물론 인류가 전쟁을 저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인류를 저주하는 것은 전쟁이다.’ 이 관념은 E. (Jung)의 역사주의와 결합되어 있는데, 그는 이렇게 언급한다: ‘인도주의 즉, 인류애에 대한 관념으로 인하여.. 역사가 규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틀림없이 원래 반()-인도주의적 주장을 내놓은 사람은 쇼펜하우어에 의하여 허풍선이로 지칭된 피히테로 헤겔의 선배였다. ‘인류애(humanity)’라는 단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피히테는 이렇게 서술했다: ‘만약 독일인에게 라틴어인 인간다음(humaneness)이라는 말 대신에 그 합당한 번역인 남자다움(manhood)을 제시했다면, 독일인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것보다 대신 야수라는 것이다!” 이것은 독일인이 말했을 터인 방식인데, 로마인들에게는 불가능했을 터인 방식이다. 이유인즉 독일어로, ‘남자다움은 단지 현상적 개념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단어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초현상적 개념이 되었던 것처럼 초현상적 개념이 되지 못했다. 이 이국적인 로마의 상징(, ‘인간다움이라는 단어) ‘교활하게 독일인들의 언어로 밀수입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하여 독일인들의 윤리적 기준을 분명히 타락시킬 것이다..’ 피히테의 교설은 슈펭글러(Spengler)에 의하여 반복되는데 그는 이렇게 서술했다: ‘남자다움은 동물학적 표현이거나 공허한 단어이다’; 그리고 로젠버그(Rosenberg)에 의해서도 반복되는데 그는, ‘사람의 내부 생활은 이국적 동기가 그의 생각에 각인될 때.. 타락하게 된다: 구원, 인도주의, 그리고 인류애라는 문화라고 서술한다.

콜나이(Kolnai), 그가 내놓은 많은 자료가 없었더라면 내가 얻을 수 없었던 그의 저서에 나는 크게 빚을 지고 있는데, 매우 두드러지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정부와 사회조직의 합리적이고 개화된 방식을 지지하는데.. 전쟁은 본질적으로 악이라는 데 동의한다...’ 우리들 대부분의 의견에서 (평화주의자들을 제외하고), 특정 상황에서, 전쟁은 필요악이 될 것이라고 부언하면서 그는 계속 말한다: ‘비록 영속적이거나 잦은 전쟁에 관한 열망을 의미할 필요는 없을지라도 민족주의적 견해는 다르다. 민족주의적 견해는, 특별한 축제라는 드문 때를 위하여 아주 잘 보관된 매우 독한 포도주처럼, 위험한 선(good)일지라도 전쟁 속에서 악보다는 선을 본다.’ 전쟁은 흔하고 풍부한 악이 아니라 드물지만 귀중한 선이다; ㅡ 이로 인하여 헤겔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요약된다.

헤겔의 공로 중 하나는 운명에 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관념을 복원한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 혹은 민족적 본질을 표현하는, 운명에 관한 이 훌륭한 그리스의 관념은, 자연에 관해서든 혹은 도덕에 관해서든 보편적 법칙에 관한 유명론적(唯名論的) 유대인의 관념과 반대라고 그는 주장했다. 운명에 관한 본질주의적 교설은 (앞 장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민족의 본질은 단지 그 민족의 역사에서 드러날 수 있다는 견해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그 교설은 비활동을 고취한다는 의미에서 운명론적은 아니다; ‘운명(destiny)’미리 정해진 운명(predestination)’과 동일시될 수 없다. 그 반대가 사실이다. 자신, 자신의 실재적 본질, 자신의 가장 깊은 영혼,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소재는 (이성보다는 의지와 열정) 사람의 운명 형성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헤겔이 이 이론을 확대한 이래, 운명에 관한 관념은 총애받는 강박관념이 되었는데, 말하자면, 자유에 대항하는 반란의 강박관념이 되었다. 콜나이(Kolnai)는 인종주의와 (사람을 자신의 인종의 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은 운명이다) 자유에 대한 적대감 사이의 연관성을 올바르게 강조한다: ‘인종 원칙에는, 인간 자유의 완전부정과 평등권의 부인 및 인류가 직면한 도전을, 구현하고 표현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콜나이는 말한다. 그리고 인종주의에는 운명에 의하여 자유, 통제와 논증을 초월하는 강제적인 피의 충동에 의하여 개인적인 인식을 반대하는경향이 있다고 그는 올바르게 주장한다. 심지어 이 경향은, 통상적으로 다소 모호한 방식일지라도, 헤겔에 의하여 표현된다: ‘소위 원칙, 목적, 운명, 혹은 정신의 본성이나 관념이라는 것은 숨겨져서 미개발된 본질인데, 그와 같은 것은 ㅡ 본질적으로 아무리 진실할지라도 ㅡ 완전히 실재적은 아니다... 그것들에게.. 실재를 부여하는.. 동력은 인간의 욕구, 본능, 경향 그리고 열정이다라고 헤겔은 서술한다. 전인교육(全人敎育)의 현대 철학자인 E. 크리크(Krieck)는 운명주의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개인이 지닌 모든 힙리적인 의지와 활동은 자신의 일상생활에 한정된다; 이 범위를 벗어나서 그가 운명의 우월한 능력에 의하여 잡히는 한, 더 높은 운명과 업적을 성취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가 다음과 같이 이어 말할 때 마치 개인적인 경험처럼 들린다: ‘사람은 자신의 합리적인 기획을 통하여 창조적이고 유관한 사람으로 만들어질 것이 아니고, 그의 위와 아래서 작동하는, 자신의 자아에서 시작하지 않지만 자신의 자아를 통과하여 길을 휩쓸고 움직여 가는 힘을 통해서만 그런 사람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동일한 철학자가 ‘“객관적인, “자유로운과학의 시대뿐 아니라 순수이성의 시대 또한 끝났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가장 친숙한 개인적 경험의 부당한 일반화이다.)

운명에 관한 관념과 함께, 그 짝인 명성에 관한 관념이 또한 헤겔에 의하여 부활된다: ‘개인들은.. 도구들이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얻는 것은.. (그들과 독립적으로 준비되고 약속된) 실체적 사업에서 그들이 얻는 개인적 몫을 통하여.. 명성인데, 명성은 그들의 보상이다.’ 그리고 새로이 이교화된 기독교 포교자인 슈타펠(Stapel)은 즉각 되뇐다: ‘모든 위대한 행위는 명성이나 명예를 위하여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 기독교도덕주의자는 헤겔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형이상학적 명예는 하나의 진정한 도덕성이다라고 그는 가르치며 따라서 이 하나의 진정한 도덕성의 지상명령(Categorical Imperative: 至上命令)은 이렇게 서술된다: ‘명예를 의미하는 것과 같은 그런 행위를 실천하라!’

(e) 그러나 모든 사람이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명예라는 신앙은 반()-평등주의를 의미한다 ㅡ 그것은 위대한 사람에 대한 신앙을 의미한다. 현대 인종주의에는 따라서 영혼들 사이에 평등도 없고 사람들 사이에 평등도 없다 (로젠버그[Rogenberg]). 그리하여 자유에 대항하는 지속적인 반란의 무기고에서, 혹은 헤겔이 지칭하는 바와 같이, 세계사적 개성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지도자 원칙을 채택하는 데 장애물이 없다. 이 관념은 헤겔이 가장 선호하는 주제의 하나이다. ‘국민을 속이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지라는 불경스러운 문제를 토론하면서 (위를 참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론에서는 모든 것이 거짓이고 진실이기도 하지만 여론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위대한 사람이 할 일이다. 자기 시대의 위대한 사람은 그 시대의 의지를 표현하는 사람이다; 자기 시대에게 그 시대가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사람; 그리고 그 시대의 의지를 실천하는 사람. 그는 자기 시대의 내부 정신과 본질에 따라서 행동하여 그 정신과 본질을 실현한다. 그리고 여론이 여기저기서 드러날 때 여론을 무시하는 방법,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위대한 것을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선전담당자로서의 지도자에 ㅡ 위대한 독재자 ㅡ 대한 이 탁월한 묘사는 위대한 사람의 위대함에 대한 정교한 신화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 신화의 본질은 그가 역사에서 정신의 최상 도구라는 것이다.역사적 인간 ㅡ 세계사적 개인들에 대한 이 토론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사고하는 사람들로, 시대의 욕구에 ㅡ 발전을 위하여 완숙된 것에 ㅡ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계사적 인물들은 ㅡ 시대의 영웅들 ㅡ 그러므로 그 시대에 대하여 분명한 시각을 지녔던 사람들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그들의 행위, 그들의 말은 저 시대에서 최고이다... 사건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들은 그들이었다; 그들로부터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정책을 배우고 승인하거나 적어도 묵인한다. 이유인즉 역사에서 이 신선한 조치를 취한 정신은 모든 개인들의 가장 깊은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을 일깨운 무의식 상태에서... 그들의 동료는, 그러므로, 저 영혼-지도자를 추종하는데, 이유인즉 그 동료들이 그렇게 구현된 그들 내부 영혼의 억제될 수 없는 힘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커다란 이해력과 지혜를 지닌 사람일뿐 아니라 위대한 열정을 지닌 ㅡ 물론 무엇보다도 정치적 열정과 야망을 지닌 ㅡ사람이기도 하다. 그 사람은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서 열정을 일깨울 수 있다.위대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을 만족시키는 목적을 구성했다... 그들은 위대한 것에 의지했고 성취했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이다... 세상의 어떤 위대한 것도 열정 없이 이룩되지 않았다... 이것은 이성의 교활함이라고 지칭될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 열정을 작동시킨다는 것... 열정이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아주 적합한 말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여기서, 의지와 인격의 전체 에너지가 사적인 이해관계에 바쳐진다는 조건과 함께, 사적인 이해관계로부터 야기되는 것으로서의 인간행동만을 의미한다 ㅡ 특히, 또는 여러분이 원한다면 스스로-추구하는 의도... 열정, 사적인 목표, 그리고 이기적인 욕망의 충족은.. 행동의 매우 효과적인 근원이다. 그것들의 힘은, 정의와 도덕성이 그것들에게 부과할 제한을 하나도 그것들이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그리고 이 자연스런 충동은, 질서와 자기-억제라는 법률과 도덕성의 경향을 띤 인위적이고 피곤한 원리보다 동료들에게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루소(Rousseau)에서 시작하여 계속, 낭만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이란 주로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인도주의자들이 목표로서 합리성에 매달린 반면, 이성에 대항하는 반란은 자체의 정치적 목표를 위하여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한 이 심리학적 통찰을 이용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파시스트의 호소는 우리들이 지닌 열정에 대한, 우리가 지닌 집단주의적인 신비한 욕구에 대한, ‘미지의 인간에 대한 것이다. 방금 인용된 헤겔의 말을 채택하면, 이 호소는 이성에 대항하는 반란의 교활함으로 지칭될 것이다. 그러나 이 교활함의 정점은, 헤겔의 이 대담한 변증법적 왜곡에서 헤겔에 의하여 도달되었다. 합리주의에 입에 발린 말을 하면서, 자신의 전후 어떤 사람보다도 이성에 관하여 더 시끄럽게 말하면서, 그는 비합리주의로 끝난다; 열정뿐 아니라 잔인한 힘을 신격화함으로 끝난다: ‘이 도덕적 전체가’ (다시 말해서 국가) ‘존재해야 하는 것은 이성의 절대적인 이익이다; 그리고 이곳에 국가의 설립자들인 영웅들의 정당성과 장점이 놓여있다 ㅡ 그들이 아무리 잔인했을지라도... 그런 사람들은 다른 위대하고 심지어 성스러운 이해관계를 무심하게 다룰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강력한 형태는 많은 죄 없는 꽃을 짓밟아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진로에 놓여있는 물체를 산산조각 내어야 한다고 헤겔은 서술한다.

(f) 합리적 동물이라기보다는 영웅적인 동물로서의 존재인 인간의 구상은 이성에 대항하는 반란에 의하여 창안되지 않았다; 그 구상은 전형적인 종족주의적 이상이다. 우리는 영웅적 인간에 관한 이 이상과 영웅적 행동에 대한 더 합리적인 존경을 구분해야 한다. 영웅적 행동은 지금도 그렇고 항상 찬양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내는 찬양은, 영웅이 헌신하는 대의명분을 우리가 평가하는 데 크게 주로 의존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폭력 행위 속의 영웅적 요소는, 평가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스콧 탐험대장(Captain Scott)과 그의 동료들을 찬양해야 하고, 가능하면 훨씬 더, X선이나 황열병을 연구한 영웅들을 찬양해야 한다; 그리고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물론.

영웅적인 인간에 대한 종족적 이상은, 특히 그 파시스트적 형태로, 다른 견해에 근거한다. 그 이상은 우리들 대부분에게 영웅적 행동을 찬양 가능하도록 만드는 저 일들을 ㅡ 문명을 증진시키는 것과 같은 그런 일들 ㅡ 직접적으로 공격한다. 이유인즉 그 이상이 시민 생활 자체의 관념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시민 생활은 그 생활이 간직하고 있는 안전관념 때문에 얄팍하고 물질주의적이라고 비난을 받는다. 위험하게 살아라!가 영웅적 이상의 명령이다; 이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당신이 떠맡는 대의명분이란 부차적으로 중요하다; 혹은 W. 베스트(Best)가 말하는 바와 같이: ‘훌륭한 투쟁과 같은 것은, “훌륭한 대의명분이 아니고.. 국면을 결정짓는 것이다... 어떤 목적을 위하여가 아니고 어떻게 우리가 싸우는가가 중요하다.’ 이 주장이 헤겔의 관념들을 상술한 것임을 우리는 다시 발견한다: ‘평화 시에, 시민의 생활은 더 확대된다, 모든 분야는 보호되고.. 마침내 모든 사람이 정체된다... 강단으로부터 세속적인 것의 위험과 허영 및 불안정에 관하여 많은 것이 설교되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은 적어도 자신의 재산에 성공적으로 매달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재산과 생명을.. 우연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불안이 번뜩이는 칼을 찬 경기병의 모습으로 마침내 와서 자체의 충실한 활동을 보이도록 하라!’고 헤겔은 서술한다. 또 다른 곳에서, 헤겔은 자신이 단지 관습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음울한 그림을 그린다; 그는 그 삶에 의하여 문명화된 공동체의 평범한 삶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듯이 보인다: ‘관습이란 반대가 없는 행위인데.. 그 속에서 충만이나 열정은 불가능하다 ㅡ 자체를 열정적으로 자체의 목표에 던지기를 중단한 외적이고 감각적인’ (다시 말해서 우리 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물질주의적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것) ‘존재.., 지성이나 생기가 없는 존재.’ 헤겔은, 항상 자신이 주장하는 역사주의에 충실한데, 자신의 반()-공리주의적 자세를 (‘번영의 위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리주의적 비평과 구별하여) 자신의 역사 해석에 근거시킨다: ‘세계역사는 행복의 극장이 아니다. 행복의 기간은 그 역사에서 공란인데, 이유인즉 그것들이 조화(harmony)의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유주의, 자유와 이성은 통상적으로 헤겔의 공격 목표들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투쟁을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쇠사슬을 원한다!는 신경질적인 구호가 헤겔 철학의 구조물을 통하여, 닫힌 사회와 자유에 대항하는 반란의 이 본거지를 통하여 메아리친다.

합리적인 것이 실재적이라는 자신의 이론에 근거한 헤겔의, 말하자면, 공식적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현대 인종적 철학자들 중에서 더 지성적인 철학자에게 그렇게 특징적인 비관론을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아마도 이전 철학자들에게 (라가르드[Lagarde], 트라이츠케[Treitschke], 모엘러 반 덴 브루크[Moeller van den Bruck]처럼) 특징적이라기보다는 유명한 역사주의자인 슈펭글러(Spengler)의 후배들에게 특징적인 비관론. 슈펭글러의 생물학적 전체론, 직관적 이해력, 집단정신과 시대정신도, 심지어 그의 낭만주의도 이 점쟁이가 매우 비관적인 관점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을 도와주지 못한다. 미래를 예견하고 미래의 도래에 매개체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남겨진 음울한행동주의에는 철저한 절망의 요소가 명백하다. 사건들에 대한 이 음울한 관점이 기독교파벌뿐 아니라 인종주의자들인 무신론자파벌 모두에 의하여 동등하게 공유되는 것을 관찰하면 흥미롭다.

슈타펠(Stapel)은 전자에 속하는데 (예를 들어 고가르텐[Gogarten] 같은 다른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서술한다: ‘사람은 자신의 총체성에서 원죄의 지배를 받는다.. 기독교도는 자신이 죄를 벗어나서 산다는 것이 엄격하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는 도덕적으로 세밀하게 따지는 편협함을 피한다... 윤리화된 기독교는 철저히 반()-기독교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멸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세상은 파멸될 운명이다. 그러므로 운명에 따라서 이 세상이 파멸되기를! 자신이 세상을 낫게 말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고등도덕성을 창조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항하여 웃기는 쓸데없는 반란을 시작하고 있다... 하느님의 희망은 축복 받은 자들이 지닌 행복의 기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희망은 복종과 전우애를 의미한다.’ (종족으로의 복귀.) ‘만약 하느님이 자신이 창조한 사람에게 지옥에 가라고 명령한다면, 하느님에게 맹세한 추종자는.. 따라서 지옥으로 갈 것이다.. 만약 하느님이 그 추종자에게 영원한 고통을 배당한다면 이 고통도 역시 인내되어야 한다... 신앙은 승리에 대한 또 다른 말일뿐이다. 주님이 요구하는 것은 승리이다..’

매우 유산한 정신이 동시대 독일의 주도적 철학자 두 명인 실존주의 철학자하이데거(Heidegger)와 야스퍼스(Jaspers)의 저술에 살아있는데 그 두 사람은 원래 본질주의 철학자 후설(Husserl)과 쉘러(Scheler)의 추종자들이었다. 하이데거는 헤겔의 ()의 철학(Philosophy of Nothingness)을 부활시킴에 의하여 명성을 얻었다: 헤겔은 순수한 존재순수한 무()’는 동일하다는 이론을 세웠다’; 헤겔은 만약 당신이 순수한 존재의 관념을 생각해내려면, 그 존재로부터 모든 특정 대상에 대한 결정을 추상해야 하므로 헤겔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ㅡ ()가 남는다고 말했다. (이 헤라클레이토스식 방식은, 순수한 부()와 순수한 가난의 동일시와 순수한 주인상태와 순수한 노예상태의 동일시 및 순수한 아리안 주의와 순수한 유대주의의 동일시와 같은 모든 종류의 아름다운 동일시를 증명하는 데 아마도 사용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헤겔의 무() 이론을 실용적인 삶의 철학, 실존의 철학에 교묘하게 적용한다. 삶 즉, 실존은 무()를 이해함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자신의 저서 형이상학은 무엇인가?(What is Metaphysics?)에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탐구는 존재하는 것이나 아니면 무()에 대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존재하는 것만에 대해서, 그리고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는 ()에 대해서.’ ()에 대한 탐구는 (‘어디에서 우리는 무[]를 찾을 수 있는가? 어디에서 우리가 무[]를 발견할 수 있는가?’) ‘우리는 무()를 안다는 사실에 의하여 가능해진다; 우리는 공포를 통하여 무()를 안다: ‘공포는 무()를 드러낸다.’

공포; ()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고뇌; 이것들이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실존철학의 기본적 범주이다; 그 진짜 의미가 죽음을 향하여, 존재 속으로 억눌려버린삶의 철학. 인간의 실존은 강철의 폭풍우로서 해석될 수 있다; 한 인간의 확고한 실존완전한 자의식과 고뇌 속에서.. 열정적으로 자유롭게 죽을 수 있는 자아가 될수 있다. 그러나 이 음울한 고백에 위로되는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독자들은 하이데거의 죽으려는 열정에 의하여 완전히 압도당할 필요가 없다. 이유인즉 권력에 대한 의지와 살려는 의지가 그의 스승 헤겔과 비교하여 하이데거에게서 결코 덜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1933년 이렇게 서술한다, ‘본질에 대한 독일 대학의 의지는 과학에 대한 의지이다; 그것은 자신의 국가 안에서 자신을 경험하는 민족으로서 독일민족의 역사적-정신적 사명에 대한 의지이다. 과학과 독일의 운명은 힘을 얻어야 하는데, 특히 본질적인 의지에서이다.’ 이 구절은, 독창성이나 명료성의 기념비는 아닐지라도, 틀림없이 자신의 스승들에 대한 충성심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의 심오함을 신뢰하는 저 하이데거 찬양자들은 쇼펜하우어의 말이 아마도 상기될 것이다: ‘진리가 단지 부산물로서, 또한 밝혀질 것이라고 누가 실제로 믿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인용된 하이데거의 마지막 말을 고찰하면, 하이데거 찬양자들은 부정직한 수호자에게 주는 쇼펜하우어의 충고가 독일 안팎에서 많은 교육자들에 의하여 장래가 유망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성공적으로 실천되지 않았든 지를 자문해야 한다. 나는 다음 구절을 염두에 두고 있다: ‘젊은이의 재기를 둔화시켜 그의 두뇌가 어떤 종류의 사고도 불가능하도록 만들려고 당신이 의도한다면, 헤겔을 그에게 주면서 읽으라고 것보다 더 잘하는 일은 없다. 이유인즉 단어들을 서로 없애고 부정하는 이 괴물스러운 단어들의 축적으로 인하여, 그 단어들과 관련된 무엇이든지 생각하려는 헛된 시도로써 생각이 스스로 괴롭게 되어, 마침내 생각은 완전히 탈진하여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고능력이 완전히 파괴되어 마침내 젊은이는 무의미하고 공허한 장광설을 실재적인 사상으로 오해할 것이다. 자기의 술책과 비교하여 피수호자가 혹시 너무 영리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수호자는, 천진스럽게 헤겔을 읽을 것을 제안함에 의하여 이 두려움이라는 불행을 아마도 막을 것이다.’

야스퍼스(Jaspers)는 심지어 헤겔보다, 가능하면 더 솔직하게, 자신의 허무주의적 경향을 선언한다. 당신이 무(), 즉 멸절(滅絶)에 직면할 때만 당신은 실존을 경험하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야스퍼스는 가르친다. 본질적 의미로 살기 위하여, 사람은 위기 속에서 살아야 한다. 삶을 맛보기 위해서 사람은 위험을 무릅쓸 뿐 아니라, 패배도 해야한다! ㅡ 야스퍼스는 변화와 운명에 대한 역사주의적 관념을 가장 음울한 극단까지 무모하게 가져간다. 만물은 틀림없이 사멸한다; 만물은 실패로 끝난다: 이런 방식으로 발전에 관한 역사주의적 법칙이, 그가 지녔던 환멸된 지성까지, 드러난다. 그러나 파멸을 직시하라 ㅡ 그러면 여러분은 당신 삶의 전율을 얻을 것이다! ‘제한적 상황에서만, 존재와 무() 사이의 가장자리에서만, 우리는 실제로 살아간다. 삶의 환희는 항상 삶의 이해 가능성의 끝과 일치한다, 특히 신체의 극단적 상황과 일치하며 무엇보다도 신체적 위험과 일치한다. 당신은 실패를 맛보지 않고는 삶을 맛볼 수 없다. 파멸하는 당신 자신을 즐겨라!

이것은 도박꾼의 철학이자 폭력배의 철학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충동과 공포의, 의기양양하거나 아니면 사냥당한 금수(콜나이[Kolnai]) 이 악마적 종교’, 단어의 가장 완벽한 의미에서 이 절대적인 허무주의는 대중적인 신조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성과, 그리고 그 이성과 함께 자신들의 인간성을 포기한 내밀한 지식인 무리들의 특징적인 고백이다.

또 다른 독일, 자신의 두뇌가 고등교육이라는 파멸적 체계에 의하여 독살되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독일이 있다. 그러나 이 다른독일은 틀림없이 독일이 가졌던 사상가들의 독일이 아니었다. 독일에는 몇 명의 다른사상가들이 (그들 중 최고는 칸트)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방금 끝난 조사는 고무적이지 않고, 나는 콜나이의 비평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아마도 독일문화에 대한 우리들의 절망을, 결국 프러시아 사상가들의 독일 외에도 프러시아 장군들로 구성된 또 다른 독일이 있다는 고찰로써 위로한다는 것은 역설이.. 아니다.’

 

VI

나는 헤겔의 역사주의가 현대 전체주의 철학과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이 일치는 충분히 분명하게 이해된 적이 없다. 헤겔의 역사주의는 여러 무리의 지식인들, 심지어 솔직한 ()-파시스트주의자들좌파들의 언어가 되었다. 헤겔의 역사주의는 그 사람들의 지적 분위기의 그렇게 많은 부분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호흡하는 공기보다 더 감지될 수도 없고 그 역사주의의 가공할 거짓말은 더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인종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헤겔에게 진 빚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다. 한 가지 사례는 H. O. 지글러(Ziegler)인데, 그는 자신의 연구서인 근대민족(The Modern Nation)에서 개성으로서 이해되는 집단정신이라는 헤겔의 (그리고 A. 무엘러[Mueller]) 관념 도입을 민족에 관한 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옳게 기술한다. 헤겔 철학의 중요성에 관한 이 인식의 또 다른 예화는, 아마도 특히 영국 독자들에게 흥미를 줄 것인데, 영국철학에 관하여 최근의 독일 역사에서 가해진 판단에서 (1935, R. 메츠[Metz]에 의하여) 발견될 수 있다. T. H. 그린(Green)이라는 탁월한 사람이 여기서 비판을 받는데, 물론 그가 헤겔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영국인들의 전형적인 개인주의에 다시 빠진다... 그는 헤겔이 도출한 그런 급진적인 귀결로부터 물러서기때문이다. 홉하우스(Hobhouse), 헤겔 학설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는데,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국가의 전능(全能)에 의하여 위협을 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국가의 전능(全能)에 대항하여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전형적 형태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경멸적으로 기술된다 ㅡ 어떤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으로 아마도 보일 느낌. 보상케(Bosanquet)는 물론 그의 순수한 헤겔 학설 때문에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대부분의 영국 검토자들에 의하여 완전히 진지하게 취급된다는 것이다.

이 얄팍한 헛소리에 (이것을 헤겔도 자신의 철학을 최고의 깊이를 가진 것으로서 기술할 때 정확하게 이해했다) 대항하는 쇼펜하우어의 싸움을 계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동시에 얼마나 시급한지를 내가 밝히고 싶다는 주요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사실을 언급한다. 적어도 새로운 세대는 아마도 우리 문명사에서 가장 큰 지적(知的) 사기극으로부터, 그리고 그 세대의 적들과의 논쟁으로부터 헤방되는 데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아마도 새로운 세대는 쇼펜하우어의 기대에 따라서 살 것인데, 쇼펜하우어는 1840년에 이 거대한 황당함은 후세에게 야유의 무한한 근원을 제공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지금까지 이 위대한 비관론자는 후손에 관하여 망상적인 낙관주의자로 판명되었다.) 헤겔의 광대놀음은 충분히 해독을 끼쳤다. 우리는 그 광대놀이를 중지시켜야 한다. 우리는 말을 해야 한다 ㅡ 불행하게도 성공도 없이, 100년 전에 분명하게 폭로되었던 이 추잡한 것에 손을 대어 우리 자신이 더러워지는 대가를 심지어 치르더라도. 너무 많은 철학자들이 쇼펜하우어가 끊임없이 반복했던 경고를 무시했다; 그 철학자들은 쇼펜하우어의 경고를 자신들이 위험해서 무시했다기보다 (그들은 나쁘게 생활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경고를 무시해서 자신들이 가르치는 사람들과 동시에 인류를 위험에 빠뜨렸다.

100년 전에 헤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던 반()-민족주의자였던 쇼펜하우어에게 내가 마지막 말을 맡긴다면 이 장에 걸맞은 결론으로 나는 본다: 그는, 철학에 관해서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독일 문학에 파멸적인, 혹은 더 엄밀하게 말해서, 혼미하게 만드는, 질병과 같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사람들은 또한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이 영향력과 강력하게 그리고 항상 싸우는 것이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수 있는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이유인즉 만약 우리가 침묵한다면, 누가 말을 할 것인가?이기 때문이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