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열린사회와 그 적들, 2권 11장 헤겔 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뿌리 (번역 수정본)

이윤진이카루스 2022. 7. 21. 17:12

열린사회와 그 적들, 2권 11장 헤겔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뿌리 (번역 수정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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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수정에 대한 역자의 언급

 

 

본 저서는 1971년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 판본을 역자가 2007년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평역 하여 번역했고, 원문에 지적된 바와 같이 원주 없이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서 역자는 원주를 번역하지 않았다. 그러나 202112월 역자는, 칼 포퍼 경의 공저인 자아와 자아의 두뇌(The Self and Its Brain)를 제외하고 모두 번역했기 때문에 역자는 저자의 생각과 언어사용법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어서 다시 번역물을 되돌아보고 미흡하거나 누락 및 오역된 부분을 찾아 수정 및 보충을 하고 평역이 아닌 단순한 번역으로 원주도 번역하고 싶었다.

따라서 역자가 26년에 걸쳐 번역한 칼 포퍼 경의 저서들 모두가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부터 번역 수정 작업을 역자가 수행하지만, 다른 저서들은 수정할 필요를 아직 느끼지 못하는 까닭이 국내 다른 역자들이 번역한 한글 번역본과 대조하면서 역자가 번역했기 때문이다. 본 저서는 1982년 국내에서 이명현 번역, 민음사 출판본이 있지만, 역자 이명현의 역자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Karl Raimund Popper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대본으로 Princeton University Press가 인쇄한 1971년 판을 사용하였음) 2 권의 번역이다.’ 하여 역자가 대본으로 삼은 1971년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 판본과 같다. 그리고 역자는 이명현 번역본의 내용도 참고하여, 본 저서를 번역했고 이명현 번역본과 역자의 번역에 큰 차이점이 발생하는 곳에서는 역자의 역주로 지적하였다.

덧붙여, 역자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번역할 당시 인터넷에서 원서를 구할 수 없어서 역자가 원문을 타이프 하여 첨부하였고, 그 후 역자는 인터넷 올라온 원서를 발견했지만 역자가 대본으로 삼은 1971년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 판본이 아니었다. 따라서 영어에 능통한 독자는 굳이 번역본을 읽을 필요가 없으며 번역본을 읽는 독자는 번역문이 매끄럽지 못할 경우 원문과 대조할 수도 있다.

그리고 번역에서 밑금은 역자가 특히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그은 것이므로 독자의 입장에서는 주목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또한 원서를 번역하여 인터넷상에 발표하는 관계로 원서에 표시된 쪽수는 번역문의 쪽수와 다를 것이다.

 

20226월 서울에서 역자

 

 

 

 

 

 

 

열린사회와 그 적들

(2022년 번역 수정본)

 

R. 포퍼 저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

프린스턴, 뉴저지

목차

 

2: 예언의 밀물

예언 철학의 발흥 ..............................................................................1

11. 헤겔 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뿌리 .....................................1

12. 헤겔과 새로운 종족주의 .....................................................11

 

마르크스의 방법 ............................................................................81

13. 사회학적 결정론 ...............................................................81

14. 사회학의 자율성 ...............................................................89

15. 경제적 역사주의 ..............................................................100

16. 계급 ...............................................................................111

17. 법률제도와 사회체제 .......................................................118

 

마르크스의 예언 .............................................................................135

18. 사회주의의 도래 .................................... .......................135

19. 사회혁명 .......................................................................146

20. 자본주의와 그 운명 ........................................................166

21. 예언에 대한 평가 ............................................................193

 

마르크스의 윤리 ...............................................................................199

22. 역사주의의 도덕론.............................................................199

 

결과 ................................................................................................212

23. 지식사회학 ......................................................................212

24. 예언철학, 그리고 이성에 대한 반역 ....................................224

 

결론 .................................................................................................259

25. 역사에는 의미가 있는가? ...................................................259

 

주석 ................................................................................................281

 

부록 (1961, 1965) ......................................................................369

 

인명색인 ..........................................................................................397

 

주제색인 ...........................................................................................405

 

 

 

 

 

 

 

 

 

 

 

 

 

 

 

 

 

 

 

 

 

 

 

 

 

 

 

 

 

 

 

 

 

 

 

 

 

 

 

교양인들을 그토록 비극적으로 분열시키는 현대 세계의 도덕적 분열은 인문학의 붕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

 

 

 

 

 

 

 

 

 

열린사회와 그 적들

2

예언의 밀물

 

예언 철학의 발흥

 

11: 헤겔 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뿌리

 

우리가 흥미를 갖는 관념들의 역사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역사주의의 관계 역사를 쓰는 과제는 여기서 시도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희망하는 바, 이 관념들의 현대판 배경을 밝혀줄 고작 몇 가지 산재한 비평만 제시하려고 내가 노력한다는 것을 독자들이 기억할 것이다. 그 관념들의 발전에 관한 이야기인 특히 플라톤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이야기는, 저서의 부피를 적당한 규모로 유지하면 도저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진지하게 다루려하지 않겠지만, 그가 해설한 플라톤의 본질주의가 헤겔의 역사주의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역사주의에 영향을 미친 정도만 다루겠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한 스승인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익숙하게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들에만 국한할지라도 첫눈에 우리가 혹시 우려할 만큼 그렇게 심각한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지닌 엄청난 박학다식에도 불구하고, 두드러진 독창적 사고를 지닌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관념 창고에 그가 추가한 것은 주로 경험적 문제들의 체계화와, 경험적 문제들 특히 생물학적 문제들 대한 불타는 관심이었다. 확실히 그는 논리를 창안한 사람이었고, 논리 창안과 다른 업적으로 인하여 자신이 주장하는 (그의 저서 소피스트의 반박[Sophistic Refutations] 말미에서) 것을 우리들이 보내는 뜨거운 감사와 그의 결점들에 대한 우리들의 용서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을 읽는 사람들과 예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결점들이 엄청난 것이다.

 

I

플라톤의 말년 작품 몇 가지에서, 우리는 당시 아테네에서 일어났던 정치적 전개상황의 민주주의 강화의 반향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플라톤도 어떤 형태의 민주주의가 수용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우리는 그가 더 이상 민주주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 징표를 발견한다. 비록 그가 민주주의의 친구는 아닐지라도 그는 민주주의를 불가피한 것으로서 수용하여 적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있다.

타협하려는 경향은, 자신의 선배와 동시대인들을 (그리고 특히 플라톤을) 비난하려는 경향과 기묘하게 혼합되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백과사전적 저술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특징은 플라톤 저술의 동기인 비극적이고도 도발적인 갈등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다. 플라톤이 지녔던 날카로운 통찰력의 섬광 대신,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건전하고 균형 잡힌 판단을 냄으로써 어떤 문제든 해결하려는 후세대의 그토록 많은 범용한 저술가들도 지니고 있던 무미건조한 체계화와 애착을 우리는 발견한다; 이것의 의미는, 정교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요점을 놓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중용론(doctrine of means)’에서 체계화된 이 개탄스러운 경향은, 그가 그렇게 자주 플라톤을 억지로 비판해야 되고 심지어 플라톤을 어리석게 비판하는 근원의 하나이다. 이 역사관련 통찰의 경우에서 (그는 역사가이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력 결여에 대한 사례는, 명백한 민주주의의 강화가 마케도니아 제국의 전제정치에 의하여 대체된 바로 그때 그가 그 강화를 추종했다는 사실이다; 그 역사관련 사건을 그의 주목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부친처럼 필리포스(Philip) 왕에 의하여 아들 알렉산더의 교사로 선발된 마케도니아 궁정의 신하였는데 이들과 이들의 계획을 과소평가 했던 듯하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그들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군주를 의식하지 못하고 군주와 앉아서 식사를 했다고 곰페르츠(Gomperz)는 적절하게 비평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플라톤의 사상에 의하여 완전히 지배당했다. 다소 망설이며 그는 자신의 일반적인 정치적 견해에서뿐 아니라 실제로 모든 곳에서 자신의 기질이 허용하는 대로 자신의 위대한 스승을 밀접하게 추종했다. 그리하여 그는 플라톤이 주장하는 노예제도에 대한 자연주의적 이론을 지지했고 체계화했다: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자유롭고 다른 사람은 노예이다; 그래서 후자(後者)에게는 노예제도가 정당할 뿐 아니라 알맞다... 천성적으로 자기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인 사람은 천성적으로 노예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들을 노예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지 않고 그 용어를 야만인들에게 국한하여 사용한다... 노예에게는 추리능력이 전혀 없다’, 반면 자유 여성은 추리능력을 매우 적게만 지니고 있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아테네인들의 운동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과 비난에서 유래한다. 자유를 위한 투사들에 반대하여 주장을 폄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투사들의 발언 몇 가지를 남겨놓았다.) 몇 가지 사소한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노예제도론을 다소 완화하여 당연히 자신의 스승이 지나치게 엄혹하다고 비난한다. 그는 플라톤을 비판할 기회를 거부할 수도 없었고, 당시 자유주의적 경향과의 타협이 아닐지라도 타협을 위한 기회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예제도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채택한 플라톤의 많은 정치적 이념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아는 한, 특히 그의 최상 국가론은 국가(Republic)법률(Laws)의 이론을 모방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저서로 인하여 플라톤의 저서가 상당히 조명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상 국가는 낭만적인 플라톤의 귀족정치와 건전하고 균형 잡힌봉건제도 및 몇 가지 민주주의적 관념들, 이 세 가지의 타협이다; 그러나 봉건제도가 우세하다. 민주주의자들과 함께, 모든 시민은 정부에 참여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말처럼 그렇게 근본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닌데, 이유인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뿐 아니라 생산계급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은 시민권에서 제외된다고 즉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플라톤과 함께 노동자 계급은 통치를 해서는 안 되며 통치계급은 노동을 해서도 안 되고 돈을 벌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통치계급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토지를 소유하지만 그들 자신이 그 토지를 경작해서는 안 된다. 사냥과 전쟁, 그리고 유사한 취미만 봉건적 통치자들에게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어떤 형태의 돈벌이에 대한, 다시 말해서 모든 직업적 활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두려움은 아마도 플라톤이 가졌던 두려움보다 훨씬 더 심하다. 플라톤은 실용본위적(banausic)’이라는 용어를 민중적이거나 비참하거나 부패한 정신상태를 기술하는 데 사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용어의 폄하성 사용을 확대하여 순수한 취미가 아닌 모든 이해관계를 포함시킨다. 사실상 이 용어를 그가 사용하는 방식은 우리가 직업적(professiona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매우 근사한데 더욱 특히 그 용어가 아마추어 경기에서 자격을 제한하는 의미에서 그렇고 또한 그 용어가 내과의사 같은 전문가에게 적용되는 의미에서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모든 형태의 전문직이 신분제도가 없어짐을 의미한다. 봉건주의의 신사는 기술(art)이든 과학이든... 어떤 직업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또한 몇 가지 인문학, 다시 말해서 신사가 습득할 과목이 있지만 항상 어느 정도까지 만이다. 이유인즉 그가 이 과목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갖게 되면 이 사악한 결과들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전문가처럼 능숙해지고 사회신분을 잃는다. 이것이 아직 구식이 되어버리지 않은 신사의 교육에 관한 이념으로 노예나 농노, 하인이나 전문인들의 교육에 반대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이라는 관념이다. 그가 모든 행동의 제1원칙은 여가(餘暇)’라고 반복해서 주장하는 것은 동일한 사고 선상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유한(有閑) 계급을 찬양하고 존경하는 것은 불안감이라는 기묘한 감정의 표현으로 보인다. 마케도니아 궁정의 내과의사의 아들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특히 전문적으로 혹시 간주될 학자적 이해관계 때문에 사회적 신분을 잃을 가능성에 의하여 고통을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귀족 친구들로부터 그런 비난을 듣는 것을 그가 두려워했다는 것을 믿으려는 유혹을 우리가 받는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학자는 아닐지라도 가장 위대한 학자 중의 한 사람인 전문적인 학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을 알면 정말로 이상하다. 그는 오히려 아마추어와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곰페르츠(Gomperz)는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열등의식에는 아마도, 그 자신의 전문적뿌리와 별도로, 플라톤으로부터의 독립을 증명하고자 하는 자신의 소망과 별도로, 그리고 그가 틀림없이 전문적인 소피스트였다는 사실과 (그는 심지어 논리학을 가르쳤다) 별도로, 여전히 또 다른 근거가 있다. 이유인즉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플라톤 철학은 그 위대한 열망인 권력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그 철학은 단지 가르치는 직업으로서만 계속될 수 있었다. 그리고 봉건 영주를 제외하고 철학을 공부할 돈과 여가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철학이 갈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전통적 신사교육의 첨가물이 되는 것이었다. 보다 겸손한 이 열망을 목적으로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적 사색과 관조가 봉건적 신사의 훌륭한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봉건적 신사를 설득하는 일이 매우 필요함을 발견한다; 이유인즉 사람이 정치적인 음모나 전쟁에 몰두해있지 않다면, 철학적 사색과 관조가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가장 행복하고 고귀하고 세련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표현하는 것처럼 아무도.. 그 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지 않기때문에 사람의 여가를 보내는 최상의 방법이다.

그러한 궁중 신하의 철학은 낙관적이 아니라면 유쾌한 소일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낙관적이 되는 경향을 띨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리고 정말로 그 낙관론에 플라톤 학설을 체계화함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이룩된 한 가지 중요한 조정사항이 놓여있다. 플라톤의 표류감정은 모든 변화는, 적어도 어떤 우주적 기간 속에서 더 악화할 것이 틀림없다는 그의 이론에서 나타났다; 모든 변화는 퇴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변화를 향상으로 인정한다; 그리하여 변화는 진보일 것이다. 모든 발전은 원형인 완벽한 형상이나 이데아로부터 시작하고 그래서 발전하는 것은 그것이 변하고 원형에 대한 그것의 유사성이 감소하는 정도에서 자체의 완벽성을 잃을 것이 틀림없다고 플라톤은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플라톤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스페우시포스(Speusippus)에 의하여 이 이론은 폐기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페우시포스의 주장들이 고등 형태를 향한 일반적인 생물학적 진화를 함축하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다고 비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시대에 많이 토론된 진화론적 생물학 이론을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플라톤의 학설에 부여한 기묘한 낙관적인 왜곡도 역시 생물학적 사색의 결과였다. 그것은 목적인(目的因: final cause)이라는 관념에 근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물의 4 원인 중 하나가 또한 움직임이나 변화의 4 원인 중 하나 목적인으로, 즉 움직임이 지향하는 목적이다. 그것이 목적 즉, 바라는 목표인 한, 목적인 또한 선하다(good). 어떤 (good)은 움직임의 시발점일 뿐 아니라 (플라톤이 가르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정한 바와 같이) 어떤 선은 또한 그 움직임의 끝에 틀림없이 있다고 귀결된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 속에서 시작이 되는 모든 것에게,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존재하게 되는 모든 것에게 중요하다. 발전하는 모든 것의 형상이나 본질은 그것이 지향하여 발전하는 목적, 즉 끝 혹은 최종 상태와 동일하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결국 플라톤 학설을 스페우시포스가 조정한 것과 매우 닮은 것을 우리가 얻게 된다. 형상과 이데아는 여전히 플라톤에게 선(good)으로 여겨지는데, 시작 대신에 끝에 존재한다. 이로 인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관론을 낙관론으로 대체한 것이 특정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다시 말해서 변화의 끝이나 목적을 그 목적인으로서 그가 강조한 것은 그가 지녔던 주로 생물학적 관심의 표현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생물학적 이론에 의하여, 그리고 또한 플라톤이 자신의 정의(正義) 이론을 우주로 확대함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이유인즉 시민들의 다양한 계급 각각이 사회에서 자연적인 위치, 즉 그 계급이 속하고 그 계급이 자연적으로 들어맞는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에 플라톤이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유사한 원칙들을 토대로 물리적 물체와 그들의 다양한 집합이나 종류의 세상을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공기나 불이 상승하는 경향뿐 아니라 돌이나 흙 같은 무거운 물체의 무게와 그 물체들의 하강하는 경향을, 그것들이 자신의 종류가 깃든 장소를 유지하거나 되찾으려고 애를 쓴다는 전제에 의하여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돌과 흙은 떨어지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돌과 흙이 있는 곳, 그리고 그것들이 속한 곳에서, 자연의 정당한 순서로 존재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공기와 불은 상승하는데 왜냐하면 공기와 불이 (천체) 있는 곳에, 그리고 그것들이 속하는 곳에, 자연의 정당한 순서로 존재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이 운동이론은 동물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매혹했다; 그 이론은 목적인 이론과 쉽게 결합되고, 그 이론으로 인하여 모든 움직임을 자기들의 마구간으로 돌아가기에 열중하는 말의 구보와 비슷한 것으로서 설명하는 것이 허용된다. 그는 그 이론을 자신의 유명한 자연적 위치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만물은 자신의 자연적 위치로부터 격리되면 그 위치로 돌아가려는 자연적 경향을 가진다.

몇 가지 수정사항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본질주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하찮은 차이점만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플라톤과 달리, 자신은 형상이나 이데아를 감지될 수 있는 물체와 별도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차이점이 중요한 한, 이 차이점은 변화 이론에서의 조정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유인즉 플라톤 이론의 요점 하나가, 감지될 수 있는 것들이 형상이나 본질이나 원형으로부터 (혹은 선조들로 부터) 점점 더 멀리 떨어져 움직이기에, 그가 형상이나 본질이나 원형들을 (혹은 선조들) 감지될 수 있는 것들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그것들과 별개로 그가 틀림없이 생각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지될 수 있는 물체들을 그들의 목적인들 즉, 목표들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만들고 이 목적인들 즉, 목표들을 그 물체들의 형상이나 본질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생물학자로서 그는 감지될 수 있는 것들은 내부에, 말하자면, 그들의 최종 상태인 본질의 씨앗을 잠재적으로 지닌다고 전제한다. 이것이 그가 형상이나 본질은 물체 안에 있고,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물체에 앞서거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모든 움직임이나 변화는 사물의 본질에 내재하는 잠재성 몇 가지가 실현되는 것을 (혹은 실제화 되는 것’) 의미한다. 예를 들어, 목재 조각이 물 위에 뜨거나 불에 탈 수 있는 것은 목재 조각의 본질적 잠재성들이다; 이 잠재성들은 목재 조각이 물에 뜨거나 불에 타지 않을지라도 그 본질 속에 내재되어 남아있다. 그러나 목재 조각이 물에 뜨거나 불에 탄다면, 목재 조각은 잠재성을 실현하며, 그리하여 변화하거나 움직인다. 따라서 본질은 사물의 모든 잠재성을 포함하는데, 변화나 움직임의 내적 근원과 같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형상의 본질인 이 형상인이나 목적인은 그러므로 실제로 플라톤의 자연이나 영혼과 동일하다; 그리고 이 동일시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에 의하여 입증된다. ‘자연은 또한 잠재성과 같은 유에 속한다; 이유인즉 그것은 물체 자체 속에 내재하는 운동의 원칙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서술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영혼살아있는 몸의 제1 현실태(first entelechy)’로 정의하며, ‘현실태는 원동력으로 생각되어 나중에 형상이나 형상인으로 설명되기 때문에 우리는 다소 복잡한 용어사용법적 도구의 도움을 받아서 플라톤의 원래 관점에 다시 도달한다: 영혼이나 자연은 형상이나 이데아와 비슷한 것이지만 물체에 내재해 있으며 물체의 운동 원리는 것. (젤러[Zeller]과학적 용어사용법의 확정된 사용과 포괄적 전개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칭찬했을 때, 그가 확정된[definit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다소 불안감을 틀림없이 느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복잡하고도 다소 허세적인 전문용어를 사용함에 의하여 너무 많은 철학자들을 매혹시켰다는 가장 개탄스러운 사실뿐 아니라 포괄성도 인정될 수 있다; 그리하여 젤러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수천 년 동안 그는 철학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백과사전적 유형의 역사가였는데 역사주의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바는 없다. 그는 홍수와 다른 재발성 재앙이 때때로 인류를 파괴하여 극소수의 생존자만 남긴다는 플라톤 이론의 보다 제한된 설명을 고집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과 별도로 역사적 추세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변화 이론이 얼마나 역사주의적 해석에 들어맞는지가 이곳에서 밝혀질 수 있으며, 그의 변화 이론이 과시적인 역사주의적 철학을 상술하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이곳에서 밝혀질 것이다. (헤겔 이전에 이 기회는 완전히 이용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로부터 직접적으로 귀결되는 세 가지 역사주의적 원칙이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1) 개인이나 국가가 발전한다는 조건으로만, 그리고 그 역사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 숨겨진, 전개되지 않은 본질(헤겔의 표현을 사용하여) 관한 어떤 것이든 수 있게 될 수 있다. 이 교설로 인하여 나중에 무엇보다도 역사주의적 방식이 채택된다; 다시 말해서, 역사주의 방식을 적용함에 의해서만, 사회 변화를 연구함에 의해서만 우리가 사회적 실체나 본질에 관한 어떤 지식이든 습득할 수 있다는 원칙의 채택. 그러나 그 교설로 인하여 나아가 (특히 실재적인 것뿐 아니라 알려진 것을 선한[good] 것과 동일시하는 헤겔의 도덕적 실증주의와 결합될 때) 역사 숭배와, 세계의 재판정[the World' Court of Justice]뿐 아니라 실재의 거대한 극장[Grand Theatre of Reality]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칭송이 발생한다. (2) 변화로 인하여, 전개되지 않은 본질 속에 숨은 것을 폭로함에 의하여, 처음부터 변화하는 대상에 내재한 본질이자 잠재성인 씨앗이 나타나게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교설로 인하여 역사적 운명이나 불가피한 본질적 운명이라는 역사주의적 관념이 출현한다; 이유인즉 헤겔이 나중에 밝힌 바와 같이, ‘우리가 원칙, 목표,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숨겨져 전개되지 않은 본질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나 민족 혹은 국가에게 발생하는 모든 것은, 이 인간이나 이 민족 혹은 이 국가에서 발현되는 본질이자 실재적인 것인 실재적인 개성으로부터 유래하며 그것들을 통하여 이해될 수 있다고 간주되어야 함을 이것은 의미한다. ‘한 인간의 운명은 자기 자신의 존재와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정말로 그가 대항해서 싸워야 하지만 실제로 우리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인 것이다.’ 헤겔의 운명에 관한 이 언명은 (케어드[Caird]에게서 기인하는), 분명히 모든 몸체는 자기 자신의 자연적 위치를 찾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역사적이고 낭만적으로 대응한다. 물론, 인간에게 발생하는 것은 그의 외부 환경뿐 아니라 그가 그것들에 반응하는 방식인 자신에 달려있다는 것은 진부한 말의 허세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활한(迂闊: naive) 독자는, ‘운명과 특히 자기 자신의 존재같은 짜릿한 말의 도움을 받아서 공식화될 필요가 있는 이 지혜의 깊이가 주는 진리를 이해하고 느끼는 자신의 능력에 극도로 기뻐한다. (3) 현실적이거나 실제적이 되기 위해서, 본질은 변화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이 교설은 나중에, 헤겔에게서 다음과 같은 형식을 띤다: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잠재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존재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데아가 실제화 되는 것은 활동에 의해서 만이다.’ 그리하여 내가 존재로 나타나기를원한다면 (확실히 매우 겸손한 소망이다), 나는 나의 개성을 주장해야 한다. 여전히 다소 인기가 있는 이 이론으로 인하여, 헤겔이 분명하게 보는 바와 같이, 노예제도론에 대한 새로운 정당화가 발생한다. 이유인즉 자기주장이란,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어느 사람의 관계에 관한 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시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모든 관계는 그러므로 주인과 노예, 지배와 복종의 근본적인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고 헤겔은 지적한다. 각자는 자신을 주장하고 증명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자신의 독립을 보존하는 본성과 용기 및 일반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은 노예상태로 떨어져야 한다. 개인 관계에 대한 이 매력적인 이론은, 물론, 헤겔의 국제 관계 이론 속에서도 대등한 것을 지닌다. 민족은 역사의 무대(Stage of History)에서 자신을 주장해야 한다;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는 민족의 의무이다.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는 이 모든 역사주의적 결론은, 다음 장에서 다른 각도로 접근될 것인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 속에서 숨어서 전개되지 않은 채’ 2000년 이상을 잠자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은 많은 예찬자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풍요롭고 미래가 기대되는 것이었다.

 

II

 

우리의 철학에 대한 가장 중대한 위험은, 태만과

애매모호함을 별도로 하고, 학풍고집(scholasticism)

이다,.. 그것은 모호한 것을 정확한 것인 양 다룬다..

F. P. 램지(Ramsey).

 

헤겔의 역사주의 철학을 분석하는 데로, 혹은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 사이의 전개에 대한 비평과 현재 장의 III절로 종결되는 기독교의 발흥에 대한 간단한 비평으로 지체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지점에 우리는 도달했다. 일종의 여담이지만, 나는 보다 전문적인 문제인 정의(定義)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적 방식을 다음에 토론하겠다.

정의(定義: definition)용어의 의미의 문제는 역사주의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문제는, 혼동이 고갈되지 않고 나오는 근원이고 헤겔의 생각 속에서 역사주의와 결합될 때 내가 예언 철학(oracular philosophy)으로 부르는 우리 시대의 독소적인 지적(知的) 질병을 배양한 저 특정 종류의 장광설이 고갈되지 않고 나오는 근원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발휘하는 지배적인 지적(知的) 영향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자 중세기 철학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동시대 철학에 출몰하는 모든 언어적이고도 공허한 학풍고집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다: 이유인즉 심지어 L.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같은 최근의 철학도, 우리가 알게 될 것처럼, 이 영향으로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사상의 발전은, 모든 원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定義: definition) 방식을 사용한다면 공허한 장광설과 무의미한 학풍고집의 상태에 정지되어 있었으며, 다양한 과학이 진보를 이룩할 수 있었던 한계가 이 본질주의적 방식을 제거할 수 있었던 한계에 좌우되었다고 말함에 의하여 요약될 수 있을 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 과학의 많은 부분이 아직도 중세기에 속하는 이유이다.) 이 방식에 대한 토론은 문제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다소 추상적이어야 할 것인데,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뿌리 깊은 편견을 낳아서 그 편견을 추방하려는 전망이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혼란과 장광설의 근원을 분석하면 아마도 흥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견해를 구별하는 데에서 플라톤을 따랐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지식, 즉 과학은 두 가지 종류일 것이다 논증적(demonstrative) 혹은 직관적(intuitive). 논증적 지식(demonstrative knowledge)은 또한 원인에 대한 지식이다. 그 지식은 삼단논법적 논증과 (그것의 매개념[媒槪念: middle terms]’에서 원인을 보여준다) 함께 논증될 수 있는 명제로 결론 구성된다. 직관적 지식은 사물의 불가분(indivisible) 형태혹은 본질 혹은 본질적 성질의 파악을 본질로 한다 (그것이 즉각적이라면, 다시 말해서 그 원인이 그것의 본질적 성질과 동일하다면); 그것은 모든 논증의 원초적 기본 전제를 파악하기 때문에 모든 과학의 독창적 근원이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의 모든 지식을 증명하거나 논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옳았다. 모든 증거는 전제로부터 나아가야 한다; 그런 증거는, 다시 말해서, 전제로부터의 도출은 그러므로 모든 결론이 진리임을 최종적으로 확정할 수 없고, 전제가 사실이라면 결론이 틀림없이 사실임을 보여줄 따름이다. 우리가 이제 전제가 다시 증명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진리의 문제는 또 다른 단계에 의하여 새로운 전제의 집합과 기타 등등, 무한까지 다시 옮겨질 따름일 터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확실하게 참이고 증거가 필요 없는 전제가 있다고 우리가 상정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그러한 무한 소급추론(infinite regress)(논리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그는 기본 전제(basic premises)’라고 불렀다. 우리가 이 기본 전제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을 당연시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서 과학적 지식 전체는 기본 전제 속에 포함되어 있고 우리가 기본 전제에 관한 백과사전적 목록을 얻을 수 있을 터이기만 하면 과학적 지식 전체가 우리 것일 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이 기본 전제를 얻는가? 플라톤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파악함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앎에 의해서만 사물을 알 수 있다. 사물을 아는 것은 그 본질을 아는 것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술한다. 그에 따르면, ‘기본 전제란 사물의 본질을 기술하는 명제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명제란 바로 그가 정의(定義: definition)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증거들에 관한 기본 전제들은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이다.

정의(定義)는 무엇과 같은가? 정의에 관한 한 가지 보기는: ‘강아지는 어린 개다일 터이다. 그런 정의(定義)-문장의 주어인 강아지라는 용어는 정의될 용어(term to be defined)(혹은 정의되는 용어[defined term]) 지칭된다; ‘어린 개라는 단어들은 정의하는 공식(defining formula)으로 지칭된다. 대체로, 정의하는 공식은 정의되는 용어보다 더 길고 더 복잡하고 때때로 매우 많이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되는 용어를 사물의 본질 명칭으로서 그리고 정의하는 공식을 저 본질에 대한 기술로서 간주한다. 그래서 그는 정의하는 공식은 문제의 사물의 본질이나 본질적 속성을 망라해서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강아지는 네 발을 가지고 있다와 같은 명제는 사실일지라도 강아지다움의 본질로 지칭될 것을 망라하지 않고 말()에 관해서도 역시 사실이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정의가 아니다; 그리고 유사하게 강아지는 갈색이다라는 명제는 어떤 강아지에 관해서는 사실일지라도 모든 강아지에 관해서 사실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 명제는 정의되는 용어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한 속성을 기술한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정의나 기본 전제를 파악하여 그것들이 옳다는 것을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또한 틀린 본질을 파악하지 않았다는 것 확실하게 할 수 있는가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요점에 관하여 분명히 밝히지는 않을지라도, 그가 주로 플라톤을 다시 추종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플라톤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지적(知的) 직관(intellectual intuition)의 도움을 받아서 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정신적 눈으로 이데아를 우리가 시각화하거나 바라보는데, 보는 것과 유사하다고 그가 생각했지만 순전히 지성에 의지하여 감각에 의존하는 모든 요소를 배제한 과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플라톤의 견해보다 덜 급진적이고 덜 영감적이지만 결국 동일한 것에 해당한다. 이유인즉 우리가 많은 관찰을 한 후에만 정의(定義)에 도달한다고 그가 가르치지만, 감각-경험은 본질적으로 보편적 본질을 파악하지 않아서 정의를 완전히 결정할 수는 없음을 그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우리가 지적(知的) 직관, 즉 우리로 하여금 오류 없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도록 만들어 알게 만드는 정신적 혹은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상정할 따름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본질을 안다면 그 본질을 기술할 수 있고 그리하여 정의할 수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고 전제한다. (해석학 후편[Posterior Analytic]에서 이 이론을 옹호하는 그의 주장들은 놀랄 정도로 취약하다. 그 주장들의 본질은, 우리가 지닌 기본 전제에 관한 지식은 무한소급을 야기할 터이기 때문에 논증적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기본 전제들은 그 위에 근거한 결론만큼 적어도 사실적이고 확실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기본 전제에 대한 논증적 지식은 있을 리가 없다고 귀결된다; 그리고 지적 직관만이 논증적 지식보다 더 참일 수 있기 때문에, 기본 전제를 파악하는 것은 틀림없이 지적 직관임이 귀결된다 그는 서술한다. 영혼론[靈魂論: De Anima]형이상학[Metaphysics]의 신학 부분에서, 우리는 나은 논증을 발견한다; 이유인즉 여기서 지적 직관에 관한 이론을 우리가 발견하기 때문이다 지적 직관이 그 대상인 본질과 접촉하고, 심지어 지적 직관이 그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이론. ‘실제 지식은 그 대상과 동일하다.’)

이 간단한 분석을 요약하면, 모든 본질의 직관적 정의(定義)를 포함하는, 다시 말해서, 모든 본질을 정의하는 공식과 함께 모든 본질의 이름을 포함하는 백과사전의 편찬에서 모든 연구의 궁극적 목적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았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완벽하고 완전한 지식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理想)을 우리가 공정하게 기술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런 백과사전의 점증적 축적으로서, 백과사전 속의 빈칸을 채워 넣는 것뿐 아니라 백과사전의 확충으로서, 그리고 물론 논증적 지식인 사실 모두가 백과사전으로부터 삼단논법적으로 도출됨으로서 그가 지식 진보의 본질을 간주했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이제 이 모든 본질주의적 견해는 현대 과학의 방식과 가장 강력한 대조를 이룬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아마도 순수 수학을 제외한 경험과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 첫째로, 과학에서 진리를 찾기 위하여 우리가 최선을 다할지라도, 진리를 찾았는지를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한다. 많은 좌절로부터, 우리는 궁극성(finality)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과거에 배웠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가진 과학 이론이 뒤집혀도 더 이상 낙망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 이유인즉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가 두 이론 중 어느 것이 나은 이론인지를 매우 확신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보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에게 궁극성(finality)이나 확실성이라는 망상을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보상하는 것은 이 지식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 이론이 틀림없이 항상 가설로 남지만, 많은 중요한 경우에 새로운 가설이 옛 가설보다 더 우수한지 아닌지를 알아낼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이유인즉 두 가설이 다르면, 그 가설들은 다른 예측을 낳고, 그 예측은 흔히 실험적으로 시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결정적인 실험을 근거로, 때때로 옛 가설이 붕괴하는 곳에서 새로운 가설이 만족스런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리하여 진리탐구에서 우리가 과학적 확실성 대신 과학적 진보를 선택하였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과학적 방식에 관한 이 견해는 과학의 발전에 의하여 입증된다. 이유인즉 과학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것처럼 본질적 정보의 점진적인 백과사전적 축적에 의하여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혁명적인 방식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대담한 관념들에 의하여, 새롭고 매우 기이한 이론의 전개에 의하여 (지구는 평평하지 않다거나, ‘측량 공간[metrical space]’은 평탄하지 않다는 이론과 같은), 그리고 옛 이론들의 전복에 의하여 발전한다.

그러나 과학적 방식에 관한 이 견해는 과학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단어를 이해한 의미에서, 궁극성(finality)을 암시하는 의미에서, ‘지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에서, 우리가 진리에 도달했다는 믿음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우리는 가지지 못한다. 우리가 보통 과학적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이런 의미에서의 지식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경쟁하는 다양한 가설과 그 가설들이 다양한 실험을 견디어내는 등급에 관한 정보이다; 그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를 사용하여, 최신작이자 가장 잘 실험된 과학적 견해(opinion)에 관한 정보이다. 이 의견은 게다가, 우리가 과학에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물론 순수수학과 논리학을 제외하고) 의미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하여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경험과학에서, ‘증거에 의하여 이론의 진리를 최종적으로 확립할 수 있는 논증을 우리가 의미한다면, 증거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발생할 것은 과학이론에 대한 반박이다.) 다른 한편으로 순수수학과 논리학에서는 증거가 허용되는데, 세상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고 세상을 기술하는 수단을 개발할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다른 곳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명제들이 경험의 세계를 언급하는 한, 그 명제들은 틀림없이 반증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명제들이 반증될 수 없다면, 그 명제들은 경험의 세계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증거가 경험과학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지라도, 논증은 여전히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 정말로, 논증의 역할은 적어도 관찰과 실험의 역할만큼 중요하다.

과학에서 정의(定義)의 역할은, 특히,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과 매우 다르다. 정의에서 우리는 먼저 본질을 가리킨다 아마도 본질에 이름을 부여함에 의하여 그리고 우리는 정의하는 공식의 도움을 받아서 본질을 기술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르쳤다; ‘이 강아지는 갈색이다와 같은 평범한 문장에서와 똑같이, 우리는 처음에 이 강아지라고 말함에 의하여 어떤 것을 가리키고 그 다음에 그것을 갈색으로 기술한다. 그리고 정의될 수 있는 용어가 가리키는 본질을 그렇게 기술함에 의하여, 우리는 용어의 의미 또한 결정하여 설명한다고 그는 가르쳤다. 따라서, 정의(定義)는 한 번에 두 가지 매우 긴밀하게 관련된 질문에 답한다. 한 가지 질문은 그것이 무엇인가?’인데 예를 들어, ‘강아지는 무엇인가?’이다; 그 질문은 정의된 용어에 의하여 지적되는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다른 질문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인데 예를 들어, ‘“강아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이 질문은 용어의 (다시 말해서, 본질을 지적하는 용어의) 의미를 묻는다. 현재 문맥에서 이 두 가지 질문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 더 정확하게, 두 가지 질문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특히 두 가지 질문이, 정의에서, 왼편에 있는 용어에 의하여 제기되어 오른편에 있는 정의하는 공식에 의하여 답변이 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싶다. 이 사실로 인하여 본질주의적 관점이 규정되는데, 정의에 대한 과학적 방식은 그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본질주의적(essentialist) 해석은 정의를 보통’, 다시 말해서,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읽는다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정의는 보통 현대 과학에서 쓰이는 바와 같이 거슬러 앞으로 ,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읽혀야 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이유인즉 정의란 정의하는 공식으로 시작하여, 정의에 대한 짧은 표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강아지는 어린 개다라는 정의에 대한 과학적 견해는, 그 정의는 강아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기보다는 어린 개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일 터이다. (‘생명은 무엇인가?’중력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은 과학에서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못한다.) ‘오른편에서 왼편으로라는 접근방식으로 특정된 정의의 과학적 사용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나 본질주의적(essentialist) 해석과 반대로, 유명론적(唯名論的: nominalist) 해석으로 지칭될 것이다. 현대 과학에서, 유명론적 정의만 나타나는데, 다시 말해서, 약호나 표식은 긴 설명을 줄이기 위하여 도입된다. 그래서 이것으로부터 정의란 과학에서 조금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그 이유인즉 약호란 물론 항상 약호가 의미하는 더 긴 표현인 정의하는 공식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로 인하여 우리의 과학 언어가 매우 부담스럽게 될 터이다; 우리는 틀림없이 시간과 종이를 낭비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적 정보의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닌 과학적 지식, 이 용어가 적합하게 사용될 의미에서, 우리가 모든 정의를 제거할지라도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 언어에 끼치는 유일한 영향은, 정확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간결성을 잃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에서 간결성을 위하여 정의를 도입할 시급한 실용적 필요성이 부정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정의가 수행하는 역할에 관한 이 견해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사이의 대조보다 더 큰 대조는 있을 수 없을 터이다. 이유인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본질주의적 정의는 우리가 지닌 모든 지식이 도출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정의는 우리의 모든 지식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정의는 짧은 공식을 긴 공식으로 대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것과 반대로, 과학적 즉, 유명론적 정의는 어떤 지식도, 심지어 어떤 견해도 담고 있지 않다; 그 정의는 새로운 자의적인 약호를 도입할 따름이다; 그 정의는 긴 설명을 축소한다.

실제로, 이 표식은 매우 유용하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박테리아 연구가가, 특정 종류의 박테리아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마다, 그 전체 묘사를 (몇 가지 유사한 종과 그 종이 구별되는 염색 방법, 기타 등등의 방법을 포함하여) 반복해야 한다면 발생할 극단적인 난관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유사한 고찰에 의해서, 과학적 정의가 위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읽혀져야 한다는 것이 왜 그리 자주 잊혔던 지를 우리는 또한 이해할 것이다. 이유인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균학 같은 과학을 처음 연구할 때, 자신들이 직면하는 이 모든 새로운 전문적 용어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마치 그것이 본질주의적 정의인양, 매우 짧은 설명을 매우 긴 설명으로 대체하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정의를 실제로 배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심리학적 우연이고, 교사나 교과서 저술가는 정말로 완전히 다르게 나아갈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전문적 용어에 대한 필요성이 발생한 후에만 그 용어를 소개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정의의 과학적 사용 즉, 유명론적 사용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적 방법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정의에 관한 본질주의적 견해는 본질적으로 옹호될 수 없을 뿐임이 또한 밝혀질 수 있다. 부당하게 너무 오래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본질주의적 교설 두 가지를 비판하겠다; 영향력이 있는 몇몇 현대 학파가 여전히 그 교설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중요한 두 가지 교설들. 하나는 지적(知的) 직관이라는 밀교적(密敎的: esoteric) 교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정확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용어를 정의해야 한다는 매우 인기 있는 교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함께 우리가 지적 직관이라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것으로써 우리는 본질을 시각화할 수 있으며 어느 정의가 올바른 것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고, 많은 현대 본질주의자들은 이 교설을 반복했다. 다른 철학자들은, 칸트를 좇아서, 우리는 그런 종류의 것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나의 견해는 우리가 지적 직관으로서 기술될 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더 정확하게, 우리가 지닌 지적 경험 중 어떤 것은 그렇게 기술될 것임을. 관념이나 관점, 혹은 예를 들어 곱셈 같은 산술적 방식을, 자신이 그것에 대하여 직관적 지식을 갖게되었다는 의미에서 이해하는모든 사람은 저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한다고 아마도 언급될 것이다; 그리고 저런 종류의 지적 경험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이 아무리 강하게 직관적으로 그것이 사실임에 틀림없다고, 즉 그것은 자명하다고 느낄지라도, 나는 이 경험들이 우리들의 과학적 노력에 대하여 중요해도 어떤 관념이나 이론의 진리를 확립하는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직관에 의하여 논증을 찾는 우리가 고무될지라도, 그런 직관은 심지어 논증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도 없다. 이유인즉 다른 사람이 동일한 이론이 틀렸다는 똑같이 강한 직관을 가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과학의 길에는, 예전에 자명하다고 선언되었다가 폐기된 이론들이 즐비하다; 예들 들어 프랜시스 베이컨은 태양과 별들이 분명히 정지해 있는 지구 주위를 회전한다는 자명한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시인의 삶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과학자의 삶에서도 직관은 틀림없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한다. 직관으로 인하여 과학자는 발견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직관으로 인하여 과학자는 실패를 또한 맛볼 것이다. 그래서 직관은 말하자면 항상 과학자의 사사로운 사건으로 남는다. 과학은 과학자가 어떻게 관념을 얻는지를 묻지 않고, 모든 사람에 의하여 실험될 수 있는 논증에 흥미를 가질 따름이다. 위대한 수학자 가우스(Gauss)는 예전에 이렇게 소리쳐 이런 상황을 말끔하게 기술했다: ‘나는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그 결과를 얻는지 아직 모른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소위 본질에 관한 지적 직관이라는 원칙에도 적용되는데, 그 교설은 헤겔에 의하여 전파되었고 우리 시대에는 E. 후설(Husserl)과 그의 수많은 제자들에 의하여 전파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본질에 관한 지적 직관, 후설이 지칭하는 바의 순수 현상학이 과학이나 철학의 방법이 아님이 적시된다. (순수 현상학자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새로운 창안인지 혹은 데카르트주의나 헤겔주의적 해석인지라는 많이 논쟁된 문제는 쉽게 결정될 수 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해석이다.)

비판될 두 번째 교설은 현대적 관점들과 훨씬 더 중요하게 연결된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장광설이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우리가 모든 명제들을 증명할 수 없으며, 모든 명제들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증명의 무한소급(無限遡及: infinite regression)을 초래할 뿐일 터이기 때문에 붕괴할 터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수많은 현대 저술가들은 분명히 우리가 지닌 모든 용어의 의미를 정의하려는 유사한 시도로 인하여, 같은 방식으로, 정의의 무한소급이 발생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크로스먼(Crossman)오늘날의 플라톤(Plato To-Day)에서 유래하는 다음 구절은 우리 시대의 많은 유명한 철학자들,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함축적으로 주장하는 관점의 특징이다: ‘..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유용하게 토론할 수가 없다. 우리 모두가 시간을 낭비하는 무익한 논쟁 대부분은, 주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에 대하여 각자가 자신의 모호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반대자가 그 단어들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우리가 우선 용어를 정의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이로운 토론을 할 수 있을 터이다. 다시, 우리는 일간신문을 읽고 선전이 (현대판 수사학) 성공하기 위하여 주로 용어의 의미를 혼동시키는 데 의존하는 것을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정치가들이 법률에 의하여 자신들이 사용하고자 하는 용어를 정의하도록 강제된다면, 그들은 대중적 인기 대부분을 잃어버릴 것이고, 그들의 연설은 짧아질 것이며, 그들의 의견대립은 순전히 언어적임이 밝혀질 터이다.’ 이 구절은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빌려온 편견 한 가지의 특징인데, 언어란 정의를 사용함에 의하여 더 정확해질 수 있다는 편견 한 가지의 커다란 특징이다. 이것이 실제로 실천될 수 있는지 고찰해보자.

첫째, ‘정치가들(혹은 다른 사람들) ‘법률에 의하여 자신들이 사용하고자 하는 용어를 정의하도록 강제된다, 그들의 연설은 짧아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길어질 터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유인즉 논리 도출이 명제의 진리를 확립할 수 없는 바와 같이, 정의는 용어의 의미를 확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리 도출과 정의 모두는 이 문제를 원래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을 뿐이다. 논리 도출로 인하여 진리 문제가 전제로 돌아가고, 정의로 인하여 의미의 문제가 정의하는 용어들로 (다시 말해서, 정의하는 공식을 구성하는 용어들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것들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가 출발할 때 사용한 용어만큼 꼭 모호하고 혼란스럽기 쉽다; 그리고 여하튼, 우리는 그 용어들을 차례차례 계속해서 정의하여야 한다; 그로 인하여 역시 정의되어야 하는 새로운 용어들이 생긴다. 새로운 용어들은 무한대로 계속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용어가 정의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가 내놓은 모든 명제들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꼭 마찬가지로, 옹호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첫눈에 보면 이 비판은 불공평해 보일 것이다. 사람들이 정의를 요구한다면 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 ‘자유’, ‘의무’, ‘종교’, 기타 등등과 같은 단어들과 매우 흔히 연결되는 모호성의 제거라고 언급될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모두를 정의한다는 것을 분명히 불가능하지만, 더 위험한 이 용어들의 몇 가지를 정의하여 그대로 두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리고 정의하는 용어들은 수용되어야만 한다고,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무한 소급추론을 피하기 위해서 한두 단계 다음에 멈추어야 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어는 옹호될 수 없다. 언급된 그 용어들은 많이 오용된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그 용어들을 정의하려는 시도로 인하여 사태가 개선될 수 있음을 나는 부인한다. 그런 시도는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심지어 한번이라도 자신들이 쓰는 용어를 정의함에 의하여, 그리고 정의하는 용어들을 정의되지 않은 채로 내버려둠에 의하여, 정치가들이 자신의 연설을 더 짧게 만들 수 없을 터임은 분명하다; 이유인즉 본질주의적 정의란, 다시 말해서 우리의 용어를 정의하는정의는 (새로운 전문적 용어를 도입하는 유명론적[唯名論的] 정의와 반대로) 우리가 안 바와 같이 짧은 이야기를 긴 이야기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용어를 정의하려는 시도로 인하여 모호함과 혼동이 가중될 따름일 터이다. 이유인즉 모든 정의하는 용어가 차례차례 정의되어야 한다고 우리가 요구할 수 없기 때문에, 영리한 정치가나 철학자는 정의하라는 요구를 쉽게 충족시킬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에 의하여 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정치가는 일반인들의 의지에 의한 통치혹은 국민들 정신의 통치라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가 이제 정의를 내놓아서 최고 기준의 정확성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더 이상 감히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통치국민이나 의지정신이 차례차례 정의되어야 한다는 요구로 인하여 우리가 무한소급의 길로 치닫게 되어 모든 사람이 그런 요구 제기를 주저할 터이기 때문에, 어떻게 그가 비판을 받을 수 있을 터인가?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런 요구가 제기된다면, 그 요구는 동등하게 쉽게 충족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정의가 옳은지 혹은 참인지의 질문에 관한 논쟁으로 인하여 단어들에 관한 공허한 논란만 초래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정의에 관한 본질주의적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우리가 지닌 지식의 원칙을 확립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다만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를 정의하여야 한다는 분명히 보다 겸손한 주장을 한다고 할지라도, 붕괴한다.

그러나 의심할 바 없이, 우리가 분명하고 모호함 없이 말해야 한다는 요구는 매우 중요하며, 충족되어야 한다. 유명론적(唯名論的) 관점으로 그 요구가 충족될 수 있을까? 그리고 유명론으로 인하여 무한소급이 예방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유명론적 입장과 관련하여 무한소급에 상응하는 난제가 없다. 우리가 안 바와 같이, 과학은 과학이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하여 정의를 사용하지 않고, 다만 편리한 짧은 표식을 도입하기 위하여 정의를 사용한다. 그래서 과학은 정의에 의존하지 않는다; 모든 정의는 전달되는 정보를 손상시키지 않고도 생략될 수 있다. 이것으로부터, 과학에서 실제로 필요한 모든 용어는 정의되지 않아야 하는 용어라고 귀결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과학은 자체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를 확실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다양한 답변이 제시되었지만, 나는 그 답변 중 어느 것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황은 이러한 듯싶다. 아리스토텔레스 학설 및 관련된 철학들이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들에게 말해서 우리 모두에게는 그것을 믿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어 및 그 의미에 대하여 거의 신경 쓰지 않고 대신 사실에 대하여 신경 쓰던 물리학과 같은 과학이 커다란 정확성을 이룩한 반면, 2000년 동안 용어의 의미에 관하여 걱정하던 철학이 장광설로 가득 찼을 뿐만 아니라 또한 충격적으로 애매모호하다는 확실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이 신조에 매달린다. 이것은 확실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서 용어의 의미에 관한 중요성이 부당하게 과장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유인즉 의미 문제에 대한 이 집착은 정확성을 이룩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애매모호함과 혼란의 주원인이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우리가 만드는 명제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에 의존하지 않도록 우리는 배려한다. 심지어 용어가 정의되는 곳에서도, 우리는 정의로부터 정보를 도출하려하거나, 정의에 논증을 근거시키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가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유이다. 우리는 용어에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용어에 가능한 한 적은 무게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용어의 의미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용어란 조금 모호하며 (우리가 실용적인 적용에서만 용어 사용을 배웠기 때문에), 모호함이라는 용어의 경계부분을 감소시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경계부분 속에서 충분히 유지함에 의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와 관련된 가능한 음영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문장을 신중하게 표현함에 의하여 정확성에 우리가 도달함을 우리는 항상 인식한다. 이것이 우리가 단어들에 관한 논쟁을 피하는 방식이다.

과학과 과학적 언어의 정확성이 그 용어의 정확성에 달렸다는 견해는 틀림없이 매우 그럴 듯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견일 따름이라고 나는 믿는다. 언어의 정확성은 오히려 용어에 정확성이라는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고 조심한다는 사실에 달려있다. ‘사구[砂丘]’바람같은 용어는 분명히 매우 모호하다. (작은 모래 언덕은 사구로 지칭되기 위하여 몇 인치로 높아야 하는가? 공기는 바람으로 지칭되기 위하여 얼마나 빨리 움직여야 하는가?) 그러나 많은 지구과학자들의 목적을 위해서, 이 용어들은 아주 충분하게 정확하다; 그리고 다른 목적을 위해서, 더 높은 수준의 구분이 필요할 때, 지구과학자는 항상 ‘430 피트 높이 사이의 사구혹은 시속 2040 마일 사이의 속도를 지닌 바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정확한 과학에서의 입장도 비슷하다. 예를 들어 물리적 측정에서 우리는 오차범위를 항상 고려하여 배려한다; 그래서 정확성의 본질은 이 범위를 0으로 감소시키려고 노력하거나 그런 범위가 없다고 주장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오차를 명시적으로 인정함이다.

심지어 용어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는 곳에서도,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동시성(simultaneity)’이라는 용어처럼, 그것은 용어의 의미가 정확하지 못하거나 모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용어에 너무 적은 의미보다는 너무 많은 의미나 너무 정확한의미를 우리가 부담시키게 되는 어떤 직관적 이론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동시성 분석에서 발견한 것은, 동시적 사건에 대하여 말할 때, 물리학자들은 무한 속도의 신호가 있다면 도전 받을 수 없었을 터인 허위 전제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오류는 물리학자들이 무의미한 짓을 했다거나 그들의 의미가 모호했다거나 용어가 충분히 정확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것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자체의 직관적 자명성(自明性) 때문에 당시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이론적 전제를 제거하면 과학에서 나타났던 난제가 제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실제로 용어의 의미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론의 진리에 관심을 가졌다. 어떤 사람이, 확정된 물리적 문제를 제쳐두고, 동시성의 본질적 의미를 분석함에 의하여 혹은 심지어 물리학자들이 동시성에 관하여 말할 때 물리학자들이 실제로 의미하는것을 분석함에 의하여 동시성 관념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했다면 많은 것이 이룩되었을 개연성은 매우 적다.

이 사례로부터 우리가 미리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가 배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애매모호함과 같은 용어의 의미에 관한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아인슈타인 사례의 도움을 받아도 틀림없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나는 또한 생각한다. 그런 집착은 더 정확하게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에 많은 것이 달려있다는, 그리고 우리가 이 의미로써 연구한다는 전제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그로 인하여 장광설과 학풍고집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교설과 같은 교설을 비판할 것인데, 그는 과학이 사실의 문제를 조사하는 반면 용어의 의미를 설명하여 우리의 언어를 정화하고 언어적 수수께끼를 제거하는 것이 철학이 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학파의 견해들로 인하여 합리적으로 비판될 수 있을 터인 어떤 연속적 논쟁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학파 견해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그 학파는 미묘한 분석 작업을 소수의 밀교적(密敎的) 창시자 무리에게 독점적으로 맡긴다. 이로 인하여, 의미에 집착하면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의 전형적인 결과가 생기는 경향이 암시되는 듯하다: 학풍고집과 신비주의.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의 이 두 가지 전형적인 결과가 어떻게 출현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 즉, 증거와 정의(定義)는 지식을 획득하는 두 가지 근본적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먼저 증거라는 교설을 고려하면, 증거로 인하여 증명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증명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발생했음은 부인될 수 없다; 중세의 철학은 이 학풍고집으로 가득 차있고 동일한 경향이 유럽대륙에서는 칸트까지 관찰될 수 있다. 피히테(Fichte)와 쉘링(Schelling), 그리고 헤겔(Hegel)의 낭만적 반동을 불러왔던 것은 칸트가 신(God)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새로 태동한 경향은 증거를 버리고, 증거와 함께 모든 종류의 합리적 논증을 버리는 것이었다. 사회과학에서뿐 아니라 철학에서도 낭만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독단론이 유행하게 되었다. 낭만주의는 우리에게 자체의 금언을 내민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금언을 수용하거나 버리거나 할 수 있다. 예언 철학의 이 낭만적 기간은, 쇼펜하우어에 의하여 거짓의 시대(age of dishonesty)’로 지칭되었는데, 쇼펜하우어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정직의 특성으로 탐구를 독자와 함께 떠맡는 저 정신은 이전 모든 철학자의 작품에 스며있는데 여기서 완전히 사라졌다. 한 쪽 한 쪽 읽을 때마다 소위 철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은 독자를 가르치려하지 않고 독자에게 마술을 걸려고 한다.’

유사한 결과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관한 교설에 의하여 생겼다. 첫째로 그 교설로 인하여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일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나중에, 철학자들은 우리가 정의에 관하여 논증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방식으로, 본질주의는 장광설을 부추겼을 뿐 아니라 논증에 대한, 다시 말해서 이성(理性)에 대한 환멸을 불러왔다. 학풍고집과 신비주의, 그리고 이성에 대한 절망, 이것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가 초래한 불가피한 결과이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플라톤의 공개적인 반역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이성에 반대하는 은밀한 반역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으로부터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본질주의와 정의의 이론은 최초로 제시되었을 때, 특히 소크라테스의 오랜 동료인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로부터 강력한 반대를 받았는데 그의 비판은 매우 타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반론은 불행히도 패퇴 당했다. 인류의 지적(知的) 발달과 관련된 이 패퇴의 결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 결과 중 몇 가지가 다음 장에서 토론될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인 정의에 관한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대한 비판을 끝낸다.

 

III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나의 토론이 매우 개괄적이라는 사실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다 내가 플라톤을 토론한 것보다 훨씬 더 그렇다. 그 두 사람에 대한 언급의 주목적은 그들이 역사주의의 발흥과 열린사회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보여주는 것과, 우리 시대의 문제에 현대 역사주의와 전체주의의 시조인 헤겔의 예언 철학 발흥에 그들이 끼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 사이의 전개상황은 여기서 조금도 다루어질 수 없다. 그들을 공평한 것처럼 다루려면, 적어도 저서 한 권이 필요할 터이다. 그러나 본 장의 남은 몇 쪽에서 나는, 열린사회와 닫힌 사회 사이의 갈등을 통하여 이 기간이 아마도 어떻게 해석될지를 밝히려고 노력하겠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사변(思辨)과 위대한 세대인 페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 및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의 정신 사이의 갈등은 여러 시대를 통틀어 추적될 수 있다. 이 정신은, 초기 기독교도들처럼, 인간의 형제애를 설교했던 견유학파(Cynics)의 운동에 다소 순수하게 보존되었는데 그들은 형제애를 신()을 아버지로 하는 일신교적 신앙과 연결시켰다. 아우구스투스의 제국뿐 아니라 알렉산더의 제국도 페리클레스의 제국주의적 아테네에서 최초로 형성된, 그리고 항상 동서양의 접촉으로 자극을 받았던 이 관념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 관념들과 아마도 견유학파 운동 자체는 기독교 발흥에 또한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높다.

초기에, 견유학파의 운동처럼 기독교는 플라톤화 하는 고답적인 지식인들인 율법사들(scribes)’의 이상주의(Idealism)와 지성주의(intellectualism)를 반대했다. (‘하느님은 이것을 지혜롭고 신중한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 그것이, 부분적으로 더 넓은 의미에서 유대인의 플라톤 학설로 기술될 것인 하느님과 하느님 말씀의 추상적 숭배에 대한 항거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이 유대인의 종족주의에 반대하는, 그 종족주의의 경직되고 공허한 종족적 금기에 반대하는 그리고 예를 들어 선민사상에서 다시 말해서 신()을 종족적 신으로 해석하는 데에서 표현된 그 종족적 배타성에 반대하는 항거였다. 종족적 율법과 종족적 단결에 대한 그런 강조는, 원시 종족 사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종족적 생활의 옛 형태를 복원하고 고착시키려는 필사적인 시도의 특징으로 보인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경우에, 그것은 유대인의 종족생활에 닥친 바빌로니아의 정복이라는 충격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큰 경직성으로 향하는 이 운동과 병행하여 분명히 동시에 시작되었고, 그리스 종족주의의 해체에 위대한 세대(the Great Generation)가 대응한 것과 닮았던 박애주의 사상을 낳은 또 다른 운동을 우리는 발견한다. 이 과정은 유대인들의 독립이 결국 로마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파괴되었을 때 반복되었던 듯하다. 이 과정으로 인하여 가능성이 있던 두 가지의 해결책 사이에서 새롭고 더 깊은 분열이 생겼는데, 정통 유대인들에 의하여 대표되는 바와 같이 종족으로의 복귀 및 노예뿐 아니라 야만인을 (혹은 이방인) 포용하던 새로운 기독교 종파의 박애주의였다. 이 문제들이 민족적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서 얼마나 다급했던가를 사도행전(Acts)으로부터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유대인들의 전개상황으로부터 또한 이것을 알 수 있다; 이유인즉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동일한 도전에 대하여 자신들의 종족적 삶의 형태를 정지시키고 고착시키는 또 다른 운동에 의하여, 그리고 플라톤의 인정을 받았을 아집으로써 자신들의 율법에 매달림에 의하여 반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개상황이, 플라톤 관념들의 전개상황처럼, 열린사회라는 새로운 신조에 대한 강한 적대감에 의하여 고취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경우에는, 기독교라는 새로운 신앙에 대한.

그러나 위대한 세대, 특히 소크라테스의 신조와 초기 기독교의 신앙 사이의 유사점은 더 깊다. 초기 기독교도들의 힘은 그들의 도덕적 용기에 놓여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 힘은 로마는 자신의 신민들에게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도록 강요할 권한이 있다는 로마의 주장을 수용 거부했다는 사실에 놓여있었다. 정의(justice)의 기준을 정하려는 권력의 주장을 거부했던 기독교 순교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죽은 동일한 대의(大義)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 신앙이 강력해졌을 때 이 문제들은 분명히 크게 바뀌었다. 이 기독교의 공인이 (그리고 배교자인 율리아누스 황제의 신 플라톤적 반[]교회 모형을 모방한 그 후 조직) 지배 권력의 편에서 평등주의적 종교가 그들이 무신론과 불경이라는 죄목에 의해서만 아니라 무력으로 싸우려다가 실패한 종교 지닌 엄청난 도덕적 영향력을 파괴하고자 의도된 교묘한 정치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던지 의문이 대두된다. 다시 말해서, (특히 율리아누스 황제 이후에) 로마는 파레토(Pareto)의 충고인 감정을 파괴하려는 헛된 노력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감정을 이용하는 것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대두된다. 이 의문은 답변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 시대착오적으로 냉소적인 동기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 지닌 삶에 대한 현대 서구적 자세와 더 일치하는 동기들을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 추종자들의 시기에 귀속시키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하는 역사적인 의미의 도움을 받음에 의하여 (토인비가 그렇게 하는 바는 같이) 그 의문은 분명히 일축될 수 없다. 이유인즉 그런 동기가 30인 참주의 지도자인 크리티아스(Critias)에 의하여 기원전 5세기에 공개적이고 냉소적으로’, 더 정확하게 말해서, 파렴치하게 표현된 것을 우리는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사한 진술들이 그리스 철학사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다. 아무튼 유스티아누스 황제(Justinian)의 비기독교도와 이단자 그리고 철학자 박해와 더불어 (기원후 529) 암흑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교회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 전체주의 이후에 종교재판에서 절정을 이루는 과정을 따랐다. 종교재판의 이론은 특히 순전히 플라톤적이라고 기술될 수 있다. 그 이론은 법률(Laws)의 마지막 세 권에 밝혀져 있는데, 그 저서에서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솔직하고 명예로운 사람으로 인정될 사람이고 그의 병든 양심으로 인하여 불행하게도 권력가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 늑대인 그 사람을 양치기 통치자가 죽여야 할지라도, 법률의 엄격성과 특히 종교적 관행 및 종교적 이론의 엄격성을 보존함에 의하여 어떤 희생을 치르고도 양떼를 보호하는 것이 양치기 통치자들의 의무이다.

중세기의 기독교적권위주의로 주장되는 것이, 특정 지성주의적 집단에게서, 당시 최신 유행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시대에서 문명이 주는 긴장에 대한 특징적인 반응의 하나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정말로 더 유기적이고 통합된과거를 이상화하는 데에 기인할 뿐 아니라, 이 긴장을 무한히 증가시킨 현대의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 대한 이해 가능한 혐오감에 또한 기인한다. 사람은 하느님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믿었다. 이 믿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책임이 제한되었다. 사람들 자신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새로운 믿음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거의 견딜 수 없는 책임 부담이 생겼다. 이 모든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중세가 심지어 기독교의 관점에서도 우리의 서구 민주주의보다 더 잘 다스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가 특정 율법학자에 의하여 예수 말의 진짜 해석과 가짜 해석을 구분할 기준에 관하여 심문을 받았다고 우리가 복음서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부상당한 사람을 보고 다른 편으로 비켜간제사장 및 레위 사람과, 반면 사마리아인이 부상당한 사람의 상처를 싸매 주고 그의 물질적 요구를 돌보아주었다는 우화를 말하며 대답했다. 이 우화는 교회가 자유와 양심을 억압하던 때뿐 아니라, 교회가 지켜보고 교회의 권위 때문에 밝혀지지 않은 박해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갔던 때를 갈망하는 저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기억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그리고 동시에 이 시절의 회복을 원하는 현재 그렇게도 유행하는 낭만적 중세주의의 기독교에 대한 감동적인 비평으로서, 여기서 한 구절이 H. 진서(Zinsser)의 저서 쥐와 이, 그리고 역사(Rats, Lice, and History)에서 인용될 것인데 그 저서에서 그는 성 요한의 춤(St. John's dance)’, ‘성 비투스의 춤(St. Vitus' dance)’, 기타 등등으로 알려진 중세의 춤 광증 유행병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진서를 중세에 대한 권위자로 인용할 의사가 나에게 없다 쟁점이 되는 사실들은 거의 논쟁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실용적인 사마리아인에 대한 위대하고 인자한 내과의사에 대한 희귀하고도 기묘한 효과를 자아낸다.)이전 시대에서 들어보지 못한 것을 아닐지라도 이 이상한 발작은 흑사병이라는 참혹한 질병이 창궐하던 동안과 바로 직후에 흔해졌다. 대체로, 춤 광증에는 우리가 신경계통의 유행성 전염병으로 연상하는 특징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 광증은 오히려 오늘날 거의 상상될 수 없는 정도로 억압받고 굶주리고 비참해진 사람들 속에서 공포와 절망에 의하여 야기된 집단 광란처럼 보인다. 상존하는 전쟁과, 정치적 및 사회적 분열이라는 참혹함에 피할 수 없고, 알 수 없고 치명적인 질병인 무서운 고통이 추가되었다. 인류는 방어할 수 없는 공포와 위험의 세상에 갇힌 것처럼 무기력하게 서있었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가해진다고 그들이 믿었던 고통 아래서 움츠렸던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악마는 살아있는 개념이었다. 긴장 하에서 무너졌던 사람들에게, 시대상황 아래서 종교적 광신주의의 방향을 잡았던 정신착란이라는 내부적 피난처를 제외하고 도피의 길이 없었다.’ 그 다음에 진저는 이 사건들과, ‘경제 및 정치적 광란이 이전 시대의 종교적 광란을 대신했던이라고 자신이 말하는 우리 시대의 특정 반응 사이의 유사점을 비교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권위주의의 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특징지어 공포에 질려 비참했던 사람들로, 거의 믿어지지 않는 고초와 위험이라는 압박감으로 무너져 내렸다고 그는 요약한다. 중세기의 부단한 조화와 통합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는 태도 혹은 인류를 전염병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이성을 이용하기를 원하는 태도 중 어느 태도가 더 기독교적인가? 질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중세 권위적인 교회의 일부는 그런 실용적인 인도주의를 세속적으로서, 향락주의(Epicureanism)의 특징으로서 그리고 금수처럼 자신의 배를 채우기를 원하기만 하는 사람들의 특징으로서 낙인찍는 데 성공했다. ‘향락주의(Epicureanism)’, ‘물질주의(materialism)’, 그리고 경험론(empiricism)’이라는 용어, 다시 말해서, 위대한 세대의 가장 위대한 한 사람이었던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의 철학은 이런 방식으로 사악함과 동의어가 되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족적 이상주의(Idealism)는 일종의 그리스도 이전의 기독교로 칭송을 받았다. 정말로, 그들의 철학이 중세 권위주의에 의하여 채택되었다는 것은 심지어 우리 시대에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거대한 권위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전체주의 진영 밖에서도 우리 삶에 끼치는 그들의 실제 영향보다 그들의 명성이 더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이 잊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데모크리토스(Democritus)라는 이름은 기억되지 않을지라도 그의 도덕뿐 아니라 그의 과학은 우리와 함께 여전히 살아있다.

 

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