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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II권 1971년 23장 지식사회학 24장 예언철학, 그리고 이성에 대한 반역 (번역 수정본)

이윤진이카루스 2022. 11. 27. 16:55

열린사회와 그 적들, 2권 23장 및 24장 (번역 수정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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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진리에 관한 보편적이고 불편부당한 진리 기준의

요청이라는 의미에서, 합리성은 최고로 중요하다..,

합리성이 쉽게 우세한 시대에서뿐 아니라, 사람들이

동의할 수 없는 곳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용기가

결여된 사람들의 헛된 꿈으로서 합리성이 경멸당하고

배척당하는 불행한 시대에서도 또한.

트런드 .

 

23: 지식사회학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주의적 철학이 그들 시대의 ㅡ 사회 변혁기 ㅡ 특징적인 산물이라는 것은 의심될 수 없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와 플라톤의 철학처럼, 그리고 콩트(Comte)와 밀(Mill) 및 라마르크(Lamarck)와 다윈(Darwin)의 철학처럼,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은 변화의 철학이며, 그 철학은 변하는 사회적 환경에 의하여 이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의 정신에 각인된 엄청나고 틀림없이 다소 무서운 인상을 증언한다. 플라톤은 모든 변화를 중단시키려고 노력함에 의하여 이 상황에 대응했다. 더 현대적인 사회철학자들은 매우 다르게 대응하는 듯 보이는데 왜냐하면 변화를 수용하고 심지어 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변화에 대한 사랑은 내가 보기에 다소 양면성을 띤다. 이유인즉 그들이 변화를 중단시키려는 어떤 희망도 포기했을지라도, 역사주의자로서 그들은 변화를 예언하려고 시도하고 그리하여 변화를 합리적으로 억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분명히 변화를 길들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역사주의자에게, 변화에 대한 공포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듯이 보인다.

훨씬 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우리 시대에, 변화를 예언하려는 욕망뿐 아니라, 중앙집권적인 대규모 기획에 의하여 변화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우리가 심지어 또한 발견한다. 이 전체론적인 관점은 (내가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에서 비판했다) 말하자면, 플라톤 이론과 마르크스 이론 사이의 타협을 의미한다. 변화를 중지시키려는 플라톤의 의지로 인하여, 그 의지가 변화의 불가피성에 관한 마르크스의 교설과 결합되어 일종의 헤겔식 종합(synthesis)’으로서 다음과 같은 주장이 발생한다. 변화가 완전히 중단될 수는 없기 때문에 자체의 권력이 거대하게 확대될 수 있는 국가에 의하여 최소한도 기획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처음 보기에, 일종의 합리주의로 보일 것이다; 그 태도는 그 속에서 사람이 최초로 자신의 운명의 지배자가 되는 자유의 영역에 대한 마르크스의 꿈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 태도는, 합리주의에 확실히 반대되는 (그리고 특히 인류의 합리적 통합이라는 교리와 반대가 되는: 24장 참조) 교설과 긴밀하게 연합하여 발생하는데 그 교설은 우리 시대의 비합리주의적이고 황당한 경향과 잘 일치한다. 우리가 지닌 도덕적이자 과학적인 의견을 포함하여 우리의 의견은 계급 이해에 의하여,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우리 시대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교설을 나는 염두에 두고 있다. ‘지식사회학(sociology of knowledge)’이나 사회학주의(sociologism)’라는 이름으로, 이 교설은 최근에 (특히 M. 쉘러[Scheler]K. 만하임[Mannheim]에 의하여) 과학적 지식의 사회적 결정론으로서 개발되었다.

과학적 사고(思考), 그리고 특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관한 사고(思考), 진공상태 속에서 진행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조건화된 환경 속에서 진행한다고 지식사회학은 주장한다. 과학적 사고, 그리고 특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관한 사고(思考)는 주로 무의식적이거나 잠재의식적인 요소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이 요소들은 사색가의 관찰하는 눈으로부터 숨겨져 남아있는데 왜냐하면, 말하자면, 사색가가 살고 있는 바로 그 장소인 그의 사회적 서식처를 그 요소들이 형성하기 때문이다. 사색가의 사회적 서식처에 의하여, 사색가에게 의문의 여지없이 참이나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견해들이나 이론들의 전체 체계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모든 탁자는 탁자다라는 문장처럼, 그 견해들이나 이론들은 논리적으로 사실인 양 그리고 하찮게 사실인 양 사색가에게 보인다. 이것이, 사색가가 조금이라도 가정했다는 것을 심지어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 사색가가 가정했다는 것은, 우리가 그를 매우 다른 사회적 서식처에 사는 사색가와 비교하면 알려질 수 있다; 이유인즉 매우 다른 사회적 서식처에 사는 사색가 또한 표면적으로 의문의 여지가 없는 가정의 체계로부터, 그러나 매우 다른 체계로부터 출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체계는 매우 달라서 이 두 이론체계 사이에는 어떤 지적(知的) 교량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타협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회적으로 결정된 다른 가정 체계는 지식사회학자들에 의하여 이데올로기 총체(total ideology)라고 지칭된다.

지식사회학은 칸트의 인식론에 대한 헤겔식 해석본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유인즉 우리가 수동주의적(passivist)’ 지식론이라고 지칭할 것에 대한 칸트의 비판 노선에서 지식사회학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수동주의적(passivist)’ 지식론 의하여 나는 흄(Hume)까지를 포함하는 경험론자들의 이론을 의미한다. 개략적으로 지식이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그리고 오류는 감각에 주어진 자료를 우리가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혹은 감각에 주어진 자료 내부에 발달한 연상(聯想)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그 이론이 기술될 것이다; 오류를 피하는 최상의 방법은 완전히 수동적이고 수용적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 지식용기설(知識容器說: receptacle theory of knowledge)(나는 보통 그 이론을 양동이 정신이론[bucket theory of the mind]’이라고 부른다) 반대하여, 칸트는 지식은 박물관인 양 우리의 감각이 받아들여 생각 속에 저장하는 선물의 수집물이 아니라, 지식은 주로 우리 자신의 정신활동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지식을 얻고자 원한다면 매우 능동적으로 탐구, 비교, 통합, 일반화에 몰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 이론을 능동주의적(activist)’ 지식론으로 지칭할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칸트는 어떤 종류의 선입견도 없는 과학이라는 옹호될 수 없는 이상(理想)을 포기했다. (이 이상이 심지어 자기-모순적이라는 것이 다음 장에서 밝혀질 것이다.) ()로부터 시작할 수 없음과, 과학의 경험적 방법에 의하여 시험하지 않고 우리가 믿는 선입견의 체계를 지니고 우리의 과제에 우리가 접근해야 함을 그는 아주 분명히 했다; 그런 이론체계는 범주적 장치(categorial apparatus)’로 지칭될 것이다. 칸트는 진실하고 변하지 않는 한 가지 범주적 장치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그 범주적 장치는 말하자면 우리가 지닌 지적(知的) 장비에 관한 반드시 불변하는 구조를 의미하는데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이성(理性)’이다. 칸트가 주장하는 이론의 이 부분을 헤겔은 포기했는데, 그는 칸트와 반대로, 인류통합을 신뢰하지 않았다. 인간의 지적(知的) 장비는 부단히 변하며, 그 장비는 인간의 사회적 유산의 일부라고 그는 가르쳤다; 따라서 인간 이성의 발달은 인간사회의 역사적 발전, 다시 말해서 인간이 속한 민족의 역사적 발전과 틀림없이 일치한다. 헤겔의 이 이론과, 특히 모든 지식과 모든 진리는 역사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상대적이라는 그의 교설은, 때때로 전통적 역사주의(historism)’로 지칭된다 (앞 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역사결정론적 역사주의[historicism]’와 대조적으로). 지식사회학 즉, ‘사회학주의는 분명히 전통적 역사주의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거나 거의 동일하다. 유일한 차이점이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아서 역사발전이 헤겔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한 가지 획일적인 민족정신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데올로기 총체를 보유한 사람들의 계급이나 사회적 계층 혹은 사회적 서식처에 따라서 한 민족 내에 몇 가지 그리고 때때로 대립하는 이데올로기 총체를 낳는다고 전통적 역사주의가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과의 유사점은 더 깊다. 지식사회학에 따르면, 다양한 이데올로기 총체 사이의 지적(知的) 교량이나 타협이 가능하지 않다고 나는 위에서 말했다. 그러나 이 근본적 회의론은 들리는 것처럼 완전히 심각한 의미가 실제로 아니다. 그 회의론으로부터 탈출구가 있으며, 그 탈출구는 철학사에서 헤겔에 앞섰던, 갈등을 대체하는 헤겔식 방법과 유사하다. 불화(不和)하는 철학들의 소용돌이 위에서 자유롭게 균형을 잡았던 정신인 헤겔은 그 불화 모두를 자기 자신이 만든 이론체계인 종합의 최고 경지의 단순한 부품으로 환원시켰다. 유사하게, 사회적 전통 속에 오직 느슨하게 고정된 지식인의 자유롭게 균형 잡힌 지성은 이데올로기 총체의 함정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식사회학자들은 주장한다; 그 지성이 심지어 다양한 이데올로기 총체와 숨겨진 동기를,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 총체와 숨겨진 동기를 고취하는 다른 결정인자들을 통찰할 수 있고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지식사회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리하여 객관성의 최고도가 무의식 속에 있는 숨겨진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의 정착을 분석하는 자유롭게 균형 잡힌 지성에 의하여 도달될 수 있다고 지식사회학이 믿는다. 진정한 지식으로 가는 길은 무의식적 상정(想定)을 밝히는 것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치료이거나, 혹은 내가 그렇게 이름 붙인다면 사회적-치료(socio-therapy)이다. 사회적으로 분석된 사람, 혹은 자신을 사회적으로 분석한 사람과 이 사회적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사람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사회적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된 사람만이 객관적 지식의 최고 종합에 도달할 수 있다.

앞 장에서, ‘통속적 마르크스주의를 다루면서 나는 한 무리의 현대 철학 안에서 관찰될 수 있는 경향인 우리의 행동 뒤에 있는 숨겨진 동기를 폭로하는 경향을 언급했다. 지식사회학은, 정신분석 및 그 특정 철학에 반대하는 철학들의 신조가 무의미함을 밝히는 특정 철학들과 함께, 이 집단에 속한다. 이 견해들의 인기는, 그 견해들이 적용될 수 있는 용이함과, 사물을 통찰하며 계몽되지 못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통찰하는 사람들에게 그 견해들에 의하여 제공되는 만족에 놓여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 모든 관념들이 내가 강화된 독단주의로 지칭한 것을 설정함에 의하여 토론의 지적(知的) 토대를 파괴하기 쉽지 않다면, 이 즐거움은 해롭지 않을 터이다. (정말로, 이것은 이데올로기 총체와 다소 유사한 것이다.) 헤겔 학설은 모순의 수용가능성과 심지어 풍요로움을 선언함에 의하여 토론의 지적(知的) 토대를 파괴한다. 그러나 모순을 피할 필요가 없다면 비판과 토론이 불가능해지는데 그 이유는 비판의 본질이 항상 비판되는 이론의 내부의 모순이나, 혹은 그 이론과 경험적인 몇 가지 사실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에 관한 상황도 유사하다: 정신분석학자는 반론이 비판자를 억압하기 때문이라고 밝힘에 의하여 항상 반론을 설명해 치워버릴 수 있다. 그리고 의미를 다루는 철학자들은 다시 자신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지적할 필요만 있는데, 그것은 항상 사실일 것으로 왜냐하면 무의미함은 그렇게 정의될 수 있어서 무의미함에 대한 토론은 정의(定義)에 의하여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의 계급편견으로 적의 반론을 설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고, 지식사회학자들은 반대자의 이데올로기 총체로 반대자의 반론을 설명하는 데 익숙하다. 그런 방법들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그런 방법들은 다루기 쉽고 아주 재미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들로 인하여 합리적 토론의 토대가 분명히 파괴되며, 궁극적으로 틀림없이 반()-합리주의와 신비주의가 발생한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내가 이 방식들을 다루는 즐거움을 완전히 삼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유인즉 정신분석이 가장 잘 적용되는 사람들인 정신-분석가들과 꼭 마찬가지로, 사회분석가들은 자신의 방식을 자신에게 적용하기를 거의 억제할 수 없는 환대로써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전통에 느슨하게 고정된 지식인에 대한 그들의 서술이 그들 자신의 사회적 집단에 대한 매우 말끔한 서술이 아닌가?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 총체 이론이 옳다고 상정(想定)한다면, 자신의 그룹은 편견이 없었으며 그래서 진실로 홀로 객관성을 지닐 수 있는 선택된 사람들의 집단이었다고 믿는 것은 모든 이데올로기 총체의 한 부분이라는 것 또한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항상 이 이론의 진실성을 전제하여 그 이론을 지닌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닌 견해의 객관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이론에 수정을 가함에 의하여 자신들을 무의식적으로 기만할 것이 기대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자신들의 사회학적 자기-분석에 의하여 자신들이 더 높은 정도의 객관성에 도달했다는 그들의 주장을 우리가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회적 분석으로 인하여 이데올로기 총체가 추방될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을 우리가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전체 이론이 이 특정 집단의 계급 이해를 표현하는 것뿐이 아닌지 심지어 물을 수 있을 터이다; 헤겔의 말을 자신들의 모국어처럼 말하기에 충분히 단호할지라도, 전통에 오직 느슨하게 고정된 지식층의 계급 이해를 표현하는 것뿐이 아닌지.

우리가 헤겔에 대한 지식사회학자들의 관계를 고찰한다면 그들이 사회적- 치료에서, 다시 말해서 그들 자신의 이데올로기 총체를 제거하는 데서 얼마나 성공하지 못했는지가 특히 명백할 것이다. 이유인즉 자신들이 헤겔의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임을 그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은 헤겔보다 더 성장했을 뿐 아니라, 헤겔을 성공적으로 통찰했고 사회적으로 분석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제 특정 사회적 서식처로부터가 아니라, 우월한 지평으로부터 객관적으로 헤겔을 볼 수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자기-분석에서 이 뚜렷한 실패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모든 농담을 제쳐놓고, 보다 진지한 반론들이 있다. 지식사회학은 자기-파멸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분석의 다소 만족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 주요 주제인 지식의 사회적 측면, 즉 더 정확하게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 측면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충격을 또한 드러낸다. 그 사회학은 과학이나 지식을 개별 과학자의 생각이나 의식속의 한 과정으로서, 혹은 아마도 그런 과정의 산물로서 간주한다. 이런 방식으로 고찰되면, 소위 과학적 객관성이란 정말로 완전히 불가사의해지거나 심지어 불가능해진다; 게다가 계급 이해와 유사한 숨겨진 동기가 임무를 수행할 사회과학 혹은 정치과학에서뿐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동일하게 정확히 그만큼 그렇다. 자연과학사에 조금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과학에 관한 논쟁 중 많은 논쟁을 특징짓는 열정적인 고집을 의식하고 있다. 몇몇 자연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지적(知的) 자식을 옹호하여 표출하는 편파성은, 정치적 편파성의 어떤 정도가 정치이론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보다 더 지독하다. 지식사회학적 이론이 순진하게 상정(想定)하는 바와 같이 과학적 객관성이 개별 과학자의 불편부당성 즉, 객관성을 토대로 설정된다면, 우리는 그 과학적 객관성에 이별을 고해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는 틀림없이 지식사회학보다 어느 정도 더 근본적으로 회의적이다; 이유인즉 우리 모두가 편견으로 (혹은 이 용어가 선호된다면 이데올로기 총체’) 된 우리 자신의 이론체계 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많은 것이 자명하다고 생각한다는 것, 우리가 많은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심지어 비판이 아주 불필요하다는 순진하고도 오만하게 확신하는 믿음으로써 수용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특정 분야에서 자신들의 편견 몇 가지를 피상적으로 제거했을지라도 과학자들도 이 규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적-분석이나 유사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정화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념적 어리석음을 이해하고 사회적으로 분석하여 제거할 수 있는 더 높은 지평으로 오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유인즉 자신들의 생각을 보다 객관적으로 만듦에 의하여 그들은 소위 과학적 객관성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 이 용어에 의하여 우리가 보통 의미하는 것은 다른 토대에 놓여있다. 그것은 과학적 방법의 문제이다. 게다가 매우 역설적으로, 객관성은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 측면, 과학과 과학적 객관성은 개별 과학자가 객관적이 되려는 시도로부터가 귀결되는 (그리고 귀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의 호의적-적대적 협조로부터 생긴다는 (생길 수 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과학적 객관성은 과학적 방법에 관한 상호간-주관성으로서 기술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의 이 사회적 측면은 자신을 지식사회학자로 부르는 사람들에 의하여 거의 전적으로 무시된다.

자연과학의 방법에 관한 두 가지 측면은 이와 관련하여 중요성을 갖는다. 합쳐서 그것들은 내가 과학적 방법의 공공성이라고 칭하는 것을 구성한다. 첫째로, 자유 비판에 근접하는 것이 있다. 과학자는 공격받을 수 없다는 완벽한 신념으로 자신의 이론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동료 과학자와 경쟁자들에게 감명을 주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동료 과학자와 경쟁자들에게 도전한다: 그들은 과학적 자세가 모든 것을 비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알고 있어서 심지어 권위에 의해서도 제지당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과학자들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을 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는 독자들에게 내가 자연과학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현대 경제학의 일부가 포함될 것임을 상기시킬 것이다.) 그들은 다른 모국어를 사용할지라도 동일한 언어를 말하려고 매우 진지하게 노력한다. 자연과학에서 경험을 자신들의 논쟁에 관한 불편부당한 중재자로서 인정함에 의하여 이것이 성취된다. ‘경험에 관하여 말할 때, 보다 개인적인심미적이거나 종교적인 의미의 경험과 반대로, 관찰과 실험과 같은 공공적특성을 지닌 경험을 나는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경험은 모든 사람이 시도하여 반복할 수 있다면 공공적이다. 오해를 일으키는 말을 피하기 위하여, 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실험될 수 있는 형태로, 다시 말해서 그런 경험에 의하여 반증될 수 있도록 (혹은 입증될 수 있도록)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과학적 객관성이다. 과학이론을 이해하고 실험하는 기법을 터득한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그 실험을 반복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편파적이거나 심지어 기묘한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항상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고, 이로 인하여 과학적 객관성과 비판을 촉진하려고 고안되었던 다양한 사회제도의 작동이 심각하게 방해받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 사회제도는 실험실들, 과학정기간행물들, 학술회의들이다. 전문가 동아리에 국한될지라도 과학적 방법의 이 측면으로 인하여 공공적(公共的) 통제를 가능하도록 고안된 제도에 의하여, 그리고 여론의 공개적 표현에 의하여 무엇이 성취될 수 있는지가 밝혀진다. 오직 정치권력만이 자유 비판을 억누르는 데 사용될 때, 혹은 자유 비판을 보호하지 못할 때, 이 제도의 작동이 손상될 수 있는데 그 제도에 모든 과학적, 기술적(technological), 그리고 정치적 진보가 궁극적으로 달려있다.

이 유감스럽게 무시된 과학적 방법의 측면을 한층 더 명백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과학을 그 결과보다는 방법에 의하여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관념을 우리가 고찰할 것이다.

우선 천리안을 가진 사람이 꿈을 꿈에 의하여, 혹은 자동적인 글쓰기에 의하여 책을 펴낸다고 먼저 상정(想定)하자. 나아가 몇 년 뒤 새롭고 혁명적인 과학적 발견의 결과로서, 한 위대한 과학자가 (그 책을 본 적이 없는) 똑같은 책을 저술한다고 상정(想定)하자. 혹은 달리 표현해서, 관련된 많은 발견이 당시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과학자에 의하여 당시 발간될 수 없었던 과학서적을 천리안을 가진 사람이 보았다고 우리는 상정(想定)한다. 우리는 이제 묻는다: 천리안을 가진 사람이 과학서적을 저술했다고 말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당시 유능한 과학자들의 판단을 위하여 책이 제출되었다면, 그 책은 부분적으로 이해불가능하고 부분적으로 매력적이라고 기술되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상정(想定)한다; 그리하여 그 책은 과학적 방법의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에, 천리안을 가진 사람의 저작은 서술되었을 때 과학적 저작이 아니었다고,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결과물을, 몇 가지 과학적 결과와 일치할지라도 과학적 방법의 산물이 아니어서, ‘계시된 과학(revealed science)’의 한 편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고찰을 과학적 방법의 공공성 문제에 적용하기 위하여, 로빈슨 크루소가 자신의 섬에 물리 및 화학 실험실과 천문대, 기타 등등을 세워서 전적으로 관찰과 실험을 토대로 수많은 논문을 썼다고 상정(想定)하자. 심지어 그는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무한한 시간을 가지고 있고, 현대 우리들의 과학자에 의하여 수용된 결과와 실제로 일치하는 과학체계를 구축하여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고 상정(想定)하자. 이 크루소식 과학의 특징을 고찰하여, 어떤 사람들은 첫눈에 보고 이것은 실재적 과학이고 계시된 과학(revealed science)’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향을 지닐 것이다. 그래서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천리안을 가진 사람에게 계시된 과학서적보다 훨씬 더 많이 과학과 같은데, 그 까닭은 로빈슨 크루소가 많은 과학적 방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크루소식 과학이 여전히 계시된종류라고 주장한다; 과학적 방법의 한 요소가 빠져서 결과적으로 크루소가 우리 과학자들이 얻은 결과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천리안을 가진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의 우연적이고 기적적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이유인즉 자신이 얻은 결과를 검토할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고유한 정신적 편력의 불가피한 결과인 저 편견들을 교정할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 우리들이 얻은 결과들 대부분이 상대적으로 무관한 접근방식을 통하여 습득된다는 사실의 결과인, 우리 자신이 얻은 결과들의 내재적 가능성에 관한 저 고유한 맹목성을 제거하는 데 그를 도울 사람이 없다. 그래서 그의 과학적 논문에 관해서, 역시 과학적 방법의 한 부분인 명백하고 논리적으로 표현된 의사소통의 지침을 그가 습득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연구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저술을 설명하려는 시도에서뿐이다. 한 가지 요점에서 ㅡ 비교적 하찮은 점에서 ㅡ 크루소식 과학의 계시된특성은 특히 명백하다; 자신의 개인적 등식을 크루소가 발견한 것을 나는 의미하는데 (이유인즉 우리는 그가 이것을 발견했다고 상정[想定]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천문 관찰에 영향을 미치는 특징적인 개인적 반응시간의 발견이다. 물론 그가 가령, 자신의 반응시간 안에서 변화를 발견했다고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반응시간을 감안하게 되었다고 상상될 수 있다. 그러나 반응시간에 관하여 발견하는 이 방식을, 그것이 공공적과학에서 발견되던 ㅡ 다양한 관찰자가 얻은 결과들 사이의 모순을 통하여 ㅡ 방식과 우리가 비교한다면, 로빈슨 크루소의 과학이 지니는 계시된특성은 분명해진다.

이 고찰들을 요약하면, 소위 과학적 객관성은 개별 과학자들이 지니는 불편부당성의 산물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 혹은 공공적 특성의 산물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래서 개별 과학자의 불편부당성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 과학의 사회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조직된 이 객관성의 근원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이다.

칸트주의자들과 헤겔주의자 모두는 우리가 지닌 선입견들이 (그것들이 우선, 의심할 바 없이 경험을 우리가 능동적으로 만드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필수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결심에 의하여 변할 수도 없고 경험에 의하여 반증될 수도 없다고 전제하는 동일한 실수를 저지른다; 모든 사고(思考)의 기본적 선입견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입견들은 이론을 실험하는 과학적 방법을 초월한다고 전제하는 동일한 실수. 그러나 과학에서 이론과 경험 사이의 관계를 오해하는 데 근거하여, 이것은 과장이다. 아인슈타인이 경험에 비추어, 심지어 공간과 시간에 관하여 우리가 지닌 선입견들도 우리가 의문시하고 수정할 것임을 밝혔을 때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였다. 그 선입견들은 모든 과학의 필수적 선입견이라고 믿어지고 그 과학의 범주적 장치(categorial apparatus)’에 속한다고 믿어져왔던 관념들이었다. 그리하여 지식사회학에 의하여 과학에 가해진 회의적인 공격은 과학적 방법에 비추어서 무너진다. 경험적 방법은 스스로 완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편견을 모두 일시에 제거함에 의하여 경험적 방법이 스스로 완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험적 방법은 우리가 지닌 편견을 하나씩만 제거할 수 있다. 이 요점에서 고전적 경우가 다시 시간에 관한 우리의 편견을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편견을 발견하려고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비판하려고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가 지녔던 문제는 물리학의 구체적인 문제인데 이론에 비추어 서로 모순이 되는 듯했던 다양한 실험 때문에 무너졌던 이론을 다시 초안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대부분의 물리학자들과 함께 이것은 그 이론이 허위임을 의미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 의하여 당시까지 자명하다고 믿어져서 그리하여 주목을 피해갔던 요점에서 우리가 그 이론을 수정한다면 난제가 제거될 수 있음을 그는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과학적 비판과 이론의 창안 및 제거라는 방법인 시행착오라는 방법을 적용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인하여 우리가 지닌 모든 편견이 폐기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직 편견을 제거한 후에야 우리가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진 여하한 순간에도, 우리의 과학적 이론은 그 순간까지 이룩된 실험 기타 등등에 의존할 뿐 아니라, 당연시되는 편견에도 의존하여 (특정 논리적 방법의 적용이 우리가 그 편견을 탐지하는 데 도움을 줄지라도) 우리는 그 편견을 의식하지 못했음이 틀림없이 인정되어야 한다. 아무튼 이 외피(外皮)와 관련하여 과학은 그 외피의 얼마간을 배울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 과정은 완결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 과정이 앞에서 멈추어야 하는 고정된 장애물은 없다. 원칙적으로 여하한 상정(想定)도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구도 비판할 것임이 과학적 객관성이다.

과학적 결과는 그 결과가 과학적 발전의 특정 단계에 속하는 결과물이어서 과학적 진보과정에서 대체되기 쉬운 한에서만 상대적이다 (이 용어가 조금이라도 사용될 수 있다면). 그러나 이것이 진리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주장이 참이면 그 주장은 영원히 참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과학적 결과들에 가설의 특징, 다시 말해서 그 서술에 대하여 증거가 불확정적이어서 어느 때고 수정될 수 있는 서술의 특징이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이 고찰은 (내가 다른 곳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었다), 사회학자들을 비판하는 데 필요하지 않을지라도, 사회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는 데 아마도 도움을 줄 것이다. 나의 주요 비판으로 돌아와서 이 고찰로 인하여 또한, 과학적 비판과 과학적 진보에서 방법의 협력, 상호주관성, 그리고 공공성이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이 어느 정도 밝혀진다.

사회과학이 아직도 방법에 관한 이 공공성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지성을 파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영향 때문이고, 또한 부분적으로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사회적 도구를 그들이 이용하지 못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제로 이데올로기 총체인데, 혹은 다르게 표현하여, 몇몇 사회과학자는 공동의 언어로 말할 수 없고 심지어 그 언어로 말하려는 의지도 없다. 그러나 이유는 계급 이해가 아니며, 치료법은 헤겔의 변증법적 종합도 아니요, 자기-분석도 아니다. 사회과학에 열려있는 유일한 과정은 말장난에 관하여 완전히 잊고 우리 시대의 실제적 문제를 모든 과학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이론적 방법의 도움을 받아 다루는 것이다. 시행착오의 방법인 실제로 실험될 수 있는 가설을 고안하여 그 가설들은 실제적 시험에 부치는 방법을 나는 의미한다. 그 결과가 점진적 사회공학에 따라 시험될 수 있는 사회적 기술이 필요하다.

사회과학을 위하여 여기에 제시된 치료법은 지식사회학들에 의하여 제시된 치료법과 완전히 반대다. 이 과학들의 방법론적 난제를 야기하는 것은 그 과학들의 비실제적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적이고 이론적인 문제들이 사회적 및 정치적 지식 분야에서 너무 많이 얽혀있다는 사실이라고 사회학주의는 믿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식사회학에 관한 주요 저술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 ‘정치적 지식의 특이성은, “정확한지식과 반대로, 지식과 의지 혹은 합리적 요소와 비합리적인 것의 범위가 불가분하게 그리고 본질적으로 얽혀있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이것에 대하여 지식의지, 어떤 의미에서, 항상 불가분하다; 그리고 이 사실로 인하여 어떤 위험한 혼효(混淆)도 생길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답변할 수 있다. 어떤 과학자도 노력하지 않고, 흥미를 지니지 않고, 지식을 습득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의 노력에는 보통 심지어 특정 양의 자기-이익이 포함된다. 기술자는 주로 실용적 관점에서 사물을 연구한다. 농부도 마찬가지다. 실습은 이론적 지식의 적이 아니라 이론적 지식에 대한 가장 귀한 장려책이다. 어느 정도의 초연함이 과학자에게 어울릴 것이지만, 과학자가 그렇게 초연한 것이 항상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과학자가 현실과, 실습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유인즉 현실과 실습을 간과하는 과학자들은 학풍고집에 빠짐에 의하여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발견한 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과학으로부터 비합리주의를 제거할, 그리고 의지로부터 지식을 분리하려는 어떤 시도도 제거하지 않는, 수단이다.

이것과 반대로, 사회과학자들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힘과 이데올로기들을 의식하게 만듦에 의하여 사회과학의 개혁을 지식사회학은 희망한다. 그러나 편견에 관한 주요 골칫거리는 편견을 제거하는 그런 직접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어떻게 우리가 편견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제거하려는 노력에서 진보를 이룩했는지 알 수 있을까?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편견을 없앴다고 가장 확신했던 사람들이 가장 편견적이었던 것은 흔한 경험이 아닌가? 편견에 관한 사회학적이나 심리학적 혹은 인류학적 또는 다른 연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편견을 제거하는 데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 까닭은 이 연구들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편견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분석은 우리가 우리의 견해를 무의식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자주 자기-분석은 훨씬 더 미묘한 자기-기만(自己-欺瞞)을 초래한다. 그리하여 지식사회학에 관한 동일한 저술에서 그 자체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는 것을 우리가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지배를 당하던 요인들을 의식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 결정요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증가하면 우리의 결정이 마비될 것이고 자유가 위협당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걱정을 거두어야 한다. 이유인즉 가장 본질적인 결정요인은 알지 못하지만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은 결정인자의 압력을 받아서 즉각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이제 이것은 명백하게 엥겔스가 순진하게 복창한 헤겔이 애용하던 관념의 반복일 뿐이다: ‘자유는 필연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동적인 편견이다. 이유인즉 잘 알려진 결정인자의 압력 하에서, 예를 들어, 정치적 독재체제의 압력 하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지식에 의하여 자유롭게 되는가? 이기 때문이다. 헤겔만이 그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식사회학이 이 특정 편견을 보존한다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이데올로기를 제거하는 가능한 지름길이 없다는 것이 충분히 명백하게 밝혀진다. (한번 헤겔주의자이면 영원히 헤겔주의자.) 유일하게 비판적 사고의 자유를 그래서 과학의 진보를 보증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제도를 확립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저 실제적 행동인데, 자기-분석은 그 행동에 대한 대체물이 아니다.

 

 

 

 

 

24: 예언철학, 그리고 이성에 대한 반역

 

마르크스는 합리주의자였다. 소크라테스와 함께, 그리고 칸트와 함께 그는 인간의 이성을 인류통합의 토대로서 신뢰했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가 계급이해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그의 교설로 인하여 이 신뢰의 쇠퇴가 가속되었다. 우리의 관념들이 민족적 이해(利害)와 전통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헤겔의 교설처럼, 마르크스의 교설에도 이성에 대한 합리주의적 신뢰를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주의적 예언과 예언적 비합리주의가 직접적인 공격을 가해왔을 때, 우파와 좌파 양쪽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사회적 및 경제적 문제에 대한 합리주의적 태도는 저항할 수 없었다. 이것이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사이의 갈등이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지적(知的),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 도덕적 쟁점이 된 이유이다.

 

I

이성합리주의라는 용어가 모호하기 때문에, 그 용어들이 이곳에서 사용되는 방식을 개략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그 용어들은 넓은 의미에서 사용된다; 그 용어들은 지적(知的) 행동뿐 아니라, 관찰과 실험을 포함하여 사용된다. ‘이성합리주의비합리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경험론에 대한 반대로 다양하고 더 좁은 의미로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이 언급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사용된다면, 합리주의는 관찰과 실험보다 지성을 찬양하며, 그래서 아마도 지성주의(intellectualism)’로 더 잘 기술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합리주의를 언급할 때, 나는 그 단어를 항상 지성주의뿐 아니라 경험주의또한 포함하는 의미에서 사용한다; 과학이 사고(思考)뿐 아니라 실험 또한 이용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 둘째, 감정이나 열정의 도움을 받아서라기보다는, 이성 다시 말해서 명료한 사고(思考)와 경험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한 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개략적으로 지적하기 위하여 나는 합리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설명은 물론,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데 그 이유는 이성이나 열정같은 모든 용어들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특정 신체기관, 예를 들어, 뇌나 혹은 심장을 우리가 소유하는 의미로, 혹은 특정 기능예를 들어 말하는 능력 혹은 이빨을 부딪치는 능력을 우리가 소유하는 의미로 이성이나 열정을 우리는 소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금 더 정확해지기 위하여, 합리주의를 실제 태도나 행동을 통하여 설명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합리주의는 비판적 주장을 듣고 경험으로부터 배우려는 용의의 태도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터이다. 합리주의는 근본적으로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력하여 우리가 진실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를 수용하는 태도이다. 합리주의는 논증 및 세심한 관찰과 같은 그런 수단을 통하여 사람들이 많은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어떤 종류의 합의에 이를 것이라는 희망을 가볍게 포기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리고 심지어 사람들의 요구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곳에서도, 다양한 요구와 제안에 관하여 논증을 벌여, 그 공정성 때문에, 모두 사람은 아니라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수용될 수 있는 타협에 ㅡ 아마도 중재에 의하여 ㅡ 도달하는 것이 흔히 가능하다는 희망. 요컨대, 합리주의적 태도는, 혹은 내가 이름을 붙인다면 합리성의 태도(attitude of reasonableness)’, 과학적 태도와 매우 유사한데 진리탐색에서 우리에게 협조가 필요하며 논증의 도움으로써 우리가 조만간 객관성과 같은 중요한 것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과 매우 유사하다.

이 합리성의 태도와 과학적 태도 사이의 이 유사점을 더 충실하게 분석하면 다소 흥미롭다. 앞 장에서, 나는 과학적인 로빈슨 크루소라는 허구의 도움을 받아서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인 측면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정확하게 유사한 한 가지 고찰에 의하여, 지적(知的) 재능이나 영리함과 반대로 합리성의 사회적 특성이 밝혀질 수 있다. 언어처럼 이성은, 사회적 생활의 산물로 일컬어질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 같은 사람은 (매우 어린 시절에 버려진) 아마도 충분히 영리해서 많은 난관을 극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언어나 논쟁기법을 창안하지는 않을 터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주 논증한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과 논증하는 것을 배웠고, 이런 방식으로 논증하는 사람보다는 논증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배웠다는 이유로만 우리는 우리 자신과 논증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이 마지막 고찰은 물론, 우리가 우리 자신과 논증할 때,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닌 이성이, 우리의 언어와 같이, 다른 사람과의 교제에 기인한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합리주의적 태도가 논증하는 사람보다 논증 자체를 생각한다는 사실은 폭넓은 중요성을 띤다. 그 사실로 인하여, 우리가 함께 의사소통하는 모든 사람을 논증의 잠재적 근원으로서 그리고 합리적 정보의 잠재적 근원으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가 생긴다; 그리하여 그 사실로 인하여 인류의 합리적 통합으로 기술될 것이 확립된다.

어떤 정도로, 우리의 이성분석이 헤겔과 헤겔주의자들의 이성 분석과 다소 닮았다고 언급될 것인데, 그들은 이성을 사회적 산물로서 그리고 진정으로 사회의 (예를 들어, 민족이나 계급의) 영혼이나 정신의 부분 일종으로서 간주한다. 그들은 버크(Burke)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가 지닌 사회적 유산에 대하여 우리가 진 빚과 그 유산에 우리가 거의 전적으로 의존함을 그들은 강조한다. 약간의 유사점이 있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매우 상당한 차이점들 또한 존재한다. 헤겔과 헤겔주의자들은 집단주의자들이다. 우리가 사회에 ㅡ 혹은 민족과 같은 특정 사회에 ㅡ 우리의 이성을 빚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는 전부요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혹은 개인이 소유한 모든 가치가 모든 가치를 실제로 지닌 것인 집단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한다. 이것과 반대로, 이곳에 제시된 입장은 집단의 존재를 상정(想定)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성을 사회에 빚지고 있다고 내가 말한다면, 우리는 이성을 특정 구체적인 개인들에게 ㅡ 아마도 상당한 숫자의 익명의 개인들에게 일지라도 ㅡ 그리고 그들과의 지적(知的) 교류에, 우리가 빚지고 있음을 나는 항상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성에 관한 (혹은 과학적 방법에 관한) ‘사회적이론을 말하면서, 나는 더 정확하게 이론은 개인-상호적인 것임을 의미하며 이론이 집단주의적 이론이라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틀림없이 우리는 전통에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전통은 매우 중요하지만, ‘전통이라는 용어는 또한 분석되어 구체적인 개인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모든 전통을 성스러운 것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귀중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를 우리가 버릴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 그리고 전통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서, 귀중하거나 해롭다고 여기는 태도에 의하여 우리가 이 태도를 대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사례와 비판을 통하여) 그런 전통의 성장이나 억제에 기여할 것임을 우리는 깨달을 것이다.

여기서 채택된 입장은 이성을 일종의 기능으로서 보는 대중적이고 원래 플라톤적인 관점과 매우 다른데, 그 이성은 매우 다양한 정도들로 다양한 사람들에 의하여 소유되고 개발될 것이다. 지적(知的) 재능은 이런 정도로 다양할 것이고, 그 재능은 합리성에 기여할 것이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그 재능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영리한 사람은 매우 비이성적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견에 매달릴 것이고 타인으로부터 가치 있는 것을 들을 기대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에 따르면, 타인들로부터 우리의 이성이 기인할 뿐 아니라, 권위 소유를 확립할 정도로 우리들이 지닌 합리성에서 우리는 타인들을 결코 능가할 수 없다; 권위주의와 우리가 의미하는 합리주의는 타협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비판을 포함하는 논증과 비판을 청취하는 기법이 합리성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의미하는 이 합리주의는, 그 신세계 속에서 이성의 성장이 어떤 우세한 이성에 의하여 통제되거나 기획될 멋진 신세계에 대한 모든 현대적인 저 플라톤식 꿈과 완전히 반대된다. 과학처럼, 이성은 상호비판을 통하여 성장한다; 이성의 성장을 기획하는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이 비판의 자유를, 다시 말해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저 제도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이론이 권위적이어서 자신이 주장하는 수호자에게서 인간 이성의 성장을 엄격히 통제할 것을 요구할지라도 (특히 8장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신의 글 쓰는 방식에 의하여, 우리가 주장하는 인간-상호적 이성 이론에 경의를 표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이유인즉 그의 초기 대화 대부분이 매우 합리적인 정신으로 수행되는 논증을 기술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가 진정한 합리주의와 거짓 혹은 사이비-합리주의를 구분한다면, ‘합리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나의 방식이 조금 더 분명해질 것이다. 내가 진정한 합리주의로 부를 것은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이다.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 자신들이 얼마나 자주 잘못을 저지르는지 아는, 그리고 심지어 이 지식을 얻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이 자신들이 타인에게 의존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의 지적(知的) 겸손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성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이다; 논증이 습득을 ㅡ 분명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분명히 아는 것을 습득 ㅡ 위한 유일한 수단일지라도, 논증으로 인하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깨달음.

내가 사이비-합리주의로 부를 것은 플라톤의 지적(知的) 직관주의이다. 플라톤의 지적(知的) 직관주의는 비결을 알고 있다는 주장, 확신하여 그래서 권위적으로 안다는 것으로 사람의 우월한 지적(知的) 재능을 오만하게 믿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견해는 ㅡ 우리가 티마이오스(Timaeus)에서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심지어 진정한 견해(true opinion)’모든 인간들에 의하여 공유된다; 그러나 이성은’ (혹은 지적[知的] 직관) ‘()들에 의해서만, 극소수의 사람에 의해서만, 공유된다’. 이 권위적인 지성주의, 발견에 대한 무오류의 도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 믿음, 인간이 지닌 지적(知的) 능력과 인간이 아마도 알거나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관하여 인간이 타인에게 진 빚을 구분하지 못함, 이 사이비-합리주의는 간혹 합리주의로 불리지만, 우리가 이 명칭으로 부르는 것과 완전히 반대가 된다.

합리주의적 태도에 대한 나의 분석은 의심할 바 없이 매우 불완전하고, 다소 모호하다고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나의 분석은 우리의 목적에 충분할 것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나는 이제 동시에 어떻게 비합리주의자가 비합리주의를 옹호할 것인지를 지적하면서, 비합리주의를 기술하겠다.

비합리주의적 태도는 다음 노선을 따라서 전개될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피상적으로 다루기를 원한다면 충분히 잘 작동할 도구로서, 어떤 비합리적 목표에 부합할 수단으로서, 아마도 이성과 과학적 논증을 인정할지라도, 비합리주의자에게는 인간의 본성이 주로 합리적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사람은 합리적 동물 이상이기도 하고 또한 이하라고 비합리주의자는 주장한다. 인간이 합리주의자 이하라는 것을 알기 위하여, 논증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작은지를 고찰할 필요만 우리에게 있다; 비합리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닌 이성을 매혹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지닌 감정과 열정을 매혹해서 그들이 항상 취급되어야 할 이유가 이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또한 단순한 합리적 동물 이상인데 왜냐하면 사람의 삶에서 실제로 중요한 모든 것은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성과 과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극소수의 과학자도 그들이 지닌 합리주의적 태도를 사랑하기 때문에만 그들의 합리적 태도에 묶여 있다. 그리하여 심지어 이 드문 경우에서도, 인간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적 조합이지 인간의 이성이 아니다. 게다가,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은 그의 이성사용이라기보다는 그가 지닌 직관인 그가 지닌 사물의 본성에 대한 신비적 통찰이다. 그리하여 합리주의로 인하여 심지어 과학자의 표면적으로 합리적인 활동에 대해서도 적절한 해석이 제시될 수가 없다. 그러나 과학적 분야가 예외적으로 합리주의적 해석에 선호될 수 있기 때문에, 합리주의가 인간 활동의 다른 분야를 다루려고 할 때 훨씬 더 뚜렷하게 실패할 것이라고 우리가 기대해야 한다. 그리고 이 기대는 아주 정확한 것으로 판명된다고 비합리주의자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할 것이다. 인간본성의 하층 측면은 차치하고, 우리는 인간본성의 최고 측면 중 하나인 사람이 창조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것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사람의 작은 창조적 소수이다; 예술작품이나 사상을 창조하는 사람들, 종교 창시자들, 위대한 정치가들이다. 이 극소수의 예외적 개인들로 인하여 우리는 인간의 진정한 위대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인류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어떻게 이성을 사용할지 알지라도, 그들은 이성의 인간이 결코 아니다. 그들의 뿌리는 더 깊은 곳에 놓여있다 ㅡ 그들의 본능과 충동 속 깊이, 그리고 그들이 부분을 이루고 있는 사회의 본능과 충동에 놓여있다. 창조력은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신비적 능력이다...

 

II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사이의 쟁점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희랍철학이 의심할 바 없이 합리주의적 탐구로서 시작되었을지라도, 심지어 초창기에는 신비주의적 색채가 있었다. (10장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근본적으로 합리적인 접근방식 내부의 이 신비적 요소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잃어버린 종족주의의 통합과 종족주의 피난처에 대한 열망이다. 그리고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사이의 공개적 갈등이 처음으로 스콜라철학과 신비주의 사이의 대립으로서 중세에 발생했다. (‘야만국가 출신자들이 신비주의자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낸 반면, 합리주의가 이전 로마영토에서 번성했던 것은 아마도 흥미 없는 일은 아니다.) 합리주의의, 지성주의의 그리고 유물론의 조류가 밀려오던 17세기와 18세기 및 19세기에, 비합리주의자들은 그 조류를 주목해야 했고, 그 조류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야 했다; 그리고 그 조류의 한계를 들춤에 의하여, 그리고 사이비-합리주의의 (우리가 의미하는 바의 합리주의와 그들이 구분하지 않았던) 오만한 주장과 위험을 폭로함에 의하여, 이 비판자들 몇 명, 특히 버크(Burke)는 모든 진정한 합리주의자들로부터 감사표현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조류가 바꾸었고, ‘몹시 의미심장한 암시.. 그리고 풍자(칸트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당시의 유행이 되었다. 예언적 비합리주의로 인하여 합리주의자와 같은 열등한 존재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기껏해야 개탄하는 습관이 확립되었다 (특히 베르그송 및 대부분의 독일 철학자 그리고 지식인들에 의하여). 그들이 보기에 합리주의자들과 ㅡ 혹은 그들이 자주 말하는 바와 같이 유물론자들ㅡ 특히 합리주의적 과학자는, 정신이 빈곤하여 영혼이 없고 주로 기계적인 활동을 추구하며 인간의 운명과 그 운명에 대한 철학에 관한 더 깊은 문제를 완전히 의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합리주의자들은 보통 비합리주의를 완전한 헛소리로서 일축함에 의하여 응수한다. 이전에는 이 단절이 그렇게 철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철학자들의 사교적 관계의 단절로 인하여, 그 단절 후속으로 국가의 외교관계 단절이 왔을 때, 그 중요성이 증명되었다.

이 쟁점에서 나는 전적으로 합리주의 편을 든다. 이것은 매우 사실이어서 심지어 합리주의가 너무 멀리 갔다고 내가 느낄 때도 나는 여전히 합리주의를 동정하는데 그런 방향으로의 과도함은 (플라톤의 사이비-합리주의가 지닌 지적[知的] 오만을 우리가 배제한다면) 다른 방향으로의 과도함과 비교되어 진정으로 해롭지 않다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 나의 견해로 과도한 합리주의가 해롭다고 판명될 것 같은 유일한 방식은, 합리주의가 자기 자신의 입장을 약화시켜 비합리주의적 반발을 촉진하는 경향을 띠는 것이다. 과도한 합리주의의 주장을 더 세밀하게 조사하도록, 그리고 특정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하고 자기-비판적인 합리주의를 변호하도록 나를 이끄는 것은 이 위험뿐이다. 따라서 나는 다음에서 두 가지 합리주의적 입장을 구분하겠는데, 두 가지 합리주의적 견해에 나는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 ‘무비판적 합리주의(uncritical rationalism)’포괄적 합리주의(comprehensive rationalism)’라는 표찰을 붙인다. (비록 내가 의미하는 진정한합리주의가 비판적임 외에 다른 것이 아닐지라도, 이 구분은 진정한합리주의와 허위합리주의를 이전에 구분한 것과 별개이다.)

무비판적이나 포괄적 합리주의는 논증이나 경험으로써 방어될 수 없는 어떤 것도 나는 수용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태도로서 기술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논증에 의하여 혹은 경험에 의하여 지지될 수 없는 여하한 상정(想定)도 포기되어야 한다는 원칙의 형태로 또한 표현할 수 있다. 이제 이 무비판적 합리주의의 원칙이 모순적임을 알기 쉽다; 이유인즉 무비판적 합리주의가 반대로, 논증에 의해서 혹은 경험에 의해서 지지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그 합리주의 자체가 폐기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것은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다시 말해서 자체의 거짓됨을 주장하는 문장과 유사하다.) 무비판적 합리주의는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옹호될 수 없다; 그리고 순전히 논리적인 주장에 의하여 이것이 밝혀질 수 있기 때문에, 무비판적 합리주의는 그 자체가 선택한 무기인 논증에 의하여 패배를 당할 수 있다.

이 비판은 일반화될 것이다. 모든 주장은 상정(想定)으로부터 틀림없이 나아가기 때문에, 모든 상정(想定)이 논증에 근거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우리는 여하한 상정(想定)으로써 출발해서도 안 되고 충분한 이유에 관하여 어떤 것도 상정(想定)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많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된 요구사항과, 심지어 우리는 작은 수의 상정(想定)으로써 (‘범주: categories’) 시작해야 한다는 더 약한 주장도 양쪽 모두 이런 형식에서 모순적이다. 이유인즉 그 주장들 자체가 극소수의 상정(想定)을 지니거나 상정(想定)없이 출발하여 가치 있는 결과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는, 진정으로 거대한 상정(想定)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모든 상정[想定]을 피하는 이 원리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완벽의 충고가 아니라 거짓말쟁이의 역설의 한 형태이다.)

이제 이 모든 것은 다소 추상적이지만 그것은 덜 형식적인 방식으로 합리주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시 진술될 것이다. 합리주의적 태도는 그 태도가 논증과 경험에 부착하는 중요성에 의하여 특징된다. 그러나 논리적 논증이나 경험에 의해서도 합리주의적 태도가 확립될 수 없다; 이유인즉 논증과 경험을 고찰할 준비가 된, 그러므로 이런 태도를 이미 채택한 사람만, 논증과 경험에 의하여 깊이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논증이나 경험이 효과적이려면 합리주의적 태도가 먼저 채택되어야 하며, 그러므로 합리주의적 태도는 논증이나 경험에 근거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고찰은, 합리주의적 태도 채택을 선호하는 어떤 확신적인 합리적 논증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의 문제와 완전히 별개이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합리적 태도를 채택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합리적 주장도 합리적 효과를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러므로 포괄적 합리주의는 옹호될 수 없다.

그러나 합리주의적 태도를 채택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어떤 제안이나 결정 혹은 믿음이나 행동을 채택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이것이 의미한다; ‘비합리적으로 지칭될 채택이다. 이 채택이 잠정적이든 혹은 고착된 습관을 초래하든, 우리는 그 채택을 비합리적인 이성에 대한 신뢰로서 기술할 것이다. 그래서 합리주의는 반드시 포괄적이거나 자족적이 결코 아니다. 합리주의자들이 총애하는 무기를 비합리주의자들이 합리주의자들에게 겨냥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자신들을 자신들의 분야에서 패배에 노출시키는 합리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리고 그 합리주의자들이 총애하는 무기에 의하여 이것이 자주 간과되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모든 종류의 논증이든 혹은 특정 종류의 논증이든, 논증 수용을 사람들이 항상 거부할 수 있음을 합리주의의 몇몇 적들이 주목했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논리적으로 모순적이 되지 않고 단행될 수 있음을 합리주의의 몇몇 적들이 주목했다. 이로 인하여, 몇몇 합리주의의 적들은 합리주의가 자족적이어서 논증에 의하여 확립될 수 있다고 믿는 무비판적 합리주의자가 틀림없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합리주의는 무비판적 합리주의보다 논리적으로 우수하다고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비합리주의를 왜 채택하지 않는가? 합리주의자로서 출발하였지만 너무 포괄적인 합리주의는 스스로 패배하는 것을 발견하고 환멸을 느꼈던 많은 사람들은 정말 실제로 비합리주의에 굴복했다. (내가 완전히 틀리지 않다면, 이것이 화이트헤드[Whitehead]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그런 비합리적 행동은 전혀 바람직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무비판적이고 포괄적인 합리주의가 논리적으로 옹호될 수 없을지라도, 그리고 포괄적 비합리주의가 논리적으로 옹호를 받을 수 있을지라도, 이것이 우리가 후자를 채택해야 할 이유는 아니다. 이유인즉 다른 옹호될 수 있는 태도가 있기 때문인데 특히 근본적인 합리주의적 태도는 (적어도 잠정적인) 신념의 행동으로부터 ㅡ 이성에 대한 신념으로부터 ㅡ 귀결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비판적 합리주의의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은 열려있다. 우리는 어떤 형태의 비합리주의, 심지어 어떤 근본적이거나 포괄적인 형태를 선택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체의 근원이 비합리적 결정에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그리고, 저 정도까지, 비합리주의의 특정 우선순위를 인정하는) 비판적 합리주의의 형태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또한 우리에게 있다.

 

III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단순히 지적(知的) 사건, 혹은 기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5장의 의미에서) 도덕적 결정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어떤 다소 근본적 형태의 비합리주의 채택할 것인지, 혹은 내가 비판적 합리주의라고 부르는 저 비합리주의에 최소한도로 양보하는 것을 채택할 것인지의 문제는 타인을 향한, 그리고 사회생활의 문제를 향한 우리의 전체 태도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주의가 인류 통합에 대한 믿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이미 언급되었다. 비합리주의는, 일관성에 관한 여하한 규칙에도 구속되어있지 않은데, 인간의 형제애를 포함한 어떤 종류의 믿음과도 결합될 것이다; 그러나 비합리주의가 매우 다른 믿음과 쉽게 결합될 것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그리고 특히 비합리주의가 선택된 무리의 존재에 대한, 인간을 지도자와 피지도자로 분할하는 데 대한, 자연적인 주인과 자연적인 노예로 분할하는 데 대한 낭만적 믿음을 지지하는 데 수월하게 적당하다는 사실로 인하여 도덕적 결정이 비합리주의와 비판적 합리주의 사이의 선택에 관련됨이 명백하게 밝혀진다.

이전에 (5장에서), 그리고 이제 다시 무비판적 합리주의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서 우리가 안 바와 같이, 논증에 의하여 그런 근본적인 도덕적 판단이 결정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여하한 종류의 논증에 의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우리가 보다 추상적인 종류의 도덕적 결정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대안들 사이에서 귀결될 것 같은 결과들을 신중하게 분석하면 크게 도움이 된다. 그 까닭은 우리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이 결과들을 시각화할 수 있을 때만, 우리의 결정이 무엇에 관련되어 있는지를 우리가 실제로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맹목적으로 결정한다. 이 요점을 예시하기 위하여, 나는 쇼(Shaw)의 작품 성 조안(Saint Joan)에서 한 구절을 인용할 것이다. 화자(話者)는 목사이다; 그는 조안의 죽음을 고집스럽게 요구했다; 그러나 그가 화형대에 선 조안을 볼 때, 그는 무너진다: ‘나에게는 해를 입힐 의도가 없었다. 나는 이럴 줄 몰랐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다.. 내가 알았더라면, 나는 그녀를 그 사람들의 손에서 떼어놓았을 터이다. 당신들은 모른다. 당신들은 보지 못했다: 알지 못할 때 말하는 것은 매우 쉽다. 당신들은 말로써 당신들 자신을 미치게 만든다.. 그러나 당신들이 완전히 이해할 때; 당신들이 한 짓을 당신들이 볼 때; 당신의 눈을 멀게 하고 당신의 코를 질식시키고, 당신의 심장을 찢을 때, 그 때 ㅡ 그 때 ㅡ 오 하느님, 이 광경을 나로부터 거두소서!’ 물론, (Shaw)의 희곡에는 자신들이 하는 일을 정확하게 알았지만 그것을 하겠다고 결정한 다른 인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던 다른 인물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동료 인간이 화형대에서 불타는 것을 보기 싫어하고, 다른 사람들은 싫어하지 않는다. 이 요점은 (많은 빅토리아 시대의 낙관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시된) 중요한데 이유인즉 그 요점으로 인하여, 결정의 결과에 대한 합리적 분석에 의하여 그 결정이 합리적이 되지 않는다고 밝혀지기 때문이다; 결과로 인하여 우리의 판단이 결정되지 않는다; 결정하는 것은 항상 우리들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결과에 대한 분석과, 소위 우리들의 상상속에서 그 결과들이 명백하게 깨달아짐으로 인하여, 눈을 감고 내린 결정과 눈을 뜨고 내린 결정이 구별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상상력을 거의 사용하기 않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자주 맹목적으로 결정한다. (Shaw)의 표현을 사용해서, 우리 자신을 단어들로써 미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수단의 하나인 예언철학에 의하여 우리가 고취된다면 이것은 특히 그러하다.

도덕이론의 결과에 대한 합리적이고 상상적인 분석에는, 과학적 방법에서처럼 특정 유사점이 있다. 이유인즉 과학에서도 또한, 이론이 본질적으로 확신을 준다는 이유로 우리가 추상적인 이론을 수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히려, 실험에 의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저 결과들을 우리가 조사한 다음에 그 이론을 수용하거나 거부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과학이론의 경우, 우리의 결정은 실험의 결과들에 의존한다. 이 결과들에 의하여 이론이 확증되면, 나은 이론을 발견할 때까지 우리는 그 이론을 수용할 것이다. 그 결과들에 의하여 이론이 모순되면, 우리는 그 이론을 배척한다. 그러나 도덕이론의 경우, 우리는 다만 우리의 양심으로써 그 이론의 결과들과 대면할 수 있다. 그리고 실험의 판결이 우리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은 반면, 우리의 양심의 판결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어떤 의미에서 결과분석으로 인하여, 우리의 판단이 결정되지 않지만 우리의 판단이 영향을 받는지를 내가 명백하게 밝혔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리고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두 가지 대안인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의 결과를 제시하면서, 나는 편파적일 것임을 독자에게 경고한다. 지금까지, 우리 앞에 놓인 도덕적 결정의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면서 ㅡ 그 결정은 많은 의미에서, 윤리 분야에서 가장 근본적인 결정이다 ㅡ 내가 지닌 동정심을 숨기지 않았지만 나는 불편부당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 그리고 그것들에 의하여 나 자신이 비합리주의를 배격하고 이성에 대한 신뢰를 수용하는 데 영향을 받은, 두 가지 대안들의 결과들에 대한 저 고찰을 제시할 예정이다.

우선 비합리주의의 결과를 검토하자. 비합리주의자는 이성보다는 감정과 열정이 인간 행동의 동기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치료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며, 우리는 가능한 한 큰 역할을 이성이 하도록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합리주의자의 답변에, 비합리주의자는 이 태도가 절망적으로 비현실적이라고 (비합리주의자가 토론에 응한다면) 답변할 터이다. 이유인즉 이 합리주의자의 태도가 인간 본성의 취약점인 대부분의 인간들이 지닌 허약한 지적(知的) 속성과 그 인간들이 지닌 감정과 열정에 대한 의존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과 열정에 대한 이 비합리적 강조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내가 범죄로서 오직 기술할 수 있는 것이 발생한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신념이다. 이 견해에 대한 한 가지 이유는 이 태도가 기껏해야 인간의 비합리적 본성을 향한 유보적 태도이고 최악으로 인간 이성에 대한 멸시인데, 그 태도로 인하여 틀림없이 어떤 논쟁에서도 궁극적인 중재자로서 폭력과 잔인한 힘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논쟁이 발생하면, 원칙적으로 논쟁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보다 건설적인 저 감정들과 열정들인 존경, 사랑, 공동의 대의에 대한 헌신, 기타 등등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이것이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르면서 덜 건설적인 감정들과 열정들인 공포, 증오, 질시 그리고 궁극적으로 폭력에 의존하는 것을 제외하고 비합리주의자에게 무엇이 남는가? 이 경향은, 비합리주의에 역시 내재한 또 다른 그리고 아마도 훨씬 더 중요한 태도, 즉 인간의 불평등성에 대한 강조에 의하여 매우 크게 강화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 개인은 물론, 우리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처럼, 매우 많은 측면에서 매우 불평등하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또한 이 불평등이 매우 중요하며 심지어 많은 측면에서 고도로 바람직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량생산과 집단화의 발전이, 인간의 불평등과 개성을 파괴함에 의하여 인간에게 반응할 것이라는 우려는 우리 시대의 악몽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인간을, 특히 정치적 쟁점에서, 평등한 사람들로서 혹은 가능한 한 많이 평등한 사람들로서 취급하기로 결정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와 관계가 없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평등한 권리를 소유한 것으로서 그리고 평등한 대우에 대한 평등한 주장으로서;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정치적 제도를 거기에 따라서 구축해야 하는지의 문제와 관계가 없다. ‘법 앞에서의 평등사실이 아니라 도덕적 결정에 근거한 정치적 요구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이론과 ㅡ 아마도 거짓인 ㅡ 완전히 별개이다. 불편부당성에 관한 이 인도주의적 태도를 채택하는 것이, 합리주의를 선호하여 결정하는 직접적인 결과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의도가 이제 나에게 없다. 그러나 불편부당성을 향한 경향은 합리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합리주의적 신조로부터 배제될 수 없다. 다시, 비합리주의자가 평등주의적이거나 불편부당한 자세를 일관적으로 채택할 수 없을 터라고 말하려는 의도가 나에게 없다; 그리고 비합리주의자가 일관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을지라도, 그가 반드시 일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합리주의적 태도가 평등주의에 반대되는 태도와 얽히게 됨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정말로 강조하고 싶다. 이 사실은 비합리주의가 감정과 열정을 강조함과 관련되어 있다; 이유인즉 우리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우리 모두는 사람을 우리에게 가까운 사람과 우리로부터 먼 사람으로 나눈다. 인류를 친구와 적으로 나누는 것은 매우 명백한 감정적 분할이다; 그리고 이 분할은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계명에서 심지어 인정된다. 심지어 실제로 이 계명에 따라서 사는 최고의 기독교도도 (‘유물론자무신론자를 향한 평균적인 훌륭한 기독교도의 태도에 의하여 밝혀지는 바와 같이 많지 않다), 심지어 그 기독교도도 모든 사람에 대하여 동등한 사랑을 느낄 수는 없다. 우리는 실제로 추상적으로사랑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심지어 우리가 지닌 최고의 감정인 사랑 그리고 자비심에는 단지 인류를 다양한 범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낮은 단계의 감정과 열정에 의존한다면 더 사실적일 것이다. 우리의 자연스런반응은 인류를 친구와 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리라; 우리 종족에, 우리의 정서적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과, 그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로 구분하는 것; 신자(信者)와 불신자(不信者)로 구분하는 것; 동포와 외국인으로 구분하는 것; 계급 동지와 계급 적()으로 구분하는 것; 그리고 지도자와 피지도자로 구분하는 것.

우리의 사고(思考)와 견해가 우리의 계급 상황에, 혹은 우리의 민족적 이해관계에 달려있다는 이론으로 인하여 틀림없이 비합리주의가 발생한다고 나는 이전에 언급했다. 이제 나는 그 반대 또한 진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합리주의적 태도 포기, 이성과 논증 및 다른 사람의 관점에 대한 존중 포기, 인간 본성의 더 깊은층에 대한 강조,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사고(思考)란 단지 이 비합리적인 심층부 속에 놓여있는 것을 다소 피상적으로 표명하는 것이라는 관점이 틀림없이 생긴다. 그로 인하여 틀림없이 거의 항상 그의 사고(思考) 대신에 사고가(思考家)인 사람을 고찰하는 태도가 생긴다고 나는 믿는다. 그로 인하여 틀림없이 우리는 우리의 혈통으로써 생각한다’, 혹은 우리의 민족적 유산으로써 생각한다’, 혹은 우리 계급으로써 생각한다는 믿음이 발생한다. 이 관점은 유물론적 형태나 고도로 정신적인 양상으로 제시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인종으로써 생각한다는 관념은 아마도 하느님의 은총으로써 생각하는선택되거나 영감을 받은 관념에 의하여 대체될 것이다. 도덕적 근거로써, 나는 이 차별에 의하여 감동받기를 거부한다; 그 까닭은 지적(知的)으로 오만한 이 모든 견해들 사이의 결정적인 유사점은 그 견해들이 사고(思考)를 그 자체의 장점에 근거하여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성을 배격함에 의하여, 그 견해들은 인류를 친구와 적으로 구분한다; ()들과 함께 이성에 참여하는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로 (플라톤이 말하는 바와 같이); 가까이 있는 소수와 멀리 있는 다수로; 우리 자신의 감정과 열정을 번역될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과 우리의 언어가 아닌 언어를 지닌 사람들로. 우리가 이 짓을 하자마자, 정치적인 평등주의는 실제로 불가능해진다.

이제 정치적 생활에서,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힘과 관련된 문제의 분야에서, ()-평등주의적 태도를 채택하는 것은 내가 범죄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일 뿐이다. 이유인즉 그 채택으로 인하여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이 다양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태도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주인은 노예를 예속화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태도;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의 도구로서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태도. 궁극적으로 그 채택은, 플라톤에게서와 같이, 살인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비합리주의자들이 있다는 사실과, 모든 형태의 비합리주의가 범죄성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 지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증오에 의하여 통치하는 사람들을 위한 길을 열어놓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소크라테스가 논증을 불신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사람을 불신하거나 증오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자신이 제안했을 때, 이런 점을 알았다고 나는 믿는다.) 이 관련성을 즉각 알지 못하는 사람들인, 감정적 사랑에 의한 직접적 통치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사랑과 같은 것에 의하여 틀림없이 불편부당성이 촉진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랑에 의하여 갈등이 없어지지도 못한다. 사랑과 같은 것에 의하여 갈등이 해소될 수 없을 것임은 해롭지 않은 시험 사례를 고찰함에 의하여 밝혀질 수 있는데, 그 사례는 보다 심각한 사례의 대표적 사례로서 수용될 것이다. 톰은 극장을 좋아하고 딕은 춤추기를 좋아한다. 딕은 톰을 위하여 극장에 가기를 원하는 반면, 톰은 무도회에 가기를 사랑스럽게 주장한다. 이 갈등은 사랑에 의하여 해소될 수 없다; 오히려, 사랑이 커질수록 갈등이 커질 것이다. 단지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하나는 감정의 사용인데 궁극적으로 폭력의 사용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의 사용이자 불편부당성의 사용이며 이성적 타협의 사용이다. 이 모든 것에는 내가 사랑과 증오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나, 삶은 사랑 없이도 살 가치가 있으리라고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의도가 없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기독교적 관념이 순전히 감정적 방식으로 의미되는 것이 아님을 나는 인정할 준비가 철저히 되어있다.) 그러나 어떤 감정도, 심지어 사랑도 이성에 의하여 통제되는 제도의 지배를 대체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것은 물론, 사랑의 지배라는 관념에 반대하는 유일한 논증이 아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를 행복하게 만들려는 소망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내린 사랑의 정의[定義]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적 이상(理想) 중에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이상이 아마도 가장 위험한 이상이다. 그 이상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지닌 더 높은가치 척도를 다른 사람에게 부과하려는 시도가 변함없이 발생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그 이상으로 인하여 유토피아주의와 낭만주의가 생긴다. 우리 모두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꿈으로 된 아름답고 완벽한 공동체 속에서 행복하리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지구상에 천국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내가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9장에서), 지구상에 천국을 만들려는 시도로 인하여 변함없이 지옥이 출현한다. 그 시도에 의하여 불관용이 생긴다. 그 시도로 인하여 종교전쟁과, 종교재판을 통한 영혼구원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시도는 우리가 지닌 도덕적 의무를 완전히 오해하는 데 근거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나 타인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런 우호적 의도를 지닌 그 사람들의 개인생활을 우리가 침범하는 것을 이것이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돌볼 권한은 그들의 친구라는 가까운 무리에 국한된 특권으로 여겨져야 하는 반면 고통에 대항하는 싸움은 의무로 여겨져야 한다는 판단과, 점진적 (유토피아적과 반대로) 방법에 대한 정치적 요구가 일치한다. 친구들의 경우에, 우리는 아마도 우리의 가치 척도를 ㅡ 예를 들어, 음악에 관한 우리의 선호를 ㅡ 부과하려고 노력할 특정 권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에 그렇게 많이 기여할 수 있다고 우리가 믿는 가치의 세상을 그들에게 열어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느끼기조차 할 것이다.) 우리가 지닌 이 권리는 그 사람들이 우리를 배척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그리고 그 이유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정이 끝장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치 척도를 타인들에게 부과하는 정치적 수단의 사용은 매우 다른 문제이다. 아픔, 고통, 불의(不義), 그리고 이것들의 예방, 이런 것들은 공중도덕의 영원한 문제이며, 공공 정책의 의제이다 (벤담[Bentham]이 말했을 바와 같이). ‘더 높은가치는 거의 대부분 ()-의제로서 간주되어서, 자유방임의 영역에 남겨져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여러분의 적을 도우라; 그들이 당신을 증오할지라도 고민에 쌓인 사람들을 도우라; 그러나 여러분의 친구들만을 사랑하라.

이것은 비합리주의에 반대하는 경우의, 나로 하여금 그 반대 태도 다시 말해서 비판적 합리주의를 채택하도록 이끌었던 결과들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논증과 경험을 강조하는 이 후자의 태도는, ‘내가 틀릴지도 모르고 당신이 옳을지도 모르며, 노력하여 우리는 진실에 더 다가갈 것이다라는 그 방안과 함께, 이전에 언급된 바와 같이 과학적 태도와 밀접하다. 그 태도는 모든 사람이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는 관념과 연관되어 있는데, 그 관념은 본인에 의하여 혹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혹은 다른 사람들의 비판의 도움을 받아서 본인에 의하여 발견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태도로 인하여 누구도 자기 자신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이 제시되고 불편부당성에 대한 관념이 제시된다. (이것은 앞 장에서 분석된 바와 같은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태도가 지닌 이성에 대한 신뢰는 우리 자신의 이성에 대한 신뢰일 뿐 아니라, 또한 ㅡ 그리고 훨씬 더 ㅡ 다른 사람이 지닌 이성에 대한 신뢰이다. 그리하여 합리주의자는, 자신이 지적(知的)으로 타인들보다 우월하다고 믿을지라도, 권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거부할 것인데 왜냐하면 자신의 지성이 타인들의 지성보다도 우월하다면 (이것은 자신이 판단하기 어렵다) 자신과 타인들의 실수로부터 뿐 아니라 비판으로부터 자신이 배울 수 있는 한에서만 그렇다는 것을 의식하고, 이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는 조건으로만 사람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에게도 그의 말이 경청될 권리와, 그의 주장이 옹호될 권리가 있다는 관념과 합리주의가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합리주의는, 적어도 스스로 불관용적이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관용 요구를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주장을 먼저 듣는 태도를 채택할 때 그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칸트는 황금률을 이성이라는 관념에 근거했을 때 옳았다. 확실히, 어떤 윤리적 원칙의 옳음을 증명한다는 것, 혹은 심지어 우리가 과학적 진술을 지지하여 우리가 주장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윤리적 원칙을 지지하여 주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윤리는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윤리에 대한 합리적인 과학적 토대는 없을지라도, 과학에 대한 그리고 합리주의에 대한 윤리적 토대는 있다.) 또한 불편부당이라는 관념으로 인하여 책임이라는 관념이 발생한다; 우리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 응답해야 할, 답변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합리주의는 비판의 자유, 사상의 자유, 그리고 그리하여 인간의 자유를 보호할 사회제도들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합리주의에 의하여, 이 제도들을 뒷받침하는 도덕적 의무 같은 것이 확립된다. 이것이 합리주의가, 자유에 대한 계획세우기 위하여 그리고 이성에 의하여 자유를 통제하기 위하여 사회의 합리화를 요구하며, 인도주의적 의미에서 실용적인 사회공학에 ㅡ 물론, 점진적 공학 ㅡ 대한 정치적 요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이유이다; ‘과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플라톤적 사이비-합리적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체의 한계를 깨달아서 그리하여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을 강요하려고 ㅡ 심지어 행복으로도 ㅡ 열망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적 이성에 의하여 자유를 통제하기 위하여. 게다가 합리주의를 채택함은 의사소통과 관련한 공동의 매체인 이성이라는 공동의 언어가 있음을 의미한다; 합리주의를 채택함에 의하여 저 언어를 향한 도덕적 의무 같은 것인 그 언어의 명료성 기준을 유지하고 그 언어의 기능을 논증의 수단으로서 보유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할 의무가 확립된다. 다시 말해서, 그 언어를 분명하게 사용하는 것; 그 언어를, 우리들의 교육자 대부분이 쓰는 사악한 낭만적 횡설수설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자기-표현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합리적 의사소통의 도구인 중요한 정보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 (그 횡설수설이, ‘이성에 관한 헤겔의 집단주의를 감정에 관한 과도한 개인주의와 결합시키는 것은 현대 낭만적 발작증상의 특징이다; 그리하여 의사소통 대신에 자기-표현의 수단으로서 언어를 강조한다. 물론 양쪽 태도 모두는 이성에 대한 반역의 일부이다.) 그리고 합리주의를 채택함으로 인하여 우리들의 다양한 모국어가 합리적인 한, 서로 번역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인류가 통합되어 있음이 인정된다. 합리주의를 채택함으로 인하여 인간 이성의 통합이 인정된다.

보통 상상력이라고 지칭되는 것을 사용할 준비된 태도에 대한, 합리주의적 태도의 관계에 관하여 몇 가지 언급이 추가될 것이다. 상상력은 감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비합리주의와도 긴밀하다고, 그리고 합리주의에는 오히려 상상적이지 않은 무미건조한 학풍고집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자주 상정(想定)된다. 나는 그런 관점에 어떤 심리학적 토대가 있는지 알지 못해서 오히려 그 관점을 의심한다. 그러나 나의 흥미는 심리학적이라기보다는 제도적이어서, 제도적 관점에서 (방법적 관점에서 뿐 아니라) 고찰하면, 비합리주의에 틀림없이 상상력 사용을 위축시키는 경향이 있는 반면 합리주의는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상력 사용을 틀림없이 격려하는 듯이 보인다. 비합리주의가 틀림없이 독단주의로 향하는 반면 (독단주의에는 논증이 없고, 전부 수용이나 전부 거부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것이 없다), 합리주의가 비판적이라는 바로 그 사실은 다음 방향으로 통한다. 독단주의는 상상력을 억압하는 반면, 비판은 항상 어느 정도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유사하게, 과학적 탐구와 기술적(technical) 건설과 발명은 상상력을 상당히 많이 사용하지 않고는 구상될 수 없다; 사람은 이 분야들에서 (인상적인 단어들이 끝없는 반복되어 그 단어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 듯이 보이는 예언철학 분야와 반대로) 틀림없이 새로운 것을 제공한다. 적어도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평등주의와 불편부당성의 실제 적용에서 상상력이 수행하는 역할이다. ‘내가 틀렸고 당신이 옳은지도 모른다는 합리주의자의 기본적 태도로 인하여, 실제로 그 태도가 사용될 때 그리고 인간의 갈등이 포함될 때, 우리가 지닌 상상력의 실제 노력이 요구된다. 사랑의 감정과 동정심의 감정으로 인하여 때때로 유사한 노력이 발생할 것임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도 나에게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우리의 돕는 능력이나 바로 이 감정들의 강도가 궁극적으로 파괴될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상력의 뒷받침을 받는 이성의 덕택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인 우리가 결코 보지 못할 사람들이 우리 자신과 같다는 것과, 그들 서로의 관계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같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추상적인 인류 전체를 향한 직접적인 감정적 자세는 내가 보기에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개인들 안에서만 인류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고(思考)와 상상력을 사용함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도울 준비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고찰로 인하여 합리주의와 인도주의 사이의 연관성이 매우 긴밀하다는 것과, 틀림없이 비합리주의가 반()-평등주의 및 반()-인도주의적 자세와 상응하게 얽혀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긴밀하다는 것이 밝혀진다고 나는 믿는다. 가능한 한 멀리 이 결과가 경험에 의하여 입증된다고 나는 믿는다. 합리주의적 태도는 기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이며 인도주의적인 관점과 결합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비합리주의가 흔히 인도주의와 또한 결합될지라도, 대부분의 경우에 적어도 기술된 반()-평등주의적 경향 몇 가지를 드러낸다. 내가 주장하는 요점은 후자의 결합이 결코 확고하지 않다는 것이다.

 

IV

내가 실행하는 대로 내가 결정하도록 만들었던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의 저 결과들을 나는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이 결정이 주로 도덕적 결정이었음을 나는 반복해서 말하고 싶다. 그것은 논증을 진지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결정이다. 이것은 그 두 가지 관점 사이의 차이점이다; 이유인즉 비합리주의 또한 이성을 사용하지만, 어떤 의무감도 없기 때문이다; 비합리주의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성을 사용하거나 배격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도덕적으로 올바르다고 간주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우리가 타인들과 우리 자신들을 합리적인 존재로서 대우하는 것이 타인들에게 기인함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나는 믿는다.

이런 방식으로 고찰되면, 비합리주의에 대한 나의 반격은 도덕적 공격이다. 우리의 합리주의가 자신의 취향에 너무 진부한 것이라고 아는, 그리고 최신의 내밀한 지적(知的) 유행을 탐색하는 지식인은, 그 유행을 중세의 신비주의를 찬양하는 데서 발견하는데, 동료 인간들에게 자신의 의무를 실행하지 않고 있다고 사람들은 우려한다. 그는 자신과 자신이 지닌 미묘한 취향이 우리의 과학적 시대보다, 그 어리석은 노동 분업과 그 분업의 기계화물질화를 심지어 인간의 사고(思考) 분야까지 운반하는 산업화의 시대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에 내재한 도덕적 힘을 자신이 평가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음을 그는 드러낼 따름이다. 내가 공격하는 태도는 아마도 내가 A. 켈러(Keller)에게서 가져오는 다음 구절에 의하여 예시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과학에 대한 이 낭만적 적대감의 전형적 표현인 구절: ‘인간의 영혼이 자체의 신비롭고도 종교적인 능력을 되찾고 있으며, 새로운 신화를 창조함에 의하여, 삶의 물질화와 기계화에 대하여 항의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를 우리는 시작하고 있는 듯하다. 정신은 기술자로서, 운전수로서 인류에 봉사해야 했을 때 고통을 당했다; 정신은, 지식적 지혜 및 과학적 프로그램만큼 완전히 현명하고 신뢰성이 있어 보이지만 지식적 지혜와 과학적 프로그램보다 더 영감을 주며 자극적으로 보이는 꿈의 명령과 지도력에 복종하면서, 시인과 예언자로서 다시 깨어나고 있다. 혁명의 신화는 부르주아 사회와 낡고 맥빠진 문화의 상상력이 없는 진부성과 자기만족적 자족(自足)에 대항하는 반발이다. 혁명의 신화는 모든 안전성을 상실하여, 구체적인 사실 대신 꿈을 시작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험이다.’ 이 구절을 분석하면서, 나는 먼저 그러나 다만 개괄적으로, 그 구절이 지닌 전형적인 역사주의적 특징과 그 구절의 도덕미래주의를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낡고 맥빠진’, 등등) 환기시키고 싶다. 그러나 심지어 그 구절이 사용하는 단어-마술의 기교를 깨닫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구절이 말하는 바가 사실인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 생활의 물질화와 기계화에 대하여 항의한다는 것, 우리의 영혼이 중세기를 특징짓는 굶주림과 질병을 통한 무수한 고통에 대한 싸움에서 우리가 이룩한 진보에 대하여 항의한다는 것은 사실인가? 정신이 기술자로서 인류에 봉사해야 했을 때 고통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며, 정신은 농노(農奴)나 노예로서 일하는 것이 더 행복했을까? 순전히 기계적인 작업이라는,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노동자의 창조력을 파괴하는 고역이라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폄하할 의도가 나에게 없다; 그러나 유일하게 실제적인 희망은, 노예제도와 농노제도에로의 회귀가 아니라, 기계류로 하여금 이 기계적인 고역을 떠맡도록 하는 데 달려있다. 생산성 증대가 노동의 인간화라는 희망 그리고 노동일(勞動日)을 추가로 감축하는 유일하게 합당한 희망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마르크스는 옳았다. (게다가, 정신이 기술자로서 인류에 봉사해야 할 때 항상 고통을 겪는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주 흔히, 훌륭한 발명가과 훌륭한 과학자를 포함하는 기술자들이 그 봉사를 오히려 즐겼으며, 그들도 꼭 신비주의자만큼 모험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동시대 예언자들, 몽상가들, 그리고 지도자들이 꾼 것과 같은 꿈의 명령과 지도력이 실제로 지식적 지혜와 과학적 프로그램과 완전히 동일하게 현명하고 신뢰될 수있다고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마주하고 있는지를 더 분명히 알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혁명의 신화에게로 돌아설 필요만 있다. 혁명의 신화는 종족의 해체에 의하여 그리고 문명의 긴장에 의하여 초래된 낭만적인 발작증상과 근본주의의 전형적인 발로이다 (내가 10장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기독교적 책임의 대체물로서 신화창조를 권유하는 이런 종류의 기독교는 종족적 기독교이다. 그것은 인간적이 되는 십자가 지니기를 거부하는 기독교이다. 이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라! 깨닫지도 못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종족주의의 잃어버린 통합이다. 그리고 그 거짓 예언가들이 옹호하는 닫힌사회로의 회귀는 새둥지로의, 그리고 야수들로의 회귀다.

이런 종류의 낭만주의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그런 비판에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지 고찰하면 유용할 것이다. 논증은 제시되지 않을 것이다; 합리주의자와 그렇게 깊은 문제를 토론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장 개연성이 있는 반응은, 위압적인 태도로 물러서는 것이리라. 영혼들이 아직 자체의 신비적인 능력을 되찾지못한 사람들과 영혼들이 그런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언어가 없다는 주장과 결합된, 위압적인 태도로 물러서는 것이리라. 이제 이 반응은, 반대자들의 주장에 답변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대자들의 억압 때문에 반대자들이 정신분석을 수용할 수 없다고 지적함에 의하여 자신의 반대자들을 무찌르는 정신분석가의 반응과 유사하다 (앞 장에서 언급되었다). 그 반응은 또한 자신의 반대자들이 자기들의 이데올로기 총체 때문에 지식사회학을 수용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사회분석가의 반응과 비슷하다. 내가 이전에 인정한 바와 같이, 이 방식은 그 방식을 써먹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재밋거리다. 그러나 그 방식으로 인하여 인간을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로 비합리적으로 분할하는 일이 틀림없이 발생할 것을 우리가 여기서 보다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이 분할은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지만 모하메드교, 기독교, 혹은 합리적인 신앙에서 비교적 해롭지 않으며, 그 종교들 모두는 모든 사람에게서 잠재적인 개종자를 보며, 동일한 것이 정신-분석에 대해서도 언급될 것인데 정신-분석은 모든 사람에게서 잠재적 치료 대상을 본다 (마지막의 경우에 치료비용이 심각한 걸림돌이 된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식사회학으로 나아갈 때 그 분할은 점점 더 해로워진다. 사회분석가는 특정 지식인들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총체를 없앨 수 있어서 자신들의 계급으로써 생각하기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잠재적인 합리적 통합이라는 관념을 포기하여 자신을 완전히 비합리주의에 맡겨버린다. 그리고 이 우리가 이 이론의 생물학적 혹은 자연주의적 설명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혈통으로써 생각한다나 우리는 우리의 인종으로써생각한다는 종족적 교설로 나아갈 때, 이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된다. 그러나 더 미묘하기 때문에 적어도 동등하게 위험한 것은 종교적 신비주의의 옷을 입고 나타날 때의 동일한 관념이다; 시인이나 음악가의 신비주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고(思考)는 특별한 은총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지 못한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스스로 확신하여 자신의 추종자들을 설득하는 헤겔화하는 지성주의자들과, 그리하여 자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사고한다고 주장하는 헤겔화하는 지성주의자들의 신비주의로 나타난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부드럽게 암시하는 이 주장이자 인류의 잠재적인 정신적 통합에 대한 이 공격은, 그것이 스스로를 겸손하며 경건하고 기도교적이라 믿는 만큼 오만하고 불경스러우며 반()-기독교적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다.

꿈속으로 도피하는 신비주의의 지적(知的) 무책임 그리고 허장성세 속으로 도피하는 예언철학의 지적(知的) 무책임과 반대로, 현대 과학은 우리의 지성에게 실제적 실험이라는 규율을 부과한다. 과학이론은 그 이론의 실제적 결과에 의하여 시험될 수 있다. 과학자는 자신의 분야에서, 자기가 말하는 것에 책임을 진다; 여러분은 과학자가 거두는 열매에 의하여 과학자를 알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 과학자를 거짓 예언자와 구분할 수 있다. 과학의 이 측면을 알아보았던 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 기독교 철학자 J. 맥머레이(Macmurray)이다 (다음 장에서 밝혀질 것과 같이, 역사관련 예언에 관한 그의 견해에 나는 크게 동의하지 않는다): ‘과학 자체는, 탐구라는 자체의 구체적 분야에서, 이론과 실제라는 분리된 통합을 복원하는 이해 방법을 사용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것이 신비주의의 눈에 과학이 왜 그렇게 거슬리는지의 이유인데, 신비주의는 대신 신화를 창조함에 의하여 실제를 회피한다고 나는 믿는다. ‘과학은, 자체의 분야에서, 기독교의 산물이며 지금까지 기독교의 가장 합당한 표현이다; .. 인종이나 국적이나 성()의 경계가 없는 협동적 진보를 위한 과학의 능력, 예언하는 과학의 능력 및 통제하는 과학의 능력은 유럽에서 기독교가 아직 보지 못한 가장 풍부한 구체화이다라고 맥머레이는 다른 곳에서 말한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이유인즉 우리의 서구문명이 자체의 합리주의를, 인간의 합리적 통합과 열린사회에 대한 자체의 믿음을, 특히 서구문명의 과학적 전망을, 모든 인간의 형제애에 대한 그리고 지적(知的) 정직성과 책임에 대한 고대 소크라스테스적이고 기독교적인 믿음에 빚지고 있다고 내가 또한 믿기 때문이다. (과학의 도덕성에 반대하는 흔한 주장은 과학의 많은 열매가 나쁜 목적으로, 예를 들어, 전쟁에 쓰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진지한 고찰을 받을만하지 않다. 태양 아래는 오용될 수 없는 것이 없고, 오용되지 않은 것도 없다. 심지어 사랑도 살인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평화주의도 공격적 전쟁의 무기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민족적 적대감과 공격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것은 합리주의가 아니라 비합리주의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십자군 전후로 너무나 많은 종교적인 공격적 전쟁들이 있었고, ‘과학적목적 때문에 과학자들에 의하여 고취되어 촉발된 어떤 전쟁도 나는 알지 못한다.)

인용된 구절에서, 맥머레이가 자신이 높이 평가하는 것은 탐구와 관련된 그 자체의 고유한 분야에서의과학이라는 것을 강조함이 관찰될 것이다. 이 강조가 특히 귀중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유인즉 보통 에딩튼(Eddington)과 진스(Jeans)의 신비주의와 관련하여, 현대과학은 19세기의 과학과 반대로 이 세상의 신비를 지금 인정하기 때문에 더 겸손해졌다는 말을 오늘날 사람들이 듣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완전히 빗나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예를 들어, 다윈(Darwin)과 패러데이(Faraday)는 어떤 사람만큼 겸손하게 진리를 추구했고, 그들이 언급된 두 명의 위대한 동시대 천문학자인 에딩튼과 진스보다 훨씬 더 겸손했다는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이 탐구와 관련된 그 자체의 구체적인 분야에서위대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철학적 신비주의의 영역까지 확대하지 않음에 의하여 자신들의 겸손을 증명한다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말로 과학자들이 점점 더 겸손해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데 왜냐하면 과학의 진보는 주로 오류의 발견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더 많이 알수록 우리가 무식하다는 것을 우리가 더 분명하게 깨닫기 때문이다. (과학의 정신이란 소크라테스의 정신이다.)

내가 주로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사이의 갈등에 관한 도덕적 측면을 다루고 있을지라도 그 문제의 더 철학적측면을 간단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나는 느낀다; 그러나 내가 이 측면을 여기서 하찮다고 여긴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하고 싶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비판적 합리주의자가 다른 방식으로 비합리주의자에게 또한 역공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더 심오한 신비에 대한 자신의 존경을 자랑하고, 그 신비를 자신이 이해함을 자랑하는 비합리주의자는 (변죽만 울리는 과학자와 반대로) 실제로 세상의 신비를 존경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며, 값싼 합리화로써 자기만족에 빠진다고 비판적 합리주의자는 주장할 것이다. 이유인즉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화하려는 시도가 아니라면 신화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말인가?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 신화에 더 큰 존경을 보내는가, 항상 사실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고 심지어 자신의 가장 과감한 업적도 후배들을 위한 디딤돌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항상 인식하고 있으면서 신화를 한걸음씩 밝히는 데 헌신하는 과학자인가, 아니면 어떤 실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아무 것이나 주장하는 신비주의자인가? 그러나 이 의심스러운 자유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자들은 끊임없이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것은 항상 잃어버린 종족적 천국의 신화로 문명의 십자가를 지니기를 발작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신비적 시인인 F. 카프카(Kafka)가 절망적으로 서술한 바와 같이, 모든 신비주의자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이해될 수 없다고, 그리고 우리는 이전에 알고 있었다고 ..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합리주의자는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을 합리화하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완전히 오류에 빠져있기도 하다. 그 까닭은 합리적인 방법으로 접근될 수 없는 것은 독특하고 고유하고 구체적인 개체이지 추상적인 보편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과학은 풍경의 일반적인 유형이나 인간의 일반적인 유형을 기술할 수 있지만, 하나의 단일한 개별 풍경이나 한 명의 단일한 개별 인간을 망라하여 기술할 수는 없다. 보편적인 것인 전형적인 것은, 과학적 추상의 산물인 한, 이성의 영역일 뿐 아니라 주로 이성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특한 개인과 그의 독특한 행동 및 경험, 그리고 다른 개인에 대한 그의 관계는 결코 완전히 합리화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독특한 개성의 바로 이 비합리적 영역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삶이 어떤 의미에서도 독특하지 않고 모든 면에서 한 계층 사람들의 전형적인 것이어서 그들이 이 계층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동과 경험을 정확하게 반복한다면,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 크게 파괴될 것이라고 느낄 터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은 우리 경험의 독특함으로, 풍경에 대한 독특한 경험, 석양에 대한 독특한 경험, 인간의 얼굴 표정에 대한 독특한 경험이다. 그러나 플라톤 시대 이후, 독특한 개인이 지닌 비합리성에 관한 이 느낌과, 개별인간들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관계들에 관한 이 느낌을 다른 분야, 즉 과학의 영역에 고유하게 속하는 분야인 추상적인 보편자들의 분야로 신비주의가 이전시키는 것은 모든 신비주의의 특징이었다. 신비주의자가 이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 감정이라는 것은 의심될 수 없다. 신비주의의 용어사용법인 신비적인 결합, 아름다움에 대한 신비적인 직감, 신비적인 사랑은 항상 개별 인간들 사이의 관계들 영역으로부터, 그리고 특히 성적(性的) 사랑의 경험으로부터 차용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느낌이 신비주의에 의하여 추상적인 보편자로, 본질로, 형상이나 이데아로 이전된다는 것 또한 의심될 수 없다. 이 신비적 태도 뒤에 서 있는 것은 다시 종족의 잃어버린 통합이요 가부장적 가정이라는 피난처 속으로 돌아가서 그 피난처의 경계를 우리 세상의 경계로 만들려는 소망이다. ‘제한된 전체로서 세상에 대한 느낌은 신비적인 느낌이다라고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말한다. 그러나 이 전체론적이고 보편주의적인 비합리주의는 위치가 잘못되었다. ‘세계전체그리고 자연’, 이 모든 것은 추상이며 우리가 지닌 이성의 산물이다. (이로 인하여 신비적인 철학자와, 합리화하지 않고 추상을 사용하지 않지만 자신의 상상 속에서 구체적인 개인들과 독특한 경험을 창조하는 예술가가 구분된다.) 요컨대, 신비주의는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화하려고 시도하며 동시에 신비주의는 잘못된 장소에서 신비를 구한다; 그리고 신비주의는 집단을, 그리고 선택된 자들의 융합을 꿈꾸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개별 인간은 본질적으로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직시해야 하는 어렵고 실제적인 임무를 신비주의가 감히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학과 종교 사이의 19세기 갈등은 내가 보기에 대체되었다. ‘무비판적합리주의가 모순적이기 때문에, 문제는 지식과 신앙 사이의 선택일 수 없고 두 종류의 신앙 사이의 선택이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새로운 문제는: 어느 것이 올바른 신앙이고 어느 것이 잘못된 신앙인가? 내가 밝히려고 노력했던 것은 우리가 직면한 선택이, 첫째 이성에 대한 신념인 인간 개인에 대한 신앙과 둘째 신비적인 능력에 의하여 집단에 결합된 인간의 신비적인 능력에 대한 신앙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동시에 인류의 통합을 인정하는 태도와 인간을 친구와 적으로, 주인과 노예로 나누는 태도 사이의 선택이라는 것.

현재 목표를 위해서, 합리주의를 지지하기로 결정한 나의 동기 및 현재 매우 유행하는 비합리적이고 신비적인 지성주의에서 내가 우리 시대의 미묘한 지적(知的) 질병을 보는 이유뿐 아니라 합리주의비합리주의라는 용어를 설명하기 위하여 충분한 언급도 있었다. 그것은 너무 심각하게 고려될 필요가 없는 질병이며, 피상적 이하이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과학자들에게는 특별히 이 질병이 없다.) 그러나 그 피상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위험한 질병인데 왜냐하면 사회적 및 정치적 사상의 분야에서의 그 영향력 때문이다.

 

V

그 위험을 예시하기 위하여, 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비합리주의적 권위자들 중에서 두 명을 간단하게 비판하겠다. 첫째는 A. N. 화이트헤드(Whitehead)인데 수학에서의 그의 업적으로, 그리고 가장 위대한 동시대의 합리주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과의 협력으로 유명하다. 화이트헤드 역시 자신을 합리주의 철학자로 여긴다; 그러나 헤겔도 그랬는데, 화이트헤드는 헤겔에게서 많은 것을 빌려왔다; 정말로, 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많이 헤겔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뿐 아니라) 빌려왔는지를 아는 소수의 신()-헤겔주의자 한 명이다. 의심할 바 없이, 칸트의 열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헤드는 논증을 당당하게 경멸하는 장엄한 형이상학 이론체계를 구축하는 용기를 헤겔에게서 빌려왔다.

먼저 화이트헤드 자신의 저서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에 의하여 제시되는 소수의 합리적 주장 중 하나인 자신의 사변(思辨) 철학적 방법을 (그가 합리주의라고 부르는 방법) 방어하는 주장을 고찰하자. ‘사변 철학이 너무 야심적이라는 것이 사변 철학에 대한 반론이었다. 합리주의는 자체에 의하여 특정 과학의 한계 안에서 진전이 이룩되는 방법이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이 제한적인 성공에 의하여 사물의 일반적인 본성을 표현하는 야심 찬 기획을 창조하려는 시도가 고취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된다. 이 비판에 대하여 주장되는 한 가지 정당화는 실패이다; 유럽 사상은 포기되고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형이상학적 문제로써 어질러진 것으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동일한 기준으로 인하여 과학에 실패가 고정될 터이다. 우리가 17세기의 물리학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과 같이 우리는 그 세기의 데카르트 철학도 지니고 있지 않다.. 합당한 시험은 종결성에 대한 시험이 아니라 진보에 대한 시험이다라고 그는 서술한다. 이제 이것은 본질적으로 분명히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심지어 그럴싸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효한가? 그것에 대한 명백한 반론은 물리학이 진보하는 반면 형이상학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리학에는, ‘진보에 대한 합당한 시험’, 즉 실험에 대한 시험이자 실용에 대한 시험이 있다. 우리는 현대 물리학이 17세기 물리학보다 나은 이유를 말할 수 있다. 현대 물리학은 더 오래된 이론체계들을 완전히 패퇴시키는 많은 실제적 시험들을 통과한다. 그리고 사변적 형이상학 이론체계들에 대한 분명한 반론은 그 체계들이 주장하는 진보가 그 이론체계들에 관한 다른 어떤 것만큼 꼭 공상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반론은 매우 오래되었다; 이 반론은 베이컨(Bacon), (Hume) 그리고 칸트(Kant)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를 들어 우리는 칸트의 형이상학서설(Prolegomena)에서, 형이상학에 대하여 주장되는 진보에 관한 다음 언급을 읽는다: ‘틀림없이 없이 이 주제에 관하여 오랫동안 발간된 그렇게 많은 아름다운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 과학이 손가락 넓이만큼도 진보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던 나 자신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 정의(定義)를 예리하게 만들려는, 혹은 절름발이 증거에 새로운 목발을 제공하여 형이상학의 누더기 이불을 기우려는, 혹은 그 이불에 새로운 무늬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우리가 발견할 것이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형이상학적 주장에 신물이 났다. 그 기준에 의하여 진리로부터.. 변증법적 환상을 구별할 확정적 기준을 우리는 원한다.’ 화이트헤드는 아마도 이 고전적이면서 명백한 반론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앞에 인용된 문장 다음 문장에서 이렇게 다음과 같이 서술할 때 그는 그 반론을 기억하는 듯하다: ‘그러나 16세기부터 유래하고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으로부터 최종적 표현을 받는 주요 반론은 철학적 사변의 무용성(無用性)이다.’ 베이컨이 반대했던 것은 철학의 실험적이고 실용적인 무용성(無用性)이기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여기서 우리의 요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더 멀리 추적하지 않는다. 이 실용적 무용성(無用性)으로 인하여 과학처럼 사변 철학은 그 철학이 이룩하는 진보에 의하여 정당화된다는 자신의 요점이 파괴된다는 명백한 반론에 그는 답변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완전히 다른 문제, 사실에 관한 냉혹하고 자족적인 문제는 없다는 그리고 모든 과학은 사실을 일반화하고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사고(思考)를 이용해야 한다는, 잘 알려진 문제로 옮겨감으로써 만족한다. 이 고찰에 그는 자신의 형이상학적 이론체계의 방어를 근거시킨다: ‘그리하여 직접적인 냉혹한 사실을 이해하려면 그 이해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이 필요하다..’ 이제 이것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시작했던 주장과 분명히 전혀 다른 주장이다. 철학에서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합당한 시험은.. 진보이다’: 이것이 우리가 처음에 화이트헤드로부터 들은 것이다. 그러나 칸트의 명백한 반론에 대해서는 답변이 없다. 대신 화이트헤드의 주장은, 보편성과 일반성의 문제에 관한 길로 들어서자마자, (플라톤식) 집단주의적 도덕성 이론과 같은 문제들로 빠져버린다: ‘관점의 도덕성은 관점의 일반성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일반적인 선()과 개인적인 이익 사이의 대립은, 개인의 이해가 일반적인 선()일 그런 개인일 때만 폐지될 수 있다..’

이제 이것은 합리적 논증의 표본이었다. 그러나 합리적 논증은 진정으로 드물다. 사변 철학으로 인하여 절름발이 증거에 새로운 목발이 제공될 따름이라는 칸트의 비판을 피하는 방법을 화이트헤드는 헤겔로부터 배웠다. 이 헤겔식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우리가 증거와 논증을 전부 피한다면 목발을 쉽게 피할 수 있다. 헤겔식 철학은 논증을 하지 않는다; 그 철학은 명령을 내린다. 헤겔과 반대로, 화이트헤드가 최종적 진리를 제공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을 논쟁될 수 없는 독단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독단적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철학이 지닌 결점들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신()-헤겔주의자들처럼, 그는 자신의 철학을 논증 없이 언명하는 독단적 방법을 채택한다. 우리는 그 철학을 수용하거나 아니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철학을 토론할 수는 없다. (우리는 냉혹한 사실과 진정으로 직면한다; 베이컨식의 경험에 관한 냉혹한 사실이 아니라, 한 인간의 형이상학적 영감에 관한 냉혹한 사실과 직면한다.) 수용하거나 아니면 버리는 방법을 예시하기 위하여, 나는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로부터 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그러나 내가 그 구절을 공정하게 선택하려고 노력했을지라도, 나의 저서를 읽는 독자들이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 자체를 읽지 않고 의견을 형성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그 독자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최종 해석(Final Interpretations)’으로 제목이 붙은 그 저서의 마지막 부분은 두 장(two chapters)으로 구성되는데, ‘이상적 반대자(The Ideal Opposites)’(여기서 예를 들어 플라톤의 이론체계에서 나온 유명한 잡동사니 작품인 영원과 변화[Permanence and Flux]’가 나타난다; 우리는 이것을 변화와 정지[Change and Rest]’라는 이름으로 다루었다), ‘신과 세계(God and the World)’이다. 나는 이 후자의 장으로부터 인용한다. 그 구절은 두 문장으로 도입된다: ‘최종 요약문은 한 무리의 반대명제들을 통하여 표현될 수 있을 따름인데, 그 반대명제들의 명백한 자기-모순은 존재의 다양한 범주를 무시한 것에 달려있다. 각 반대명제 안에는 반대를 대조로 변화시키는 의미 변화가 있다.’ 이것이 도입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명백한 모순에 대비하게 되며, 우리는 이것이 어떤 무시에 달려있다는 말을 듣는다. 저 무시를 피함에 의하여 우리는 모순을 피할 것임을 이것이 지적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이룩될 수 있는지, 혹은 더 정확하게 저자(著者)의 정신 속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듣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버려야한다. 역시 일말의 논증도 없이 서술되는 선언된 반대명제들이나 명백한 자기-모순들중에서 처음 두 가지를 이제 내가 인용한다: ‘세계는 영원하고 신()은 유동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신()은 영원하고 세계는 유동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이다.ㅡ세계는 하나고 신()은 다수라고 말하는 것처럼 신()은 하나고 세계는 다수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 나는 이 희랍 철학적 환상의 반향을 비판하지 않을 예정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처럼 나머지 하나가 꼭 같이 사실적이라는 것을 당연히 여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백한 자기-모순을 약속받았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모순이 나타나는 곳을 알고 싶다. 이유인즉 나에게는 심지어 모순의 출현도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기-모순은 이런 문장일 터이다: ‘플라톤은 행복하고 플라톤은 행복하지 않다’, 그리고 자기-모순은 동일한 논리적 형태의 모든 문장들일 (다시 말해서, ‘플라톤에 고유명사를 대입하고 행복한에 속성어를 대입함에 의하여 앞의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모든 문장들) 터이다. 그러나 다음 문장은 분명히 모순이 아니다: ‘플라톤이 오늘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만큼 플라톤이 오늘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유인즉 플라톤이 죽었기 때문에 전자가 정말로 후자처럼 동일하게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형태의 다른 문장은, 우연히 거짓일지라도, 자기-모순적이라고 지칭될 수 없다. 이것으로 인하여 내가 왜 그 문제의 순전히 논리적인 측면인 명백한 자기-모순들에 관하여 당황하고 있는지가 밝혀질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저서 전부에 관해서도 저런 방식으로 느낀다. 저자가 그 저서를 통하여 무엇을 전하고자 원하는지 내가 이해를 하지 못할 따름이다. 매우 개연적으로, 이것은 나의 잘못이지 저자의 잘못이 아니다. 나는 선택된 자들의 숫자에 속하지 못하고, 많은 타인들도 같은 위치에 있다고 나는 우려한다. 이것이 내가 그 저서의 방법이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이유이다. 그 저서의 방법은 인류를 작은 숫자의 선택된 자들과 큰 숫자의 길 잃은 자들의 두 부분으로 나눈다. 그러나 내가 길을 잃었을지라도, 내가 보는 바에 따라서 칸트에 의하여 그렇게 생생하게 기술된 저 몇 개의 새로운 헝겊을 덧댄 낡은 넝마 이불처럼 신()-헤겔주의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나는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오히려 신()-헤겔주의는 이제 그 이불로부터 떨어져나간 몇 개의 낡은 넝마조각들의 더미처럼 보인다.

화이트헤드의 저서가 자체의 합당한 시험을 통과했는지, 그 정체(停滯)에 대하여 칸트가 불평했던 형이상학적 체계와 비교되어 그 저서가 진보를 보여주는지를 결정하는 일을 나는 그 저서를 정독하는 학생에게 맡긴다; 그 학생이 그런 진보를 판단할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맡긴다. 그리고 형이상학에 관한 칸트의 또 다른 비평으로써 이 언급들을 끝내는 합당성을 판단하는 일을 나는 같은 학생에게 맡기겠다: ‘일반적인 형이상학에 관하여, 그리고 내가 그 형이상학의 가치에 관하여 표현한 견해들에 관하여, 나의 언명들이 이곳저곳에서 충분하게 조건적이고 조심스럽지 않았을 것임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오늘날 유행하는 것처럼 지혜로 가득 찬 이 모든 저서들의 자만적인 오만을 강한 혐오로써 그리고 심지어 증오 같은 것으로써 볼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숨기고 싶지 않다. 이유인즉 틀린 방법이 선택되었다는 것에 내가 완전히 만족하기 때문이다; 수용된 방법들로 인하여 틀림없이 이 어리석음과 실수가 끝없이 증가한다는 것에 내가 완전히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이 환상에 가득 찬 업적들 모두가 완전히 파멸됨도 그 역겨운 풍요로움을 지닌 이 가짜 과학만큼 도저히 그렇게 해로울 수 없다는 것에 내가 완전히 만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다루려고 의도하는 동시대 비합리주의의 두 번째 사례는 A. J. 토인비(Toynbee)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이다. 내가 이것을 매우 두드러지고 흥미로운 저서로 간주한다는 것과,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다른 동시대 비합리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저술들에 대한 그 저서의 우수성 때문에 내가 그 저서를 선택했다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하고 싶다. 역사학자로서 토인비의 장점을 판단할 능력이 나에게 없다. 그러나 다른 동시대의 역사주의적이고 비-합리주의적 철학자들과 반대로, 그는 매우 자극적이고 도전적인 말을 많이 한다; 나는 적어도 그를 그렇게 알고 있고, 나는 많은 귀중한 제안을 그에게서 가져온다. 나는 역사적 연구에 관한 그의 분야에서 비합리주의로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특정 역사적 해석을 지지하거나 반대하여 증거를 비교하는 문제가 있는 곳에서, 그가 주저하지 않고 논증에 관하여 근본적으로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역사적 기록으로서 복음서들의 신빙성에 대한 그의 비교 연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 연구의 결과는 복음서들이 역사적 기록으로서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증거를 판단할 능력이 나에게 없을지라도, 그 방법의 합리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이것은 한층 더 감탄을 받을만하다. 이유인즉 기독교 정통성에 대하여 토인비가 가졌던 일반적인 동정심으로 인하여 토인비가, 최소한도로 말해서 비정통적인 관점을 옹호하는 것이 아마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저서에 표현된 정치적 경향 중 많은 경향에 동의하고 현대 민족주의와 그 민족주의와 연결된 종족주의적이자 복고주의적경향, 다시 말해서 문화적으로 반동적인 경향들에 대한 그의 공격에 매우 강하게 또한 동의한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저술이 비합리적이라고 힐난하기 위하여, 내가 토인비의 기념비적인 역사주의적 저술을 골라내는 이유는 그런 장점을 지닌 저술 속에서 이 독소의 영향을 우리가 볼 때만 우리가 그 비합리주의의 위험을 완전히 알아챈다는 것이다.

토인비의 비합리주의로 내가 기술해야 하는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한 가지 방식은 그가 만연하고 위험한 우리 시대의 픙조에 굴복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잠정적으로, 액면가치대로 논증을 진지하게 수용하지 않고 더 깊은 비합리적 동기들과 경향들이 표출되는 방식만을 논증에서 보는 풍조를 나는 의미한다. 그것은 앞 장에서 비판된 사회적-분석의 태도이다; 먼저 논증 자체의 유효성을 검토하는 대신, 논증자의 사회적 서식처에서의 무의식적 동기와 결정인자를 즉시 찾는 태도이다.

내가 앞의 두 장에서 밝히려고 노력한 바와 같이, 이 태도는 어느 정도까지는 정당화될 것이다; 그리고 논증을 제시하지 않는, 혹은 논증이 명백하게 검토할 가치가 없는 저자의 경우에 이것은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진지한 주장을 진지하게 수용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비합리주의라는 힐난을 해도 정당화된다고 나는 믿는다; 게다가 그 과정에 대하여 같은 태도를 채택함에 의하여, 심지어 보복한다면 우리는 정당화된다. 그리하여 진지한 논증을 진지하게 수용하지 않는 토인비의 태만이 20세기 지성주의를 대표한다는 사회-분석적 진단을 내릴 모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 태만은 종교적 신비주의로 도피함에 의하여 이성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사회적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대한 환멸이나 심지어 절망을 표현한다.

진지한 논증을 진지하게 고찰하기를 거부하는 사례로서, 토인비가 마르크스를 취급하는 것을 나는 선택한다. 이 선택에 대한 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마르크스는 토인비 저서의 독자들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익숙한 주제이다. 둘째, 마르크스는 그 실제적인 측면 대부분에서 내가 토인비와 의견일치를 이루는 주제이다. 마르크스의 정치적 및 역사적 영향력에 대한 토인비의 주요 판단은 내가 보다 단조로운 방법들에 의하여 도달한 결과와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마르크스는 토인비가 다룸으로써 토인비의 훌륭한 역사적 직관이 드러나는 주제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내가 토인비에 반대하여 마르크스의 합리성을 옹호한다면, 나는 마르크스의 변호자라는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유인즉 다음 것이 내가 동의하지 않는 요점이기 때문이다: 토인비는 마르크스를 합리적인 존재로서,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논증을 제공하는 사람으로서 취급하지 (그가 모든 사람을 합리적인 존재와 논증을 제공하는 사람으로서 취급하는 것처럼) 않는다. 정말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렇게 다루는 것으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인상이 토인비의 저술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전달된다고 예시될 따름이다. 논증은 말의 하찮은 양태라는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감정과 열정 및 종교와 비합리적인 철학과 아마도 예술 및 시()의 역사라는, 토인비의 저술에 의하여 전달되는 일반적인 인상이 예시될 따름이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이나 인간의 과학의 역사와 전혀 관련이 없다는 일반적인 인상이 예시될 따름이다. (갈릴레오[Galileo]와 뉴튼[Newton], 하베이[Harvey]와 파스퇴르[Pasteur]같은 이름은 문명의 생명-주기(life-cycle)에 대한 토인비의 역사주의적 연구의 최초 6권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에 대한 토인비와 나의 일반적인 견해 사이의 유사한 요점에 관하여, 1장에서 선택된 사람들과 선택된 계급 사이의 유사점에 대한 나의 언급을 나는 독자들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그리고 다른 다양한 곳에서, 나는 역사적 필연에 관한 특히 사회혁명의 불가피성에 관한 마르크스의 교설을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이 관념들은 토인비에 의하여 그의 일상적인 탁월함과 함께 연결된다: ‘마르크스주의의 현저하게 유대인적인.. 영감은 그것이 하느님 자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폭력적 혁명에 대한 종말론적 통찰력이고, 그리고 한번 도약하여 이 세상의 왕국에서 최하위 위치에서 최고의 위치로 선택된 사람들을 운반할 수 있는 역할의 반전..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와 지배적인 소수의 현재 역할을 뒤집을 수 있는, 폭력적 혁명에 대한 종말론적 통찰력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전능한 신()을 위하여 야훼(Yahweh)의 자리에 역사적 필연이라는 여신(女神)을 수용했고, 유대인 자리에 현대 서구세계의 내부 프롤레타리아를 수용했다; 그래서 그의 구세주적 왕국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서 구상된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태인적 묵시록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 낡은 변장을 뚫고 돌출하며, 우리의 철학자-기획자가 현대 서구 의상을 입혀 제시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랍비 이전의 마카비적(Maccanaean) 유대주의이다..’라고 그는 서술한다. 이제 탁월하게 표현된 그 구절에 흥미로운 유추 이상 의도가 없다면,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없다. 그러나 그 구절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진지한 분석으로서의 (혹은 그 분석의 한 부분) 의도가 있다면, 나는 항의를 해야 한다; 그 공헌들 대부분이 대체되었을지라도, 마르크스가 자본론(Capital)을 저술했으며,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를 연구해서 사회과학에 진지하고 매우 중요한 공헌들을 수행했다는 것이 기억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토인비의 구절에는 진지한 분석이 의도된다; 그는 자신의 유추와 비유가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평가하는 데 기여한다고 믿는다; 이유인즉 이 구절에 대한 부록의 (나는 그 부록에서 중요한 부분만을 인용했다)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기독교라는 제목 아래서, 마르크스 철학에 관한 설명에 대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내놓을 것 같은 반론들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그가 다루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단이 마르크스주의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라고 항의할 것이다라는 말로써 시작하며 두 번째 문단은 이것들과 같은 노선들에 대한 마르크스의 항의에 답변하려는 시도에서.. ’라는 말로써 시작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밝혀질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부록 자체에는 또한 의심할 바 없이 마르크스주의를 진지하게 토론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더 세밀하게 이 토론을 조사하면, 검토되는 것은 차치하고 마르크스주의의 합리적 논증이나 주장 하나도 심지어 거론도 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발견한다. 마르크스의 이론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 이론들이 참인지 혹은 거짓인지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한마디 말도 듣지 못한다. 부록에서 제기된 한 가지 추가적인 문제는 다시 역사관련 근원의 문제이다; 이유인즉 토인비에 의하여 그려지는 마르크스주의의 반대자는, 토인비가 의미하는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항의할 것처럼, 옛 이념인 사회주의를 새로운 토대 즉,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토대 위에 근거했던 것은 마르크스의 주장이라고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나는 토인비를 인용한다) ‘마르크스의 철학을 다소 요약한 설명에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요점의 가장 중요한 특징적인.. 부분에 대하여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이것을 분석하여 헤겔적이고 유태인적이며 기독교적인 구성요소로 만드는 가식적인 태도를 취했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적 생활방식의 본질이라고 마르크스주의자는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헤겔적이거나 기독교적이거나 유대인적이거나 마르크스 이전의 다른 근원까지 추적될 수 없는 것은 마르크스적 이론체계 속의 창조적 요소라고 항의한다’. 이것이 토인비가 어느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을 빌려 표현하는 항변인데,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공산당 선언(Manifesto)밖에 읽은 것이 없을지라도 마르크스 자신은 이미 1847년에 사회주의의 7 내지 8가지 다른 마르크스-이전의 근원들을 구분해서, 그 근원들 사이에 또한 마르크스가 사제적(司祭的)’ 사회주의 혹은 기독교적사회주의로 표찰을 붙인 것들이 있음을 그 마르크스주의자가 틀림없이 알지라도, 그리고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발견했음을 꿈꾼 적이 없지만 다만 사회주의를 합리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나 혹은 엥겔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마르크스가 유토피아적 관념으로부터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을 그 마르크스주의자 틀림없이 알지라도 이것이 토인비가 어느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을 빌려 표현하는 항변이다; 그러나 토인비는 저것 모두를 무시한다. ‘이것들과 같은 노선에서 마르크스의 항변에 답변하려고 시도하면서, 이 이상(理想)이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에서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뿐 아니라 사회주의가 지지하는 이상의 인간적임과 건설적임을 우리가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마르크스의 창조적 발견이라는 마르크스적 주장을 우리가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편에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가 소문으로 들려오기 전에 설교되었을 뿐 아니라 실천되었던 기독교적 사회주의가 있다고 우리가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공격할 차례가 올 때,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가 기독교적 전통에서 유래한다고 우리가 주장.. 할 것이다..’라고 그는 서술한다. 이제 나는 이 유래를 틀림없이 결코 부인하지 않을 터이고, 그리고 모든 마르크스주의자가 자신의 신조를 조금도 희생하지 않고 이 유래를 인정할 수 있음은 아주 분명하다; 이유인즉 마르크스주의의 신조는 마르크스가 인도적이고 건설적인 이상을 창조한 사람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순전히 합리적인 수단에 의하여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임을,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인지를 밝힌 과학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묻는다, 마르크스의 합리적 주장과는 전혀 관련 없는 노선에서 토인비가 마르크스주의를 토론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내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합리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주장은 토인비에게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종교로서 어떻게 유래되었는가라는 문제에 그가 흥미를 가질 뿐이다. 이제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종교적 특징을 전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이나 종교를 완전히 그것들의 역사적 근원과 환경에 대한 관점으로부터 다루는 방법은 전통적 역사주의(historism)(역사법칙적 역사주의[historicism]와 구분될) 앞 장에서 기술된 태도인데, 최소한도로 말해서도, 매우 편파적이다; 그리고 이 방법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이 비합리주의가 발생할 것 같은지는, 우리가 여기서 합리적으로서 기술했던 저 인간 생활의 중요한 영역에 대한 토인비의 경멸이 아닐지라도 토인비의 태만으로부터 알려질 수 있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평가하면서, ‘역사의 판결에 의하여 기독교의 사회적 양심의 재각성(再覺醒)이 칼 마르크스의 한 가지 위대한 긍정적 업적이었다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라는 결론에 토인비가 도달한다. 이 평가에 반대하여, 나에게는 말할 것이 틀림없이 많지 않다; 아마도 나 또한 기독교에 끼친 마르크스의 도덕적 영향을 강조했음을 독자는 기억할 것이다. 최종적 평가로서, 피착취자들은 착취자들의 편에서 자선의 행동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훌륭한 도덕적 관념을 토인비가 충분하게 고려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견해 차이일 뿐이고, 나는 토인비 자신의 견해에 대한 토인비의 권리를 논쟁할 꿈도 꾸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을 나는 매우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함축된 역사주의적 도덕론 및 심지어 도덕미래주의와 함께, ‘역사의 판결에 의하여 판명될 것이다라는 표현에 나는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 이유인즉 우리는 그런 문제에서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판결을 내릴 수 없다면, 역사에 의하여 또한 판결이 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

토인비가 마르크스를 다루는 것에 대해서는 이만큼만 하자. 그의 전통적 역사주의나 역사상대주의에 대한 더 일반적인 문제에 관하여, 모든 사고(思考)를 역사적으로 결정하는 일반적인 원칙으로서가 아니라 역사관련 사고(思考)에 적용이 가능한 제한된 원칙으로서만 그 문제를 그가 언명할지라도, 그는 그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다고 언급될 것이다; 이유인즉 자신은 모든 역사관련 사고(思考)는 사고자(思考者) 자신의 시대와 장소라는 특정 환경에 불가피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원칙을 .. 출발점으로서수용한다. ‘이것은 어떤 인간의 천재성도 제외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법칙이다라고 그가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 전통적 역사주의가 지식사회학과 흡사함은 다소 명백하다; 이유인즉 사고자(思考者) 자신의 시대와 장소, 지식사회학에 의하여 기술된 사회적 서식처와 비슷함에 의하여, 분명히 그의 역사관련 서식처로 지칭될 것의 기술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차이점이라면 토인비는 자신의 인간 본성의 법칙을 역사관련 사고(思考)에 제한시킨다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보기에 다소 이상하고 아마도 심지어 비의도적 제한이다; 그 까닭은 일반적인 사고(思考)에 대해서가 아니라 단지 역사관련 사고(思考)에 대하여 유효한 어떤 인간의 천재성도 제외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법칙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은 다소 개연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전통적 역사주의나 사회학주의에 포함된 부인될 수 없지만 다소 사소한 진실의 한 핵심은 내가 앞의 두 장에서 다루었고 그래서 내가 거기서 말한 것을 반복할 필요가 나에게 없다. 그러나 비판에 관해서, 토인비가 쓴 문장이 역사관련 사고(思考)에 제한된 것으로부터 풀려날지라도 그 공리(公理: axiom)가 모순적일 것이기 때문에 공리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은 지적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 이유인즉 어떤 천재성도 자신의 사회적 서식처의 유행을 표현하는 것으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면 이 주장 자체는 그 주장자의 사회적 서식처의 유행에 대한 표현, 다시 말해서 우리 시대의 상대주의적 유행에 대한 표현일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언급에는 형식-논리적 중요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유인즉 이 언급으로 인하여 전통적 역사주의나 역사-분석이 전통적 역사주의 자체에 적용될 수 있음이 밝혀지며, 이것은 정말로 관념이 합리적 논증을 통하여 비판을 받은 후에 관념을 다루는 허용 가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전통적 역사주의가 그렇게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역사관련-분석적 진단을 실행하여, 전통적 역사주의가 다소 낡았을지라도 전형적인 우리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혹은 더 정확하게, 우리 시대 사회과학의 전형적 후진성의 산물이라고. 전통적 역사주의는 개입주의에 대한 그리고 합리화와 산업적 협력의 기간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이다; 역사상 다른 기간보다 더 많이 사회적 문제에 합리적 방법의 실제적 적용을 요구하는 기간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이다. 그러므로 이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는 사회과학은, 그런 문제에 대한 과학의 적용가능성을 정교하게 공격함에 의하여 자체를 방어하는 경향을 띤다. 나의 역사관련-분석적 진단을 요약하여, 토인비의 전통적 역사주의가 이성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탄생하여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뿐 아니라 과거로 도피하려고 시도하는 변명적 반()-합리주의라고 나는 감히 제시한다. 그렇다면 혹시 전통적 역사주의라는 것은 역사관련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진단은 토인비 저술의 많은 특징에 의하여 입증된다. 한 가지 사례는 이 세상의 흐름에 영향을 미칠 행동에 우선하는 내세(來世)의 우월성에 대한 그의 강조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이 세상에서 행동을 취하는 기회 자체가 예언자 모하메드(Mohammed)에게 주어졌는데 그 예언자의 정신이 응수하지 못했던 도전이었다고 말하면서 모하메드(Mohammed)비극적인 세속적 성공에 관해 토인비는 말한다. ‘수용하면서.. 모하메드는 고귀하게-명예로운 예언자의 숭고한 역할을 거부하고 있었으며 탁월하게 성공적인 정치가의 진부한 역할에 만족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모하메드는 예수가 저항한 유혹에 굴복했다.) 따라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는 군인에서 성인(聖人)으로 변신하여 토인비의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이 성인(聖人) 역시 성공적인 정치가가 되지 않았던지?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회[Jesuitism]에 관한 문제라면, 모든 것이 달라지는 듯하다: 이런 형태의 정치가 신분은 충분히 내세적[來世的]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이나 혹은 거의 모든 정치가들보다 많은 성인(聖人)들을 나 자신이 더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내가 정치적인 성공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감동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은 나의 역사관련-분석적 진단에 대한 입증으로서만 인용한다: 현대 역사관련 예언가의 이 전통적 역사주의가 도피의 철학이라는 것.

토인비의 반()-합리주의는 많은 다른 장소에서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관용에 관한 합리주의적 개념을 공격하면서, 그는 논증 대신 비천함에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고귀함같은 범주를 사용한다. 그 구절은 합리적 근거에서 단지 부정적폭력의 회피와 내세적인 참된 비폭력 사이의 대립을 다루며 이 둘은 서로 확정적으로 정반대인.. 의미들의 사례들이라고 암시한다. 여기에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구절이 있다: ‘그 최저점에서 비폭력 실천은, 이전에 지겹도록 실천된.. 폭력에.. 대한 냉소적 환멸보다 더 고귀하고 더 건설적인 것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도덕적으로 개선적이지 않는 이런 종류의 비폭력에 관한 악명 높은 사례는 17세기부터.. 우리 시대까지 서구세계에서의 종교적 관용이다.’ 이 서구의 민주주의적인 종교적 관용에 대한 도덕적으로 개선적인 이 공격이 이성에 대한 냉소적 환멸보다 더 고귀하고 더 건설적인 것을 표현하는지를 질문함에 의하여 ㅡ 토인비 자신의 용어사용법을 이용하여 ㅡ, 보복하고 싶은 유혹을 참기는 어렵다; 우리 서구세계에서 유행했고, 훨씬 더 불행하게 지금도 유행하며 특히 헤겔 시대부터 우리 시대까지 지겹도록 실천되었던 것은 저 반()-합리주의의 악명 높은 사례가 아닌지?

물론, 토인비에 대한 나의 역사관련-분석은 진지한 비판이 아니다. 나의 분석은 보복하는, 전통적 역사주의에 똑같이 보복하는 한 가지 불친절한 방식일 따름이다. 나의 근본적인 비판은 매우 다른 노선 위에 있으며, 전통적 역사주의를 비전문적으로 다룸에 의하여 이 싸구려 방식을 이미 유행하는 것보다 더 유행하게 만든 것에 대하여 내가 책임지게 된다면 나는 틀림없이 사과해야 할 터이다.

나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 나는 종교적 신비주의에 적대감을 느끼지 않으며 (오직 호전적인 반[]-합리주의적 지성주의[intellectualism]에만 적대감을 느낀다) 나는 틀림없이 종교적 신비주의를 억압하려는 어떤 시도와 먼저 나서서 싸운다. 종교적 불관용을 옹호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그러나 이성이나 합리주의, 혹은 인도주의나 인본주의에 대한 신념에는 인간사(人間事)의 개선에 기여할, 그리고 특히 국제범죄 억제와 평화정착에 기여할 다른 믿음과 동일한 권리가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인본주의자는 인간사(人間事)를 인간이 통제하도록 하는.. 데 자신의 모든 주의와 노력을 의도적으로 집중한다. 그러나.. 인류통합은 인류가 한 부분인 초인적인 전체의 통합의 구조 안에서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결코 확립될 수 없다..; 게다가 우리 현대 서구의 인본주의자 학교는 지구상의 토대 위에 거대한 바벨탑을 세움에 의하여 하늘에 도달하려는 계획에서, 정도(正道)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기묘했다..’고 토인비는 서술한다. 내가 그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토인비의 주장은 인본주의자가 국제문제를 인간의 이성으로 통제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베르그송(Bergson)의 권위의 도움을 받아, 초인적인 전체에 대한 충성만으로 우리가 구원될 수 있고, 지구상의 길에 의하여 종족적 민족주의가 대체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을 위한 길인, 그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지구상의 길(terrestrial road)’은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천국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정말로 합리주의적 정치의 원칙이기 때문에, 이성에 대한 인본주의적 신념을 지구상의(terrestrial)’로서 특징짓는 것을 이제 나는 꺼려지 않는다. 그러나 인본주의는 행동으로 스스로를 증명한, 그리고 아마도 다른 신조만큼 스스로를 잘 증명한 신념임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본주의자들과 함께, 기독교가 하느님의 부성(父性)을 가르침에 의하여 인간의 형제애를 확립함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내가 생각할지라도, 이성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폄훼하는 사람들은 이 목적에 크게 기여하지 못할 개연성이 있다고 나는 또한 생각한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2권 헤겔과 마르크스”, 칼 포퍼 ㅡ

 

 

주석

23장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