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표준을 배우는가?
우리는 어떻게 표준들에 관하여 배우는가? 이 영역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오류로부터 배우는가? 먼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는 것을 배우고 (부언하여, 우리는 시행착오에 의하여 그렇게 한다) 그리하여 행동표준들은 마치 고정된, ‘주어진’ 규칙들로서 구성된 것처럼 간주하는 것을 배운다. 나중에 우리가 오류를 저지르고 있음을 ㅡ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힐 것을 ㅡ 우리가 발견한다 (역시 시행착오에 의하여). 그리하여 우리는 황금률을 배울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태도, 그의 배경지식, 그의 목표들, 그의 표준들을 우리가 잘못 판단할 것임을 곧 우리가 발견한다; 그래서 우리의 오류들로부터 심지어 황금률을 넘어 신중해지는 것을 배울 것이다.
공감이나 상상력과 같은 것들이 이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권위적인 지식의 근원들이 아니다 ㅡ 사실들에 대한 지식 영역에서도 우리의 근원들이 아니다. 그리고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직관과 같은 것이 또한 이 전개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지라도, 다시 그것은 권위적인 지식의 근원이 아니다. 이유인즉 우리가 옳다는 것을 우리가 오늘 매우 분명하게 알 것이지만 우리가 오류를 저질렀음을 내일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직관주의(intuitionism)’는, 우리가 진리를 ‘보도록’ 허용하는 지성적 직관의 어떤 기능이나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가르치는 철학파의 명칭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참이라고 본 것은 틀림없이 정말로 참이라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그것은 어떤 권위적 지식 근원의 이론이다. 반(反)-직관주의자들은 통상적으로 감각-지각과 같은 어떤 다른 근원의 존재를 주장하는 반면, 이 지식 근원의 존재를 일반적으로 부인했다. 나의 견해는 두 파가 모두 두 가지 이유들 때문에 틀렸다는 것이다. 먼저, 우리가 진리를 본다고 매우 확신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지성적 직관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직관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부인되는 한 가지 요점) 나는 주장한다. 두 번째, 이 지성적 직관은 어느 정도 필수불가결할지라도 그 직관으로 인하여 흔히 우리가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잘못된 길로 간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진리를 본다고 아주 확신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진리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류들을 통하여 이 직관들을 불신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신뢰해야 하는가? 무엇을 우리가 수용해야 하는가? 답변은 이렇다: 우리가 수용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오직 잠정적으로 신뢰하면서 우리가 기껏해야 부분적 진리를 (혹은 올바름) 소유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어느 곳에서 어떤 오류나 판단오류를 저지르기 ㅡ 사실들과 관련해서 뿐 아니라 채택된 표준들에 대해서도 또한 ㅡ 마련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두 번째, 우리의 직관이 우리의 상상력을 사용하려는 많은 시도들의 결과로서 도달된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우리의 직관을 신뢰해야 (심지어 잠정적으로) 한다; 많은 오류들의, 많은 시험들의, 많은 의심들의, 그리고 탐구하는 비판의 결과로서.
이 형태의 반(反)-직관주의는 (혹은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직관주의를 말할 것이다) 반(反)-직관주의의 더 오래된 형태들과 근본적으로 다름이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 이론에 한 가지 본질적인 요소가 있음이 알려질 것이다: 우리의 행위들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견해들에서도 우리가 절대 진리나 절대 옳음의 어떤 표준들에 우리가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ㅡ 아마도 항상 ㅡ 관념.
이 모든 것에, 윤리적 지식과 윤리적 경험의 본성에 관한 나의 견해들이 수용될 수 있든 아니든 그 견해들은 여전히 ‘상대주의적’이거나 ‘주관주의적’이라고 반박될 것이다. 이유인즉 그 견해들로 인하여 절대적 도덕 표준들이 확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그 견해들로 인하여 절대표준이라는 관념이 규제적 관념임이, 이미 의견을 바꾼 ㅡ 참이거나 유효하거나 훌륭한 도덕표준들을 배우고 찾는 데 이미 열심인 ㅡ 사람들에게 유용한 관념임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나의 답변은, 심지어 절대표준이나 윤리적 규준체계의 ‘확립(establishment)’에 ㅡ 가령 순수 논리를 수단으로 ㅡ 의해서도 이런 면에서 차이점이 발생하지 않을 터이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절대표준의 유효성이나 윤리적 규준체계의 유효성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데 우리가 성공해서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 방식을 어떤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전제하자: 심지어 그 경우에도 그는 아마도 주목하지 않을 터이다; 아니면 그는 다음과 같이 아마도 답변할 터이다: ‘당신의 “해야 한다” 즉, 당신의 도덕적 규칙들에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ㅡ 당신의 논리적 증명들이나, 가령, 당신의 고등수학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이것들을 진지하게 수용할 그리고 이것들에 관하여 배울 준비가 된 사람들만 윤리적 (혹은 다른) 논증들에 의하여 감명을 받을 것이라는 근본적인 상황이 심지어 논리적 증명에 의해서도 바뀔 수 없다. 당신은 논증들에 의하여 어떤 사람을 그 논증들을 진지하게 수용하라고 혹은 그 자신의 이유를 존중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ㅡ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I권, 390-391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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